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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에바다교회

'Bible Study/성경공부'에 해당되는 글 93건

  1. 2011.11.23 [성경공부 092] 시간 / 때
  2. 2011.11.16 [성경공부091] 희년 (A Jubilee)
  3. 2011.10.26 [성경공부 090] 율법과 복음
  4. 2011.10.12 [성경공부 089] 재창조
  5. 2011.06.15 [성경공부 088] 사도 바울의 4차 선교여행
  6. 2011.06.01 [성경공부 087] 성령의 하나님
  7. 2011.05.18 [성경공부 086] 보혜사 (Counselor)
  8. 2011.04.20 [성경공부 085] 부림절
  9. 2011.03.30 [성경공부 084] 산상수훈
  10. 2011.03.23 [성경공부083] 성령의 은사
  11. 2011.03.02 [성경공부 082] '이신칭의'
  12. 2011.02.23 [성경공부 081] '성전/ Temple'
  13. 2011.02.09 [성경공부 080] “인자” / The Son of Man
  14. 2011.02.02 [성경공부 079] '여호와의 날' / The Day of the LORD
  15. 2011.01.26 [성경공부 078] 예수님의 이름
  16. 2011.01.05 [성경공부 077] 송구영신2/ 새해 첫날 행하신 것을 바라보라!
  17. 2010.12.22 [성경공부 076] 송구영신1 / 지난 날을 상고하라!
  18. 2010.12.08 [성경공부 075] 섬김의 여 선교회
  19. 2010.11.24 [성경공부 074] 크리스마스(Christmas) / 성탄절
  20. 2010.11.10 [성경공부 073] 추수감사절
  21. 2010.10.27 [성경공부 072] 종교개혁일
  22. 2010.10.06 [성경공부 071] 제자의 삶
  23. 2010.09.22 [성경공부 070] 그리스도인의 정의
  24. 2010.09.15 [성경공부 069] 대강절 / The Advent
  25. 2010.09.08 [성경공부 068] 부활신앙
  26. 2010.08.25 [성경공부 067] 그리스도인의 재정
  27. 2010.08.18 [성경공부 066]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
  28. 2010.08.11 [성경공부 065] 혼으로 사는 그리스도인
  29. 2010.08.04 [성경공부 064]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
  30. 2010.07.14 [성경공부 063] 계명으로서의 사랑


시간 /
[겔 7:7]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체에게 존재의 기간을 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시간(Time)' 생명과 같이 아주 소중한 의미인데도 

막상 '생명'이라 하면 절실하게 긴장으로 받아들이는 반면에, 

'시간' 보다는 무관심하게 여기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기간이 대상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시간의 개념을 바로 알고 산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을 가치 있고 유효하게 사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간이란 무엇일까요?



1. 시간의 개념


1) 구약에서의 시간의 개념은 기간 보다는 

질적 상태를 나타내는 의미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시간을 나타내는 히브리어는 주로 에트 라는 단어로 

의미는 정해진 기간 또는 

특정한 뜻으로 쓰여졌습니다. ( 7:7)


본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영생체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시간이란 개념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음으로 죄는 죽음을 가져왔으며 

죽음은 정해진 시간의 끝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영생에서 900년으로 제한된 생명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생명의 존재기간은 죄의 결과임으로 의미가 없으십니다. 


다만 주어진 기간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가 하나님의 관심이 뿐입니다. 

그래서 구약초기에 많은 사람의 이름들이 나열됐고 

900 이상 살았던 기간이 명시됐지만 사건은 아무것도 없음으로 

그냥 낳고, 죽었다 간략하게 표시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아브라함의 생애에 있어서는 

그는 단지 175세로 비교적 짧은 기간을 살았으나 

성경에서 창세기에 그에 대한 많은 부분이 기술된 것은 

그의 삶이 하나님과 연관된 질적인 사건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의 시간에 대한 참된 이해는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시간 안에 있는 의미 있는 사건 보다 중요하게 여겼으며, 

모든 인간의 삶에서도 양적인 기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질적인 시간이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 죽어서 심판대 앞에 섰을 인간에게 물어지는 것은 

'그가 세상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살았는가?' 아니라 

그가 사는 동안 세상에서 무엇을 하였는가?” 하는 

질적인 시간에 대한 해명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서는 시간은 의미의 기간으로 

취급 되어졌음을 봅니다. (쉐마사전 P43 시간 참조)


   

 2)  신약에서의 시간의 개념은 시간의 흐름이라는 양적 기간 

속에 중요한 때를 포함시키는 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헬라어에서 '시간(Time)' 가리키는 단어는 가지인데

'크로노스' '카이로스'   '호라'' 라는 단어로 

각각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1] 크로노스 (인간의 )


인간 편에서의 시간의 의미합니다.


시간은 인간의 행동에 의해서 폭도 정해지게 됩니다. 

, 같은 기간도 평안이 지낼 시간의 폭은 느낌 없이, 

소중히 여김 없이 시간은 흐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위기나 고난이나 헌신이 삶속에 깊이 있게 수반될 때는 

시기는 일정한 흐름보다 오래 느껴질 수도, 

느리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마치 33년을 살았어도 100년을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100년을 살았어도 20-30 같이 여겨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은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여 땅에 오심으로 

시간의 바른 의미를 얻게 되었습니다. ( 4:4-6)


, 죄인으로서의 인간으로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삶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주어졌으며, (벧전 4:23)

같은 삶은 시간의 폭을 가장 넓혀서 사는 의미 있는 삶이 되었습니다. 

(시간 밖에 계신 분이 시간안에 포함되어 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2] 카이로스 (하나님의 )


하나님 편에서의 지정하신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의 기간을 정하셨으며 

시작의 , 죽음의 , 심판의 때와 인간에게 간섭하실 때를 정하여 

(징계의 , 축복의 , 연단의 , 성취의 -- ) 

계획하신 뜻을 인간의 속에 나타내십니다. ( 3:3)


주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때는 구약에서는 예언으로 주어졌으며 

신약에서는 예수님과 성령님에 의해서 성취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때인 '카이로스' 가장 알고 사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인간이 만약 하나님의 때를 모르고 마치 멸망하는 

짐승과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닮아 하나님의 때를 알고 살면 우리의 중에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반영할 있는 참된 가치와 

성취를 이루는 행복한 삶을 있게 됩니다.



[3] 호라 (인간편에서의 좋은 시간)


인간 편에서의 정한 시간, 좋은 시간 의미합니다.


인간은 일생을 살면서 정해진 때를 지키고 살게 됩니다. 

(공부, , 성공, 결혼, 양육, 은퇴, 헌신할 …… )


그러나 이와 같은 때는 인간 스스로가 정하여 진행할지라도

인간 스스로 정할 없는 때를 감안하여 

하나님께 자신의 계획을 아뢰어 응답 받지 못하고 지낸다면 

모두 이룬 것들이 헛수고가 있습니다. 


, 위기의 , 사망의 , 하나님의 진노의 ..들을 모르면

나의 이룬 것은 무의미하게 없어질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이란 출생 사망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기간으로 주어진 존재의 기간이기 보다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계획하시고 예정하신 뜻을 

땅에 이루는 영혼의 삶을 준비하는 기간임을 알고 

소중히 여기고 사는 삶이 바른 시간을 이해하고 사는 삶이 됩니다.


2.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지금은 어떤 때일까요?


1) 세상은 말세임으로 고통과 타락의 때입니다.


[딤후 3:1-5]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여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지 않습니다.

인간이 고통을 받는 것은 자신이 행한 행실의 결과로 주어질 뿐입니다.



[1] 잘못된 사랑이 고통을 가져옵니다.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대상은 자신과 돈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의 성향을 지닌 죄인이며 돈은 세상의 창조물입니다.

결국 자신과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사랑할 고통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할 축복과 영생이 주어지게 됩니다.

인간이 타락하게 되면 죄가 정상으로 여겨지고 

의가 비정상적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2] 잘못된 자기 평가가 고통을 가져옵니다.


자긍과 교만과 훼방은 자기 분수를 넘어서 

남을 무시하거나 비방하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일어나는 것이 불화입니다.

불화는 마음의 고통을 수반합니다.

인간이 다투고 헤어지는 것만큼 고통이 없습니다.



[3] 잘못된 성격이 고통을 가져옵니다.


원통함, 참소, 사나움, 배반 등은 불화를 넘어선 싸움이 벌어지게 되고

결과로 끊임없는 전쟁이 땅에 지속되고 있습니다.


같은 성품은 죄성의 범주를 넘어선 

마귀의 영향에 사로잡혀있을 생기게 됩니다.

마귀는 바로 참소자이자 배반자이기 대문입니다.



2)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는 지금이 은혜와 구원의 때입니다.


[고후 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하나님의 3 사역' '창조사역', '구원사역', ' 창조사역'입니다.

중에서 가장 소중한 사역은 구원인 은혜사역입니다.

그리고 은혜의 집행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오셨는데 세상은 잠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재창조사역을 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심판주로 오십니다. 

전에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3. 그러면 우리는 지금 어떤 상태에 놓여 있을까요?


1) 우리는 모두 잠들어 있는 때입니다.


[ 13:11]

또한 너희가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때가 벌써 되었으니……”


[1] 영혼이 잠들어 있습니다.


영혼이 잠이 들면 세상을 하나님보다 사랑하게 됩니다.

진리를 모르므로 육신의 일만 도모하게 됩니다.

세상의 부귀영화, 출세, 성공, 쾌락, 오락 등은 

우리의 영혼을 잠들게 하는 유혹들입니다.


[2] 사명이 잠들어 있습니다.


[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께서 '천국잔치' 배설하고 사람들을 초청했을

번째 사람은 사업이 바빠서 불참했고

번째 사람은 일이 바빠서 거절했고

번째 사람은 쾌락에 젖어 불참했습니다.


그러나 일들은 하나님과 연관된 관계에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들입니다.


사람은 사명이 없을 존재의 의미도 없게 됩니다.

영혼의 잠은 유혹에 빠져있을 오게 되고, 

육신의 잠은 게으를 오게 되고

사명의 잠은 욕심에 빠져있을 오게 됩니다.



2) 여호와를 찾을 때입니다.


[ 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묵은 '이란 '버려진 , 아무것도 생산치 못하는 '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 중에도 아무것도 생산치 못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 무지, 고집, , 타락 등으로 마음이 썩은 경우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잡초와 벌레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온통 마음이 세상 관심사와 유흥거리로 가득 경우입니다.


이때는 성령의 쟁기 말씀으로 마음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회개로 씻어내고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갈아엎은 마음에 의를 심어 

마침내 '거룩의 열매' 맺게 하여 주십니다.


세상 속에서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을 찾지 말고 

하나님을 찾아 남은 삶을 은혜의 삶으로 바꾸어야만 때입니다.



4. 우리가 하나님의 때를 알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를 가장 아시고 분의 때에 맞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유는 주님께서는 항상 성령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1) 성령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때를 수가 있습니다.


[고전 2:9-10]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보내주신 성령님은 우리 마음속에 임재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며 때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과 때를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성령님께 이러한 은혜를 얻기 위해서는 

성령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중심의 삶이란 나의 주인 자아의 자리에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 삶에 제일 중요한 분으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2)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하나님의 때를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신 분의 뜻을 있습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실천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받을 있습니다.

마음의 소원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3) 믿음과 신앙이 성숙할 하나님의 때를 따라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75 하나님께서 

자녀, 이름가나안 땅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자녀를 얻었을 때는 100 때였습니다. 

, 25년은 '믿음의 성장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러 가실 아브라함에게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 18:17) 하시면서

자신의 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믿음이 자라나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면 

친히 말씀으로 예언과 계시로 알려주십니다.


인간의 때는 창상 하나님의 때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열심히 하여 

하나님의 때를 따라 사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희년 (A Jubilee) 
[레위기 25:8-13]



1. 희년의 의미


희년은 히브리어로요벨이라 부르며

의미는 '수양뿔의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보통 전쟁 사용된 은 나팔과는 달리 ( 10:1)

구부러진 수양의 뿔로 만들어져 

제사장들이 주로 사용하는 나팔입니다. ( 6:4-5)


그러므로 나팔을 제사장들이  

이는 종교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었으며 

승리의 전주곡 또는 기쁜 소식을 알리는 

특수한 용도로 불리어졌습니다.


한편, 랍비의 전승에 의하면희년이란 낱말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을  

숲에 걸려 있던 수양의 이야기와 

관련 있는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전승은 아브라함이 수양을 태워 재로 만들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통하여 수양을 되살아나게 하셨고 

가죽으로는 엘리야가 광야에서 입었던 외투를, 

내장으로는 다윗이 키던 것과 같은 하프를, 

그리고 하나로는 출애굽 당시 시내 산에서 불던 것과 같은

 
나팔을 만들고,   다른 하나로는 

메시야가 오심을 알리는데 사용될 나팔을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후대의 주석가들은 원어를 여호수아 6:5에서 찾고 있습니다.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제사장들이 희년의 양각 나팔을 길게 올려 불어라고 되는데 

구절에 의하면 희년이 오직 뿔이란 악기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나팔소리에서 계속 울려 나오는 소리의 진동을 함께 동참하는 의미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누리에 멀리 울려 퍼짐을 말하고 있다 합니다.

(엑셀,레21장 참조, S 로빈슨)


그리고 그 시기는 안식년이 7 반복된 이듬해 

50년째 되는 해를 희년으로,  시기의 선포는 유대종교력으로 

7 10 속죄일에 나팔을 크게 불어 희년임을 알렸습니다.


