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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에바다교회

'Bible Study'에 해당되는 글 191건

  1. 2011.11.25 [성경인물 092] 제사장 가문의 조상 레위 / Levi
  2. 2011.11.23 [성경공부 092] 시간 / 때
  3. 2011.11.22 [재미있는 성경상식 004] DOUBLING OVER
  4. 2011.11.18 [성경인물 091]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여인 레아( Leah )
  5. 2011.11.16 [성경공부091] 희년 (A Jubilee)
  6. 2011.10.26 [성경공부 090] 율법과 복음
  7. 2011.10.21 [성경인물 090] 신약의 첫 여선지자 안나 / Anna (2)
  8. 2011.10.12 [성경공부 089] 재창조
  9. 2011.09.30 [성경인물 089] 용단의 여인 리브가 / Rabecca
  10. 2011.09.14 [성경인물 088] 남은 자 / Remnant
  11. 2011.06.24 [성경인물 087] 겐그리아의 일꾼 /뵈뵈(Phoebe) (1)
  12. 2011.06.15 [성경공부 088] 사도 바울의 4차 선교여행
  13. 2011.06.10 [성경인물 086] 교법사 가말리엘 / Gamaliel
  14. 2011.06.01 [성경공부 087] 성령의 하나님
  15. 2011.05.20 [성경인물 085] 아리마대 요셉 / Joseph of Arimathea
  16. 2011.05.18 [성경공부 086] 보혜사 (Counselor)
  17. 2011.05.06 [성경인물 084]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 / 시므온(Simeon)
  18. 2011.05.04 [성경공부 086] 시간 / 때
  19. 2011.04.29 [성경인물 083] 기업무를 자 / 보아스(Boaz) (1)
  20. 2011.04.20 [성경공부 085] 부림절
  21. 2011.04.15 [성경인물 082] '이스라엘의 어미' / 여 사사 드보라( Deborah)
  22. 2011.03.30 [성경공부 084] 산상수훈
  23. 2011.03.25 [성경인물 081] 부스러기 은혜에 만족한 / 수로보니게 여인(A Canaanite woman)
  24. 2011.03.23 [성경공부083] 성령의 은사
  25. 2011.03.18 [성경인물 080] 산자의 어미 하와 / Eve
  26. 2011.03.02 [성경공부 082] '이신칭의'
  27. 2011.02.25 [성경인물 079] 베들레헴에 메시야의 탄생을 예고한 선지자 / 미가 (Micah)
  28. 2011.02.23 [성경공부 081] '성전/ Temple'
  29. 2011.02.09 [성경공부 080] “인자” / The Son of Man
  30. 2011.02.04 [성경인물 078] 불순종의 선지자 요나 / Jonah (2)



제사장 가문의 조상 레위 / Levi  
[2:4-6]


1. 인적사항


레위는 야곱과 레아의 셋째 아들로서 그 이름의 원어는
'라아''연합'이라는 뜻의 단어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이는 레아가 남편 야곱의 사랑을 받기 원하여 지어준 이름으로
넷째 아들 '유다'를 낳으면서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란 것으로 보아
레아는
  더 이상 야곱의 무시를 받지 않고 결혼 생활에서
기쁨을 누렸음을 볼 수 있습니다.

레위는 결혼하여 게르솜과, 고핫과 무라리의 세 아들을 낳았으며
또한 고핫은 모세와 아론의 조부가 되었습니다.
레위는 누이 동생 디나가 레위 족속 추장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을 당한 후
세겜성에 유치되어있자 형 시므온과 더불어 이 치욕을 갚기 위하여
세겜성의 남자들에게 할례를 받도록 한 후
성을 급습하여 성안의 모든 남자들을 살해하였습니다. (창 34:25]

그후 레위는 아버지를 따라 가족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갔으며
야곱이
  임종전에 받은 유언기도에서
"네 자손이 흩어지리라.[창 49:5-7] "
라는 저주를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의 정직함과 화평의 마음을 보시고(말 2:6)
그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어주시어 오히려 그의 지파와 후손을
이스라엘의 장자를 대신하는 제사장 가문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민 3:12)
그는 애굽에서 살다가 137세 때에 그 곳에서 죽었습니다. (출 6:16)


2. 레위의 성격과 신앙적인 행위


1) 레위의 젊은 시절은 정의에 불타는 의로움을 지니고 산 삶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20안밖이었을 시절에 어린 누이동생 디나가(약 15세)
가나안 땅 세겜에서 그 마을의 잔치를 구경하러 나갔다가
그 성 추장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고 욕을 본 후
세겜 성에 유치되어있는 것을 보자 불같은 화가 치밀어 올랐으며
그 동생을 위하여 복수할 것을 마음에 품었습니다.

여러 형제들 중 아무도 이에 동참하지 않고 오직
그의 형 시므온과 둘이서 온 성안에 있는 남자들이
할례를 받고 고통 중에 있는 틈을 타서 그 성을 급습하여
추장 및 모든 남자들을 다 죽이고 동생 디나를 데리고 왔습니다.(창 34;26)

나머지 그의 형제들은 학살극에는 동참하지 않았으나 모두 합세하여
그 성안의 재물들을 약탈하였으며 그 성을 폐허화 시켰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레위는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이같은
학살 행위는 잘못이었음을 견책받았으나
레위는 '이는 이방인들이 자신의 가문과 선민
이스라엘에 대한 모욕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정당성을 강조했습니다.(창 34:31)
 

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이같은 일을
완수 할 수 있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동생 디나는 세겜성에 유치된 채
족장 세겜의 정욕의 대상으로 치욕적인 생활을 일생동안 하였을 것입니다.
이는 실로 동생의 아픔을 마음으로 함께 나눈 의로운 오빠의 행위였습니다.
       


2) 레위의 말년 시절은 화평과 정직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제사장 가문으로서의 언약을 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말 2:6)
 

레위는 형제들 중에서 가장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이름을 두려워 한 사람이었습니다. (말 2:5)

 
그는 비록 세겜 학살 사건을 통하여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네 후손이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지리라"는
저주를 받았으나 (창 49:7)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이 흩어짐을 통하여
레위와 그 후손들의 축복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이 저주를 똑같이 받은 형 시므온은 레위만큼
신앙과 성품이 정직치 못하였기 때문에

결국 지파가 흩어지고 감소하여
유다지파로 흡수되었지만 (삿1:3-17)
레위는 하나님께서 종교적 장자로 만들어서
자신의 소유로 삼으시고
제사장 집안으로 임명을 하셨습니다.

레위의 후손은 모여서 성읍을 분배받지 못하고 흩어져 살았음으로
그들의 소속은 오직 각 지파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와 헌물로서 몫을 대신 받게 되었습니다.

각 지파들도 자신의 장자를 모두 하나님께 드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레위 족속이 대신하여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저 자신들에게는 아들과 헤어져 사는 것보다 낫게 여겼기 때문에
이를 모두 허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의 후손들이 레위의 성픔과 신앙을 따라
광야에서 금 송아지 사건 때, 주동자들 삼천명을 모두 죽여
여호와께 헌신 하였음으로 (출 32:28-29)이들을 세워
제사장 집안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민 3:12) 


또한 하나님께서
 
[말 2:5-6]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으로 그에게 준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 하였으며 그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란 
 
 
말씀에 나타났듯이 레위는 형제들 중 누구보다도 이기적인 마음도
 
편파적인 마음도 없이 지냈으며 그는 노아와 에녹같이 여호와 와
 
가장 친근하고 애정어린 교제를 하며 심령과 생활에 
 
흠이 없이 살았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의로움을 보고 
 
죄악에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항상  율법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며 백성에게
교훈하며 제사직을 성취하며 살았습니다. (랑게 주석 말라기 2:6절 참조)
이러한 성품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3. 레위후손들의 구별된 타 지파와의 신앙적 태도


죽음의 홍해 바다를 하나님의 기적을 통하여 건넌 백성들은
여호와를 찬양하며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시내산에 이르러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산에 올라간 사이 40일이 지나자 그 안에 금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그 앞에서 춤추며 경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애굽을 벗어났을 지라도 애굽에서
물들었던 죄성을 다버리지 못한데서 기인한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신앙생활을 하고있을지라도세상의 유혹과 죄성을
유지하고 있는한 30일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세상 죄악에 빠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때에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하나님께 받아서 내려왔습니다.
 


1) 레위의 후손들은 여호와께 헌신한자들이었습니다. (출 32:29)
 

이같은 타락한 백성들의 모습을 본 모세는 자신이 들고있는
십계명 돌판을 금 송아지 위에 던져 둘다 모두 박살을 내었습니다.
이는 이미 십계명 판이 백성들의 우상 숭배로 실효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즉 십계명 1. 2 계명을 어긴 백성들은 곧 죽어야했기 때문입니다.
언약은 파기 되었으며 두 돌판은 무의미한 돌덩이에 불과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세의 감정에 의한 것이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다 멸망 시키지 않으시려는 사랑의 경륜에 따른 것으로 볼수입니다.

그 때 모세는 명령하기를 누구든지 하나님 편에 선 사람은
자기 편에 서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기가 막하게도 레위 자손들만이 모세의 편에 모두 나와 섰습니다.
이 선별된 선택이 결국 레위인들만이 특별히 이 일을 위해
봉사하도록 구별받은 자들이 된 계기기 되었습니다. (민1:47-54)

이들은 누가 우상 숭배를 선동한 주동자들인지를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무섭게 친구든 친척이든 형제든
모두 주모자들은 칼로 처단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삼천명 가량이 처단되자 우상숭배 사건은 수습되었으며
모세는 그들에게 너희가 여호와께 헌신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말은 원문의 뜻은 "너희 손을 채우라"는 말로
'제사장과 같이 죄를 속하여 희생제사를 드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미 이 사건을 통하여
제사장 직분을 행한거나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 헌신한 레위인들을 위하여
'여호와께서 복을 내리시리라'
 
 
하며 축복을 하여주었습니다. (출32:29),

즉 언제나 여호와께 헌신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성별하여주심을 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사업이 가족이 더 소중할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보다 더 소중히 여긴다면
우상숭배자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유부단한 신앙행위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레위인들의 결단과 순종은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하는 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좋은 예로 볼 수 있습니다
 


2) 이스라엘의 제 3대 대제사장이 된 비느하스에게 하나님께서
그와 후손들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주셨습니다. (민 25:12:13)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바로 앞에 둔 싯딤에 머므르게 되었을 때,
모압왕 발락은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하고
여인들로 유혹하였으며 그들로 우상에 제물을 먹게하고
음란을 저지르게 하였습니다.

이에 많은 백성들이 음란에 빠졌으며 우상숭배의 죄를 짓게되었습니다.
마비된 양심은 영적 타락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셔서 염병을 터뜨리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죽은 자가 이만 사천명이나 되었습니다. (민 25:9}
 
 
그러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이 음행에 가담하였는 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제사장 중의 한 사람이었던 비느하스가 회막문 앞에서
백성들의 죄를 탄식하며 울고 있는 가운데 시므온 종족중
한 족장인 시므리가 미디안 창녀를 데리고 진영안으로 들어와
자기 장막 속에서 음란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신분이 높기 때문에 감히 자기에게 사람들이
손을 대지 못할 것으로 여기고 담대하게 음란 행위를 한 것입니다.
이때 비느하스는 시므리의 오만한 행위를 보고
기도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창을 들고 장막 속으로 들어가
그둘을 함께 창으로 꿰똟어 죽였습니다. (민 25:7-8)

그러자 퍼지던 염병이 그치고 하나님의 진노가 멈추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시므리의 높은 지위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었을 때,
비느하스는 용기를 내어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하나닙께서 그의 행위를 기쁘게 여기셨으며
"이일을 저에게 의로여겨 주셨습니다"(시106:31)
또한 그에게 제사장 직분과 그의 후손들에게 제사장 직분이
 상속되도록 언약을 하셨습니다.(민 25:13)

그러므로 그 후손들에게 약속된 대 제사장 직분은 엘리시대에
일시적인 단절 (삼상 2:27-36)을 제외하고는
신약시대 로마가 예루살렘을 초토화시킬 때까지
비느하스의 가문을 통하여 그 명맥이 유지되었다고합니다. (keil)


이와같이 레위의 여호와를 향한 특심과 성실은 그의 후손에게로 이어져 내려갔으며
이는 바벨론 포로 귀환시 그대로 나타나 귀환자들의 42,360명 중
1/10 에 해당하는 4289명의 사람들이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에스라 2:36-42)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각자의 믿음과 행위를 구분하십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위하여 헌신한 사람들에게 
생명과 평강의 언약을 내려주십니다. (말2:5)

우리도 모두 레위를 본받아 제사장으로서의
생명과 평강의 언약을 받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시간 /
[겔 7:7]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체에게 존재의 기간을 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시간(Time)' 생명과 같이 아주 소중한 의미인데도 

막상 '생명'이라 하면 절실하게 긴장으로 받아들이는 반면에, 

'시간' 보다는 무관심하게 여기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기간이 대상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시간의 개념을 바로 알고 산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을 가치 있고 유효하게 사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간이란 무엇일까요?



1. 시간의 개념


1) 구약에서의 시간의 개념은 기간 보다는 

질적 상태를 나타내는 의미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시간을 나타내는 히브리어는 주로 에트 라는 단어로 

의미는 정해진 기간 또는 

특정한 뜻으로 쓰여졌습니다. ( 7:7)


본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영생체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시간이란 개념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음으로 죄는 죽음을 가져왔으며 

죽음은 정해진 시간의 끝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영생에서 900년으로 제한된 생명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생명의 존재기간은 죄의 결과임으로 의미가 없으십니다. 


다만 주어진 기간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가 하나님의 관심이 뿐입니다. 

그래서 구약초기에 많은 사람의 이름들이 나열됐고 

900 이상 살았던 기간이 명시됐지만 사건은 아무것도 없음으로 

그냥 낳고, 죽었다 간략하게 표시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아브라함의 생애에 있어서는 

그는 단지 175세로 비교적 짧은 기간을 살았으나 

성경에서 창세기에 그에 대한 많은 부분이 기술된 것은 

그의 삶이 하나님과 연관된 질적인 사건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의 시간에 대한 참된 이해는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시간 안에 있는 의미 있는 사건 보다 중요하게 여겼으며, 

모든 인간의 삶에서도 양적인 기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질적인 시간이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 죽어서 심판대 앞에 섰을 인간에게 물어지는 것은 

'그가 세상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살았는가?' 아니라 

그가 사는 동안 세상에서 무엇을 하였는가?” 하는 

질적인 시간에 대한 해명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서는 시간은 의미의 기간으로 

취급 되어졌음을 봅니다. (쉐마사전 P43 시간 참조)


   

 2)  신약에서의 시간의 개념은 시간의 흐름이라는 양적 기간 

속에 중요한 때를 포함시키는 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헬라어에서 '시간(Time)' 가리키는 단어는 가지인데

'크로노스' '카이로스'   '호라'' 라는 단어로 

각각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1] 크로노스 (인간의 )


인간 편에서의 시간의 의미합니다.


시간은 인간의 행동에 의해서 폭도 정해지게 됩니다. 

, 같은 기간도 평안이 지낼 시간의 폭은 느낌 없이, 

소중히 여김 없이 시간은 흐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위기나 고난이나 헌신이 삶속에 깊이 있게 수반될 때는 

시기는 일정한 흐름보다 오래 느껴질 수도, 

느리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마치 33년을 살았어도 100년을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100년을 살았어도 20-30 같이 여겨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은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여 땅에 오심으로 

시간의 바른 의미를 얻게 되었습니다. ( 4:4-6)


, 죄인으로서의 인간으로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삶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주어졌으며, (벧전 4:23)

같은 삶은 시간의 폭을 가장 넓혀서 사는 의미 있는 삶이 되었습니다. 

(시간 밖에 계신 분이 시간안에 포함되어 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2] 카이로스 (하나님의 )


하나님 편에서의 지정하신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의 기간을 정하셨으며 

시작의 , 죽음의 , 심판의 때와 인간에게 간섭하실 때를 정하여 

(징계의 , 축복의 , 연단의 , 성취의 -- ) 

계획하신 뜻을 인간의 속에 나타내십니다. ( 3:3)


주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때는 구약에서는 예언으로 주어졌으며 

신약에서는 예수님과 성령님에 의해서 성취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때인 '카이로스' 가장 알고 사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인간이 만약 하나님의 때를 모르고 마치 멸망하는 

짐승과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닮아 하나님의 때를 알고 살면 우리의 중에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반영할 있는 참된 가치와 

성취를 이루는 행복한 삶을 있게 됩니다.



[3] 호라 (인간편에서의 좋은 시간)


인간 편에서의 정한 시간, 좋은 시간 의미합니다.


인간은 일생을 살면서 정해진 때를 지키고 살게 됩니다. 

(공부, , 성공, 결혼, 양육, 은퇴, 헌신할 …… )


그러나 이와 같은 때는 인간 스스로가 정하여 진행할지라도

인간 스스로 정할 없는 때를 감안하여 

하나님께 자신의 계획을 아뢰어 응답 받지 못하고 지낸다면 

모두 이룬 것들이 헛수고가 있습니다. 


, 위기의 , 사망의 , 하나님의 진노의 ..들을 모르면

나의 이룬 것은 무의미하게 없어질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이란 출생 사망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기간으로 주어진 존재의 기간이기 보다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계획하시고 예정하신 뜻을 

땅에 이루는 영혼의 삶을 준비하는 기간임을 알고 

소중히 여기고 사는 삶이 바른 시간을 이해하고 사는 삶이 됩니다.


2.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지금은 어떤 때일까요?


1) 세상은 말세임으로 고통과 타락의 때입니다.


[딤후 3:1-5]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여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지 않습니다.

인간이 고통을 받는 것은 자신이 행한 행실의 결과로 주어질 뿐입니다.



[1] 잘못된 사랑이 고통을 가져옵니다.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대상은 자신과 돈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의 성향을 지닌 죄인이며 돈은 세상의 창조물입니다.

결국 자신과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사랑할 고통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할 축복과 영생이 주어지게 됩니다.

인간이 타락하게 되면 죄가 정상으로 여겨지고 

의가 비정상적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2] 잘못된 자기 평가가 고통을 가져옵니다.


자긍과 교만과 훼방은 자기 분수를 넘어서 

남을 무시하거나 비방하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일어나는 것이 불화입니다.

불화는 마음의 고통을 수반합니다.

인간이 다투고 헤어지는 것만큼 고통이 없습니다.



[3] 잘못된 성격이 고통을 가져옵니다.


원통함, 참소, 사나움, 배반 등은 불화를 넘어선 싸움이 벌어지게 되고

결과로 끊임없는 전쟁이 땅에 지속되고 있습니다.


같은 성품은 죄성의 범주를 넘어선 

마귀의 영향에 사로잡혀있을 생기게 됩니다.

마귀는 바로 참소자이자 배반자이기 대문입니다.



2)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는 지금이 은혜와 구원의 때입니다.


[고후 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하나님의 3 사역' '창조사역', '구원사역', ' 창조사역'입니다.

중에서 가장 소중한 사역은 구원인 은혜사역입니다.

그리고 은혜의 집행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오셨는데 세상은 잠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재창조사역을 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심판주로 오십니다. 

전에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3. 그러면 우리는 지금 어떤 상태에 놓여 있을까요?


1) 우리는 모두 잠들어 있는 때입니다.


[ 13:11]

또한 너희가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때가 벌써 되었으니……”


[1] 영혼이 잠들어 있습니다.


영혼이 잠이 들면 세상을 하나님보다 사랑하게 됩니다.

진리를 모르므로 육신의 일만 도모하게 됩니다.

세상의 부귀영화, 출세, 성공, 쾌락, 오락 등은 

우리의 영혼을 잠들게 하는 유혹들입니다.


[2] 사명이 잠들어 있습니다.


[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께서 '천국잔치' 배설하고 사람들을 초청했을

번째 사람은 사업이 바빠서 불참했고

번째 사람은 일이 바빠서 거절했고

번째 사람은 쾌락에 젖어 불참했습니다.


그러나 일들은 하나님과 연관된 관계에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들입니다.


사람은 사명이 없을 존재의 의미도 없게 됩니다.

영혼의 잠은 유혹에 빠져있을 오게 되고, 

육신의 잠은 게으를 오게 되고

사명의 잠은 욕심에 빠져있을 오게 됩니다.



2) 여호와를 찾을 때입니다.


[ 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묵은 '이란 '버려진 , 아무것도 생산치 못하는 '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 중에도 아무것도 생산치 못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 무지, 고집, , 타락 등으로 마음이 썩은 경우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잡초와 벌레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온통 마음이 세상 관심사와 유흥거리로 가득 경우입니다.


이때는 성령의 쟁기 말씀으로 마음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회개로 씻어내고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갈아엎은 마음에 의를 심어 

마침내 '거룩의 열매' 맺게 하여 주십니다.


세상 속에서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을 찾지 말고 

하나님을 찾아 남은 삶을 은혜의 삶으로 바꾸어야만 때입니다.



4. 우리가 하나님의 때를 알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를 가장 아시고 분의 때에 맞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유는 주님께서는 항상 성령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1) 성령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때를 수가 있습니다.


[고전 2:9-10]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보내주신 성령님은 우리 마음속에 임재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며 때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과 때를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성령님께 이러한 은혜를 얻기 위해서는 

성령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중심의 삶이란 나의 주인 자아의 자리에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 삶에 제일 중요한 분으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2)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하나님의 때를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신 분의 뜻을 있습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실천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받을 있습니다.

마음의 소원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3) 믿음과 신앙이 성숙할 하나님의 때를 따라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75 하나님께서 

자녀, 이름가나안 땅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자녀를 얻었을 때는 100 때였습니다. 

, 25년은 '믿음의 성장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러 가실 아브라함에게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 18:17) 하시면서

자신의 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믿음이 자라나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면 

친히 말씀으로 예언과 계시로 알려주십니다.


인간의 때는 창상 하나님의 때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열심히 하여 

하나님의 때를 따라 사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0


DOUBLING OVER
[이사야 40 : 2]

 


40:2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나 받았느니라 할찌니라
 
 

이사야 40장의 내용은 이스라엘의 포로 해방에 대한 예언입니다.

복역의 때란 이스라엘 백성, 남유다의 범죄에 대한 징계로 인해

바벨론에서 약 70년간의 포로 생활을 말합니다.

 

문구대로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정확하게 두 배로 심판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의 대가로 값을 치렀으니

더 이상의 형벌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61:7)

 

그들의 포로 생활은 끝났고 죄악은 사함 받았으므로

선지자들을 통해 실의에 빠진 백성들에게 구원과 소망을 갖게 하며

죄의 백성을 버리지 않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습니다.

 

 

로 갚는다는 것은 율법에 따라 모든 범죄에 적용되었으며 ( 33:9)

이 때 당시, 이방 국가들에서도 통용되었던 판결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 값의 배가 되는 대가를 받았다 하는데

바벨론 포로생활 약 70년이란 기간이 그 대가였다면

과연, 그 단위가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집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이스라엘 문화를 살펴보겠습니다.


 

어느 이스라엘 마을에서 살고 있는 아담씨.
여러가지 형편이 어려워
주위 안면이 있는 분들에게 어느 정도 물질적 빚을 집니다.

하루는 A씨에게 양 3마리,
어느 날은 B씨에게 $$$,
 
그 다음엔 C, D…


날은 흘러 빚을 갚을 약속이 넘었어도 형편이 어려워 고민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빌려 준 사람들 입장에서는 본인에게 찾아와 '돈 갚아!!' 다짜고짜 잡아갈 수도 있습니다만

이스라엘 민족은 규율이나 법을 어긴다든지, 아니면 가장 큰 죄 -
신성모독일 때를 제외하면
어느 정도의 친밀도라든지 관계하에 있어서 서로 난폭한 행동 보단

그레이스 타임을 주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집 문 앞에 하얀 종이가 붙습니다.


그리고 언제 양 3마리 빌려줬음 - A씨 –‘ 라고 써집니다.


그 담날 종이를 발견한 B씨는 ?! 나도 빌려 준 거 있는데…’

A씨 글 옆에 돈 얼마 by B씨’라고 적습니다.

그 후 C, D… 등 사람들이 자신들이 빌려준 목록을 차례차례 적어갑니다.

 

마치 수학여행 마지막 때 반 친구들의 롤링페이퍼 처럼
... 이렇게 차곡차곡 빈칸이 채워져 갑니다.

 

 

 
친구사이의 귀여운 표현으로 여겨지는 이 일은 사실

이 사람은 신용도가 떨어짐을 의미할 수도 있고,

덕을 세우지 못하는 사람으로 여겨지고

그 사회에서 손가락질 받게 되면 본인 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가 부끄러워 밖에 나가기를 거부하게 됩니다.


결국 그 마을을 떠날 수도 있을 만큼 신용에 철저한 그들에겐

직접 와서 두들겨 패지 않아도 충분히 그 만한 가치가 있는 하얀 종이.

(이스라엘 당시 상황이라면 양피지 일 수도 있고)


 

\\\\\\\\\\\\



그러던 어느 날, 길을 지나가던 아담의 삼촌, 엉클 싸이먼은

오랜만에 볼일을 마치고 조카를 보러 오는 길에 이 종이를 보게 됩니다.


? 아니, 이거 무슨 일이지?’


대충 글을 봐도 상황을 알게 된 엉클 싸이먼.

'좋아. 내가 대신 갚아주지'

조카를 위해 대신 해결하기로 결심합니다.
아담을 직접 만나 이야기 할 수도 있고
사람들에게 설명할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고...

그런 행동보다 그는 갑자기 종이를 뒤집고 깨끗한 면에 무엇인가 적습니다.


'xxxx 언제까지 모두 갚는다 엉클 싸이먼 –‘
 

 

이 뜻은 곧, 이 사람의 문제는 엉클 싸이먼이 해결함으로

이 사람을 더 이상 추궁하지 말고 내게 오라는 것이죠.

 


이 행동을 Doubling Over 라 표현하는데

오늘의 말씀 문자대로 두 배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종이 앞면의 모든 죄를 뒤집고 대신 탕감해 주는 것이니

더 이상 이 사람의 죄를 묻지 않을 것이며
없는 것과 같이 내가 사하여 준다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잘못으로 인해
노예로 생활하게 되었더라도
과거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더 이상 추궁하지 않겠다
란 뜻으로도 해석 할 수 있겠습니다.


문구대로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정확하게 두 배로 심판하신다는
엄격하고 어려운 하나님의 뜻으로 보기 보다
좀 더 자비하신, 은혜의 하나님을 표현해주는
또 하나의 표현임을 알게하는 이야기 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여인 / 레아(Leah) 
  [창
29 : 31]


1. 인적 사항


리브가의 오빠 라반에게는 딸이 있었습니다.


[1]
레아 (암소라는 )

[2] 둘째 라헬 (암양이라는 )


여인의 이미지는 이름의 뜻에서 나타나 있듯이

언니레아 동생라헬 비해 미모가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레아를안력이 부족하다 표현하고 있으며

이는 여성적인 매력이 부족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레아는 메소포타미아 하란에서 출생하였으며

야곱과 결혼한 가나안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죽어 선영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습니다.


비록 동생 라헬보다는 

남편 야곱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하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녀를 불쌍히 여기셔서 

자녀 생산의 축복을 주셨으므로 61녀를 두게 하셨습니다.


[1] 르우벤 (보라 아들이라)        [2] 시므온 (들으심)    

[3] 레위    (연합)            [4] 유다 (찬송함)

[5] 잇사갈 ()            [6] 스블론 (거함)

[7] 디나 (, 심판) 어머니가 되었으며 


하나님의
특별 섭리로 선택된 여인이 되어

그녀의 넷째 아들 유다의 혈통에서 메시야가 태어나도록 

섭리하심을 받은 은총 받은 여인이 되었습니다.


2. 주요 생애


야곱은 이삭의 장자권 축복을 받고 아내를 구하려 

외삼촌이 사는 하란으로 떠날 때의 나이가 77세였습니다.

레아와 라헬은 20 후의 나이로 

야곱과는 나이차가 많이 나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라헬이 야곱을 좋아한 것으로 보아 

야곱은 에서와 달리 숫총각으로 지내면서 

몸단장을 하였으므로 젊은 모습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과 라헬을 얻는 약조  

결혼지참금 대신 봉사대가로 7년을 일하고 

결혼식에 임했을 때는 84세로 늦은 감이 있으나 

그래도 상당한 활력을 지닌 젊은이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결혼식 레아는 아버지에게서 

동생 대신 신방에 들어갈 것을 지시 받았습니다.

레아는 야곱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숨기고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라헬과 같이 행동 하였습니다.


야곱은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며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사랑하는 라헬이 아니라

언니 레아였음을 발견하고 매우 놀라 화가 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외삼촌에게 신부가 라헬이 아니었음을 항의하였으나 

레아를 파혼하지는 않았고 7일간 결혼예식을 치렀습니다.

이는 바로 자신이레아의 입장 같이 

에서 대신하여 이삭을 속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를 감수하고 레아를 거두어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레아가 아버지와 합의하여 자신을 속인 것에 분노하여 

레아를 사랑하지 않은 결과 

그녀는 남편에게서 미움 받고 사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레아를 긍휼히 여기셔서 

태를 열어 자식의 축복을 주셨으므로 

무자 했던 라헬보다는 자녀들로 인한 가족의 기쁨은 

마음껏 누리며 있었습니다.


한가지 자녀로부터의 고민을 경우는 

가나안으로 이주 세겜 성에서 

디나가 추장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당하고 

일로 인하여 시므온과 레위가 앞장서고 

다른 아들들과 더불어 세겜 성을 엄습하여 

남자들과 추장 하몰, 그의 아들 세겜…… 모두 죽임으로 

살륙상을 겪게 되었으며

이로 디나는 불행한 모습으로 어머니 곁에 있는 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레아에게는 마음에 아픔이 되었습니다.


남편의 사랑은 받지 못한 대신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의지한 결과 

야곱의 12지파의 조상 6명을 낳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후 야곱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130세에 애굽에 내려가기 레아는 죽었으며

야곱은 레아를 조상들의 무덤인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습니다. ( 49:31)


결국 라반의 레아와 라헬은 일찍 죽어 야곱의 곁을 떠나게 되었으나 

레아는 하나님의 선택한 약속의 자손 3대의 정식 부인으로 

라헬과는 달리 자신의 자리를 지킨 하나님의 축복받은 여인이 되었습니다.

.

3. 신앙생활의 특징


1) 오직 남편 야곱의 사랑만을 원하며 살았습니다.


부부는 사랑으로 맺어진 사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3:16]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그런데 문제는 서로의 사랑이 식어질 경우

부모가 정한 중매 결혼의 경우 

부부가 서로 의무를 충실히 이행치 못하고 

쪽에서 탈선할 경우가정의 유지를 어떻게 해야 할지 

요즘 우리에게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결혼이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경로를 통하여 결혼이 이루어 졌든지 간에 

믿는 자들의 결합은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이기 때문에 

결혼생활의 과정도 그분께 맡기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레아는 자신이 정당하게 야곱의 아내가 것은 아니며

야곱이 외삼촌의 설득에 따라 아내로 맞이되었고

남편에게서 사랑 받지 못하는 외로운 결혼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레아는 남편을 미워하거나 괴롭게 하지 않고 

자기 마음 속에만 슬픔을 감춘 남편을 사모하며 지냈습니다.


그러자 아들을 낳게 되었으므로

아들 이름을르우벤이라 짓고

이제는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 9:32]

하며 아들로 인한 사랑의 기대를 하였습니다.


또한 셋째 아들 레위를 낳으면서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 9:34]


야곱도 레아만이 아들을 낳았을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비록 아내는 사랑스럽지 않아도 자신의 자녀는 예쁘기 때문입니다.


레아는 비록 남편이 자신보다 아이들을 보러 오더라도 

기쁘게 여기며 살았습니다.

이는 아내가 남편을 항상 사랑하며 순종하는 것이 

가정의 행복을 유지할 있는 방법임을 레아는 보여준 것입니다


야곱이 라헬과 여종 빌하와 실바를 취하여 명의 아내를 두었을 때에도 

그녀는 시기하지 않고 꾸준히 남편의 사랑을 기다리고 결과 

잇사갈, 스블론, 디나의 자녀를 낳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사는 생활이 

괴로움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의 행복은 자녀들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축복을 주신 부분에 주로 감사하고 사는 삶이

기쁘게 사는 삶임을 레아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자신의 외로움을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위로 받고 여인이었습니다.


[v 31] “여호와께서 라헬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 하였더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모두 지니고 

만족하게 사는 것을 기뻐하시기 보다 

부족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며 응답으로 받아 감사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여인의 가장 소망은 미인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과 인기를 받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미인은 사람들의 사랑으로 만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애타게 구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라헬보다는 레아가 애타게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의 괴로움을 자주 고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녀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 36:17]

그녀는 결혼생활의 문제를 세상적인 방법을 통하여 해결하려 들지 않고

하나님을 통하여 해결하려 하였습니다.


그녀가 아들을 낳은 출산이 그쳤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아내를 취하여 아들을 낳게 되어 

관심이 곳으로 다시 쏠리게 되었을 때에도 

레아는 여전히 하나님께 기도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녀의 기도를 들으시고 [ 30:17]

다시 태를 열어 자녀를 주셨습니다.


이는 라헬이 자녀를 생산하지 못하자 자신의 여종 빌하를 통하여 

아들을 낳아 자신의 아들로 삼고자 편법에 대하여 

하나님의 축복으로 자녀를 생산함으로 

레아는 라헬보다 당당하고 떳떳한 우의를 차지함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아의 삶은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삶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아보셨다

그리하여 내게 아들을 주셨도다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자녀의 축복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며 살았습니다.


사람은 때때로 세상의 것을 모두 소유하며 태어나는 것이  

불행한 삶임을 느낄 있습니다.

증거가 왕들이 모두행복한 삶을 살았느냐?하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부족하게 지내는 삶에서 더욱 채워지게 하셨습니다.


레아를 통하여 오늘 나에게 부족한 삶에 처해 있다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기 원하시는 사랑과 축복의 부분임을 깨닫고

 하나님께 레아와 같이 구하여 특별 은혜를 받는 삶을 누리십니다.


3) 하나님의 특별 은총을 받아 

그녀의 후손에서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족보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레아와 라헬의 사랑 싸움은 야곱이 가나안 벧엘로 돌아왔을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 죽음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라헬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드라빔 (수호신) 훔쳐서 가지고 거짓말의 결과이며

당시 야곱은 

외삼촌의 신은 뉘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 31:32]

말한 저주가 라헬에게 임한 것입니다.


결국 레아와 라헬은 결혼생활 14년간을 경쟁자로 지냈으나 

라헬이 죽음으로 레아는 가정의 평화를 찾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녀가 번째 아들 유다를 낳고 고백하기를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말함으로 

그녀의 특별한 신앙심을 야곱은 

그녀에게 많은 감화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적인 결혼생활은 여전히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고 

그녀의 아들 요셉과 베냐민을 가장 사랑했습니다.


야곱이 영적인 눈을 뜨고 죽음에 임박하여 

12 자녀에게 마지막 축복 기도를 하여줄 그는 

유다가 하나님께서 섭리한 메시야의 계보를 이을 아들임을 알고 

그에 대한 축복기도를 하여주었습니다. [ 49:10]


결국 여호와를 찬송하며 지내는 레아를 

정실 아내의 자격으로 인정하게 야곱은

라헬이 죽었을 때는 그녀를 베들레헴에 묻고 묘비를 세워 기념하였으나

40 이상 같이 살아 레아가 죽었을  

조상의 묘인 막벨라 굴에 정실 부인으로 장사 지냈습니다. [ 49:31]


레아의 일생은 오직 남편과 하나님 만을 

존귀하게 여기는 삶을 삶이었습니다.


인생의 삶에는 여러 가지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여성들에게는 미모와 인기, 사랑과 물질…… 외에도 많겠지만

그러나 가장 행복은 가정과 신앙임을 

레아는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욱 여인으로서 후세의 메시야 계보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일생이 생존에만 그치는 삶이 아니라 

후손에게 이르는 연결선상의 삶을 살아야 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삶의 외로움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채워 누리고 레아의 삶을 

우리의 외로운 삶에도 적용하여 

같이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십시다.



 



희년 (A Jubilee) 
[레위기 25:8-13]



1. 희년의 의미


희년은 히브리어로요벨이라 부르며

의미는 '수양뿔의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보통 전쟁 사용된 은 나팔과는 달리 ( 10:1)

구부러진 수양의 뿔로 만들어져 

제사장들이 주로 사용하는 나팔입니다. ( 6:4-5)


그러므로 나팔을 제사장들이  

이는 종교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었으며 

승리의 전주곡 또는 기쁜 소식을 알리는 

특수한 용도로 불리어졌습니다.


