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체에게 존재의 기간을 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시간(Time)'은 생명과 같이 아주 소중한 의미인데도 막상 ㅡ'생명'이라하면 절실하게 긴장으로 받아들이는 반면에, '시간'은 그 보다는 무관심하게 여기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기간이 그 대상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시간의 개념을 바로 알고 산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을 가치 있고 유효하게 사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간이란 무엇일까요?
1. 시간의 개념
1) 구약에서의 시간의 개념은 기간 보다는
질적 상태를 나타내는 의미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시간을 나타내는 히브리어는 주로 “에트” 라는 단어로
그 의미는“정해진 기간” 또는 “특정한 때”의 뜻으로 쓰여졌습니다. (겔 7:7)
본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영생체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시간이란 개념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음으로 죄는 죽음을 가져왔으며
죽음은 정해진 시간의 끝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영생에서 900년으로 제한된 생명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생명의 존재기간은 죄의 결과임으로 큰 의미가 없으십니다.
다만 주어진 기간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가 하나님의 관심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구약초기에 많은 사람의 이름들이 나열됐고
900년 이상 살았던 기간이 명시됐지만 사건은 아무것도 없음으로
그냥 “낳고, 죽었다”만 간략하게 표시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아브라함의 생애에 있어서는
그는 단지 175세로 비교적 짧은 기간을 살았으나
성경에서 창세기에 그에 대한 많은 부분이 기술된 것은
그의 삶이 하나님과 연관된 질적인 사건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의 시간에 대한 참된 이해는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시간 안에 있는 의미 있는 사건”을 보다 중요하게 여겼으며,
모든 인간의 삶에서도 양적인 기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질적인 시간이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즉, 죽어서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인간에게 물어지는 것은 '그가 세상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살았는가?'가 아니라 “그가 사는 동안 세상에서 무엇을 하였는가?” 하는
질적인 시간에 대한 해명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서는 시간은 의미의 기간으로
취급 되어졌음을 봅니다. (쉐마사전 P43 시간 참조)
2) 신약에서의 시간의 개념은 시간의 흐름이라는 양적 기간 속에 중요한 때를 포함시키는 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헬라어에서 '시간(Time)'을 가리키는 단어는 세 가지인데 '크로노스' 와'카이로스'와 '호라'' 라는 단어로
각각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1] 크로노스 (인간의 때)
“인간 편에서의 시간의 폭”을 의미합니다.
시간은 인간의 행동에 의해서 폭도 정해지게 됩니다.
즉, 같은 기간도 평안이 지낼 때 시간의 폭은 느낌 없이,
소중히 여김 없이 시간은 흐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위기나 고난이나 헌신이 삶속에 깊이 있게 수반될 때는
그 시기는 일정한 흐름보다 더 오래 느껴질 수도,
더 느리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마치 33년을 살았어도 100년을 산 것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100년을 살았어도 20-30년 산 것 같이 여겨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은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심으로
시간의 바른 의미를 얻게 되었습니다. (갈 4:4-6)
즉, 죄인으로서의 인간으로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새 삶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주어졌으며, (벧전 4:23)
이 같은 삶은 시간의 폭을 가장 넓혀서 사는 의미 있는 삶이 되었습니다.
(시간 밖에 계신 분이 시간안에 포함되어 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2] 카이로스 (하나님의 때)
“하나님 편에서의 지정하신 때”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의 기간을 정하셨으며
시작의 때, 죽음의 때, 심판의 때와 인간에게 간섭하실 때를 정하여
(징계의 때, 축복의 때, 연단의 때, 성취의 때-- 등)
계획하신 뜻을 인간의 삶 속에 나타내십니다. (전 3:3)
주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때는 구약에서는 예언으로 주어졌으며
신약에서는 예수님과 성령님에 의해서 성취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때인 '카이로스'를 가장 잘 알고 사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인간이 만약 하나님의 때를 모르고 살 때 마치 멸망하는
짐승과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닮아 하나님의 때를 알고 살면 우리의 삶 중에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는 참된 가치와
성취를 이루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3] 호라 (인간편에서의 좋은 시간)
“인간 편에서의 정한 시간, 좋은 시간”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일생을 살면서 정해진 때를 지키고 살게 됩니다.
