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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에바다교회

'Bible Study'에 해당되는 글 191건

  1. 2011.11.25 [성경인물 092] 제사장 가문의 조상 레위 / Levi
  2. 2011.11.23 [성경공부 092] 시간 / 때
  3. 2011.11.22 [재미있는 성경상식 004] DOUBLING OVER
  4. 2011.11.18 [성경인물 091]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여인 레아( Leah )
  5. 2011.11.16 [성경공부091] 희년 (A Jubilee)
  6. 2011.10.26 [성경공부 090] 율법과 복음
  7. 2011.10.21 [성경인물 090] 신약의 첫 여선지자 안나 / Anna (2)
  8. 2011.10.12 [성경공부 089] 재창조
  9. 2011.09.30 [성경인물 089] 용단의 여인 리브가 / Rabecca
  10. 2011.09.14 [성경인물 088] 남은 자 / Remnant
  11. 2011.06.24 [성경인물 087] 겐그리아의 일꾼 /뵈뵈(Phoebe) (1)
  12. 2011.06.15 [성경공부 088] 사도 바울의 4차 선교여행
  13. 2011.06.10 [성경인물 086] 교법사 가말리엘 / Gamaliel
  14. 2011.06.01 [성경공부 087] 성령의 하나님
  15. 2011.05.20 [성경인물 085] 아리마대 요셉 / Joseph of Arimathea
  16. 2011.05.18 [성경공부 086] 보혜사 (Counselor)
  17. 2011.05.06 [성경인물 084]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 / 시므온(Simeon)
  18. 2011.05.04 [성경공부 086] 시간 / 때
  19. 2011.04.29 [성경인물 083] 기업무를 자 / 보아스(Boaz) (1)
  20. 2011.04.20 [성경공부 085] 부림절
  21. 2011.04.15 [성경인물 082] '이스라엘의 어미' / 여 사사 드보라( Deborah)
  22. 2011.03.30 [성경공부 084] 산상수훈
  23. 2011.03.25 [성경인물 081] 부스러기 은혜에 만족한 / 수로보니게 여인(A Canaanite woman)
  24. 2011.03.23 [성경공부083] 성령의 은사
  25. 2011.03.18 [성경인물 080] 산자의 어미 하와 / Eve
  26. 2011.03.02 [성경공부 082] '이신칭의'
  27. 2011.02.25 [성경인물 079] 베들레헴에 메시야의 탄생을 예고한 선지자 / 미가 (Micah)
  28. 2011.02.23 [성경공부 081] '성전/ Temple'
  29. 2011.02.09 [성경공부 080] “인자” / The Son of Man
  30. 2011.02.04 [성경인물 078] 불순종의 선지자 요나 / Jonah (2)



제사장 가문의 조상 레위 / Levi  
[2:4-6]


1. 인적사항


레위는 야곱과 레아의 셋째 아들로서 그 이름의 원어는
'라아''연합'이라는 뜻의 단어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이는 레아가 남편 야곱의 사랑을 받기 원하여 지어준 이름으로
넷째 아들 '유다'를 낳으면서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란 것으로 보아
레아는
  더 이상 야곱의 무시를 받지 않고 결혼 생활에서
기쁨을 누렸음을 볼 수 있습니다.

레위는 결혼하여 게르솜과, 고핫과 무라리의 세 아들을 낳았으며
또한 고핫은 모세와 아론의 조부가 되었습니다.
레위는 누이 동생 디나가 레위 족속 추장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을 당한 후
세겜성에 유치되어있자 형 시므온과 더불어 이 치욕을 갚기 위하여
세겜성의 남자들에게 할례를 받도록 한 후
성을 급습하여 성안의 모든 남자들을 살해하였습니다. (창 34:25]

그후 레위는 아버지를 따라 가족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갔으며
야곱이
  임종전에 받은 유언기도에서
"네 자손이 흩어지리라.[창 49:5-7] "
라는 저주를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의 정직함과 화평의 마음을 보시고(말 2:6)
그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어주시어 오히려 그의 지파와 후손을
이스라엘의 장자를 대신하는 제사장 가문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민 3:12)
그는 애굽에서 살다가 137세 때에 그 곳에서 죽었습니다. (출 6:16)


2. 레위의 성격과 신앙적인 행위


1) 레위의 젊은 시절은 정의에 불타는 의로움을 지니고 산 삶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20안밖이었을 시절에 어린 누이동생 디나가(약 15세)
가나안 땅 세겜에서 그 마을의 잔치를 구경하러 나갔다가
그 성 추장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고 욕을 본 후
세겜 성에 유치되어있는 것을 보자 불같은 화가 치밀어 올랐으며
그 동생을 위하여 복수할 것을 마음에 품었습니다.

여러 형제들 중 아무도 이에 동참하지 않고 오직
그의 형 시므온과 둘이서 온 성안에 있는 남자들이
할례를 받고 고통 중에 있는 틈을 타서 그 성을 급습하여
추장 및 모든 남자들을 다 죽이고 동생 디나를 데리고 왔습니다.(창 34;26)

나머지 그의 형제들은 학살극에는 동참하지 않았으나 모두 합세하여
그 성안의 재물들을 약탈하였으며 그 성을 폐허화 시켰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레위는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이같은
학살 행위는 잘못이었음을 견책받았으나
레위는 '이는 이방인들이 자신의 가문과 선민
이스라엘에 대한 모욕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정당성을 강조했습니다.(창 34:31)
 

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이같은 일을
완수 할 수 있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동생 디나는 세겜성에 유치된 채
족장 세겜의 정욕의 대상으로 치욕적인 생활을 일생동안 하였을 것입니다.
이는 실로 동생의 아픔을 마음으로 함께 나눈 의로운 오빠의 행위였습니다.
       


2) 레위의 말년 시절은 화평과 정직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제사장 가문으로서의 언약을 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말 2:6)
 

레위는 형제들 중에서 가장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이름을 두려워 한 사람이었습니다. (말 2:5)

 
그는 비록 세겜 학살 사건을 통하여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네 후손이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지리라"는
저주를 받았으나 (창 49:7)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이 흩어짐을 통하여
레위와 그 후손들의 축복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이 저주를 똑같이 받은 형 시므온은 레위만큼
신앙과 성품이 정직치 못하였기 때문에

결국 지파가 흩어지고 감소하여
유다지파로 흡수되었지만 (삿1:3-17)
레위는 하나님께서 종교적 장자로 만들어서
자신의 소유로 삼으시고
제사장 집안으로 임명을 하셨습니다.

레위의 후손은 모여서 성읍을 분배받지 못하고 흩어져 살았음으로
그들의 소속은 오직 각 지파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와 헌물로서 몫을 대신 받게 되었습니다.

각 지파들도 자신의 장자를 모두 하나님께 드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레위 족속이 대신하여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저 자신들에게는 아들과 헤어져 사는 것보다 낫게 여겼기 때문에
이를 모두 허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의 후손들이 레위의 성픔과 신앙을 따라
광야에서 금 송아지 사건 때, 주동자들 삼천명을 모두 죽여
여호와께 헌신 하였음으로 (출 32:28-29)이들을 세워
제사장 집안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민 3:12) 


또한 하나님께서
 
[말 2:5-6]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으로 그에게 준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 하였으며 그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란 
 
 
말씀에 나타났듯이 레위는 형제들 중 누구보다도 이기적인 마음도
 
편파적인 마음도 없이 지냈으며 그는 노아와 에녹같이 여호와 와
 
가장 친근하고 애정어린 교제를 하며 심령과 생활에 
 
흠이 없이 살았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의로움을 보고 
 
죄악에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항상  율법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며 백성에게
교훈하며 제사직을 성취하며 살았습니다. (랑게 주석 말라기 2:6절 참조)
이러한 성품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3. 레위후손들의 구별된 타 지파와의 신앙적 태도


죽음의 홍해 바다를 하나님의 기적을 통하여 건넌 백성들은
여호와를 찬양하며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시내산에 이르러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산에 올라간 사이 40일이 지나자 그 안에 금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그 앞에서 춤추며 경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애굽을 벗어났을 지라도 애굽에서
물들었던 죄성을 다버리지 못한데서 기인한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신앙생활을 하고있을지라도세상의 유혹과 죄성을
유지하고 있는한 30일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세상 죄악에 빠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때에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하나님께 받아서 내려왔습니다.
 


1) 레위의 후손들은 여호와께 헌신한자들이었습니다. (출 32:29)
 

이같은 타락한 백성들의 모습을 본 모세는 자신이 들고있는
십계명 돌판을 금 송아지 위에 던져 둘다 모두 박살을 내었습니다.
이는 이미 십계명 판이 백성들의 우상 숭배로 실효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즉 십계명 1. 2 계명을 어긴 백성들은 곧 죽어야했기 때문입니다.
언약은 파기 되었으며 두 돌판은 무의미한 돌덩이에 불과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세의 감정에 의한 것이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다 멸망 시키지 않으시려는 사랑의 경륜에 따른 것으로 볼수입니다.

그 때 모세는 명령하기를 누구든지 하나님 편에 선 사람은
자기 편에 서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기가 막하게도 레위 자손들만이 모세의 편에 모두 나와 섰습니다.
이 선별된 선택이 결국 레위인들만이 특별히 이 일을 위해
봉사하도록 구별받은 자들이 된 계기기 되었습니다. (민1:47-54)

이들은 누가 우상 숭배를 선동한 주동자들인지를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무섭게 친구든 친척이든 형제든
모두 주모자들은 칼로 처단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삼천명 가량이 처단되자 우상숭배 사건은 수습되었으며
모세는 그들에게 너희가 여호와께 헌신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말은 원문의 뜻은 "너희 손을 채우라"는 말로
'제사장과 같이 죄를 속하여 희생제사를 드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미 이 사건을 통하여
제사장 직분을 행한거나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 헌신한 레위인들을 위하여
'여호와께서 복을 내리시리라'
 
 
하며 축복을 하여주었습니다. (출32:29),

즉 언제나 여호와께 헌신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성별하여주심을 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사업이 가족이 더 소중할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보다 더 소중히 여긴다면
우상숭배자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유부단한 신앙행위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레위인들의 결단과 순종은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하는 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좋은 예로 볼 수 있습니다
 


2) 이스라엘의 제 3대 대제사장이 된 비느하스에게 하나님께서
그와 후손들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주셨습니다. (민 25:12:13)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바로 앞에 둔 싯딤에 머므르게 되었을 때,
모압왕 발락은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하고
여인들로 유혹하였으며 그들로 우상에 제물을 먹게하고
음란을 저지르게 하였습니다.

이에 많은 백성들이 음란에 빠졌으며 우상숭배의 죄를 짓게되었습니다.
마비된 양심은 영적 타락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셔서 염병을 터뜨리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죽은 자가 이만 사천명이나 되었습니다. (민 25:9}
 
 
그러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이 음행에 가담하였는 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제사장 중의 한 사람이었던 비느하스가 회막문 앞에서
백성들의 죄를 탄식하며 울고 있는 가운데 시므온 종족중
한 족장인 시므리가 미디안 창녀를 데리고 진영안으로 들어와
자기 장막 속에서 음란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신분이 높기 때문에 감히 자기에게 사람들이
손을 대지 못할 것으로 여기고 담대하게 음란 행위를 한 것입니다.
이때 비느하스는 시므리의 오만한 행위를 보고
기도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창을 들고 장막 속으로 들어가
그둘을 함께 창으로 꿰똟어 죽였습니다. (민 25:7-8)

그러자 퍼지던 염병이 그치고 하나님의 진노가 멈추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시므리의 높은 지위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었을 때,
비느하스는 용기를 내어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하나닙께서 그의 행위를 기쁘게 여기셨으며
"이일을 저에게 의로여겨 주셨습니다"(시106:31)
또한 그에게 제사장 직분과 그의 후손들에게 제사장 직분이
 상속되도록 언약을 하셨습니다.(민 25:13)

그러므로 그 후손들에게 약속된 대 제사장 직분은 엘리시대에
일시적인 단절 (삼상 2:27-36)을 제외하고는
신약시대 로마가 예루살렘을 초토화시킬 때까지
비느하스의 가문을 통하여 그 명맥이 유지되었다고합니다. (keil)


이와같이 레위의 여호와를 향한 특심과 성실은 그의 후손에게로 이어져 내려갔으며
이는 바벨론 포로 귀환시 그대로 나타나 귀환자들의 42,360명 중
1/10 에 해당하는 4289명의 사람들이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에스라 2:36-42)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각자의 믿음과 행위를 구분하십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위하여 헌신한 사람들에게 
생명과 평강의 언약을 내려주십니다. (말2:5)

우리도 모두 레위를 본받아 제사장으로서의
생명과 평강의 언약을 받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시간 /
[겔 7:7]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체에게 존재의 기간을 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시간(Time)' 생명과 같이 아주 소중한 의미인데도 

막상 '생명'이라 하면 절실하게 긴장으로 받아들이는 반면에, 

'시간' 보다는 무관심하게 여기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기간이 대상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시간의 개념을 바로 알고 산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을 가치 있고 유효하게 사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간이란 무엇일까요?



1. 시간의 개념


1) 구약에서의 시간의 개념은 기간 보다는 

질적 상태를 나타내는 의미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시간을 나타내는 히브리어는 주로 에트 라는 단어로 

의미는 정해진 기간 또는 

특정한 뜻으로 쓰여졌습니다. ( 7:7)


본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영생체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시간이란 개념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음으로 죄는 죽음을 가져왔으며 

죽음은 정해진 시간의 끝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영생에서 900년으로 제한된 생명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생명의 존재기간은 죄의 결과임으로 의미가 없으십니다. 


다만 주어진 기간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가 하나님의 관심이 뿐입니다. 

그래서 구약초기에 많은 사람의 이름들이 나열됐고 

900 이상 살았던 기간이 명시됐지만 사건은 아무것도 없음으로 

그냥 낳고, 죽었다 간략하게 표시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아브라함의 생애에 있어서는 

그는 단지 175세로 비교적 짧은 기간을 살았으나 

성경에서 창세기에 그에 대한 많은 부분이 기술된 것은 

그의 삶이 하나님과 연관된 질적인 사건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의 시간에 대한 참된 이해는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시간 안에 있는 의미 있는 사건 보다 중요하게 여겼으며, 

모든 인간의 삶에서도 양적인 기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질적인 시간이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 죽어서 심판대 앞에 섰을 인간에게 물어지는 것은 

'그가 세상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살았는가?' 아니라 

그가 사는 동안 세상에서 무엇을 하였는가?” 하는 

질적인 시간에 대한 해명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서는 시간은 의미의 기간으로 

취급 되어졌음을 봅니다. (쉐마사전 P43 시간 참조)


   

 2)  신약에서의 시간의 개념은 시간의 흐름이라는 양적 기간 

속에 중요한 때를 포함시키는 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헬라어에서 '시간(Time)' 가리키는 단어는 가지인데

'크로노스' '카이로스'   '호라'' 라는 단어로 

각각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1] 크로노스 (인간의 )


인간 편에서의 시간의 의미합니다.


시간은 인간의 행동에 의해서 폭도 정해지게 됩니다. 

, 같은 기간도 평안이 지낼 시간의 폭은 느낌 없이, 

소중히 여김 없이 시간은 흐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위기나 고난이나 헌신이 삶속에 깊이 있게 수반될 때는 

시기는 일정한 흐름보다 오래 느껴질 수도, 

느리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마치 33년을 살았어도 100년을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100년을 살았어도 20-30 같이 여겨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은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여 땅에 오심으로 

시간의 바른 의미를 얻게 되었습니다. ( 4:4-6)


, 죄인으로서의 인간으로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삶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주어졌으며, (벧전 4:23)

같은 삶은 시간의 폭을 가장 넓혀서 사는 의미 있는 삶이 되었습니다. 

(시간 밖에 계신 분이 시간안에 포함되어 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2] 카이로스 (하나님의 )


하나님 편에서의 지정하신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의 기간을 정하셨으며 

시작의 , 죽음의 , 심판의 때와 인간에게 간섭하실 때를 정하여 

(징계의 , 축복의 , 연단의 , 성취의 -- ) 

계획하신 뜻을 인간의 속에 나타내십니다. ( 3:3)


주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때는 구약에서는 예언으로 주어졌으며 

신약에서는 예수님과 성령님에 의해서 성취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때인 '카이로스' 가장 알고 사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인간이 만약 하나님의 때를 모르고 마치 멸망하는 

짐승과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닮아 하나님의 때를 알고 살면 우리의 중에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반영할 있는 참된 가치와 

성취를 이루는 행복한 삶을 있게 됩니다.



[3] 호라 (인간편에서의 좋은 시간)


인간 편에서의 정한 시간, 좋은 시간 의미합니다.


인간은 일생을 살면서 정해진 때를 지키고 살게 됩니다. 

(공부, , 성공, 결혼, 양육, 은퇴, 헌신할 …… )


그러나 이와 같은 때는 인간 스스로가 정하여 진행할지라도

인간 스스로 정할 없는 때를 감안하여 

하나님께 자신의 계획을 아뢰어 응답 받지 못하고 지낸다면 

모두 이룬 것들이 헛수고가 있습니다. 


, 위기의 , 사망의 , 하나님의 진노의 ..들을 모르면

나의 이룬 것은 무의미하게 없어질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이란 출생 사망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기간으로 주어진 존재의 기간이기 보다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계획하시고 예정하신 뜻을 

땅에 이루는 영혼의 삶을 준비하는 기간임을 알고 

소중히 여기고 사는 삶이 바른 시간을 이해하고 사는 삶이 됩니다.