한편, 랍비의 전승에 의하면희년이란 낱말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을  

숲에 걸려 있던 수양의 이야기와 

관련 있는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전승은 아브라함이 수양을 태워 재로 만들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통하여 수양을 되살아나게 하셨고 

가죽으로는 엘리야가 광야에서 입었던 외투를, 

내장으로는 다윗이 키던 것과 같은 하프를, 

그리고 하나로는 출애굽 당시 시내 산에서 불던 것과 같은

 
나팔을 만들고,   다른 하나로는 

메시야가 오심을 알리는데 사용될 나팔을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후대의 주석가들은 원어를 여호수아 6:5에서 찾고 있습니다.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제사장들이 희년의 양각 나팔을 길게 올려 불어라고 되는데 

구절에 의하면 희년이 오직 뿔이란 악기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나팔소리에서 계속 울려 나오는 소리의 진동을 함께 동참하는 의미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누리에 멀리 울려 퍼짐을 말하고 있다 합니다.

(엑셀,레21장 참조, S 로빈슨)


그리고 그 시기는 안식년이 7 반복된 이듬해 

50년째 되는 해를 희년으로,  시기의 선포는 유대종교력으로 

7 10 속죄일에 나팔을 크게 불어 희년임을 알렸습니다.


평상시 속죄일에는 나팔을 불지 않았으며 

희년의 속죄일에만 나팔을 이유는 모든 회복을 알리는 안식과 

자유의 선포 기쁜 소식이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께서 희년의 제도를 만드신 이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통하여 자신의 일을 시키시기 보다는 

함께 있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이 지음 받고 일은 오직 하나님과 함께 안식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안식 속에서 

하고 싶은 것들을 즐기며 사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죄를 짓고 나자 일은 노동이 되었으며

안식은 없어지고 삶은 생존 경쟁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백성으로 삼으시고 

다시 안식을 기준으로 삶을 제시해주셨습니다.


제도가 안식일 즉, 7 하루를 

하나님과 함께 지내며 안식하는 삶이며 

안식년 즉, 7 1년을 사람과 모두 쉬는 해이며

희년은 50년째 되는

 
안식년과 희년 2년을 모두가 쉬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안식의 제도는 

인간들로부터 탐욕을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며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알려주어 

육신의 쉼을 통하여 

영혼이 하나님께 더욱 나아가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취지가 제일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 희년 규정되어 있으며

희년은 인간이 성인이   한번만 맞이할 있는

 
완전해방과 회복의 해로 누구나 희년 후에는

 
천국에서의 최종 안식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희년제도는 천국 삶의 예비과정임을 있습니다.


1) 희년은 모든 얽매인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해입니다.


[ 25:10]

오십 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인간의 진정한 안식은 자유로부터 누릴 있습니다.

억눌려 있는 상태에서는 진정한 안식은 이루어질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는 희년의 가장 축복이라 아니할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노예들과 죄수들이 감옥에서 풀려났고, 신분이 회복되었으며

육체적으로는 모든 노동에서 완전한 안식을 얻을 있게 되었고

물질적으로는 모든 빚이 탕감되어 물질로부터의 자유를 얻게 되었으며 

땅과 기업이 소유자에게 돌아감으로 소유가 회복되었습니다.


이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며

같은 권리를 누려야 함을 하나님께서는 지시하신 것입니다.



2) 희년은 기업과 가족이 회복되어 한데 모아지는 해입니다.


[레위기 25:10]

“...이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가족에게로 돌아갈 지며


기업이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지파 별로 나누어 받았던 토지를 말하며

구체적으로는 자손 대대로 물려줄 가문의 유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득이하게 자신의 기업을 팔고 타지방으로 옮겨갔거나 기타 사정으로

 
남의 소유가 되어버렸을 지라도희년이 되면 원주인에게로 다시 돌아가며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은 다시 돌아와 가족이 한데 모여 같이 살면서 

기업을 다시 돌려받아 농사를 짓고 있게 것입니다.


요즘에는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일 것이며

가족들도 성인이 되면 각자 독립하여

자기 일자리 찾아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추석이나 명절에 고향 찾아 부모님 뵙는 기쁨 한가지 만으로도 

얼마나 고대하며 1년을 지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와같은 인간의 심정을 하나님께서는 욕심 없이 

허락하신 땅에서 부여 받은 기업으로 돌아가

하나님을 섬기며 지내고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유혹은 우리들을 뿔뿔이 고아로 만들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예비하신 자리에 모여 살게 하십니다.


3) 희년은 사람과 모두가 안식하는 해입니다.


[레위기 25:11]

오십 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안식년에 자연적으로 자라난 곡물과 과실은 

땅의 주인이 수확하여 저장할 없었습니다.


이유는 소출들은 모든 사람의 공동소유로 

특히 고아나 과부, 객이나 이방인

 
의지할 은신처가 없는 자나 가난한 자를 위한 

양식이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들의 위하여 

공정한 소득 분배를 하고 계심을 있습니다.


사람은 몸이 자유 해도 안식을 얻을 있지만 

마음도 자유 해야만 진정한 안식을 누릴 있습니다.


오늘날 부자들도 몸은 자유 하지만 

 
마음 속에 욕망과 탐심이 가득 차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탐심을 가지고 사는 것을 

몹시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탐심을 포기시키는 제도를 만들어 

욕망에서 해방되는 진정한 안식을 누릴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3. 영적 희년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희년의 완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만드셔서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 

세상을 사탄에게 내주고 말았습니다. ( 4:6)


하나님께서는 땅므르기 법칙에 따라 

세상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의 생명을 되찾고자 하셨는데

법칙을 적용시켜 마귀에게 찾아올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을 찾을 없었습니다.

인간의 생명을 힘이 세상 인간 동족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세상에 보내사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사탄 마귀로 하여금 없는 자를 죽게 만들어

하나님의 법칙에 어긋난 일을 행하게 하여 

다시 권한을 되찾아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모두가 

우리에게 진정한 희년을 베풀어 주신 것이며

영적인 희년이 하나님의 제정하신 

희년의 완성 되는 것입니다 ( 61 완성).

(쉐마 희년 해설 참고)



1) 포로와 노예로부터의 해방은 

 
죄의 멍에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자에게 자유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주의 은혜의  '희년' 가리키며

구약의 희년은 신약에서 완전 해방을 완성하도록 예정하신 것인데

주님께서 오셔서 모든 죄와 죄의 결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신약의 희년의 선포는 복음이 바로 나팔을 부는 것이며

복음이 전파되자 즉시 죄의 세력에 포로가 되어 있는 인류를 

영적으로 해방시켜 자유함을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세상 쫓아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구원의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세상이 전부인 줄로 착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공포에서 영생의 길을 발견한 사람들은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또한 세상 삶에는 무거운 짐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세상 근심 걱정에 짓눌려 한시도 편안히 지낼 없는 

인간들의 모든 짐을 주님께서 대신 짊어져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진정 완성된 희년을 만끽하고 사는 

축복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닐 없습니다.



2) 재림시의 주님의 호령 나팔소리는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해방시킴 의미합니다.


[살전 5: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외 함께 있으리라."


구약에서의 제사장의 나팔은 

대적을 무너뜨리고 승리하는데 불려졌는데

신약에서의 천사들의 부는 나팔소리는 

사탄 마귀에 대한 확실한 승리의 선포가 것이며, 

증거가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부활하며 

자들도 죽음에 묶이지 않고 

살아서 공중으로 들림 받아 올라감으로 증명 것입니다.


살아서 들림 받은 성도들은 공중에서 변화되어

죽은 자들이 부활의 몸을 입듯이

죄로 연약한 육체를 벗어버리고 

똑같은 부활의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세상과
육신으로부터의 해방.

이것이 진정 모든 저주에서의 해방이 아닐 없습니다.


3) 천년 왕국에서의 삶이 

세상 희년의 완성된 삶이 것입니다.


[ 20:6] 

"이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1] 첫째 부활에 참여한 성도들은 예수님의 지상 재림  

공중에서의 어린양 혼인잔치를 끝내고 땅에 다시 내려와 

천년 동안 주님과 더불어 노릇하며 세상을 다스릴 것입니다.


때가 영육간의 희년의 완성이 됨은 

세상에 마귀가 없음으로 죄가 없어지게 됩니다.


천지창조 때와 같은 

아담과 하와 와 같은 삶이 재현될 것입니다.



[2] 부활로 이미 육신이 변화 성도들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년을 것입니다.


그때는 모든 인생의 짐이 벗겨진 가운데 진정한 행복을 누리며 살게 것입니다.

질병도 노쇠도 죽음도 없는 삶을 이 땅에서 다시 한번 누리고 살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셨던 모든 능력을 지니고 것입니다.


영생체와 능력을 지닌 성도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완전히 개발하고 사용하며 

하나님의 땅을 정복하라 하신 문화 명령을 완성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존재를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발휘할 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때문에 마귀에 눌려 연약함 가운데 살게 되었지만 능력을 

회복한 때는 영의 세계도 물질세계도 관장하며 살게 것입니다.


인간의 완전한 완성 모습으로서의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희년의 마지막 목적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믿어 우리 모두 희년의 완성에 동참하는 

택함 받은 자들이 같이 되십시다.







“율법과 복음” 
[마 5:17]



오늘날 신앙생활의 특징은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신으로 마감하는 풍조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은 깊어지면 더욱 주님을 닮아가야 하는데 
반대로 세속을 닮아 가는 이유는 
신앙이 세상에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죄의 뿌리는 깊고 
신앙의 뿌리는 얕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본래 신앙의 뿌리는 하나님께 있었고 
죄의 뿌리는 마귀에 있음으로 
당연히 신앙은 죄의 뿌리보다 깊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신앙의 뿌리인 하나님을 제대로 찾게 하여주지 못할 때 
신앙은 표류하게 됩니다. 

왜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날까요? 

이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살펴봄으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셨을 때는 
인간의 삶의 기준은 양심에 있었습니다. 

양심은 하나님의 속성을 닮은 마음으로 항상 기준이 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바른 양심만 가지고 산다 하여도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지 속에 죄가 들어오면서 
하나님의 영이 떠난 영속의 양심은 
비대해진 죄성의 혼에 눌리면서 
올바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혼의 의지가 선악을 구분 할 수 있는 법을 
아스라엘 민족을 택하여 수여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한 
인간은 다시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었는데 
육신 속에 욕망이 죄의 중독으로 커지면서 
도저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타락한 죄인의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자력으로는 양심도 계명도 지킬 수 없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보내어
죄인 된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면서 
죄인의 신분을 바꾸어주시고 
이에 맞는 새 기준인 복음을 내려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신앙은 복음의 시대가 된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은 죄 씻음을 받았고 거듭났으며 
성령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사는 
거룩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이 것이 하나님의 뜻이자 구원의 완성 계획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듭난 것은 영이요, 
혼과 육신은 양자로서 붙어 갔다는 데 있습니다.
즉, 거듭난 영 속에 죄성과 
욕망이 한 지체 속에 머물고 있는 현상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사역 중에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사역이 바로 “성화 사역”입니다. 

성령님은 육신의 소욕은 다스려 주시지만 
혼의 죄성은 진리를 가르쳐 주심으로 
개심하도록 인도하여주십니다. 

이 같은 성화과정에서 
성도인 우리들은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계명에 비추어 
더욱 죄에서 떠나 성결의 자리로 나아가야만 하는 
우리들의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1. 율법의 역할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기준”
율법이 있기 전에는 양심이었으며
율법이 수여된 후로는 계명이었습니다.

죄는 양심보다 강하고 죄성은 본성보다 강하기 때문에
인간은 한번 죄에 중독된 이상 죄가 인간의 삶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을 택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셨는데
이들이 번성하기 전까지는 노예라는 신분과 환경으로 
죄 된 생각과 죄 된 욕망이 분출되지 않도록 
바로 왕의 압제로 막아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출애굽을 하면서 자유를 누리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야 할 하나님 나라의 법이 필요하였습니다.

이를 율법을 모세를 통하여 내려주셨는데
이것은 크게 세 분야로 나눠집니다.

[1] 도덕법
이는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지켜야 할 
기본적 윤리강령입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십계명이며
이 계명은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따른 것이므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지켜야만 하는 불변의 법입니다.

[2] 의식법
종교생할에서 지켜야 할 제사법과 성결법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짓게 하시고
여러 가지 제사법과 제사장 및 성도들의 행실 등을 규정하여
하나님께 나오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의식법은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여 오시기 전까지 예표하는 의식이므로
주님께서 오신 다음에는
실질적인 제사의식은 바뀌어지게 되었습니다.

[3] 시민법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바른 규범으로 주어진 것으로 
재산법, 결혼 및 이혼법, 보상법, 민사 형사재판법…… 등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법은 시대와 생활 수준에 맞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과학, 문명, 인구, 문화, 제도가 바뀜에 따라
변동되는 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이 다소 변경될지라도 
그 법에 담긴 원리나 기준만은 계속 적용되어야 바람직한 법입니다.

이 같은 성문법 외에도 
유대인들에게는 소중히 여기는 구전법인 “미쉬나”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모세가 아론에게 구전으로 전하고 
아론이 그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그리고 12 지파에게, 
선지자들과 교법사들에게 전하여 내려온 것입니다.
마지막 구전의 완성은 
힐렐의 가문에서 오랜 구전을 성문화한 것으로 
주전 66-70년 경 유대민족의 전통으로 확립되었습니다.

이 구전은 바리새파의 소산으로 
바리새인들은 이 구전까지도 철저히 지킨 율법주의자들이 되었습니다.



1) 율법은 죄를 구분하고 죄인을 형벌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율법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을 정의롭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로 세우며 
보존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있기 전 백성들은
무엇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죄가 되며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는지를 잘 알지 못하였으나
도덕법, 의식법, 시민법을 통하여 
올바른 신앙생활과 삶의 바른 규범을 알고 지키게 된 것입니다.

또한, 이를 어겼을 경우 
율법의 판결은 매우 엄중한 것으로서 
형벌의 두려움으로 범죄를 예방하는 역할을 동시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법이 범죄를 다 몰아낼 수 없듯이
구약시대에도 죄는 날로 늘어갔으며
이후에는 법을 집행하여야 하는 지도자들조차 타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오늘날에도 법보다도 주먹이 앞서듯 
과거에도 법보다는 욕망이 앞선 인간의 연약함을 볼 수 있습니다.

약이 많아지면 병도 많아지듯이 
율법도 많아지면서 죄도 더욱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자력으로는 죄를 다스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2) 율법은 세상 최후의 심판 때 회개하지 않는 자들의 정죄에 대한
절대적 기준의 역할을 합니다.

율법은 심판주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수여하신 것이기 때문에
마지막 심판 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성도들은 주님의 보혈로 죄를 용서함 받았기 때문에 관계가 없지만 
충분히 회개치 않은 자들이나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살지 못한 성도들과 불신자들은
율법의 기준에 의해서 죄가 규명되고 심판 받게 됩니다.

특히, 십계명은 심판의 주 된 기준이 될 것입니다.
십계명을 모르고 살고 있는 불신자들은
탐심의 우상숭배로 인하여 큰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믿는 자들 또한 탐심이 우상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2.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


율법은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은혜의 계시였으므로 
죄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를 알려주는 반면 
죄의 대속은 동물의 제사법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본인의 죄는 완전히 씻음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사함과 구원 면에서 율법은 일시적일 수 밖에 없으며
죄가 더욱 증가함에 따라 
율법으로는 더 이상 죄의 문제를 처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필요가 있게 되었으며
죄를 짓지 않게 하기 보다 죄 자체를 끊어버려야 하는 
구원대책이 절실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죄인 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심으로
의의 자녀로 신분을 바꾸어 주셨으며
짐승의 피로 제사 드리던 율법의 제사법을 폐지하시고 
스스로 제물이 되어 우리의 죄를 속죄하신 것입니다.

처음부터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다면 좋았을 텐데
하나님께서는 왜 구약의 율법시대를 지나게 하셨을까요?

이는 인간이 발전되어가는 변천과정에서 죄도 따라 발전 및 변천되어지기 때문에
시대 및 환경 속에서 짓는 죄가 무엇인지를 구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죄와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을 깨달았을 때 
구원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바라보게 되며
형벌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아야 구원의 고마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자체는 구원을 주지 못하지만 
인간의 정죄의 당위성과 구원복음의 필요성을 인식시켜 
복음으로 인도하는 인도자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한 역할을 다한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의 시작은 율법의 한계에서부터 출발되며
죄사함과 구원의 완성은 천국을 계시하여 주는데 
무척 희망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의 성도들의 삶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또한, 천국에 들어올 경건한 자들을 
정한 숫자가 차기까지 얻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들어와 구원받을 자의 숫자도 거의 찼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한 자들이 많이 생기자 
천국에 대한 계시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애굽에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나라로 계시가 되었듯이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천국이 진정 성도가 살아야 할 곳으로
계시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가나안 땅에서의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의 지켜야 할 법이라면 
복음은 천국 백성들이 지켜야 할 수준 높은 은혜의 법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서 
세 가지 단계를 통과하여 구원에 이룰 수 있게 됨을 봅니다.

[1] 율법 이전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에는 범죄하면서도 죄를 깨닫지 못하고 
양심의 가책만 받고 있었습니다.

[2] 율법이 주어짐
율법이 주어짐으로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죄를 짓지 않으려 시도하지만 
절망 속에 빠져 구원의 상태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3] 율법의 완성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율법에서 자유를 얻고 
의인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율법의 방법은 행함이었으나 
인간의 행위가 온전치 못함으로 복음의 방법 안에서 
믿음으로 율법의 완성이신 주님의 혜택을 값없이 입게 된 것입니다.



3. 율법과 복음의 조화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유지시켜 줍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구약의 “심판의 하나님” “사랑의 아버지”가 되었으며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의 “영적인 신랑”이 되셨습니다.
은혜의 시대가 왔으므로 모든 법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율법을 폐지, 또는 
무용지물로 여기는 신앙풍조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점점 자녀들은 방자하게 되었고
웬만한 죄는 회개하면 모두 용서해 주신다는 
하나님의 관대함만을 의지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복음의 진수는 
사랑과 은혜 안에서 자발적으로 율법을 수행해 나가는 
하나님의 자녀 로서의 삶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산상수훈 은 은혜의 율법이고
주님의 두 계명은 십계명의 요약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한다면 
이는 자유주의적인 신앙관이나 세속주의적인 기복신앙
추구하는 사람들의 신앙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모세가 기준이었습니다.
모든 백성은 모세의 수준까지 자라나는 신앙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기준이 되십니다.
아무리 모세의 신앙과 인격이 훌륭하였다 할지라도 
주님에 비하면 한낮 죄인 된 인간에 불과합니다.

율법의 표본이 모세인 반면
은혜의 표본이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들은 모세의 표본을 넘어서 
주님의 표본에 이르러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율법이 하나님의 백성의 조건이 되었지만
신약에서는 율법은 성화 가운데 이미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결의 자리인 성화 속에는 
율법의 요구가 이미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복음과 따로 폐지되어야 할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라 
복음 속에 기본으로 포함된 사랑의 준수사항 으로 지켜지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이 그 속에 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의 준수 요구로부터는 면제받았으나
율법의 정신만은 우리 삶의 지표로 삼아 
자율적으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겨야 합니다.

복음의 축복 속에서의 신앙의 타락은 
율법의 정신을 잃어버린 데서 오게 되는 결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랑이시지만 
언제나 한 손에는 가 들려져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매는 율법에 의해서 징계로 내려집니다.

이를 알려주시고 올바른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성령님 이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과제는 우리를 주님의 닮은 영화의 수준까지 올려놓는데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셨고 
복음은 예수님을 주셨으며
율법과 복음을 합하여 구원의 완성을 이루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구원을 넘어서 성화를 이루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같이 되십시다.





신약의 여선지자 안나 
[ 2:36]



1. 인적 사항


안나는 히브리어의한나 해당되는 헬라어 이름으로 
 
뜻은은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야곱의 여덟 번째 아들인 아셀의 지파의 후손으로 
 
그의 부모는 마누엘로 이름은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고 
 
곳에 붙인브니엘이라는 ( 32:30) 지명에서 나온 이름으로 
 
뜻은하나님의 얼굴 이라는 의미입니다.

예로부터 아셀은 미녀지파로 
 
흔히 왕비나 대제사장의 아내가 배출된 지파인 것으로 보아 
 
안나 또한 믿음과 미모를 겸비한 여인으로 여겨집니다.

당시 유대인 처녀들은 14세를 전후하여 결혼식을 올린 것으로 보아 
 
안나의 나이는 105 정도였을 것이며 (14+7+84=105)\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하는 그녀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언의 은사를 주심으로 
 
예루살렘에서 여선지자로 ( 2:36)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과부로 지내온 84 동안을 오직 성전 뜰에 기숙하면서
 
성전에 필요한 일이 생기면  일에 언제나 솔선수범으로 
 
나서서 일을 했던 일꾼으로 보입니다.

구약 말라기 이후 300 이상 예언의 영이 끊어졌으나
 
하나님의 영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의 구속을 기다리던 모든 자에게 
 
예수님의 초림을 처음 증거하는 여예언자가 되었습니다.


2. 시대적 배경


B.C.1세기 유대가 헬라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독립시대를 지내다가 
 
다시 로마의 식민통치하에 들어간 시기는 혼란에 혼란을 거듭 시기로 
 
당시 이스라엘인들은 종류로 나누어 종교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부류는 바리새인들로서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대하며 로마의 압제로부터의 해방과 
 
장차 열방에 군림하는 나라로 만들어  
 
탁월한 지도자로서의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부류는 사두개인들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현실에 당면한 유익과 이득만을 누리고 살려는 집권층들이 있었는가 하면, 
 
마지막으로 시므온, 안나와 같은 소수의 경건한 사람들은 
 
구약에서 예언한대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여 
 
영생으로 인도할 메시아를 기대하는 사람들로 나눠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정치적, 종교적으로 암울한 상황 속에서 
 
유대인들에게는 자연히 종말론적 메시아 대망 사상이 크게 무르익게 되었으며 
 
구약의 예언의 성취를 간절히 기다리는 분위기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성령님께서는 경건한 사람 시므온과 안나에게 임하셔서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계시하여 주셨으며 
 
시므온이 아기예수님을 보고 찬미와 예언을 한대 이어 
 
안나를 통하여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증언케 하신 것입니다.


3. 안나 선지자의 신앙 생활의 특징


1) 경건한 신앙 생활을 여인이었습니다. [ 2:37]


그녀는
결혼한지 7 후에 과부가 되었는데 
 
이후로 84 동안을 성전 중심의 생활을 하여왔습니다.

그녀의 생활의 특징은 금식과 기도 생활이었는데
 
대부분 특별한 믿음으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하는 생활을 하였으며 
 
기도는 하루에 번을 정규적으로 드렸습니다.

번째는 오전 9, 번째는 12,
 
번째는 오후 3 번을 드렸으며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는 공식 기도시간이었으나
 
해질 황혼 무렵에 한번의 기도 시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같이 주에 금식하며 하루에 번씩 기도 생활한다는 것은 
 
보통 신앙인들로는 없는 특별한 신앙행위이며
 
이는 다니엘과 같이 어려운 포로생활에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섬겨 
 
하루 기도했던 모습에서도 이어지고 있음을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이와 같이 세월 동안을 규칙적인 신앙생활을
 
날마다 있었던 것은 메시아를 대망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동기가 있을 열심히 하나님께 구하게 됩니다.
 
아니면 특별한 은총을 만났을 하나님께 꾸준히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전자는 안나 선지자의 경우요
 
후자는 바벨론 총리가 다니엘의 경우입니다.

오늘날 신자인 우리들에게는 참으로 
 
실천하기 어려운 경건한 신앙 자세가 아닐 없습니다.
 
안나 선지자는 중보기도 용사로서 백성과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를 보내어 주시기를
 
평생을 기도한 여인이었습니다.


2)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한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 2:38]


당시 예루살렘에는 소수의 경건한 무리들이 메시아를 기다리며 
 
함께 기도하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에서도 안나 선지자에게 성령님께서 임하심으로
 
아기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녀에게만 알려주셨을까요?
 
그것은 메시아에 대한 그녀의 간절한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누구나 믿음을 가지고 있고 누구나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항상 중에서도 선택하는 사람이 있으십니다.
 
선택의 동기가 믿음 위에 충성입니다.

믿음은 충성심으로 진위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
101:6] “ 눈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


이로 신앙생활은 믿음과 함께 충성심이 있어야 함을 수가 있습니다.
 
안나 선지자가 초림의 예수님을 평생 기다려 만날 있었다면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재림의 예수님을 평생을 기다려 뵈올 있도록 
 
충성된 신앙생활을 하도록 성령님께서는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안나 선지자가 예수님을 뵙고 몹시 흥분되어 
 
자기의 동료들에게 메시아가 오셨음을 증거할 때와 같이 
 
우리들도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벅찬 기쁨으로 증거할 있는 기회가 
 
나에게도 주어지기를 기다리며
 
신앙생활을 해야 함을 본받게 하여주는 예입니다.


3) 안나 선지자는여호와 이레예비의 하나님을 체험한 신앙의 여인입니다.


요즘과 같이 사회 보장이 되어있지 않았던 옛날에는
 
고아와 과부는 사회에서 가장 불쌍한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더구나 홀로된 여인이 생활할 있는 수단은 거의 전무한 때였으므로 
 
길은 정말 안나 선지자에게는 막막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의식주를 해결하러 세상으로 나가지도 아니하였고
 
자기의 미모나 젊음을 의지하여 살지도 않았고
 
오직 하나님께 나가 의지함으로 성전 중심의 신앙 생활만을 지속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아픈 마음과 의로움을 위로하여 주셨고
 
예언의 은사를 내려주시므로 여선지자로서 추앙을 받게 하셨습니다.

인생에서는 대개 부와 가난, 신앙과 세상, 
 
그리고 거룩과 욕망의 갈림길 번을 통과하여야 함을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과 자신의 의지하는 것으로 선택을 하려 합니다.
 
그러나 안나 선지자는 세상의 것들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84 동안을 예비의 하나님을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안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그녀는 보게 되었고
 
깨달음을 전할 있는 권능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모든 생활이 공급받게 하신 것입니다.

육신의 양식을 구하는 자에게는 
 
끝없이 양식을 구해야만 하는 노동만이 주어지지만 
 
영생의 양식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성과 능력이 주어져서 육신의 양식을 구한 자들로부터 
 
공궤를 받게 함을 안나 선지자를 보고 깨달을 있습니다.

안나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신을 찾는 자에게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심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이 증명된 삶인 것을 있습니다.
 
일개의 과부 여인이 84 동안을 성전 중심의 신앙 생활을 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신앙이 과연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복도 아니요, 건강도 아니요, 성공도 아니고
 
그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하나님께 상달될 때에 
 
나의 생활의 문제는 저절로 풀려질 뿐만 아니라
 
우리도 모르는 하나님의 은사와 능력이 주어져 
 
더욱 진리의 세계를 증거할 있는 영권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심을 
 
안나 여선지자를 통하여 배울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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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7.11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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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7.11 00:52



재창조
[사 65:17] 


하나님은 존재의 근원이시고 모든 의미의 마감이십니다. 
 
그러므로 창조는 존재의 발생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그 안에는 존재의 의미가 담겨져있어 그 의미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반영될 때까지 진행하는 것이 \
 
창조의 목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창조의 주된 의미는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인간의 존재를 
 
얻기 위함임으로 인간을 중심으로한 만물들이 
 
보조로 지어진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영원을 기반으로 창조되어진 만물들은 하나님의 신성을 드러내며 
 
사랑의 아름다운 조화가운데 인간과 더불어 공존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그들의 존재 의미이며 인간에게 
 
하나님의 속성을 더욱 표현하여 줌으로 하나님의 
 
신적인 속성을 개발 할 수 있도록 보조역할을 하는
부가적 목적의미를
 또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지음 받은 인간은 부여되어진 영생의 기간 
 
속에 무한히 진정한 존재의미를 더욱 깊이 깨닫고 
 
하나님의 의도하신 수준까지 자라나야만 하는 
 
의무와 축복이 함께 주어져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1. 창조가 영원히 존속할 수 없게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6일동안 하루하루 새로운 것을 창조하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가 모두 만족하게
 이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마지막날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셨음으로 창조의 총 하이라이트는
 인간 창조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기대를 걸었던 인간은 하나님의 의도와는 반대로
 
 
불순종과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깨뜨리고 말았으며 
 
이로 인한 저주는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이 모두 고통 속에 
 
죽음을 맞이하는 저주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롬 8:22]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맞지 않음으로 
 
죄로 오염된 이 세상은 모두 사라지고 하나님의 또 다른 은혜의
 
구원을 통하여 거룩한 영적 자녀가 된 인간들과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새 창조가 요구 되어집니다.  


2. 재 창조로서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곳일까요?


헬라어에서 새로운 것을 의미한 단어에는 
 
시간적으로 새로운 것을 의미하는 "네오스"와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의미하는 '카이노스'가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 21장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재 창조에 쓰여진 
'
새로운 '이란 말은 '카이노스'라는 단어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재 창조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의 변형이나 갱신이 아니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새 질서의 창조를 의미합니다. 

'카이노스'로 표현된 새 하늘과 새  땅은 죄악과 사망과 
 
고통이 지배하던 현재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구원받은 
 
거룩한 성도들만이 살 수 있는 깨끗한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호크마 요한 계시록 21장 강해)

또한 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성격은 이사야 65:17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1)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곳입니다.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사 65:18]


인간은 죽음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슬플 수 밖에 없고 
 
질병과 배고픔으로 인한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모두는 죄로 인한 저주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이런 것에 대하여는 기억되거나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사 65:17]하십니다. 

그 이유는 내가 완전한 환경에 알맞도록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으니 죽음이 없고 저주가 없으니 배고픔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 땅에서 살면서 누구나 '파라다이스'를 꿈꾸며 삽니다.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은 인간이 그리는 파라다이스와 같은 곳입니다.
 
더욱 나아가서는 성령의 열매로 신령한 성품이 된 성도들과 
 
기쁜 교제를 하는 곳임으로 낙원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2) 마음껏 하고싶은 활동을 하며 지낼 수 있는 곳입니다. [사 65:21-22]


인간의 기쁨은 배불리 먹고 건강한데 있는 것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에 더욱 기쁜 보람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대개 천국에 가면 하루종일 먹고 즐기고 노는 곳이라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천국에서도 우리의 할 일은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일을 우리도 맡아 분담하여야하고 
 
또한 자신이 살고 있는 거처나 주변도 내가 관리하여야만 합니다. 

즉 내가 가장 좋아하는곳 으로 거처를 정하고 숙소를 만들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환경에 천국 양식을 가꿀 수도 있습니다. 
 
백배로 수확되는 천국의 맛있는 열매를 재배해서 먹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서로 나누어가며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지낼 수도 있습니다. 
 
이웃과 어울려 더 좋은 공동 놀이터를 개간할 수도 있습니다. 

천국의 재료들로 지어지는 건물과 도시는 망치와 못으로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능력에 의해서 
 
말과 능력의 손재주만으로 지어질 것입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이겠습니까? 

우리도 하루 일이 끝날 때마다 
 
 "보기에 좋았더라."하면서 지낼 것입니다.  


3) 신령한 교제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v.25)


이 땅에서는 인간과 인간과의 교제만 가능합니다.
 
 
다른 생명체와는 충분한 교제를 할 수가 없습니다. 

더우기 물질의 교제의 한계는 
 
영이신 하나님과의 교제가 실질적으로 불가능한데 있습니다. 
 
그러나 새하늘과 새땅에서는 모두가 신령한 존재가 됩니다. 
 
같은 세계에서 같은 이해와 같은 사귐이 있는 
 
고차원의 존재들로 변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과도 보고, 듣고, 모시고, 대화하고, 기뻐하고
또한 각종 천국의 영물들과도
 대화와 그들의
재미있는 속성을 사귀며 나눌 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실 때는 그들 속에 하나님의 천만가지 아름다운 
 
속성 중 한 가지 씩을 다 넣어주셨기 때문에 서로 좋은 속성들이 나타나면 
 
신기하기도, 기쁘기도 하면서 서로 공유 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동물들을 먹이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며 
 
동물들은 인간을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다같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피조물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화평은 사랑할 때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사랑의 범주와 높이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의 범주까지 
 
이르러 만물을 품에 안을 수 있는 화평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3. 재창조 되어지는 새 하늘과 새땅은 천국과는 다른 곳입니다. 


현재 현존하는 천국은 영혼의 중간기 쉼의 처소로서 
 
하나님께서 재창조하시기 전까지 머무는 장소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백보좌 심판이 시작되면 이 땅도 하늘도 모든 세계도 
 
다 없어지고 오직 우주 공간에 심판대만 놓이게 됩니다. (계20:11)

하나님의 모든 심판이 죽은 자 산자를 막론하고 다 이루어지면 
 
그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어 생기게됩니다. 
 
그동안 죽은 자들은 천국 또는 지옥에 머물러 있었으나 백보죄 심판을 거쳐 
 
죄인은 영벌의 장소로 성도는 새 천지로 옮겨갈 것입니다. 
 
이때 성도들에게 오는 변화가 완전 신령한 영, 횬, 육으로의 부활의 변화입니다.

 우리가 현재 죽어 구원받아 천국에가도 신령한 존재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다만 부족한 것이 있다면 육신의 부활이 함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과,
 
영혼이 죄성으로 인하여, 완전 영화 단계를 이 땅에서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천국엘 가기 때문에 성령님이 완전히 임하실 완전 충만은 
 
다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백보좌 심판시 모든 영혼이 다시 부활의 모습으로 설 때에는 
 
첫째, 부활을 이루며 살았던 천년 왕국의 존재시보다 
 
더욱 완전한 신령한 모습의 존재가 되어 살 것입니다. 

이전까지의 천국의 개념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까지 
 
구원받은 영혼들이 모이는 낙원이며 재림시 사탄을 결박하여 
 
무저갱에 가두고, 주님을 죽도록 충성한 성도들이 
 
다시 주님과 더불어 이 땅에 천년동안 통치하러 
 
내려올 때까지의 머무는 처소란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이에 하나님의 백보좌 심판이 끝나면 마귀와의 싸움도, 대치도 없어지기 때문에 
 
영원히 마귀의 존재가 나타나지 않은 세계, 그 세계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며 
 
죄가 영원히 없어지는 세계가 바로 재창조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4. 재창조의 주역은 예수님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지는 사역입니다. 


태초의 천지창조는 하나님께서 주역이 되어 이루어진 사역이며
 
 
성자와(요1:3)성령은(창 1:2) 이 일에 동참하시어 이루어진 사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재창조는 구원 사역의 연장이자 완성임으로 구속 사역의 주인공이자 
 
집행자이신 예수님께서 주관하시는 사역이 될 것이며 성부 하나님은 
 
심판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시며 성령님께서는 
 
온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사역으로 동참하실 것입니다. 

특히 재 창조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탄과의 
 
영적 전투와 처벌 문제가 선행되어야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하심과 사탄을 영원히 지옥에 가두는 사역을 
 
직접 지휘하시는 분인 예수님의 최종사역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성도들의 각 행위에 따라 상금을 주실 것이요,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통하여 신부된 성도들과 새하늘과 새땅에서의 삶을 
 
함께 영위해 나가시는 신랑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환경도, 사역도, 
 
유업도 함께 관여하실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계획하시고, 

성자 하나님은 실천하시고, 성령 하나님은 모든 것을
새롭게 완성 하시는 일로
함께 동참하실 것입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이 땅에서 우리에게 지상 사역으로
 
구원을 보여 주셨지만 그것은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사명의 일부에 속한
작은 일에 
불과할 뿐이며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회복하신 예수님은 
 
천상 사역의 거대한 프로르렘을 진행하시고 계신 영의 세계의 주인공이십니다.   

성도는 구세주 예수님만을 국한하여 주님을 섬기기보다 우리 사후 세계의 
 
총 주인공으로서의 재창조 주역으로서  주님을 기대하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5. 재 창조에 대한 소망을 갖고 사는 성도들의 자세
 

1)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며 살아야합니다. (벧후 3;11)


우리는 약혼한 처녀와 일반 처녀와는 사고와 행실이 다른 것을 보게됩니다. 
 
그 이유는 약혼한 예비 신부는 신랑을 생각하고 시댁을 생각하고 
 
시댁의 분위기와 수준에 맞추어 살아야 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기쁨은 그녀의 소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모두 예수님의 예비된 신부들입니다.
 
주님의 수준으로, 천국의 분위기로, 새생활을 할 수준에
맞게 지금부터 준비해야만합니다.
 
 
결혼이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듯,
천국도 죽으면 그냥 가서 사는곳이 아닙니다.
 

가야할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의 삶입니다.
 
 
세상을 사랑할 때, 신부의 신분은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그리며 살아야합니다. 