평상시 속죄일에는 나팔을 불지 않았으며 

희년의 속죄일에만 나팔을 이유는 모든 회복을 알리는 안식과 

자유의 선포 기쁜 소식이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께서 희년의 제도를 만드신 이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통하여 자신의 일을 시키시기 보다는 

함께 있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이 지음 받고 일은 오직 하나님과 함께 안식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안식 속에서 

하고 싶은 것들을 즐기며 사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죄를 짓고 나자 일은 노동이 되었으며

안식은 없어지고 삶은 생존 경쟁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백성으로 삼으시고 

다시 안식을 기준으로 삶을 제시해주셨습니다.


제도가 안식일 즉, 7 하루를 

하나님과 함께 지내며 안식하는 삶이며 

안식년 즉, 7 1년을 사람과 모두 쉬는 해이며

희년은 50년째 되는

 
안식년과 희년 2년을 모두가 쉬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안식의 제도는 

인간들로부터 탐욕을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며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알려주어 

육신의 쉼을 통하여 

영혼이 하나님께 더욱 나아가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취지가 제일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 희년 규정되어 있으며

희년은 인간이 성인이   한번만 맞이할 있는

 
완전해방과 회복의 해로 누구나 희년 후에는

 
천국에서의 최종 안식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희년제도는 천국 삶의 예비과정임을 있습니다.


1) 희년은 모든 얽매인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해입니다.


[ 25:10]

오십 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인간의 진정한 안식은 자유로부터 누릴 있습니다.

억눌려 있는 상태에서는 진정한 안식은 이루어질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는 희년의 가장 축복이라 아니할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노예들과 죄수들이 감옥에서 풀려났고, 신분이 회복되었으며

육체적으로는 모든 노동에서 완전한 안식을 얻을 있게 되었고

물질적으로는 모든 빚이 탕감되어 물질로부터의 자유를 얻게 되었으며 

땅과 기업이 소유자에게 돌아감으로 소유가 회복되었습니다.


이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며

같은 권리를 누려야 함을 하나님께서는 지시하신 것입니다.



2) 희년은 기업과 가족이 회복되어 한데 모아지는 해입니다.


[레위기 25:10]

“...이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가족에게로 돌아갈 지며


기업이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지파 별로 나누어 받았던 토지를 말하며

구체적으로는 자손 대대로 물려줄 가문의 유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득이하게 자신의 기업을 팔고 타지방으로 옮겨갔거나 기타 사정으로

 
남의 소유가 되어버렸을 지라도희년이 되면 원주인에게로 다시 돌아가며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은 다시 돌아와 가족이 한데 모여 같이 살면서 

기업을 다시 돌려받아 농사를 짓고 있게 것입니다.


요즘에는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일 것이며

가족들도 성인이 되면 각자 독립하여

자기 일자리 찾아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추석이나 명절에 고향 찾아 부모님 뵙는 기쁨 한가지 만으로도 

얼마나 고대하며 1년을 지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와같은 인간의 심정을 하나님께서는 욕심 없이 

허락하신 땅에서 부여 받은 기업으로 돌아가

하나님을 섬기며 지내고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유혹은 우리들을 뿔뿔이 고아로 만들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예비하신 자리에 모여 살게 하십니다.


3) 희년은 사람과 모두가 안식하는 해입니다.


[레위기 25:11]

오십 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안식년에 자연적으로 자라난 곡물과 과실은 

땅의 주인이 수확하여 저장할 없었습니다.


이유는 소출들은 모든 사람의 공동소유로 

특히 고아나 과부, 객이나 이방인

 
의지할 은신처가 없는 자나 가난한 자를 위한 

양식이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들의 위하여 

공정한 소득 분배를 하고 계심을 있습니다.


사람은 몸이 자유 해도 안식을 얻을 있지만 

마음도 자유 해야만 진정한 안식을 누릴 있습니다.


오늘날 부자들도 몸은 자유 하지만 

 
마음 속에 욕망과 탐심이 가득 차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탐심을 가지고 사는 것을 

몹시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탐심을 포기시키는 제도를 만들어 

욕망에서 해방되는 진정한 안식을 누릴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3. 영적 희년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희년의 완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만드셔서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 

세상을 사탄에게 내주고 말았습니다. ( 4:6)


하나님께서는 땅므르기 법칙에 따라 

세상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의 생명을 되찾고자 하셨는데

법칙을 적용시켜 마귀에게 찾아올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을 찾을 없었습니다.

인간의 생명을 힘이 세상 인간 동족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세상에 보내사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사탄 마귀로 하여금 없는 자를 죽게 만들어

하나님의 법칙에 어긋난 일을 행하게 하여 

다시 권한을 되찾아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모두가 

우리에게 진정한 희년을 베풀어 주신 것이며

영적인 희년이 하나님의 제정하신 

희년의 완성 되는 것입니다 ( 61 완성).

(쉐마 희년 해설 참고)



1) 포로와 노예로부터의 해방은 

 
죄의 멍에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자에게 자유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주의 은혜의  '희년' 가리키며

구약의 희년은 신약에서 완전 해방을 완성하도록 예정하신 것인데

주님께서 오셔서 모든 죄와 죄의 결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신약의 희년의 선포는 복음이 바로 나팔을 부는 것이며

복음이 전파되자 즉시 죄의 세력에 포로가 되어 있는 인류를 

영적으로 해방시켜 자유함을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세상 쫓아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구원의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세상이 전부인 줄로 착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공포에서 영생의 길을 발견한 사람들은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또한 세상 삶에는 무거운 짐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세상 근심 걱정에 짓눌려 한시도 편안히 지낼 없는 

인간들의 모든 짐을 주님께서 대신 짊어져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진정 완성된 희년을 만끽하고 사는 

축복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닐 없습니다.



2) 재림시의 주님의 호령 나팔소리는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해방시킴 의미합니다.


[살전 5: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외 함께 있으리라."


구약에서의 제사장의 나팔은 

대적을 무너뜨리고 승리하는데 불려졌는데

신약에서의 천사들의 부는 나팔소리는 

사탄 마귀에 대한 확실한 승리의 선포가 것이며, 

증거가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부활하며 

자들도 죽음에 묶이지 않고 

살아서 공중으로 들림 받아 올라감으로 증명 것입니다.


살아서 들림 받은 성도들은 공중에서 변화되어

죽은 자들이 부활의 몸을 입듯이

죄로 연약한 육체를 벗어버리고 

똑같은 부활의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세상과
육신으로부터의 해방.

이것이 진정 모든 저주에서의 해방이 아닐 없습니다.


3) 천년 왕국에서의 삶이 

세상 희년의 완성된 삶이 것입니다.


[ 20:6] 

"이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1] 첫째 부활에 참여한 성도들은 예수님의 지상 재림  

공중에서의 어린양 혼인잔치를 끝내고 땅에 다시 내려와 

천년 동안 주님과 더불어 노릇하며 세상을 다스릴 것입니다.


때가 영육간의 희년의 완성이 됨은 

세상에 마귀가 없음으로 죄가 없어지게 됩니다.


천지창조 때와 같은 

아담과 하와 와 같은 삶이 재현될 것입니다.



[2] 부활로 이미 육신이 변화 성도들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년을 것입니다.


그때는 모든 인생의 짐이 벗겨진 가운데 진정한 행복을 누리며 살게 것입니다.

질병도 노쇠도 죽음도 없는 삶을 이 땅에서 다시 한번 누리고 살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셨던 모든 능력을 지니고 것입니다.


영생체와 능력을 지닌 성도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완전히 개발하고 사용하며 

하나님의 땅을 정복하라 하신 문화 명령을 완성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존재를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발휘할 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때문에 마귀에 눌려 연약함 가운데 살게 되었지만 능력을 

회복한 때는 영의 세계도 물질세계도 관장하며 살게 것입니다.


인간의 완전한 완성 모습으로서의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희년의 마지막 목적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믿어 우리 모두 희년의 완성에 동참하는 

택함 받은 자들이 같이 되십시다.







“율법과 복음” 
[마 5:17]



오늘날 신앙생활의 특징은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신으로 마감하는 풍조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은 깊어지면 더욱 주님을 닮아가야 하는데 
반대로 세속을 닮아 가는 이유는 
신앙이 세상에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죄의 뿌리는 깊고 
신앙의 뿌리는 얕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본래 신앙의 뿌리는 하나님께 있었고 
죄의 뿌리는 마귀에 있음으로 
당연히 신앙은 죄의 뿌리보다 깊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신앙의 뿌리인 하나님을 제대로 찾게 하여주지 못할 때 
신앙은 표류하게 됩니다. 

왜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날까요? 

이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살펴봄으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셨을 때는 
인간의 삶의 기준은 양심에 있었습니다. 

양심은 하나님의 속성을 닮은 마음으로 항상 기준이 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바른 양심만 가지고 산다 하여도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지 속에 죄가 들어오면서 
하나님의 영이 떠난 영속의 양심은 
비대해진 죄성의 혼에 눌리면서 
올바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혼의 의지가 선악을 구분 할 수 있는 법을 
아스라엘 민족을 택하여 수여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한 
인간은 다시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었는데 
육신 속에 욕망이 죄의 중독으로 커지면서 
도저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타락한 죄인의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자력으로는 양심도 계명도 지킬 수 없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보내어
죄인 된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면서 
죄인의 신분을 바꾸어주시고 
이에 맞는 새 기준인 복음을 내려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신앙은 복음의 시대가 된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은 죄 씻음을 받았고 거듭났으며 
성령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사는 
거룩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이 것이 하나님의 뜻이자 구원의 완성 계획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듭난 것은 영이요, 
혼과 육신은 양자로서 붙어 갔다는 데 있습니다.
즉, 거듭난 영 속에 죄성과 
욕망이 한 지체 속에 머물고 있는 현상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사역 중에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사역이 바로 “성화 사역”입니다. 

성령님은 육신의 소욕은 다스려 주시지만 
혼의 죄성은 진리를 가르쳐 주심으로 
개심하도록 인도하여주십니다. 

이 같은 성화과정에서 
성도인 우리들은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계명에 비추어 
더욱 죄에서 떠나 성결의 자리로 나아가야만 하는 
우리들의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1. 율법의 역할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기준”
율법이 있기 전에는 양심이었으며
율법이 수여된 후로는 계명이었습니다.

죄는 양심보다 강하고 죄성은 본성보다 강하기 때문에
인간은 한번 죄에 중독된 이상 죄가 인간의 삶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을 택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셨는데
이들이 번성하기 전까지는 노예라는 신분과 환경으로 
죄 된 생각과 죄 된 욕망이 분출되지 않도록 
바로 왕의 압제로 막아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출애굽을 하면서 자유를 누리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야 할 하나님 나라의 법이 필요하였습니다.

이를 율법을 모세를 통하여 내려주셨는데
이것은 크게 세 분야로 나눠집니다.

[1] 도덕법
이는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지켜야 할 
기본적 윤리강령입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십계명이며
이 계명은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따른 것이므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지켜야만 하는 불변의 법입니다.

[2] 의식법
종교생할에서 지켜야 할 제사법과 성결법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짓게 하시고
여러 가지 제사법과 제사장 및 성도들의 행실 등을 규정하여
하나님께 나오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의식법은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여 오시기 전까지 예표하는 의식이므로
주님께서 오신 다음에는
실질적인 제사의식은 바뀌어지게 되었습니다.

[3] 시민법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바른 규범으로 주어진 것으로 
재산법, 결혼 및 이혼법, 보상법, 민사 형사재판법…… 등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법은 시대와 생활 수준에 맞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과학, 문명, 인구, 문화, 제도가 바뀜에 따라
변동되는 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이 다소 변경될지라도 
그 법에 담긴 원리나 기준만은 계속 적용되어야 바람직한 법입니다.

이 같은 성문법 외에도 
유대인들에게는 소중히 여기는 구전법인 “미쉬나”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모세가 아론에게 구전으로 전하고 
아론이 그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그리고 12 지파에게, 
선지자들과 교법사들에게 전하여 내려온 것입니다.
마지막 구전의 완성은 
힐렐의 가문에서 오랜 구전을 성문화한 것으로 
주전 66-70년 경 유대민족의 전통으로 확립되었습니다.

이 구전은 바리새파의 소산으로 
바리새인들은 이 구전까지도 철저히 지킨 율법주의자들이 되었습니다.



1) 율법은 죄를 구분하고 죄인을 형벌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율법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을 정의롭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로 세우며 
보존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있기 전 백성들은
무엇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죄가 되며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는지를 잘 알지 못하였으나
도덕법, 의식법, 시민법을 통하여 
올바른 신앙생활과 삶의 바른 규범을 알고 지키게 된 것입니다.

또한, 이를 어겼을 경우 
율법의 판결은 매우 엄중한 것으로서 
형벌의 두려움으로 범죄를 예방하는 역할을 동시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법이 범죄를 다 몰아낼 수 없듯이
구약시대에도 죄는 날로 늘어갔으며
이후에는 법을 집행하여야 하는 지도자들조차 타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오늘날에도 법보다도 주먹이 앞서듯 
과거에도 법보다는 욕망이 앞선 인간의 연약함을 볼 수 있습니다.

약이 많아지면 병도 많아지듯이 
율법도 많아지면서 죄도 더욱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자력으로는 죄를 다스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2) 율법은 세상 최후의 심판 때 회개하지 않는 자들의 정죄에 대한
절대적 기준의 역할을 합니다.