2.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지금은 어떤 때일까요?


1) 세상은 말세임으로 고통과 타락의 때입니다.


[딤후 3:1-5]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여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지 않습니다.

인간이 고통을 받는 것은 자신이 행한 행실의 결과로 주어질 뿐입니다.



[1] 잘못된 사랑이 고통을 가져옵니다.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대상은 자신과 돈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의 성향을 지닌 죄인이며 돈은 세상의 창조물입니다.

결국 자신과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사랑할 고통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할 축복과 영생이 주어지게 됩니다.

인간이 타락하게 되면 죄가 정상으로 여겨지고 

의가 비정상적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2] 잘못된 자기 평가가 고통을 가져옵니다.


자긍과 교만과 훼방은 자기 분수를 넘어서 

남을 무시하거나 비방하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일어나는 것이 불화입니다.

불화는 마음의 고통을 수반합니다.

인간이 다투고 헤어지는 것만큼 고통이 없습니다.



[3] 잘못된 성격이 고통을 가져옵니다.


원통함, 참소, 사나움, 배반 등은 불화를 넘어선 싸움이 벌어지게 되고

결과로 끊임없는 전쟁이 땅에 지속되고 있습니다.


같은 성품은 죄성의 범주를 넘어선 

마귀의 영향에 사로잡혀있을 생기게 됩니다.

마귀는 바로 참소자이자 배반자이기 대문입니다.



2)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는 지금이 은혜와 구원의 때입니다.


[고후 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하나님의 3 사역' '창조사역', '구원사역', ' 창조사역'입니다.

중에서 가장 소중한 사역은 구원인 은혜사역입니다.

그리고 은혜의 집행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오셨는데 세상은 잠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재창조사역을 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심판주로 오십니다. 

전에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3. 그러면 우리는 지금 어떤 상태에 놓여 있을까요?


1) 우리는 모두 잠들어 있는 때입니다.


[ 13:11]

또한 너희가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때가 벌써 되었으니……”


[1] 영혼이 잠들어 있습니다.


영혼이 잠이 들면 세상을 하나님보다 사랑하게 됩니다.

진리를 모르므로 육신의 일만 도모하게 됩니다.

세상의 부귀영화, 출세, 성공, 쾌락, 오락 등은 

우리의 영혼을 잠들게 하는 유혹들입니다.


[2] 사명이 잠들어 있습니다.


[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께서 '천국잔치' 배설하고 사람들을 초청했을

번째 사람은 사업이 바빠서 불참했고

번째 사람은 일이 바빠서 거절했고

번째 사람은 쾌락에 젖어 불참했습니다.


그러나 일들은 하나님과 연관된 관계에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들입니다.


사람은 사명이 없을 존재의 의미도 없게 됩니다.

영혼의 잠은 유혹에 빠져있을 오게 되고, 

육신의 잠은 게으를 오게 되고

사명의 잠은 욕심에 빠져있을 오게 됩니다.



2) 여호와를 찾을 때입니다.


[ 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묵은 '이란 '버려진 , 아무것도 생산치 못하는 '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 중에도 아무것도 생산치 못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 무지, 고집, , 타락 등으로 마음이 썩은 경우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잡초와 벌레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온통 마음이 세상 관심사와 유흥거리로 가득 경우입니다.


이때는 성령의 쟁기 말씀으로 마음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회개로 씻어내고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갈아엎은 마음에 의를 심어 

마침내 '거룩의 열매' 맺게 하여 주십니다.


세상 속에서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을 찾지 말고 

하나님을 찾아 남은 삶을 은혜의 삶으로 바꾸어야만 때입니다.



4. 우리가 하나님의 때를 알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를 가장 아시고 분의 때에 맞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유는 주님께서는 항상 성령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1) 성령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때를 수가 있습니다.


[고전 2:9-10]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보내주신 성령님은 우리 마음속에 임재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며 때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과 때를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성령님께 이러한 은혜를 얻기 위해서는 

성령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중심의 삶이란 나의 주인 자아의 자리에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 삶에 제일 중요한 분으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2)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하나님의 때를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신 분의 뜻을 있습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실천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받을 있습니다.

마음의 소원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3) 믿음과 신앙이 성숙할 하나님의 때를 따라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75 하나님께서 

자녀, 이름가나안 땅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자녀를 얻었을 때는 100 때였습니다. 

, 25년은 '믿음의 성장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러 가실 아브라함에게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 18:17) 하시면서

자신의 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믿음이 자라나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면 

친히 말씀으로 예언과 계시로 알려주십니다.


인간의 때는 창상 하나님의 때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열심히 하여 

하나님의 때를 따라 사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DOUBLING OVER
[이사야 40 : 2]

 


40:2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나 받았느니라 할찌니라
 
 

이사야 40장의 내용은 이스라엘의 포로 해방에 대한 예언입니다.

복역의 때란 이스라엘 백성, 남유다의 범죄에 대한 징계로 인해

바벨론에서 약 70년간의 포로 생활을 말합니다.

 

문구대로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정확하게 두 배로 심판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의 대가로 값을 치렀으니

더 이상의 형벌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61:7)

 

그들의 포로 생활은 끝났고 죄악은 사함 받았으므로

선지자들을 통해 실의에 빠진 백성들에게 구원과 소망을 갖게 하며

죄의 백성을 버리지 않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습니다.

 

 

로 갚는다는 것은 율법에 따라 모든 범죄에 적용되었으며 ( 33:9)

이 때 당시, 이방 국가들에서도 통용되었던 판결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 값의 배가 되는 대가를 받았다 하는데

바벨론 포로생활 약 70년이란 기간이 그 대가였다면

과연, 그 단위가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집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이스라엘 문화를 살펴보겠습니다.


 

어느 이스라엘 마을에서 살고 있는 아담씨.
여러가지 형편이 어려워
주위 안면이 있는 분들에게 어느 정도 물질적 빚을 집니다.

하루는 A씨에게 양 3마리,
어느 날은 B씨에게 $$$,
 
그 다음엔 C, D…


날은 흘러 빚을 갚을 약속이 넘었어도 형편이 어려워 고민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빌려 준 사람들 입장에서는 본인에게 찾아와 '돈 갚아!!' 다짜고짜 잡아갈 수도 있습니다만

이스라엘 민족은 규율이나 법을 어긴다든지, 아니면 가장 큰 죄 -
신성모독일 때를 제외하면
어느 정도의 친밀도라든지 관계하에 있어서 서로 난폭한 행동 보단

그레이스 타임을 주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집 문 앞에 하얀 종이가 붙습니다.


그리고 언제 양 3마리 빌려줬음 - A씨 –‘ 라고 써집니다.


그 담날 종이를 발견한 B씨는 ?! 나도 빌려 준 거 있는데…’

A씨 글 옆에 돈 얼마 by B씨’라고 적습니다.

그 후 C, D… 등 사람들이 자신들이 빌려준 목록을 차례차례 적어갑니다.

 

마치 수학여행 마지막 때 반 친구들의 롤링페이퍼 처럼
... 이렇게 차곡차곡 빈칸이 채워져 갑니다.

 

 

 
친구사이의 귀여운 표현으로 여겨지는 이 일은 사실

이 사람은 신용도가 떨어짐을 의미할 수도 있고,

덕을 세우지 못하는 사람으로 여겨지고

그 사회에서 손가락질 받게 되면 본인 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가 부끄러워 밖에 나가기를 거부하게 됩니다.


결국 그 마을을 떠날 수도 있을 만큼 신용에 철저한 그들에겐

직접 와서 두들겨 패지 않아도 충분히 그 만한 가치가 있는 하얀 종이.

(이스라엘 당시 상황이라면 양피지 일 수도 있고)


 

\\\\\\\\\\\\



그러던 어느 날, 길을 지나가던 아담의 삼촌, 엉클 싸이먼은

오랜만에 볼일을 마치고 조카를 보러 오는 길에 이 종이를 보게 됩니다.


? 아니, 이거 무슨 일이지?’


대충 글을 봐도 상황을 알게 된 엉클 싸이먼.

'좋아. 내가 대신 갚아주지'

조카를 위해 대신 해결하기로 결심합니다.
아담을 직접 만나 이야기 할 수도 있고
사람들에게 설명할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고...

그런 행동보다 그는 갑자기 종이를 뒤집고 깨끗한 면에 무엇인가 적습니다.


'xxxx 언제까지 모두 갚는다 엉클 싸이먼 –‘
 

 

이 뜻은 곧, 이 사람의 문제는 엉클 싸이먼이 해결함으로

이 사람을 더 이상 추궁하지 말고 내게 오라는 것이죠.

 


이 행동을 Doubling Over 라 표현하는데

오늘의 말씀 문자대로 두 배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종이 앞면의 모든 죄를 뒤집고 대신 탕감해 주는 것이니

더 이상 이 사람의 죄를 묻지 않을 것이며
없는 것과 같이 내가 사하여 준다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잘못으로 인해
노예로 생활하게 되었더라도
과거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더 이상 추궁하지 않겠다
란 뜻으로도 해석 할 수 있겠습니다.


문구대로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정확하게 두 배로 심판하신다는
엄격하고 어려운 하나님의 뜻으로 보기 보다
좀 더 자비하신, 은혜의 하나님을 표현해주는
또 하나의 표현임을 알게하는 이야기 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여인 / 레아(Leah) 
  [창
29 : 31]


1. 인적 사항


리브가의 오빠 라반에게는 딸이 있었습니다.


[1]
레아 (암소라는 )

[2] 둘째 라헬 (암양이라는 )


여인의 이미지는 이름의 뜻에서 나타나 있듯이

언니레아 동생라헬 비해 미모가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레아를안력이 부족하다 표현하고 있으며

이는 여성적인 매력이 부족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레아는 메소포타미아 하란에서 출생하였으며

야곱과 결혼한 가나안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죽어 선영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습니다.


비록 동생 라헬보다는 

남편 야곱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하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녀를 불쌍히 여기셔서 

자녀 생산의 축복을 주셨으므로 61녀를 두게 하셨습니다.


[1] 르우벤 (보라 아들이라)        [2] 시므온 (들으심)    

[3] 레위    (연합)            [4] 유다 (찬송함)

[5] 잇사갈 ()            [6] 스블론 (거함)

[7] 디나 (, 심판) 어머니가 되었으며 


하나님의
특별 섭리로 선택된 여인이 되어

그녀의 넷째 아들 유다의 혈통에서 메시야가 태어나도록 

섭리하심을 받은 은총 받은 여인이 되었습니다.


2. 주요 생애


야곱은 이삭의 장자권 축복을 받고 아내를 구하려 

외삼촌이 사는 하란으로 떠날 때의 나이가 77세였습니다.

레아와 라헬은 20 후의 나이로 

야곱과는 나이차가 많이 나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라헬이 야곱을 좋아한 것으로 보아 

야곱은 에서와 달리 숫총각으로 지내면서 

몸단장을 하였으므로 젊은 모습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과 라헬을 얻는 약조  

결혼지참금 대신 봉사대가로 7년을 일하고 

결혼식에 임했을 때는 84세로 늦은 감이 있으나 

그래도 상당한 활력을 지닌 젊은이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결혼식 레아는 아버지에게서 

동생 대신 신방에 들어갈 것을 지시 받았습니다.

레아는 야곱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숨기고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라헬과 같이 행동 하였습니다.


야곱은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며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사랑하는 라헬이 아니라

언니 레아였음을 발견하고 매우 놀라 화가 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외삼촌에게 신부가 라헬이 아니었음을 항의하였으나 

레아를 파혼하지는 않았고 7일간 결혼예식을 치렀습니다.

이는 바로 자신이레아의 입장 같이 

에서 대신하여 이삭을 속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를 감수하고 레아를 거두어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레아가 아버지와 합의하여 자신을 속인 것에 분노하여 

레아를 사랑하지 않은 결과 

그녀는 남편에게서 미움 받고 사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레아를 긍휼히 여기셔서 

태를 열어 자식의 축복을 주셨으므로 

무자 했던 라헬보다는 자녀들로 인한 가족의 기쁨은 

마음껏 누리며 있었습니다.


한가지 자녀로부터의 고민을 경우는 

가나안으로 이주 세겜 성에서 

디나가 추장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당하고 

일로 인하여 시므온과 레위가 앞장서고 

다른 아들들과 더불어 세겜 성을 엄습하여 

남자들과 추장 하몰, 그의 아들 세겜…… 모두 죽임으로 

살륙상을 겪게 되었으며

이로 디나는 불행한 모습으로 어머니 곁에 있는 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레아에게는 마음에 아픔이 되었습니다.


남편의 사랑은 받지 못한 대신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의지한 결과 

야곱의 12지파의 조상 6명을 낳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후 야곱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130세에 애굽에 내려가기 레아는 죽었으며

야곱은 레아를 조상들의 무덤인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습니다. ( 49:31)


결국 라반의 레아와 라헬은 일찍 죽어 야곱의 곁을 떠나게 되었으나 

레아는 하나님의 선택한 약속의 자손 3대의 정식 부인으로 

라헬과는 달리 자신의 자리를 지킨 하나님의 축복받은 여인이 되었습니다.

.

3. 신앙생활의 특징


1) 오직 남편 야곱의 사랑만을 원하며 살았습니다.


부부는 사랑으로 맺어진 사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3:16]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그런데 문제는 서로의 사랑이 식어질 경우

부모가 정한 중매 결혼의 경우 

부부가 서로 의무를 충실히 이행치 못하고 

쪽에서 탈선할 경우가정의 유지를 어떻게 해야 할지 

요즘 우리에게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결혼이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경로를 통하여 결혼이 이루어 졌든지 간에 

믿는 자들의 결합은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이기 때문에 

결혼생활의 과정도 그분께 맡기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레아는 자신이 정당하게 야곱의 아내가 것은 아니며

야곱이 외삼촌의 설득에 따라 아내로 맞이되었고

남편에게서 사랑 받지 못하는 외로운 결혼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레아는 남편을 미워하거나 괴롭게 하지 않고 

자기 마음 속에만 슬픔을 감춘 남편을 사모하며 지냈습니다.


그러자 아들을 낳게 되었으므로

아들 이름을르우벤이라 짓고

이제는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 9:32]

하며 아들로 인한 사랑의 기대를 하였습니다.


또한 셋째 아들 레위를 낳으면서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 9:34]


야곱도 레아만이 아들을 낳았을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비록 아내는 사랑스럽지 않아도 자신의 자녀는 예쁘기 때문입니다.


레아는 비록 남편이 자신보다 아이들을 보러 오더라도 

기쁘게 여기며 살았습니다.

이는 아내가 남편을 항상 사랑하며 순종하는 것이 

가정의 행복을 유지할 있는 방법임을 레아는 보여준 것입니다


야곱이 라헬과 여종 빌하와 실바를 취하여 명의 아내를 두었을 때에도 

그녀는 시기하지 않고 꾸준히 남편의 사랑을 기다리고 결과 

잇사갈, 스블론, 디나의 자녀를 낳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사는 생활이 

괴로움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의 행복은 자녀들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축복을 주신 부분에 주로 감사하고 사는 삶이

기쁘게 사는 삶임을 레아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자신의 외로움을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위로 받고 여인이었습니다.


[v 31] “여호와께서 라헬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 하였더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모두 지니고 

만족하게 사는 것을 기뻐하시기 보다 

부족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며 응답으로 받아 감사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여인의 가장 소망은 미인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과 인기를 받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미인은 사람들의 사랑으로 만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애타게 구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라헬보다는 레아가 애타게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의 괴로움을 자주 고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녀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 36:17]

그녀는 결혼생활의 문제를 세상적인 방법을 통하여 해결하려 들지 않고

하나님을 통하여 해결하려 하였습니다.


그녀가 아들을 낳은 출산이 그쳤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아내를 취하여 아들을 낳게 되어 

관심이 곳으로 다시 쏠리게 되었을 때에도 

레아는 여전히 하나님께 기도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녀의 기도를 들으시고 [ 30:17]

다시 태를 열어 자녀를 주셨습니다.


이는 라헬이 자녀를 생산하지 못하자 자신의 여종 빌하를 통하여 

아들을 낳아 자신의 아들로 삼고자 편법에 대하여 

하나님의 축복으로 자녀를 생산함으로 

레아는 라헬보다 당당하고 떳떳한 우의를 차지함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아의 삶은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삶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아보셨다

그리하여 내게 아들을 주셨도다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자녀의 축복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며 살았습니다.


사람은 때때로 세상의 것을 모두 소유하며 태어나는 것이  

불행한 삶임을 느낄 있습니다.

증거가 왕들이 모두행복한 삶을 살았느냐?하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부족하게 지내는 삶에서 더욱 채워지게 하셨습니다.


레아를 통하여 오늘 나에게 부족한 삶에 처해 있다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기 원하시는 사랑과 축복의 부분임을 깨닫고

 하나님께 레아와 같이 구하여 특별 은혜를 받는 삶을 누리십니다.


3) 하나님의 특별 은총을 받아 

그녀의 후손에서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족보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레아와 라헬의 사랑 싸움은 야곱이 가나안 벧엘로 돌아왔을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 죽음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라헬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드라빔 (수호신) 훔쳐서 가지고 거짓말의 결과이며

당시 야곱은 

외삼촌의 신은 뉘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 31:32]

말한 저주가 라헬에게 임한 것입니다.