  

2) 예수님의 은혜와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합니다.(벧후3:18)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는 것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는 서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전자는 체험을 주로 여기면서 느껴지는 감정이고, 
 
후지는 주님에 대한 모든 말씀을 읽고 지식적으로 깨달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사랑하는 연인을 만날 때 성숙하게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을 버릴 수 있는 희생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극치는 자신의 포기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자신을 포기하신 분이십니다. 
 
그같은 사랑을 느끼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 십자가를 바라보아야합니다. 
 
6시간을 고통중에 달리시어 돌아가시는 모습을 항상 기억하고 살아야합니다. 

또한 지식은 인간을 성장시킵니다. 인간은 양식으로 
 
성장되는 아니라 지식으로  성장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격체이기 때문에 인격이 모자라는 육신은
 
아무리 커도 어린아이로 취급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의 겉사람은  커도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속사람은 
 
여전히 어린아이라 영적인 구실을 제대로 하지못하고 있음을 봅니다. 

 사람은 관심 있는 것에 대하여 파악을 제일 많이 하게됩니다.
 
현재 우리의 관심은 세상입니다. 따라서 죄악이 성장 할 뿐입니다.   
 
그러나 새 하늘을 바라보는 성도들의 관심은 주님이어야 합니다. 
 
그때 성령의 열매와 은사로 신령하게 자라나게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을 구세주로, 주인으로, 
 
세례주로, 신랑으로, 심판주로, 사역의 주관자로, 재림주로, 인도자로, 
 
처소 예비자로, 영적 전투의 대장으로, 영생을 주시는 분이요, 
 
상주시는 분으로, 스승이요, 재장조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부적으로 깨닫고 주님과 함께 동참하며 살 때, 
 
재창조에 대한 성도들의 바른 신앙적인 삶이 될 것입니다. 
 
다같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으로 바른 신앙관을 정립하고 
 
사는성도들이 다같이 되십시다.  











 




용단의 여인 리브가 / Rabecca 
[
창24:58]


1. 인적사항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의 아들 브두엘의 딸로서 
 
이삭과는 오촌간이며 그의 아내가 된 여인입니다. 
 
그녀의 이름의 뜻은'고리'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언약의 
 
혈통을 잇는 역할을 한 인생을 살았으며 이삭과의 사이에서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을 낳은 어미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메소포타미아 출신으로서 오빠 라반의 두 딸인 
 
레아와 라헬을 아들 야곱의 아내로 맞아 들임으로 고모이자 
 
시어머니가 된 여인입니다. 

20살 전후의 아름다운 미모를 갖춘 순결한 그녀는 그 당시 
 
40세인 이삭과 결혼함에 주저없이 승낙한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2. 리브가의 생애


아브라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갈대아우르를 떠날즈음 
 
아버지 데라는 두 아들중 나홀만 데리고 함께 아브라함과 같이 떠났는데 
 
이는 큰 아들인 하란이 일찍 죽어 그의 아들 롯을 자녀가 없는 아브라함이 
 
길렀기 때문으로 데라와 나홀 가족은 메소포타미아지역 \
 
하란에 머므르게 되었습니다. 

그후 데라가 죽자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떠난 후 
 
나홀은 형 하란의 딸이자 자신의 아내가 된 밀가 사이에서 브두엘을 낳아 
 
하란에서 살다 죽었으며 브드엘은 라반과 리브가를 낳고
 
메소포타미아 땅에서 정착하여 부유한 기반을 갖춘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B.C. 2046년경에 태어난 리브가는 가사를 열심히 돌보고 
 
쾌활하고 적극적인 성품을 지닌 여인으로 성장하였으며 
 
아브리함이 보낸 종 엘리에셀(창 15:2)울 통한 이삭의 청혼 소식을 듣고 
 
믿음으로 그를 따라 가난안 땅으로 떠났습니다. 

이삭과 만나 결혼 후 (B.C. 2026)20년동안 자녀없이 지내왔으나 
 
꾸준히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40세가 되어 하나님의 응답으로 
 
쌍동이 아들인 에서와 야곱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 첫 흉년은 
 
아브라함시절(B.C.2090년경)이었으며 
 
아브라함이 사라를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가 
 
흉년은 면하였으나 사라를 누이동생이라 부르게하여 
 
바로왕에게 아내를 빼앗겼던 수모를 겪은 사건과 비슷하게 
 
이삭에게도 대 흉년이 찾아와(B.C.1990년경)할 수없이
 
리브가도 남편따라 팔레스틴땅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애굽으로 내려가지말고 블레셋 그랄 땅에 
 
머므르도록 지시하심을 받고 이삭과 리브가는
블레셋왕 아비멜렉에게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예쁜 자기 아내 때문에 이방 땅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이삭은 아내 리브가를 누이동생으로 주변에
소개하였으며 
리브가 또한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고 지내었습니다. 

이삭이 어느날 리브가를 껴앉은 것을 본 아비멜렉왕은 
 
리브가가 이삭의 아내인 것을 보고 이삭을 질책한 후 
 
자신이 리브가를 범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이는 자신의 선왕시대에 있었던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랄 땅에 머므른 시절에 
 
여전히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동생이라 소개함으로 그랄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하였다가 여호와께로부터 저주를 받아
그의 가족이 자녀생산을 못했던 과거가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고사를 알고 있었던 아비멜렉왕은 그녀를 이삭에게 돌려보내었으며 
 
리브가는 남편의 말에 끝까지 순종한 착한 여인이었습니다. 
 
 
그 후 에서와 야곱이 성장하면서 에서가 40세에 헷족속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자 근심이 된 리브가는 아들 이삭을 
 
위해 배우자를 얻도록 하란으로 보내기를 이삭에게 종용한 후,
 
단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빼앗고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채어 형에서의 분노를 사고있는 야곱을 하란으로 피신 시켰습니다. 

허나 결국 리브가는 야곱을 31년간이나 보지 못하고 떨어져 살다가 
 
야곱의 나이 108세가 되어 이삭에게로 돌아왔을시 그녀는 이미 죽어 
 
가족 묘인 막벨라굴에 안장이 되었습니다. 

그녀가 죽은 후 이삭은 야곱과 12년간을 더 살다가
180세의 나이로 죽었으며
 그역시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습니다. 
 
 
리브가는 이삭의 정실 부인으로 또한 이삭은 리브가의 오직 남편으로 
 
두 사람의 급실은 아주 좋았으며 평생 둘만의 부부가 되어 사랑을 나누고 산, 
 
그리고 리브가는 남편에게 아주 사랑을 독차지한 여인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3. 리브가의 믿음 생활의 특징


1] 천한 일도 즐겨서하는 봉사정신이 특출한 여인이었습니다.(창 24:47)


[창24:16] "그 소녀를 보기에 심히 아름답고 …"


그녀의 미모는 뛰어날만큼 예뻤습니다. 
 
대부분 인물이 예쁜 여인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유지하기위하여 
 
집안일을 하지 않을 뿐더러 더우기 우물가에 물을 길어 오는 일은 하인이나 할 것이지 
 
주인 아가씨가 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리브가 에게는 자신의 유모와 집안에 
 
일꾼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물길어오는 일을 즐겨하였습니다. 

더우기 우물가에서 만난 낯선 사람의 짐승 낙타에게까지 물을 먹인 
 
선행은 관대한 마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본래 낙타란 짐승은 한번 물을 먹기 시작하면 엄청난 양의 물을 먹고 
 
저장하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 소비와 고생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댓가 없는 선행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마음임으로 일찌기 
 
집안에서부터 베풀어온 행위가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 
이삭의 아내감으로 선택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리브가로부터 실천하는 신앙생활을  본받아야할 점이 있습니다. 
 
외모의 아름다움은 마음의 아름다움으로부터 선행의 행동으로 나타날 때, 
 
고귀한 아름다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위적인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하기보다 
 
마음이 아름다움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신앙으로 
 
단장하는 여인들이 되어야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즉시 순종하는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창 24:61)


[창24:58] "내가 가겠나이다."


아브라함의 종의 설명을 다 들은 가족들은 이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임을 알고 청혼을 승락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종이 당장 떠나야한다는 단호한 요청에 
 
가족들은 결혼 당사자에게 모두 물어 보기를 원했습니다.

한 번 떠나면 다시는 보기 어려운 부모와 가족들과 마음껏 
 
석별의 정을 나누고 싶은 것이 시집가는 딸들의 공통적인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당장 떠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가족들과 정이 없어서였을까요?  

미래의 남편이 그리워서 서둘러 떠나려고 하였을까요? 아닙니다. 
 
그녀는 아브라함의 종 아비멜렉으로 부터의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것을 믿음으로 깨닫고
 
아브라함의 가정의 훌륭한 신앙과 경건의 또 다른 믿음의 분위기를 느꼈던 것입니다. 

 
신앙이 별로 없는 분위기의 자기 백성들과 아버지의 집을 빨리 떠나 
 
참다운 믿음의 분위기로 속히 가기를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믿음에는 결단력이 따르나 , 현실에는 주저함이 따르게됩니다. 
 
믿음은 항상 현실보다 말씀을 더욱 따르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용기와 결단력이 있게됩니다. 

미련은 믿음을 미루게 만들고, 지연은 환경에 더욱 집착하게 만들어줍니다. 
 
환경을 보는 육신의 눈보다, 미래를 보는 영안의 눈을 뜨고 
 
사는 것이 믿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함을 그녀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3] 참된 믿음으로 인내를 하여 응답을 받은 여인입니다.(창 25:21)


리브가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이삭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런데도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녀를 잉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부사이에 자녀가 없으면 몹시 애가타는 쪽은 여자쪽입니다. 

혹시 내 몸에 이상이 있어서 애를 못 낳는 것인지 아니면 
 
남편에에게 문제가 있는 것인지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옛날에는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이 그져 기다려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이삭은 늘 하나님께 기도하였다고합니다.

그런데 그 기간이 장장 20년이나 되었습니다. 
 
사라는 자녀를 10년이나 기다리다 포기하고 
 
남편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시녀 하갈을 취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그 세월의 두배를 묵묵히 기다립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다릴 줄 아는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배우게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부부의 기도를 들으시고 20년만에
 
 
그들로 자녀를 잉태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잉태하면서도 문제가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뱃속에 이는 태아들이 서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오죽 싸움이 심했으면 리브가가 하나님께 여쭈었겠습니까?

이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큰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태아의 속성까지도 다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한 부모밑에 여러 자녀가 있어도 제각기 성격, 능력, 취미든 모두가 다릅니다.
 
 
이는 태어날 때, 부모의 성격중 에서 한부분만을 이어받기 때문입니다.  
이를 볼 때, 에서 는
 아버지의 여러 성격중 남성다운 활달한 성격을
이어 받았기 때문에
 사냥을 하러 돌아다니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이삭도 그의 이러한 성품을 좋아했습니다. (창 25:28)

그러나 야곱은 이삭의 또 다른 성품 즉, 
 
조용함과 어머니의 믿음의 소중한 성품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복중에서도 이삭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를 리브가는 깊이 새겨듣고 믿음쪽의 아들 야곱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됩니다. 

 

4]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위기를 감수하는 행동을 시행하는 여인입니다. (창 27:8-13)


 이삭의 나이 137세가 되었을 때, 이미 장님이 된 이삭은 자신의 
 
이복형 이스마엘이 137세로 죽은 것을 기억하고
자신도 죽을 날이 다가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장자 에서에게 모든 축복과 유업을 물려주려고
 
 
축복 기도를 받을 준비를 해 가지고 오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때 공교롭게도 이사실을 리브가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을 불러 형처럼 대신하여 아버지께 들어가
축복기도를 
받게하였습니다.

이와갘은 리브가의 행동은 하나님의 말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하신 말씀을
어떻게 해서든지
 실현 시키고자 모든 위험과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감행한 믿음의 용단이었습니다.
 

이같은 거짓말을 통하여 장자권을 야곱에게 이어 주려한 리브가는 
 
큰 실수를 한 것이지만 이보다 이 실수를 유발시킨 것은 바로 이삭이었습니다. 

이삭도 죽을 날이 43년이나 넘게 남았으며 장자권은 
 
야곱에게 돌아갈 것을 리브가에게 들어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앞당겨 에서에게 모든 것을 주려고 서두른데 있습니다. 

이를 볼 때 리브가의 행동은 어쩔 수 없이 행한 것으로 보아야합니다. 
 
결국 야곱으로 축복기도를 받도록 거짓 계교를 꾸민 리브가는 자신이 

말한 "내 아들아 저주는 내게로 돌리라."(창 27:13)한 말에 따라 
 
야곱의 나이 77세때에 자기의 친정 하란으로 아들을 보낸 후 
 
다시는 만나보지도 못하고 죽게되었습니다.

그녀가 죽을 때에 야곱을 한번이라도 보고 싶었겠지만 
 
자신의 믿음의 행동으로 야곱이 가문의 장자권을 갖게 된 것에 
 
기쁨을 가지고 죽었을 것입니다.  

리브가는 인생을 용단으로 시작하여 용단으로 마감을 한 여인입니다. 
 
우리는 그녀에게서 믿음에는 용단이 필요함을 다시 한번 배우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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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자 / Remnant
[9:27-28]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대상은 모든 인간들이지만
그 구원 사역의 전개는 스스로 선택하신
소수의 무리들을 통하여 이루어 나가십니다.

이를 '남은 자 사상'이라고 말하며 첫번 째 이 사건이 드러난 경우는
인류를 홍수로 멸하실 때, 남겨 놓으신 노아와 그의 가족들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이어서 백성들이 다시 이 땅에 번성하자, 아브라함을 택하시어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지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구원 사역이 본격적인 전개에 이르러 선택의 범위를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국한 시키지 아니 하시고
신약시대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한
영적 이스라엘 백성으로 확대하셨습니다.

결국 남은 자들이란 구원 사역의 끈을 이어가는
시대의 고리들로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완성시키며
하늘 나라에 가서는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기업을 유업으로 얻을 자들을 의미합니다. [계 21:7]


1. '남은 자 사상'이란 무엇인가?
 

남은 자를 통한 구원사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창 7:23] "모든 호흡하는 생물들은 다 홍수로 죽고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하신 말씀으로 시작되었으나
구체적으로 사상으로 드러나게 된 것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스알야숩"이라고
부르게 한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사 7:3, 8:18]

왜냐하면 그 이름의 뜻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남은 자란 단어의 구체적인 뜻은 무엇일까요?
 


[1] 남은 자란 어떠한 심판에도 구원 받고 남아 있는 축복된 무리를 가르키는 말입니다. 


(1)'솨알': 총 276회나 쓰여졌으며 이 단어의 기본 의미는 '남겨있다"란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멸망 받지 않고 남겨져 보존 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2)'팔랏': 총 80회 사용되었고 그 기본의 의미는 '구출하다"란 뜻이며
'남은 자란 극도의 심판의 혼란에서 꺼내져 구출받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3)'말랏': 총 89회 쓰여졌으며 그 기본 의미는
'도피하다, 안전을 구하다"
  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한 집단 전체가 멸망되는, 인간의 힘으로는 살아날 수 없는 위기에서
안전하게 도피하여 생명을 건지게된 사람들'
을 의미 합니다.
 

(4) '야탈': 총 110여회 사용되었습니다.
그 기본 의미는 '님기다, 잔류하다" 란 뜻으로 '멸망의 위기에서
생존한 자들에게는 주어진 약속의 축복가운데
머므르는 사람들'
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말들을 종합적으로 요약해 보면
"어떠한 위기와 심판에서도 멸망 받지 않고 구출받아
남아있는 축복된 무리
'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랜드 주석 이사야 10장 연구자료 참조)


[2] 남은 자란 주의 말씀을 이 땅에서 이루고 마치는 일을 할 사람들을 말합니다. 

 

[롬 9:27-28]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게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같을 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서 '필하다'란 헬라어 '순텔레오'란 단어로
'완성하다'성취하다'라는 의미이고
'끝내시리라'란 단어는 '순템노'인데 그 뜻은
'단축하다, 잘라내다'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계획하신 것은 신속히 성취하신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일에 택함 받은 사람들이 시대별로 '남은 자'들입니다.


1) 남은 자들은 씨의 역할을 합니다. 


이사야는 남은 자들을 '거룩한 씨'라고 표현을 하였습니다. [사6:13]
 
씨란 미래의 추수를 위하여 뿌려지는 씨앗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로 씨를 뿌리실 때,
씨는 많은 열매를 맺어야 그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 의해서 증명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심은 씨앗인 그의 자녀 이삭은 430년이 지난 후,
200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오늘날 남은 자인 우리들도 믿음의 아브라함이 되어
나의 씨로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 200만이 넘는 역할을
감당하는 일꾼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이는 이삭을 드렸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는 사람들만이 맺을 수 있는 추수입니다.
 


2) 남은 자들을 예수님을 증거하는 역할울 합니다. 


[께 12: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게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구약에서 남은 자의 특징을 믿음을 지닌 자로 표현한다면,
신약에서는 주님을 증거하는 자가 남은 자의 특징이 됩니다.
 
 
요즈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원과 축복 받는 일에
주로 목적을 두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주님의 명령이자
사명을 잊어버린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분은 예수님 증거와 제자 삼는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의 초청과, 택함 받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교회에 참석한 것은 청함받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는 반면,
천국가는 것은 택함 받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마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하신 말씀도 '남은 자'의 특징을 나타내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증거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자신의 유익을 위한 도움만을
도구로 사용하려는 신앙이 되어 택함 받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의 특징은 영적 전투를 한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자신만의 안일을 위주로 하는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미 자신의 유혹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는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여러 방면으로 공격을 해 옵니다.
특히 환경을 어렵게 만듭니다.

오늘날 남은 자의 자세는 환경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자세를 지녀야합니다.
성령님이 마음에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2. 누가 남은 자로 선택될까요?
 

[1] 우상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자가 남은 자로 선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왕상 19: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명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 한 자니라."
 

 

그 당시 아합왕과 이세벨은 '바알'을 우상으로 섬겼음으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면 고통을 당할 뿐만 아니라,
여호와를 섬기는 선지자들을 모두 잡아 죽였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생명의 위협을 무릎쓰고
여호와를 섬겼다는 것은 충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지켜 나가야할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하나님을 위하여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 중에 가장 버리기 어려운 것이 자신의 생명입니다.

그러나 참 믿음이 들어있는 사람들에게는 육신의 생명은
어차피 버려져야하는 생명이고 영혼의 영생이 참 생명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육신의 생명이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포기의 계기가 되면
기쁜 마음으로 바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람들의 특징이며
오늘날은 주님의 부활의 영이신 성령님이 오셔서
성령세례 체험을 한 사람들의 특징으로 나타남을 볼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자가 남은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롬 11:5] "그런즉 이와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똑같이 사랑하셨기 때문에 출애굽을 시키셨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백성을 삼으려 하셨습니다.
그런데 택함을 받아 들어간 사람은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습니다.
이는 은혜받은 것에서 택함을 받는 사이에는 반드시 은혜 받은 것에
대한 증거가 있어야함을 의미합니다.

즉 받은 은혜를 육신적으로만 만족 할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깨달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감사하고
따르는 행위가 있어야함을 말합니다.

대부분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의 삶의 축복 여부에만 국한 시키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게하는데 있습니다.
사람은, 믿으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면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기적과 이사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기 보다는 자신을 더욱 사랑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모세는 하나님을 자신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40년 광야 생활을 믿음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은혜를 받고 느낄 때 마다 항상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믿음보다 더 커야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사랑의 부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은 삶이 하나님 선택의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남은 자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오늘날에는 세상에 사랑 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자신, 돈, 권력, 자녀, 컴퓨터…등을 들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앞선 것은 선택의 조건에서
제외된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야합니다.
 

한국 성도들은 이 시대에 남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점점 이스라엘 백성이 걸어갔던 길을
가고 있음을 봅니다. 주변에 우상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버리실 수 있습니다.

천국의 본분을 잃어버리고 세상에 안주하려는
기복 신앙을 떨쳐버리고 한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
주님을 증거하는 참된 남은 자들이 다같이 되십시다.
 








겐그리아의 일꾼
/ 뵈뵈(Phoebe}

[롬 16:1]


1. 인적사항


'포이베'라는 '뵈뵈'의 이름은 이방여신 '아르테미스'의 이름인데
그 뜻은 '밝게 빛나다' 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방인으로 기독교로 개종했으나,
이름을 바꾸지 아니한 것은 그 지방에서 재력으로 부유하고
시회적 지위가 높은데다가 상업상 여러 지역에
그 이름으로 관계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녀는 사도바울이 제 2차 전도 여행시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와 더불어
고린도에 교회를 세우고 전도하였을 당시 고린도에서 남 동쪽으로
약 11Km 떨어진 겐그리아 도시에도 복음이 들어가 세워진
'겐그리아 교회'의 여집사로 봉사하였습니다.

과부로서 많은 재산을 소유한 그녀는 사도바울 사역에 조력및
물질적인 지원을 많이 한 여인이었으며 특히 바울의 부탁을 받고
로마서 서신을 로마 교인들에게 전달한 여인입니다.


2. 시대적 현황


A.D. 1세기 중반경에는 사도바울의 제 2차 , 제 3차 선교여행으로 인하여
복음이 아시아 및 유럽 지역으로 확장 되던 시기였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고린도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던 바울은
당시 고린도에 복음 사역이 어찌나 힘들었던지 회당의 유대인들은
그를 훼방하며 대적하고 이방인들의 우상숭배와 타락은
심하기가 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에 밤에 주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행 18:9-10] "두려워 하지 말고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니라."

이에 바울은 디도 유스도의 집에서 1년 6개월 동안 말씀을 강론했습니다.
이 때에 바울은 사역의 정진을 위하여 주님께 나실인의 서원을 하였습니다.
나실인의 서원은 평생 나실인과, 일정 기간만 나실인으로 서원하는 두 종류가 있는데
바울은 1년 6개월 동안을 나실인으로서의 서원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나실인의 세가지 금지 사항은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고,
시체에 근접하기 말며. 머리카락을 자르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이같이 고린도에 머물러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동안
주변도시에도 복음이 들어가 여러 교회들이 세워졌으며
 그 중에 한 곳이 바로 겐그리아 교회입니다.

시도바울은 고린도에서의 전도를 마지막으로
수리아 안디옥으로 귀환 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항구도시 겐그리아로 내려가 배를 타고
에베소를 경유하여 가이사랴에 상륙,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가려 하였습니다.

겐그리아에 들린 바울은 자신의 서원의 기한이 끝났음으로
 머리를 그곳에서 잘랐습니다[행 18;18]. 이때에
교회의 일꾼으로 봉사하고 있었던
뵈뵈 집사의 도움을 많이 받게 되었습니다.

일찌기 겐그리아 교회의 일꾼이된 뵈뵈 집사는
이후에도 A.D. 50-58 경까지 바울의 선교에
물질적인 지원과 조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A.D. 57년 경에는 바울이 서신을 로마에 전하는
귀중한 사명을 받고 그것을 로마 교인들에게 전달한
사명을 감당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뵈뵈 여집사의 역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땅 곳곳마다
하나님의 일군들을 예비하여 놓으셨으며
또한 남녀 모두 각자가 할 임무도 부여하여 주셨음을 봅니다.

그들은 내적으로는 교회의 유지를 책임지는 일군들이며
외적으로는 이방인을 향한 복음사명을 감당하는 사역자들 이었음을 봅니다.


3. 뵈뵈 집사의 신앙특징


1) 교회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일군이었습니다. [롬 16:1]

사도바울이 그녀를 일군이라 칭한 것은
이 일군 이라는 호칭이 제 2세기에 접어들어 집사로 불리워 졌음으로
그녀의 일이 집사의 일을 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여집사는 대체로 과부중에서 피택을 하였고
그들의 임무는 병든자와 가난한 자를 돌보며 ,
순교자와 옥에 갇힌 자에게 지원하고 봉사하며, 교리를 가르치고,
여신도들의 세례식 때, 수종드는 일들을 하였습니다.

교회를 하나님의 가정으로 볼 때, 성도들을 다스리고
말씀으로 양육하고 교회를 운영하는 일들은
주로 장로들에게 주어진 일이지만,

성도들을 가족처럼 돌보아주고, 먹이고, 위로와 권면하고,
사랑으로 따뜻하게 대하여 주는 것은 여성도에게
주어진 일로 볼 수 있습니다.

집안에 어머니가 없을 때, 사랑의 손길과 평안함을 느낄 수 없듯이,
교회에서 여성도들의 봉사가 없으면 관계나 분위기가 메말라 버리고 맙니다.
뵈뵈 집사는 교회 내에서 마치 어머니 같은 역할을 한 일군 이었음을 봅니다.

이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나타나는 주님을 위한 헌신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은 교회 헌신으로 나타남을 봅니다.


2) 로마까지 사도바울의 편지를 전달하는 사명감이 있는 일군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오래전부터 로마 교회를 방문하려는 마음이 간절하던 차에
이제 3차 선교여행을 마쳤믐으로 이를 실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교회를 방문하기전에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여 준비한
구제 헌금을 전달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연을 본 서신에 기록하여
겐그레아교회의 참 믿음의 조력자인 뵈뵈 편에
자신의 서신을 로마교회에 전달하게되었습니다.

실상 여인의 혼자 몸으로 처음으로 가는 낯선 도시에
중대한 서신을 지니고 장거리를 여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믿음의 위인들은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주님의 돕는 손길이 있음을 믿고 실천을 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뵈뵈 집사의 삶은 사업, 소유, 편안, 행복 이상의 삶을 살려고 노력 하였음을 봅니다.
이는 그녀가 자신의 삶을 이미 주님께 위탁드리고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사명을 수행함으로서 주어지는 댓가는 수고, 베품, 위기, 피곤, 고생…등입니다.
이는 주님을 위한 마음일 때만 감수할 수 있지, 자신을 위한 삶일 때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명감을 가지기가 어려움을 볼수 있습니다.

더우기 있는 자, 부족함이 전혀 없는자가 이와같은 일을 한다는 것은
가치를 천국에 두고 살지 않는 한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3) 여러사람의 보호자로 칭함을 받을 만큼 선행을 베푼 일군이었습니다. [롬 16:2]


보호자란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은신처와 양식을 제공해주고,
법의 혜택이나 제도 아래 있지 못한 이방인들이나
나그네들에게 가디언이 되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미 그녀는 이같은 일을 겐그레아 지역의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풀어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사도바울이 그 지역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사도바울과 동역자들 일행을 자기 처소로 모시고
따뜻한 정성으로 대접을 하여 준 것은 물론
사도바울이 지친 마음을 쉬게 하여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녀를 표햔하기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는 말의 의미는
사역의 모든 뒷치닥거리를 도맡아서 해주는 역할과
그 이후에도 지속적인 물질적 지원을 하여 주었음을 의미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을 해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표현하며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신앙의 동기나 목적이 사랑과 축복을 받기 위한
 인본주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의 시각으로는 남을 나와 같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모시고 사는 신앙인은 남을
주님의 시각으로 볼 수 있도록 성령님이 감동시켜 주십니다.

이같은 삶은 이 땅에 얼마나 많은 것을 남겨놓고 천국에 기느냐보다,
천국에 가지고 갈 것을 얼마만큼 이 땅에서 준비하고 사느냐에
인생의 목적을 정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성령님의 감동하심입니다. \

그러므로 베푸는 삶을 옳게 보여주고 산 뵈뵈 집사의 삶을
우리도 본받을 수 있는 성도들이 다같이 되십시다.             




  1. 삭개오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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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08 14:30



   
“사도 바울의 4차 선교여행”
[롬 15:23]


사도바울의 일생을 요약해 보면
A.D. 1년에 출생하여 6세부터 율법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10세가 되자 예루살렘으로 상경하여 당대의 최고의 랍비였던
가말리엘의 제자로 학문과 율법을 공부하였습니다.

공부를 끝낸 후 그는 다시 고향 '다소'로 돌아가 있었으므로
주님의 공생에 기간 동안에는 (A.D. 27-29) 주님을 대하지 못하였다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신흥 그리스도교의 부흥이 일어나자
이단으로 정죄하고 박해에 선두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가 다메섹 선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회심한 때는 A.D. 34년경이며
아라비아에서 3년간의 수양을 끝낸 후 '다소'로 은퇴하여
7년 동안 준비하는 가운데 바나바의 인도로
'안디옥' 교회로 가서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A.D.44)

그 후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선교사역으로
다음과 같이 네 차례에 걸친 선교여행을 감행했습니다.

[제 1차 선교여행]
바나바와 함께 구브로 섬과 소아시아 지역을 1차 순방하였습니다. (A.D. 47-40)

[제 2차 선교여행]
실라와 함께 아시아와 유럽을 전도하였습니다. (A.D. 49-52)

[제 3차 선교여행]
아시아와 에베소를 중심으로 유럽까지 확대된 사역을 하였습니다. (A.D. 53-57)

그 후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A.D. 58)
가이사랴에 투옥되어 2년간 연금생활을 하였고 (A.D.59-60)
그 후 로마로 후송되어 1차 투옥생활을 하다 (A.D. 60-63) 다시 석방되었습니다.

[제 4차 선교여행]
서바나를 거쳐 그레데, 밀레로에서 아가야로 사역하다 (A.D.63-66)
니고볼리에서 다시 체포되어 로마로 후송된 후 순교하였습니다. (A.D.67)


1. 제 4차 선교여행에 대한 근거


사도행전은 사도바울이 A.D.61년 로마 감옥에 투옥된 후,
2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면서 복음 사역을 한 것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행 28:30-31)

그러나 딤후 및 목회서신서를 보면 바울은 1차 감금 후 풀려나서
한 차례 더 광범위한 순회선교사역을 행한 후
다시 투옥된 사실이 제시되어있습니다.

또한 [롬 15:23]에 서바나로 가기를 간절히 사모한 것으로 보아
4차 선교사역은 서바나를 시점으로 하여 시작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세 가지의 예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1] A.D.96년경 로마의 클레멘트의 기록에 나와있습니다.

“그는 동방과 서방에 복음을 전하며
전 세계에 의를 가르치며 서방 경계에 이르렀다.
통치자들에게 증언한 후 그의 믿음에 당연한 명성을 얻었다.
이와 같이 그는 세상을 떠난 것이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여기서 ‘서방경계’란 로마라는 설이 있으나
클레멘트 자신이 로마시민으로 로마에서 편지를 쓰면서
그곳을 서방경계라 일컫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는 '서바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2] A.D.170년경 무라토리 정경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누가는 데오빌로 각하를 위해 이루어진 일들에 관하여
그의 앞에서 상세히 편집하였다.
그것은 두 가지 사건 즉, 베드로의 죽음과
바울이 로마를 떠나 서바나로 향한 일을 같이 생략하면서
상세히 보인 바와 같다.” (Muratorian Canon)


3] 역사가 '유세비어스'의 (A.D.263-340) 증언에 이런 기록이 있음을 봅니다.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고 선교의 여행에 다시 오른 후
이 성에(로마) 두 번째 들어가 거기서 그의 생애를 순교로 끝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 옥중생활 중에 그는 디모데후서를 기록하고
그의 처음 변호한 일과 임박한 그의 죽음에 언급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일단 석방되어
먼저 숙원의 처소인 서방 서바나에 가서 전도하고
다시 동방으로 가 전도하면서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를 기록하고
재차 체포되어 로마에 투옥되어 디모데후서를 기록한 후
순교하였음을 봅니다. (이 상근 목회서신 총론)


2. 제 4차 선교여행의 경로


2년 동안 로마 감옥에서 전도하였던 많은 군인들과 가족들은
바울에게 호의적이었으며 그에게 좋은 정보들을 전하여 주었을 것입니다.
그 중 한 가지가 바울의 석방에 대한 정보였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에 편지를 디모데를 통하여 보내려 했을 때
자신의 일이 곧 잘 풀릴 것 같아서 디모데는 곁에 남겨놓고 대신
에바브로 디도를 보낸다는 서신을 띄었습니다. (빌 2:23-24)

곧 석방된 바울은 디모데와 디도를 동행하고
숙원의 땅인 서바나로 가서 사역을 하였는데
전설에 의하면 그 곳에 2년간 머무르면서 사역하였다고 합니다.

서방전도를 마친 바울은 다시 동방전도를 돌아볼 의향으로
디도와 더불어 그레데를 방문하였습니다.
당시 그레데의 현황은 교회가 상당히 혼란스럽고
교회내의 질서와 바른 신앙관이 결여되어있었으므로 디도를
그 곳에 남겨 장로를 세우고 바른 신앙관과 윤리를 세우도록 하였습니다 (디1:5).

이어서 그는 밀레도를 방문하여 그 곳에 병든 “드로비모”를 남겨두었습니다.
드로비모는 에베소 출신의 바울의 충실한 동역자였으며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울 때 에베소 교인들의 헌금을
예루살렘까지 운반한 자입니다. (행 21:29)

그런데 그가 건강이 좋지 않아 병든 몸이 되자
밀레도에서 요양하며 간간히 사역을 돌보게 하였습니다.

그 후, 골로새와 에베소를 방문하여 '디모데'
그 곳에 남겨두어 그 지방의 전도를 맡게 했습니다. (딤전 1:3)
또한 드로아를 지나면서 그 곳 “가보의 집”에 외투를 남겨두고, (딤후 4:3)
마게도냐를 방문하여 고린도에 “에라스도”를 남겨두었습니다. (딤후 4:20)

참고적으로, 에라스도는 고린도 출신으로 디모데와 한 팀으로
바울의 전도사역에 일익을 담당했던 일꾼입니다. (행 19:22)

그 후 자신은 과동할 예정으로 “니고볼리”로 향하였습니다. (딛 3:12)
그리고 그 곳에서 바울은 로마 관원에게 재차 체포되어 로마로 호송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디모데 전서는 에베소를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
마게도냐 지방에서 디모데전서를 써 보냈으며
'디도서'는 아가야 어느 지방에서 니고볼리로 향할 무렵에 쓴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디모데후서'는 로마 옥에 두 번째로 투옥된 후 기록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과정은 서바나에서 2년과 서방 전도 1년을 합하여
3년간의 사역이 4차 선교여행의 기간으로 보이며 (A.D.63-66)
감옥 투옥 후에 모든 사역을 마치고 순교하였습니다.(A.D.67)

그가 형장을 향하여 걸어갈 때 마치 고향에 가는 사람처럼
환한 얼굴에 기쁜 모습을 하고 갔다고 합니다.
그에게는 천국이 영원한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3. 제 4차 선교 사역의 바울 신앙의 특징


제 4차 선교사역을 마무리 하면서 그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분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하여 권면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은 군사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딤전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딤후 2:3-5]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사도바울은 복음전도를 영적 싸움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수 없이 받은 박해에 근거한 것입니다.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는 반드시 마귀가 점령하고 있는 지역이라서
많은 대적과 해가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먼저 영적 전투에 참여하는
예수님의 모집된 군사로서의 자신의 신분을 확립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면 군사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1] 명령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전투는 항상 상부 전략의 지시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병사는 전쟁터의 상황이나 임무를 알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영적 전투에 대한 상황을 일일이 모릅니다.
다만 명령에 따라 움직일 뿐입니다.

[2] 군사는 충성으로 그 나라를 위하여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이미 영적 전쟁은 주님께서 2천년 전에 모두 싸워 이기셨습니다.
나머지 지역 전투만 우리에게 남겨져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마귀의 세력을 물리치는 사명의 충성은
장차 하늘나라에서의 상급과 훈장으로 보상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면류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인은 후사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디도서 3:7] “무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구원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신분은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1]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

이는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주어지는 신분입니다. (요 1:12)
자녀란 부모 밑에서 주어지는 은혜와 혜택을 입고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구원의 일반 은혜를 받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2] 하나님 아들의 신분

이는 자녀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위하여, 말씀을 지키고 살 때 주어지는 신분입니다.
즉, 원수를 사랑하기까지 자비할 때 아들의 자격이 주어진다고 하였고 (눅 6:35)
온전할 때 아들의 자격이 주어지며 (마 5:48) '화평케 하는 자가 될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습니다. (마 5:9)

자녀는 혈연관계에 의해 성립됩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일을 할 때 주어지게 됩니다.
즉, 하늘에 속한 일을 동역으로 이 땅에서 하고 있을 때
아들의 인정과 대우도 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마지막 단계가 하나 더 있습니다.

[3] 후사의 단계

후사가 되려면 한 가지 더 특별한 조건이 부여됩니다.
바로 “고난”입니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후사는 영광의 존재입니다.
상급인 면류관과 유업인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 받게 되는 상속자입니다.
바울의 신앙관은 후사의 신앙관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세상에서도 일등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에서도 역시 일등인 신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것이 그를 사역에 고난과 위기를 극복하게 만들어 준 동기가 되었습니다.


3) 그리스도인은 승리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딤후 2:7-8]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무든 자에게니라.”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질”'군사의 자질'이지만
“그리스도인의 기질” '경기자의 승부기질을 가져야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 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우리 모두가 다 같은 그리스도인일지라도 구원의 만족도는 다 다릅니다.
세상 일에 연연할수록 천국에서의 삶에는 가치를 적게 두게 됩니다.
그러나 영생에 가치를 두고 사는 사람은
천국에서의 삶의 수준이, 이 곳에서 미리 정해진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맞는 삶을 살려고 노력합니다.