율법은 심판주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수여하신 것이기 때문에
마지막 심판 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성도들은 주님의 보혈로 죄를 용서함 받았기 때문에 관계가 없지만 
충분히 회개치 않은 자들이나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살지 못한 성도들과 불신자들은
율법의 기준에 의해서 죄가 규명되고 심판 받게 됩니다.

특히, 십계명은 심판의 주 된 기준이 될 것입니다.
십계명을 모르고 살고 있는 불신자들은
탐심의 우상숭배로 인하여 큰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믿는 자들 또한 탐심이 우상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2.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


율법은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은혜의 계시였으므로 
죄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를 알려주는 반면 
죄의 대속은 동물의 제사법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본인의 죄는 완전히 씻음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사함과 구원 면에서 율법은 일시적일 수 밖에 없으며
죄가 더욱 증가함에 따라 
율법으로는 더 이상 죄의 문제를 처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필요가 있게 되었으며
죄를 짓지 않게 하기 보다 죄 자체를 끊어버려야 하는 
구원대책이 절실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죄인 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심으로
의의 자녀로 신분을 바꾸어 주셨으며
짐승의 피로 제사 드리던 율법의 제사법을 폐지하시고 
스스로 제물이 되어 우리의 죄를 속죄하신 것입니다.

처음부터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다면 좋았을 텐데
하나님께서는 왜 구약의 율법시대를 지나게 하셨을까요?

이는 인간이 발전되어가는 변천과정에서 죄도 따라 발전 및 변천되어지기 때문에
시대 및 환경 속에서 짓는 죄가 무엇인지를 구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죄와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을 깨달았을 때 
구원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바라보게 되며
형벌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아야 구원의 고마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자체는 구원을 주지 못하지만 
인간의 정죄의 당위성과 구원복음의 필요성을 인식시켜 
복음으로 인도하는 인도자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한 역할을 다한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의 시작은 율법의 한계에서부터 출발되며
죄사함과 구원의 완성은 천국을 계시하여 주는데 
무척 희망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의 성도들의 삶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또한, 천국에 들어올 경건한 자들을 
정한 숫자가 차기까지 얻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들어와 구원받을 자의 숫자도 거의 찼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한 자들이 많이 생기자 
천국에 대한 계시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애굽에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나라로 계시가 되었듯이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천국이 진정 성도가 살아야 할 곳으로
계시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가나안 땅에서의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의 지켜야 할 법이라면 
복음은 천국 백성들이 지켜야 할 수준 높은 은혜의 법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서 
세 가지 단계를 통과하여 구원에 이룰 수 있게 됨을 봅니다.

[1] 율법 이전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에는 범죄하면서도 죄를 깨닫지 못하고 
양심의 가책만 받고 있었습니다.

[2] 율법이 주어짐
율법이 주어짐으로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죄를 짓지 않으려 시도하지만 
절망 속에 빠져 구원의 상태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3] 율법의 완성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율법에서 자유를 얻고 
의인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율법의 방법은 행함이었으나 
인간의 행위가 온전치 못함으로 복음의 방법 안에서 
믿음으로 율법의 완성이신 주님의 혜택을 값없이 입게 된 것입니다.



3. 율법과 복음의 조화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유지시켜 줍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구약의 “심판의 하나님” “사랑의 아버지”가 되었으며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의 “영적인 신랑”이 되셨습니다.
은혜의 시대가 왔으므로 모든 법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율법을 폐지, 또는 
무용지물로 여기는 신앙풍조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점점 자녀들은 방자하게 되었고
웬만한 죄는 회개하면 모두 용서해 주신다는 
하나님의 관대함만을 의지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복음의 진수는 
사랑과 은혜 안에서 자발적으로 율법을 수행해 나가는 
하나님의 자녀 로서의 삶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산상수훈 은 은혜의 율법이고
주님의 두 계명은 십계명의 요약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한다면 
이는 자유주의적인 신앙관이나 세속주의적인 기복신앙
추구하는 사람들의 신앙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모세가 기준이었습니다.
모든 백성은 모세의 수준까지 자라나는 신앙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기준이 되십니다.
아무리 모세의 신앙과 인격이 훌륭하였다 할지라도 
주님에 비하면 한낮 죄인 된 인간에 불과합니다.

율법의 표본이 모세인 반면
은혜의 표본이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들은 모세의 표본을 넘어서 
주님의 표본에 이르러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율법이 하나님의 백성의 조건이 되었지만
신약에서는 율법은 성화 가운데 이미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결의 자리인 성화 속에는 
율법의 요구가 이미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복음과 따로 폐지되어야 할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라 
복음 속에 기본으로 포함된 사랑의 준수사항 으로 지켜지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이 그 속에 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의 준수 요구로부터는 면제받았으나
율법의 정신만은 우리 삶의 지표로 삼아 
자율적으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겨야 합니다.

복음의 축복 속에서의 신앙의 타락은 
율법의 정신을 잃어버린 데서 오게 되는 결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랑이시지만 
언제나 한 손에는 가 들려져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매는 율법에 의해서 징계로 내려집니다.

이를 알려주시고 올바른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성령님 이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과제는 우리를 주님의 닮은 영화의 수준까지 올려놓는데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셨고 
복음은 예수님을 주셨으며
율법과 복음을 합하여 구원의 완성을 이루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구원을 넘어서 성화를 이루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같이 되십시다.






재창조
[사 65:17] 


하나님은 존재의 근원이시고 모든 의미의 마감이십니다. 
 
그러므로 창조는 존재의 발생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그 안에는 존재의 의미가 담겨져있어 그 의미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반영될 때까지 진행하는 것이 \
 
창조의 목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창조의 주된 의미는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인간의 존재를 
 
얻기 위함임으로 인간을 중심으로한 만물들이 
 
보조로 지어진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영원을 기반으로 창조되어진 만물들은 하나님의 신성을 드러내며 
 
사랑의 아름다운 조화가운데 인간과 더불어 공존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그들의 존재 의미이며 인간에게 
 
하나님의 속성을 더욱 표현하여 줌으로 하나님의 
 
신적인 속성을 개발 할 수 있도록 보조역할을 하는
부가적 목적의미를
 또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지음 받은 인간은 부여되어진 영생의 기간 
 
속에 무한히 진정한 존재의미를 더욱 깊이 깨닫고 
 
하나님의 의도하신 수준까지 자라나야만 하는 
 
의무와 축복이 함께 주어져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1. 창조가 영원히 존속할 수 없게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6일동안 하루하루 새로운 것을 창조하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가 모두 만족하게
 이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마지막날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셨음으로 창조의 총 하이라이트는
 인간 창조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기대를 걸었던 인간은 하나님의 의도와는 반대로
 
 
불순종과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깨뜨리고 말았으며 
 
이로 인한 저주는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이 모두 고통 속에 
 
죽음을 맞이하는 저주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롬 8:22]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맞지 않음으로 
 
죄로 오염된 이 세상은 모두 사라지고 하나님의 또 다른 은혜의
 
구원을 통하여 거룩한 영적 자녀가 된 인간들과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새 창조가 요구 되어집니다.  


2. 재 창조로서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곳일까요?


헬라어에서 새로운 것을 의미한 단어에는 
 
시간적으로 새로운 것을 의미하는 "네오스"와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의미하는 '카이노스'가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 21장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재 창조에 쓰여진 
'
새로운 '이란 말은 '카이노스'라는 단어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재 창조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의 변형이나 갱신이 아니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새 질서의 창조를 의미합니다. 

'카이노스'로 표현된 새 하늘과 새  땅은 죄악과 사망과 
 
고통이 지배하던 현재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구원받은 
 
거룩한 성도들만이 살 수 있는 깨끗한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호크마 요한 계시록 21장 강해)

또한 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성격은 이사야 65:17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1)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곳입니다.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사 65:18]


인간은 죽음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슬플 수 밖에 없고 
 
질병과 배고픔으로 인한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모두는 죄로 인한 저주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이런 것에 대하여는 기억되거나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사 65:17]하십니다. 

그 이유는 내가 완전한 환경에 알맞도록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으니 죽음이 없고 저주가 없으니 배고픔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 땅에서 살면서 누구나 '파라다이스'를 꿈꾸며 삽니다.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은 인간이 그리는 파라다이스와 같은 곳입니다.
 
더욱 나아가서는 성령의 열매로 신령한 성품이 된 성도들과 
 
기쁜 교제를 하는 곳임으로 낙원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2) 마음껏 하고싶은 활동을 하며 지낼 수 있는 곳입니다. [사 65:21-22]


인간의 기쁨은 배불리 먹고 건강한데 있는 것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에 더욱 기쁜 보람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대개 천국에 가면 하루종일 먹고 즐기고 노는 곳이라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천국에서도 우리의 할 일은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일을 우리도 맡아 분담하여야하고 
 
또한 자신이 살고 있는 거처나 주변도 내가 관리하여야만 합니다. 

즉 내가 가장 좋아하는곳 으로 거처를 정하고 숙소를 만들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환경에 천국 양식을 가꿀 수도 있습니다. 
 
백배로 수확되는 천국의 맛있는 열매를 재배해서 먹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서로 나누어가며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지낼 수도 있습니다. 
 
이웃과 어울려 더 좋은 공동 놀이터를 개간할 수도 있습니다. 

천국의 재료들로 지어지는 건물과 도시는 망치와 못으로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능력에 의해서 
 
말과 능력의 손재주만으로 지어질 것입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이겠습니까? 

우리도 하루 일이 끝날 때마다 
 
 "보기에 좋았더라."하면서 지낼 것입니다.  


3) 신령한 교제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v.25)


이 땅에서는 인간과 인간과의 교제만 가능합니다.
 
 
다른 생명체와는 충분한 교제를 할 수가 없습니다. 

더우기 물질의 교제의 한계는 
 
영이신 하나님과의 교제가 실질적으로 불가능한데 있습니다. 
 
그러나 새하늘과 새땅에서는 모두가 신령한 존재가 됩니다. 
 
같은 세계에서 같은 이해와 같은 사귐이 있는 
 
고차원의 존재들로 변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과도 보고, 듣고, 모시고, 대화하고, 기뻐하고
또한 각종 천국의 영물들과도
 대화와 그들의
재미있는 속성을 사귀며 나눌 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실 때는 그들 속에 하나님의 천만가지 아름다운 
 
속성 중 한 가지 씩을 다 넣어주셨기 때문에 서로 좋은 속성들이 나타나면 
 
신기하기도, 기쁘기도 하면서 서로 공유 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동물들을 먹이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며 
 
동물들은 인간을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다같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피조물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화평은 사랑할 때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사랑의 범주와 높이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의 범주까지 
 
이르러 만물을 품에 안을 수 있는 화평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3. 재창조 되어지는 새 하늘과 새땅은 천국과는 다른 곳입니다. 


현재 현존하는 천국은 영혼의 중간기 쉼의 처소로서 
 
하나님께서 재창조하시기 전까지 머무는 장소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백보좌 심판이 시작되면 이 땅도 하늘도 모든 세계도 
 
다 없어지고 오직 우주 공간에 심판대만 놓이게 됩니다. (계20:11)

하나님의 모든 심판이 죽은 자 산자를 막론하고 다 이루어지면 
 
그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어 생기게됩니다. 
 
그동안 죽은 자들은 천국 또는 지옥에 머물러 있었으나 백보죄 심판을 거쳐 
 
죄인은 영벌의 장소로 성도는 새 천지로 옮겨갈 것입니다. 
 
이때 성도들에게 오는 변화가 완전 신령한 영, 횬, 육으로의 부활의 변화입니다.

 우리가 현재 죽어 구원받아 천국에가도 신령한 존재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다만 부족한 것이 있다면 육신의 부활이 함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과,
 
영혼이 죄성으로 인하여, 완전 영화 단계를 이 땅에서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천국엘 가기 때문에 성령님이 완전히 임하실 완전 충만은 
 
다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백보좌 심판시 모든 영혼이 다시 부활의 모습으로 설 때에는 
 
첫째, 부활을 이루며 살았던 천년 왕국의 존재시보다 
 
더욱 완전한 신령한 모습의 존재가 되어 살 것입니다. 

이전까지의 천국의 개념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까지 
 
구원받은 영혼들이 모이는 낙원이며 재림시 사탄을 결박하여 
 
무저갱에 가두고, 주님을 죽도록 충성한 성도들이 
 
다시 주님과 더불어 이 땅에 천년동안 통치하러 
 
내려올 때까지의 머무는 처소란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이에 하나님의 백보좌 심판이 끝나면 마귀와의 싸움도, 대치도 없어지기 때문에 
 
영원히 마귀의 존재가 나타나지 않은 세계, 그 세계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며 
 
죄가 영원히 없어지는 세계가 바로 재창조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4. 재창조의 주역은 예수님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지는 사역입니다. 


태초의 천지창조는 하나님께서 주역이 되어 이루어진 사역이며
 
 
성자와(요1:3)성령은(창 1:2) 이 일에 동참하시어 이루어진 사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재창조는 구원 사역의 연장이자 완성임으로 구속 사역의 주인공이자 
 
집행자이신 예수님께서 주관하시는 사역이 될 것이며 성부 하나님은 
 
심판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시며 성령님께서는 
 
온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사역으로 동참하실 것입니다. 