결국 레아와 라헬은 결혼생활 14년간을 경쟁자로 지냈으나 

라헬이 죽음으로 레아는 가정의 평화를 찾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녀가 번째 아들 유다를 낳고 고백하기를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말함으로 

그녀의 특별한 신앙심을 야곱은 

그녀에게 많은 감화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적인 결혼생활은 여전히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고 

그녀의 아들 요셉과 베냐민을 가장 사랑했습니다.


야곱이 영적인 눈을 뜨고 죽음에 임박하여 

12 자녀에게 마지막 축복 기도를 하여줄 그는 

유다가 하나님께서 섭리한 메시야의 계보를 이을 아들임을 알고 

그에 대한 축복기도를 하여주었습니다. [ 49:10]


결국 여호와를 찬송하며 지내는 레아를 

정실 아내의 자격으로 인정하게 야곱은

라헬이 죽었을 때는 그녀를 베들레헴에 묻고 묘비를 세워 기념하였으나

40 이상 같이 살아 레아가 죽었을  

조상의 묘인 막벨라 굴에 정실 부인으로 장사 지냈습니다. [ 49:31]


레아의 일생은 오직 남편과 하나님 만을 

존귀하게 여기는 삶을 삶이었습니다.


인생의 삶에는 여러 가지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여성들에게는 미모와 인기, 사랑과 물질…… 외에도 많겠지만

그러나 가장 행복은 가정과 신앙임을 

레아는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욱 여인으로서 후세의 메시야 계보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일생이 생존에만 그치는 삶이 아니라 

후손에게 이르는 연결선상의 삶을 살아야 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삶의 외로움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채워 누리고 레아의 삶을 

우리의 외로운 삶에도 적용하여 

같이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십시다.



 



희년 (A Jubilee) 
[레위기 25:8-13]



1. 희년의 의미


희년은 히브리어로요벨이라 부르며

의미는 '수양뿔의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보통 전쟁 사용된 은 나팔과는 달리 ( 10:1)

구부러진 수양의 뿔로 만들어져 

제사장들이 주로 사용하는 나팔입니다. ( 6:4-5)


그러므로 나팔을 제사장들이  

이는 종교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었으며 

승리의 전주곡 또는 기쁜 소식을 알리는 

특수한 용도로 불리어졌습니다.


한편, 랍비의 전승에 의하면희년이란 낱말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을  

숲에 걸려 있던 수양의 이야기와 

관련 있는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전승은 아브라함이 수양을 태워 재로 만들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통하여 수양을 되살아나게 하셨고 

가죽으로는 엘리야가 광야에서 입었던 외투를, 

내장으로는 다윗이 키던 것과 같은 하프를, 

그리고 하나로는 출애굽 당시 시내 산에서 불던 것과 같은

 
나팔을 만들고,   다른 하나로는 

메시야가 오심을 알리는데 사용될 나팔을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후대의 주석가들은 원어를 여호수아 6:5에서 찾고 있습니다.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제사장들이 희년의 양각 나팔을 길게 올려 불어라고 되는데 

구절에 의하면 희년이 오직 뿔이란 악기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나팔소리에서 계속 울려 나오는 소리의 진동을 함께 동참하는 의미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누리에 멀리 울려 퍼짐을 말하고 있다 합니다.

(엑셀,레21장 참조, S 로빈슨)


그리고 그 시기는 안식년이 7 반복된 이듬해 

50년째 되는 해를 희년으로,  시기의 선포는 유대종교력으로 

7 10 속죄일에 나팔을 크게 불어 희년임을 알렸습니다.


평상시 속죄일에는 나팔을 불지 않았으며 

희년의 속죄일에만 나팔을 이유는 모든 회복을 알리는 안식과 

자유의 선포 기쁜 소식이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께서 희년의 제도를 만드신 이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통하여 자신의 일을 시키시기 보다는 

함께 있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이 지음 받고 일은 오직 하나님과 함께 안식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안식 속에서 

하고 싶은 것들을 즐기며 사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죄를 짓고 나자 일은 노동이 되었으며

안식은 없어지고 삶은 생존 경쟁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백성으로 삼으시고 

다시 안식을 기준으로 삶을 제시해주셨습니다.


제도가 안식일 즉, 7 하루를 

하나님과 함께 지내며 안식하는 삶이며 

안식년 즉, 7 1년을 사람과 모두 쉬는 해이며

희년은 50년째 되는

 
안식년과 희년 2년을 모두가 쉬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안식의 제도는 

인간들로부터 탐욕을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며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알려주어 

육신의 쉼을 통하여 

영혼이 하나님께 더욱 나아가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취지가 제일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 희년 규정되어 있으며

희년은 인간이 성인이   한번만 맞이할 있는

 
완전해방과 회복의 해로 누구나 희년 후에는

 
천국에서의 최종 안식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희년제도는 천국 삶의 예비과정임을 있습니다.


1) 희년은 모든 얽매인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해입니다.


[ 25:10]

오십 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인간의 진정한 안식은 자유로부터 누릴 있습니다.

억눌려 있는 상태에서는 진정한 안식은 이루어질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는 희년의 가장 축복이라 아니할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노예들과 죄수들이 감옥에서 풀려났고, 신분이 회복되었으며

육체적으로는 모든 노동에서 완전한 안식을 얻을 있게 되었고

물질적으로는 모든 빚이 탕감되어 물질로부터의 자유를 얻게 되었으며 

땅과 기업이 소유자에게 돌아감으로 소유가 회복되었습니다.


이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며

같은 권리를 누려야 함을 하나님께서는 지시하신 것입니다.



2) 희년은 기업과 가족이 회복되어 한데 모아지는 해입니다.


[레위기 25:10]

“...이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가족에게로 돌아갈 지며


기업이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지파 별로 나누어 받았던 토지를 말하며

구체적으로는 자손 대대로 물려줄 가문의 유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득이하게 자신의 기업을 팔고 타지방으로 옮겨갔거나 기타 사정으로

 
남의 소유가 되어버렸을 지라도희년이 되면 원주인에게로 다시 돌아가며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은 다시 돌아와 가족이 한데 모여 같이 살면서 

기업을 다시 돌려받아 농사를 짓고 있게 것입니다.


요즘에는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일 것이며

가족들도 성인이 되면 각자 독립하여

자기 일자리 찾아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추석이나 명절에 고향 찾아 부모님 뵙는 기쁨 한가지 만으로도 

얼마나 고대하며 1년을 지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와같은 인간의 심정을 하나님께서는 욕심 없이 

허락하신 땅에서 부여 받은 기업으로 돌아가

하나님을 섬기며 지내고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유혹은 우리들을 뿔뿔이 고아로 만들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예비하신 자리에 모여 살게 하십니다.


3) 희년은 사람과 모두가 안식하는 해입니다.


[레위기 25:11]

오십 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안식년에 자연적으로 자라난 곡물과 과실은 

땅의 주인이 수확하여 저장할 없었습니다.


이유는 소출들은 모든 사람의 공동소유로 

특히 고아나 과부, 객이나 이방인

 
의지할 은신처가 없는 자나 가난한 자를 위한 

양식이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들의 위하여 

공정한 소득 분배를 하고 계심을 있습니다.


사람은 몸이 자유 해도 안식을 얻을 있지만 

마음도 자유 해야만 진정한 안식을 누릴 있습니다.


오늘날 부자들도 몸은 자유 하지만 

 
마음 속에 욕망과 탐심이 가득 차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탐심을 가지고 사는 것을 

몹시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탐심을 포기시키는 제도를 만들어 

욕망에서 해방되는 진정한 안식을 누릴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3. 영적 희년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희년의 완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만드셔서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 

세상을 사탄에게 내주고 말았습니다. ( 4:6)


하나님께서는 땅므르기 법칙에 따라 

세상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의 생명을 되찾고자 하셨는데

법칙을 적용시켜 마귀에게 찾아올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을 찾을 없었습니다.

인간의 생명을 힘이 세상 인간 동족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세상에 보내사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사탄 마귀로 하여금 없는 자를 죽게 만들어

하나님의 법칙에 어긋난 일을 행하게 하여 

다시 권한을 되찾아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모두가 

우리에게 진정한 희년을 베풀어 주신 것이며

영적인 희년이 하나님의 제정하신 

희년의 완성 되는 것입니다 ( 61 완성).

(쉐마 희년 해설 참고)



1) 포로와 노예로부터의 해방은 

 
죄의 멍에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자에게 자유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주의 은혜의  '희년' 가리키며

구약의 희년은 신약에서 완전 해방을 완성하도록 예정하신 것인데

주님께서 오셔서 모든 죄와 죄의 결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신약의 희년의 선포는 복음이 바로 나팔을 부는 것이며

복음이 전파되자 즉시 죄의 세력에 포로가 되어 있는 인류를 

영적으로 해방시켜 자유함을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세상 쫓아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구원의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세상이 전부인 줄로 착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공포에서 영생의 길을 발견한 사람들은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또한 세상 삶에는 무거운 짐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세상 근심 걱정에 짓눌려 한시도 편안히 지낼 없는 

인간들의 모든 짐을 주님께서 대신 짊어져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진정 완성된 희년을 만끽하고 사는 

축복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닐 없습니다.



2) 재림시의 주님의 호령 나팔소리는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해방시킴 의미합니다.


[살전 5: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외 함께 있으리라."


구약에서의 제사장의 나팔은 

대적을 무너뜨리고 승리하는데 불려졌는데

신약에서의 천사들의 부는 나팔소리는 

사탄 마귀에 대한 확실한 승리의 선포가 것이며, 

증거가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부활하며 

자들도 죽음에 묶이지 않고 

살아서 공중으로 들림 받아 올라감으로 증명 것입니다.


살아서 들림 받은 성도들은 공중에서 변화되어

죽은 자들이 부활의 몸을 입듯이

죄로 연약한 육체를 벗어버리고 

똑같은 부활의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세상과
육신으로부터의 해방.

이것이 진정 모든 저주에서의 해방이 아닐 없습니다.


3) 천년 왕국에서의 삶이 

세상 희년의 완성된 삶이 것입니다.


[ 20:6] 

"이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1] 첫째 부활에 참여한 성도들은 예수님의 지상 재림  

공중에서의 어린양 혼인잔치를 끝내고 땅에 다시 내려와 

천년 동안 주님과 더불어 노릇하며 세상을 다스릴 것입니다.


때가 영육간의 희년의 완성이 됨은 

세상에 마귀가 없음으로 죄가 없어지게 됩니다.


천지창조 때와 같은 

아담과 하와 와 같은 삶이 재현될 것입니다.



[2] 부활로 이미 육신이 변화 성도들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년을 것입니다.


그때는 모든 인생의 짐이 벗겨진 가운데 진정한 행복을 누리며 살게 것입니다.

질병도 노쇠도 죽음도 없는 삶을 이 땅에서 다시 한번 누리고 살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셨던 모든 능력을 지니고 것입니다.


영생체와 능력을 지닌 성도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완전히 개발하고 사용하며 

하나님의 땅을 정복하라 하신 문화 명령을 완성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존재를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발휘할 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때문에 마귀에 눌려 연약함 가운데 살게 되었지만 능력을 

회복한 때는 영의 세계도 물질세계도 관장하며 살게 것입니다.


인간의 완전한 완성 모습으로서의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희년의 마지막 목적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믿어 우리 모두 희년의 완성에 동참하는 

택함 받은 자들이 같이 되십시다.







“율법과 복음” 
[마 5:17]



오늘날 신앙생활의 특징은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신으로 마감하는 풍조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은 깊어지면 더욱 주님을 닮아가야 하는데 
반대로 세속을 닮아 가는 이유는 
신앙이 세상에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죄의 뿌리는 깊고 
신앙의 뿌리는 얕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본래 신앙의 뿌리는 하나님께 있었고 
죄의 뿌리는 마귀에 있음으로 
당연히 신앙은 죄의 뿌리보다 깊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신앙의 뿌리인 하나님을 제대로 찾게 하여주지 못할 때 
신앙은 표류하게 됩니다. 

왜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날까요? 

이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살펴봄으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셨을 때는 
인간의 삶의 기준은 양심에 있었습니다. 

양심은 하나님의 속성을 닮은 마음으로 항상 기준이 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바른 양심만 가지고 산다 하여도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지 속에 죄가 들어오면서 
하나님의 영이 떠난 영속의 양심은 
비대해진 죄성의 혼에 눌리면서 
올바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혼의 의지가 선악을 구분 할 수 있는 법을 
아스라엘 민족을 택하여 수여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한 
인간은 다시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었는데 
육신 속에 욕망이 죄의 중독으로 커지면서 
도저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타락한 죄인의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자력으로는 양심도 계명도 지킬 수 없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보내어
죄인 된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면서 
죄인의 신분을 바꾸어주시고 
이에 맞는 새 기준인 복음을 내려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신앙은 복음의 시대가 된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은 죄 씻음을 받았고 거듭났으며 
성령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사는 
거룩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이 것이 하나님의 뜻이자 구원의 완성 계획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듭난 것은 영이요, 
혼과 육신은 양자로서 붙어 갔다는 데 있습니다.
즉, 거듭난 영 속에 죄성과 
욕망이 한 지체 속에 머물고 있는 현상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사역 중에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사역이 바로 “성화 사역”입니다. 

성령님은 육신의 소욕은 다스려 주시지만 
혼의 죄성은 진리를 가르쳐 주심으로 
개심하도록 인도하여주십니다. 

이 같은 성화과정에서 
성도인 우리들은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계명에 비추어 
더욱 죄에서 떠나 성결의 자리로 나아가야만 하는 
우리들의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1. 율법의 역할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기준”
율법이 있기 전에는 양심이었으며
율법이 수여된 후로는 계명이었습니다.

죄는 양심보다 강하고 죄성은 본성보다 강하기 때문에
인간은 한번 죄에 중독된 이상 죄가 인간의 삶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을 택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셨는데
이들이 번성하기 전까지는 노예라는 신분과 환경으로 
죄 된 생각과 죄 된 욕망이 분출되지 않도록 
바로 왕의 압제로 막아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출애굽을 하면서 자유를 누리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야 할 하나님 나라의 법이 필요하였습니다.

이를 율법을 모세를 통하여 내려주셨는데
이것은 크게 세 분야로 나눠집니다.

[1] 도덕법
이는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지켜야 할 
기본적 윤리강령입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십계명이며
이 계명은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따른 것이므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지켜야만 하는 불변의 법입니다.

[2] 의식법
종교생할에서 지켜야 할 제사법과 성결법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짓게 하시고
여러 가지 제사법과 제사장 및 성도들의 행실 등을 규정하여
하나님께 나오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의식법은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여 오시기 전까지 예표하는 의식이므로
주님께서 오신 다음에는
실질적인 제사의식은 바뀌어지게 되었습니다.

[3] 시민법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바른 규범으로 주어진 것으로 
재산법, 결혼 및 이혼법, 보상법, 민사 형사재판법…… 등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법은 시대와 생활 수준에 맞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과학, 문명, 인구, 문화, 제도가 바뀜에 따라
변동되는 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이 다소 변경될지라도 
그 법에 담긴 원리나 기준만은 계속 적용되어야 바람직한 법입니다.

이 같은 성문법 외에도 
유대인들에게는 소중히 여기는 구전법인 “미쉬나”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모세가 아론에게 구전으로 전하고 
아론이 그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그리고 12 지파에게, 
선지자들과 교법사들에게 전하여 내려온 것입니다.
마지막 구전의 완성은 
힐렐의 가문에서 오랜 구전을 성문화한 것으로 
주전 66-70년 경 유대민족의 전통으로 확립되었습니다.

이 구전은 바리새파의 소산으로 
바리새인들은 이 구전까지도 철저히 지킨 율법주의자들이 되었습니다.



1) 율법은 죄를 구분하고 죄인을 형벌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율법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을 정의롭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로 세우며 
보존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있기 전 백성들은
무엇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죄가 되며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는지를 잘 알지 못하였으나
도덕법, 의식법, 시민법을 통하여 
올바른 신앙생활과 삶의 바른 규범을 알고 지키게 된 것입니다.

또한, 이를 어겼을 경우 
율법의 판결은 매우 엄중한 것으로서 
형벌의 두려움으로 범죄를 예방하는 역할을 동시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법이 범죄를 다 몰아낼 수 없듯이
구약시대에도 죄는 날로 늘어갔으며
이후에는 법을 집행하여야 하는 지도자들조차 타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오늘날에도 법보다도 주먹이 앞서듯 
과거에도 법보다는 욕망이 앞선 인간의 연약함을 볼 수 있습니다.

약이 많아지면 병도 많아지듯이 
율법도 많아지면서 죄도 더욱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자력으로는 죄를 다스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2) 율법은 세상 최후의 심판 때 회개하지 않는 자들의 정죄에 대한
절대적 기준의 역할을 합니다.

율법은 심판주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수여하신 것이기 때문에
마지막 심판 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성도들은 주님의 보혈로 죄를 용서함 받았기 때문에 관계가 없지만 
충분히 회개치 않은 자들이나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살지 못한 성도들과 불신자들은
율법의 기준에 의해서 죄가 규명되고 심판 받게 됩니다.