사도바울은 셋째 하늘을 다녀온 후부터는
이 세상에서의 삶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오직 천국을 목적으로 한 삶 만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이 천국을 경험하지 못하였기에
천국 생활에 대한 신비감이 덜합니다.
그럴지라도 사도바울의 간증을 통해 간접경험으로 받아들여
이 땅에서 나의 천국 신분과 지위를 준비하는 삶을 사는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일등용사를 항상 쓰십니다.
여호수아나 다윗, 그리고 다니엘도 모두 일등 용사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일등 용사가 되는 것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신앙생애의 결과는 오직 승리자가 되어야 함을 보여준 것입니다.








교법사 가말리엘
/ Gamaliel

[행 5:34]


1. 인적 사항

가말리엘이란 히브리 원어는 '가물리엘'로 그 의미는
"하나님은 나의 보답이시다."라는 뜻입니다. [민 1:10]
그는 유대인들의 율법과 유전을 연구히고
체계화하는 율법학자인 교법사였습니다. [행 5:34]

산헤드린 공회에 바리새파를 대표하는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위대한 랍비 '힐렐'의 손자이며 힐렐학파 의 계승자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를 사모하며 기다리다 예수님을
품에 안았던 '시므온'의 아들입니다.[눅 2:25]

그는 '랍비'(선생)라고 칭해지기보다 훨씬 영광의 호칭인
"랍반"(우리들의 큰 선생)으로 불리워진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수제자 사도바울의 스승이기도합니다. [행 22:3]


2. 그의 생애


가말리엘의 가문은 유대교의 보수파인 "샴마이" 학파와
쌍벽을 이루었던 온건파인 '힐렐'학파의 원조였던 '힐렐'이 조부였으며,
그의 부친은 또한 예수님께서 아기로 성전에 드리어졌을 때,
'그리스도를 보기 전엔 죽지 않겠다'
시므온이 부친인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하였던 그는
조부가 세운 힐렐학파의 계승자가 되었고 랍비가 되었으며
랍비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랍비에게 주어진
7명의 랍반중 한 사람으로 불리어졌습니다.

또한 그의 부친 시므온과 조부 힐렐에 뒤를 이어
랍반의 호칭을 받은 가말리엘은 3대째 랍반 가문의 후예로서
그는 평생에 문하생을 천여명이나 배출을 하였습니다.
그들 중 5백명은 율법사로, 나머지 5백명은 희랍의 지혜를
공부하는 제자들이었다고 합니다.  (탈무드)

이중에는 수제자로 '사도 바울'이 있으며, 또한 전승에 의하면  
'스테반' '바나바'도 그에게서 배운 제자들이었다고합니다.

그는 성전에서 가르치기를 좋아해서, 주님이 어렸을 당시
부모와 더불어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성전에 남아 랍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을 시기에 주님과 대화를 나누었던
선생들 중 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눅 2:46]
또한 바로 그 때에 예수님에 대하여 특별한
인상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나중에 주님의 기적을 일으카는 사역을 통하여
그는 점점 그 도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으며
니고데모와 아리마데 요셉과 더불어
주님의 숨은 제자로 전승에는 전해지고 있습니다.

더우기 그의 온전하고 관대한 성품은
산헤드린의 극단적인 분위기에 말려들지 않고
오히려 그 분위기를 진정시키는 역할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이미 그는 주님의 도를 따르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만년에 그의 아들 아힙과
니고데모와 함께 베드로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바리새인으로서의 바른 행실과 그의 높은 학문,
온화하고 관대한 성품은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살았으며,
그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라반 가말리엘이 돌아가셨으니, 이제는
율법에 대한 존경도 없어졌고 순수성과 금욕도 가버렸도다.
"
라고 하며 많이들 아쉬워 하였답니다.

그의 제자이며 개종자인 탈꿈학자 '몽켈로스'는 그를 추모하면서
두로돈으로 70미네의 향료를 제공하였으며
위대한 위인의 장례절차에 따라 장례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그는 비록 나타나지 않은 그리스도의 제자였으나
말년의 세례는 그로 평안히 구원받은 기쁨으로 임종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이 파괴되기전 (A.D. 70) 18 년 전에 죽었으며,

그의 죽음에 대하여 '미쉬나'에 기록되었으되
"그의 죽음으로 토라에 관한 경의도 끝났고 순결과 절제도
그와 함께 묻혔다."라고 표현되어있다 합니다.


3. 그의 신앙의 특징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메모는 공회에서 주님을 잡으려는
쟁론이 한창일 때, 말하기를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전에 판결하느냐?"[요 7:51] 함으로
그들의 행위를 은근히 저지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이미 예수님을 따르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말리엘도 마찬가지로 공회에서 사도들을 붙잡아
처형하고자 했을 때, 그 일에 대하여 과거 행해진
'드다'와 '유다'의 사건을 예를 들어, 또한 공회의 결정을
저지한데에는 이미 그의 마음 속에
주님을 따르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 가멜리엘은 하나님의 뜻만을 따르려는 신앙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신앙은 운명과 자유 의지를
한데 묶은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하면서도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했으며,
"모든 것이 예비되어져 있으나 인간에게도
선택의 자유가 주어져 있다." 라고 믿었습니다.
(바클레이 주석 참조)

이같은 그들의 신앙태도는 오히려 정치적, 종교적,
기득권을 옹호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보다
현실적인 위치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삶을 살게 만들었으며
주님이 행하신 모든 기적을 오히려 바알세블에 힘입어
행한 귀신의 역사라고 왜곡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같은 마음과 생각은 자신의 유익을 위한 지위 및
신분 유지 로서의 신앙을 필요로 하는 삶을 살게 만들어준 반면에,

가말리엘은 그의 직분과 직책은 이미 온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랍반의 위치 인데다가,
그가 이미 주님의 행하신 기적과 말씀으로
참 신앙의 길을 찾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행실에 대하여 주의와 경고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즉, "너희들의 자유 의지와 행실은 생활면에서는 허락될지라도
신앙면에서는 허용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의 뜻을 지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일을 막는다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됨을
알아야한다." 고 엄히 나무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같은 신앙에 있으면서도 타교단과
이웃 교회에 역사가 일어나는데 대하여
비판과 정죄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단에 대한 경고는 바람직하지만, 기적과 이사는
교리에 의해 해석되기 어려운 부분들임을 감안할 때,
기도하며 성령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시는 지를
기다리며 주시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말리엘은 신앙의 변화에 대하여 신중하였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는 행위가 되지 않도록
좀더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신앙도, 인격과 지식과 덕망이 배양되어
있을 때 더욱 존경받는 신앙인이 됨을 배울 수 있습니다.


2) 가말리엘의 신앙은 현상보다도
과거의 하나님의 역사를 근거로한 신앙이었습니다.


우리들이  현실에 당면한 문제로 미래를 예측할 수 없을 때,
바른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행하셨던 일과 인도하셨던 역사를 돌이켜보면
현실을 이해할 수 있고 미래를 예측할 수가 있습니다.

가말리엘은 많은 학문과 지식 못지않게 신앙 안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도 면밀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드다'라는 사람과 '유다'라는 자가 사람들을 미혹하고
난을 일으켰을 때에 장본인을 잡아 처형하자 그를 뒤쫓았던
무리들이 저절로 해체되었던 사건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소행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모세처럼 하나님께서 난 것이면
바로왕이 아무리 방해를 해도 결국은
자신에게 불행만 주어졌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세가 죽었어도 여호수아를 통하여
모두 이루어졌음을 보고, 기득권의 치리를
옹호하려는 무리들의 감정적이고 선동적인
동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는 주제를 주입시켜
흥분을 가라앉힌 것입니다.

왜 그들은 모두 가말리엘의 주장을
반대하지않고 순순히 따랐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가 한 말 중
"너희들이 하나님의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v.39]
라고한 그의 결정적인 일침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의 기적과
이사와 부활하심을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일종의 죄 의식과 불안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가말리엘은 그 같은 그들의 정곡을 찌른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이 지금이 아나라.
예전에 주님을 죽였을 때, 이미 저지른 죄를 알고
더 이상 하지 말라."라는 의도를 지난 말이었습니다.  

거짓 무리들은 이익을 중심으로 할 땐 함께 모여듭니다.
그러나 불리한 결과가 초래할 땐, 서로가 등을 돌리고 맙니다.
가말리엘은 그들과 함께 더 이상 동조하지 않고
살다가 (A.D. 52)년 경에 일생을 마감하였습니다


3) 가말리엘의 신앙은 주님의 말씀을 숨어서 지키는 살이었습니다.  


[행 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이 말씀은 공회 의원들일지라도 주님의 재자가
많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 그리고 가말리엘이었습니다.

그 이유로서 그는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이었으며
제자들의 기적과 기사는 확실히 하나님께로서
기인한 것이며, 학문 없는 그들이 구약을 인용하며
대제사장들에게 변론하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능력을 주셨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기전에 제자였던 사도바울을 만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대한 그의 간증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죽기 전에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기 위하여
아들과 더불어 사도 베드로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는 바울도 사도였으나 제자로 부터 세례를 받기보다는
주님의 정사도인 베드로와 요한에게 받는 것이
더 이치적이었을 것입니다.

이와같은 내용과, 제사장들 중 주님께로 향한
허다한 수의 사람들의 아름은 가리어져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제자들에게 세례를 받고 숨은 제자들로 살았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말리엘이 보여주는것은, 진리는 지식보다 앞서며,
신분과 지위도 주님의 종들인 사도보다 결코 높을 수 없으며,
백성들에게 받는 존경과 인정도 주님으로 부터 받는 인정보다
훨씬 못하다는 것을 그는 몸소 보여준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겸손입니다.
참된 신앙은 드러내 보이는 것보다 주님과의 내면의 관계가
더 깊고 중요한 부분을 조용히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요즈음은 보기 드믄 일들이라 여겨집니다.
이 시대에 모두 요구되어지는 것도 드러내지않고
숨은 제자로서의 진리를 따르는 진실된 모습일 것입니다.

그의 부친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아보고 눈을 감았지만,
가말리엘은 성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마음에 모시고 눈을 감았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의인을 옳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의 하나님
[요14:16-17]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오실 수 있으신 길은
인간의 영이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입니다.
이것은 죄가 없는 상태에서만이 가능합니다.

죄가 몸 속에 들어오자 하나님의 영은 떠났고,
인간의 영은 죽었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은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으나, 거듭나게 되며는
그 영속에 하나님과의 교제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성령의 하나님은 우리로 예수님이 열어 놓으신
구원의 길로 들어오도록 인도하시고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동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은 죄에 빠질 수는 있으나 죄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죄의 세력은 영의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구원의 길을 가기를 원하고는 있으나, 그길을 갈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죄의 값을 인간은 지불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혼은 영의 길을 자각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혼이 영을 주관 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영은 혼에 속한 부분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혼이 영의 길을 택하기 원할 때, 영의 길로 들어서도록
도와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분이 필요합니다.
그분이 바로 성령님이시고 성령님의 역할이 바로
혼과 육에 속한 인간을 영에 속한 인간으로
변화시켜주시는 일이십니다.

인간은 아무리 능력이 있고 똑똑해도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마치 인간이 아무리 건강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죽음을 부활로, 우리의 죽을 생명을
영생으로 바꾸어 주신 분이 허락하심으로 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주관하시고, 주님의 죽을 몸에
영생을 주신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마찬가지로 혼이 주님을 믿을 때, 그 믿음을 통하여
성령님은 주님께 역사하셨던 능력을
우리에게도 적용시켜주십니다.

인간이 영의 길로 갈 수 있음은 오직 혼이
주님을 선택하는 한 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 결과 선택과 믿음을 통하여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나에게 나타나게 됩니다.

믿음은 구원의 문 밖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에서 문을 열어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어느 누구도 그 구원의 문을 열 수가 없습니다.
그문은 안에서 열어 주어야지만 열려지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문을 여시고 우리를 맞아 들이신 성령님은
우리에게 다섯 가지 면에서 역사를 하십니다.
이같은 성령님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구원의 길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1. 성령님은 보혜사 이시기 때문에 우리와 항상 함게 계시며 도와주십니다.


[요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인간이 죄에 빠졌던 원인은, 죄가 얼마나 나쁜 것인지,
죄를 짓지 못하도록 저지할 도움을 줄 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를 통하여 인간은 단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죄가 없었을 때는 아담에게는
자신의 영생의 삶에 불가능한 것이 없었습니다.
피조물이라는 인식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통하여
인간의 피조물의 한계를 알려 주셨습니다.
죄를 통하여 선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모시고 싶은 인식을 갖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도록 지음을 받았으나
하나님 대신 자기를 의지하고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 결과가 멸망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다시 돌아와
순종할 때, 또한, 창조주 를 하나님 답게 섬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인간이 알 때, 하나님은 땅으로 부터의 삶에서 우리를
하늘의 삶의 영생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깨닫기 까지만 허락하셨지
깨닫고 돌아올 수 있는 능력까지는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피조물의 한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도움은 시작되게 됩니다. 이 깨달음의 자리에 올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다가 도와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이것이 인간이 다시 잃었던 진리를 깨닫는 일이고
진리는 진리의 영 이신 성령님과의 만남을
만들어주는 기회인 것입니다.

내가 진리를 찾고 진리를 따라 사는 한 성령님은
절대로 나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진리와 성령님은 하나 이시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내 안에 쌓이면 쌓일 수록 나에게 오신 성령님은 함께
동행하시며 곁에 계시고, 나중에는 네 안에 들어와 계시게됩니다.
진리는 성령님의 거하시는 집이기 때문입니다.


2. 성령님은 교사이시기 때문에 항상 우리를 가르쳐주십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진리는 인간이 찾으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을 깨달으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죄에 대하여,
구원에 대해서, 하늘나라에 대해서, 그리고 마귀와
영적 전쟁과, 재림과, 심판과 그리고 부활에 이르기까지
다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오직 혼에 매여 이 땅에
육신적인 삶에만 깨달음이 묶여져 살고 있기 때문에
영에 관한 부분은 점점 무지해지고 맙니다.

인간은 죄 중에 잉태하여 태어났기 때문에
태어나서는 육신 중심의 삶을 제일 먼저 살게됩니다.

그리고 또한, 혼과 죄가 지배하는 세상의 교육을 통하여
혼 중심의 삶, 즉 세상 중심적인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다가 삶위 허무와 죽음을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말씀과 체험을 통하여 영적 중심의 삶으로 변화되어집니다.

혼이 영의 세계를 알도록 깨우쳐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영이 말씀으로 자라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은 12제자들에게 영의 세계에 대하여
특히 하늘나라에 대하여 들려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이 어렸기 때문에 아는 것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오순절날 성령의 임재하심을 받고
그들은 아는 것을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말씀의 양식은 우리의 영인 속사람을 자라게 만들어줍니다.
우리의 속사람의 완성이 부활후 천국에서의 모습이 되듯이
 우리의 진리의 깨달음의 완성도 천국에 가서야 이룰 수가 있습니다.

이땅에서의 진리의 깨달음의 한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격과 신분으로 이 땅에서 사는데 필요한 부분까지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 집안의 가정 교사로서 우리가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도록 말씀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3. 성령님은 조명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의
구주되심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요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성령님의 역할의 한계는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예수님의 선포하신 말씀의 법주 안에서만 활동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 활동의 주된 역할은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를
밝히 드러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증인 사역이십니다.

 우리는 귀로 듣고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봄으로 이해의 범주를 벗어나,
놀람과 확신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마치 땅의 만물이 달빛을 받을 때와, 햇빛을 받을 때가 다르게 보이듯이  
해의 역할은 빛으로 남을 비추어 드러나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나타나게 하시고
주님의 구원사역이 얼마나 은혜로운지를 조명의 빛으로 보
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뚜렷한 모습은 용서에 있고,
주님의 은혜가 드러난 현상은 구원의 표상인 십자가에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오셔서 나의 영안을 열어주실 때,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바로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고전 12:3f]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주님은 사역시절에 많은 기사와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이를 보는 사람들 시각에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은 주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으로 보았고, 나머지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예수님이
바알새블의 힘을 덧입어 기적을 일으킨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의 차이점은 같은 신앙, 같은 말씀을 지녔어도
성령의 역사하심의 차이에 의하여 주님을 다르게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메튜헨리' "신앙이 성령으로 역사되지 않고는
그에게 복종하고 의지하여 살아가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주시라 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고전 주석 p.180)

예수님이 구세주이신 것은 머리로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에 의해서 깨달아지는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증인 사역입니다.

 
4. 성령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불의한 것을 지적하십니다.


[요 16:8-11]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동물이 인간을 보는 눈과, 인간이
동물을 보는 것과는 많이 차이가 있습니다.

즉, 동물은 자신이 어떡해야지 유익이 주어진다는 면에서
주인을 이해하고 있는 반면, 인간은
동물의 행동 동기 까지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욥이 고난을 받고 있을 때, 네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각자 알고 있는 하나님을 욥에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닙께서 욥에게 직접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성령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이 잘못 알고 있는
세가지 오류를 지적하시고 바로 세우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1] 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입니다.
 
인간편에서는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죄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의 진정한 죄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죄인들을 용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통하여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길을 믿지를 않고 주님을 부인하고 구원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지은 모든 죄는 주님 안에서 용서되어질 수 있음을 볼 때,
진정 용서되어지지 않는 죄는 용서될 수 있는 죄보다
더 큰 구원의 부인죄 인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님은 제일 먼저 지적하십니다.


[2] 의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매달린 주님을 바라보았을 때에 죄인으로, 심판으로,
멸망으로. 저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자리가 대속으로,
영생으로. 부활로, 영광으로 바라보고 가셨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을 중거하심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셨음을 증거하십니다.
인간이 주님을 못박은 의는 멸망의 의 였음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의 바른 이해가 참 의 임을 알려주십니다.


[3]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심판하여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 바로 너희들도
죽으면 더 큰 불과 유황의 심판에 들어갈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땅에서 벌이 무서워 감옥에 갈까봐 죄를 짓지않고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행위의 죄가 없어도 마음 속에 죄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형의 집행이 죽음 후에 주어질 뿐입니다.
사후의 심판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5. 성령님은 인도자 이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요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인도와 계시는 가나안 땅과 율법이었습니다.
신약에서의 예수님의 인도와 계시는 천국과 복음이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의 성령님의 인도와 계시는 증인과 선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인도하심은 처음에는 이 땅에 백성으로의 삶,
그리고 나아가서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서의 삶, 그리고 마지막은
하늘과 땅에서의 후사로서의 삶으로 진행하고 계심을 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알려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아직도 많은 것이 남아 있습니다. 장래의 하나님의 계획은
지나온 것보다 더 심오하고 깊은 것들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만이 아십니다.
성도들은 마지막 환난에 대해 대비해야합니다.
사탄과의 영적 전투에 참가해야합니다.
주님의 재림에 준비해야합니다.
마지막 심판에 설 수 있어야합니다.
천국의 상급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성도들은 증인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성령님의 마지막 사역은 우리로 증인이 되게 만드는 사역입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한 인간의 삶은 긴 구원의 사슬에 연결되어 있는 한 고리에 해당됩니다.
성령님이 오신 것은 나로 하나님의 세우신 구원의 줄의 대열에
든든한 고리로 매어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권능수여의 의미는 순교의 정신에서 발견해야만 되는 일이기에
권능과, 증인과, 순교는, 하나로 묶여 있음을 봅니다.

오늘도 성령님은 증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이는 그들만이 하늘의 상급을 받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성령님을 모시고 하늘의 상급을 받는
성도들이 다같이 되십시다.










아리마대 요셉
/ Joseph of Arimathea
[눅 23:50]



1. 인적사항


70 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위원
공회의 결의와 행사에 가담하지 아니한 선하고 의로운 자
사무렐의 출생지인 라마다임 출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린 사므온과 안나 선지자 같은 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요구한 자
주님을 자신의 묘실에 모실만큼 부자인 자
예수님의 숨은 제자 (마 27:57)
니고데모와 함께 향품과 향료로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한 자 (요 19:39)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 장례식 행사 때 의외에는
성경에서 그에 대하여 언급되어져 있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이 주님의 숨은 제자로서 매우 가치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후대의 성도들은 그를 흠모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에 관한 미흡한 언급을 대신하여
전해 내려오는 전설로 많은 사람들이 위로 받기도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주후 61년에 빌립에 의해서
영국으로 파송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글래스턴버리 (Glastonbury)로 왔고 그 때에
그는 최후 만찬때에 사용되었던 잔을 가지고 왔는데
그 안에 그리스도의 피가 들어있었다 합니다.
이 잔이 성배가 되었으며 아더왕의 기사들은
그것을 찾는 것이 꿈이었다고 합니다.

요셉이 글래스턴버리에 이르렀을 때는 그는 피로에 지쳐
지팡이에 의지하여 쉬려고 지팡이를 땅이 깊이 박았는데
그 지팡이에 싹이 나서 해마다 크리스마스 날이면
꽃을 피우는 숲이 되었다 합니다.

성 요셉의 숲은 아직도 글래스텐베리에서 꽃피고 있으며
오늘까지도 그 점지를 온 세상에 내보내고 있다 합니다.
영국 최초의 교회는 글래스텐베리에 세워졌고 대 수도원과
고대 건물에는 성요셉 예배당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곳은 순례자들이 즐기는 순례지이자
휴양지가 되고있다고 합니다.
(바클레이 주석 씨리즈 눅 p. 404 참조)


2. 신앙의 특징


1)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산 자였습니다. (눅 23:51)

예루살렘의 공회는 70명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그 중 24명은 제사장들의 대표자들로
24명은 이스라엘 국민들을 대표하는 장로들로
나머지 22명은 율법을 배운 세기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공회의 기원은 광야에서 모세를 도와주었던
 70인 장로들을 본받아 이루어졌다고하며
그들의 권한은 예루살렘의 시정, 종교적 가르침,
치안의 확립,  성전 내의 각종 업무 집행들을 수반하였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당시 국민의 대표 중 한 사람의 장로로써
공회에서 일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와같은 정치, 종교의 지도자역에 가담하면서
그는 시므온과 안나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며 지내던 중
예수님을 만나게 되자 약속된 구세주가 바로 예수님임을 믿게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와 시므온과 안나 선지자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의 공동특징을 보게됩니다.
그것은 바로 선하고 의로운 성품을 지녔다는 것입니다.
(눅 2:25, 23:50)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날
우리들에게 행한대로 보응하리라 하셨습니다. (롬 2:6)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에서의 위로를 바라며 살고 있습니다.

그 결과 재산, 권위, 명예, 권세, 소유, 치리 등에 중심을 둔
신앙생활을 하고있는 것을 봅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그대로 본받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신앙생활은 하나님 나라를 염두에 둔
참된 믿음의 생활은 아님을 요셉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의란 본래 재판자리에서 필요한 것으로서
의를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재판자리에 서 있다는
인식을 항상 갖고 바르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즉, 의란 선행과 일치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고
고아를 위해  신원하며 과부를 위해 변호하고 (사 1:17)
공평을 지키는 것임을 (사 56:!)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예수님을 처형할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그는 아에 처음부터 그 같은 불법적인 모임에
가담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에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결정은
만장일치였기 때문입니다. (막 14:64)
그의 이와같은 행동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사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빌라도에게 주님의 시신을 요구한 담대한 신앙을 가진 자였습니다. (눅 23:52)


성경에서 요셉과 니고데모를 주님의 숨은 제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 27:57)
이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지만 자신들의 소속과 사역속에서는
떳떳히 제자의 신분을 노출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1] 산헤드린 공회원이란 신분과 지위는, 그들로 자격을 박탈당해야만 하는
주님의 제자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못하는 처지에 있게 하였으며

[2] 유대교사회에서의 축출과 재산의 몰수 등은 큰 위험임으로
숨은 제자로서의 신앙인으로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재판받는  자리에서와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담대한 믿음과 순종을 보고 그들의 마음은 강하게
믿음으로 자리잡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특이한 사건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1] 주님꼐서 돌아가시자 성전의 휘장이 찢어져 둘이 되었으며
무덤들이 열리고 죽은 성도들이 다시 살아났으며
부활의 몸으로 돌아다니는 역사가 일어난 사건 (마 27:51-52)

[2]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강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심을
나타내는 표현을 어느 누구도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옆에 달린 강도가 고백했습니다.


[눅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찮은 죄인인 도둑만이 예수님을 구주로 외치고 있는데
자신은 정작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자로서
자신의 신분을 더 이상 감추고 있는 것이 신앙 양심에
어긋나는 일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현실 위주의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천국 백성으로서의 신분을 깨닫고 담대하게 처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빌라도에게 가서 주님의 시신을 요구하였습니다.
이 같은 행동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자세일 뿐 아니라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려놓은 온전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보인 행동이었습니다.


세상 속에서의 삶은 신앙행활에 많은 걸림돌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전혀 걸림돌이 되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왜나하면 나에게 주어진 모든 형편은 나의 노력과 능력으로
얻어진 것이기보다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맡기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란 주인공의 인식이 주님이라는 중심의 삶으로
바뀌는 것이  참된 신앙임을 요셉은 보여준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시신을 자신의 무덤에 안치하여 장사지낸 자입니다. (눅 23:52)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 다음에 12 제자들과 같이
주님 곁에서 많은 말씀을 듣지 못하는 대신 주님에 대한
구약의 말씀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서에 대하여 늘 자신의 정원을 거닐면서 묵상을 하였습니다.
그 때, 그는 마음에 와닿는 한 구절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 53:9] "그는 강포를 행치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이 말씀 가운데 과연 그 부자란 누구일까요?
그 말씀은 그의 마음을 파고들었으며 마침내 그는
자신이 장본인이 되어야 함을 점점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주님께서 돌아가시자 지체하지 않고 빌라도 총독에게
달려가 주님의 시신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제자들도,  평소에 은혜를 많이 받았던
  장본인들도 없었습니다.
오직 같은 공회원인 니고데모가 가지고 온 백근에 해당되는
몰약과 침향으로 주님의 몸을 닦고 세마포에 싸서
둘이서 주님의 장례를 치룬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위하여 마련해 둔 돌무덤에 시신을 안치하였습니다.
신앙에는 시작시점과, 성장 시점과, 완성시점이 누구나 다 다릅니다.

먼저 시작한 신앙인에게도 자신의 할 사명이 주어져 있고 나타난
제자된 사람들도 해야할 때가 있는 반면 늦게 부르심 받은 사람도,
숨어있는 제자의 삶을 산 사람도 주님의 떄가 되면
할 일들이 주어지게 됩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순종하려는 자세로
말씀을 늘 묵상하며 깨달음을 갖는 신앙생활이 중요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마지막 주님을
온전히 모신 것도 구약을 늘 읽고 묵상하고
하나님을 말씀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자신의 믿음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 중에 사명적인 삶은 말씀을 중심으로 묵상하고
의미를 깨닫도록 노력할 때 성령님의 계시하심으로 이룰 수 있습니다.

시므온과 안나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그들에게
성령님꼐서 임하셔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계시를 주셨듯이
아리마대 요셉에게도 성령님께서 주님의 마지막 장례에 대하여
계시히여 주셨을 것입니다.

그는 숨은 제자로서의 신앙생활을 시작하였지만 나중에는
정식 제자들보다도 더 큰일을 해낸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그의 신앙을 본받아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마지막 떄에
감당하는 성도들이 다 같이 되십시다.












보혜사 (Counselor)
[요 16:7-14]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는 영생체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영의 세계도 물질의 세계도 동시에 다 누리고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때에는 계시적 지식이 필요 없이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세상에 들어오자 진리의 세계는
문이 닫히고 영생도 잃어버리고 혼과 육만이
살 수 있는 죄 된 물질의 세계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인간은 창조 본연의 뜻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사물에 대한 존재의미를 분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에 거짓이 진리를 대신하게 되었고
죄된 욕망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간은 진리를 다시 찾아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회귀하기 위하여 진리를 계시하여 줄 존재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노아를 통하여
새 창조와 새 질서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점진적 진리의 계시를 위하여 구약에서의 약속을 통하여
메시야의 오심을 증거하였으며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는
신약에서의 약속으로 성령님의 오심을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특징은 진리의 영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성육신 예수님의 구속 사역, 그리고 좀 더 구분되어 마지막 진리의
회귀사역으로 인간의 잃어버린 영의 세계를 계시하여 주심에 있습니다.
진리의 회복이 인간 창조존재의 회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1. 성령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세 가지 일을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1)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하여 그들을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요 16:13]


진리의 특징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자
얻은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죄를 더 깊이 알게 되었고,
또 하나는 영생대신 죽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죄는 거짓된 삶을 살도록 만들었고
죽음은 이 세상에서의 두려운 삶과 지옥에서
둘째 사망을 겪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진리이신 예수님을 증거함으로
죄와 사망에서 건짐 받고 영생을 얻는 길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내가 곧 진리요.” 라고
말씀하신 것을 이해 적용 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2) 세상에 대하여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러 오셨습니다. [요 16:8]


죄를 깨우쳐 주는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셨고,
죄를 판정하는 분은 예수님이시며
죄를 회개하고 구원케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죄에 대하여 책망 하실 때에 '자범 죄'가 아니라
주님을 믿지않고 구원을 거부하고 있는' 교만 죄'를 지적 하십니다.

또한 의에 대한 책망은,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것을 깨닫지 못함”에 대한 책망입니다.

세상의 의는 정직, 준법, 선행, 효, 애국심 등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를 벗어난 의가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의일 뿐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의는 예수님을 정죄한 의 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세상적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는 피고요, 빌라도는 재판장이고, 원고는 제사장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재판 결과 주님께서는 사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땐 빌라도와 제사장들은 피고요,
원고는 주님이시며, 재판장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결과, 세상의 심판을 뒤엎고 주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사탄 마귀의 죄가 심판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을 좋아하고
사탄마귀 에 속해 있는 것을 성령님께서는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하여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요 16:14]

주님의 “성령님에 대한 가르침”은 너무 영적인 것이어서
구약과 신약 모두의 하나님 사역이 진행되는 동안
“성령님께서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그것은 사역의 진행상 뒤에서 일하셨기 때문에
영의 세계에서는 세분이 다 같이 함께 행한 것이었으나
표현상으로는 시작의 주 된 부분만 소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천지창조 시 성령님께서는 수면 위에 운행하심으로 생명체들을 잉태시키셨고,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사역 시엔 동정녀 마리아의 잉태, 사역을 함께하심으로
기적을 베푸심, 부활, 등 주님의 사역에 주 된 역할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구원의 완성 단계에서 성령님께서는
하나님과 주님에 대한 속 사정과 “그분들의 사랑과 은혜”에 대하여
더 자세히 우리들에게 알려주시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즉, 태양이 빛을 비추어야 지구의 모든 창조물이
아름답게 드러나듯이 우리의 영혼 속에 성령님의 조명이
비취어져야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아름다운 계획과 준비하신 모습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또한 주님과 주님의 말씀에 대한 지혜를 성령님이 주셔야
우리는 성육신의 의미와 십자가의 죽음 및 부활하심의
성자 하나님의 참된 은혜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가까이 할수록 특별한 지식을 더 많이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짐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를 위하여 성령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 편에서 성령님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을까요?


2. 성령님께서는 모든 구원 사역에 앞서
우리에게 보혜사의 역할을 하러 오셨습니다. [요 16:7]



아기가 태어났다고 해서 그의 인생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성인이 되어 올바른 삶을 살 줄 알아야 인생을 완성 할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주님 안에서 거듭 태어났다고 해서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따라 살 줄 알아야
올바른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앙이 완성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이렇기 위해서는 아기에게 어머니가 필요하듯이 우리에게도
어머니와 같으신 보혜사 성령님의 보살펴 주심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보혜사로 불리어지는 성령님의 호칭을 바르게 이해함으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역할도 온전히 받을 수 있습니다.


1) 보혜사란 “어떤 사람 곁으로 오도록 부름 받은 자” 란 뜻입니다.


이 단어 “파라클레토스” 는 어원적으로
“파라"(곁에) 와 “클레토스” (부르다) 단어가 결합된 말입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오도록 청함을 받았느냐?”
하는 것이 우리에겐 궁금한 부분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부르실 때 '또 다른 보혜사'
(요 14:16) 라고 부르신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헬라어에는 “다른” 이란 단어가 두 가지인데
[1] 알로스: 첫 번째 경우와 똑 같으나 다른 하나”라는 의미이며
[2] 헤테로스: 전혀 처음 것과 다른 어떤것” 이란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성령님을
자신과 같은 "알로스" 즉,다른 분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님께서는 예수님과 똑같은 분이십니다.
똑 같은 일을 하시지만 효능과 방법에서 다르게 하실 뿐입니다.

즉, 주님께서는 육신으로 제한 된 지역에서만 사역을 하신데 비해
성령님께서는 영으로 활동에 제한을 받지 않고
전 세계적으로 확대 사역을 하신다는 것과

주님께서는 일일이 사람들을 만나 말씀을 들려주심으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들려주신 데 비해
성령님께서는 동시에 어느 지역 어떤 사람들을 막론하고
계시와 꿈, 음성, 기적과 이사, 은사를 나누어 주심으로
더욱 천국과 영의 세계를 깊이 계시하여 주신다는 데에 있습니다.

결국 범위는 확대되었지만 우리를 향한 본질은
예수님과 같은 역할을 하시는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대신 성령님을
보내 주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2) 보혜사 성령님의 적극적인 사역은 우리 곁에서
격려하고 권고하여 주시는 역할을
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곁에서 능동적인 역활과 수동적인 역활을 하시는데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언제나 사단 마귀의 공격과 방해를 받아
성도들이 신앙생할을 하기에 낙심과 위협을 겪게 됩니다.

이  반대 세력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이겨나갈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주님께서 떠나신 후 사도들에게는 의지할 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회에 잡혀갔고더 이상
사역을 하지 못하도록 위협과 채찍을 맞고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한 자리에 모여 기도하였고, 이때 모인 곳이 진동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담대히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행 4:31)

성령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은 사도들은 주님을 모시듯 성령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살았기 때문에 더 이상 낙심이나
주저하지 않고 담대히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결과로 각 지역의 교회에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행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성령의 위로란, 성령님께서 격려해 주시고 든든히 서도록 시켜주셨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들 사역의 원동력이 되어주십니다.
이 힘이 우리로 하여금 사역의 고난과 위기, 영적 싸움을 모두 이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사도들을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게 하신 그분의 도우심인 것입니다.


3) 보혜사 성령님의 소극적인 사역은 친구와 같이 항상 동행하며 함께 도와주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제부터는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말씀하셨습니다. (요 15:15)
친구이기 때문에 나의 비밀모두를 너희에게 다 들려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참 좋은 친구를 만나 서로 사귀고
도와가며 지내는 것처럼 기쁜 일이 없습니다.
더욱이 주님을 친구로 삼았던 사도들은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그런데 사도들이 영으로 거듭 태어나자
육신의 친구대신 영의 친구가 생긴 것입니다.
육신의 친구는 만나야지만 함께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의 친구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같은 기쁨은 영으로 나에게 오신 성령님께서 만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시며, 함께 주님의 일을 하시고 도와주시며,
하나님께 우리를 위해 대언하시고 변호해 주시며,
우리를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연단 훈련시키셔서 성장, 성숙하게 자라나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신부가 되도록 자라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님의 성화의 길에서 열매를 맺게 해주심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3. 우리는 우리에게 오신 보혜사 성령님을 어떻게 모셔드릴 수가 있을까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려면 우리의 몸을
성령의 전이 되도록 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이유를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한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육체의 소욕은 =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술수, 원수,
분쟁, 시기, 분냄, 당 지음, 분리,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 등이라 하였습니다. (갈 5:19-20)

이 같은 소욕을 없애기 위하여는 성경에 기록된바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속이 성령의 전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속에 자신의 정과 욕심을 못박은
십자가를 지니고 있을 때에 가능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성령님 오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행 1: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나의 노력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준비로 받는 것이고
나의 욕망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으로 받는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노력으로 받게 되면 소유 개념이 생겨 남용하게 되고,
욕심으로 받게 되면 과시하여 교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나를 쓰시도록
선택하실 때까지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오시면 우리로 오심을 알게 하십니다.


1) 성령님께서 바람과 같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바람과 같이 성령님이 오실 때 숨으로 마음껏 들이마셔
내 속에 가득 채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을 바람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요 3:8]

헬라어로 성령을 “프뉴마”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뜻은 "호흡"내지는 "바람"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임하셨을 때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행 2:2) 하였고
예수님께서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성령을 받으라 말씀하실 때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요 20:22) 하셨습니다.

즉, 주님의 숨을 불어내신 미풍은 성령 강림절 날 임하실 강한 바람의
성령님의 임재 하심의 보증으로 제자들에게 불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바람 미풍을 체험하였다면
강한 성령충만의 바람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풍이 불어올 때마다 마음껏 들이마셔야 됩니다.
나의 영혼육이 성령의 호흡으로 가득 찰 수 있도록
제자들과 같이 들숨을 채워야 합니다.