(공부, 일, 성공, 결혼, 양육, 은퇴, 헌신할 때…… 등)
그러나 이와 같은 때는 인간 스스로가 정하여 진행할지라도
인간 스스로 정할 수 없는 때를 감안하여
하나님께 자신의 계획을 아뢰어 응답 받지 못하고 지낸다면
모두 이룬 것들이 다 헛수고가 될 수 있습니다.
즉, 위기의 때, 사망의 때, 하나님의 진노의 때..들을 모르면
나의 이룬 것은 무의미하게 없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이란 출생 후 사망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기간으로 주어진 존재의 기간이기 보다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계획하시고 예정하신 뜻을
이 땅에 이루는 영혼의 삶을 준비하는 기간임을 알고
소중히 여기고 사는 삶이 바른 시간을 이해하고 사는 삶이 됩니다.
2.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지금은 어떤 때일까요?
1) 세상은 말세임으로 고통과 타락의 때입니다.
[딤후 3:1-5]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여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지 않습니다.
인간이 고통을 받는 것은 자신이 행한 행실의 결과로 주어질 뿐입니다.
[1] 잘못된 사랑이 고통을 가져옵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대상은 자신과 돈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의 성향을 지닌 죄인이며 돈은 세상의 창조물입니다.
결국 자신과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사랑할 때 고통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할 땐 축복과 영생이 주어지게 됩니다.
인간이 타락하게 되면 죄가 정상으로 여겨지고
의가 비정상적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2] 잘못된 자기 평가가 고통을 가져옵니다.
자긍과 교만과 훼방은 자기 분수를 넘어서
남을 무시하거나 비방하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 때 일어나는 것이 불화입니다.
불화는 마음의 고통을 수반합니다.
인간이 다투고 헤어지는 것만큼 큰 고통이 없습니다.
[3] 잘못된 성격이 고통을 가져옵니다.
원통함, 참소, 사나움, 배반 등은 불화를 넘어선 싸움이 벌어지게 되고
그 결과로 끊임없는 전쟁이 이 땅에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성품은 죄성의 범주를 넘어선
마귀의 영향에 사로잡혀있을 때 생기게 됩니다.
마귀는 바로 참소자이자 배반자이기 대문입니다.
2)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는 지금이 은혜와 구원의 때입니다.
[고후 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하나님의 3대 사역'은 '창조사역', '구원사역', '재 창조사역'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소중한 사역은 구원인 은혜사역입니다.
그리고 은혜의 집행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오셨는데 세상은 잠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재창조사역을 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심판주로 오십니다.
그 전에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3. 그러면 우리는 지금 어떤 상태에 놓여 있을까요?
1) 우리는 모두 잠들어 있는 때입니다.
[롬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1] 영혼이 잠들어 있습니다.
영혼이 잠이 들면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됩니다.
진리를 모르므로 육신의 일만 도모하게 됩니다.
세상의 부귀영화, 출세, 성공, 쾌락, 오락 등은
우리의 영혼을 잠들게 하는 유혹들입니다.
[2] 사명이 잠들어 있습니다.
[마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께서 '천국잔치'를 배설하고 사람들을 초청했을 때 첫 번째 사람은 사업이 바빠서 불참했고 두 번째 사람은 일이 바빠서 거절했고 세 번째 사람은 쾌락에 젖어 불참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들은 하나님과 연관된 관계에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들입니다.
사람은 사명이 없을 때 존재의 의미도 없게 됩니다.
영혼의 잠은 유혹에 빠져있을 때 오게 되고,
육신의 잠은 게으를 때 오게 되고
사명의 잠은 욕심에 빠져있을 때 오게 됩니다.
2) 여호와를 찾을 때입니다.
[호 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묵은 땅'이란 '버려진 땅, 아무것도 생산치 못하는 땅'을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 중에도 아무것도 생산치 못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즉, 무지, 고집, 죄, 타락 등으로 마음이 썩은 경우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잡초와 벌레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온통 마음이 세상 관심사와 유흥거리로 가득 찬 경우입니다.
이때는 성령의 쟁기 인 말씀으로 마음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회개로 씻어내고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갈아엎은 마음에 의를 심어
마침내 '거룩의 열매'를 맺게 하여 주십니다.