특히 재 창조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탄과의 
 
영적 전투와 처벌 문제가 선행되어야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하심과 사탄을 영원히 지옥에 가두는 사역을 
 
직접 지휘하시는 분인 예수님의 최종사역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성도들의 각 행위에 따라 상금을 주실 것이요,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통하여 신부된 성도들과 새하늘과 새땅에서의 삶을 
 
함께 영위해 나가시는 신랑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환경도, 사역도, 
 
유업도 함께 관여하실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계획하시고, 

성자 하나님은 실천하시고, 성령 하나님은 모든 것을
새롭게 완성 하시는 일로
함께 동참하실 것입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이 땅에서 우리에게 지상 사역으로
 
구원을 보여 주셨지만 그것은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사명의 일부에 속한
작은 일에 
불과할 뿐이며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회복하신 예수님은 
 
천상 사역의 거대한 프로르렘을 진행하시고 계신 영의 세계의 주인공이십니다.   

성도는 구세주 예수님만을 국한하여 주님을 섬기기보다 우리 사후 세계의 
 
총 주인공으로서의 재창조 주역으로서  주님을 기대하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5. 재 창조에 대한 소망을 갖고 사는 성도들의 자세
 

1)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며 살아야합니다. (벧후 3;11)


우리는 약혼한 처녀와 일반 처녀와는 사고와 행실이 다른 것을 보게됩니다. 
 
그 이유는 약혼한 예비 신부는 신랑을 생각하고 시댁을 생각하고 
 
시댁의 분위기와 수준에 맞추어 살아야 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기쁨은 그녀의 소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모두 예수님의 예비된 신부들입니다.
 
주님의 수준으로, 천국의 분위기로, 새생활을 할 수준에
맞게 지금부터 준비해야만합니다.
 
 
결혼이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듯,
천국도 죽으면 그냥 가서 사는곳이 아닙니다.
 

가야할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의 삶입니다.
 
 
세상을 사랑할 때, 신부의 신분은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그리며 살아야합니다. 

  

2) 예수님의 은혜와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합니다.(벧후3:18)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는 것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는 서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전자는 체험을 주로 여기면서 느껴지는 감정이고, 
 
후지는 주님에 대한 모든 말씀을 읽고 지식적으로 깨달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사랑하는 연인을 만날 때 성숙하게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을 버릴 수 있는 희생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극치는 자신의 포기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자신을 포기하신 분이십니다. 
 
그같은 사랑을 느끼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 십자가를 바라보아야합니다. 
 
6시간을 고통중에 달리시어 돌아가시는 모습을 항상 기억하고 살아야합니다. 

또한 지식은 인간을 성장시킵니다. 인간은 양식으로 
 
성장되는 아니라 지식으로  성장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격체이기 때문에 인격이 모자라는 육신은
 
아무리 커도 어린아이로 취급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의 겉사람은  커도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속사람은 
 
여전히 어린아이라 영적인 구실을 제대로 하지못하고 있음을 봅니다. 

 사람은 관심 있는 것에 대하여 파악을 제일 많이 하게됩니다.
 
현재 우리의 관심은 세상입니다. 따라서 죄악이 성장 할 뿐입니다.   
 
그러나 새 하늘을 바라보는 성도들의 관심은 주님이어야 합니다. 
 
그때 성령의 열매와 은사로 신령하게 자라나게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을 구세주로, 주인으로, 
 
세례주로, 신랑으로, 심판주로, 사역의 주관자로, 재림주로, 인도자로, 
 
처소 예비자로, 영적 전투의 대장으로, 영생을 주시는 분이요, 
 
상주시는 분으로, 스승이요, 재장조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부적으로 깨닫고 주님과 함께 동참하며 살 때, 
 
재창조에 대한 성도들의 바른 신앙적인 삶이 될 것입니다. 
 
다같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으로 바른 신앙관을 정립하고 
 
사는성도들이 다같이 되십시다.  











 



   
“사도 바울의 4차 선교여행”
[롬 15:23]


사도바울의 일생을 요약해 보면
A.D. 1년에 출생하여 6세부터 율법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10세가 되자 예루살렘으로 상경하여 당대의 최고의 랍비였던
가말리엘의 제자로 학문과 율법을 공부하였습니다.

공부를 끝낸 후 그는 다시 고향 '다소'로 돌아가 있었으므로
주님의 공생에 기간 동안에는 (A.D. 27-29) 주님을 대하지 못하였다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신흥 그리스도교의 부흥이 일어나자
이단으로 정죄하고 박해에 선두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가 다메섹 선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회심한 때는 A.D. 34년경이며
아라비아에서 3년간의 수양을 끝낸 후 '다소'로 은퇴하여
7년 동안 준비하는 가운데 바나바의 인도로
'안디옥' 교회로 가서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A.D.44)

그 후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선교사역으로
다음과 같이 네 차례에 걸친 선교여행을 감행했습니다.

[제 1차 선교여행]
바나바와 함께 구브로 섬과 소아시아 지역을 1차 순방하였습니다. (A.D. 47-40)

[제 2차 선교여행]
실라와 함께 아시아와 유럽을 전도하였습니다. (A.D. 49-52)

[제 3차 선교여행]
아시아와 에베소를 중심으로 유럽까지 확대된 사역을 하였습니다. (A.D. 53-57)

그 후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A.D. 58)
가이사랴에 투옥되어 2년간 연금생활을 하였고 (A.D.59-60)
그 후 로마로 후송되어 1차 투옥생활을 하다 (A.D. 60-63) 다시 석방되었습니다.

[제 4차 선교여행]
서바나를 거쳐 그레데, 밀레로에서 아가야로 사역하다 (A.D.63-66)
니고볼리에서 다시 체포되어 로마로 후송된 후 순교하였습니다. (A.D.67)


1. 제 4차 선교여행에 대한 근거


사도행전은 사도바울이 A.D.61년 로마 감옥에 투옥된 후,
2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면서 복음 사역을 한 것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행 28:30-31)

그러나 딤후 및 목회서신서를 보면 바울은 1차 감금 후 풀려나서
한 차례 더 광범위한 순회선교사역을 행한 후
다시 투옥된 사실이 제시되어있습니다.

또한 [롬 15:23]에 서바나로 가기를 간절히 사모한 것으로 보아
4차 선교사역은 서바나를 시점으로 하여 시작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세 가지의 예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1] A.D.96년경 로마의 클레멘트의 기록에 나와있습니다.

“그는 동방과 서방에 복음을 전하며
전 세계에 의를 가르치며 서방 경계에 이르렀다.
통치자들에게 증언한 후 그의 믿음에 당연한 명성을 얻었다.
이와 같이 그는 세상을 떠난 것이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여기서 ‘서방경계’란 로마라는 설이 있으나
클레멘트 자신이 로마시민으로 로마에서 편지를 쓰면서
그곳을 서방경계라 일컫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는 '서바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2] A.D.170년경 무라토리 정경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누가는 데오빌로 각하를 위해 이루어진 일들에 관하여
그의 앞에서 상세히 편집하였다.
그것은 두 가지 사건 즉, 베드로의 죽음과
바울이 로마를 떠나 서바나로 향한 일을 같이 생략하면서
상세히 보인 바와 같다.” (Muratorian Canon)


3] 역사가 '유세비어스'의 (A.D.263-340) 증언에 이런 기록이 있음을 봅니다.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고 선교의 여행에 다시 오른 후
이 성에(로마) 두 번째 들어가 거기서 그의 생애를 순교로 끝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 옥중생활 중에 그는 디모데후서를 기록하고
그의 처음 변호한 일과 임박한 그의 죽음에 언급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일단 석방되어
먼저 숙원의 처소인 서방 서바나에 가서 전도하고
다시 동방으로 가 전도하면서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를 기록하고
재차 체포되어 로마에 투옥되어 디모데후서를 기록한 후
순교하였음을 봅니다. (이 상근 목회서신 총론)


2. 제 4차 선교여행의 경로


2년 동안 로마 감옥에서 전도하였던 많은 군인들과 가족들은
바울에게 호의적이었으며 그에게 좋은 정보들을 전하여 주었을 것입니다.
그 중 한 가지가 바울의 석방에 대한 정보였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에 편지를 디모데를 통하여 보내려 했을 때
자신의 일이 곧 잘 풀릴 것 같아서 디모데는 곁에 남겨놓고 대신
에바브로 디도를 보낸다는 서신을 띄었습니다. (빌 2:23-24)

곧 석방된 바울은 디모데와 디도를 동행하고
숙원의 땅인 서바나로 가서 사역을 하였는데
전설에 의하면 그 곳에 2년간 머무르면서 사역하였다고 합니다.

서방전도를 마친 바울은 다시 동방전도를 돌아볼 의향으로
디도와 더불어 그레데를 방문하였습니다.
당시 그레데의 현황은 교회가 상당히 혼란스럽고
교회내의 질서와 바른 신앙관이 결여되어있었으므로 디도를
그 곳에 남겨 장로를 세우고 바른 신앙관과 윤리를 세우도록 하였습니다 (디1:5).

이어서 그는 밀레도를 방문하여 그 곳에 병든 “드로비모”를 남겨두었습니다.
드로비모는 에베소 출신의 바울의 충실한 동역자였으며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울 때 에베소 교인들의 헌금을
예루살렘까지 운반한 자입니다. (행 21:29)

그런데 그가 건강이 좋지 않아 병든 몸이 되자
밀레도에서 요양하며 간간히 사역을 돌보게 하였습니다.

그 후, 골로새와 에베소를 방문하여 '디모데'
그 곳에 남겨두어 그 지방의 전도를 맡게 했습니다. (딤전 1:3)
또한 드로아를 지나면서 그 곳 “가보의 집”에 외투를 남겨두고, (딤후 4:3)
마게도냐를 방문하여 고린도에 “에라스도”를 남겨두었습니다. (딤후 4:20)

참고적으로, 에라스도는 고린도 출신으로 디모데와 한 팀으로
바울의 전도사역에 일익을 담당했던 일꾼입니다. (행 19:22)

그 후 자신은 과동할 예정으로 “니고볼리”로 향하였습니다. (딛 3:12)
그리고 그 곳에서 바울은 로마 관원에게 재차 체포되어 로마로 호송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디모데 전서는 에베소를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
마게도냐 지방에서 디모데전서를 써 보냈으며
'디도서'는 아가야 어느 지방에서 니고볼리로 향할 무렵에 쓴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디모데후서'는 로마 옥에 두 번째로 투옥된 후 기록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과정은 서바나에서 2년과 서방 전도 1년을 합하여
3년간의 사역이 4차 선교여행의 기간으로 보이며 (A.D.63-66)
감옥 투옥 후에 모든 사역을 마치고 순교하였습니다.(A.D.67)

그가 형장을 향하여 걸어갈 때 마치 고향에 가는 사람처럼
환한 얼굴에 기쁜 모습을 하고 갔다고 합니다.
그에게는 천국이 영원한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3. 제 4차 선교 사역의 바울 신앙의 특징


제 4차 선교사역을 마무리 하면서 그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분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하여 권면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은 군사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딤전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딤후 2:3-5]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사도바울은 복음전도를 영적 싸움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수 없이 받은 박해에 근거한 것입니다.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는 반드시 마귀가 점령하고 있는 지역이라서
많은 대적과 해가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먼저 영적 전투에 참여하는
예수님의 모집된 군사로서의 자신의 신분을 확립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면 군사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1] 명령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전투는 항상 상부 전략의 지시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병사는 전쟁터의 상황이나 임무를 알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영적 전투에 대한 상황을 일일이 모릅니다.
다만 명령에 따라 움직일 뿐입니다.

[2] 군사는 충성으로 그 나라를 위하여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이미 영적 전쟁은 주님께서 2천년 전에 모두 싸워 이기셨습니다.
나머지 지역 전투만 우리에게 남겨져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마귀의 세력을 물리치는 사명의 충성은
장차 하늘나라에서의 상급과 훈장으로 보상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면류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인은 후사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디도서 3:7] “무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구원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신분은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1]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

이는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주어지는 신분입니다. (요 1:12)
자녀란 부모 밑에서 주어지는 은혜와 혜택을 입고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구원의 일반 은혜를 받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2] 하나님 아들의 신분

이는 자녀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위하여, 말씀을 지키고 살 때 주어지는 신분입니다.
즉, 원수를 사랑하기까지 자비할 때 아들의 자격이 주어진다고 하였고 (눅 6:35)
온전할 때 아들의 자격이 주어지며 (마 5:48) '화평케 하는 자가 될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습니다. (마 5:9)

자녀는 혈연관계에 의해 성립됩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일을 할 때 주어지게 됩니다.
즉, 하늘에 속한 일을 동역으로 이 땅에서 하고 있을 때
아들의 인정과 대우도 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마지막 단계가 하나 더 있습니다.

[3] 후사의 단계

후사가 되려면 한 가지 더 특별한 조건이 부여됩니다.
바로 “고난”입니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후사는 영광의 존재입니다.
상급인 면류관과 유업인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 받게 되는 상속자입니다.
바울의 신앙관은 후사의 신앙관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세상에서도 일등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에서도 역시 일등인 신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것이 그를 사역에 고난과 위기를 극복하게 만들어 준 동기가 되었습니다.


3) 그리스도인은 승리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딤후 2:7-8]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무든 자에게니라.”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질”'군사의 자질'이지만
“그리스도인의 기질” '경기자의 승부기질을 가져야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 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우리 모두가 다 같은 그리스도인일지라도 구원의 만족도는 다 다릅니다.
세상 일에 연연할수록 천국에서의 삶에는 가치를 적게 두게 됩니다.
그러나 영생에 가치를 두고 사는 사람은
천국에서의 삶의 수준이, 이 곳에서 미리 정해진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맞는 삶을 살려고 노력합니다.