2) 성령님께서 강물같이 오실 때 마음껏 들이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마실 물을 달라 청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요 5: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라.” 하셨습니다.
이는 성령을 주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우리는 말씀으로 은혜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한 없는 회개와 눈물이 쏟아집니다.
성령님께서는 말씀의 위로로 마음껏 평안으로 채워주십니다.

말씀이 강물같이 선포됩니다.
진리의 깨달음이 넘치고 말씀에 대한 체험과 확신이 생깁니다.
이때 성령님의 조명을 더욱 받기 위해서 말씀을 많이 먹어야 합니다.
먹은 말씀만큼 성령님의 역사가 따르게 됩니다.


3) 성령님께서 불 같이 오실때 기도로 계속 받아야 합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오신 성령님께서는 불 같이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행 2: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에게 임하여 있더니”

성령님의 임재 하심에 바람으로 오심은 “동행과 인도하심”
생수로 오심은 “은혜와 평안함”을
그리고 불같이 오심은 “능력을 통해 사역을 감당 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불이 아니더라도, 바람도 태풍으로,
생수도 홍수로 오실 때는 그 위력도 상당히 큽니다.
그렇지만 불의 위력은 무엇보다도 제일 강합니다.

그리고 영적 전투에서 꼭 필요한것은 불 세례입니다.
이를 위해 금식기도로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늘에서 번개가 칠 때 피뢰침이 번갯불을 흡수할 수
있는 것은 '전류를 흡수할 수 있는 피뢰침'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성령의 불을 받기 위해서는 기도 침이 있어야 됩니다.
“기도 침”이란 한마디로 기도의 영을 말합니다.
나의 혼적인 생각이 아닌 영적인 욕구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영으로 기도를 많이 한다 하였고 
그리고 그 기도를 방언기도라 하였습니다.(고전 14:14-18)
기도는 성령을 불 같이 끌어들이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에게 임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나와 함께
가시적으로 계시는 것 같이 성령님을 대우해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14: 16-17] '성령의 오심'을 “우리의 같이” (메타, v16)
“우리와 함께” (파라, v17) “우리 안에” (엔 v17)
그 분의 위치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성령님과의 관계를 매일 교제를 함으로,
매일 동행함으로, 매일 의지함으로 우리로 어떻게
성령님을 모셔야 됨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는 성령강림절을 맞이하여
성령님을 바르게 모시는 성도들이 다 같이 되십시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
/ 시므온 (Simeon)
[눅 2:25]


1. 인적사항


시므온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들으셨다"라는 의미 입니다.
그는 유명한 유대인 랍비 힐렐의 아들이요,
 가말리엘의 아버지요, 
A.D.13년에 산헤드린 회장이었습니다.

그는 일생을 메시야를 기다리다 성령의 계시로
 예수님을 처음 본자가 되었으며,
이에 감동하여 하나님께 메시야에 대한 찬송인
 '눈크디미티스' 를 올린 자가 되었습니다.


2. 시대적 배경


말라기 선자자 이후 400년 동안이나 이스라엘에는
영감받은 선자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상황은
B.C. 1세기경 유다가 헬라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다시 로마의 식민지 통치 하에 들어감으로
정치적, 종교적으로 암울한 침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유대인들 사이에는 종말론적 메시야 대망사상이
크게 무르익게 되었으며 대부분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이
적국의 압제에서 벗어나 정치적 으로 해방을 가져다줄
지도자로 서의 메시야상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그럴 즈음에 소수의 경건란 신앙인들은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야의 상' 그대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할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시므온과 안나 여선지자 였습니다.
시므온은 메시야의 오심을 간절히 기도하며
성전 중심의 생활을 한 결과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가 죽기전에 메시야가 오는 것을 보리라 알려주셨습니다. (눅 2:26)

 그는 이 위로의 말씀을 붙들고 기다린 결과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처음 알아보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 감사, 찬송 드리는 시므온의 고별송을 지었고
이 노래는 마리아의 찬송과, 사가랴의 찬송과 더불어
5세기 이후 저녁예배 용으로 많이 불리어졌으며,
또한 임종시에 찬송으로 사용되어졌습니다.

그는 유대역사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시므온은
 주님을 뵌 이후에도 훨씬 오랫동안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이미 메시야를 보았은즉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음을
하나님께 고백드렸으나 하나님께서는
노후의 평안의 생활을 오랫동안 보장해 주신 것입니다.


3. 신앙적 특징


1)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 자였습니다. (눅 2:25)


사람이 의롭다는 것은 사람들에 대한 그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고,
경건 하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그의 성품을 나타낸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그는 '예언자의 영을 받은 자요'
더우기 메시야의 현세적 왕국에 대한 해방의 지도자로
유대인들이 품고 있었던 견해와는 달리,
영혼 구원의 메시야로써 그들과 반대되는 증언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위를 빼앗겼다고 합니다.
(메튜헨리 p.118)

이로 보아 사람이 의롭다 하는 것은 사람의 행동을
기준으로 하는 의로움과 불의를 보고 따지려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한 믿음과 순종 여부에 따라 하는 행동에
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경건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투명하게 보이고 맡기는 삶을 의미합니다.

예전, 독일에 '고틀리프'(하나님의 사랑이란 의미)이라는
늙은 농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지나가던 그리스도인이 사과를 줍고 있는 그를 보고
 '고틀리프씨 피곤하지  않으세요?'하고 인사를 하자
익은 사과를 건네주면서 그가 다음과 같이 말했답니다.

 '나는 피곤하지 않아요. 나는 지금 단지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오.
생각컨대 나는 이제 거의 다 익었어요.
머지않아 나도 땅에 떨어질거야.
그 땐 아마 하나님께서 날 주워 올리시곘지?'
(싸이클로 피티아 예화 중에서)

시므온은 메시야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항상 성전에서 기다렸습니다.
죽음 보다도 더 소중한 메시야를 보기를 원하면서
소망을 기다리는 것과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는것 모두 경건한 삶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메시야를 뵙기 위해서는
성결이 요구 되어진다는 점입니다.

율법에서 흠이 없는 자, 산앙에서도 흠이 없는 자,
성결한자,  결국 그는 신약에서 처음으로 성령강림 전에
성경의 충만함을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2) 성령의 지시를 받은 자였습니다. (눅 2:26)


성령의 임재는 성결 위에 임하시고, 성령의 충만하심은
믿음위에 예언의 영으로 시므온에게 임하셨습니다.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전에 죽지 아니하니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구약의 말기 400년간의 성령님의 침묵 가운데
시므온에게 임하셨음은 그의 성결과 믿음이 얼마나
좋았는 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시므온에게 있어서의 삶이란 하나님을 섬기는 기간이자,
하나님의 뜻이 자신에게 이루어지는 때이며,
죽음이란 평안으로 맞이하는 하늘의 부르심으로 여긴 삶이였습니다.

그에게 남은 인생의 한가지 하나님의 뜻은
메시야를 보도록 허락하신 축복의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아기 예수님이 성전에 오르시는
그 시간에 시므온을 감동시켜 미주치게 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으나 그들은 생후
몇주 지난 어린 아기와 가난하고 미천한 부부가
성전으로 들어오는 것으로만 보였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의 영의 눈에는 아기 예수님이 바로 구세주시요,
이스라엘의 위로자이심을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사람의 눈이란 생각 속에  있는 것만 현실에서
찿아내어 볼수있게 되어 있습니다.
시므온의 마음 속은 오직 메시야만을 그리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찾는 성도들도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전에 들어올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영의 눈과 귀가 열려 주님의 임재하심을 체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므온은 신앙생활이란 성전 생활이며 예배란 전적으로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예배임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3) 메시야에 대한 예언 찬송을 부른 자였습니다. (눅 2:29-32)


구원이란 즉 주님을 보는 것임을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체험 모두를 구원으로 여기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4) 구원은 온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은혜임을 그는 알았습니다. (눅:31)


'만민 앞에 예비된 것'이란 인간 종교가 아닌
하나님의 구원의 길임을 예견한 말입니다.
또한 구원의 역사를 두 가지로 나타내었는데, 
이방인에게는 빛의 역할로,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으로 표현을 하였습니다.

이는 주님을 모르고 사는 이방인들은
무지와 어두움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빛이 어두움을 몰아내는 구원으로 표시한 것이며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지만
천대와 멸시 속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메시야의 탄생으로 인한 영광의 회복이
이루어 질 것이 필요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시므온의 메시야의 찬송은
마리아의 찬송과 사가랴의 찬송과 더불어
이름다운 찬송의 하나로 5세기 이후
 저녁예배시 찬송으로 불리었으며
또한 임종시의 찬송으로 사용되어졌습니다.
(누가복음 주해 이상근 박사)

노년이란 오랫동안 산 삶에서 오는 것이기 보다는,
신앙 속에서 산 삶에서 오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인생의 열매는 육신에서 열리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서 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므온의 신앙의 열매를 보면서 인생의 마지막을
신앙 속에서 열매를 맺는 삶으로
좀 더 변화되어 져야겠다는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간 / 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체에게 존재의 기간을 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시간(Time)'은 생명과 같이 아주 소중한 의미인데도
막상 ㅡ'생명'이라 하면 절실하게 긴장으로 받아들이는 반면에,
'시간'은 그 보다는 무관심하게 여기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기간이 그 대상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시간의 개념을 바로 알고 산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을 가치 있고 유효하게 사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간이란 무엇일까요?


1. 시간의 개념


1) 구약에서의 시간의 개념은 기간 보다는
질적 상태를 나타내는 의미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시간을 나타내는 히브리어는 주로 “에트” 라는 단어로
그 의미는 “정해진 기간” 또는
“특정한 때”의 뜻으로 쓰여졌습니다. (겔 7:7)

본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영생체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시간이란 개념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음으로 죄는 죽음을 가져왔으며
죽음은 정해진 시간의 끝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영생에서 900년으로 제한된 생명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생명의 존재기간은 죄의 결과임으로 큰 의미가 없으십니다.

다만 주어진 기간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가 하나님의 관심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구약초기에 많은 사람의 이름들이 나열됐고
900년 이상 살았던 기간이 명시됐지만 사건은 아무것도 없음으로
그냥 “낳고, 죽었다”만 간략하게 표시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아브라함의 생애에 있어서는
그는 단지 175세로 비교적 짧은 기간을 살았으나
성경에서 창세기에 그에 대한 많은 부분이 기술된 것은
그의 삶이 하나님과 연관된 질적인 사건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의 시간에 대한 참된 이해는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시간 안에 있는 의미 있는 사건”을 보다 중요하게 여겼으며,
모든 인간의 삶에서도 양적인 기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질적인 시간이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즉, 죽어서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인간에게 물어지는 것은
'그가 세상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살았는가?'가 아니라
“그가 사는 동안 세상에서 무엇을 하였는가?” 하는
질적인 시간에 대한 해명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서는 시간은 의미의 기간으로
취급 되어졌음을 봅니다. (쉐마사전 P43 시간 참조)

  
 2)  신약에서의 시간의 개념은 시간의 흐름이라는 양적 기간

속에 중요한 때를 포함시키는 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헬라어에서 '시간(Time)'을 가리키는 단어는 세 가지인데
'크로노스' '카이로스' 와  '호라'' 라는 단어로
각각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1] 크로노스 (인간의 때)

“인간 편에서의 시간의 폭”을 의미합니다.

시간은 인간의 행동에 의해서 폭도 정해지게 됩니다.
즉, 같은 기간도 평안이 지낼 때 시간의 폭은 느낌 없이,
소중히 여김 없이 시간은 흐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위기나 고난이나 헌신이 삶속에 깊이 있게 수반될 때는
그 시기는 일정한 흐름보다 더 오래 느껴질 수도,
더 느리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마치 33년을 살았어도 100년을 산 것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100년을 살았어도 20-30년 산 것 같이 여겨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은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심으로
시간의 바른 의미를 얻게 되었습니다. (갈 4:4-6)

즉, 죄인으로서의 인간으로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새 삶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주어졌으며, (벧전 4:23)
이 같은 삶은 시간의 폭을 가장 넓혀서 사는 의미 있는 삶이 되었습니다.
(시간 밖에 계신 분이 시간안에 포함되어 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2] 카이로스 (하나님의 때)

“하나님 편에서의 지정하신 때”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의 기간을 정하셨으며
시작의 때, 죽음의 때, 심판의 때와 인간에게 간섭하실 때를 정하여
(징계의 때, 축복의 때, 연단의 때, 성취의 때-- 등)
계획하신 뜻을 인간의 삶 속에 나타내십니다. (전 3:3)

주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때는 구약에서는 예언으로 주어졌으며
신약에서는 예수님과 성령님에 의해서 성취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때인 '카이로스'를 가장 잘 알고 사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인간이 만약 하나님의 때를 모르고 살 때 마치 멸망하는
짐승과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닮아 하나님의 때를 알고 살면 우리의 삶 중에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는 참된 가치와
성취를 이루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3] 호라 (인간편에서의 좋은 시간)

“인간 편에서의 정한 시간, 좋은 시간”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일생을 살면서 정해진 때를 지키고 살게 됩니다.
(공부, 일, 성공, 결혼, 양육, 은퇴, 헌신할 때…… 등)

그러나 이와 같은 때는 인간 스스로가 정하여 진행할지라도
인간 스스로 정할 수 없는 때를 감안하여
하나님께 자신의 계획을 아뢰어 응답 받지 못하고 지낸다면
모두 이룬 것들이 다 헛수고가 될 수 있습니다.

즉, 위기의 때, 사망의 때, 하나님의 진노의 때..들을 모르면
나의 이룬 것은 무의미하게 없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이란 출생 후 사망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기간으로 주어진 존재의 기간이기 보다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계획하시고 예정하신 뜻을
이 땅에 이루는 영혼의 삶을 준비하는 기간임을 알고
소중히 여기고 사는 삶이 바른 시간을 이해하고 사는 삶이 됩니다.


2.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지금은 어떤 때일까요?

1) 세상은 말세임으로 고통과 타락의 때입니다.

[딤후 3:1-5]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여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지 않습니다.
인간이 고통을 받는 것은 자신이 행한 행실의 결과로 주어질 뿐입니다.


[1] 잘못된 사랑이 고통을 가져옵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대상은 자신과 돈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의 성향을 지닌 죄인이며 돈은 세상의 창조물입니다.
결국 자신과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사랑할 때 고통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할 땐 축복과 영생이 주어지게 됩니다.
인간이 타락하게 되면 죄가 정상으로 여겨지고
의가 비정상적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2] 잘못된 자기 평가가 고통을 가져옵니다.

자긍과 교만과 훼방은 자기 분수를 넘어서
남을 무시하거나 비방하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 때 일어나는 것이 불화입니다.
불화는 마음의 고통을 수반합니다.
인간이 다투고 헤어지는 것만큼 큰 고통이 없습니다.


[3] 잘못된 성격이 고통을 가져옵니다.

원통함, 참소, 사나움, 배반 등은 불화를 넘어선 싸움이 벌어지게 되고
그 결과로 끊임없는 전쟁이 이 땅에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성품은 죄성의 범주를 넘어선
마귀의 영향에 사로잡혀있을 때 생기게 됩니다.
마귀는 바로 참소자이자 배반자이기 대문입니다.


2)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는 지금이 은혜와 구원의 때입니다.


[고후 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하나님의 3대 사역''창조사역', '구원사역', '재 창조사역'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소중한 사역은 구원인 은혜사역입니다.
그리고 은혜의 집행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오셨는데 세상은 잠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재창조사역을 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심판주로 오십니다.
그 전에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3. 그러면 우리는 지금 어떤 상태에 놓여 있을까요?

1) 우리는 모두 잠들어 있는 때입니다.

[롬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1] 영혼이 잠들어 있습니다.

영혼이 잠이 들면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됩니다.
진리를 모르므로 육신의 일만 도모하게 됩니다.
세상의 부귀영화, 출세, 성공, 쾌락, 오락 등은
우리의 영혼을 잠들게 하는 유혹들입니다.

[2] 사명이 잠들어 있습니다.

[마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께서 '천국잔치'를 배설하고 사람들을 초청했을 때
첫 번째 사람은 사업이 바빠서 불참했고
두 번째 사람은 일이 바빠서 거절했고
세 번째 사람은 쾌락에 젖어 불참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들은 하나님과 연관된 관계에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들입니다.

사람은 사명이 없을 때 존재의 의미도 없게 됩니다.
영혼의 잠은 유혹에 빠져있을 때 오게 되고,
육신의 잠은 게으를 때 오게 되고
사명의 잠은 욕심에 빠져있을 때 오게 됩니다.


2) 여호와를 찾을 때입니다.

[호 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묵은 땅'이란 '버려진 땅, 아무것도 생산치 못하는 땅'을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 중에도 아무것도 생산치 못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즉, 무지, 고집, 죄, 타락 등으로 마음이 썩은 경우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잡초와 벌레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온통 마음이 세상 관심사와 유흥거리로 가득 찬 경우입니다.

이때는 성령의 쟁기 인 말씀으로 마음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회개로 씻어내고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갈아엎은 마음에 의를 심어
마침내 '거룩의 열매'를 맺게 하여 주십니다.

세상 속에서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을 찾지 말고
하나님을 찾아 남은 삶을 은혜의 삶으로 바꾸어야만 할 때입니다.


4. 우리가 하나님의 때를 알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를 가장 잘 아시고 그 분의 때에 맞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는 항상 성령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1) 성령님을 모시고 살 때 하나님의 때를 알 수가 있습니다.

[고전 2:9-10]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보내주신 성령님은 우리 마음속에 임재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 때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과 때를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성령님께 이러한 은혜를 얻기 위해서는
성령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중심의 삶이란 나의 주인 된 자아의 자리에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즉, 내 삶에 제일 중요한 분으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2)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살 때 하나님의 때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신 분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실천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음의 소원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3) 믿음과 신앙이 성숙할 때 하나님의 때를 따라 살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75세 때 하나님께서
자녀, 이름,  가나안 땅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자녀를 얻었을 때는 100세 때였습니다.
즉, 25년은 '믿음의 성장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러 가실 때 아브라함에게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창 18:17) 하시면서
자신의 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믿음이 자라나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면
친히 말씀으로 예언과 계시로 알려주십니다.

인간의 때는 창상 하나님의 때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열심히 하여
하나님의 때를 따라 사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기업무를 자
/ 보아스(Boaz)

[룻 3:13]


1. 인적사항


'보아스'는 광야에 있을 때, 유다 지파의 한 방백이었던
 '나손'의 손자였고, 여리고 기생 '라합'에게서 난 '살몬'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와 '엘리 멜렉'과의 관계는 랍비 전승에 의하면
그는 엘리 멜렉의 조카였다고 합니다.

'보아스' 란 그의 이름의 뜻은 '그에게 힘이있다' 라는 의미로
 시리아 역본에 의하면 그는 '율법에 있어서 유력자'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유력한 자'(2:1)로 표현 한 것으로 보아
신앙과 재력 모두를 갖춘 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엘리 멜렉의 기업을 물어줌으로 모압 여인인 '룻'과 결혼하였으며
'오벳'을 낳아 '다윗'의 증조부가 되었습니다. (4:13)


2. 시대적 배경


B.C.1390-1050년 사이를 사사기 시대라고 하는데
이 당시의 이스라엘은 도덕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몹시 타락해서 제각기 살기에 바쁜 시기였습니다.

이때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는데
'엘리 멜렉'(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
'나오미'(기쁨)부부는 베들레헴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이스라엘과는 적대 관계에 있었던 모합 땅으로
양식을 얻기위하여 이사를 하였습니다.

이는 신앙 중심의 삶에서 벗어난 환경 중심의 삶으로
경제적 추구를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어느덧 그곳에서 십년의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엘리 멜렉이 죽고 이어서 두 아들 '말론'(질병)
'기룐'(상실하다)의 두 아들도 이어서 죽어버렸습니다.

결국 나오미와 젊은 두 며느리인 말론의 아내 '룻'(친구)
기룐의 아내 '오르바'(돌아오는 자)만 남게 되었습니다.(룻 4:10)

나오미는 그제서야 자신과 남편이 모압 땅에 이주해 온 것이
잘못 되었음을 깨닫고 고향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두 며느리입니다.
결혼한지 몇년 되지도 않아 청상 과부가 되었으니
그들의 젊음이 너무 아까와 고향으로 돌아가 인생을
다시 출발하도록 권하였습니다.

그 두 며느리는 이스라엘 집안으로 시집와 모압에서
 섬겼던 우상과는 다른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배우게 되었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신앙의 열매가 룻에게 나타납니다.
둘째 자부 오르바는 고향 땅으로 돌아가고
룻은 결단코 시어머니를 좇아 베들레헴을 돌아오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의 신앙의 결단으로 세 가지로 포기하였습니다. 

1) 자신의 청춘의  인생을 포기하였습니다.
2) 고향과 민족을 등졌습니다.

3) 시모 봉양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런데 룻이 이같이 결단한데는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삶을 살려고
하나님을 선택하고 살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룻은 신앙을 선택함으로
인생이 바르게 열릴 것임을 믿은 여인이었습니다.

한편 보아스는 베들레헴 근교에 많은 밭을 가지고 있는
부유한 지주로서 그 지방의 유력자 였습니다. (룻 2:1)

이 '유력 자'란 뜻은 히브리어 성경에는 '큰 용사'로 표기되어 있으며
이는 '용맹스러운 영웅이다'라는 뜻으로서
이 말은 보아스가 적들과의 투쟁을 통하여 이름난 용사였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의 위치는 그 지방에서 '영웅적이며 부유한 지주'
충분히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어느날 베들레헴의 자기 밭으로 와서 밭의 추수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자기 밭에서 이삭을 열심히 줏고 있는 여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신앙의 눈은 동시에 신앙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주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룻에 대하여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룻에게 한 말을 보십시요.

[룻2:12]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보아스는 이미 모합 여인 룻이 시어머니를 좇아
이곳에 온 것과 늙은 시모를 봉양하는 효성과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살기로 결정한 것을
다 전해듣고 전해 듣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날개 아래 머물려는 가련한 작은 새에게
날개와 같은 은혜를 네 가지로 베풀어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1] 날개는 보호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는 룻에게 다른 곳을 가지말고 이 곳에
안전하게 머물도록 허락하였습니다.

[2] 날개 안은 따뜻합니다.

[룻 2:12]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고…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말씀대로 이는 위로와 안심을 주는 장소를 제공했습니다.

[3] 세째는 보장입니다.

그녀를 위하여 일꾼들에게 이삭을 다 베지말고
오히려 조금씩 뽑아버려 그녀로 넉넉히 줏게 하였습니다.

[4] 네쩨는 배부름입니다.

주인의 자리에 함께 참석하여 요리한 곡식을
마음껏 먹게 한 것입니다. (룻 2:14)

룻기에서 주인공은 룻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일을 맡아 시행하는 남자 주인공은 보아스입니다.
룻기에서 가장 하나님의 섭리를 먼저 깨달은 사람은 나오미입니다.

그 때문에 룻이 보아스의 밭에 이른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임을 알았고
룻이 보아스와 결혼을 하여야할 것도 제일 먼저 알아서 지시한 사람도 그녀입니다.

보아스는 룻을 탐한 것도 소유하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판단이나 의지대로 행하지않고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오직 행하며 베풀고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는 보아스로 룻을 통하여
다윗의 증조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말씀 따라 사는 삶이 섭리따라 사는 삶이며
섭리 따라 사는 삶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사는 길임을
보아스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날 나에게 위기가 있다면 오늘의 주신 말씀을 따르십시다.
우리의 앞에 계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업을 물어주실 것입니다.


3. 보아스 신앙 인품의 툭징



1) 부를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남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부의 남용이란 무엇일까요?

[1] 자기만의 소유를 위하여 부를 사용하지 않고 보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의 고통을 외면하고 그것으로 자기만의 기쁨과 위로를 느끼고 사는 것입니다.


[2] 자신에게 주어진 부를 더 쌓기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예컨대 값싼 노동력,
과도한 이자 적용, 상대방의 약점을 자신의 유익의
기회를 삼고
생대방의 재산을 헐값으로 매입하는…등
가난한 자와 무지한 자들의 소유를 착취하는 것입니다.

[3] 부를 미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입니다.

즉, 불법, 불의, 정욕, 향락, 지배, 군림, 핍박, 학대…등을 일삼으며

약한 자들을 부리며 자신의 농락거리로 여기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딤전 6:17-18]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보아스는 자기 부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쓰여지기를 원하며 산 사람입니다.
그 중에 한 가지가 선한 일과 선한 사업에 자신의 부를 사용한 것입니다.
자신이 룻의 기업을 물으려면 재산상의 손해를 감수해야합니다.
결국 자기 돈으로 산 기업은 나중에
일리 멜렉의 소유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는 계대 율법에 따라 이방 여인 룻을 취할 경우 그 집안은
남자가 모두 죽은 저주의 집안일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에도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혼 적인 삶보다 영적인 삶을 선택했습니다.
부란 혼 적인 삶에서는 군림의 역활을 하게되는 세력이 됩니다.
그러나 영적인 삶에서는 좋은 일에 사용되어지는 도구가 됩니다.
보아스는 자신의 부를 선한 일의 도구로 사용하며 산 사람입니다.


2) 신앙으로 자신의 욕망을 잘 다스리고 살았습니다.



[신 25:7-9]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취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거든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내게 행치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이를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 취하기를 즐겨 아니하노라 하거든
그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할 것이며."


이에 따르면 남편이 죽은 여인은 형제에게 나아가
죽은 형제의 대를 잇게 해 달라고 간청할 수 있는
관습이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 법을 잘 알고있는 나오미는 룻에게 그 법대로
보아스에게 나아가 간청하도록 지시를 하였습니다.

이에 룻은 몸을 단장하고 추수가 끝나는 날
타작 마당에 나아가 보아스 곁에 가만히 누었습니다.
그때 보아스가 놀라 일어나자 룻은 자신의 간청을 말하였습니다.

 더우기 이 시대는 도덕적, 신앙적으로 타락한 시대였기 때문에
서로가 허락한 남녀 관계는 얼마든지 져지르면서도
죄책감없이 살 수 있는 분위기엿습니다.

더군다나 룻은 젊은 여인이자 예뻤고
마음 또한 착한 정숙한 여인이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소유하고 싶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현실의 개인적인 욕망이나 충족보다
미래적 상황 전개를 말씀에 따라 행동하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제일 적격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자기보다 기업을 무를 수 있는 더 가까운 친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룻의 간청을 거절로 부끄럽게 만들지 않기 위하여
먼저 위로의 말로 안심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였습니다.

[룻 3:11] "네가 현숙한 여자인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다만 네 기업 무를 자가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
먼저 그에게 묻고 나서 거절하면 내가 무르리라."

그리고 룻의 겉 옷을 펼치게 하고 보리를 여섯번 되어
부어주고 룻으로 하여금 시모에게 갖다주도록 하였습니다.

이 사건에서 가장 궁금하게 여기고 있는 사람은 시모 나오미입니다.
보아스는 나오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섯번이나 보리를 달아준 것입니다.

이는 단지 그가 먹을 것을 풍성히 보냄으로 현실적으로
나오미에게 배가 고픈 것을 위로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여섯번이란 숫자의 의미를 전하게 한 것입니다.

즉, 여섯이란 숫자는 '노고와 봉사'를 의미하는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그러나 일곱의 수는 '안식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안식년은 6년 봉사후 7년 째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나오미에게는 안식년의 때가 이른 것임을
보아스의 암시를 받은 것입니다.

보아스의 사랑은 육신에 속한 것도, 혼에 속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영에 속한 사랑을 룻과 나오미에게 베푼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에 따른 책임과 도리를 지키는 신앙인에게서만
나타날 수 있는 사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3) 보아스는 오늘날 나의 기업을 물어주시는 예수님의 예표적 인물이었습니다.


구약은 항상 신약의 예표로 쓰여졌습니다.
그러므로 룻기에서 또한 보아스의 역할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형이요,
우리들에 대한 하늘나라의 기업을 물어주신 것의 예표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아스가 룻의 근족이었듯이
주님은 우리들의 가장 가까운 하나님 가정의 형제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받은 이 세상을
마귀의 유혹과 계략에 빠져서 모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더우기 성도들 중에는 지금도 사단의 세력에 눌리며
삶을 억울하게 갈취를 당하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단 마귀가 덤벼들어 빼앗으려들면
우리의 힘으로는 그 세력을 막을 수도 지킬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욥'도 하루 아침에 재산, 가족, 건강, 모두를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보아스는 이방인 룻을 자신의 신부로 맞아들였습니다.
주님도 이방인인 우리들을 자신의 신부로 맞아 들이십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기업을 찾아 주었습니다.
주님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업을 받게 하여주셨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통하여 자녀를 낳아 하나님의 족보를 이루게 하였습니다.
주님 또한 우리로 영적인 자녀들을 낳아 하나님의 가족을 이루게 하여 주시고 계십니다.

보아스는 후손인 다윗으로 이스라엘의 왕을 삼는 조상이 되었습니다.
주님 또한 우리와 후손들로 재림하여 이 땅을 다스리실 때에 우리와 후손들로 왕같이
이 세상을 다스리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업을 잃고 위기와 방황 속에 있는 성도분들은 지체치말고 속히
오늘 나에게 기업을 물어 주시러 오신 예수님을 만나십시요.

룻과같이 하나님을 선택한 나의 바른 신앙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비록 지난날 한 때 나의 잘못된 판단과 선택의 실수로 잃어버렸던 기업들을 
오늘 보아스처럼 오신 주님이 친히 나서셔서 모두 찾아 물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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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27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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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절
[에스더 9:22]


각 민족과 나라들마다 기념일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날들은 주로 큰 공적을 이루었던 승리의 날이라던가
민족적 해방을 이룬 날이든가 두고두고 기억하여 지킴으로
당시의 기쁨과 전통을 유지하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키는 절기는 항상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 드리는
특별 섭리에 따른 것입니다.

“부림절”은 유대민족에 대한 축제의 날이기도 하지만
흑암의 세력과 항상 직면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도
영적으로 얼마나 귀중한 날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부림절의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배워
성도 모두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신앙인들이 되십시다.


1.“부림”이란 무엇일까요?

부림이란‘바사’의 말 ‘부르’ (Pur)에서 유래된 말로
“제비 뽑기”란 의미입니다.
‘바사 제국’의 제 2인 자인 하만이
유대인들을 다 진멸하기 위하여 제비를 뽑아
12월 13일을 유대인 멸절의 날로 정한데서 기인한 말입니다.

정월 초 하루에 제비를 뽑아  그달 13 일에- 전도에 조서를 반포하였으니
이는 11개월이나 늦게 날짜가 잡힌 것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며
오히려 유대인들이 진멸되는 날이 아니라
반대로 승리의 날이 되게 하신 날입니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도의 날은 아니므로
성일이라 부르지 않고 “길한 날” 이라고 불렀습니다. (9:22)


2. 부림절이 제정된 배경

부림절 사건의 장본인인 ‘모르드개’는 베냐민지파 기스의 증손으로
많은 학식과 투철한 신앙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더욱이 에스더의 사촌오빠로서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가 되도록
에스더를 학문, 교양 및 인격을 딸 같이 잘 양육하여 성장시킨 위인입니다.

그는 높은 학문에도 도산성의 하급관리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 도성에는 하만이라는 자가 총리로 있어 그가 지날 때마다
모두 엎드려 절하라는 왕의 명령에 따라 모두가 다 순종하고 있었읍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만은 이 같은 신적 경외를 그에게 표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한 분만을 경외하는 신앙은 교만한 하만의 행위를 받아드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하만은 모르드개가 유대인인줄 알고
모르드개의 반항을 빌미로 유대인 대학살을 계획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이유는 하만은 아말렉의 왕손으로서, 과거에 아말렉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을 르비딤에서 기습 공격함으로 서로가 적대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 하나님의 명령에따라 이스라엘의 몇 차례의 공격을 받고
멸절위기에 놓였던 종족이었습니다. 이와같은 원한의 역사를 품고있는
하만은 이스라엘에 복수를 계획하고 유대인 진멸 작전에 나선 것입니다.

이에 왕의 재가를 얻은 그는 정월 초하루에
제비를 뽑아 ‘멸절의 날’이 12월 13일로 정하여 지자
1월 13일 조서반포일로 잡고 페르시아 전 지역에 공포함으로 유대인들은
모든 대적들로부터 도륙, 진멸, 약탈의 대상이 돼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에 모르드개는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재를 뒤집어 쓰고
궁궐 밖에 앉아 애곡하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를 전해들은 '에스더 왕비'는 심히 근심하여 이유를 물은 즉
자신의 민족이 다 죽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몸으로, 더욱이 자신이 유대인임을 숨기고 왕비가 되었는데
지금 와서 자신이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음을 이야기하였으나
모르드개의 한마디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라는 말에 자극을 받아 3일을 단식하고 왕께 나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 당시 에스더의 입장은 왕이 자신을 찾은 지 한 달이 넘었으므로
왕을 만나려면 어전에 나가야만 하는데 이는 왕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들어갈 경우사형을 받아야 하는 법을 어기며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스더와 온 유대인은 먼저 하나님께
3일간 단식으로 자신들의 억울한 사정을 고하였으며
금식 후 에스더는 왕을 뵈러 어전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녹게 하셨으므로
왕이 왕비를 보는 순간 어찌나 황홀하고 아름다운지
무슨 청이든 다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하셨습니다.

이때 에스더 왕비는 함부로 사정을 말하지 않고
하만과 더불어 함께 다음날 정찬에 참석하기를 요구하였습니다.

교만한 하만은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이 심판 받을 자리인지도 모르고 기뻐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날 생각한 것이 ‘모르드개를 어떻게 죽일까’ 궁리하던 중
높은 장대를 세워 그 위에 매달아 죽이기로 계획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날밤 하나님께서는 왕을 잠을 재우지 않으시고
서책에 기록된 모르드개의 과거의 공적을 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실 때는 택하신 사람으로
먼저 드러나 알려지게 하십니다.

오히려 모르드개를 높이라는 왕명을 받은 하만은
자신이 말꾼이 되어 모르드개를 말에 태우고 '이 사람은 귀한 사람’이라고
자신의 입으로 백성 앞에서 외치고 다니는 수치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 이후 왕궁에 불려간 하만은 에스더 왕비의 폭로에 따라
죄악이 드러나고 드디어 자신이 세운 장대에 모르드개
대신 매달려 죽는 운명이 돼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에 하만총리의 자리를 대신한 모르드개는
왕으로부터 새 조서를 받아 오히려 유대인을 죽이려 했던 무리들을
모두 죽이도록 조서를 바꿔 각 도에 시달하였습니다.

역전으로 끝난 유대인 승리는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감사의 날로 바뀌어
12월 13-15일 간 유대인들의 승리의 부림절이 되어 대대로 지키게 된 것입니다.


3. 부림절 날 이루어지는 행사

1) 금식의 날로 에스더를 기념하였습니다.

12월 13일 첫날은 왕비 에스더가 왕에게 도움을 구하러 나가기 전에
금식하고 기도한 것을 본받아 모두 금식함으로
 "에스더 의 날" 로 에스더를 기념하였습니다.

2) 회당에 모여 에스더 서를 낭독하였습니다.

그 다음 14일은 "모르드개 의 날" 로 모르드게 를 기념하기 위하여
새벽에 회당에 모여 에스더 서를 낭독하였으며
이때 모르드개의 이름이 나오면 공경과 감사의 축복의 말을 외쳤고
하만의 이름이 나오면 저주와 비탄의 소리를 외쳤습니다.

더욱이 하만의 열 아들들의 이름이 나올 때면
낭독자가 숨쉬지 않고 단숨에 이름들을 읽도록 되어있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모두 함께 죽임을 당해
일제히 같은 순간에 저주를 받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며
한번에 모두를 물리친것을 기억하기위함이었습니다.

3) 예배와 친교를 하였습니다.


14일 새벽에 에스더서의 낭독이 끝나면 아침에 모여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으며
예배 후에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며
기쁘게 떡을 떼고 서로 예물을 준비하여 주고 받았습니다.


4)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하여 나누어 주었습니다.



15일 아침에는 다시 회당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에스더서를 낭독하였습니다.
그리고 소외된 공동체의 남은 사람들도 돌보기 위하여 각자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생필품이나 양식을 준비해 가난한 동족들을 찾아가 나누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과 은혜를 모두 즐기며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이날에는 특히 축제가 벌어지는 마지막 날로 가장 무도회(부림절 사건),
어린이들의 각종 놀이 및 풍성한 회식들이 이어졌습니다.


4. 부림절을 통한 영적 교훈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사는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당하는 환난이나 핍박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와 간절히 간구할 때마다 그들을 구원하심으로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 드리며 살게 하십니다.