특히, 십계명은 심판의 주 된 기준이 될 것입니다.
십계명을 모르고 살고 있는 불신자들은
탐심의 우상숭배로 인하여 큰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믿는 자들 또한 탐심이 우상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2.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


율법은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은혜의 계시였으므로 
죄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를 알려주는 반면 
죄의 대속은 동물의 제사법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본인의 죄는 완전히 씻음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사함과 구원 면에서 율법은 일시적일 수 밖에 없으며
죄가 더욱 증가함에 따라 
율법으로는 더 이상 죄의 문제를 처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필요가 있게 되었으며
죄를 짓지 않게 하기 보다 죄 자체를 끊어버려야 하는 
구원대책이 절실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죄인 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심으로
의의 자녀로 신분을 바꾸어 주셨으며
짐승의 피로 제사 드리던 율법의 제사법을 폐지하시고 
스스로 제물이 되어 우리의 죄를 속죄하신 것입니다.

처음부터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다면 좋았을 텐데
하나님께서는 왜 구약의 율법시대를 지나게 하셨을까요?

이는 인간이 발전되어가는 변천과정에서 죄도 따라 발전 및 변천되어지기 때문에
시대 및 환경 속에서 짓는 죄가 무엇인지를 구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죄와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을 깨달았을 때 
구원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바라보게 되며
형벌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아야 구원의 고마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자체는 구원을 주지 못하지만 
인간의 정죄의 당위성과 구원복음의 필요성을 인식시켜 
복음으로 인도하는 인도자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한 역할을 다한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의 시작은 율법의 한계에서부터 출발되며
죄사함과 구원의 완성은 천국을 계시하여 주는데 
무척 희망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의 성도들의 삶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또한, 천국에 들어올 경건한 자들을 
정한 숫자가 차기까지 얻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들어와 구원받을 자의 숫자도 거의 찼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한 자들이 많이 생기자 
천국에 대한 계시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애굽에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나라로 계시가 되었듯이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천국이 진정 성도가 살아야 할 곳으로
계시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가나안 땅에서의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의 지켜야 할 법이라면 
복음은 천국 백성들이 지켜야 할 수준 높은 은혜의 법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서 
세 가지 단계를 통과하여 구원에 이룰 수 있게 됨을 봅니다.

[1] 율법 이전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에는 범죄하면서도 죄를 깨닫지 못하고 
양심의 가책만 받고 있었습니다.

[2] 율법이 주어짐
율법이 주어짐으로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죄를 짓지 않으려 시도하지만 
절망 속에 빠져 구원의 상태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3] 율법의 완성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율법에서 자유를 얻고 
의인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율법의 방법은 행함이었으나 
인간의 행위가 온전치 못함으로 복음의 방법 안에서 
믿음으로 율법의 완성이신 주님의 혜택을 값없이 입게 된 것입니다.



3. 율법과 복음의 조화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유지시켜 줍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구약의 “심판의 하나님” “사랑의 아버지”가 되었으며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의 “영적인 신랑”이 되셨습니다.
은혜의 시대가 왔으므로 모든 법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율법을 폐지, 또는 
무용지물로 여기는 신앙풍조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점점 자녀들은 방자하게 되었고
웬만한 죄는 회개하면 모두 용서해 주신다는 
하나님의 관대함만을 의지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복음의 진수는 
사랑과 은혜 안에서 자발적으로 율법을 수행해 나가는 
하나님의 자녀 로서의 삶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산상수훈 은 은혜의 율법이고
주님의 두 계명은 십계명의 요약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한다면 
이는 자유주의적인 신앙관이나 세속주의적인 기복신앙
추구하는 사람들의 신앙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모세가 기준이었습니다.
모든 백성은 모세의 수준까지 자라나는 신앙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기준이 되십니다.
아무리 모세의 신앙과 인격이 훌륭하였다 할지라도 
주님에 비하면 한낮 죄인 된 인간에 불과합니다.

율법의 표본이 모세인 반면
은혜의 표본이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들은 모세의 표본을 넘어서 
주님의 표본에 이르러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율법이 하나님의 백성의 조건이 되었지만
신약에서는 율법은 성화 가운데 이미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결의 자리인 성화 속에는 
율법의 요구가 이미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복음과 따로 폐지되어야 할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라 
복음 속에 기본으로 포함된 사랑의 준수사항 으로 지켜지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이 그 속에 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의 준수 요구로부터는 면제받았으나
율법의 정신만은 우리 삶의 지표로 삼아 
자율적으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겨야 합니다.

복음의 축복 속에서의 신앙의 타락은 
율법의 정신을 잃어버린 데서 오게 되는 결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랑이시지만 
언제나 한 손에는 가 들려져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매는 율법에 의해서 징계로 내려집니다.

이를 알려주시고 올바른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성령님 이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과제는 우리를 주님의 닮은 영화의 수준까지 올려놓는데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셨고 
복음은 예수님을 주셨으며
율법과 복음을 합하여 구원의 완성을 이루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구원을 넘어서 성화를 이루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같이 되십시다.





신약의 여선지자 안나 
[ 2:36]



1. 인적 사항


안나는 히브리어의한나 해당되는 헬라어 이름으로 
 
뜻은은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야곱의 여덟 번째 아들인 아셀의 지파의 후손으로 
 
그의 부모는 마누엘로 이름은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고 
 
곳에 붙인브니엘이라는 ( 32:30) 지명에서 나온 이름으로 
 
뜻은하나님의 얼굴 이라는 의미입니다.

예로부터 아셀은 미녀지파로 
 
흔히 왕비나 대제사장의 아내가 배출된 지파인 것으로 보아 
 
안나 또한 믿음과 미모를 겸비한 여인으로 여겨집니다.

당시 유대인 처녀들은 14세를 전후하여 결혼식을 올린 것으로 보아 
 
안나의 나이는 105 정도였을 것이며 (14+7+84=105)\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하는 그녀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언의 은사를 주심으로 
 
예루살렘에서 여선지자로 ( 2:36)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과부로 지내온 84 동안을 오직 성전 뜰에 기숙하면서
 
성전에 필요한 일이 생기면  일에 언제나 솔선수범으로 
 
나서서 일을 했던 일꾼으로 보입니다.

구약 말라기 이후 300 이상 예언의 영이 끊어졌으나
 
하나님의 영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의 구속을 기다리던 모든 자에게 
 
예수님의 초림을 처음 증거하는 여예언자가 되었습니다.


2. 시대적 배경


B.C.1세기 유대가 헬라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독립시대를 지내다가 
 
다시 로마의 식민통치하에 들어간 시기는 혼란에 혼란을 거듭 시기로 
 
당시 이스라엘인들은 종류로 나누어 종교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부류는 바리새인들로서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대하며 로마의 압제로부터의 해방과 
 
장차 열방에 군림하는 나라로 만들어  
 
탁월한 지도자로서의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부류는 사두개인들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현실에 당면한 유익과 이득만을 누리고 살려는 집권층들이 있었는가 하면, 
 
마지막으로 시므온, 안나와 같은 소수의 경건한 사람들은 
 
구약에서 예언한대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여 
 
영생으로 인도할 메시아를 기대하는 사람들로 나눠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정치적, 종교적으로 암울한 상황 속에서 
 
유대인들에게는 자연히 종말론적 메시아 대망 사상이 크게 무르익게 되었으며 
 
구약의 예언의 성취를 간절히 기다리는 분위기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성령님께서는 경건한 사람 시므온과 안나에게 임하셔서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계시하여 주셨으며 
 
시므온이 아기예수님을 보고 찬미와 예언을 한대 이어 
 
안나를 통하여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증언케 하신 것입니다.


3. 안나 선지자의 신앙 생활의 특징


1) 경건한 신앙 생활을 여인이었습니다. [ 2:37]


그녀는
결혼한지 7 후에 과부가 되었는데 
 
이후로 84 동안을 성전 중심의 생활을 하여왔습니다.

그녀의 생활의 특징은 금식과 기도 생활이었는데
 
대부분 특별한 믿음으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하는 생활을 하였으며 
 
기도는 하루에 번을 정규적으로 드렸습니다.

번째는 오전 9, 번째는 12,
 
번째는 오후 3 번을 드렸으며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는 공식 기도시간이었으나
 
해질 황혼 무렵에 한번의 기도 시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같이 주에 금식하며 하루에 번씩 기도 생활한다는 것은 
 
보통 신앙인들로는 없는 특별한 신앙행위이며
 
이는 다니엘과 같이 어려운 포로생활에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섬겨 
 
하루 기도했던 모습에서도 이어지고 있음을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이와 같이 세월 동안을 규칙적인 신앙생활을
 
날마다 있었던 것은 메시아를 대망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동기가 있을 열심히 하나님께 구하게 됩니다.
 
아니면 특별한 은총을 만났을 하나님께 꾸준히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전자는 안나 선지자의 경우요
 
후자는 바벨론 총리가 다니엘의 경우입니다.

오늘날 신자인 우리들에게는 참으로 
 
실천하기 어려운 경건한 신앙 자세가 아닐 없습니다.
 
안나 선지자는 중보기도 용사로서 백성과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를 보내어 주시기를
 
평생을 기도한 여인이었습니다.


2)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한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 2:38]


당시 예루살렘에는 소수의 경건한 무리들이 메시아를 기다리며 
 
함께 기도하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에서도 안나 선지자에게 성령님께서 임하심으로
 
아기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녀에게만 알려주셨을까요?
 
그것은 메시아에 대한 그녀의 간절한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누구나 믿음을 가지고 있고 누구나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항상 중에서도 선택하는 사람이 있으십니다.
 
선택의 동기가 믿음 위에 충성입니다.

믿음은 충성심으로 진위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
101:6] “ 눈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


이로 신앙생활은 믿음과 함께 충성심이 있어야 함을 수가 있습니다.
 
안나 선지자가 초림의 예수님을 평생 기다려 만날 있었다면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재림의 예수님을 평생을 기다려 뵈올 있도록 
 
충성된 신앙생활을 하도록 성령님께서는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안나 선지자가 예수님을 뵙고 몹시 흥분되어 
 
자기의 동료들에게 메시아가 오셨음을 증거할 때와 같이 
 
우리들도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벅찬 기쁨으로 증거할 있는 기회가 
 
나에게도 주어지기를 기다리며
 
신앙생활을 해야 함을 본받게 하여주는 예입니다.


3) 안나 선지자는여호와 이레예비의 하나님을 체험한 신앙의 여인입니다.


요즘과 같이 사회 보장이 되어있지 않았던 옛날에는
 
고아와 과부는 사회에서 가장 불쌍한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더구나 홀로된 여인이 생활할 있는 수단은 거의 전무한 때였으므로 
 
길은 정말 안나 선지자에게는 막막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의식주를 해결하러 세상으로 나가지도 아니하였고
 
자기의 미모나 젊음을 의지하여 살지도 않았고
 
오직 하나님께 나가 의지함으로 성전 중심의 신앙 생활만을 지속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아픈 마음과 의로움을 위로하여 주셨고
 
예언의 은사를 내려주시므로 여선지자로서 추앙을 받게 하셨습니다.

인생에서는 대개 부와 가난, 신앙과 세상, 
 
그리고 거룩과 욕망의 갈림길 번을 통과하여야 함을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과 자신의 의지하는 것으로 선택을 하려 합니다.
 
그러나 안나 선지자는 세상의 것들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84 동안을 예비의 하나님을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안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그녀는 보게 되었고
 
깨달음을 전할 있는 권능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모든 생활이 공급받게 하신 것입니다.

육신의 양식을 구하는 자에게는 
 
끝없이 양식을 구해야만 하는 노동만이 주어지지만 
 
영생의 양식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성과 능력이 주어져서 육신의 양식을 구한 자들로부터 
 
공궤를 받게 함을 안나 선지자를 보고 깨달을 있습니다.

안나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신을 찾는 자에게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심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이 증명된 삶인 것을 있습니다.
 
일개의 과부 여인이 84 동안을 성전 중심의 신앙 생활을 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신앙이 과연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복도 아니요, 건강도 아니요, 성공도 아니고
 
그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하나님께 상달될 때에 
 
나의 생활의 문제는 저절로 풀려질 뿐만 아니라
 
우리도 모르는 하나님의 은사와 능력이 주어져 
 
더욱 진리의 세계를 증거할 있는 영권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심을 
 
안나 여선지자를 통하여 배울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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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7.11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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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7.11 00:52



재창조
[사 65:17] 


하나님은 존재의 근원이시고 모든 의미의 마감이십니다. 
 
그러므로 창조는 존재의 발생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그 안에는 존재의 의미가 담겨져있어 그 의미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반영될 때까지 진행하는 것이 \
 
창조의 목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창조의 주된 의미는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인간의 존재를 
 
얻기 위함임으로 인간을 중심으로한 만물들이 
 
보조로 지어진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영원을 기반으로 창조되어진 만물들은 하나님의 신성을 드러내며 
 
사랑의 아름다운 조화가운데 인간과 더불어 공존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그들의 존재 의미이며 인간에게 
 
하나님의 속성을 더욱 표현하여 줌으로 하나님의 
 
신적인 속성을 개발 할 수 있도록 보조역할을 하는
부가적 목적의미를
 또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지음 받은 인간은 부여되어진 영생의 기간 
 
속에 무한히 진정한 존재의미를 더욱 깊이 깨닫고 
 
하나님의 의도하신 수준까지 자라나야만 하는 
 
의무와 축복이 함께 주어져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1. 창조가 영원히 존속할 수 없게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6일동안 하루하루 새로운 것을 창조하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가 모두 만족하게
 이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마지막날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셨음으로 창조의 총 하이라이트는
 인간 창조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기대를 걸었던 인간은 하나님의 의도와는 반대로
 
 
불순종과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깨뜨리고 말았으며 
 
이로 인한 저주는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이 모두 고통 속에 
 
죽음을 맞이하는 저주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롬 8:22]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맞지 않음으로 
 
죄로 오염된 이 세상은 모두 사라지고 하나님의 또 다른 은혜의
 
구원을 통하여 거룩한 영적 자녀가 된 인간들과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새 창조가 요구 되어집니다.  


2. 재 창조로서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곳일까요?


헬라어에서 새로운 것을 의미한 단어에는 
 
시간적으로 새로운 것을 의미하는 "네오스"와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의미하는 '카이노스'가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 21장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재 창조에 쓰여진 
'
새로운 '이란 말은 '카이노스'라는 단어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재 창조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의 변형이나 갱신이 아니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새 질서의 창조를 의미합니다. 

'카이노스'로 표현된 새 하늘과 새  땅은 죄악과 사망과 
 
고통이 지배하던 현재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구원받은 
 
거룩한 성도들만이 살 수 있는 깨끗한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호크마 요한 계시록 21장 강해)

또한 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성격은 이사야 65:17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1)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곳입니다.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사 65:18]


인간은 죽음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슬플 수 밖에 없고 
 
질병과 배고픔으로 인한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모두는 죄로 인한 저주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이런 것에 대하여는 기억되거나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사 65:17]하십니다. 

그 이유는 내가 완전한 환경에 알맞도록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으니 죽음이 없고 저주가 없으니 배고픔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 땅에서 살면서 누구나 '파라다이스'를 꿈꾸며 삽니다.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은 인간이 그리는 파라다이스와 같은 곳입니다.
 
더욱 나아가서는 성령의 열매로 신령한 성품이 된 성도들과 
 
기쁜 교제를 하는 곳임으로 낙원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2) 마음껏 하고싶은 활동을 하며 지낼 수 있는 곳입니다. [사 65:21-22]


인간의 기쁨은 배불리 먹고 건강한데 있는 것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에 더욱 기쁜 보람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대개 천국에 가면 하루종일 먹고 즐기고 노는 곳이라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천국에서도 우리의 할 일은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일을 우리도 맡아 분담하여야하고 
 
또한 자신이 살고 있는 거처나 주변도 내가 관리하여야만 합니다. 

즉 내가 가장 좋아하는곳 으로 거처를 정하고 숙소를 만들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환경에 천국 양식을 가꿀 수도 있습니다. 
 
백배로 수확되는 천국의 맛있는 열매를 재배해서 먹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서로 나누어가며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지낼 수도 있습니다. 
 
이웃과 어울려 더 좋은 공동 놀이터를 개간할 수도 있습니다. 

천국의 재료들로 지어지는 건물과 도시는 망치와 못으로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능력에 의해서 
 
말과 능력의 손재주만으로 지어질 것입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이겠습니까? 

우리도 하루 일이 끝날 때마다 
 
 "보기에 좋았더라."하면서 지낼 것입니다.  


3) 신령한 교제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v.25)


이 땅에서는 인간과 인간과의 교제만 가능합니다.
 
 
다른 생명체와는 충분한 교제를 할 수가 없습니다. 

더우기 물질의 교제의 한계는 
 
영이신 하나님과의 교제가 실질적으로 불가능한데 있습니다. 
 
그러나 새하늘과 새땅에서는 모두가 신령한 존재가 됩니다. 
 
같은 세계에서 같은 이해와 같은 사귐이 있는 
 
고차원의 존재들로 변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과도 보고, 듣고, 모시고, 대화하고, 기뻐하고
또한 각종 천국의 영물들과도
 대화와 그들의
재미있는 속성을 사귀며 나눌 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실 때는 그들 속에 하나님의 천만가지 아름다운 
 
속성 중 한 가지 씩을 다 넣어주셨기 때문에 서로 좋은 속성들이 나타나면 
 
신기하기도, 기쁘기도 하면서 서로 공유 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동물들을 먹이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며 
 
동물들은 인간을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다같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피조물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화평은 사랑할 때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사랑의 범주와 높이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의 범주까지 
 
이르러 만물을 품에 안을 수 있는 화평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3. 재창조 되어지는 새 하늘과 새땅은 천국과는 다른 곳입니다. 