사도바울은 셋째 하늘을 다녀온 후부터는
이 세상에서의 삶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오직 천국을 목적으로 한 삶 만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이 천국을 경험하지 못하였기에
천국 생활에 대한 신비감이 덜합니다.
그럴지라도 사도바울의 간증을 통해 간접경험으로 받아들여
이 땅에서 나의 천국 신분과 지위를 준비하는 삶을 사는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일등용사를 항상 쓰십니다.
여호수아나 다윗, 그리고 다니엘도 모두 일등 용사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일등 용사가 되는 것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신앙생애의 결과는 오직 승리자가 되어야 함을 보여준 것입니다.








성령의 하나님
[요14:16-17]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오실 수 있으신 길은
인간의 영이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입니다.
이것은 죄가 없는 상태에서만이 가능합니다.

죄가 몸 속에 들어오자 하나님의 영은 떠났고,
인간의 영은 죽었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은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으나, 거듭나게 되며는
그 영속에 하나님과의 교제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성령의 하나님은 우리로 예수님이 열어 놓으신
구원의 길로 들어오도록 인도하시고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동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은 죄에 빠질 수는 있으나 죄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죄의 세력은 영의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구원의 길을 가기를 원하고는 있으나, 그길을 갈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죄의 값을 인간은 지불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혼은 영의 길을 자각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혼이 영을 주관 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영은 혼에 속한 부분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혼이 영의 길을 택하기 원할 때, 영의 길로 들어서도록
도와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분이 필요합니다.
그분이 바로 성령님이시고 성령님의 역할이 바로
혼과 육에 속한 인간을 영에 속한 인간으로
변화시켜주시는 일이십니다.

인간은 아무리 능력이 있고 똑똑해도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마치 인간이 아무리 건강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죽음을 부활로, 우리의 죽을 생명을
영생으로 바꾸어 주신 분이 허락하심으로 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주관하시고, 주님의 죽을 몸에
영생을 주신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마찬가지로 혼이 주님을 믿을 때, 그 믿음을 통하여
성령님은 주님께 역사하셨던 능력을
우리에게도 적용시켜주십니다.

인간이 영의 길로 갈 수 있음은 오직 혼이
주님을 선택하는 한 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 결과 선택과 믿음을 통하여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나에게 나타나게 됩니다.

믿음은 구원의 문 밖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에서 문을 열어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어느 누구도 그 구원의 문을 열 수가 없습니다.
그문은 안에서 열어 주어야지만 열려지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문을 여시고 우리를 맞아 들이신 성령님은
우리에게 다섯 가지 면에서 역사를 하십니다.
이같은 성령님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구원의 길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1. 성령님은 보혜사 이시기 때문에 우리와 항상 함게 계시며 도와주십니다.


[요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인간이 죄에 빠졌던 원인은, 죄가 얼마나 나쁜 것인지,
죄를 짓지 못하도록 저지할 도움을 줄 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를 통하여 인간은 단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죄가 없었을 때는 아담에게는
자신의 영생의 삶에 불가능한 것이 없었습니다.
피조물이라는 인식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통하여
인간의 피조물의 한계를 알려 주셨습니다.
죄를 통하여 선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모시고 싶은 인식을 갖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도록 지음을 받았으나
하나님 대신 자기를 의지하고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 결과가 멸망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다시 돌아와
순종할 때, 또한, 창조주 를 하나님 답게 섬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인간이 알 때, 하나님은 땅으로 부터의 삶에서 우리를
하늘의 삶의 영생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깨닫기 까지만 허락하셨지
깨닫고 돌아올 수 있는 능력까지는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피조물의 한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도움은 시작되게 됩니다. 이 깨달음의 자리에 올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다가 도와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이것이 인간이 다시 잃었던 진리를 깨닫는 일이고
진리는 진리의 영 이신 성령님과의 만남을
만들어주는 기회인 것입니다.

내가 진리를 찾고 진리를 따라 사는 한 성령님은
절대로 나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진리와 성령님은 하나 이시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내 안에 쌓이면 쌓일 수록 나에게 오신 성령님은 함께
동행하시며 곁에 계시고, 나중에는 네 안에 들어와 계시게됩니다.
진리는 성령님의 거하시는 집이기 때문입니다.


2. 성령님은 교사이시기 때문에 항상 우리를 가르쳐주십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진리는 인간이 찾으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을 깨달으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죄에 대하여,
구원에 대해서, 하늘나라에 대해서, 그리고 마귀와
영적 전쟁과, 재림과, 심판과 그리고 부활에 이르기까지
다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오직 혼에 매여 이 땅에
육신적인 삶에만 깨달음이 묶여져 살고 있기 때문에
영에 관한 부분은 점점 무지해지고 맙니다.

인간은 죄 중에 잉태하여 태어났기 때문에
태어나서는 육신 중심의 삶을 제일 먼저 살게됩니다.

그리고 또한, 혼과 죄가 지배하는 세상의 교육을 통하여
혼 중심의 삶, 즉 세상 중심적인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다가 삶위 허무와 죽음을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말씀과 체험을 통하여 영적 중심의 삶으로 변화되어집니다.

혼이 영의 세계를 알도록 깨우쳐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영이 말씀으로 자라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은 12제자들에게 영의 세계에 대하여
특히 하늘나라에 대하여 들려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이 어렸기 때문에 아는 것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오순절날 성령의 임재하심을 받고
그들은 아는 것을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말씀의 양식은 우리의 영인 속사람을 자라게 만들어줍니다.
우리의 속사람의 완성이 부활후 천국에서의 모습이 되듯이
 우리의 진리의 깨달음의 완성도 천국에 가서야 이룰 수가 있습니다.

이땅에서의 진리의 깨달음의 한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격과 신분으로 이 땅에서 사는데 필요한 부분까지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 집안의 가정 교사로서 우리가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도록 말씀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3. 성령님은 조명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의
구주되심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요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성령님의 역할의 한계는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예수님의 선포하신 말씀의 법주 안에서만 활동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 활동의 주된 역할은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를
밝히 드러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증인 사역이십니다.

 우리는 귀로 듣고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봄으로 이해의 범주를 벗어나,
놀람과 확신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마치 땅의 만물이 달빛을 받을 때와, 햇빛을 받을 때가 다르게 보이듯이  
해의 역할은 빛으로 남을 비추어 드러나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나타나게 하시고
주님의 구원사역이 얼마나 은혜로운지를 조명의 빛으로 보
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뚜렷한 모습은 용서에 있고,
주님의 은혜가 드러난 현상은 구원의 표상인 십자가에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오셔서 나의 영안을 열어주실 때,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바로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고전 12:3f]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주님은 사역시절에 많은 기사와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이를 보는 사람들 시각에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은 주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으로 보았고, 나머지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예수님이
바알새블의 힘을 덧입어 기적을 일으킨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의 차이점은 같은 신앙, 같은 말씀을 지녔어도
성령의 역사하심의 차이에 의하여 주님을 다르게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메튜헨리' "신앙이 성령으로 역사되지 않고는
그에게 복종하고 의지하여 살아가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주시라 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고전 주석 p.180)

예수님이 구세주이신 것은 머리로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에 의해서 깨달아지는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증인 사역입니다.

 
4. 성령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불의한 것을 지적하십니다.


[요 16:8-11]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동물이 인간을 보는 눈과, 인간이
동물을 보는 것과는 많이 차이가 있습니다.

즉, 동물은 자신이 어떡해야지 유익이 주어진다는 면에서
주인을 이해하고 있는 반면, 인간은
동물의 행동 동기 까지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욥이 고난을 받고 있을 때, 네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각자 알고 있는 하나님을 욥에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닙께서 욥에게 직접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성령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이 잘못 알고 있는
세가지 오류를 지적하시고 바로 세우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1] 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입니다.
 
인간편에서는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죄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의 진정한 죄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죄인들을 용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통하여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길을 믿지를 않고 주님을 부인하고 구원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지은 모든 죄는 주님 안에서 용서되어질 수 있음을 볼 때,
진정 용서되어지지 않는 죄는 용서될 수 있는 죄보다
더 큰 구원의 부인죄 인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님은 제일 먼저 지적하십니다.


[2] 의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매달린 주님을 바라보았을 때에 죄인으로, 심판으로,
멸망으로. 저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자리가 대속으로,
영생으로. 부활로, 영광으로 바라보고 가셨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을 중거하심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셨음을 증거하십니다.
인간이 주님을 못박은 의는 멸망의 의 였음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의 바른 이해가 참 의 임을 알려주십니다.


[3]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심판하여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 바로 너희들도
죽으면 더 큰 불과 유황의 심판에 들어갈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땅에서 벌이 무서워 감옥에 갈까봐 죄를 짓지않고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행위의 죄가 없어도 마음 속에 죄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형의 집행이 죽음 후에 주어질 뿐입니다.
사후의 심판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5. 성령님은 인도자 이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요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인도와 계시는 가나안 땅과 율법이었습니다.
신약에서의 예수님의 인도와 계시는 천국과 복음이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의 성령님의 인도와 계시는 증인과 선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인도하심은 처음에는 이 땅에 백성으로의 삶,
그리고 나아가서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서의 삶, 그리고 마지막은
하늘과 땅에서의 후사로서의 삶으로 진행하고 계심을 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알려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아직도 많은 것이 남아 있습니다. 장래의 하나님의 계획은
지나온 것보다 더 심오하고 깊은 것들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만이 아십니다.
성도들은 마지막 환난에 대해 대비해야합니다.
사탄과의 영적 전투에 참가해야합니다.
주님의 재림에 준비해야합니다.
마지막 심판에 설 수 있어야합니다.
천국의 상급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성도들은 증인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성령님의 마지막 사역은 우리로 증인이 되게 만드는 사역입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한 인간의 삶은 긴 구원의 사슬에 연결되어 있는 한 고리에 해당됩니다.
성령님이 오신 것은 나로 하나님의 세우신 구원의 줄의 대열에
든든한 고리로 매어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권능수여의 의미는 순교의 정신에서 발견해야만 되는 일이기에
권능과, 증인과, 순교는, 하나로 묶여 있음을 봅니다.

오늘도 성령님은 증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이는 그들만이 하늘의 상급을 받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성령님을 모시고 하늘의 상급을 받는
성도들이 다같이 되십시다.









보혜사 (Counselor)
[요 16:7-14]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는 영생체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영의 세계도 물질의 세계도 동시에 다 누리고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때에는 계시적 지식이 필요 없이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세상에 들어오자 진리의 세계는
문이 닫히고 영생도 잃어버리고 혼과 육만이
살 수 있는 죄 된 물질의 세계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인간은 창조 본연의 뜻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사물에 대한 존재의미를 분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에 거짓이 진리를 대신하게 되었고
죄된 욕망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간은 진리를 다시 찾아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회귀하기 위하여 진리를 계시하여 줄 존재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노아를 통하여
새 창조와 새 질서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점진적 진리의 계시를 위하여 구약에서의 약속을 통하여
메시야의 오심을 증거하였으며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는
신약에서의 약속으로 성령님의 오심을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특징은 진리의 영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성육신 예수님의 구속 사역, 그리고 좀 더 구분되어 마지막 진리의
회귀사역으로 인간의 잃어버린 영의 세계를 계시하여 주심에 있습니다.
진리의 회복이 인간 창조존재의 회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1. 성령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세 가지 일을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1)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하여 그들을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요 16:13]


진리의 특징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자
얻은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죄를 더 깊이 알게 되었고,
또 하나는 영생대신 죽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죄는 거짓된 삶을 살도록 만들었고
죽음은 이 세상에서의 두려운 삶과 지옥에서
둘째 사망을 겪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진리이신 예수님을 증거함으로
죄와 사망에서 건짐 받고 영생을 얻는 길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내가 곧 진리요.” 라고
말씀하신 것을 이해 적용 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2) 세상에 대하여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러 오셨습니다. [요 16:8]


죄를 깨우쳐 주는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셨고,
죄를 판정하는 분은 예수님이시며
죄를 회개하고 구원케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죄에 대하여 책망 하실 때에 '자범 죄'가 아니라
주님을 믿지않고 구원을 거부하고 있는' 교만 죄'를 지적 하십니다.

또한 의에 대한 책망은,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것을 깨닫지 못함”에 대한 책망입니다.

세상의 의는 정직, 준법, 선행, 효, 애국심 등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를 벗어난 의가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의일 뿐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의는 예수님을 정죄한 의 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세상적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는 피고요, 빌라도는 재판장이고, 원고는 제사장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재판 결과 주님께서는 사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땐 빌라도와 제사장들은 피고요,
원고는 주님이시며, 재판장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결과, 세상의 심판을 뒤엎고 주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사탄 마귀의 죄가 심판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을 좋아하고
사탄마귀 에 속해 있는 것을 성령님께서는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하여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요 16:14]

주님의 “성령님에 대한 가르침”은 너무 영적인 것이어서
구약과 신약 모두의 하나님 사역이 진행되는 동안
“성령님께서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그것은 사역의 진행상 뒤에서 일하셨기 때문에
영의 세계에서는 세분이 다 같이 함께 행한 것이었으나
표현상으로는 시작의 주 된 부분만 소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천지창조 시 성령님께서는 수면 위에 운행하심으로 생명체들을 잉태시키셨고,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사역 시엔 동정녀 마리아의 잉태, 사역을 함께하심으로
기적을 베푸심, 부활, 등 주님의 사역에 주 된 역할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구원의 완성 단계에서 성령님께서는
하나님과 주님에 대한 속 사정과 “그분들의 사랑과 은혜”에 대하여
더 자세히 우리들에게 알려주시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즉, 태양이 빛을 비추어야 지구의 모든 창조물이
아름답게 드러나듯이 우리의 영혼 속에 성령님의 조명이
비취어져야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아름다운 계획과 준비하신 모습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또한 주님과 주님의 말씀에 대한 지혜를 성령님이 주셔야
우리는 성육신의 의미와 십자가의 죽음 및 부활하심의
성자 하나님의 참된 은혜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가까이 할수록 특별한 지식을 더 많이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짐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를 위하여 성령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 편에서 성령님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을까요?