부림절은 12월 15일에 마지막 달로 1년을 감사하며 지키게 하셨는데,
유월절은 그해의 첫달로 1월 10일에 지키게 하심으로
항상 그 해의 첫 시작을 감사로 시작해서
그 해의 마지막을 감사로 마무리 하는 생활을 하게하신 것입니다.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은 의미를 깨닫고 1년 내내 감사생활을 하도록 원하십니다.


1)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려는 것은
대적의 세력이 핍박을 가하기 때문입니다.

에스더가 왕후의 자리에 오른 지 5년이 되는 어느 날,
하만은 왕이 자신의 지위를 높여줌에 따라 온 백성이
자신이 지날 때 무릎을 꿇고 절하도록 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당시 페르시아에서는 무릎을 꿇어 절하는 풍습은
신에 대한 경의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르드개는 그 사실을 알고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일에 대해 에스더서 위경서에 보면 13장 12, 14절에 모르드개가
하나님께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탄원하였다고 합니다.

“여호와는 내가 교만한 하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것은
경멸이나 교만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내 영광을 위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나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선한 일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의 발바닥에도 입맞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어느 인간도 하나님보다 더한 영광을 받기를 원하지 않고

여호와 이외에는 그 누구도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행했나이다”
라고 아뢰었습니다. (메튜헨리주석 참조)

이에 분노한 하만은 모르드개 뿐만 아니라
유대백성 전부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하만이 악한 영의 세력의 한 도구로 쓰여지는 모습을 불 수 있습니다.

[1] 사소한 한 사람으로 인한 개인 감정을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죽이려는 사단의 계략에 가담한 모습입니다.

[2] 그의 비열한 방법입니다.

거짓누명과 중상모략, 뇌물공세로 왕의 환심을 사는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왕께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보잘것없는 백성, 이 나라 민족과 병합되지 않고 각기 모여 사는데
주변에 피해를 주는 종족으로, 그들은 자신의 풍습과 법률만 따르며
언젠가는 반란을 일으킬 종족들입니다.그들을 멸하고 나면
은 일만 달란트를 왕께 드리리이다”

왕으로 보아서는 참으로 잘 하는 일이라고 여길 수 밖에 없습니다.
이로서 유대인 진멸 계획이 시작된 것입니다.
흔히 비방과 중상모략은 사단의 전술입니다.


2)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어둠의 세력과 주관자들에 의해 공격을 받을 시
맞대적하기에 앞서 하나님께 나아가 이 상황을 아뢰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마귀의 계획을 사전에 알고 계시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그 문제를 대처할 예비하심을 이루어 놓으십니다.
이를 모르드개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왕후 에스더에게 종용하였습니다.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에 4:14]

이에 자신의 사명을 깨달은 에스더는
자신부터 시작하여 전 유대인들의 3일간 단식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높으신 뜻과 계획을 따라 순종으로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자세가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자세입니다.

이 같은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단식은 하나님께 똑같이 긍휼을 얻게 되었는데

[1] 에스더는 왕 앞에 나갔을 때에 죽음의 위기가 온 것이 아니라
왕으로 하여금 사랑의 감동을 유발시켜 무슨 청이든
다 들어 주겠다는 마음을 갖게 만들어 주었으며


[2] 모르드개는 하나님께서 그날 밤 왕을 잠을 안 재우시고
궁중 실록을 읽게 하여 자신의 생명을 모반으로부터 구해 준 사람이
모르드개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왕으로 하여금 거짓의 가리움에 있지 않고
진실의 현실을 직접 보고 알게 하신 것입니다.

이 부분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대적과 직접 맞닥뜨리지 않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대적의 공격 바로 직전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도록 막아주십니다.
그 것이 바로 기도의 응답입니다.


3) 위기를 맞은 하나님의 백성은
함께 모여 힘을 합하여 위기를 대처해나가야 합니다.

세상의 풍조는 뇌하부동하는데 있습니다.
즉, 분위기에 휩쓸려 따르는 경향이 많기 때문에 하만을 쫓는 바사국
백성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유대인들은 죽음의 궁지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수산성에 다모여 금식하며 가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세상과 의 사이에서 어려울 때는
이와같이 함께 모여 힘을 합하여야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숫자는 많아도 단결력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숫자는 적어도
주님을 중심으로 한 신앙의 결속이 있습니다.

요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많이 지적 받고 나약한 상태에
있는 것은 서로가 모여 힘을 합하고 기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의 금식기도에 하나님의 응답은 그들로
아말렉 족속 하만과 그 일가는 물론
평상시 유대인을 경멸하고 핍박하던 무리들을
모조리 멸망시키 도록 하여 원수를 갚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7만 오천명을 죽이고도 대적들의 재산에 손을 데지 않은 것은 바로
사심에 의한 싸움이 아니라 영적 전쟁이기 때문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부림절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인 우리에게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의 비결과 여호와의 위대하심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좋은 예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어미' 여 사사
/ 드보라 (Deborah)
[삿 5:7]


1. 인적 사항



이스라엘의 네번 째, 사사인 드보라는 잇사갈 자손으로(삿5:15)
랍비돗의 아내였습니다. (삿4:4). 그녀의 이름 드보라는 "꿀벌" 이라는 뜻을
지닌 이름으로 그 이름처럼 부지런하고 지헤로운 여인이었습니다.

유태의 율법학자들에 의하면 그녀는 성전의 등의 심지를 만드는 일에
종사 하였다고 하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 쓰임받아
그 백성들을 밝혀주는 조명의 여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이스라엘의 여자사사가 되어 40년을 백성을 통치 하였으며(삿 4:4),
그녀는 주로 사마리아 남부 에브라임 산지의 라마와 벧엘 사이에 있는
 종려나무 아래 거하며 말씀을 선포 하였음으로 이 나무를 나중에
'드보라의 종려나무' 라는 명칭으로 불리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왕 야빈의 지배아래 20년간 학대를 당하고 지내자
여사사인 드보라는 당시 이스라엘의 장군이었던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초청하여 가나안 군대를 물리치도록 명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은 장본인 입니다.

승리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드보라의 노래'를 지어 바락과 함께 불렀습니다. (삿 5:1)


2. 시대적 배경


드보라는 젊어서 성전의 등의 심지를 만드는 일에 종사하였던 여인으로
지식이 많고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랍비돗과 결혼하여
평범한 가정의 여인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사사로 부르심으로
여선지자로서의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먼저 사사였던 에홋이 죽은 후 백성들이 악을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가나안 왕 야빈을 통하여 납달리 지파와 북부지역
이스라엘을 심히 압제하게 만들었던 시기인 B.C. 1216년 경이었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뒤 예전에 사무엘 선지자가
라마와 벧엘 사이를 오가며 직무를 수행하였던 그 장소에서
한 종려나무가 서있는 넓은 공중 집회 장소를 택하여
그곳에서 법령을 베풀고 백성들을 재판하여 주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의 명을 받고 당시 이스라엘의 장군이었던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초청하여 당시 가장 학대를 받고 있었던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들중 일만명을 뽑아
가나안 왕과 전투하기를 명하였습니다.

드보라는 여자였기 때문에 직접 군대를 소집하거나
지휘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음으로 당시 백성들로부터
명성을 얻고 있었던 바락을 지명하였습니다.

당시 철병거 900승등 탁월한 군사력을 가지고 20년동안
이스라엘을 지배하여 왔던 군대장관 시스라는 백성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비록 선지자의 명령이며 하나님의 말씀이었지만
바락 자신도 출전에 많은 부담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바락은 드보라에게 함께 출전하기를 건의 하였습니다.

이와같은 분위기는 모든 군사에게도 또한 많은 부담을 가져왔을 것입니다. 
더구나 적군인 시스라는 철병거 외에도 10만명이 넘는 병력을
철병거와 함께 넓은 평지인 기손 강가에 모았음으로
그 위세에 많은 긴장감을 이스라엘 군사들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의무적으로 전쟁에 참여 하였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신앙적인 마음으로 출전하였기 때문에
드보라의 담대한 하나님 말씀의 증거와 하나님의 신이 임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두려움이 떠나가고 그녀의 말 대로
 "일어나라 이는 여효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붙이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의 앞서 행하지 아니하시느냐" 란 말에
  의해서 승리의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드디어 산에서 내려와 시스라가 운집해있는
평지로 돌진 하였으며 전혀 기습하리라 생각지도 못했던
가나안 병사들은 놀라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더우기 하늘에서 별들이 도왔음으로 (5:20)
거센 우박 줄기와 폭우가 쏟아짐으로 철병거도 무력하였을 뿐아니라
큰 우박에 맞은 적군들은 쓰러져가고 멸망하였습니다.

오죽 다급했으면  적장 시스라도 철병거를 버리고 도보로
도망을 쳐 버렸습니다. 바락과 함께 승리한 드보라는
승전가를 지어 바락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녀는 B.C.1216 년부터 B.C.1176년까지 40년간을 사사로
이스라엘을 통치하였으며 미리암 (출 15:20)과 훌다(왕하 22;14)와 같이
이스라엘의 3인의 여선지자의 영예를 누리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3. 드보라의 신앙의 특징


신앙생활에서의 한가지 특기할 사항은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과
그 삶을 계속 유지해 나갈 것과는 별개라는 것입니다.
시작은 여러가지 동기에 의해 출발하게 되는데 (질병, 고난, 문제,
축복, 갈급…등) 이 문제들은 곧 해결 받을 때가 오게 됩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의 지속은 필요성을 잃게 되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태평하면 하나님을 떠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시 괴로움을 주시곤 하십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시대의 사사는, 참된 신앙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귀감이 되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러면 드보라는 사사로서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요?


1) 드보라는 담대한 용기를 지닌 여선지자였습니다. (삿 4:8-10)


가나안 민족과 왕 야빈은, 여호수아가 가난안땅 정복전쟁을 할 당시
하솔의 도읍과 그 당시 왕 야빈을 칼로 쳐 죽이고 도성을 불살랐으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그 도성은 회복이 되고 세력은 재 규합되어
마침내 야빈은 하솔의 왕이 되었으며,  그 군대장관 시스라는
 과거의 땅을 빼앗겼던 울분과 자신의 조상들을 죽였던
이스라엘에 지독한 적개심을 가지고 그들을 억압하였습니다.

이 잔악한 지배는 20년이나 계속되었고 견디다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구하여 주시기를 부르짖었습니다. (삿 4:3)

이때 하나님께서 드보라를 세워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셨는데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하였을뿐 아니라.
직접 전쟁에 참여해 군사들을 격려하며 사기를
북돋아준 용감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의 담대함은 믿음으로 부터 나왔으며, 그녀의 믿음은
현실을 바라보는 대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였기 때문에
그녀의 눈에는 적군의 군대장관 시스라와 그가 거느린 철병거 900승의 군대도
안중에 보이지 않았고 자신들의 군사가 만명인데 비해 적군은
10만-20만명이 집결된 것을 보고도 바락과 군사들에게 명하여
선재공격을 하도록 명한 여 전사 였습니다.

드보라의 믿음의 확신과, 군사들을 향한 하나님 말씀의 증거는
모든 군사들에게 승리의 확신을 불러 일으켰고 그녀가 외친 한마디
"여호와께서 너의 앞서 행하지 아니하시느냐?"(삿 4:14) 라는 구호는
일만명 군사가 10만병의 군대를 향하여 돌진하는 용기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누구에게나 위기의 때는 주어지게 됩니다.
우리도 공격이냐 후퇴냐를 결정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만일 상황 위주로 산 경우에는 100% 후퇴하기를 결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씀따라 산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입니다.
대부분 하나님의 뜻은 불가능한 현실에 믿음으로 대응하여
나가도록 명하십니다.

여 선지자 드보라는 이 점에 있어서 조금도 세상이나 상황을 따라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왔음을 보여준 여인이었습니다.
믿음이 담대함을 산출함을 보여준 여사사였습니다.   


2) 자신의 믿음을 실제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증명한 능력의 여사사였습니다. (삿 5:20-22)

여호수아가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모세가 산상에 올라 기도함으로
이스라엘이 승리를 하였듯이 드보라 또한 다볼산에 올라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역사를 베푸시사 대적을 패하게 하셨습니다.

[1] 별들로 돕게 하셨습니다. (삿 5:20)

[삿 4:15]"여호와께서…패하게 하시며…" 란 말씀에서
어떻게 드보라의 기도에 응답하셨는지를 과거의 인용된 문구로부터
도우심의 구체적인 예를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여호수아가 아모리 다섯 왕과 싸울 때,
"여호와께서 패하게 하시므로"[수10:10) 에서 하늘에서 큰 덩이
우박을 내리시므로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 많았더라."하였고(수10:11)

또 그 다음은 [삼상 7:10] "여호와께서 블레셋사람에게
큰 우뢰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 지라." 하였음으로
큰 우뢰가 비와 더불어 내렸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과거 사건들로 미루어 보아 바락이 시스라 군대들과 싸운 날에도
하늘에서는 큰 우박덩이가 쏟아졌으며 비바람과 천둥번개가
내려침으로 철병거들은 진흙 바닥에 묻혔고 우박과 번개를 맞은 적군은
비명과 함께 모두 혼비백산하여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2] 기손강 으로 돕게 하셨습니다. (삿 5:21)


하늘로부터 돌연 엄청나게 쏟아진 폭우는 시스라군대가 집결해 있는 지역으로
흘러넘쳤는데 그 지점은 바로 강들의 거대한 합류지역 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홍수는 사람, 말, 병거들을 덮쳐버렸고 수장시켜 버렸습니다.

이는 마치 애굽 병사가 이스라엘 백성을 쫓아 홍해 바다 갈라진 길을
추격해 왔을 때, 여호와께서 바다를 합류시키심으로
모든 병거와 군사들이 수장 되었듯이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는 기손 강이 '옛 강' 이라 불리어진 이유가 바로
시스라와 군대를 멸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예정 해 놓으신 강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성령님의 은사중 능력 행함의 은사가 있습니다.
드보라 선지자는 이같은 성령님의 큰 역사를 체험한 것으로 보입니다.


3) 하나님께 진심으로 영광을 올리는 선지자였습니다. (삿 5:1-31)

드보라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왕 야빈을 물리치신 기쁨으로
영광의 개선가를 지어 불렀습니다.
이 노래는 승리의 사건들이 직접적이고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감사와 찬양으로 표시되어있습니다.
이 노래는 사사시대의 시들 중에서 지금까지 보존 되어진 유일한 시입니다.

특히 31절에 이스라엘의 승리사건이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우리의 삶에 똑같이 적용되어질 예표적인 사건임을 드보라는
표현하고 있음으로, 참된 신앙인의 마음가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이와 같이'
란 말을 가나안 왕 야빈이 진멸된 것과 같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대적하고 핍박하는 무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모두 심판 받게 될 것임을 소원하는 기도로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있습니다.

또한 주를 위하여 영적전투를 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놀라운 승리의 축복을 받을 것임을 확신케 하여 줍니다.

'해가 힘있게 돋움같이 하옵소서' 란  이 세상의 어두움은
강한 밝은 빛으로 완전히 축출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겐
활력과 승리가 주어짐을 확신하는 표현입니다.

많은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기적들을 우리에게
간증하여 줌으로 믿음을 더욱 지닌 신앙인으로 성숙하게 자라나게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드보라 여 선지자는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승리가
오늘날 우리들의 승리가 되기를 하나님께 구하고 있으며 우리들로 하여금
해같이 빛나는 의인이 되어 대적을 물리치는 승리자가 될 것을
기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감동을 주는 참 선지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드보라의 신앙을 본받아 다같이 해 같이 빛나는
 의인들이 되어 세상의 어두움의 세력을 이겨나가는 승리자들이 되십시다.
(그랜드 종합주석과 QA 성경연구 시리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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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마 5:3-12]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이 지켜야할 규례를 내려 주시고
하나님 나라에 알맞는 백성이 되어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는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을 주셨으며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산상수훈을 그의 백성에게 내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려주신 이 두가지 명령은 따로 따로 여길 것이 아니요,
어느 한 쪽을 택하여 그것만 지킬 것도 아닙니다.
그 이유는 복음이 율법의 완성이며 율법위에 은혜가 있으므로
성도는 율법이 제시하는 기준 이상으로 살아야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핵심이 십계명이듯 산상수훈의 핵심도 팔복과 그에 따른 행위입니다.


1. 산상수훈의 정의


산상수훈이란 주님이 그의 제자들(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천국백성으로서의 삶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산에 오르사
그 들에게 들려주신 교훈을 말합니다.

이 말씀이 너무 가치있는 교훈이어서 '산상보훈'이라고도 불리우며
인간에게 주어질 가장 큰 복들이 기술되어있음으로
'산상팔복'이라고도 불리어집니다.

이는 천국의 대헌장이요, 신구약 전 메시지의 요약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 교훈이 행해진 산은 디베랴 서쪽과 막달라 남쪽에 위치한
완만한 구릉인 "핫틴산"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팔복산으로 불리어지며
그 곳에 '산상수훈 교회'가 세워져있습니다.

산상수훈의 총 주제는 천국백성으로서 마땅히 지켜야할
윤리적, 종교적, "의(righteousness)"이며
이를 위하여 예수님은 세부분으로 나누어 말씀하셨습니다.
즉 서론 부분으로서 마 5:3-12절까지, 본론 부분으로서
마 5:13-7:12절까지, 그리고 결론 부분으로서
마 7:13-27절까지 3장에 걸쳐 말씀하고 계십니다.

서론에서는 천국백성이 지녀야할 기본자세와 그에 따른
8가지 복들에 대하여, 본론에서는 구원의 진리에 따라
의를 지향하는 삶에 대하여 마지막 결론에서는
이 수훈을 지키는 자와 안지키는 자에 대한
축복과 저주에 대하여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2. 산상수훈의 중요성


오늘날 신앙생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피상성''세속성''기복성'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과의 신앙생활과 대조해볼 때, 신앙은 점점
현실위주의 안일함과 단지 행복만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영혼과 천국에 대한 본질은 점점 희석되어져가서 교회생활이
얄팍스럽게 변질되어가고 있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삶의 주체는 세상과 그에 속한 것들이기 보다는
성경이며 핵심은 천국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성경을 인생의 필독서로 보고
매일 소중히 여겨 읽는 경우는 드믑니다.
 더우기 현실의 삶에 바빠 천국을 생각할 틈도 많지가 않은 형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값싼 은혜를 강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값싼 은혜에 젖어 구원을 쉽게 여기고 사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산상수훈을 대할 때, 도저히 나는
저 수준에 도달을 할 수 없다고 좌절하는 마음부터 생기게 됩니다.

산상수훈이 신앙적 윤리적 수준이 높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그만큼 높다고 여겨야만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문제를 풀어주시기 위하여 '중생' '성령 내주 생활'
하고 살도록 성화의 삶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오셔서 우리에게 믿음의 중요성을 알려주십니다.
세상과 천국이 따로 떨어져 있음으로 따로따로 생활해야 되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구원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영접한 이 순간이
구원의 길을 가는 것임을, 또한 천국의 축복은 천국에 가서만 누릴 수 있는
축복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 천국의 축복을 누리는 생활이
시작 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이 축복된 삶을 지금부터 맛보고 살도록
천국시민의 바른 삶을 살게 알려주는 복된 말씀입니다.

주님은 율법과 같이 지키기에 불가능한 복음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습니다.
말씀자체는 불가능해도 이루어질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님의 도우심입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령님과 함께 지낼 때, 주님의 복음의 말씀을  따를 수 있습니다.

즉 초대 교회 교인들의 진정한 믿음 생활과 같이
다시 돌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에 따른 보상은 지금부터 누리면서 시작되게 하셨습니다.


3. 산상수훈의 핵심인 산상팔복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에덴동산 에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 때의 생활이 인간의 삶의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 축복과 행복을 잃어버린 이유는 인간이 무능하고
모자라서가 아니라 누릴 자격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즉 죄있는 인간은 하나님께 속한 것을 관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첫째는 구원이고,
둘째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위해서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것을 누릴 수 있을 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것들로 누리고 사는 삶이 행복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신과 타락한 혼을 만족시키는 쾌락일 뿐,
영에는 아무런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참 행복은 에덴동산의 삶과같이 영,혼,육의 순서의 기쁨으로 살 때,
인간은 이 땅에서 참 행복된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산상팔복을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이 행복을
찾아 살 수 있도록 길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1) 심령이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v. 3)

가난이란 부족하거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마음이 비어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을 모두 포기하고 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심령에 다른 것을 채우면 세상의 것을 비울 수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욥 32:8] "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

전능자의 기운을 받으면 마음을 비우게 할수 있습니다.
이 때에 주어지는 것이 천국을 소유한 축복입니다.
이 것을 우리는 심령천국 이라고 부릅니다.
세가지 천국중 첫번 째 천국입니다.

앞으로 두번 째, 세번 째도 주어집니다.
그들은 바로 천년왕국과 하늘의 천국입니다.
그리고 심령천국이 천국의 시작입니다. 첫번째 복입니다.

2) 애통하는 자가 될 때 위로의 복을 받습니다. (v. 4)

애통이란 마음이 매우 슬퍼 우는 상태를 말합니다.
인간이 언제 가장 슬픕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할 때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가장 사랑하고 인간을 가장 사랑하는 분은 누구십니까?
바로 하나님 이십니다.

애통하는 마음이란 하나님을 잃어버린 아픈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하여 성령님께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통회자복하게 만드십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보혜사 성령님이 내주 하셔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가장 큰 위로가 '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랑의 회복의 위로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가된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습니까?
십자가를 넘어선 기쁨입니다. 바로 후사까지 이루어지는 복입니다.

3) 온유한 자가 될 때 땅을 기업으로 받는 축복을 얻습니다. (v. 5)

기질은 성격이고 온유는 성품입니다.
성품은 성격이 길들여질 때, 생기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성품은 주님안에서 거듭나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예: 사도바울).
이때, 이 땅의 기업이 주어집니다. (에덴동산, 가나안 땅…등).

장막도, 사업도, 사역도, 이 것을 분깃이라고
다윗은 기뻐했습니다(시16:6편).
그리고 천국의 기업은 유업으로 남아있습니다.
이 땅의 기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십시요!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십시요, 배가 부른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v. 6)

육신의 배고픔은 배가 곺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차원의 배고픔이요,
진정한 배고픔은 영적인 배고픔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40일 금식후 돌로 떡을 만들어 먹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이 더 먼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일을 중명한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고후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케하고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사도바울 같이 예수님을 소유한 자가 가장 배부른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신의 배부름은 저절로 해결이 됩니다. (예: 12 제자들)

5)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었을 때, 긍휼의 여김의 복을 받습니다. (v. 7)

인간이 지닌 잣대는 판단의 잣대요,
하나님께서 지니신 잣대는 긍휼의 잣대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처럼 자식을 바라보는
마음의 긍휼의 잣대를 가지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안에서
모두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남이 아니라 가족 입니다.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취하였음에도
하나님의 긍휼로 용서를 받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을 긍휼히여겨 죽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배반한 자녀 압살롬도, 자기를 저주한 시므이도,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간 아내 미갈에게도
원망하지 않고 긍휼하 여겼습니다.
그 댓가를 하나님께 받은 것입니다.

6)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될 때 하나님을 뵙는 축복을 받습니다. (v. 8)

회개는 마음 속에 죄를 씻어 비워줍니다.
그 다음에 청결하게 마음을 유지 시켜주는 것은 말씀입니다.

[엡 5:26] "이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마음 속엔 무엇을 담아두느냐에 따라 정결과 부정이 정해집니다.
매일 말씀을 일고 묵상을 담아주면 청결한 마음이 나를 거룩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을 만나게 되는 기회입니다.
구약에서는 모세가 하나님을 제일 많이 뵈었고,
신약에서는 사도바울이 승천하신 예수님을 제일 많이 뵈었습니다.

하나님을 뵙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동행하고 계심을 의미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진수는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을 뵙는데 있습니다.
말씀이 이를 가능하게 해줍니다.

7) 화평케하는 자가 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축복을 받습니다. (v. 9)           

모든 화평을 가로막고 깨어지게 만드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모든 화평을 이룰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우리가 남들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와 나 사이에 언제나
예수님을 모시고 있을 때만 가능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로 하여금 상대방을 영혼의 차원에서 바라보게 하십니다.
지옥에 갈 것을 생각하면 불쌍한 마음을, 천국에 갈 것을 생각하면
기쁜 마음을 갖게 됨으로 잘 지내게 만들어줍니다.

하나님의 구원에는 세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녀의 단계, 둘째는 아들의 단계, 셋째는 후사의 단계입니다.
자녀는 주님을 영접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만 아들의 단계는
원수를 사랑하고 자비함으로 자격을 얻을 수 있습니다. (눅 6:35-36).
그리고 아들에게는 기름부음이 주어집니다.

8)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될 때에 천국이 주어지는 복을 받습니다. (v. 10)

죄된 생활과 동류화 시키려는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요와 압박을 가합니다.
이에 따라, 예를 들어 다니엘은 사자굴에 들어가게 됩니다.
스데반은 돌에맞아 죽게 됩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의 핍박은 천국에서의  상급의 기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희망과 기쁨을 바라보고 넘어가야합니다.

신념은 현상을 주로 바라보게 하는 반면에,
믿음은 말씀이 가리키는 최종의 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성령님이 신념을 믿음으로 바꾸어주십니다.

심령천국은 천국의 시작이지만, 의의 핍박으로 인한
상급 천국은 천년 왕국과 하늘나라입니다.
더 높을 수록 더 큰 것입니다.

이상 주님이 들려주신 자격을 잊지 말고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성령님과 동행할 때,
이룰수 있음도 아는것이 중요합니다.


4. 산상수훈의 말씀을 따라 살 수 있는 길


구약에서의 율법은 문자 그대로를 받아들여 각자의 힘과 노력으로
지켜 나가도록 주어진 행위계약 입니다.

그러나 산상수훈의 복음은 마음속에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깨닫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루어 나가도록 주어진 은혜계약 입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구약의 율법같이
지키기 불가능한 명령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주님도 성령님의 능력에 힘입어 구원사역을 모두 이루고 마치셨듯이
우리들도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 수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요?

1) 성령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말씀을 매일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말씀이 싫고 따르기가 어려운 것은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육이 죽듯이 곧 지옥에서 영혼이 죽습니다.
오직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구원의 밧줄인 성경말씀 입니다.
말씀의 줄을 매일 튼튼히 잡고 있는 사람은 산상수훈의 말씀은
당연히 지켜야될 하나님 아버지의 뜻임을 알고 따르게 됩니다.

참 은혜는 구원으로부터 느끼는 것이지,
축복과 응답으로부터 느끼는 은혜는 선물을 주시는분 보다
선물을 더 좋아하는 욕심에서 나오는 은혜일 뿐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한번 바라보고 읽기를 원하십니다.

2)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삶만이 성화의 삶을 완성시켜줍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처소로 지음을 받은 곳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을 담지않고 이 세상의 어느 것을
담는다해도 그 영혼을 만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영이 비어있을 때, 혼과 육은 무능합니다. 아담이 영생과 지혜로
살 수 있었던 것은 혼의 능력이 아니라 영의 능력 이었습니다.

욥기 32:8과 같이 "전능자의 기운이 그의 심령에 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나의 삶의 주관자로 모셔들이면
나의 영과 혼과 육은 성령님에 의해서 다스려집니다.
성령님 안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다같이 예수님께서 주신 산상수훈의 말씀을 준행하며 살기 위해서
우리 모두 보혜사 성령님을 더욱 의지하고 복을 누리며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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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러기 은혜에 만족한

/ 수로보니게 여인
(A Canaanite woman of Tyre and Sidon.)

[마 15:28]




1. 인적사항


1) 가나안사람: 수로보니게 족속, 헬라인
2) 귀산 들린 딸을 둔 어머니
3) 이방인으로 기독교로 귀의한 여인
4) 그녀의 이름은 '유스타'이며 딸의 이름은 '베니게'
5)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이 큰 여인으로 인정받은 여인


2. 시대적 배경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고조되고 있는 유대종교 지도자들의
긴장을 느끼시고 유대인의 거주지와 헤롯의 관할권에서 벗어나
갈릴리 호수로부터 약 50-60 Km 떨어진 서북쪽 지역인
지중해 연안도시 '두로'와 '시돈'지방으로 나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는 옛날 가나안 땅에 살던 가나안 족속이
살고 있었으며 그들은 옛날 수리아 영역 보니게 지역에
보니게인들 속에 섞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수로보니게 인'이라 불렀습니다.

이들은 아프리카 사람들과 시리아인 혈통으로 갈라져 있는 가운데
이 여인은 시리아인 지역의 사람들에게 섞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알신과 아스다롯 신을 숭배하는 이방인들로서
비옥한 골짜기와 지중해 연안 평원에 대단히 부요한
고대 문명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는 도저히 인간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귀신들린 딸이 있었는데 이 귀신을 쫓아내려고 그 지역 우상들을
다 섬기면서 고침을 받기를 노력하였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 여인은 예수님에 대하여 전해듣기 시작했습니다.
병자를 고치신 능력도, 오병이어를 베푸셔서 오천명이 먹고
남은 부스러기가 12 광주리나 남았다는 기적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하여 더욱 알아본 결과 다윗의 자손으로
올 메시야란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자라났고 그 믿음은 우상숭배를 버리고
기독교로 귀의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께서 자기가 사는 지역으로 오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그녀는 주님을 뵙고 딸의
귀신들린 병을 고침 받을 각오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주님을 쉽게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람들을
예수님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막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먼 거리에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하고
큰 소리를 질러 예수님께 호소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이 자기에게 다가올 줄을 알고 계셨습니다.
구세주이신 주님이 지니신 영혼은 구원을 받기 원하는
영혼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서 그 여인의 영혼이
예수님께 나아올 것을 이미 아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 여인이 주님께 나아오기를 허락받자 가까이나와
무릎을 꿇고 예수님께 직접 아뢰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 여인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한한 신성을 느끼게 되었고
입으로 나온 첫 말이 '주여 나를 도우소서!'란 말이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에서 '주님'(Lord)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주님은 이 여인이, 위대한 능력을 베푸는
한 인간에게 부탁하는 것으로부터,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간구로 변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 때 주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더욱 자라나게 하시기 원하셨습니다.
즉, 그녀의 간구를 거절한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하셨습니다.

이 때, 이 소리를 들은 여인은 그 말씀이 자신을
도와 주신다는 확신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개라고 표현한 단어 - '퀴나리온'이라는 말은
경멸적인 들개나 사나운 개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집안에서 기르는 애완용의 강아지를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 그 여인은 순간적으로 '오병이어 기적'에서
유대인들이 먹고 남은 부스러기가 무려
12 광주리나 된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렇게 배불리 먹이시고도 부스러기를 열두 광주리나
남게 하신 주님의 풍성한 은혜를 받고 싶었습니다.
그레서 예수님께 부스러기를 청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이 온전히 자라났음을 아시고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며
그녀의 딸을 말씀으로 고쳐주셨습니다.
이와같이 주님은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멀고도 먼
이방 땅, '두로'와 '시돈'지방까지 가신 것입니다.

만일 우리에게도 주님을 찾아야만 되는 믿음이 있다면
주님은 오늘도 땅끝까지 이르러 나를 찾아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인의 믿음을 본받아 우리의 믿음을 키우십시다.


3. 수로보니게 여인의 신앙의 특징


1) 사랑이 많은 여인 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딸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침묵하심을 보고도 소리질러 도움을 요청한 것도,
주님이 이방인을 개로 표현하시면서 '떡을 줄 수 없다'
거절 하심을 받으면서도, 주님께 매달린 것은
병든 딸을 어찌하든 고치고 싶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즉, 이 여인은 딸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여기고 살았던 것입니다.
결국 딸의 병을 고친 것은 그녀의 사랑이었습니다.

누구나 가정마다 환난이 있습니다.
가난, 질병, 재난…등 이같은 문제들을 풀기 위하여
세상적인 방법을 동원해 봅니다. 그러다 아무리 애를 써도
해결이 안되면 포기 해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 때에 포기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상대를 포기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신을 포기하는 마음입니다.

나자신을 희생할 때, 남은 살아납니다. 이것이 사랑의 법칙입니다.
때때로 신앙에는 자신을 버려야할 때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 대상을 올바로 찾아가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희생의 대상은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완성은 오직 주님을 위하여
자신을 포기함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딸을 사랑함으로 자신을 희생하였지만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시 자신을 희생하는 참다운 믿음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2)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믿음이 모든 사람들애개 똑같이 귀중하지만
각자 지닌 믿음의 분량은 똑같지가 않습니다.
믿음의 분량은 예수님을 얼마큼 신뢰하고 있느냐에 따라
주님의 역사하심도 나에게 차등 적용됩니다.

예수님께서 정작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나타내신 것은
제자들과 유대인들에게 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적과 이사를 목격하였음에도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본다고 믿어지는 것은 아님을 봅니다.
'주님께서만이 나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다는 마음'에서
믿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두 사람을 주님은 칭찬하셨는데
한 사람은 로마 백부장이며,
또 한 사람은 바로 오늘의 성경 인물인
'수로보니게 여인'입니다.  
   
그들은 둘다 이방인이었지만 유대인들보다 믿음이 컸습니다.
그러나 둘 중에서도 믿음이 더 큰 사람은 바로 수로보니게 여인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두 사람 다 '주님이 말씀만 하시면
모든 질병이 고침을 받는다'
는 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 거주한 환경은 정반대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은 유대인들과 함께 살고 생활하였으며
회당을 지어주는 등, 상당히 주님의 역사하시는
환경에 속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이 여인은 전혀 다른 우상 숭배 지역에서
오직 자신의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또한 백부장의 하인은 중풍병 환자였지만,
이 여인의 딸은 흉악한 귀신에 사로잡혀 남에게 해를 주는
심각한 발작병 이었습니다.

병의 원인이 육신의 연약함에 있는 것과
사탄 마귀에 있는 것과는 치료에 대한 기대가 다릅니다.
즉, 약한 것은 강하게 하면 됩니다.

그러나 마귀를 쫓아내는 것은 육신을 강하게 하는 것 외에
흉악한 세력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주님께 대한 믿음은
이미 귀신을 쫓아 낼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지니신 분'으로
여긴 믿음이었습니다.

가능과 불가능한 사이에는 여러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가능 쪽으로 갈 수록 믿음은 커지지만,
불가능한 쪽으로 갈 수록 믿음은 적어집니다.

그런데 상황에 따라 커졌다 적어졌다 하는 믿음은
사실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입니다.
불가능한 것이든 가능한 것이든 변함없이 믿는 믿음이 생길 때,
바른 믿음을 소유한 것이 됩니다.


3) 인내의 여인이었습니다.

인내는 희망이 있을 때만 존재합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일찍 포기하게됩니다.
이 여인은 딸의 병고침의 소망을 오직 주님께 두고 산 사람입니다.

환경과 상황은 마치 밤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은 마치 태양 빛과 같은 대낮과 같습니다.
 "내가 절망의 밤에 속한 사람이냐?", 아니면
 "희망의 낮에 속한 사람이냐?"
내가 어느 것이든 바라보는 쪽에 달려있습니다.

믿음이란 낮이 밤을 없앤다는 생각이고,
포기란 밤이 낮을 이긴다는 생각입니다.
즉 환경이 환경을 지으신 하나님을 이긴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밤같은 절망 속에서도 낮이 올 것을 바라본 여인이었습니다.
주님이 오시면 자신의 불가능한 문제가 해결된다는 소망을 가진 여인었습니다.
드디어 이 소망은 모든 것을 참고 견디게 해주는 힘이 되었습니다.

'인내의 끝' - 즉, 결과는
그 소중함의 참 가치를 아는 사람이 마침내 지닐 수 있는 덕목입니다.
그리고 그 끝을 알려주는 계시가 말씀입니다.

반면에 포기란 끝을 절망으로 잘못 알고았는 사람의 불안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삶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도록 예비하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결과가 좋던 나쁘던 모든 것이 결국엔 선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지금의 형편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 것을 믿을 때, 우리는 인내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릴 수 있었던 것도,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사도바울이 죽음을 무릎쓰고 복음을 전도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랑도, 믿음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인내란 열매를 맺을 때, 참 인 것이 드러납니다.

지금 현재 인내의 한계에 직면해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현재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소망을 희망으로 바꾸십시요!
이 여인처럼 딸이 병에서 치료된다는 소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바뀌어진 환경 속에서 내가 바라는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고 있는 행복의 희망을 바라보십시요!