현재 현존하는 천국은 영혼의 중간기 쉼의 처소로서 
 
하나님께서 재창조하시기 전까지 머무는 장소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백보좌 심판이 시작되면 이 땅도 하늘도 모든 세계도 
 
다 없어지고 오직 우주 공간에 심판대만 놓이게 됩니다. (계20:11)

하나님의 모든 심판이 죽은 자 산자를 막론하고 다 이루어지면 
 
그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어 생기게됩니다. 
 
그동안 죽은 자들은 천국 또는 지옥에 머물러 있었으나 백보죄 심판을 거쳐 
 
죄인은 영벌의 장소로 성도는 새 천지로 옮겨갈 것입니다. 
 
이때 성도들에게 오는 변화가 완전 신령한 영, 횬, 육으로의 부활의 변화입니다.

 우리가 현재 죽어 구원받아 천국에가도 신령한 존재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다만 부족한 것이 있다면 육신의 부활이 함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과,
 
영혼이 죄성으로 인하여, 완전 영화 단계를 이 땅에서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천국엘 가기 때문에 성령님이 완전히 임하실 완전 충만은 
 
다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백보좌 심판시 모든 영혼이 다시 부활의 모습으로 설 때에는 
 
첫째, 부활을 이루며 살았던 천년 왕국의 존재시보다 
 
더욱 완전한 신령한 모습의 존재가 되어 살 것입니다. 

이전까지의 천국의 개념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까지 
 
구원받은 영혼들이 모이는 낙원이며 재림시 사탄을 결박하여 
 
무저갱에 가두고, 주님을 죽도록 충성한 성도들이 
 
다시 주님과 더불어 이 땅에 천년동안 통치하러 
 
내려올 때까지의 머무는 처소란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이에 하나님의 백보좌 심판이 끝나면 마귀와의 싸움도, 대치도 없어지기 때문에 
 
영원히 마귀의 존재가 나타나지 않은 세계, 그 세계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며 
 
죄가 영원히 없어지는 세계가 바로 재창조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4. 재창조의 주역은 예수님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지는 사역입니다. 


태초의 천지창조는 하나님께서 주역이 되어 이루어진 사역이며
 
 
성자와(요1:3)성령은(창 1:2) 이 일에 동참하시어 이루어진 사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재창조는 구원 사역의 연장이자 완성임으로 구속 사역의 주인공이자 
 
집행자이신 예수님께서 주관하시는 사역이 될 것이며 성부 하나님은 
 
심판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시며 성령님께서는 
 
온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사역으로 동참하실 것입니다. 

특히 재 창조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탄과의 
 
영적 전투와 처벌 문제가 선행되어야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하심과 사탄을 영원히 지옥에 가두는 사역을 
 
직접 지휘하시는 분인 예수님의 최종사역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성도들의 각 행위에 따라 상금을 주실 것이요,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통하여 신부된 성도들과 새하늘과 새땅에서의 삶을 
 
함께 영위해 나가시는 신랑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환경도, 사역도, 
 
유업도 함께 관여하실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계획하시고, 

성자 하나님은 실천하시고, 성령 하나님은 모든 것을
새롭게 완성 하시는 일로
함께 동참하실 것입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이 땅에서 우리에게 지상 사역으로
 
구원을 보여 주셨지만 그것은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사명의 일부에 속한
작은 일에 
불과할 뿐이며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회복하신 예수님은 
 
천상 사역의 거대한 프로르렘을 진행하시고 계신 영의 세계의 주인공이십니다.   

성도는 구세주 예수님만을 국한하여 주님을 섬기기보다 우리 사후 세계의 
 
총 주인공으로서의 재창조 주역으로서  주님을 기대하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5. 재 창조에 대한 소망을 갖고 사는 성도들의 자세
 

1)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며 살아야합니다. (벧후 3;11)


우리는 약혼한 처녀와 일반 처녀와는 사고와 행실이 다른 것을 보게됩니다. 
 
그 이유는 약혼한 예비 신부는 신랑을 생각하고 시댁을 생각하고 
 
시댁의 분위기와 수준에 맞추어 살아야 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기쁨은 그녀의 소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모두 예수님의 예비된 신부들입니다.
 
주님의 수준으로, 천국의 분위기로, 새생활을 할 수준에
맞게 지금부터 준비해야만합니다.
 
 
결혼이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듯,
천국도 죽으면 그냥 가서 사는곳이 아닙니다.
 

가야할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의 삶입니다.
 
 
세상을 사랑할 때, 신부의 신분은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그리며 살아야합니다. 

  

2) 예수님의 은혜와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합니다.(벧후3:18)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는 것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는 서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전자는 체험을 주로 여기면서 느껴지는 감정이고, 
 
후지는 주님에 대한 모든 말씀을 읽고 지식적으로 깨달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사랑하는 연인을 만날 때 성숙하게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을 버릴 수 있는 희생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극치는 자신의 포기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자신을 포기하신 분이십니다. 
 
그같은 사랑을 느끼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 십자가를 바라보아야합니다. 
 
6시간을 고통중에 달리시어 돌아가시는 모습을 항상 기억하고 살아야합니다. 

또한 지식은 인간을 성장시킵니다. 인간은 양식으로 
 
성장되는 아니라 지식으로  성장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격체이기 때문에 인격이 모자라는 육신은
 
아무리 커도 어린아이로 취급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의 겉사람은  커도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속사람은 
 
여전히 어린아이라 영적인 구실을 제대로 하지못하고 있음을 봅니다. 

 사람은 관심 있는 것에 대하여 파악을 제일 많이 하게됩니다.
 
현재 우리의 관심은 세상입니다. 따라서 죄악이 성장 할 뿐입니다.   
 
그러나 새 하늘을 바라보는 성도들의 관심은 주님이어야 합니다. 
 
그때 성령의 열매와 은사로 신령하게 자라나게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을 구세주로, 주인으로, 
 
세례주로, 신랑으로, 심판주로, 사역의 주관자로, 재림주로, 인도자로, 
 
처소 예비자로, 영적 전투의 대장으로, 영생을 주시는 분이요, 
 
상주시는 분으로, 스승이요, 재장조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부적으로 깨닫고 주님과 함께 동참하며 살 때, 
 
재창조에 대한 성도들의 바른 신앙적인 삶이 될 것입니다. 
 
다같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으로 바른 신앙관을 정립하고 
 
사는성도들이 다같이 되십시다.  











 




용단의 여인 리브가 / Rabecca 
[
창24:58]


1. 인적사항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의 아들 브두엘의 딸로서 
 
이삭과는 오촌간이며 그의 아내가 된 여인입니다. 
 
그녀의 이름의 뜻은'고리'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언약의 
 
혈통을 잇는 역할을 한 인생을 살았으며 이삭과의 사이에서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을 낳은 어미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메소포타미아 출신으로서 오빠 라반의 두 딸인 
 
레아와 라헬을 아들 야곱의 아내로 맞아 들임으로 고모이자 
 
시어머니가 된 여인입니다. 

20살 전후의 아름다운 미모를 갖춘 순결한 그녀는 그 당시 
 
40세인 이삭과 결혼함에 주저없이 승낙한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2. 리브가의 생애


아브라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갈대아우르를 떠날즈음 
 
아버지 데라는 두 아들중 나홀만 데리고 함께 아브라함과 같이 떠났는데 
 
이는 큰 아들인 하란이 일찍 죽어 그의 아들 롯을 자녀가 없는 아브라함이 
 
길렀기 때문으로 데라와 나홀 가족은 메소포타미아지역 \
 
하란에 머므르게 되었습니다. 

그후 데라가 죽자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떠난 후 
 
나홀은 형 하란의 딸이자 자신의 아내가 된 밀가 사이에서 브두엘을 낳아 
 
하란에서 살다 죽었으며 브드엘은 라반과 리브가를 낳고
 
메소포타미아 땅에서 정착하여 부유한 기반을 갖춘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B.C. 2046년경에 태어난 리브가는 가사를 열심히 돌보고 
 
쾌활하고 적극적인 성품을 지닌 여인으로 성장하였으며 
 
아브리함이 보낸 종 엘리에셀(창 15:2)울 통한 이삭의 청혼 소식을 듣고 
 
믿음으로 그를 따라 가난안 땅으로 떠났습니다. 

이삭과 만나 결혼 후 (B.C. 2026)20년동안 자녀없이 지내왔으나 
 
꾸준히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40세가 되어 하나님의 응답으로 
 
쌍동이 아들인 에서와 야곱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 첫 흉년은 
 
아브라함시절(B.C.2090년경)이었으며 
 
아브라함이 사라를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가 
 
흉년은 면하였으나 사라를 누이동생이라 부르게하여 
 
바로왕에게 아내를 빼앗겼던 수모를 겪은 사건과 비슷하게 
 
이삭에게도 대 흉년이 찾아와(B.C.1990년경)할 수없이
 
리브가도 남편따라 팔레스틴땅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애굽으로 내려가지말고 블레셋 그랄 땅에 
 
머므르도록 지시하심을 받고 이삭과 리브가는
블레셋왕 아비멜렉에게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예쁜 자기 아내 때문에 이방 땅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이삭은 아내 리브가를 누이동생으로 주변에
소개하였으며 
리브가 또한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고 지내었습니다. 

이삭이 어느날 리브가를 껴앉은 것을 본 아비멜렉왕은 
 
리브가가 이삭의 아내인 것을 보고 이삭을 질책한 후 
 
자신이 리브가를 범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이는 자신의 선왕시대에 있었던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랄 땅에 머므른 시절에 
 
여전히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동생이라 소개함으로 그랄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하였다가 여호와께로부터 저주를 받아
그의 가족이 자녀생산을 못했던 과거가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고사를 알고 있었던 아비멜렉왕은 그녀를 이삭에게 돌려보내었으며 
 
리브가는 남편의 말에 끝까지 순종한 착한 여인이었습니다. 
 
 
그 후 에서와 야곱이 성장하면서 에서가 40세에 헷족속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자 근심이 된 리브가는 아들 이삭을 
 
위해 배우자를 얻도록 하란으로 보내기를 이삭에게 종용한 후,
 
단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빼앗고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채어 형에서의 분노를 사고있는 야곱을 하란으로 피신 시켰습니다. 

허나 결국 리브가는 야곱을 31년간이나 보지 못하고 떨어져 살다가 
 
야곱의 나이 108세가 되어 이삭에게로 돌아왔을시 그녀는 이미 죽어 
 
가족 묘인 막벨라굴에 안장이 되었습니다. 

그녀가 죽은 후 이삭은 야곱과 12년간을 더 살다가
180세의 나이로 죽었으며
 그역시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습니다. 
 
 
리브가는 이삭의 정실 부인으로 또한 이삭은 리브가의 오직 남편으로 
 
두 사람의 급실은 아주 좋았으며 평생 둘만의 부부가 되어 사랑을 나누고 산, 
 
그리고 리브가는 남편에게 아주 사랑을 독차지한 여인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3. 리브가의 믿음 생활의 특징


1] 천한 일도 즐겨서하는 봉사정신이 특출한 여인이었습니다.(창 24:47)


[창24:16] "그 소녀를 보기에 심히 아름답고 …"


그녀의 미모는 뛰어날만큼 예뻤습니다. 
 
대부분 인물이 예쁜 여인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유지하기위하여 
 
집안일을 하지 않을 뿐더러 더우기 우물가에 물을 길어 오는 일은 하인이나 할 것이지 
 
주인 아가씨가 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리브가 에게는 자신의 유모와 집안에 
 
일꾼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물길어오는 일을 즐겨하였습니다. 

더우기 우물가에서 만난 낯선 사람의 짐승 낙타에게까지 물을 먹인 
 
선행은 관대한 마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본래 낙타란 짐승은 한번 물을 먹기 시작하면 엄청난 양의 물을 먹고 
 
저장하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 소비와 고생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댓가 없는 선행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마음임으로 일찌기 
 
집안에서부터 베풀어온 행위가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 
이삭의 아내감으로 선택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리브가로부터 실천하는 신앙생활을  본받아야할 점이 있습니다. 
 
외모의 아름다움은 마음의 아름다움으로부터 선행의 행동으로 나타날 때, 
 
고귀한 아름다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위적인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하기보다 
 
마음이 아름다움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신앙으로 
 
단장하는 여인들이 되어야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즉시 순종하는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창 24:61)


[창24:58] "내가 가겠나이다."


아브라함의 종의 설명을 다 들은 가족들은 이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임을 알고 청혼을 승락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종이 당장 떠나야한다는 단호한 요청에 
 
가족들은 결혼 당사자에게 모두 물어 보기를 원했습니다.

한 번 떠나면 다시는 보기 어려운 부모와 가족들과 마음껏 
 
석별의 정을 나누고 싶은 것이 시집가는 딸들의 공통적인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당장 떠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가족들과 정이 없어서였을까요?  

미래의 남편이 그리워서 서둘러 떠나려고 하였을까요? 아닙니다. 
 
그녀는 아브라함의 종 아비멜렉으로 부터의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것을 믿음으로 깨닫고
 
아브라함의 가정의 훌륭한 신앙과 경건의 또 다른 믿음의 분위기를 느꼈던 것입니다. 

 
신앙이 별로 없는 분위기의 자기 백성들과 아버지의 집을 빨리 떠나 
 
참다운 믿음의 분위기로 속히 가기를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믿음에는 결단력이 따르나 , 현실에는 주저함이 따르게됩니다. 
 
믿음은 항상 현실보다 말씀을 더욱 따르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용기와 결단력이 있게됩니다. 

미련은 믿음을 미루게 만들고, 지연은 환경에 더욱 집착하게 만들어줍니다. 
 
환경을 보는 육신의 눈보다, 미래를 보는 영안의 눈을 뜨고 
 
사는 것이 믿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함을 그녀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3] 참된 믿음으로 인내를 하여 응답을 받은 여인입니다.(창 25:21)


리브가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이삭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런데도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녀를 잉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부사이에 자녀가 없으면 몹시 애가타는 쪽은 여자쪽입니다. 

혹시 내 몸에 이상이 있어서 애를 못 낳는 것인지 아니면 
 
남편에에게 문제가 있는 것인지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옛날에는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이 그져 기다려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이삭은 늘 하나님께 기도하였다고합니다.

그런데 그 기간이 장장 20년이나 되었습니다. 
 
사라는 자녀를 10년이나 기다리다 포기하고 
 
남편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시녀 하갈을 취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그 세월의 두배를 묵묵히 기다립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다릴 줄 아는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배우게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부부의 기도를 들으시고 20년만에
 
 
그들로 자녀를 잉태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잉태하면서도 문제가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뱃속에 이는 태아들이 서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오죽 싸움이 심했으면 리브가가 하나님께 여쭈었겠습니까?

이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큰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태아의 속성까지도 다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한 부모밑에 여러 자녀가 있어도 제각기 성격, 능력, 취미든 모두가 다릅니다.
 
 
이는 태어날 때, 부모의 성격중 에서 한부분만을 이어받기 때문입니다.  
이를 볼 때, 에서 는
 아버지의 여러 성격중 남성다운 활달한 성격을
이어 받았기 때문에
 사냥을 하러 돌아다니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이삭도 그의 이러한 성품을 좋아했습니다. (창 25:28)

그러나 야곱은 이삭의 또 다른 성품 즉, 
 
조용함과 어머니의 믿음의 소중한 성품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복중에서도 이삭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를 리브가는 깊이 새겨듣고 믿음쪽의 아들 야곱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됩니다. 

 

4]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위기를 감수하는 행동을 시행하는 여인입니다. (창 27:8-13)


 이삭의 나이 137세가 되었을 때, 이미 장님이 된 이삭은 자신의 
 
이복형 이스마엘이 137세로 죽은 것을 기억하고
자신도 죽을 날이 다가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장자 에서에게 모든 축복과 유업을 물려주려고
 
 
축복 기도를 받을 준비를 해 가지고 오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때 공교롭게도 이사실을 리브가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을 불러 형처럼 대신하여 아버지께 들어가
축복기도를 
받게하였습니다.

이와갘은 리브가의 행동은 하나님의 말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하신 말씀을
어떻게 해서든지
 실현 시키고자 모든 위험과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감행한 믿음의 용단이었습니다.
 

이같은 거짓말을 통하여 장자권을 야곱에게 이어 주려한 리브가는 
 
큰 실수를 한 것이지만 이보다 이 실수를 유발시킨 것은 바로 이삭이었습니다. 

이삭도 죽을 날이 43년이나 넘게 남았으며 장자권은 
 
야곱에게 돌아갈 것을 리브가에게 들어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앞당겨 에서에게 모든 것을 주려고 서두른데 있습니다. 

이를 볼 때 리브가의 행동은 어쩔 수 없이 행한 것으로 보아야합니다. 
 
결국 야곱으로 축복기도를 받도록 거짓 계교를 꾸민 리브가는 자신이 

말한 "내 아들아 저주는 내게로 돌리라."(창 27:13)한 말에 따라 
 
야곱의 나이 77세때에 자기의 친정 하란으로 아들을 보낸 후 
 
다시는 만나보지도 못하고 죽게되었습니다.

그녀가 죽을 때에 야곱을 한번이라도 보고 싶었겠지만 
 
자신의 믿음의 행동으로 야곱이 가문의 장자권을 갖게 된 것에 
 
기쁨을 가지고 죽었을 것입니다.  