2. 성령님께서는 모든 구원 사역에 앞서
우리에게 보혜사의 역할을 하러 오셨습니다. [요 16:7]



아기가 태어났다고 해서 그의 인생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성인이 되어 올바른 삶을 살 줄 알아야 인생을 완성 할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주님 안에서 거듭 태어났다고 해서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따라 살 줄 알아야
올바른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앙이 완성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이렇기 위해서는 아기에게 어머니가 필요하듯이 우리에게도
어머니와 같으신 보혜사 성령님의 보살펴 주심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보혜사로 불리어지는 성령님의 호칭을 바르게 이해함으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역할도 온전히 받을 수 있습니다.


1) 보혜사란 “어떤 사람 곁으로 오도록 부름 받은 자” 란 뜻입니다.


이 단어 “파라클레토스” 는 어원적으로
“파라"(곁에) 와 “클레토스” (부르다) 단어가 결합된 말입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오도록 청함을 받았느냐?”
하는 것이 우리에겐 궁금한 부분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부르실 때 '또 다른 보혜사'
(요 14:16) 라고 부르신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헬라어에는 “다른” 이란 단어가 두 가지인데
[1] 알로스: 첫 번째 경우와 똑 같으나 다른 하나”라는 의미이며
[2] 헤테로스: 전혀 처음 것과 다른 어떤것” 이란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성령님을
자신과 같은 "알로스" 즉,다른 분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님께서는 예수님과 똑같은 분이십니다.
똑 같은 일을 하시지만 효능과 방법에서 다르게 하실 뿐입니다.

즉, 주님께서는 육신으로 제한 된 지역에서만 사역을 하신데 비해
성령님께서는 영으로 활동에 제한을 받지 않고
전 세계적으로 확대 사역을 하신다는 것과

주님께서는 일일이 사람들을 만나 말씀을 들려주심으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들려주신 데 비해
성령님께서는 동시에 어느 지역 어떤 사람들을 막론하고
계시와 꿈, 음성, 기적과 이사, 은사를 나누어 주심으로
더욱 천국과 영의 세계를 깊이 계시하여 주신다는 데에 있습니다.

결국 범위는 확대되었지만 우리를 향한 본질은
예수님과 같은 역할을 하시는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대신 성령님을
보내 주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2) 보혜사 성령님의 적극적인 사역은 우리 곁에서
격려하고 권고하여 주시는 역할을
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곁에서 능동적인 역활과 수동적인 역활을 하시는데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언제나 사단 마귀의 공격과 방해를 받아
성도들이 신앙생할을 하기에 낙심과 위협을 겪게 됩니다.

이  반대 세력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이겨나갈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주님께서 떠나신 후 사도들에게는 의지할 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회에 잡혀갔고더 이상
사역을 하지 못하도록 위협과 채찍을 맞고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한 자리에 모여 기도하였고, 이때 모인 곳이 진동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담대히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행 4:31)

성령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은 사도들은 주님을 모시듯 성령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살았기 때문에 더 이상 낙심이나
주저하지 않고 담대히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결과로 각 지역의 교회에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행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성령의 위로란, 성령님께서 격려해 주시고 든든히 서도록 시켜주셨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들 사역의 원동력이 되어주십니다.
이 힘이 우리로 하여금 사역의 고난과 위기, 영적 싸움을 모두 이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사도들을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게 하신 그분의 도우심인 것입니다.


3) 보혜사 성령님의 소극적인 사역은 친구와 같이 항상 동행하며 함께 도와주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제부터는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말씀하셨습니다. (요 15:15)
친구이기 때문에 나의 비밀모두를 너희에게 다 들려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참 좋은 친구를 만나 서로 사귀고
도와가며 지내는 것처럼 기쁜 일이 없습니다.
더욱이 주님을 친구로 삼았던 사도들은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그런데 사도들이 영으로 거듭 태어나자
육신의 친구대신 영의 친구가 생긴 것입니다.
육신의 친구는 만나야지만 함께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의 친구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같은 기쁨은 영으로 나에게 오신 성령님께서 만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시며, 함께 주님의 일을 하시고 도와주시며,
하나님께 우리를 위해 대언하시고 변호해 주시며,
우리를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연단 훈련시키셔서 성장, 성숙하게 자라나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신부가 되도록 자라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님의 성화의 길에서 열매를 맺게 해주심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3. 우리는 우리에게 오신 보혜사 성령님을 어떻게 모셔드릴 수가 있을까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려면 우리의 몸을
성령의 전이 되도록 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이유를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한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육체의 소욕은 =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술수, 원수,
분쟁, 시기, 분냄, 당 지음, 분리,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 등이라 하였습니다. (갈 5:19-20)

이 같은 소욕을 없애기 위하여는 성경에 기록된바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속이 성령의 전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속에 자신의 정과 욕심을 못박은
십자가를 지니고 있을 때에 가능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성령님 오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행 1: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나의 노력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준비로 받는 것이고
나의 욕망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으로 받는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노력으로 받게 되면 소유 개념이 생겨 남용하게 되고,
욕심으로 받게 되면 과시하여 교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나를 쓰시도록
선택하실 때까지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오시면 우리로 오심을 알게 하십니다.


1) 성령님께서 바람과 같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바람과 같이 성령님이 오실 때 숨으로 마음껏 들이마셔
내 속에 가득 채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을 바람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요 3:8]

헬라어로 성령을 “프뉴마”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뜻은 "호흡"내지는 "바람"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임하셨을 때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행 2:2) 하였고
예수님께서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성령을 받으라 말씀하실 때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요 20:22) 하셨습니다.

즉, 주님의 숨을 불어내신 미풍은 성령 강림절 날 임하실 강한 바람의
성령님의 임재 하심의 보증으로 제자들에게 불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바람 미풍을 체험하였다면
강한 성령충만의 바람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풍이 불어올 때마다 마음껏 들이마셔야 됩니다.
나의 영혼육이 성령의 호흡으로 가득 찰 수 있도록
제자들과 같이 들숨을 채워야 합니다.


2) 성령님께서 강물같이 오실 때 마음껏 들이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마실 물을 달라 청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요 5: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라.” 하셨습니다.
이는 성령을 주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우리는 말씀으로 은혜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한 없는 회개와 눈물이 쏟아집니다.
성령님께서는 말씀의 위로로 마음껏 평안으로 채워주십니다.

말씀이 강물같이 선포됩니다.
진리의 깨달음이 넘치고 말씀에 대한 체험과 확신이 생깁니다.
이때 성령님의 조명을 더욱 받기 위해서 말씀을 많이 먹어야 합니다.
먹은 말씀만큼 성령님의 역사가 따르게 됩니다.


3) 성령님께서 불 같이 오실때 기도로 계속 받아야 합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오신 성령님께서는 불 같이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행 2: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에게 임하여 있더니”

성령님의 임재 하심에 바람으로 오심은 “동행과 인도하심”
생수로 오심은 “은혜와 평안함”을
그리고 불같이 오심은 “능력을 통해 사역을 감당 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불이 아니더라도, 바람도 태풍으로,
생수도 홍수로 오실 때는 그 위력도 상당히 큽니다.
그렇지만 불의 위력은 무엇보다도 제일 강합니다.

그리고 영적 전투에서 꼭 필요한것은 불 세례입니다.
이를 위해 금식기도로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늘에서 번개가 칠 때 피뢰침이 번갯불을 흡수할 수
있는 것은 '전류를 흡수할 수 있는 피뢰침'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성령의 불을 받기 위해서는 기도 침이 있어야 됩니다.
“기도 침”이란 한마디로 기도의 영을 말합니다.
나의 혼적인 생각이 아닌 영적인 욕구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영으로 기도를 많이 한다 하였고 
그리고 그 기도를 방언기도라 하였습니다.(고전 14:14-18)
기도는 성령을 불 같이 끌어들이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에게 임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나와 함께
가시적으로 계시는 것 같이 성령님을 대우해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14: 16-17] '성령의 오심'을 “우리의 같이” (메타, v16)
“우리와 함께” (파라, v17) “우리 안에” (엔 v17)
그 분의 위치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성령님과의 관계를 매일 교제를 함으로,
매일 동행함으로, 매일 의지함으로 우리로 어떻게
성령님을 모셔야 됨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는 성령강림절을 맞이하여
성령님을 바르게 모시는 성도들이 다 같이 되십시다.





20


부림절
[에스더 9:22]


각 민족과 나라들마다 기념일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날들은 주로 큰 공적을 이루었던 승리의 날이라던가
민족적 해방을 이룬 날이든가 두고두고 기억하여 지킴으로
당시의 기쁨과 전통을 유지하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키는 절기는 항상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 드리는
특별 섭리에 따른 것입니다.

“부림절”은 유대민족에 대한 축제의 날이기도 하지만
흑암의 세력과 항상 직면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도
영적으로 얼마나 귀중한 날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부림절의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배워
성도 모두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신앙인들이 되십시다.


1.“부림”이란 무엇일까요?

부림이란‘바사’의 말 ‘부르’ (Pur)에서 유래된 말로
“제비 뽑기”란 의미입니다.
‘바사 제국’의 제 2인 자인 하만이
유대인들을 다 진멸하기 위하여 제비를 뽑아
12월 13일을 유대인 멸절의 날로 정한데서 기인한 말입니다.

정월 초 하루에 제비를 뽑아  그달 13 일에- 전도에 조서를 반포하였으니
이는 11개월이나 늦게 날짜가 잡힌 것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며
오히려 유대인들이 진멸되는 날이 아니라
반대로 승리의 날이 되게 하신 날입니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도의 날은 아니므로
성일이라 부르지 않고 “길한 날” 이라고 불렀습니다. (9:22)


2. 부림절이 제정된 배경

부림절 사건의 장본인인 ‘모르드개’는 베냐민지파 기스의 증손으로
많은 학식과 투철한 신앙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더욱이 에스더의 사촌오빠로서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가 되도록
에스더를 학문, 교양 및 인격을 딸 같이 잘 양육하여 성장시킨 위인입니다.

그는 높은 학문에도 도산성의 하급관리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 도성에는 하만이라는 자가 총리로 있어 그가 지날 때마다
모두 엎드려 절하라는 왕의 명령에 따라 모두가 다 순종하고 있었읍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만은 이 같은 신적 경외를 그에게 표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한 분만을 경외하는 신앙은 교만한 하만의 행위를 받아드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하만은 모르드개가 유대인인줄 알고
모르드개의 반항을 빌미로 유대인 대학살을 계획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이유는 하만은 아말렉의 왕손으로서, 과거에 아말렉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을 르비딤에서 기습 공격함으로 서로가 적대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 하나님의 명령에따라 이스라엘의 몇 차례의 공격을 받고
멸절위기에 놓였던 종족이었습니다. 이와같은 원한의 역사를 품고있는
하만은 이스라엘에 복수를 계획하고 유대인 진멸 작전에 나선 것입니다.

이에 왕의 재가를 얻은 그는 정월 초하루에
제비를 뽑아 ‘멸절의 날’이 12월 13일로 정하여 지자
1월 13일 조서반포일로 잡고 페르시아 전 지역에 공포함으로 유대인들은
모든 대적들로부터 도륙, 진멸, 약탈의 대상이 돼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에 모르드개는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재를 뒤집어 쓰고
궁궐 밖에 앉아 애곡하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를 전해들은 '에스더 왕비'는 심히 근심하여 이유를 물은 즉
자신의 민족이 다 죽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몸으로, 더욱이 자신이 유대인임을 숨기고 왕비가 되었는데
지금 와서 자신이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음을 이야기하였으나
모르드개의 한마디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라는 말에 자극을 받아 3일을 단식하고 왕께 나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 당시 에스더의 입장은 왕이 자신을 찾은 지 한 달이 넘었으므로
왕을 만나려면 어전에 나가야만 하는데 이는 왕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들어갈 경우사형을 받아야 하는 법을 어기며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스더와 온 유대인은 먼저 하나님께
3일간 단식으로 자신들의 억울한 사정을 고하였으며
금식 후 에스더는 왕을 뵈러 어전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녹게 하셨으므로
왕이 왕비를 보는 순간 어찌나 황홀하고 아름다운지
무슨 청이든 다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하셨습니다.

이때 에스더 왕비는 함부로 사정을 말하지 않고
하만과 더불어 함께 다음날 정찬에 참석하기를 요구하였습니다.

교만한 하만은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이 심판 받을 자리인지도 모르고 기뻐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날 생각한 것이 ‘모르드개를 어떻게 죽일까’ 궁리하던 중
높은 장대를 세워 그 위에 매달아 죽이기로 계획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날밤 하나님께서는 왕을 잠을 재우지 않으시고
서책에 기록된 모르드개의 과거의 공적을 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실 때는 택하신 사람으로
먼저 드러나 알려지게 하십니다.