상황의 변화 단계를 벗어나 결과의 승리의 단계로 바로 뛰어 넘으십시요!
수로보니게 여인은 딸이 고침받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집에 돌아가 본 것은 건강한 모습의 딸이 달려나와
어머니를 맞이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완성의 결과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다같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기적을 응답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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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은사

[고전 12:4-11]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하나님과 성도는 사랑의 관계이고
주님과 성도는 구원의 관계이고
성령님과 성도는 은사의 관계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 된 구원받은 우리들이 여전히 약하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덧입혀 주셔서
죄에서도 이기고, 세상도 이기고, 사탄 마귀의 세력도 이기고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기 위해섭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바로
성령님께서 각자에게 맞게 나누어 주시는 은사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각자에게 은사를 나누어 주실 때는
그에게 맞는 은사를 허용하실 뿐 전체 은사들은 다 주시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능력을 모두 소유할 수 없는
한계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사를 사용하는 면에서는 서로 보완하여 사용할 때에
성령님의 능력을 보완 완성하여 이룰 수 있습니다.
이 사역을 위하여 탄생하게 하신 것이 교회입니다.

즉, 교회는 성령님의 은사의 집합체이며
가장 강력한 영적인 세력이 집합된 곳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 마귀와 싸워 물리치는 곳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가장 능력 있는 공동체입니다.


1. 은사의 정의

구약에서 은사는 “투브” (좋은 것) 라 부르며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사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은혜와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좀 더 구체적인 축복으로
물질적인 축복 (렘 31:14)과 더불어 영적인 축복(렘31:14)과
구원 (시 27:13)도 포함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신약에서의 은사는 “카리스마”라고 부르고
이 단어는 “카리조마이” 라는 ‘값 없이 주다’ 란 단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값 없이 주신 선물”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영어로 “The gift of the spirit” 으로 표시되며
이는 주님께서 오순절 날에 120문도에게 내리신 성령강림과
후에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내리신 성령강림을 의미하는 말로
성령의 은사들인The Gifts of the Spirit” 과는 구별되는 말입니다.

성령강림 후 사도바울의 성령님 사역과
은사들에 대한 계시 및 확대 해석이 이루어짐에 따라
성령의 은사들은 개별적으로 성령님에 의하여 각각 개인에게 수여되어짐으로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데 쓰임 받는 은사들이 되어
교회의 성장을 이루도록 주어지게 된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고전 12:14-30)


2. 은사의 중요성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로,
은혜는 축복임에 반해 은사는 능력으로 주어지는 것으로서
사역과 봉사활동에 많은 유익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1) 신자 개인 신앙생활에 있어 더욱 깊은 믿음과
주님께 대한 자신감이 생겨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고 싶은
강한 사명감을 갖고 사역을 해나가게 해줍니다.

은사를 받은 성도와 평신도의 신앙 생활의 차이를 말하기를
활과 화살을 가지고 온 시선과 온 힘을 팔에 집중하여
과녁을 겨냥해 쏘아 맞추는 것과
소총을 가지고 겨냥하여 단지 방아쇠만 당김으로
명중시키는 것과의 차이라고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만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역하는 것이 쉽고 편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개인이 지닌 재능과 구분되며
영적인 일을 위하여 쓰여지는 능력입니다.

2) 은사는 서로 협력 보완할 때 더욱 완전해집니다.

은사는 한 사람이 모두 소유하고 있는 능력이기보다는
여러 사람이 나누어 소유하고 잇는 능력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온 몸의 지체가 한데 모여 몸을 이루듯이
각 은사들도 한데 모여 교회를 이루어 나갈 시
사역이 활성화되고 부흥이 일어나
교회성장이 크게 일어남을 말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하심은 먼저 교회를 양적으로 성장시키시며
이어 은사들의 적용으로
질적으로 성숙시키는 경로를 이루어 나가게 하십니다.

은사는 은사를 지닌 곳으로 성령님께서는 인도하시기 때문에
먼저 주의 종이 사명과 은사를 확고히 받게 되면
자연히 은사를 지닌 성도들이 모이게 되고
이어서 다양한 은사들의 활성은 교회를 부흥시키는 계기가 되게 됩니다.

3) 은사는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성령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가랴서 4:6절에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세상에 세워지는 교회의 사역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의 세계에 세워지는 교회의 사역은 할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이루어집니다.

성령님께서 운영하시는 방법이 하나님의 방법이시고
은사로 이루어지는 사역이 영적인 사역인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 나라를 훼파하려는 악한 영들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영분별, 신유, 능력 행함, 예언 등의 은사들은
필수적인 것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은사의 분류

1) 직임을 수행하기 위한 은사들

[1] 사도

사도의 기원은 예수님의 12제자들이나 능력과 지위에 따라 확대되었습니다.
즉,  바울사도 (롬 1:1), 바나바 (행 14:14),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롬 16:7), 디모데와 실라 (살전 2:6)…… 등
그리고 오늘날에는 각 교단 교파의 총회장, 의장, 감독…… 등
하나님께서 주의 종들과 교회 지도자들을 위하여 세워주신 권위자들로
사역방향을 조언, 분쟁 조정해결,
지도자들 교육지도 등을 감당하는 사역자를 말합니다.
이들은 성령님에 의해서 권위가 인정된 사람들입니다.

[2] 선지자

이 사역의 특징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메시지를 전달하는 임무로
죄에 대한 심판과 경고 및 미래의 올 사건을 예언하고
반드시 그가 전달한 메시지는 실현되어야 함을
하나님께서 입증해 주셔야만 하는 사역입니다.

[3] 복음전도자

에베소서 4:11절에 나와있는 은사로 빌립은 전도자로 불렸습니다. (행 21:8)
이는 한 지역에 고정된 지역 사역자가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어디든지 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특히, 두려움이 없으며 말씀 선포에 능력이 수반되는 사역입니다.

[4] 목사

이는 목양의 은사를 받은 사람으로
첫째, 양떼를 신령한 양식으로 잘 먹이고
둘째,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셋째, 어려움에 처한 영혼들을 위로하고 세워주며
넷째, 상한 자, 병자를 싸매고 치료하여 주는 역할을 하는 사역입니다.

[5] 교사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이 아니라 성경말씀만을 잘 해석한
능력으로 성도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주는 은사입니다.

[6] 섬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이 아니라
사역이나 과업을 대상으로 활용되는 은사로
헬라어 “디아스코노스”라는 이 말은 오늘날 집사에
해당하는 말로 교회사역에 열심히 봉사하는 은사입니다.

[7] 다스림

지도자의 은사를 말하며 권위와 직책으로 이끌기보다
자발적으로 헌신하여 목표를 달성하도록
밑에 사람에게 인품의 영향을 주는 사역자를 말합니다.
공감과 신뢰를 불러일으켜주며
보람을 나누어 갖도록 함께 솔선수범하는 사역입니다.

[8] 권위 또는 권고

일종의 상담 은사로서 난처한 입장에 놓여있는 사람에게
억울함을 덜어주고 위로, 격려하며 권면과 조언을 해줌으로
심적, 영적으로 회복을 시켜주는 사역입니다.
특히, 개인 상담에는 말씀과 경험으로
내적 치유를 시켜주는 능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9] 구제

물질에 대한 탐심이 없는 마음에
서로 나누어 사용해야 된다는 마음 가운데서 남을 돕는 은사로
절대 인정받거나 돌아올 보상으로 하지 않는 베풂입니다.
언제나 구제하는 것 외에도 불쌍한 사람을 돕는 헌금을 내는 은사입니다.

[10] 긍휼

권위하는 은사는 사람들을 주로 사랑과 위로의 말로써 돕는데 비해
긍휼의 은사는 사랑의 행동을 통하여 사람을 돕는 은사입니다.
긍휼의 대상은 주로 병자, 장애인, 가난한 자, 노인, 고아,
또한 불신자, 신자 구별 없이 베풀어 주는 마음의 은사입니다.

2) 기적을 베푸는 은사들

[1] 지혜

영적 진리란 연구하여 얻어지기 보다는 성령님과 직접 교통하는 가운데
얻을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하늘에 대한 지식이 열릴 때,
땅에 대한 모든 문제의 해결 방법이 쉽게 발견 되어집니다.
해석이 해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2] 지식

지혜의 말씀이 직접 계시와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지식의 말씀은
객관적인 계시 자료를 파악하고 그 것을
다양한 관계 속에서 적용하는 능력입니다.,
성서 번역이나, 성경강해 등은 지식의 은사를
받음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3] 믿음

일반적인 믿음은 나의 의지에 의해 생겨나는 반면,
은사로서의 믿음은 성경에 기록된 것을 믿는 것을
초월하여 주님과의 구체적이고도 확실한 관계를 성령님께서
베풀어 주심으로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드릴 수 있는 참 믿음입니다.

[4] 병고침

인간적인 수단없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해서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영적인 능력입니다. 특히 불치의 병이나 심한 정신병 등은
건강관리 부실에서 오는 경우도 있지만, 저주로 인한 질병의 영들로 부터
기인되는 경우도 있음으로 주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쫓아낼 수 있습니다.

[5] 능력행함

신유의 은사 와는 달리 온갖 종류의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입니다.
[모세가 애굽사람들에게 내린 재앙, 홍해바다의 갈라짐, 엘리야의 기도로
가뭄과 비가 내림, 엘리사의 죽은 사람을 살려냄의 기적, 주님이 풍랑을 꾸짖음,
오병이어, 사도바울의 엘루마를 저주함으로 장님이 됨…등]

[6] 예언

구약시대에 자주 나타난 은사로 계시의 수단으로 환상과 꿈이
제시 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직접 사무엘에게 들려 주셨듯이
예언자들의 귀에 들려주셔서 미래의 일을 대언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또한 집회시의 갑작스런 성령님의 말씀이나 계시로 임하여
그 즉시 특별 대상에게 주님의 뜻을 전하는 경우도 있으며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들려주기도 합니다.

[7] 영분멸

하나님과 인간과 마귀의 역사함을 구분하여 내는 능력으로
옳은 말과 선행행위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고해도
그 속 마음이 다른 동기로 부터 온 것이면 즉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마술사 시몬, 아나니아와 삽비라,  빌립보에 점치는 여종, 영지주의 이단…등]

[8] 방언

표적방언과[오순절 사도들의 방언) 은사방언(성령님이 은사로 주심)이 있으며
은사방법에는 사적방언과 공적방언이 있습니다. 주로 혼자하는 방언기도에는
 통역이 필요없으며 공적방언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예언의 기능을 가진 방언을 말합니다.

[9] 방언통역

방언의 문자를 일일히 번역하여 전달하는 능력이 아니고
전체적인 의미를 성령님이 깨닫게 하심으로 전달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특히 공적인 방언을 할 경우에는 통역의 은사를 지닌 사람이 필요하나
대개 공적 방언을 하는 사람에게는 통역의 은사도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은사들 외에도 독신, 청빈,
중보기도, 찬양, 축귀…등 여러 은사들이 있으며 각자의
사역 분야에 따라 성령님께서 나누어주십니다.


4. 은사를 얻는 방법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된 세상에서 강건하게
살 수 있도록 주어지는 능력입니다. 이는 죄로 부터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에게는 모두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임재하심과 내 몸 안에서 능력으로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1) 육신의 소욕을 버려야합니다.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 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 속의 마음밭을 성령님께서 임하실 수 있는 토양으로
바꾸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토양은 바로 성령의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마음들 입니다.

성도가 거듭날때 각자에게 은사의 속성은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 속성이 성령님에 의해서 피어날 때는
성화의 수준에 이르게 될 때입니다.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능력을 올바르게 쓸 수 있는
성숙한 자세입니다. 은사는 성화와 더불어 개발됩니다.
즉 성령의 열매와 은사는 보완관계 입니다. 

2) 사모하고(고전 14:1), 구하고(고전 14:12),
 기도해야합니다.(고전 14:13)


인간은 누구나 젊음의 건강과 근육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것은 어린아이 일 때는 누구도 이룰 수 없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성장하게 되면 몸에 관심을 가지고 음식도,
운동도, 지도도 받으면서 강한 체력을 꽃피우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능력도 영적성장과 아울러 말씀도, 실천도,
지시도 받을 때, 나에게 알맞는 영적근육인 은사도
성령님으로부터 부여 받을 수 있습니다.

운동선수들이 특별한 운동에 뛰어난 제능을 가질 수 있음은
자신의 취미와 적성에 맞는 종목을 계속 훈련과 연단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체질도 나에게만 주어진 환경속에서 문제들과
여건에 맞는 분야에 게속 영적 훈련을 쌓게 됨으로
그에 맞는 은사들이 주어지게 됩니다.

성령님은 나의 체질과 속성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주어질
은사부분의 훈련을 환경을 통하여 미리 훈련 시키십니다.
그리하여 그 분야에 대한 은사의 소망을 갖게 하시고 사역의 사명을
깨닫는 동시에 구하는 마음을 통하여 단계별로 허락하십니다.
결국 은사는 활용의 과정을 거쳐 더욱 커지며 강하게 완성되게 됩니다.

3) 성령님께 항상 순종해야합니다.

은사의 주도권은 성령님께 있는 것이지 인간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계획을 모르고 있지만
성령님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인간은 영의 세게에 대하여는
제한 적이지만 성령님은 영의 세계의 주관자이십니다.

은사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마귀와
싸워 승리하는데 있습니다. 이를 위해 나는 성령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사탄마귀는 우리로 성령님보다 앞서 가도록 부추깁니다.
교만으로 성령사역을 전복시키려 합니다.

하루에 1시간이상 성령님께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들게됩니다.
성령님께 순종은 말씀의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매일 매일 말씀 묵상과 실천은 성령님과 동행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성령님은 한번 떠나시면 다시 오시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어떤 댓가를 지불 하더라도 성령님을 놓치면 안됩니다.
오직 순종으로만 나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성령님이 우리안에 오셔서 은사를 베풀어 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성령님을 환영하고 인정하고 모셔들여
성령충만한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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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의 어미 하와/ Eve
[창3:20]



하나님은 여성을 아담과는 달리 거룩하고 오묘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 증거는 하와는 재질이 흙이 아니라 아담의 생령이 된 몸의 갈빗뼈를 취하여
재료를 삼으셨고 에덴동산에서 창조하셨으며,
그녀의 역할은 아담의 '돕는 배필'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근원은 한 뭄이 두 분신으로 나누어져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한몸을 이룰지니라."[창2:24]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몸을 이루는 과정을 죄를 짓고 난후에,
낙원을 떠나 나온 후부터 시작하게 하십니다. [창 4:1]
이로써 인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1. 하와의 특기사항

하와는 인류최초의 여자로써, 그녀의 출생은 부모없이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창조물로 민들어졌으며, 재질은 아담의 갈빗대입니다.

아담이 그녀를 보았을 때, 이르기를 여자라 칭한 것은
남자의 뼈와 살로 지음받았기 때문이며 -후에 하나님이 각자의
지은 죄에 대한 규제의 언약을 받은 후에,
여자는 아담의 종속과 종족의 계승의 임무가 있음을 깨닫고
'생명의 전달자'
라는 뜻의 '하와'로 다시 개명하여 불렀습니다. [창 3:20]

나중에 이 이름을 헬라식으로 '이와'라 붙여졌고
영어식 표기로는 '이브'로 불리어졌습니다.

그녀는 낙원에서 쫓겨난후 아담과 동침하여 가인과 아벨, 셋... 등
많은 자녀와 딸들을 낳았으며 아담이 셋을 낳은후 80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은 것으로 보아 [창 5:4] 하와도 함께 자녀를 낳고 지내다
아담이 930세에 죽었을 즈음에 비슷한 연령에 죽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2. 하와의 생애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최초로 거하실 처소를 만드셨는데
그곳이 바로 동방의 에덴 지역이었으며 에덴지역 중앙에 작은 동산을 만드시고
그 곳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두셨습니다. [창 2:8-9]
아담은 그 동산 밖에서 지음을 받았고 에덴동산의 흙이 아니라 보통 진흙으로
만들어졌으며 동산에 들어 오기전까지는 그 밖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하나님의 동산으로 이끌어 그 땅에서
살게하였으며 하나님의 소유들을 다스리게하셨습니다. [창 2:15]

아담은 낙원의 모든 것을 은혜로 물려받았으며 오직 그 축복을
누리는 데는 한가지 언약 인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말라는 조건을 지키면 되었습니다.

바로 이 금지령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동산에서는
거룩함이 유지 되어져야하기 때문에
육은 감각적인 쾌락을 멀리하고, 혼은 욕망과 호기심에서 떠나
오직 영이 하나님과의 교제로 인하여 거룩하고 성결한 상태를
유지함으로 혼과 육이 따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께서 동물들을 이끌어 오시며
그들의 이름을 지어주도록 하셨습니다. 그때 아담 앞에 나오는 동물들은
모두 암수 두마리가 함께 나왔고 이를본 아담은 자신에게 짝이없는것을 느끼고
고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아시고 "혼자있는것이 좋지 못하니
너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셨습니다 (2:18)."
그리고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빗뼈를 꺼내어 하와를 지으셨습니다.
이로서 하와는 아담과 다른 두가지 특징을 지닌 인간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구성은 흙이 아닌 남자의 살이며- 하와의 탄생은
아담같이 세상에서 지음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의 처소인
에덴동산 안에서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의 탄생이 생령의 몸과 거룩한 처소에서 나아야만 했던 이유는
후에 예수님께서 이 몸을 빌어 이 땅에 오시기 위한 조건을
갖추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보는 순간 기뻤으며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이 벗었어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몸이 생령을 통한 거룩한 몸이었기 때문에
육신의 쾌락과 마음 속의 욕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때 하와가 혼자 있는 틈을 타고 사단이 뱀을 통하여 접근합니다.
그리고 하와를 유혹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게 만듭니다.

하와는 아담으로부터 '저 열매는 먹으면 안된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왜 먹지 말아야 되는 지는 잘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뱀이 그녀에게 물었을 때, '먹으면 죽는다고 하더라' 라고
마치 남의 말처럼 말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때 틈을 본 마귀는 순간에 하와의 마음 속에 새 느낌을 주입시켰습니다.
즉, '절대로 안 죽는다' 는 두려움을 없애 주려 한 것과, 또한
'먹으면 오히려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된다'
는 교만의 유혹이었습니다.

순간, 하와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담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들은 말보다
마귀의 직접적인 해명과 설득력이 더욱 영향력있게 다가왔습니다.
이미 이 말은 그녀의 생각 속에 들어왔고 그 생각을 통하여 바라보는 눈은
실제 그 것이 자기에게 일어나게 해줄 대상물로 보였습니다.

그 결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었고 또한 아담에게도 주면서 먹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몸이 벗은 것을 깨닫고
수치스러움을 느껴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창 3:7]

여기서 '눈이 밝아졌다' 란 -다시말해 지금까지는
영이 지배하는 육신의 눈에서 거룩함만을 보아오다가
갑자기 죄가 들어와 육신이 죄를 지을 부분들이 보여지게 되었고
이미 선악과를 먹은 중독증은 육신에 욕망을 강한 성향으로
 발동시켰기 때문에 육신 중심의 삶으로 변화된것을 말합니다.  

이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으며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하나니의 저주받은 삶을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3. 하와에게 주어진 운명


화와는 선악과를 바라보고 그 열매를 따 먹었을 때,
마음 속에 가지고 있었던 두가지 욕망
즉, 쾌락(먹음직)과 교만(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럼)의
죄과에 대하여 처벌의 댓가를 받게되었습니다.

1) 육신의 쾌락에 따르는 고통이 수반되었습니다. [창 3:16]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성을 허락하셨을 때는
거룩한 자녀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말2:15]
또한 거룩한 자녀는 거룩한 삶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 잉태와 출산의 과정에서는 고통도 불편함도 없이 기쁨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육신이 쾌락을 추구하는 죄가 들어가자 쾌락에 따르는
징계가 따르게 된 것입니다. 그 것이 바로 잉태와 출산의 고통입니다.

여자는 남자와 함께 아이를 갖습니다. 그러나 아기를 임신함으로
육신의 불편함과 입덧등 괴로움은 여자 혼자만 겪습니다. 더우기
출산시의 고통은 생명을 걸고 그 순간을 넘어야 할만큼 큰 것입니다.  

2) 마음의 교만에 따르는 벌로 순종과 지배를 받는 삶이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지혜롭게 되려는 마음은 높아지려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더 낮아지는 형편으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여자가 바라는 것의 대상이 남자가 되는 것이며,
그 대상으로부터 다스림을 받고 살아야하는 불편을 겪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남녀를 평등하게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아내를 무시합니다. 학대하고 심지어 마구 부리려합니다. 
이 것은 여자만이 겪는 고통입니다. 그러면서도 참고 살아야합니다.
그 이유는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의 고통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죄의 결과로 온 것입니다.

하와는 남편과 930년 사는 동안 이 두가지를 겪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이 저주들은 예수님이 오셔서 여자의 원죄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해방이 되었습니다.


4. 하와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특별섭리[창3:15]


1) 여자와 뱀은 원수가 되었습니다.

여자와 뱀은 선악과를 따 먹기전까지는
서로를 도와주는 친밀하고도 다정한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뱀으로 인해 범죄한 것을 알게되자 그들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그런 이유로 뱀은 남자보다도 여자가 더 징그러워하고 싫어합니다.

그 이후로 뱀은 여자를 공격할 때, 기껏해야 발뒤꿈치를
무는데 비해 여자는 뱀의 머리를 밟을 수 있게 됩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죄를 중심으로한 연합은 서로가 나중에 원수가 되며
서로 멸망시키는 복수로 바꾸어진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즉 죄를 통해 마귀가 타락한 인간과 이 세상에서 쾌락가운데 함께 지냅니다.
그러나 결국은 인간을 타락시키고 지옥으로 보내는 장본인이 됩니다.

하와는 자기를 죄로 유혹한 뱀을 미워하게 되었고,
그 배후의 세력인 사탄을 싫어하게 되었음으로 오늘날 남자들보다도
여자들이 더 신앙심이 많고 교회신자 비율이 높은 것은
바로 이러한 성향이 여자들에게는 있기 때문인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영적전쟁에 있어서 여자가 큰 역할을 담당하게됨을 의미합니다.

2) 하와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뱀과 하와와의 관계는 실상은 배후에서 조종한 사탄마귀과 인간과의 관계였습니다.  
그러므로 각각 후손들이 원수가 된다는 것은 마귀의 세력들과
여자 후손인 마리아에게서 나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귀를 대항하여 싸워 이기려면 두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한가지는 원죄가 없으셔야되고, 또 한가지는 죽음을 능가할 능력이 있으셔야만 됩니다.  
만일 주님이 원죄를 지니고 있는 마리아의 몸의 속성을 그대로 이어 받으셨다면
주님의 죽으심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으신 것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또한 주님은 마음속으로 지은 죄도 죄라 하셨기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정욕등을 가지고 계셨다면 역시 죄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죄는 그냥 남아 있게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전혀 죄가 없는 상태의 인간의 몸에서 태어나게 위해서는
하와가 죄를 짓기전 에덴동산에서 거룩하게 창조되어진
그 상태에서 태어나야만합니다. 그  역할을 하신이가 성령님이십니다.

[눅 1: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이 말씀 중에서 '능력이 이를 덮으시리라"란 말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을 덮을 때 [출 40:38]를 의미하는 것과 같으며 이 뜻은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새로운 역사가 일어남을 의미합니다.

즉 마리아는 원죄를 지니고 탄생한 여인이지만 
성령님께서 하와가 탄생하여 죄를 짓기전 거룩한 여인의 상태와
마찬가지의 상태로 마리아를 되돌려주시는 가운데 잉태의 역사를 일으키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인을 통한 인성은 지니셨으되 원죄가 없으시고,
원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심판에 해당이 되지 않으시고 이렇기 때문에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여 다시 살아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와의 창조형태가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와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녀가 죄를 지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통하여 더욱 회개하고 돌아올
참 믿음의 후손들을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하와는 특별한 상태에서 아담과 구분되는
탄생의 역사를 지닌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와가 죄를 먼저 지었어도 그녀를 통하여
다시 구원얻는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육신의 사건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130세에 셋을 낳고 셋이 아담의 족보에
장자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창 5:4] 비록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은
잃어버린 자신들 이지만 마음과 생각은 신앙을 간직한 상태로
지냈음으로 모두 하나님 나라에 갔을 것입니다.

여자로 시작된 영적 전쟁은 결국 여자의 후손으로 인하여 마무리 됩니다.
하와는 비록 죄를 불러들인 최초의 여인이었지만 죄를 마감짓고
시탄을 물리치는 주님의 조상이 되었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큰 역할을 담당하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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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칭의

[롬 3:24]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가까운 분은 하나닙이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선 만 알때,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악을 알게하는 열매를 먹음으로 선의 세계에서
악의 세계로 빠져버리게 되었습니다.

악의 세계는 선의 세계와는 반대로 불행이 가득한 삶입니다.
이로서 인간은 이중적인 인격의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죄악을 제거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 것은
악의 속성이 온 몸과 마음 속에 혼합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
악을 경험하는 것은 선을 더욱 올바로 알수 있는 기회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천사와 다른 것은 선악을 모두 안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죽음으로 제한을 두신 것은
악의 경험을 제한적으로 허락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타락은 나쁩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타락을 청산하면
더욱 타락과는 먼 올바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이 진정 죄를 싫어하고
타락한 생활을 벗어나 더욱 선한 삶을 살려는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 올바른 구원의 첫 시작이 '이신칭의' 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1. 이신칭의란 무엇인가?


'이신칭의'란 믿음으로 인해 의롭게 여겨짐을 받았다는 의미로
의인의 신분을 얻음으로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에서 벗어난 상태를 말합니다.
죄성을 지닌 인간은 죄를 떠날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상태에서 살게되었습니다.
즉 죄를 짓지않아도 죄의 근원에서는 죄된 생각과 마음을 계속 갖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안지어도 죄의 마음은 심판으로 다스리십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공의의 기준에 의하여 아무리
하나님께 다시 다가가고 싶어도 결국 마음뿐이지
다가가면 심판받아 죽게 되어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되어진 의로 보시기 위하여
대속의 제물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주님만이 인간을 만드신 분이시기때문에 인간 모두를 책임질 수 있으시고,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모든 죄를 다 떠맡으실 수 있으시며
율법을 다 지키신 분이시기 때문에 충분한 의인의 자격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주님을 우리 죄대신 심판받게 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전가시키셔서 대속의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를 보실 때,
죄인이 아니라 주님의 죄 없으신 상태로 율법을 다 지킨
의인으로 바라보게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설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죄를 사함받은 것도 용서함 받은 것도 아닌 죄 자체가 없어진
선 만을 지닌 옛 아담같이 의인이 된 것입니다.

칭의란 죄사함과 용서함과는 다른 말입니다.
죄를 사하여 주었다는 것은 죄지은 것은 그대로 남아있지만
벌주는 것은 용서해준다는 것을 의미압니다.
즉, 벌 받아야 할 근거는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칭의는 벌을 받을 모든 것을 없앨뿐아니라 벌을 줄 수 있는
근거를 아예 없애버린 상태를 의미합니다. 분명히 죄를 지은 죄인인데
의인으로 쥐급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에 사도바울은 칭의의 상태란
어떤 상태인지를 세가지 예를들어 설명하고 았습니다.


1] 법정에서 무죄로 판결을 받은 상태의 경우입니다.

헬라어로 '의로 여기다' 란 단어는 '디아키운'입니다.
'의인으로 취급하고 인정한다'란 의미입니다.

인간이 법정에 서서 심판을 받을시 무죄로 판명이되면 자유인이 되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법정에 재판을 받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가 없는 의인으로의 판결을 내려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된 것입니다.


2] 제사에서 제물을 드림으로 먼저 상태가 없어진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는 부자간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하나님 앞에 법죄함으로
원수간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구약에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제사를 통해 제물을 대신 죄의 댓가로 심판하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물로서의 제물은 그가 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인간의 죄를 담당할 수 있는 자격까지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직접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제물이 되시어 드려짐으로
우리는 죄가 없는 주님의 아들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허물이 완전히 소멸됬음으로 완전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힐라스테리온]


3] 노예제도 에서의 완전 해방을 받은 상태를 말합니다.

속량이란 단어 '아플루트르시스'란 헬라어는 댓가를 치룸으로
완전히 그 상태에서 지불되어 자유롭게 벗어난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죄값을 완전히 치루었으므로 모든 죄와 마귀의 지배에서
벗어난 자유인이 된 우리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로 부터는는 심판을 대신 받으셨으며,
스스로 화해의 제물이 되심으로 아들의 자리에 우리를 앉게 하여주셨으며,
죄의 지배로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마귀의 권세에 대하여
 죄의 삯은 사망으로 모두 지불하여 주심으로 완전히 죄의 노예에서
벗어난 자유인으로 우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칭의는 하나님 편에서의 선언입니다.
우리의 상태가 어떻든 하나님의 선포가 우리에게는 제일 중요합니다.
그 것을 알고 칭의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인 것입니다.


2. 우리는 의롭다 여김을 받기 위하여 어떤 믿음을 가져야할까요?


하나님은 인간을 두가지 방법으로 창조하였는데 아답은
근원이 흙임으로 흙의 속성을 지닌 인간으로, 주님은 근원이 생명인
생령의 여인으로부터 성령님에 의해 탄생하게 하셨습니다.
즉, 육신의 탄생과 영의 탄생으로의 구분이 된 탄생 구조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도 두 구조의 탄생과정을 거칠 수 있으며
육적인 틴생에서 영적인 탄생으로 변화될 수 있게 하여주신 것입니다.


1] 이 과정은 대표와 연합의 원리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어지게됩니다.

아담은 전 인류의 조상이자 인간의 대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의 언약을 우리와 맺으신 것이 아니라
대표인 아담과 맺으셨습니다.

허나 아담이 그 언약을 지키지 않자 죽음과 저주와 영벌이 주어지게 됐습니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았어도 우리의 대표가 죄를 지음으로
그의 후손은 자연히 똑같은 저주아레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 것이 육의 탄생의 비극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하신 성도를 구원하시고자
새로운 탄생의 인간을 대표로 삼으셨습니다.
즉 생령의 인간의 몸에서 성령의 역사로 탄생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흙으로 돌아가야할 죽음의 속성이 없으시고
 육신의 죄성으로 잉태하지 않으시고 성령으로 잉태하셨기 때문에
육의 죄된 욕망의 근원이 몸에 없으신 분이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육의 탄생이 의미가 없어진 것은
곧 죽게 되는 삶이기 때문이며 영의 탄생이 중요한 것은
이 탄생으로 영원히 살수 있기 때문닙니다.

[요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이제 하나님께서는 두 대표를 인간의 조상을 삼으시고
육의 연합으로는 아담의 후손으로, 영의 연합으로는
하나님의 후손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새 생명의 구원의 길을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여 놓으신 것입니다.


2] 아담과의 연합은 우리에게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세상사람들이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려고
이 세상에서 행할 수 있는 것과, 구할수 있는 것을 총동원 해보지만
모두 실패하게 되는 이유는 물질 세계에서는 영의 세계의것 영생을
하나님외에는 허락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오직 자범죄는 줄이거나 없앨 수 있어도
원죄는 자신의 생명 이전의 생명에서 유전된 것이기 때문에
마치 인간이 성도, 체질도, 부모와 달리 할 수 없음같이
죄의 유전도 아담과 달리 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즉, 자의건 타의건 아담과의 연합된 육의 탄생은
아담과 함께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죄 속에서 살다 죄 속에서 죽는 삶입니다.


3] 예수님과의 연합은 우리로 죄의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로 탄생되어 영생을 누리는 삶을 살게합니다.


우리가 육으로 아담과 연합되어 있듯이 또한 영으로는
예수님과 연합될 수 있습니다.
이 연합의 과정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주님 안에서
거듭 태어나는 것이며 이 것은 오직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믿음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예정된 성도들에게만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로만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십자가 위에서
육의 아담과의 연합은 죽어 끊어진 것이며,
부활에 의해 주닙 안에서 영생을 얻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거듭남의 증거가 성령의 내주하심입니다.
즉, 죄에서 멀어진 생활을 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열심있는 삶을 살게 만들고 이 세상의 것을 좋아하는 삶에서
하늘의 것을 좇아 사는 삶으로 바꾸어지게 만들어줍니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연합과 '이신칭의'와의 관계는
총 구원의 과정인 : '예지-예정-소명-중생-칭의-양자-성화-견인-영화'의 과정중
에서 중생을 칭의 로 이어주는 중요역할을 하게 하여 줌으로 이 의식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비로서 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3. 올바른 칭의의 인식은 성화와 영화의 과정을 수반합니다.


칭의로써 인간은 죄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인식을 가질수 있습니다.
이 것은 나의 지적인 인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칭의- 전의 과정인 '-소명과 - 중생의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반드시 성령님의 역사로 인한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진 후에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죄사함에 대한 기쁨만 가질 때에는 지적으로 구원과정을 이해했을 때에
생기게되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어떻게 살까?' 하는
성화의 단계를 찾아갈 수 있는 마음은 성령님에 의해서 주어지게됩니다.

이기적인 마음이 있을 때, 성령님은 능력이나
은사의 대상으로 취급되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명적인 마음이 있을 때는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으로
주님의 은혜를 깨닫게 해주시는 분으로 모시게됩니다.
이때 성화의 길을 가야만하는 성숙함의 의무가 생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이 예수님의 은혜를 고백한 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당신은 당신의 겸손으로 은혜가 무엇인지 확증하셨습니다.
은혜가 당신을 비천하게하고 모욕당하게 하였습니다.

은혜가 당신으로하여금 형언할 수 없는 죄의 짐을, 눈물의 짐을,

하나님의 저주의 짐을 지게하였습니다.

은혜는 당신의 옆구리에서 흐른 당신의 피와함께 흘러나왔습니다.

은혜는 채찍으로 맞은 당신의 그곳에서, 가시로 찔린 그곳에서,
그리고 못으로 박힌 당신의 그곳에서 나타났습니다.

천사들을 경탄케한 은혜, 죄인들을 복되게한 은혜,

마귀들을 놀라게한 은혜, 그것이 당신의 은혜입니다."


칭의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구원받은 은혜에만 만족하고
머무는 세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거나 과연 하나님의 자녀로
더욱 성화의 길을 걸어 내 주 예수님을 닮아가야 되겠다는
십자가의 길을 걷는 참 신앙의 삶으로 나아갈수가 있습니다.

성령님을 모신 바른 칭의의 깨달음으로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노력을 다같이 기울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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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들레헴에 메시야의 탄생을 예고한
선지자 / 미가(Micah)



1. 인적사항


히브리어로 '미가'라는 말은 '미가야'로서(렘26:18)
그 뜻은 '여호와와 같은 자가 누구이냐?'란 의미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서쪽 블레셋 성읍 가드와 근접한 시골에 있는 -
'가드모레셋'에서 태어났으며, 귀족 출신의 선지자 이사야와는 달리
서민적 삶을 통해 사회부조리를 몸소 체험하고 겪은 선지자입니다.

미가는 호세아 및 아모스(북 이스라엘), 이사야(남유다) 와 동시대에 활동한
남유다의 선지자였으며, 그가 사역한 시기는 남유다 11.12, 13대 왕인
요담(B.C.747-731년), 아하스(B.C.731-716년), 히스기야(B.C.715-687년)등
세명의 왕들시대에 걸쳐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는 B.C.700년 경에 미가서를 썼으며 예루살렘에서의 말씀 선포는
히스기야왕으로 하여금 종교개혁을 단행하도록 영향을 끼친 선지자였습니다.


2. 시대적 배경



11대 유다의 왕 요담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도를 행하였음으로 나라도 강성하고
융성하였으나 그의 아들 아하스가 왕위에 오르자 선왕이 뒤를 쫓지않고 우상숭배와
악행을 저지르므로 아하스는 다윗왕가의 가장 사악한 왕이 되었습니다.
이에 특권계급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난한자들을 핍박해 재물을 착취하였으며,
제사장들은 물질과 뇌물에 눈이 어두어 귀에 듣기 좋은 말만 지껄이는
거짓 선지자들이 되었습니다. (3:11)

내적으로 백성들이 부패가 극에 달하였을 때, 외부적으로는 북방의 신흥제국인
앗수르가 본격적인 남진 정책으로 디글랏 빌레셀 3세(B.C.745-727년),
살만에셀 5세(B.C.727-722년), 사르곤 2세 (B.C.722-705년),
산헤립(B.C.705-681년)등이 남.북 이스라엘 두 왕국을 끊임없이 공격해왔으며
그 와중에 북왕국은 B.C.722년에 멸망하였고 남왕국은 B.C.701년에
산헤립의 침공으로 멸망직전의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남유다는 물론 북 이스라엘까지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선포하였습니다.


3. 사역의 업적


1) 최초로 메시야가 탄생할 장소를 베들레헴으로 예언한 선지자로 이는
                             700년이나 앞선 예언이었습니다. (5:2)
2)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한 최초의 선지자였습니다. (3:12)
3) 백성들의 우상숭배와 타락에 강한 책망을 통해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선지자였습니다. (대하 29:5-11)
4) B.C.700년 경에 예언활동을 마무리하면서 미가서를 기록하였습니다.


4. 신앙의 특징


1) 미가는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참 선지자였습니다. (3:8)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하나님의 일꾼들은 세상에서의 자격을 얻는 것보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자격을 얻는 것이 중요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근거는 여호와의 신의 임재입니다.