세상 속에서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을 찾지 말고
하나님을 찾아 남은 삶을 은혜의 삶으로 바꾸어야만 할 때입니다.
4. 우리가 하나님의 때를 알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를 가장 잘 아시고 그 분의 때에 맞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는 항상 성령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1) 성령님을 모시고 살 때 하나님의 때를 알 수가 있습니다.
[고전 2:9-10]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보내주신 성령님은 우리 마음속에 임재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 때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과 때를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성령님께 이러한 은혜를 얻기 위해서는
성령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중심의 삶이란 나의 주인 된 자아의 자리에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즉, 내 삶에 제일 중요한 분으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2)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살 때 하나님의 때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신 분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실천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음의 소원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3) 믿음과 신앙이 성숙할 때 하나님의 때를 따라 살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75세 때 하나님께서
자녀, 이름, 가나안 땅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자녀를 얻었을 때는 100세 때였습니다.
즉, 25년은 '믿음의 성장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러 가실 때 아브라함에게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창 18:17) 하시면서
자신의 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믿음이 자라나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면
친히 말씀으로 예언과 계시로 알려주십니다.
인간의 때는 창상 하나님의 때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열심히 하여
하나님의 때를 따라 사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돌아온 탕자’로 잘 알려진 이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땐 다른 무엇보다도 예의 없고, 철 없는 이로 각인되었던 아들이었습니다.
혼전까지 부모의 보호 아래 있는 한국 문화를 배경으로는 본다면 불효 막심! 이겠지만 이스라엘, 특히 예수님 시대를 배경으로 일어난 일이라면 이야기는 좀 달라집니다.
이 시대 아버지는 생전 자식들에게 적당한 재산을 선물로 주곤 했으며, 맏아들일 경우 다른 아들들의 두 배를 받도록 되어있었습니다. (신 21:17)
특히, 재산 상속은 아버지 임종이 임박할 때 행해졌으므로 둘째 아들은 형 몫 이외 나머지인 1/3을 요구했을 것이고 이 것은 이스라엘의 관례와 예의에 어긋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문화는 신용과 믿음이 바탕으로 되어있어 사회에서 손가락질 받기 시작하면 그 곳에서의 생활이 어려워집니다.
유대와 사마리아인의 관계에서나 '죄의 유무를 가려 공식적으로 돌로 쳐 죽이는 법'을 보면 잘 나타나듯 사람들의 죄인에 대한 반응이 너그럽지 않으며 한번 죄인으로 낙인 찍힌 사람은 그 사회로부터 철저히 고립되게 됩니다.
그럼, 돌아오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반응을 살펴보겠습니다.
멀리서 돌아오는 아들을 발견한 아버지는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목을 안아 입을 맞춤이란 노예가 아닌동등함을 인정하는 것이고, 제일 좋은 옷은 명예로운 손님에게 주는 그 집의 가장 귀한 예복이며, 반지는 아들의 권위 회복을, 신발은 노예가 아닌 자유인의 신분 회복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 ‘달려가’란 대목입니다.
성화에서 많이 등장하는 긴 예복을 보면 속옷이야 어찌되었든 보통 겉으로는 길게 늘어진 원통 옷이 대부분으로 건조한 땅을 먼지 나게 뛰어다니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니며 (걸리적 거리는 옷을 양손으로 살짝 집어 달릴 수도 있겠고) 어른이 되어 옷을 발목위로 걷어 올려 뛰어다닌다는 것은 팔레스틴 사회에선 굉장히 품위 없는 행동으로 여겨졌습니다.
탕자 아버지처럼 연로하신 분이 뛰어다닌다는 것은 더욱 더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란 말이죠.
이처럼 사회적 지위가 있음에도 달려가 아들을 맞이함엔 많은 의미가 담겨져있습니다.