오히려 모르드개를 높이라는 왕명을 받은 하만은
자신이 말꾼이 되어 모르드개를 말에 태우고 '이 사람은 귀한 사람’이라고
자신의 입으로 백성 앞에서 외치고 다니는 수치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 이후 왕궁에 불려간 하만은 에스더 왕비의 폭로에 따라
죄악이 드러나고 드디어 자신이 세운 장대에 모르드개
대신 매달려 죽는 운명이 돼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에 하만총리의 자리를 대신한 모르드개는
왕으로부터 새 조서를 받아 오히려 유대인을 죽이려 했던 무리들을
모두 죽이도록 조서를 바꿔 각 도에 시달하였습니다.

역전으로 끝난 유대인 승리는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감사의 날로 바뀌어
12월 13-15일 간 유대인들의 승리의 부림절이 되어 대대로 지키게 된 것입니다.


3. 부림절 날 이루어지는 행사

1) 금식의 날로 에스더를 기념하였습니다.

12월 13일 첫날은 왕비 에스더가 왕에게 도움을 구하러 나가기 전에
금식하고 기도한 것을 본받아 모두 금식함으로
 "에스더 의 날" 로 에스더를 기념하였습니다.

2) 회당에 모여 에스더 서를 낭독하였습니다.

그 다음 14일은 "모르드개 의 날" 로 모르드게 를 기념하기 위하여
새벽에 회당에 모여 에스더 서를 낭독하였으며
이때 모르드개의 이름이 나오면 공경과 감사의 축복의 말을 외쳤고
하만의 이름이 나오면 저주와 비탄의 소리를 외쳤습니다.

더욱이 하만의 열 아들들의 이름이 나올 때면
낭독자가 숨쉬지 않고 단숨에 이름들을 읽도록 되어있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모두 함께 죽임을 당해
일제히 같은 순간에 저주를 받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며
한번에 모두를 물리친것을 기억하기위함이었습니다.

3) 예배와 친교를 하였습니다.


14일 새벽에 에스더서의 낭독이 끝나면 아침에 모여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으며
예배 후에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며
기쁘게 떡을 떼고 서로 예물을 준비하여 주고 받았습니다.


4)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하여 나누어 주었습니다.



15일 아침에는 다시 회당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에스더서를 낭독하였습니다.
그리고 소외된 공동체의 남은 사람들도 돌보기 위하여 각자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생필품이나 양식을 준비해 가난한 동족들을 찾아가 나누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과 은혜를 모두 즐기며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이날에는 특히 축제가 벌어지는 마지막 날로 가장 무도회(부림절 사건),
어린이들의 각종 놀이 및 풍성한 회식들이 이어졌습니다.


4. 부림절을 통한 영적 교훈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사는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당하는 환난이나 핍박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와 간절히 간구할 때마다 그들을 구원하심으로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 드리며 살게 하십니다.

부림절은 12월 15일에 마지막 달로 1년을 감사하며 지키게 하셨는데,
유월절은 그해의 첫달로 1월 10일에 지키게 하심으로
항상 그 해의 첫 시작을 감사로 시작해서
그 해의 마지막을 감사로 마무리 하는 생활을 하게하신 것입니다.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은 의미를 깨닫고 1년 내내 감사생활을 하도록 원하십니다.


1)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려는 것은
대적의 세력이 핍박을 가하기 때문입니다.

에스더가 왕후의 자리에 오른 지 5년이 되는 어느 날,
하만은 왕이 자신의 지위를 높여줌에 따라 온 백성이
자신이 지날 때 무릎을 꿇고 절하도록 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당시 페르시아에서는 무릎을 꿇어 절하는 풍습은
신에 대한 경의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르드개는 그 사실을 알고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일에 대해 에스더서 위경서에 보면 13장 12, 14절에 모르드개가
하나님께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탄원하였다고 합니다.

“여호와는 내가 교만한 하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것은
경멸이나 교만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내 영광을 위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나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선한 일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의 발바닥에도 입맞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어느 인간도 하나님보다 더한 영광을 받기를 원하지 않고

여호와 이외에는 그 누구도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행했나이다”
라고 아뢰었습니다. (메튜헨리주석 참조)

이에 분노한 하만은 모르드개 뿐만 아니라
유대백성 전부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하만이 악한 영의 세력의 한 도구로 쓰여지는 모습을 불 수 있습니다.

[1] 사소한 한 사람으로 인한 개인 감정을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죽이려는 사단의 계략에 가담한 모습입니다.

[2] 그의 비열한 방법입니다.

거짓누명과 중상모략, 뇌물공세로 왕의 환심을 사는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왕께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보잘것없는 백성, 이 나라 민족과 병합되지 않고 각기 모여 사는데
주변에 피해를 주는 종족으로, 그들은 자신의 풍습과 법률만 따르며
언젠가는 반란을 일으킬 종족들입니다.그들을 멸하고 나면
은 일만 달란트를 왕께 드리리이다”

왕으로 보아서는 참으로 잘 하는 일이라고 여길 수 밖에 없습니다.
이로서 유대인 진멸 계획이 시작된 것입니다.
흔히 비방과 중상모략은 사단의 전술입니다.


2)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어둠의 세력과 주관자들에 의해 공격을 받을 시
맞대적하기에 앞서 하나님께 나아가 이 상황을 아뢰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마귀의 계획을 사전에 알고 계시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그 문제를 대처할 예비하심을 이루어 놓으십니다.
이를 모르드개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왕후 에스더에게 종용하였습니다.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에 4:14]

이에 자신의 사명을 깨달은 에스더는
자신부터 시작하여 전 유대인들의 3일간 단식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높으신 뜻과 계획을 따라 순종으로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자세가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자세입니다.

이 같은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단식은 하나님께 똑같이 긍휼을 얻게 되었는데

[1] 에스더는 왕 앞에 나갔을 때에 죽음의 위기가 온 것이 아니라
왕으로 하여금 사랑의 감동을 유발시켜 무슨 청이든
다 들어 주겠다는 마음을 갖게 만들어 주었으며


[2] 모르드개는 하나님께서 그날 밤 왕을 잠을 안 재우시고
궁중 실록을 읽게 하여 자신의 생명을 모반으로부터 구해 준 사람이
모르드개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왕으로 하여금 거짓의 가리움에 있지 않고
진실의 현실을 직접 보고 알게 하신 것입니다.

이 부분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대적과 직접 맞닥뜨리지 않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대적의 공격 바로 직전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도록 막아주십니다.
그 것이 바로 기도의 응답입니다.


3) 위기를 맞은 하나님의 백성은
함께 모여 힘을 합하여 위기를 대처해나가야 합니다.

세상의 풍조는 뇌하부동하는데 있습니다.
즉, 분위기에 휩쓸려 따르는 경향이 많기 때문에 하만을 쫓는 바사국
백성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유대인들은 죽음의 궁지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수산성에 다모여 금식하며 가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세상과 의 사이에서 어려울 때는
이와같이 함께 모여 힘을 합하여야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숫자는 많아도 단결력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숫자는 적어도
주님을 중심으로 한 신앙의 결속이 있습니다.

요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많이 지적 받고 나약한 상태에
있는 것은 서로가 모여 힘을 합하고 기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의 금식기도에 하나님의 응답은 그들로
아말렉 족속 하만과 그 일가는 물론
평상시 유대인을 경멸하고 핍박하던 무리들을
모조리 멸망시키 도록 하여 원수를 갚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7만 오천명을 죽이고도 대적들의 재산에 손을 데지 않은 것은 바로
사심에 의한 싸움이 아니라 영적 전쟁이기 때문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부림절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인 우리에게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의 비결과 여호와의 위대하심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좋은 예증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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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마 5:3-12]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이 지켜야할 규례를 내려 주시고
하나님 나라에 알맞는 백성이 되어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는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을 주셨으며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산상수훈을 그의 백성에게 내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려주신 이 두가지 명령은 따로 따로 여길 것이 아니요,
어느 한 쪽을 택하여 그것만 지킬 것도 아닙니다.
그 이유는 복음이 율법의 완성이며 율법위에 은혜가 있으므로
성도는 율법이 제시하는 기준 이상으로 살아야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핵심이 십계명이듯 산상수훈의 핵심도 팔복과 그에 따른 행위입니다.


1. 산상수훈의 정의


산상수훈이란 주님이 그의 제자들(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천국백성으로서의 삶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산에 오르사
그 들에게 들려주신 교훈을 말합니다.

이 말씀이 너무 가치있는 교훈이어서 '산상보훈'이라고도 불리우며
인간에게 주어질 가장 큰 복들이 기술되어있음으로
'산상팔복'이라고도 불리어집니다.

이는 천국의 대헌장이요, 신구약 전 메시지의 요약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 교훈이 행해진 산은 디베랴 서쪽과 막달라 남쪽에 위치한
완만한 구릉인 "핫틴산"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팔복산으로 불리어지며
그 곳에 '산상수훈 교회'가 세워져있습니다.

산상수훈의 총 주제는 천국백성으로서 마땅히 지켜야할
윤리적, 종교적, "의(righteousness)"이며
이를 위하여 예수님은 세부분으로 나누어 말씀하셨습니다.
즉 서론 부분으로서 마 5:3-12절까지, 본론 부분으로서
마 5:13-7:12절까지, 그리고 결론 부분으로서
마 7:13-27절까지 3장에 걸쳐 말씀하고 계십니다.

서론에서는 천국백성이 지녀야할 기본자세와 그에 따른
8가지 복들에 대하여, 본론에서는 구원의 진리에 따라
의를 지향하는 삶에 대하여 마지막 결론에서는
이 수훈을 지키는 자와 안지키는 자에 대한
축복과 저주에 대하여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2. 산상수훈의 중요성


오늘날 신앙생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피상성''세속성''기복성'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과의 신앙생활과 대조해볼 때, 신앙은 점점
현실위주의 안일함과 단지 행복만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영혼과 천국에 대한 본질은 점점 희석되어져가서 교회생활이
얄팍스럽게 변질되어가고 있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삶의 주체는 세상과 그에 속한 것들이기 보다는
성경이며 핵심은 천국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성경을 인생의 필독서로 보고
매일 소중히 여겨 읽는 경우는 드믑니다.
 더우기 현실의 삶에 바빠 천국을 생각할 틈도 많지가 않은 형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값싼 은혜를 강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값싼 은혜에 젖어 구원을 쉽게 여기고 사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산상수훈을 대할 때, 도저히 나는
저 수준에 도달을 할 수 없다고 좌절하는 마음부터 생기게 됩니다.

산상수훈이 신앙적 윤리적 수준이 높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그만큼 높다고 여겨야만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문제를 풀어주시기 위하여 '중생' '성령 내주 생활'
하고 살도록 성화의 삶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오셔서 우리에게 믿음의 중요성을 알려주십니다.
세상과 천국이 따로 떨어져 있음으로 따로따로 생활해야 되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구원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영접한 이 순간이
구원의 길을 가는 것임을, 또한 천국의 축복은 천국에 가서만 누릴 수 있는
축복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 천국의 축복을 누리는 생활이
시작 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이 축복된 삶을 지금부터 맛보고 살도록
천국시민의 바른 삶을 살게 알려주는 복된 말씀입니다.

주님은 율법과 같이 지키기에 불가능한 복음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습니다.
말씀자체는 불가능해도 이루어질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님의 도우심입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령님과 함께 지낼 때, 주님의 복음의 말씀을  따를 수 있습니다.

즉 초대 교회 교인들의 진정한 믿음 생활과 같이
다시 돌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에 따른 보상은 지금부터 누리면서 시작되게 하셨습니다.


3. 산상수훈의 핵심인 산상팔복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에덴동산 에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 때의 생활이 인간의 삶의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 축복과 행복을 잃어버린 이유는 인간이 무능하고
모자라서가 아니라 누릴 자격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즉 죄있는 인간은 하나님께 속한 것을 관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첫째는 구원이고,
둘째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위해서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것을 누릴 수 있을 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것들로 누리고 사는 삶이 행복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신과 타락한 혼을 만족시키는 쾌락일 뿐,
영에는 아무런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참 행복은 에덴동산의 삶과같이 영,혼,육의 순서의 기쁨으로 살 때,
인간은 이 땅에서 참 행복된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산상팔복을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이 행복을
찾아 살 수 있도록 길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1) 심령이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v. 3)

가난이란 부족하거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마음이 비어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을 모두 포기하고 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심령에 다른 것을 채우면 세상의 것을 비울 수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욥 32:8] "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

전능자의 기운을 받으면 마음을 비우게 할수 있습니다.
이 때에 주어지는 것이 천국을 소유한 축복입니다.
이 것을 우리는 심령천국 이라고 부릅니다.
세가지 천국중 첫번 째 천국입니다.

앞으로 두번 째, 세번 째도 주어집니다.
그들은 바로 천년왕국과 하늘의 천국입니다.
그리고 심령천국이 천국의 시작입니다. 첫번째 복입니다.

2) 애통하는 자가 될 때 위로의 복을 받습니다. (v. 4)

애통이란 마음이 매우 슬퍼 우는 상태를 말합니다.
인간이 언제 가장 슬픕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할 때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가장 사랑하고 인간을 가장 사랑하는 분은 누구십니까?
바로 하나님 이십니다.

애통하는 마음이란 하나님을 잃어버린 아픈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하여 성령님께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통회자복하게 만드십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보혜사 성령님이 내주 하셔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가장 큰 위로가 '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랑의 회복의 위로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가된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습니까?
십자가를 넘어선 기쁨입니다. 바로 후사까지 이루어지는 복입니다.