리브가는 인생을 용단으로 시작하여 용단으로 마감을 한 여인입니다. 
 
우리는 그녀에게서 믿음에는 용단이 필요함을 다시 한번 배우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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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자 / Remnant
[9:27-28]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대상은 모든 인간들이지만
그 구원 사역의 전개는 스스로 선택하신
소수의 무리들을 통하여 이루어 나가십니다.

이를 '남은 자 사상'이라고 말하며 첫번 째 이 사건이 드러난 경우는
인류를 홍수로 멸하실 때, 남겨 놓으신 노아와 그의 가족들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이어서 백성들이 다시 이 땅에 번성하자, 아브라함을 택하시어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지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구원 사역이 본격적인 전개에 이르러 선택의 범위를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국한 시키지 아니 하시고
신약시대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한
영적 이스라엘 백성으로 확대하셨습니다.

결국 남은 자들이란 구원 사역의 끈을 이어가는
시대의 고리들로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완성시키며
하늘 나라에 가서는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기업을 유업으로 얻을 자들을 의미합니다. [계 21:7]


1. '남은 자 사상'이란 무엇인가?
 

남은 자를 통한 구원사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창 7:23] "모든 호흡하는 생물들은 다 홍수로 죽고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하신 말씀으로 시작되었으나
구체적으로 사상으로 드러나게 된 것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스알야숩"이라고
부르게 한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사 7:3, 8:18]

왜냐하면 그 이름의 뜻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남은 자란 단어의 구체적인 뜻은 무엇일까요?
 


[1] 남은 자란 어떠한 심판에도 구원 받고 남아 있는 축복된 무리를 가르키는 말입니다. 


(1)'솨알': 총 276회나 쓰여졌으며 이 단어의 기본 의미는 '남겨있다"란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멸망 받지 않고 남겨져 보존 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2)'팔랏': 총 80회 사용되었고 그 기본의 의미는 '구출하다"란 뜻이며
'남은 자란 극도의 심판의 혼란에서 꺼내져 구출받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3)'말랏': 총 89회 쓰여졌으며 그 기본 의미는
'도피하다, 안전을 구하다"
  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한 집단 전체가 멸망되는, 인간의 힘으로는 살아날 수 없는 위기에서
안전하게 도피하여 생명을 건지게된 사람들'
을 의미 합니다.
 

(4) '야탈': 총 110여회 사용되었습니다.
그 기본 의미는 '님기다, 잔류하다" 란 뜻으로 '멸망의 위기에서
생존한 자들에게는 주어진 약속의 축복가운데
머므르는 사람들'
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말들을 종합적으로 요약해 보면
"어떠한 위기와 심판에서도 멸망 받지 않고 구출받아
남아있는 축복된 무리
'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랜드 주석 이사야 10장 연구자료 참조)


[2] 남은 자란 주의 말씀을 이 땅에서 이루고 마치는 일을 할 사람들을 말합니다. 

 

[롬 9:27-28]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게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같을 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서 '필하다'란 헬라어 '순텔레오'란 단어로
'완성하다'성취하다'라는 의미이고
'끝내시리라'란 단어는 '순템노'인데 그 뜻은
'단축하다, 잘라내다'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계획하신 것은 신속히 성취하신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일에 택함 받은 사람들이 시대별로 '남은 자'들입니다.


1) 남은 자들은 씨의 역할을 합니다. 


이사야는 남은 자들을 '거룩한 씨'라고 표현을 하였습니다. [사6:13]
 
씨란 미래의 추수를 위하여 뿌려지는 씨앗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로 씨를 뿌리실 때,
씨는 많은 열매를 맺어야 그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 의해서 증명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심은 씨앗인 그의 자녀 이삭은 430년이 지난 후,
200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오늘날 남은 자인 우리들도 믿음의 아브라함이 되어
나의 씨로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 200만이 넘는 역할을
감당하는 일꾼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이는 이삭을 드렸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는 사람들만이 맺을 수 있는 추수입니다.
 


2) 남은 자들을 예수님을 증거하는 역할울 합니다. 


[께 12: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게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구약에서 남은 자의 특징을 믿음을 지닌 자로 표현한다면,
신약에서는 주님을 증거하는 자가 남은 자의 특징이 됩니다.
 
 
요즈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원과 축복 받는 일에
주로 목적을 두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주님의 명령이자
사명을 잊어버린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분은 예수님 증거와 제자 삼는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의 초청과, 택함 받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교회에 참석한 것은 청함받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는 반면,
천국가는 것은 택함 받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마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하신 말씀도 '남은 자'의 특징을 나타내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증거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자신의 유익을 위한 도움만을
도구로 사용하려는 신앙이 되어 택함 받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의 특징은 영적 전투를 한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자신만의 안일을 위주로 하는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미 자신의 유혹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는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여러 방면으로 공격을 해 옵니다.
특히 환경을 어렵게 만듭니다.

오늘날 남은 자의 자세는 환경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자세를 지녀야합니다.
성령님이 마음에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2. 누가 남은 자로 선택될까요?
 

[1] 우상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자가 남은 자로 선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왕상 19: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명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 한 자니라."
 

 

그 당시 아합왕과 이세벨은 '바알'을 우상으로 섬겼음으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면 고통을 당할 뿐만 아니라,
여호와를 섬기는 선지자들을 모두 잡아 죽였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생명의 위협을 무릎쓰고
여호와를 섬겼다는 것은 충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지켜 나가야할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하나님을 위하여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 중에 가장 버리기 어려운 것이 자신의 생명입니다.

그러나 참 믿음이 들어있는 사람들에게는 육신의 생명은
어차피 버려져야하는 생명이고 영혼의 영생이 참 생명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육신의 생명이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포기의 계기가 되면
기쁜 마음으로 바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람들의 특징이며
오늘날은 주님의 부활의 영이신 성령님이 오셔서
성령세례 체험을 한 사람들의 특징으로 나타남을 볼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자가 남은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롬 11:5] "그런즉 이와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똑같이 사랑하셨기 때문에 출애굽을 시키셨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백성을 삼으려 하셨습니다.
그런데 택함을 받아 들어간 사람은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습니다.
이는 은혜받은 것에서 택함을 받는 사이에는 반드시 은혜 받은 것에
대한 증거가 있어야함을 의미합니다.

즉 받은 은혜를 육신적으로만 만족 할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깨달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감사하고
따르는 행위가 있어야함을 말합니다.

대부분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의 삶의 축복 여부에만 국한 시키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게하는데 있습니다.
사람은, 믿으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면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기적과 이사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기 보다는 자신을 더욱 사랑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모세는 하나님을 자신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40년 광야 생활을 믿음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은혜를 받고 느낄 때 마다 항상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믿음보다 더 커야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사랑의 부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은 삶이 하나님 선택의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남은 자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오늘날에는 세상에 사랑 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자신, 돈, 권력, 자녀, 컴퓨터…등을 들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앞선 것은 선택의 조건에서
제외된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야합니다.
 

한국 성도들은 이 시대에 남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점점 이스라엘 백성이 걸어갔던 길을
가고 있음을 봅니다. 주변에 우상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버리실 수 있습니다.

천국의 본분을 잃어버리고 세상에 안주하려는
기복 신앙을 떨쳐버리고 한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
주님을 증거하는 참된 남은 자들이 다같이 되십시다.
 








겐그리아의 일꾼
/ 뵈뵈(Phoebe}

[롬 16:1]


1. 인적사항


'포이베'라는 '뵈뵈'의 이름은 이방여신 '아르테미스'의 이름인데
그 뜻은 '밝게 빛나다' 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방인으로 기독교로 개종했으나,
이름을 바꾸지 아니한 것은 그 지방에서 재력으로 부유하고
시회적 지위가 높은데다가 상업상 여러 지역에
그 이름으로 관계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녀는 사도바울이 제 2차 전도 여행시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와 더불어
고린도에 교회를 세우고 전도하였을 당시 고린도에서 남 동쪽으로
약 11Km 떨어진 겐그리아 도시에도 복음이 들어가 세워진
'겐그리아 교회'의 여집사로 봉사하였습니다.

과부로서 많은 재산을 소유한 그녀는 사도바울 사역에 조력및
물질적인 지원을 많이 한 여인이었으며 특히 바울의 부탁을 받고
로마서 서신을 로마 교인들에게 전달한 여인입니다.


2. 시대적 현황


A.D. 1세기 중반경에는 사도바울의 제 2차 , 제 3차 선교여행으로 인하여
복음이 아시아 및 유럽 지역으로 확장 되던 시기였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고린도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던 바울은
당시 고린도에 복음 사역이 어찌나 힘들었던지 회당의 유대인들은
그를 훼방하며 대적하고 이방인들의 우상숭배와 타락은
심하기가 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에 밤에 주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행 18:9-10] "두려워 하지 말고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니라."

이에 바울은 디도 유스도의 집에서 1년 6개월 동안 말씀을 강론했습니다.
이 때에 바울은 사역의 정진을 위하여 주님께 나실인의 서원을 하였습니다.
나실인의 서원은 평생 나실인과, 일정 기간만 나실인으로 서원하는 두 종류가 있는데
바울은 1년 6개월 동안을 나실인으로서의 서원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나실인의 세가지 금지 사항은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고,
시체에 근접하기 말며. 머리카락을 자르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이같이 고린도에 머물러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동안
주변도시에도 복음이 들어가 여러 교회들이 세워졌으며
 그 중에 한 곳이 바로 겐그리아 교회입니다.

시도바울은 고린도에서의 전도를 마지막으로
수리아 안디옥으로 귀환 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항구도시 겐그리아로 내려가 배를 타고
에베소를 경유하여 가이사랴에 상륙,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가려 하였습니다.

겐그리아에 들린 바울은 자신의 서원의 기한이 끝났음으로
 머리를 그곳에서 잘랐습니다[행 18;18]. 이때에
교회의 일꾼으로 봉사하고 있었던
뵈뵈 집사의 도움을 많이 받게 되었습니다.

일찌기 겐그리아 교회의 일꾼이된 뵈뵈 집사는
이후에도 A.D. 50-58 경까지 바울의 선교에
물질적인 지원과 조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A.D. 57년 경에는 바울이 서신을 로마에 전하는
귀중한 사명을 받고 그것을 로마 교인들에게 전달한
사명을 감당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뵈뵈 여집사의 역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땅 곳곳마다
하나님의 일군들을 예비하여 놓으셨으며
또한 남녀 모두 각자가 할 임무도 부여하여 주셨음을 봅니다.

그들은 내적으로는 교회의 유지를 책임지는 일군들이며
외적으로는 이방인을 향한 복음사명을 감당하는 사역자들 이었음을 봅니다.


3. 뵈뵈 집사의 신앙특징


1) 교회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일군이었습니다. [롬 16:1]

사도바울이 그녀를 일군이라 칭한 것은
이 일군 이라는 호칭이 제 2세기에 접어들어 집사로 불리워 졌음으로
그녀의 일이 집사의 일을 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여집사는 대체로 과부중에서 피택을 하였고
그들의 임무는 병든자와 가난한 자를 돌보며 ,
순교자와 옥에 갇힌 자에게 지원하고 봉사하며, 교리를 가르치고,
여신도들의 세례식 때, 수종드는 일들을 하였습니다.

교회를 하나님의 가정으로 볼 때, 성도들을 다스리고
말씀으로 양육하고 교회를 운영하는 일들은
주로 장로들에게 주어진 일이지만,

성도들을 가족처럼 돌보아주고, 먹이고, 위로와 권면하고,
사랑으로 따뜻하게 대하여 주는 것은 여성도에게
주어진 일로 볼 수 있습니다.

집안에 어머니가 없을 때, 사랑의 손길과 평안함을 느낄 수 없듯이,
교회에서 여성도들의 봉사가 없으면 관계나 분위기가 메말라 버리고 맙니다.
뵈뵈 집사는 교회 내에서 마치 어머니 같은 역할을 한 일군 이었음을 봅니다.

이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나타나는 주님을 위한 헌신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은 교회 헌신으로 나타남을 봅니다.


2) 로마까지 사도바울의 편지를 전달하는 사명감이 있는 일군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오래전부터 로마 교회를 방문하려는 마음이 간절하던 차에
이제 3차 선교여행을 마쳤믐으로 이를 실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교회를 방문하기전에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여 준비한
구제 헌금을 전달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연을 본 서신에 기록하여
겐그레아교회의 참 믿음의 조력자인 뵈뵈 편에
자신의 서신을 로마교회에 전달하게되었습니다.

실상 여인의 혼자 몸으로 처음으로 가는 낯선 도시에
중대한 서신을 지니고 장거리를 여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믿음의 위인들은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주님의 돕는 손길이 있음을 믿고 실천을 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뵈뵈 집사의 삶은 사업, 소유, 편안, 행복 이상의 삶을 살려고 노력 하였음을 봅니다.
이는 그녀가 자신의 삶을 이미 주님께 위탁드리고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사명을 수행함으로서 주어지는 댓가는 수고, 베품, 위기, 피곤, 고생…등입니다.
이는 주님을 위한 마음일 때만 감수할 수 있지, 자신을 위한 삶일 때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명감을 가지기가 어려움을 볼수 있습니다.

더우기 있는 자, 부족함이 전혀 없는자가 이와같은 일을 한다는 것은
가치를 천국에 두고 살지 않는 한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3) 여러사람의 보호자로 칭함을 받을 만큼 선행을 베푼 일군이었습니다. [롬 16:2]


보호자란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은신처와 양식을 제공해주고,
법의 혜택이나 제도 아래 있지 못한 이방인들이나
나그네들에게 가디언이 되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미 그녀는 이같은 일을 겐그레아 지역의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풀어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사도바울이 그 지역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사도바울과 동역자들 일행을 자기 처소로 모시고
따뜻한 정성으로 대접을 하여 준 것은 물론
사도바울이 지친 마음을 쉬게 하여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녀를 표햔하기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는 말의 의미는
사역의 모든 뒷치닥거리를 도맡아서 해주는 역할과
그 이후에도 지속적인 물질적 지원을 하여 주었음을 의미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을 해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표현하며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신앙의 동기나 목적이 사랑과 축복을 받기 위한
 인본주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의 시각으로는 남을 나와 같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모시고 사는 신앙인은 남을
주님의 시각으로 볼 수 있도록 성령님이 감동시켜 주십니다.

이같은 삶은 이 땅에 얼마나 많은 것을 남겨놓고 천국에 기느냐보다,
천국에 가지고 갈 것을 얼마만큼 이 땅에서 준비하고 사느냐에
인생의 목적을 정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성령님의 감동하심입니다. \

그러므로 베푸는 삶을 옳게 보여주고 산 뵈뵈 집사의 삶을
우리도 본받을 수 있는 성도들이 다같이 되십시다.             




  1. 삭개오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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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08 14:30



   
“사도 바울의 4차 선교여행”
[롬 15:23]


사도바울의 일생을 요약해 보면
A.D. 1년에 출생하여 6세부터 율법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10세가 되자 예루살렘으로 상경하여 당대의 최고의 랍비였던
가말리엘의 제자로 학문과 율법을 공부하였습니다.

공부를 끝낸 후 그는 다시 고향 '다소'로 돌아가 있었으므로
주님의 공생에 기간 동안에는 (A.D. 27-29) 주님을 대하지 못하였다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신흥 그리스도교의 부흥이 일어나자
이단으로 정죄하고 박해에 선두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가 다메섹 선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회심한 때는 A.D. 34년경이며
아라비아에서 3년간의 수양을 끝낸 후 '다소'로 은퇴하여
7년 동안 준비하는 가운데 바나바의 인도로
'안디옥' 교회로 가서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A.D.44)

그 후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선교사역으로
다음과 같이 네 차례에 걸친 선교여행을 감행했습니다.

[제 1차 선교여행]
바나바와 함께 구브로 섬과 소아시아 지역을 1차 순방하였습니다. (A.D. 47-40)

[제 2차 선교여행]
실라와 함께 아시아와 유럽을 전도하였습니다. (A.D. 49-52)

[제 3차 선교여행]
아시아와 에베소를 중심으로 유럽까지 확대된 사역을 하였습니다. (A.D. 53-57)

그 후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A.D. 58)
가이사랴에 투옥되어 2년간 연금생활을 하였고 (A.D.59-60)
그 후 로마로 후송되어 1차 투옥생활을 하다 (A.D. 60-63) 다시 석방되었습니다.

[제 4차 선교여행]
서바나를 거쳐 그레데, 밀레로에서 아가야로 사역하다 (A.D.63-66)
니고볼리에서 다시 체포되어 로마로 후송된 후 순교하였습니다. (A.D.67)


1. 제 4차 선교여행에 대한 근거


사도행전은 사도바울이 A.D.61년 로마 감옥에 투옥된 후,
2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면서 복음 사역을 한 것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행 28:30-31)

그러나 딤후 및 목회서신서를 보면 바울은 1차 감금 후 풀려나서
한 차례 더 광범위한 순회선교사역을 행한 후
다시 투옥된 사실이 제시되어있습니다.

또한 [롬 15:23]에 서바나로 가기를 간절히 사모한 것으로 보아
4차 선교사역은 서바나를 시점으로 하여 시작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세 가지의 예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1] A.D.96년경 로마의 클레멘트의 기록에 나와있습니다.