첫째,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아들을 만나기 위한 것이며
둘째, 입을 맞춤으로써 아들의 죄를 용서하고, 그의 신분을 인정한다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대인 사회로 볼 때 이 아들은 분명히 손가락질 받을 것이므로 아들이 다른 이들에게로부터 죄인 취급 당하기 전 (앞서 설명했듯이 죄인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습니다) 말보다 행동으로 아버지가 아들을 용서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즉, ‘아들을 치려면 나를 먼저 거쳐라’ 란 뜻이 포함 된 행동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회개하는 자들을 향해 먼저 발견하시고 달려가 죄를 용서해 주시며 (시 34:18;51:17; 사 66:2),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녀로서의 권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롬 8:15)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 하겠느냐
또 찾은 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로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여기서 잃어버린 동전'드라크마 (Drachma)'라는 말은 신약 중 유일하게 이 곳에서만 나오는 헬라 화폐 명칭으로,
당시 한 드라크마는 로마 화폐
한 데나리온 (Denarins)의 가치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1 데나리온 X 10 = 열흘 품삯
한 달 생활비 생각해서 높게 300만원이라 잡고 열흘이라 치면 1/3,
300만원 x 1/3 = 100만원
그 중 1/10을 잃어버렸으니
100만원 x 1/10 = 10만원
좀 더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따따블 시키더라도 10~30만원의 값어치 하는 동전을 잃어버린 후 여인은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았다', 즉, 쉬지않고 온 집안을 샅샅히 뒤져가며 살폈을 것입니다.
그렇게나 중요한 물건을 집 안에서 잃어버렸다면 왜, 가족이나 벗의 도움 없이 혼자 고생해가며 찾고 있을까요?
또한, 넉넉한 부자가 아니고서야 대략 10만원, 많게는 30만원 정도의 고가품을 잃어버리고 나몰라~라 하진 않겠지만 내 물건, 내가 찾고나서 기쁨을 이웃과 함께한다는 말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웃 초대 및 대접하면 음료수만 내놓지 않는 이상, 음식은 기본으로 나올 것이고... 하면
그 돈이 그 돈이지 남는게 뭐가 있다고 신나서 손님 대접하며 좋아라 할까요?
이 정도의 상황이라면 그 은전의 가치는 그녀에게 있어서 특별히 의미있었을 것이며 소중하게 여기고 있던 물건이란 뜻인데... 당시, 유대 이스라엘 사회 풍습에는 결혼할 때 남자가 아내를 맞아들이는 '증표'로 가이사의 화상이 새겨진 드라크마 열 닢을 꿰어 머리에 두르게 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드라크마는 낱개보다 열 은전이 한 세트로 결혼을 기념하며 화폐나 재산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때 여인의 지위는 지금과 다르게 당당하게 자신의 뜻을 전하지 못했으므로 만약 결혼한 여인, 혹은 결혼을 앞둔 신부가 사랑하는 사람의 증표 중 하나를 잃어버렸단 것은 굉장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겠죠?
= 잃어버렸다 = = 의미를 두지 않고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 = 그들의 사랑을 얼마나 값지게 여기는지의 대한 신뢰 져버림 =
한 예로,미래의 신랑이 식 전에 신부를 찾아왔는데 그녀의 머리에 오직 아홉개의 은전이 메달려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완전하지 못한 아홉은 의미를 부여할 수 없으며 곧 은밀한 거절의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동전의 의미가 당연했던 이스라엘 사회에서 만약 내가 사랑하는 이와 결혼을 앞두고 그 사람 모르게 사랑의 증표를 잃어버렸다면,
이 일로 인해 헤어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가 날 찾아온다면? 혹여나 물어보기라도 한다면 어쩌나,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여러가지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그녀의 마음은 얼마나 절박했을까요?
따라서 이 상황은 어떤 이유던간에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만큼 누구에게도 말 못하는 혼자만의 문제였으며 잃어버렸던 한 드라크마를 찾았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쁜 일이었겠죠.
이러한 상황을 알고 성경을 읽는다면 '잃은 은전'의 의미가 좀 더 크게 다가오지 않을까요?
초대 교회, 안디옥 교회의 비젼을 주신 하나님은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과 함께 복음을 이루어 나가도록 소망을 주셨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오세아니아에 곧 불어오실 것을 기대하며 부흥을 준비하는 교회가 되어 예수님 중심의 신앙과 성령님 중심의 사역으로 활발히 전개되길 원합니다. 특히 저희 교회는 제자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부끄러움이 없는 진실하고 충실한 일군을 더욱 양성하는데 비젼을 두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