지성의 힘이 강할 때, 교리적인 가르침에 치중할 수 있고,
재능이 강할 때 프로그램적인 사역에 치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성이 강할 땐, 죄와 구원에 관한 메세지가 전달되게 됩니다.

미가 선지자가 '여호와의 신에 감동된 사역자'인 것은
담대함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죄를 책망하는 자는 항상 위협에 직면하게 됩니다.
심지어 죽음 까지 감수해야 합니다.
또한 경제적인 빈곤과 핍박에 처해지게 됩니다.

그러한 이유때문에 많은 사역자들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유리한 말을 증거함으로 반발이나 대적을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선포는 대부분 죄와 믿음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듣는 이 모두가 회개를 해야만 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용기와 능력이 주어져야만 온전히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미가 선지자는 자신이 여호와의 신으로부터 세가지를 받아서
그 힘으로 사역을 한다고 말하고있습니다.

(1) 권능을 채움받아 사역을 한다고 선포합니다.

권능은 인간을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람들이 주의 종을 두려워 하는 것은
주의 종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 선포는 사람들의 마음을 찌르고
그 속에 있는 어두움을 밝히고 쫓아내게 만듭니다.
그 어두움이 질병이면 나음을 입을 것이요,
더러운 영이면 해방을 얻을 것이며,
죄악이면 회개를 할 것입니다.

구태여 제사장이 삯을 바라고 사역을 하지 않아도
은혜받은 사람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립니다.
여호와께 드려지는 예물이 없을 때, 주의 종의 사역은 직업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의 고용에서 사람들의 고용인으로 바뀌어지게 됩니다.

주의 일을 하는 사역자가 제일 조심해야 될 부분이 물질입니다.
하늘의 공급을 의지하지 않고 일하면 권능히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2) 공의로 채움 받아 일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구원을 목적으로 신앙 생활할 시는 주로
내면적인 삶에 중심을 두게 됩니다. (기도, 말씀, 전도 등)
그러나 세상적인 삶을 주로한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 할 때
외면적인 삶에 치중하게 됩니다. (행사, 프로그램, 성공, 업적 등)

그러므로 종교적으로 가장 부패했던 중세시대 때,
교회건물이 가장 웅장하고 찬란했으며 ,
의상은 더욱 품위 있는 예복으로, 강단과 강대상은 높아지고, 
내면은 화려하게 꾸며지곤 하였던 것입니다.

공의란 일을 올바르게 처리한다는 뜻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진실과 거짓을 구분해내는 영적인 통찰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알고 지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드러나지 않은 죄가 많이 있을 때 이미 그 마음은 하나님을 떠나
세상의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 것이
당시,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현대의 그리스도인의 모습들일 수 있습니다.


(3) 재능으로 채움 받아 일한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힘으로” 라고 되어있습니다.
즉, 담대함과 용기를 말합니다.

성령충만한 사역자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않고 중심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일 수록 외모는 권세, 재력, 위엄, 품위 들로 포장 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 때 그 세력을 보면 말문이 막히게됩니다. 그러나 그 내면에 죄를 보게되면
성령님은 죄를 지적하게 만드시기 때문에 서슴없이 말할수 있습니다.
그 것이 담대함입니다. (예:나단선지자가 다윗왕이 밧세바를 취한 것을 꾸짖음).

미가 선지자의 이같은 담대함은 히스기야왕으로 하여금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2) 교회창설을 예언한 사역자 였습니다. (4:2-3)

하나님은 언제나 장래의 모습에 합당한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주님은 시몬을 베드로 '반석'이라 불러주셨고,
세리장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불리어지는 이름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자신의 처지를 개발하도록
자극을 주기 깨문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제 신앙의 공동체가
교회란 이름으로 탄생될 것과 그 역할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1) 교회는 가장 높은 곳에 굳게 세워질 것입니다.
 
[v.1]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서며
작은 산들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고 몰려갈 것이라."

이 세상에는 높은 곳이 많습니다. 빌딩도높고, 지위,제도, 세력, 문화, 과학…등
도시에 나가보면 온통 높은 것들의 경쟁이 집합되어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교회 건물은 낮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가장 높아질 수 있을까요?
죄악의 세력이 틈타지 못할 때, 영적인 건물이 되어 세상 건물보다
시공을 초월한 높임을 받습니다. 건물이 언제 든든합니까?
그 것은 기초가 튼튼할 때입니다. 어떤 건물도
'예수 그리스도를 반석으로한
기초'보다
더 튼튼한 기초로 세워진 건물은 없을 것입니다.

영생을 얻기위한 각 만족들이 몰려올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거의다 '다민족 교회'입니다.
이 것을 미가 선지자는 예언하고 있습니다.


(2) 교회에서 여호와의 말씁이 풍성히 선포될 것입니다 (4:2).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말씀의 선포와 배움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더 많이 알면 알 수록 그분을 더욱 영광되고
기쁘시게 해 드릴 수있습니다.       

구약의 성전은 예배중심의 처소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의 교회는 말씀중심의 처소가 될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생활에 비하여 요즈음은
얼마나 많은 말씀을 듣고 배울 수 있습니까?
진리의 선포는 하늘나라를 계시하여 줄뿐아니라,
주님의 구원에 완성에 대하여 선명한 믿음을 갖게 해줍니다. (재림)

(3) 교회만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옵니다. (4:3)

[v.1]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나라와 저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아니하고…"


세상의 싸움은 인간이 노력으로는 해결 할수가 없는 문제입니다.
이 세상 모든 나라가 내분과 외적의 시달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지구상에는 살생의 무기가 쌓을 곳이 없도록
각 나라마다 저장해놓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류가 무엇으로 이 위기를 막을 수 있습니까?
그 길은 하나님께서 다스려주시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교회의 역할에 중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지도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3) 불굴의 신앙을 가진 사역자였습니다. (7:8)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데는 믿음이 자랄수록
문제도 점점 커진 것들이 다가오게 됩니다.

(1) 엎드러지는 경우입니다.

즉, 대적의 공격, 비방, 멸시, 핍박을 받는 경우입니다.
이 것은 주로 주변 경쟁자로 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단이 가장 가까운 자를 도구로삼아 쓰러 뜨리려는 경우입니다.

(2) 어두운데 앉아있는 경우입니다.

절망의 상태를 말합니다. 환경은 닫쳤습니다.
구원의 손길은 끊어졌습니다.
내몸의 기운도 소진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낙심, 의심, 절망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표시입니다.
모든 시련과 환란은 그 목적과 의도를 지니고 있으며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제한 적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온전히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셔들이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기다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에게 상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시련속에서도 감사를 드릴 때,
가장 빛나게되고, 성도의 기쁨은
 "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살 때,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미가는 서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크게쓰신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그 비결이 오직 여호와만을 우러러 본데있습니다.
우리들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바라보십시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 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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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Temple'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만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맨처음 만나는 장소로 예비하신 곳이 에덴동산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에덴동산이 최초의 성전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 처소였던 곳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자 에덴동산은 폐쇄되었고
하나님의 임재는 하늘로 떠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일정 장소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만나시지 아니하시고
개인 개인에게 개별적인 관계를 가지셨습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시고 구원 계획을 다시
세우신 하나님께서는 직접 땅에 내려오셔서 인도하심으로
머믈 처소를 예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 땅에 머므시는 처소가
성소 또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성전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모셔야할까요?


1. 구약에서의 성전의 의미


1)  첫 성소로서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출 25:8)

성막의 식양과 규모 설계는
모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지정하셨고
그 의미는 가장 거룩한 것이 첫째 의미였습니다.

백성들은 정한때에 제사를 지내야만 했고
이는 성결해야만 하는 둘째 의미였습니다.
즉 성막의 기능은 거룩과 성결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성막을 짓게하신 것은 광야생활에서
손 쉽게 함께 옮겨 다닐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성막의 의미=임마누엘의 하나님)

2) 첫 성전으로 솔로몬 성전을 짓게하셨습니다. (심하 7:13)

다윗이 왕이 된후 법궤를 예루살렘에 가지고 와서 장막안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건립할 계획을 세웠으나
손에 피를 많이 흘린고로 아들인 솔로몬으로 하여금 세우게 하였습니다.
육신의 허물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솔로몬이 하나님의 지명을 받고
성전을 짓기 시작한 첫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식양은 다윗에게 일러 주셨습니다. (대상 28:19)

[1] 장소

솔로몬 성전은 예루살렘의 모리아산 으로서
오르난의 타작마당이 있던곳입니다. (대하3:1).
모리아산은 일찌기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 했던곳이며,
'오르난의 타작마당'은 다윗이 하나님께 범죄한 후
회개의 제단을 쌓은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위치의 의미는
헌신과 속죄의 의미를 지닌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2]구조

기본적으로 모세 성막의 구조를 바탕으로 건축되었습니다.
모양은 직사각형이며 세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각의 넓이는 20 규빗(8.9m) 이었습니다.

즉, 낭실과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되었습니다.
이 모든 내부를 정금으로 임혔으며 또 보석으로 전을 꾸며
화려하게 하였고 모든 기물들을 금으로 제작하여
비치하였음으로 황홀하기가 이를데없었습니다.

[3] 기간

솔로몬 즉위 제 4년인 B.C. 966년에 시작하여
그후 7년후인 B.C. 959년에 완공하였음으로
7년에 걸쳐 건축하였습니다.
이어서 왕궁을 짓기 시작하여 13년이 걸렸으며
모두 20년에 걸쳐 성전과 왕궁이 완성되었습니다.

[4] 의미

히브리어로 '헤이칼'이라는 말은 '성전' '성소' ''왕궁'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전과 왕궁의 이중적인 의미로 결합되어있는 이 단어는
신의 신전과 왕의 왕궁과의 어떤 결속관계를 암시해주는 것이며
신과 왕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따라 솔로몬은 20년에 걸쳐 성전과 왕궁을 모두
최고의 것으로 건축 완공하였던 것입니다.


3) 두번째 성전은 스룹바벨 성전입니다. (고레스왕이 선포= 스1:2)


그러나 이와같이 심혈을 기울여 지은 성전일지라도 한세대를 넘기지 못하고
솔로몬 통치 말년에 우상숭배와 타락으로 성전은 재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고
더우기 위기에 처할 때마다 성전의 금,은 을 벗겨다 대적에게 주었으며,
놋제단도 이방 제단으로 개조하는등, 우상숭배하는 왕들로 인하여
상당부분 훼손 되다가 결국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의 침략으로
남유다가 멸망한 B.C. 586년경에 성전이 완전히 훼파되었고
금.은.놋기명과 보물들은 모두 바벨론으로 옮겨졌습니다.

[1] 과정

느브갓네살왕의 솔로몬 성전 훼파 이후 다시 성전을 재건 할 수 있었던 것은
B.C. 539년 바사왕 고레스가 바밸론을 정복하고 모든 속국의 포로민 들에게
유화정책을 실시함으로 인하여 포로들도 각각 고국으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기 때문입니다.

[2] 성전 지대 건축

이스라엘 포로귀환 제 2년째 B.C. 536년에
스룹바벨이(유다왕 여호야긴의 손자이며 포로귀환후 유다의 총독)
전지대 건축의 책임을 맡고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스3:8).
그러나 그 지대의 크기가 솔로몬의 성전보다 훨씬 작았기 때문에
솔로문의 성전의 크기와 웅장함을 익히 알던 노인들은
슬퍼서 대성 통곡을 하였습니다.

[3] 성전 공사의 증단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전 재건 공사의 동참 요구가 거절되자
바사국 관료들에게 뇌물을 주어 성전재건을 중단케 한 관계로
바사왕 고레스 4년(B.C. 536)부터 다리오 제2년(B.C. 520)년까지
약 16년간 공사가 중단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백성들은 낙담과 이기주의로 인하여 무사 안일주의에 빠져
성전재건의 의욕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4] 성전 공사의 재개

그러나 학개, 스가랴 선지자의 책망과 권고로 성전 재건 공사가
다시 시도되었으며 이어 다리오왕의 성전 재건허가를 받고 공사를 시작하여
4년만인 B.C. 516에 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스4:24)

[5] 의미

이 성전도 솔로몬 성전과 같은 장소에 같은 설계와 양식대로 세워졌지만
성전기구들과 모든 것들이 전에 것만 훨씬 못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성전으로 대표되는 권위는 더 이상 왕의 것이 될 수 없게 되었고
전적으로 제사장의 몫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전의 중요성이 현저히 약화된 것은 성전안에 언약궤가 없었으며,
대제사장도 우림과 둠빔을 소유하지 못했다는데 있습니다 (스2:63).
이는 선민 이스라엘에만 임재하신다는 민족신의 사상에서 벗어나
성전의 실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을 통하여 전 인류가
구원받는 시대가 올 것임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4) 세번째 성전은 헤롯 성전입니다.

B.C. 167년에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왕이
유다사회를 헬라화하기 위하여 여호와 종교 말살정책을 폈음으로
성전을 모독 했을 뿐만아니라 성전을 파괴하고 성소안에
제우스신상을 세웠으며 유다인들로 하여금 돼지를 잡아
그 신상앞에 제사를 드리게하였습니다.

이에대해 마카비 일가가 중심이 되어 혁명을 일으켰으며
성전을 다시 정결하게 하였으나 B.C.63년에 로마 장군 폼페이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을 모욕하는 사건이 또다시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로마 원로원에 의해 유대왕으로 즉위된 헤롯은 자신이
이두메인 으로서 유대인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스룹바벨 성전이 너무 작고 초라하다는 이유로
그 것을 헐고 성전을 재건하였습니다. 이 것이 세번째 헤롯 성전입니다.

[1] 동기

스룹바벨 성전이 이방인들에 의해 수차례 모욕을 당함으로서
대부분의 경건한 유대인들은 성전을 외면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에 헤롯왕은 성전을 크게 재건함으로서 이스라엘의 종교적 구심점을 만들어
정치적으로 더욱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헤롯 성전은 헤롯 왕가를 지지했던 헤롯왕과 헤롯에 의해
임명되었던 대제사장과 그 수하에 있던 종교지도자들에
의해서만 지지를 받는데 그쳤습니다.

[2] 건축

헤롯 통치 18년째인 B.C.19년에 시작되었으며 성소와 지성소로
구성된 성전의 본체와 성전 뜰은 착공한지 약 10년만인
B.C.10년경에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둘러싸고 있는 외벽공사는
성전 건축 개시 46년만인 A.D. 26년경에 완성이 되었습니다.
또한 성전외벽과 각 모퉁이의 망대들까지 모두 완공된 것은
성전건축 개시 86년만인 A.D. 63년경이었습니다.    

[3] 규모

헤롯성전의 전체규모는 솔로몬 성전보다 더욱 크고 웅장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인 본 건물도 솔로몬 성전은 성소의 높이가
30규빗(1규빗=45.6C Cm) 지성소의 높이가 20규빗인데 반해
헤롯성전은 성소와 지성소의 높이는 각각 60규빗이나 되었고
특히 헤롯 성전의 현관의 높이는 100규빗에 이르며
현관 정면과 동편이 금관으로 꾸며져 그 화려하기가
다른 어떤 성전에 비할바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성벽 외벽의 길이가 서쪽 성벽은 479m, 북쪽은 306m,
동쪽은 469m, 남쪽은 276m로 전체 모양은
사다리꼴이며 성벽의 높이는 약 29m나 되었습니다.

[4] 의미

포로기를 거친 유대인들은 성전의 중요성을 전적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많이 생겨남으로 성전 외에도 회당을 지어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데 있으며,
또 한가지는 성전을 장악한 제사장들과 부패된 그들의 행위를
옳게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5] 성전의 파괴

A.D. 65년경 유대 주재 로마 총독인 '플로루스'가 헤롯성전의 창고에서
보물 몇개를 가져감으로 유대인들의 큰 반발을 사
유대전쟁 발발의 요인이 되었으며 마침내 A.D. 70년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의 아들 디도 장군의 예루살렘 함락에 의해
헤롯 성전은 전소되었습니다.

완공된지 물과 7년만에 모두 훼파되었으며 로마군병들 사이에
헤롯이 이 성전을 건축할 때, 돌과 돌사에에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을
숨겨놓았다는 소문에 의해 그 금.은을 찾기위하여
성전의 돌 하나하나를 다 파헤쳤습니다.
이로써 결국 "돌하나도 돌위에 남지않고 다 무너뜨리 우리라"
예수님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것입니다. (눅21:6)


2. 신약에서의 성전의 의미


예수님쎄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성전의 휘장이 찢어짐은
이로인하여 백성들이 하나님께 주님을 통하여
직접 접근 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으로 일컫는 헬라어 '나오스'는 주로
영적 성전을 기리켜 사용 되고 있음을 볼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의 성소의 의미는 세가지로 나타납니다.

1) 성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눅 2:49)

이 것은 제의적 의미로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바로 성전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의 사도들도 모두 성전에 나가 기도하였으며,
성전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사역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2) 성소는 신성한 것이 임하는 장소 보다는,
종교 공동체가 모여
예배드리는 장소로 여겨 졌습니다.

이것의 전형적인 형태가 유대인들의 회당이며,
오늘날 기독교의 다양한 예배처소가 된 교회들입니다.
그러므로 대부분 오늘날 교회에 대한 인식은 예배 보러 오는
건물로 여겨지고 있으며 성소의 특징보다는
성도들의 모임의 장소로서의 다용도 용인 복합건물로
많이 지어 사용하는 경향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설도 무대시설에 조명을 달고, 밴드와 악기들이
강단 중앙에 놓여지기도 하고, 예배의 의미도 많이 희석된 가운데
모인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드려지는 자유형식을
많이 취하는 쪽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3) 성전은 영적인 의미로 성도의 몸이
성령의 전으로 간주되었습니다.(고전 6:19)

교회를 세우신 성령님은 이제 어디든지 임하실 수 있으시기 때문에
건물이든 성도의 마음 속이든 거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의 몸과 마음이 성령님이 임하시는 성전임을
신약에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것으로, 혼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교회는 성령님께서 세우신 기관 임으로
신적인 거룩의 의미와, 죄사함의 성결의 속죄와,
예배의 헌신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있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3. 요한 계시록에서의 하늘의 성전의 의미(계7:15)


하늘 나라에는 죄인이 없음으로 죄를 사함받기 위한 성전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전이라고 일컫는 것은 지성소와 성소이신
하나님과 예수님이 바로 성전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배를 드리는 곳보다는 하나님과 함께 항상
함께 지내고 있음으로 섬기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제 성전의 의미는 땅에서 마음으로 옮겨졌고,
다시 하늘나라 최종 섬김의 장소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즉, 산앙생활이 육신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
점점 변화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영으로 예배를 드릴 때만 가능합니다. (요4:24).
그러므로 하늘 성전에 있는 나의 영혼의 모습을
교회 성전에서 생각하며 항상 예배드리는 삶을 살 때에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 질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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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
/ The Son of Man

[막 14:62]



성경에서 “인자”란 말은 - 구약에서 105회 이상 나오고
 (‘에스겔서’ 에서만 무려 90회 이상 나옴)

- 신약에서는 ‘사복음서’에서만 90회 이상 나오고 있습니다.
 (마태 30회, 마가 15회, 누가 26회, 요한 13회 등)

그러나 같은 단어일지라도 불리어지고 있는 시점과
사용에 따라 그 대상과 역할은 다 다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 “인자”라는 말이
단순히 인간을 의미하는 말인지, 메시아를 의미하는 말인지
구분하여 아는 것이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1. 인자의 의미

인자에 대한 히브리어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벤 아담” 이고, 또 하나는 “벤 에노쉬” 입니다.

전자는 단지 피조물로서의 인간을,
후자는 연약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말하나
모두 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인자”의 바른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자적인 뜻과 함께 히브리인들이 이 용어를 어떻게 사용하였으며
어떤 의미로 쓰여졌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1) 단순히 사람의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시 8:4]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대개 구약에서 사용되는 경우이며,
창조주와 대칭되는 연약한 피조물로서의 개별적인 인간,
또는 인류를 가리키는데 쓰여졌습니다.
이와 같은 경우 대개 나약하고 필연적으로 죽어야 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2) 선민으로서의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가리키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시 5:8]
“인자들아 너희가 당연히 공의를 말하겠거늘
어찌 잠잠하느뇨
너희가 정직히 판단하느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데는
선민으로서 구분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계명, 율법을 지켜야만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 외경인 “에녹서”에서는
이 용어가 “택한 자,” 혹은 “택함 받은 공동체”
가리키는 뜻으로 거의 사용되고 있습니다.


3) 특별한 인물, 즉 선지자를 호칭하는데 쓰여졌습니다.

[겔 2:1]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구약 전체, 거의 ‘에스겔서’ 에서 대부분 사용된 이 단어는
에스겔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되었으며
특별임무를 수행해야만 하는 선지자 같은 특정 인물로
사용이 국한되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인자라는 대중 의미가
특별한 사역을 감당하는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호칭의 의미로 축소 집약된 것입니다.


4) 종말에 하늘 권세를 가지고
도래할 메시아를 가리키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단 7:13-4]
“내가 또 밤 이상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마 26:64]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이 두 구절을 비교하여 볼 때
구약성경에서의 인자의 의미의 점진적 계시는
신약의 메시아로 귀결되어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랜드 주석 누가복음 참조)


2. 인자의 정의

예수님께서 자신을 인자라 지칭하신 것은
“여인에서 났지만 하나님의 아들인 자”
“인간의 육체적 베일 아래 있는 완전한 하나님의 칭호”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자의 칭호에는 메시아가 여인을 통해 나신
신비로운 탄생의 비밀이 포함되어있는 호칭입니다.


1) ‘인자’란 완벽한 두 번째 인간 “아담”을 의미합니다.

“인자”란 명칭은 주의 성육신 덕분에
제대로 된 의미를 갖게 되었는데
이는 예수님은 진실로 하나님이신 동시에
진실로 사람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아담의 타락 때문에
인간의 거룩성, 영원성을 상실해 버림으로 말미암아
창조 당시의 만물과 인간의 본래 모습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하여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롬 19:23)

그러므로 죄의 혈통으로 이어받지 않고
성령의 탄생기원을 가지심으로
죄인 된 우리들 또한 성령의 거듭난 기원을
주님의 완전함 속에서 가질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2) ‘인자’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육신 하신 분”을 의미합니다.

[요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로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즉, 주님께서는 제 2의 성자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위하여 내려오셨으며 장차 다시 회복하여
하나님의 영광된 자리로 돌아가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신인 양면의 주의 사역인 “그리스도론” 을 형성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계획을 이루시는 분으로
자신을 호칭하신 것입니다.


3) ‘인자’ 란 호칭의 가장 특별한 것은
종말론적 성격에서 불려지는
“심판의 메시아”임을 의미하는데 있습니다.

[눅 17:30]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결국 인자의 최종목표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있으며
이를 위하여 이 땅에는 은혜의 왕국이 지속되게 하셨지만
재림 시에는 하나님 나라 완성이신
영광의 왕국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는 주님이 하나님으로 영광을 회복하셨으며
성도 또한 영광의 몸으로 백성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자란 완벽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두 번째 아담으로서 의미가 시작되지만
나중에는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 하나님으로 승귀하시는 메시아의 호칭입니다.


3. 인자의 역할

예수님께서 완전한 인성을 지니신 분으로
사역하셨을 때에는 고난이 지배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인간의 죄와 구원에 완전히 사용되기 위한
제물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1) ‘인자’“십자가의 고난”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막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죄는 아담 한 사람이 지었을지라도
이제는 그 후손들 모두가 죄를 범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 많은 죄인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죄인들의 대표자가 되실 전혀 죄가 없으신 분이 필요합니다.
한 죄인들의 대표가 저지른 것을 한 의인된 대표가 마무리 하기 위하여
완전한 의인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인자가 책임을 져야지만 됩니다.

결국, 인자가 이 땅에 처음 오신 목적은 죽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 역할을 볼 때 인자란 육신적인 몸의 버려야지만 될 역할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2) ‘인자’는 “신적 권위와 능력을 베풀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질병으로 고통 받는 많은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죄를 사하시고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 날 성전에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이 모두는 바리새인과 율법사가보기에 신성모독의 일들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마 12:8)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하신 이유는
인간에게 유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심지어 안식일 마저도 복을 주신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하나님의 날 이지만 또한 안간에게도 복받고 유익한날 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의 법은 하나님의 휴식의 날만을 고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예수님께서는
원래의 뜻대로 안식일은 하나님의 날이자
인간에게도 유익이 되어야 하는 날임을 보이시며
병자를 고쳐주신 것이고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주일로 바꾸셨습니다.
부활하신 첫날이 안식일의 완성임을 보이신 것입니다.

즉, 구약에서 인간의 삶은 쉼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제 죄사함 받은 모든 인간은
부활의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부터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
오순절 (안식일 다음 날) 성령 강림하심으로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주님께서 보내신 성령님께서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신 것입니다.


3) ‘인자’는 “승천 및 재림하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러 오십니다.

[막 14: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대속사역’이였지만
천상 사역은 구원사역의 완성인 ‘심판사역’입니다.

‘대속사역’은 죄 값을 치르는 죄인의 입장에서의 사역이지만
‘심판사역’은 마귀를 심판하는 하나님 입장에서의 사역입니다.

우리는 이제 구속 주 예수님을 바라 볼 때가 아니라
진정 인자의 뜻인 “하나님의 아들 심판 주 예수님”
바라보고 기다려야 할 때입니다.

주님께서는 가장 높은 위치에서 가장 낮은 위치로 오셨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가장 낮은 죄인의 위치에서
가장 높은 하나님의 자녀의 위치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이 신분과 새 삶의 완성이 주님의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자신을 이 땅에 오셔서 인자라 부르신 주님.
죄인 된 우리를 높여주시기 위하여
낮은 자신의 모습을 보이신 호칭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베일 속에 숨겨있는 하나님의 속성은
육신의 베일을 벗으시면서
능력의 인자로, 부활의 인자로, 재림의 인자로
승귀하시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전부 감수하신 것입니다.

다시 나를 찾아오실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인자의 모습,
그 것이 인자의 참 의미이자
나의 신랑 되신 영원한 주님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 때는 인자라 하시지 않고 성자라 하실 것입니다.
인자이신 주님 성자로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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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순종의 선지자 요나
/Jonah [욘 1:3]



1. 인적 사항


요나는 이방나라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의 구원을 위해
택함을 받은 북 이스라엘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가드헤벨이라는 지역
(나사렛에서 약 4Km 북동쪽 지역) 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부친은 스불론 지파의 후손인 '아밋대'
'나의 진리'라는 뜻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그의 이름으로 보아
신앙의 가문이었음을 알수있으며 아들의 이름을 '요나'(비들기라는뜻)
로 지어준 데는 '하나님 앞에서는 비둘기같이 순결하며
죄와 재난에 대해서는 비둘기처럼 슬피 울어야 함'
상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요나는 여로보암 2세의 통치시기였던
B.C.793-753년까지 북이스라엘에서 사역한 선지자였으며
그의 말년에 요나서를 쓰고 삶을 마무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히브리인 전승에 의하면
그는 엘리야가 살려준 사렙다 과부의 아들이었고
그 후에 엘리야를 따라 다녔으며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해 보냈던
그 소년 (왕하 9:1-6)이라고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2. 시대적 배경

요나는 북 이스라엘 여로보암 왕 2세의 통치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이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어귀에서 아라바 바다까지 이르리라" [왕하 14:25] 란 예언으로,
당시 이스라엘이 수리아의 억압을 받고 있을 때,
이 예언은 참으로 희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하맛어귀란 북쪽 수리아의 주요도시로
이스라엘과 북방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곳이며
아라바 바다란 사해바다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는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의 원래
영토를 (요단 동편까지) 되찾게 됨을 나타내주는 말입니다.

이 예언대로 하나님께서 회복을 이루어주심에 따라
요나는 북이스라엘의 선지자 로써 인정과 호감을 받고 있었음으로 자신의
사역은 오로지 조국을 위해서만 부르심을 받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 니느웨로 가서 사역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는 의식적으로 피하여야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말씀에 불순종하고 니느웨와는 반대방향인 다시스로 떠났습니다.

한편 당시 앗수르는 잦은 왕들의 통치 변화가 이루어졌던 시기로
- 살만에셀 3세: B.C. 783-773,
- 앗술단 3세: B.C. 773-755,
- 앗술리나리 2세: B.C. 755-745년
이전 왕들의 통치시대에 비해 국력이 약화되어 있었으며
특히 북방의 신흥국가인 '아라랏'과의 전쟁이 장기화 됨으로
나라가 침체 국면에 접어든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택하사
 니느웨로 보내셔서 그들을 회개시키게 하셨는데
이 시점에는(B.C.765-759) 나라에 큰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B.C.763년 6월 15일에는 완전한 일식으로
앗수르 땅에 칠훍 같은 어둠에 휩싸이는 불길한 징조로 인하여
민심이 상당히 불안한 가운데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므로 요나 선지자가 단 하루 동안만 선포한 심판의 메시지로도
왕과 백성및 니느웨전체가 회개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랜드 주석 요나서 참고)


3. 요나의 성품

사람의 성품은 자신의 일생을 결정하는 주요요소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쓰여지느냐에 따라
좋은 결과 또는, 나쁜 결과도 맺게 됩니다.
만일 자신의 유익만을 위하여 쓰여진다면
이기적인 삶이 될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쓰여진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품의 주인인 자아를 버리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자기 멋대로 행하게 됩니다.
요나 또한 자신을 온전히 버리지 못한 특별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1) 시기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욥 1:2]

북 이스라엘 백성에겐 앗수르는 언제나 싫은 적국입니다.
단 한번도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도움이나 혜택을 준 적이 없고
오히려 언제나 지배하려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나를 항상 대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결코 좋아할 리가 만무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와 그사이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내가 싫어도 하나님께서 택하신다면
나의 감정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요나의 마음속에는 국내에서의 사역이 잘되어지고 있으므로
안주하고 싶었던 마음과 아울러 또한,
 적국의 나라가 하나님의 은혜로 축복받으면
결국 자신의 나라가 불리해지기 때문에 오히려 징계와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와같은 마음은 그의 사명을 져버리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에게도 탐심, 안일, 시기심은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임을 알고
고난이 닥치면 이 부분들로부터 회개하며 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2)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대개 말씀을 중심으로 삽니다.
그리고 말씀을 중심으로 판단합니다.
그 결과 정죄합니다.
그리고 단언합니다.

즉, 불신자들은 지옥에 가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당신들은 멸망 받아야만 된다고 단언하는 것'은 안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고정관념이란 인식한 것이 행동으로 나타날때 표면화 됩니다.
우리는 단지 현재만을 판단하여야 마땅할 뿐
미래에 대한 일은 단정하면 안됩니다.
사람과 환경은 언제나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스라엘을 적대시하는
이방국가들은 징계를 받고 멸망되어야만 된다는
고정 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결과 그의 고정관념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은 싫으면 부분순종,  아니면 억지로 반 순종을 하며 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은혜나 축복이 줄어들 뿐, 징계는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불순종은 다릅니다.

고치면 살고 고치지 않으면 심판을 받습니다.
 [예: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 요나는 자신의 고정관념을
바다 속에 던져짐을 당하는 징계를 받음으로 버려야만 했씁니다.


3) 의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 드립니다.
그러나 오랜 응답이 없이 계속해야지만 되는 기도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기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느 세월에나 응답 받게 될까?”
또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무응답이겠지”…… 등등)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하셨습니다. [막 11: 24]

즉, 성급함이 의심을 갖게 만들어줌을 버려야 함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는 성급한 마음을 지녔기 때문에 결과가 궁금했습니다.
정말 40일만에 멸망이 주어질지,
구원이 주어질지 기다려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자신이 선포한 구원의 반대 현상이 이루어지길 바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깨우쳐주시기 원하셔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고생하지 않도록 박넝쿨을 자라게 하시어
그늘에 앉아 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도 잠깐, 박넝쿨 잎사귀가 곧 시들어버림으로
그늘이 없게 하시고 더욱 뜨거운 햇빛을 쪼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면 당장은 고통을 받지 않습니다.
안일하다고 생각할 때, 큰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고통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바로 '성화의 은혜'입니다.

당면한 문제는 언제나 내가 자라면 지나가게 됩니다.
요나는 자신이 아끼는 박넝쿨과
하나님께서 아끼시는 니느웨백성 12만 명의 영혼을
비교해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 성숙하게 자라게 됩니다.  


4. 요나 신앙의 특징

신앙생활이란 계단을 올라가는 것과 같아서
한번에 쭉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올라가다가는 쉬고, 또 가다가는 힘들어 뒤로 내려오고
그렇다가는 또 올라가고 이렇게 하면서
결국 끝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쉴 때는 세상일에 심취할 때이고,
뒤로 갈 때는 세상일에 바빠 빠져있을 때이고,
올라갈 때는 말씀 따라 살 때입니다.
영적인 민감함은 성령님을 의지하고 있을 때,
바로 바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멈춰있는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요나 선지자는 우리에게 신앙에 뒤쳐졌다가
다시 회복으로 올라가는 신앙의 모습을 보여준 선지자였습니다.


1) 자신의 잘못에 책임을 질줄 아는 선지자였습니다. [욘 1:12]

사람의 죄악은
하나님께서 제일 잘 알고 계시고 그 다음은 자신입니다.
만일 인생에 고통이 닥쳐왔다면
그 원인을 하나님을 의식하고있는 자신이 제일 먼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 을 피하고, 자신이 먼져 해결하려 듭니다.
그러나 문제의 해결에 관한한 하나님의 개입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의 방법만을 고집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했던 행동을 보면 잘알수있습니다.
결국 그들의 최후는 멸망으로 끝나게됩니다.
또하나는 다윗왕이 행하였던 행동입니다.
그는 범죄후 하나님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죄를회개함으로 용서를 받게됩니다.

항상 내 자신의 방식은 고통 없이 말로 쉽게 지나가려는 방식이고
하나님께 맡기는 방식은 징계를 감수하는 방식입니다.

요나는 풍랑이 자신의 죄로 인하여 온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남은 선원들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을 바다에 던지우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자신을 맡긴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우상을 숭배했던 선원들을 구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다가 잠잠해지는 기적을 본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제물을 드리고 서원하였습니다. (욘 1:16)
신앙은 죄에대한 책임에 대해서는 항상 하나님앞에 맡김으로
해결해야함을 요나 선지자는 보여준 것입니다.


2) 하나님께 철저히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키는 선지자였습니다. (욘 2:1-9)

성도의 가장 큰 괴로움은
육신의 고통도, 환경의 어려움도, 대적의 위협도 아닙니다.
그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시고 떠나셨다는데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어떤 어려움도 잠시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버리신 고통은
지옥에 가서 영원히 겪어야 되는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살아야 할 것은
내가 하나님의 버리심을 받지 않도록 늘 회개하고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쫓겨났음을 알았습니다. (욘 2:4)
그리고는 회개를 하였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성전을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참된 회개기도의 특징은
죽음의 처지에서도 감사를 드린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드린 기도를 히브리어로 '팔랄' 이라고 부르고
이는 감사기도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요나는 감사기도를 드리게 되었을까요?
물고기 뱃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바다 속에서 3일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물고기 속에 큰 공기 허파나 부레가 있는 곳은 견딜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일입니다만, )

진정한 회개는 가장 불행한 처지에서 감사를 드릴 수 있는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죽게되도 천국은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하면 용서를 받는다는 것을 알기때문입니다.

요나는 절망속에서 회개기도를 드림으로 고난에 감사하는 마음이
진정한 회개임을 우리에게 보여준 신앙인이었습니다. (욘 3:4)


3)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욘3:4)

선교지의 특징은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 풍속, 문화, 사고…… 등이 다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요나는 자신 신변의 염려와 적국의 분위기에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대로를 걸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습니다.
담대함이 없이는 선교사역은
이루어질 수 없음을 보여 준 행위입니다.

담대함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따릅니다.
소심함에는 인간의 애쓴 노력만 남습니다.
주의 일을 할 때나 세상 속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를 위축시키는 세력이나 핍박하는 분위기가 많습니다.
그러나 굽히면 안됩니다.
대적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거역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물질, 권세, 무력…… 등은 우리를 능히 해코지 할 수 있습니다.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들과의 관계를
세상적인 유대 관계하에서 풀어나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안에서 세상과의 관계를 풀어나가려고 합니다
한번한 타협과 양보는 자위를 갖게 해줌으로
계속 내 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주님께 순종하는 믿음은 어느때든
성령중심 신앙생황을 하게 만들어줍니다.

즉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따르는 생활입니다. 
요나 선지자는 결국 니느웨백성 십 이만 명을 구하는
이방인 선교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긴
구약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1. setban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합니다! 은혜로운 글 잘 보고갑니다.

    2013.03.03 04:42
  2. 빛나는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관리자의 승인을 기다리고 있는 댓글입니다

    2017.03.14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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