“그는 동방과 서방에 복음을 전하며
전 세계에 의를 가르치며 서방 경계에 이르렀다.
통치자들에게 증언한 후 그의 믿음에 당연한 명성을 얻었다.
이와 같이 그는 세상을 떠난 것이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여기서 ‘서방경계’란 로마라는 설이 있으나
클레멘트 자신이 로마시민으로 로마에서 편지를 쓰면서
그곳을 서방경계라 일컫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는 '서바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2] A.D.170년경 무라토리 정경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누가는 데오빌로 각하를 위해 이루어진 일들에 관하여
그의 앞에서 상세히 편집하였다.
그것은 두 가지 사건 즉, 베드로의 죽음과
바울이 로마를 떠나 서바나로 향한 일을 같이 생략하면서
상세히 보인 바와 같다.” (Muratorian Canon)


3] 역사가 '유세비어스'의 (A.D.263-340) 증언에 이런 기록이 있음을 봅니다.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고 선교의 여행에 다시 오른 후
이 성에(로마) 두 번째 들어가 거기서 그의 생애를 순교로 끝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 옥중생활 중에 그는 디모데후서를 기록하고
그의 처음 변호한 일과 임박한 그의 죽음에 언급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일단 석방되어
먼저 숙원의 처소인 서방 서바나에 가서 전도하고
다시 동방으로 가 전도하면서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를 기록하고
재차 체포되어 로마에 투옥되어 디모데후서를 기록한 후
순교하였음을 봅니다. (이 상근 목회서신 총론)


2. 제 4차 선교여행의 경로


2년 동안 로마 감옥에서 전도하였던 많은 군인들과 가족들은
바울에게 호의적이었으며 그에게 좋은 정보들을 전하여 주었을 것입니다.
그 중 한 가지가 바울의 석방에 대한 정보였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에 편지를 디모데를 통하여 보내려 했을 때
자신의 일이 곧 잘 풀릴 것 같아서 디모데는 곁에 남겨놓고 대신
에바브로 디도를 보낸다는 서신을 띄었습니다. (빌 2:23-24)

곧 석방된 바울은 디모데와 디도를 동행하고
숙원의 땅인 서바나로 가서 사역을 하였는데
전설에 의하면 그 곳에 2년간 머무르면서 사역하였다고 합니다.

서방전도를 마친 바울은 다시 동방전도를 돌아볼 의향으로
디도와 더불어 그레데를 방문하였습니다.
당시 그레데의 현황은 교회가 상당히 혼란스럽고
교회내의 질서와 바른 신앙관이 결여되어있었으므로 디도를
그 곳에 남겨 장로를 세우고 바른 신앙관과 윤리를 세우도록 하였습니다 (디1:5).

이어서 그는 밀레도를 방문하여 그 곳에 병든 “드로비모”를 남겨두었습니다.
드로비모는 에베소 출신의 바울의 충실한 동역자였으며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울 때 에베소 교인들의 헌금을
예루살렘까지 운반한 자입니다. (행 21:29)

그런데 그가 건강이 좋지 않아 병든 몸이 되자
밀레도에서 요양하며 간간히 사역을 돌보게 하였습니다.

그 후, 골로새와 에베소를 방문하여 '디모데'
그 곳에 남겨두어 그 지방의 전도를 맡게 했습니다. (딤전 1:3)
또한 드로아를 지나면서 그 곳 “가보의 집”에 외투를 남겨두고, (딤후 4:3)
마게도냐를 방문하여 고린도에 “에라스도”를 남겨두었습니다. (딤후 4:20)

참고적으로, 에라스도는 고린도 출신으로 디모데와 한 팀으로
바울의 전도사역에 일익을 담당했던 일꾼입니다. (행 19:22)

그 후 자신은 과동할 예정으로 “니고볼리”로 향하였습니다. (딛 3:12)
그리고 그 곳에서 바울은 로마 관원에게 재차 체포되어 로마로 호송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디모데 전서는 에베소를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
마게도냐 지방에서 디모데전서를 써 보냈으며
'디도서'는 아가야 어느 지방에서 니고볼리로 향할 무렵에 쓴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디모데후서'는 로마 옥에 두 번째로 투옥된 후 기록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과정은 서바나에서 2년과 서방 전도 1년을 합하여
3년간의 사역이 4차 선교여행의 기간으로 보이며 (A.D.63-66)
감옥 투옥 후에 모든 사역을 마치고 순교하였습니다.(A.D.67)

그가 형장을 향하여 걸어갈 때 마치 고향에 가는 사람처럼
환한 얼굴에 기쁜 모습을 하고 갔다고 합니다.
그에게는 천국이 영원한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3. 제 4차 선교 사역의 바울 신앙의 특징


제 4차 선교사역을 마무리 하면서 그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분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하여 권면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은 군사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딤전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딤후 2:3-5]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사도바울은 복음전도를 영적 싸움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수 없이 받은 박해에 근거한 것입니다.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는 반드시 마귀가 점령하고 있는 지역이라서
많은 대적과 해가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먼저 영적 전투에 참여하는
예수님의 모집된 군사로서의 자신의 신분을 확립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면 군사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1] 명령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전투는 항상 상부 전략의 지시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병사는 전쟁터의 상황이나 임무를 알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영적 전투에 대한 상황을 일일이 모릅니다.
다만 명령에 따라 움직일 뿐입니다.

[2] 군사는 충성으로 그 나라를 위하여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이미 영적 전쟁은 주님께서 2천년 전에 모두 싸워 이기셨습니다.
나머지 지역 전투만 우리에게 남겨져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마귀의 세력을 물리치는 사명의 충성은
장차 하늘나라에서의 상급과 훈장으로 보상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면류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인은 후사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디도서 3:7] “무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구원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신분은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1]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

이는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주어지는 신분입니다. (요 1:12)
자녀란 부모 밑에서 주어지는 은혜와 혜택을 입고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구원의 일반 은혜를 받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2] 하나님 아들의 신분

이는 자녀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위하여, 말씀을 지키고 살 때 주어지는 신분입니다.
즉, 원수를 사랑하기까지 자비할 때 아들의 자격이 주어진다고 하였고 (눅 6:35)
온전할 때 아들의 자격이 주어지며 (마 5:48) '화평케 하는 자가 될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습니다. (마 5:9)

자녀는 혈연관계에 의해 성립됩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일을 할 때 주어지게 됩니다.
즉, 하늘에 속한 일을 동역으로 이 땅에서 하고 있을 때
아들의 인정과 대우도 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마지막 단계가 하나 더 있습니다.

[3] 후사의 단계

후사가 되려면 한 가지 더 특별한 조건이 부여됩니다.
바로 “고난”입니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후사는 영광의 존재입니다.
상급인 면류관과 유업인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 받게 되는 상속자입니다.
바울의 신앙관은 후사의 신앙관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세상에서도 일등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에서도 역시 일등인 신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것이 그를 사역에 고난과 위기를 극복하게 만들어 준 동기가 되었습니다.


3) 그리스도인은 승리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딤후 2:7-8]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무든 자에게니라.”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질”'군사의 자질'이지만
“그리스도인의 기질” '경기자의 승부기질을 가져야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 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우리 모두가 다 같은 그리스도인일지라도 구원의 만족도는 다 다릅니다.
세상 일에 연연할수록 천국에서의 삶에는 가치를 적게 두게 됩니다.
그러나 영생에 가치를 두고 사는 사람은
천국에서의 삶의 수준이, 이 곳에서 미리 정해진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맞는 삶을 살려고 노력합니다.

사도바울은 셋째 하늘을 다녀온 후부터는
이 세상에서의 삶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오직 천국을 목적으로 한 삶 만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이 천국을 경험하지 못하였기에
천국 생활에 대한 신비감이 덜합니다.
그럴지라도 사도바울의 간증을 통해 간접경험으로 받아들여
이 땅에서 나의 천국 신분과 지위를 준비하는 삶을 사는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일등용사를 항상 쓰십니다.
여호수아나 다윗, 그리고 다니엘도 모두 일등 용사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일등 용사가 되는 것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신앙생애의 결과는 오직 승리자가 되어야 함을 보여준 것입니다.








교법사 가말리엘
/ Gamaliel

[행 5:34]


1. 인적 사항

가말리엘이란 히브리 원어는 '가물리엘'로 그 의미는
"하나님은 나의 보답이시다."라는 뜻입니다. [민 1:10]
그는 유대인들의 율법과 유전을 연구히고
체계화하는 율법학자인 교법사였습니다. [행 5:34]

산헤드린 공회에 바리새파를 대표하는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위대한 랍비 '힐렐'의 손자이며 힐렐학파 의 계승자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를 사모하며 기다리다 예수님을
품에 안았던 '시므온'의 아들입니다.[눅 2:25]

그는 '랍비'(선생)라고 칭해지기보다 훨씬 영광의 호칭인
"랍반"(우리들의 큰 선생)으로 불리워진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수제자 사도바울의 스승이기도합니다. [행 22:3]


2. 그의 생애


가말리엘의 가문은 유대교의 보수파인 "샴마이" 학파와
쌍벽을 이루었던 온건파인 '힐렐'학파의 원조였던 '힐렐'이 조부였으며,
그의 부친은 또한 예수님께서 아기로 성전에 드리어졌을 때,
'그리스도를 보기 전엔 죽지 않겠다'
시므온이 부친인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하였던 그는
조부가 세운 힐렐학파의 계승자가 되었고 랍비가 되었으며
랍비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랍비에게 주어진
7명의 랍반중 한 사람으로 불리어졌습니다.

또한 그의 부친 시므온과 조부 힐렐에 뒤를 이어
랍반의 호칭을 받은 가말리엘은 3대째 랍반 가문의 후예로서
그는 평생에 문하생을 천여명이나 배출을 하였습니다.
그들 중 5백명은 율법사로, 나머지 5백명은 희랍의 지혜를
공부하는 제자들이었다고 합니다.  (탈무드)

이중에는 수제자로 '사도 바울'이 있으며, 또한 전승에 의하면  
'스테반' '바나바'도 그에게서 배운 제자들이었다고합니다.

그는 성전에서 가르치기를 좋아해서, 주님이 어렸을 당시
부모와 더불어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성전에 남아 랍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을 시기에 주님과 대화를 나누었던
선생들 중 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눅 2:46]
또한 바로 그 때에 예수님에 대하여 특별한
인상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나중에 주님의 기적을 일으카는 사역을 통하여
그는 점점 그 도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으며
니고데모와 아리마데 요셉과 더불어
주님의 숨은 제자로 전승에는 전해지고 있습니다.

더우기 그의 온전하고 관대한 성품은
산헤드린의 극단적인 분위기에 말려들지 않고
오히려 그 분위기를 진정시키는 역할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이미 그는 주님의 도를 따르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만년에 그의 아들 아힙과
니고데모와 함께 베드로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바리새인으로서의 바른 행실과 그의 높은 학문,
온화하고 관대한 성품은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살았으며,
그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라반 가말리엘이 돌아가셨으니, 이제는
율법에 대한 존경도 없어졌고 순수성과 금욕도 가버렸도다.
"
라고 하며 많이들 아쉬워 하였답니다.

그의 제자이며 개종자인 탈꿈학자 '몽켈로스'는 그를 추모하면서
두로돈으로 70미네의 향료를 제공하였으며
위대한 위인의 장례절차에 따라 장례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그는 비록 나타나지 않은 그리스도의 제자였으나
말년의 세례는 그로 평안히 구원받은 기쁨으로 임종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이 파괴되기전 (A.D. 70) 18 년 전에 죽었으며,

그의 죽음에 대하여 '미쉬나'에 기록되었으되
"그의 죽음으로 토라에 관한 경의도 끝났고 순결과 절제도
그와 함께 묻혔다."라고 표현되어있다 합니다.


3. 그의 신앙의 특징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메모는 공회에서 주님을 잡으려는
쟁론이 한창일 때, 말하기를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전에 판결하느냐?"[요 7:51] 함으로
그들의 행위를 은근히 저지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이미 예수님을 따르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말리엘도 마찬가지로 공회에서 사도들을 붙잡아
처형하고자 했을 때, 그 일에 대하여 과거 행해진
'드다'와 '유다'의 사건을 예를 들어, 또한 공회의 결정을
저지한데에는 이미 그의 마음 속에
주님을 따르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 가멜리엘은 하나님의 뜻만을 따르려는 신앙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신앙은 운명과 자유 의지를
한데 묶은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하면서도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했으며,
"모든 것이 예비되어져 있으나 인간에게도
선택의 자유가 주어져 있다." 라고 믿었습니다.
(바클레이 주석 참조)

이같은 그들의 신앙태도는 오히려 정치적, 종교적,
기득권을 옹호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보다
현실적인 위치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삶을 살게 만들었으며
주님이 행하신 모든 기적을 오히려 바알세블에 힘입어
행한 귀신의 역사라고 왜곡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같은 마음과 생각은 자신의 유익을 위한 지위 및
신분 유지 로서의 신앙을 필요로 하는 삶을 살게 만들어준 반면에,

가말리엘은 그의 직분과 직책은 이미 온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랍반의 위치 인데다가,
그가 이미 주님의 행하신 기적과 말씀으로
참 신앙의 길을 찾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행실에 대하여 주의와 경고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즉, "너희들의 자유 의지와 행실은 생활면에서는 허락될지라도
신앙면에서는 허용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의 뜻을 지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일을 막는다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됨을
알아야한다." 고 엄히 나무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같은 신앙에 있으면서도 타교단과
이웃 교회에 역사가 일어나는데 대하여
비판과 정죄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단에 대한 경고는 바람직하지만, 기적과 이사는
교리에 의해 해석되기 어려운 부분들임을 감안할 때,
기도하며 성령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시는 지를
기다리며 주시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말리엘은 신앙의 변화에 대하여 신중하였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는 행위가 되지 않도록
좀더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신앙도, 인격과 지식과 덕망이 배양되어
있을 때 더욱 존경받는 신앙인이 됨을 배울 수 있습니다.


2) 가말리엘의 신앙은 현상보다도
과거의 하나님의 역사를 근거로한 신앙이었습니다.


우리들이  현실에 당면한 문제로 미래를 예측할 수 없을 때,
바른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행하셨던 일과 인도하셨던 역사를 돌이켜보면
현실을 이해할 수 있고 미래를 예측할 수가 있습니다.

가말리엘은 많은 학문과 지식 못지않게 신앙 안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도 면밀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드다'라는 사람과 '유다'라는 자가 사람들을 미혹하고
난을 일으켰을 때에 장본인을 잡아 처형하자 그를 뒤쫓았던
무리들이 저절로 해체되었던 사건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소행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모세처럼 하나님께서 난 것이면
바로왕이 아무리 방해를 해도 결국은
자신에게 불행만 주어졌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세가 죽었어도 여호수아를 통하여
모두 이루어졌음을 보고, 기득권의 치리를
옹호하려는 무리들의 감정적이고 선동적인
동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는 주제를 주입시켜
흥분을 가라앉힌 것입니다.

왜 그들은 모두 가말리엘의 주장을
반대하지않고 순순히 따랐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가 한 말 중
"너희들이 하나님의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v.39]
라고한 그의 결정적인 일침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의 기적과
이사와 부활하심을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일종의 죄 의식과 불안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가말리엘은 그 같은 그들의 정곡을 찌른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이 지금이 아나라.
예전에 주님을 죽였을 때, 이미 저지른 죄를 알고
더 이상 하지 말라."라는 의도를 지난 말이었습니다.  

거짓 무리들은 이익을 중심으로 할 땐 함께 모여듭니다.
그러나 불리한 결과가 초래할 땐, 서로가 등을 돌리고 맙니다.
가말리엘은 그들과 함께 더 이상 동조하지 않고
살다가 (A.D. 52)년 경에 일생을 마감하였습니다


3) 가말리엘의 신앙은 주님의 말씀을 숨어서 지키는 살이었습니다.  


[행 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이 말씀은 공회 의원들일지라도 주님의 재자가
많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 그리고 가말리엘이었습니다.

그 이유로서 그는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이었으며
제자들의 기적과 기사는 확실히 하나님께로서
기인한 것이며, 학문 없는 그들이 구약을 인용하며
대제사장들에게 변론하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능력을 주셨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기전에 제자였던 사도바울을 만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대한 그의 간증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죽기 전에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기 위하여
아들과 더불어 사도 베드로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는 바울도 사도였으나 제자로 부터 세례를 받기보다는
주님의 정사도인 베드로와 요한에게 받는 것이
더 이치적이었을 것입니다.

이와같은 내용과, 제사장들 중 주님께로 향한
허다한 수의 사람들의 아름은 가리어져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제자들에게 세례를 받고 숨은 제자들로 살았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말리엘이 보여주는것은, 진리는 지식보다 앞서며,
신분과 지위도 주님의 종들인 사도보다 결코 높을 수 없으며,
백성들에게 받는 존경과 인정도 주님으로 부터 받는 인정보다
훨씬 못하다는 것을 그는 몸소 보여준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겸손입니다.
참된 신앙은 드러내 보이는 것보다 주님과의 내면의 관계가
더 깊고 중요한 부분을 조용히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요즈음은 보기 드믄 일들이라 여겨집니다.
이 시대에 모두 요구되어지는 것도 드러내지않고
숨은 제자로서의 진리를 따르는 진실된 모습일 것입니다.

그의 부친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아보고 눈을 감았지만,
가말리엘은 성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마음에 모시고 눈을 감았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의인을 옳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의 하나님
[요14:16-17]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오실 수 있으신 길은
인간의 영이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입니다.
이것은 죄가 없는 상태에서만이 가능합니다.

죄가 몸 속에 들어오자 하나님의 영은 떠났고,
인간의 영은 죽었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은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으나, 거듭나게 되며는
그 영속에 하나님과의 교제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성령의 하나님은 우리로 예수님이 열어 놓으신
구원의 길로 들어오도록 인도하시고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동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은 죄에 빠질 수는 있으나 죄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죄의 세력은 영의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구원의 길을 가기를 원하고는 있으나, 그길을 갈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죄의 값을 인간은 지불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혼은 영의 길을 자각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혼이 영을 주관 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영은 혼에 속한 부분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혼이 영의 길을 택하기 원할 때, 영의 길로 들어서도록
도와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분이 필요합니다.
그분이 바로 성령님이시고 성령님의 역할이 바로
혼과 육에 속한 인간을 영에 속한 인간으로
변화시켜주시는 일이십니다.

인간은 아무리 능력이 있고 똑똑해도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마치 인간이 아무리 건강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죽음을 부활로, 우리의 죽을 생명을
영생으로 바꾸어 주신 분이 허락하심으로 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주관하시고, 주님의 죽을 몸에
영생을 주신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마찬가지로 혼이 주님을 믿을 때, 그 믿음을 통하여
성령님은 주님께 역사하셨던 능력을
우리에게도 적용시켜주십니다.

인간이 영의 길로 갈 수 있음은 오직 혼이
주님을 선택하는 한 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 결과 선택과 믿음을 통하여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나에게 나타나게 됩니다.

믿음은 구원의 문 밖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에서 문을 열어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어느 누구도 그 구원의 문을 열 수가 없습니다.
그문은 안에서 열어 주어야지만 열려지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문을 여시고 우리를 맞아 들이신 성령님은
우리에게 다섯 가지 면에서 역사를 하십니다.
이같은 성령님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구원의 길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1. 성령님은 보혜사 이시기 때문에 우리와 항상 함게 계시며 도와주십니다.


[요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인간이 죄에 빠졌던 원인은, 죄가 얼마나 나쁜 것인지,
죄를 짓지 못하도록 저지할 도움을 줄 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를 통하여 인간은 단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죄가 없었을 때는 아담에게는
자신의 영생의 삶에 불가능한 것이 없었습니다.
피조물이라는 인식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통하여
인간의 피조물의 한계를 알려 주셨습니다.
죄를 통하여 선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모시고 싶은 인식을 갖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도록 지음을 받았으나
하나님 대신 자기를 의지하고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 결과가 멸망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다시 돌아와
순종할 때, 또한, 창조주 를 하나님 답게 섬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인간이 알 때, 하나님은 땅으로 부터의 삶에서 우리를
하늘의 삶의 영생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깨닫기 까지만 허락하셨지
깨닫고 돌아올 수 있는 능력까지는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피조물의 한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도움은 시작되게 됩니다. 이 깨달음의 자리에 올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다가 도와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이것이 인간이 다시 잃었던 진리를 깨닫는 일이고
진리는 진리의 영 이신 성령님과의 만남을
만들어주는 기회인 것입니다.

내가 진리를 찾고 진리를 따라 사는 한 성령님은
절대로 나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진리와 성령님은 하나 이시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내 안에 쌓이면 쌓일 수록 나에게 오신 성령님은 함께
동행하시며 곁에 계시고, 나중에는 네 안에 들어와 계시게됩니다.
진리는 성령님의 거하시는 집이기 때문입니다.


2. 성령님은 교사이시기 때문에 항상 우리를 가르쳐주십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진리는 인간이 찾으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을 깨달으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죄에 대하여,
구원에 대해서, 하늘나라에 대해서, 그리고 마귀와
영적 전쟁과, 재림과, 심판과 그리고 부활에 이르기까지
다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오직 혼에 매여 이 땅에
육신적인 삶에만 깨달음이 묶여져 살고 있기 때문에
영에 관한 부분은 점점 무지해지고 맙니다.

인간은 죄 중에 잉태하여 태어났기 때문에
태어나서는 육신 중심의 삶을 제일 먼저 살게됩니다.

그리고 또한, 혼과 죄가 지배하는 세상의 교육을 통하여
혼 중심의 삶, 즉 세상 중심적인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다가 삶위 허무와 죽음을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말씀과 체험을 통하여 영적 중심의 삶으로 변화되어집니다.

혼이 영의 세계를 알도록 깨우쳐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영이 말씀으로 자라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은 12제자들에게 영의 세계에 대하여
특히 하늘나라에 대하여 들려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이 어렸기 때문에 아는 것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오순절날 성령의 임재하심을 받고
그들은 아는 것을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말씀의 양식은 우리의 영인 속사람을 자라게 만들어줍니다.
우리의 속사람의 완성이 부활후 천국에서의 모습이 되듯이
 우리의 진리의 깨달음의 완성도 천국에 가서야 이룰 수가 있습니다.

이땅에서의 진리의 깨달음의 한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격과 신분으로 이 땅에서 사는데 필요한 부분까지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 집안의 가정 교사로서 우리가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도록 말씀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3. 성령님은 조명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의
구주되심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요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성령님의 역할의 한계는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예수님의 선포하신 말씀의 법주 안에서만 활동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 활동의 주된 역할은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를
밝히 드러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증인 사역이십니다.

 우리는 귀로 듣고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봄으로 이해의 범주를 벗어나,
놀람과 확신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마치 땅의 만물이 달빛을 받을 때와, 햇빛을 받을 때가 다르게 보이듯이  
해의 역할은 빛으로 남을 비추어 드러나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나타나게 하시고
주님의 구원사역이 얼마나 은혜로운지를 조명의 빛으로 보
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뚜렷한 모습은 용서에 있고,
주님의 은혜가 드러난 현상은 구원의 표상인 십자가에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오셔서 나의 영안을 열어주실 때,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바로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고전 12:3f]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주님은 사역시절에 많은 기사와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이를 보는 사람들 시각에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은 주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으로 보았고, 나머지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예수님이
바알새블의 힘을 덧입어 기적을 일으킨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의 차이점은 같은 신앙, 같은 말씀을 지녔어도
성령의 역사하심의 차이에 의하여 주님을 다르게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메튜헨리' "신앙이 성령으로 역사되지 않고는
그에게 복종하고 의지하여 살아가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주시라 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고전 주석 p.180)

예수님이 구세주이신 것은 머리로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에 의해서 깨달아지는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증인 사역입니다.

 
4. 성령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불의한 것을 지적하십니다.


[요 16:8-11]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동물이 인간을 보는 눈과, 인간이
동물을 보는 것과는 많이 차이가 있습니다.

즉, 동물은 자신이 어떡해야지 유익이 주어진다는 면에서
주인을 이해하고 있는 반면, 인간은
동물의 행동 동기 까지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욥이 고난을 받고 있을 때, 네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각자 알고 있는 하나님을 욥에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닙께서 욥에게 직접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성령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이 잘못 알고 있는
세가지 오류를 지적하시고 바로 세우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1] 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입니다.
 
인간편에서는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죄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의 진정한 죄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죄인들을 용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통하여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길을 믿지를 않고 주님을 부인하고 구원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지은 모든 죄는 주님 안에서 용서되어질 수 있음을 볼 때,
진정 용서되어지지 않는 죄는 용서될 수 있는 죄보다
더 큰 구원의 부인죄 인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님은 제일 먼저 지적하십니다.


[2] 의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매달린 주님을 바라보았을 때에 죄인으로, 심판으로,
멸망으로. 저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자리가 대속으로,
영생으로. 부활로, 영광으로 바라보고 가셨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을 중거하심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셨음을 증거하십니다.
인간이 주님을 못박은 의는 멸망의 의 였음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의 바른 이해가 참 의 임을 알려주십니다.


[3]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심판하여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 바로 너희들도
죽으면 더 큰 불과 유황의 심판에 들어갈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땅에서 벌이 무서워 감옥에 갈까봐 죄를 짓지않고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행위의 죄가 없어도 마음 속에 죄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형의 집행이 죽음 후에 주어질 뿐입니다.
사후의 심판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5. 성령님은 인도자 이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요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인도와 계시는 가나안 땅과 율법이었습니다.
신약에서의 예수님의 인도와 계시는 천국과 복음이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의 성령님의 인도와 계시는 증인과 선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인도하심은 처음에는 이 땅에 백성으로의 삶,
그리고 나아가서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서의 삶, 그리고 마지막은
하늘과 땅에서의 후사로서의 삶으로 진행하고 계심을 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알려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아직도 많은 것이 남아 있습니다. 장래의 하나님의 계획은
지나온 것보다 더 심오하고 깊은 것들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만이 아십니다.
성도들은 마지막 환난에 대해 대비해야합니다.
사탄과의 영적 전투에 참가해야합니다.
주님의 재림에 준비해야합니다.
마지막 심판에 설 수 있어야합니다.
천국의 상급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성도들은 증인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성령님의 마지막 사역은 우리로 증인이 되게 만드는 사역입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한 인간의 삶은 긴 구원의 사슬에 연결되어 있는 한 고리에 해당됩니다.
성령님이 오신 것은 나로 하나님의 세우신 구원의 줄의 대열에
든든한 고리로 매어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권능수여의 의미는 순교의 정신에서 발견해야만 되는 일이기에
권능과, 증인과, 순교는, 하나로 묶여 있음을 봅니다.

오늘도 성령님은 증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이는 그들만이 하늘의 상급을 받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성령님을 모시고 하늘의 상급을 받는
성도들이 다같이 되십시다.










아리마대 요셉
/ Joseph of Arimathea
[눅 23:50]



1. 인적사항


70 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위원
공회의 결의와 행사에 가담하지 아니한 선하고 의로운 자
사무렐의 출생지인 라마다임 출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린 사므온과 안나 선지자 같은 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요구한 자
주님을 자신의 묘실에 모실만큼 부자인 자
예수님의 숨은 제자 (마 27:57)
니고데모와 함께 향품과 향료로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한 자 (요 19:39)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 장례식 행사 때 의외에는
성경에서 그에 대하여 언급되어져 있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이 주님의 숨은 제자로서 매우 가치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후대의 성도들은 그를 흠모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에 관한 미흡한 언급을 대신하여
전해 내려오는 전설로 많은 사람들이 위로 받기도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주후 61년에 빌립에 의해서
영국으로 파송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글래스턴버리 (Glastonbury)로 왔고 그 때에
그는 최후 만찬때에 사용되었던 잔을 가지고 왔는데
그 안에 그리스도의 피가 들어있었다 합니다.
이 잔이 성배가 되었으며 아더왕의 기사들은
그것을 찾는 것이 꿈이었다고 합니다.

요셉이 글래스턴버리에 이르렀을 때는 그는 피로에 지쳐
지팡이에 의지하여 쉬려고 지팡이를 땅이 깊이 박았는데
그 지팡이에 싹이 나서 해마다 크리스마스 날이면
꽃을 피우는 숲이 되었다 합니다.

성 요셉의 숲은 아직도 글래스텐베리에서 꽃피고 있으며
오늘까지도 그 점지를 온 세상에 내보내고 있다 합니다.
영국 최초의 교회는 글래스텐베리에 세워졌고 대 수도원과
고대 건물에는 성요셉 예배당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곳은 순례자들이 즐기는 순례지이자
휴양지가 되고있다고 합니다.
(바클레이 주석 씨리즈 눅 p. 404 참조)


2. 신앙의 특징


1)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산 자였습니다. (눅 23:51)

예루살렘의 공회는 70명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그 중 24명은 제사장들의 대표자들로
24명은 이스라엘 국민들을 대표하는 장로들로
나머지 22명은 율법을 배운 세기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공회의 기원은 광야에서 모세를 도와주었던
 70인 장로들을 본받아 이루어졌다고하며
그들의 권한은 예루살렘의 시정, 종교적 가르침,
치안의 확립,  성전 내의 각종 업무 집행들을 수반하였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당시 국민의 대표 중 한 사람의 장로로써
공회에서 일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와같은 정치, 종교의 지도자역에 가담하면서
그는 시므온과 안나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며 지내던 중
예수님을 만나게 되자 약속된 구세주가 바로 예수님임을 믿게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와 시므온과 안나 선지자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의 공동특징을 보게됩니다.
그것은 바로 선하고 의로운 성품을 지녔다는 것입니다.
(눅 2:25, 23:50)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날
우리들에게 행한대로 보응하리라 하셨습니다. (롬 2:6)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에서의 위로를 바라며 살고 있습니다.

그 결과 재산, 권위, 명예, 권세, 소유, 치리 등에 중심을 둔
신앙생활을 하고있는 것을 봅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그대로 본받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신앙생활은 하나님 나라를 염두에 둔
참된 믿음의 생활은 아님을 요셉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의란 본래 재판자리에서 필요한 것으로서
의를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재판자리에 서 있다는
인식을 항상 갖고 바르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즉, 의란 선행과 일치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고
고아를 위해  신원하며 과부를 위해 변호하고 (사 1:17)
공평을 지키는 것임을 (사 56:!)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예수님을 처형할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그는 아에 처음부터 그 같은 불법적인 모임에
가담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에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결정은
만장일치였기 때문입니다. (막 14:64)
그의 이와같은 행동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사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빌라도에게 주님의 시신을 요구한 담대한 신앙을 가진 자였습니다. (눅 23:52)


성경에서 요셉과 니고데모를 주님의 숨은 제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 27:57)
이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지만 자신들의 소속과 사역속에서는
떳떳히 제자의 신분을 노출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1] 산헤드린 공회원이란 신분과 지위는, 그들로 자격을 박탈당해야만 하는
주님의 제자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못하는 처지에 있게 하였으며

[2] 유대교사회에서의 축출과 재산의 몰수 등은 큰 위험임으로
숨은 제자로서의 신앙인으로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재판받는  자리에서와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담대한 믿음과 순종을 보고 그들의 마음은 강하게
믿음으로 자리잡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특이한 사건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1] 주님꼐서 돌아가시자 성전의 휘장이 찢어져 둘이 되었으며
무덤들이 열리고 죽은 성도들이 다시 살아났으며
부활의 몸으로 돌아다니는 역사가 일어난 사건 (마 27:51-52)

[2]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강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심을
나타내는 표현을 어느 누구도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옆에 달린 강도가 고백했습니다.


[눅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찮은 죄인인 도둑만이 예수님을 구주로 외치고 있는데
자신은 정작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자로서
자신의 신분을 더 이상 감추고 있는 것이 신앙 양심에
어긋나는 일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현실 위주의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천국 백성으로서의 신분을 깨닫고 담대하게 처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빌라도에게 가서 주님의 시신을 요구하였습니다.
이 같은 행동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자세일 뿐 아니라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려놓은 온전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보인 행동이었습니다.


세상 속에서의 삶은 신앙행활에 많은 걸림돌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전혀 걸림돌이 되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왜나하면 나에게 주어진 모든 형편은 나의 노력과 능력으로
얻어진 것이기보다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맡기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란 주인공의 인식이 주님이라는 중심의 삶으로
바뀌는 것이  참된 신앙임을 요셉은 보여준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시신을 자신의 무덤에 안치하여 장사지낸 자입니다. (눅 23:52)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 다음에 12 제자들과 같이
주님 곁에서 많은 말씀을 듣지 못하는 대신 주님에 대한
구약의 말씀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서에 대하여 늘 자신의 정원을 거닐면서 묵상을 하였습니다.
그 때, 그는 마음에 와닿는 한 구절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 53:9] "그는 강포를 행치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이 말씀 가운데 과연 그 부자란 누구일까요?
그 말씀은 그의 마음을 파고들었으며 마침내 그는
자신이 장본인이 되어야 함을 점점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주님께서 돌아가시자 지체하지 않고 빌라도 총독에게
달려가 주님의 시신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제자들도,  평소에 은혜를 많이 받았던
  장본인들도 없었습니다.
오직 같은 공회원인 니고데모가 가지고 온 백근에 해당되는
몰약과 침향으로 주님의 몸을 닦고 세마포에 싸서
둘이서 주님의 장례를 치룬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위하여 마련해 둔 돌무덤에 시신을 안치하였습니다.
신앙에는 시작시점과, 성장 시점과, 완성시점이 누구나 다 다릅니다.

먼저 시작한 신앙인에게도 자신의 할 사명이 주어져 있고 나타난
제자된 사람들도 해야할 때가 있는 반면 늦게 부르심 받은 사람도,
숨어있는 제자의 삶을 산 사람도 주님의 떄가 되면
할 일들이 주어지게 됩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순종하려는 자세로
말씀을 늘 묵상하며 깨달음을 갖는 신앙생활이 중요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마지막 주님을
온전히 모신 것도 구약을 늘 읽고 묵상하고
하나님을 말씀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자신의 믿음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 중에 사명적인 삶은 말씀을 중심으로 묵상하고
의미를 깨닫도록 노력할 때 성령님의 계시하심으로 이룰 수 있습니다.

시므온과 안나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그들에게
성령님꼐서 임하셔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계시를 주셨듯이
아리마대 요셉에게도 성령님께서 주님의 마지막 장례에 대하여
계시히여 주셨을 것입니다.

그는 숨은 제자로서의 신앙생활을 시작하였지만 나중에는
정식 제자들보다도 더 큰일을 해낸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그의 신앙을 본받아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마지막 떄에
감당하는 성도들이 다 같이 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