3) 온유한 자가 될 때 땅을 기업으로 받는 축복을 얻습니다. (v. 5)

기질은 성격이고 온유는 성품입니다.
성품은 성격이 길들여질 때, 생기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성품은 주님안에서 거듭나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예: 사도바울).
이때, 이 땅의 기업이 주어집니다. (에덴동산, 가나안 땅…등).

장막도, 사업도, 사역도, 이 것을 분깃이라고
다윗은 기뻐했습니다(시16:6편).
그리고 천국의 기업은 유업으로 남아있습니다.
이 땅의 기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십시요!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십시요, 배가 부른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v. 6)

육신의 배고픔은 배가 곺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차원의 배고픔이요,
진정한 배고픔은 영적인 배고픔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40일 금식후 돌로 떡을 만들어 먹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이 더 먼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일을 중명한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고후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케하고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사도바울 같이 예수님을 소유한 자가 가장 배부른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신의 배부름은 저절로 해결이 됩니다. (예: 12 제자들)

5)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었을 때, 긍휼의 여김의 복을 받습니다. (v. 7)

인간이 지닌 잣대는 판단의 잣대요,
하나님께서 지니신 잣대는 긍휼의 잣대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처럼 자식을 바라보는
마음의 긍휼의 잣대를 가지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안에서
모두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남이 아니라 가족 입니다.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취하였음에도
하나님의 긍휼로 용서를 받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을 긍휼히여겨 죽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배반한 자녀 압살롬도, 자기를 저주한 시므이도,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간 아내 미갈에게도
원망하지 않고 긍휼하 여겼습니다.
그 댓가를 하나님께 받은 것입니다.

6)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될 때 하나님을 뵙는 축복을 받습니다. (v. 8)

회개는 마음 속에 죄를 씻어 비워줍니다.
그 다음에 청결하게 마음을 유지 시켜주는 것은 말씀입니다.

[엡 5:26] "이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마음 속엔 무엇을 담아두느냐에 따라 정결과 부정이 정해집니다.
매일 말씀을 일고 묵상을 담아주면 청결한 마음이 나를 거룩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을 만나게 되는 기회입니다.
구약에서는 모세가 하나님을 제일 많이 뵈었고,
신약에서는 사도바울이 승천하신 예수님을 제일 많이 뵈었습니다.

하나님을 뵙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동행하고 계심을 의미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진수는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을 뵙는데 있습니다.
말씀이 이를 가능하게 해줍니다.

7) 화평케하는 자가 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축복을 받습니다. (v. 9)           

모든 화평을 가로막고 깨어지게 만드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모든 화평을 이룰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우리가 남들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와 나 사이에 언제나
예수님을 모시고 있을 때만 가능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로 하여금 상대방을 영혼의 차원에서 바라보게 하십니다.
지옥에 갈 것을 생각하면 불쌍한 마음을, 천국에 갈 것을 생각하면
기쁜 마음을 갖게 됨으로 잘 지내게 만들어줍니다.

하나님의 구원에는 세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녀의 단계, 둘째는 아들의 단계, 셋째는 후사의 단계입니다.
자녀는 주님을 영접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만 아들의 단계는
원수를 사랑하고 자비함으로 자격을 얻을 수 있습니다. (눅 6:35-36).
그리고 아들에게는 기름부음이 주어집니다.

8)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될 때에 천국이 주어지는 복을 받습니다. (v. 10)

죄된 생활과 동류화 시키려는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요와 압박을 가합니다.
이에 따라, 예를 들어 다니엘은 사자굴에 들어가게 됩니다.
스데반은 돌에맞아 죽게 됩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의 핍박은 천국에서의  상급의 기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희망과 기쁨을 바라보고 넘어가야합니다.

신념은 현상을 주로 바라보게 하는 반면에,
믿음은 말씀이 가리키는 최종의 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성령님이 신념을 믿음으로 바꾸어주십니다.

심령천국은 천국의 시작이지만, 의의 핍박으로 인한
상급 천국은 천년 왕국과 하늘나라입니다.
더 높을 수록 더 큰 것입니다.

이상 주님이 들려주신 자격을 잊지 말고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성령님과 동행할 때,
이룰수 있음도 아는것이 중요합니다.


4. 산상수훈의 말씀을 따라 살 수 있는 길


구약에서의 율법은 문자 그대로를 받아들여 각자의 힘과 노력으로
지켜 나가도록 주어진 행위계약 입니다.

그러나 산상수훈의 복음은 마음속에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깨닫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루어 나가도록 주어진 은혜계약 입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구약의 율법같이
지키기 불가능한 명령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주님도 성령님의 능력에 힘입어 구원사역을 모두 이루고 마치셨듯이
우리들도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 수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요?

1) 성령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말씀을 매일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말씀이 싫고 따르기가 어려운 것은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육이 죽듯이 곧 지옥에서 영혼이 죽습니다.
오직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구원의 밧줄인 성경말씀 입니다.
말씀의 줄을 매일 튼튼히 잡고 있는 사람은 산상수훈의 말씀은
당연히 지켜야될 하나님 아버지의 뜻임을 알고 따르게 됩니다.

참 은혜는 구원으로부터 느끼는 것이지,
축복과 응답으로부터 느끼는 은혜는 선물을 주시는분 보다
선물을 더 좋아하는 욕심에서 나오는 은혜일 뿐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한번 바라보고 읽기를 원하십니다.

2)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삶만이 성화의 삶을 완성시켜줍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처소로 지음을 받은 곳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을 담지않고 이 세상의 어느 것을
담는다해도 그 영혼을 만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영이 비어있을 때, 혼과 육은 무능합니다. 아담이 영생과 지혜로
살 수 있었던 것은 혼의 능력이 아니라 영의 능력 이었습니다.

욥기 32:8과 같이 "전능자의 기운이 그의 심령에 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나의 삶의 주관자로 모셔들이면
나의 영과 혼과 육은 성령님에 의해서 다스려집니다.
성령님 안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다같이 예수님께서 주신 산상수훈의 말씀을 준행하며 살기 위해서
우리 모두 보혜사 성령님을 더욱 의지하고 복을 누리며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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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은사

[고전 12:4-11]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하나님과 성도는 사랑의 관계이고
주님과 성도는 구원의 관계이고
성령님과 성도는 은사의 관계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 된 구원받은 우리들이 여전히 약하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덧입혀 주셔서
죄에서도 이기고, 세상도 이기고, 사탄 마귀의 세력도 이기고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기 위해섭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바로
성령님께서 각자에게 맞게 나누어 주시는 은사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각자에게 은사를 나누어 주실 때는
그에게 맞는 은사를 허용하실 뿐 전체 은사들은 다 주시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능력을 모두 소유할 수 없는
한계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사를 사용하는 면에서는 서로 보완하여 사용할 때에
성령님의 능력을 보완 완성하여 이룰 수 있습니다.
이 사역을 위하여 탄생하게 하신 것이 교회입니다.

즉, 교회는 성령님의 은사의 집합체이며
가장 강력한 영적인 세력이 집합된 곳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 마귀와 싸워 물리치는 곳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가장 능력 있는 공동체입니다.


1. 은사의 정의

구약에서 은사는 “투브” (좋은 것) 라 부르며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사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은혜와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좀 더 구체적인 축복으로
물질적인 축복 (렘 31:14)과 더불어 영적인 축복(렘31:14)과
구원 (시 27:13)도 포함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신약에서의 은사는 “카리스마”라고 부르고
이 단어는 “카리조마이” 라는 ‘값 없이 주다’ 란 단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값 없이 주신 선물”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영어로 “The gift of the spirit” 으로 표시되며
이는 주님께서 오순절 날에 120문도에게 내리신 성령강림과
후에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내리신 성령강림을 의미하는 말로
성령의 은사들인The Gifts of the Spirit” 과는 구별되는 말입니다.

성령강림 후 사도바울의 성령님 사역과
은사들에 대한 계시 및 확대 해석이 이루어짐에 따라
성령의 은사들은 개별적으로 성령님에 의하여 각각 개인에게 수여되어짐으로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데 쓰임 받는 은사들이 되어
교회의 성장을 이루도록 주어지게 된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고전 12:14-30)


2. 은사의 중요성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로,
은혜는 축복임에 반해 은사는 능력으로 주어지는 것으로서
사역과 봉사활동에 많은 유익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1) 신자 개인 신앙생활에 있어 더욱 깊은 믿음과
주님께 대한 자신감이 생겨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고 싶은
강한 사명감을 갖고 사역을 해나가게 해줍니다.

은사를 받은 성도와 평신도의 신앙 생활의 차이를 말하기를
활과 화살을 가지고 온 시선과 온 힘을 팔에 집중하여
과녁을 겨냥해 쏘아 맞추는 것과
소총을 가지고 겨냥하여 단지 방아쇠만 당김으로
명중시키는 것과의 차이라고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만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역하는 것이 쉽고 편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개인이 지닌 재능과 구분되며
영적인 일을 위하여 쓰여지는 능력입니다.

2) 은사는 서로 협력 보완할 때 더욱 완전해집니다.

은사는 한 사람이 모두 소유하고 있는 능력이기보다는
여러 사람이 나누어 소유하고 잇는 능력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온 몸의 지체가 한데 모여 몸을 이루듯이
각 은사들도 한데 모여 교회를 이루어 나갈 시
사역이 활성화되고 부흥이 일어나
교회성장이 크게 일어남을 말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하심은 먼저 교회를 양적으로 성장시키시며
이어 은사들의 적용으로
질적으로 성숙시키는 경로를 이루어 나가게 하십니다.

은사는 은사를 지닌 곳으로 성령님께서는 인도하시기 때문에
먼저 주의 종이 사명과 은사를 확고히 받게 되면
자연히 은사를 지닌 성도들이 모이게 되고
이어서 다양한 은사들의 활성은 교회를 부흥시키는 계기가 되게 됩니다.

3) 은사는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성령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가랴서 4:6절에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세상에 세워지는 교회의 사역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의 세계에 세워지는 교회의 사역은 할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이루어집니다.

성령님께서 운영하시는 방법이 하나님의 방법이시고
은사로 이루어지는 사역이 영적인 사역인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 나라를 훼파하려는 악한 영들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영분별, 신유, 능력 행함, 예언 등의 은사들은
필수적인 것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은사의 분류

1) 직임을 수행하기 위한 은사들

[1] 사도

사도의 기원은 예수님의 12제자들이나 능력과 지위에 따라 확대되었습니다.
즉,  바울사도 (롬 1:1), 바나바 (행 14:14),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롬 16:7), 디모데와 실라 (살전 2:6)…… 등
그리고 오늘날에는 각 교단 교파의 총회장, 의장, 감독…… 등
하나님께서 주의 종들과 교회 지도자들을 위하여 세워주신 권위자들로
사역방향을 조언, 분쟁 조정해결,
지도자들 교육지도 등을 감당하는 사역자를 말합니다.
이들은 성령님에 의해서 권위가 인정된 사람들입니다.

[2] 선지자

이 사역의 특징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메시지를 전달하는 임무로
죄에 대한 심판과 경고 및 미래의 올 사건을 예언하고
반드시 그가 전달한 메시지는 실현되어야 함을
하나님께서 입증해 주셔야만 하는 사역입니다.

[3] 복음전도자

에베소서 4:11절에 나와있는 은사로 빌립은 전도자로 불렸습니다. (행 21:8)
이는 한 지역에 고정된 지역 사역자가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어디든지 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특히, 두려움이 없으며 말씀 선포에 능력이 수반되는 사역입니다.

[4] 목사

이는 목양의 은사를 받은 사람으로
첫째, 양떼를 신령한 양식으로 잘 먹이고
둘째,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셋째, 어려움에 처한 영혼들을 위로하고 세워주며
넷째, 상한 자, 병자를 싸매고 치료하여 주는 역할을 하는 사역입니다.

[5] 교사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이 아니라 성경말씀만을 잘 해석한
능력으로 성도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주는 은사입니다.

[6] 섬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이 아니라
사역이나 과업을 대상으로 활용되는 은사로
헬라어 “디아스코노스”라는 이 말은 오늘날 집사에
해당하는 말로 교회사역에 열심히 봉사하는 은사입니다.

[7] 다스림

지도자의 은사를 말하며 권위와 직책으로 이끌기보다
자발적으로 헌신하여 목표를 달성하도록
밑에 사람에게 인품의 영향을 주는 사역자를 말합니다.
공감과 신뢰를 불러일으켜주며
보람을 나누어 갖도록 함께 솔선수범하는 사역입니다.

[8] 권위 또는 권고

일종의 상담 은사로서 난처한 입장에 놓여있는 사람에게
억울함을 덜어주고 위로, 격려하며 권면과 조언을 해줌으로
심적, 영적으로 회복을 시켜주는 사역입니다.
특히, 개인 상담에는 말씀과 경험으로
내적 치유를 시켜주는 능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9] 구제

물질에 대한 탐심이 없는 마음에
서로 나누어 사용해야 된다는 마음 가운데서 남을 돕는 은사로
절대 인정받거나 돌아올 보상으로 하지 않는 베풂입니다.
언제나 구제하는 것 외에도 불쌍한 사람을 돕는 헌금을 내는 은사입니다.

[10] 긍휼

권위하는 은사는 사람들을 주로 사랑과 위로의 말로써 돕는데 비해
긍휼의 은사는 사랑의 행동을 통하여 사람을 돕는 은사입니다.
긍휼의 대상은 주로 병자, 장애인, 가난한 자, 노인, 고아,
또한 불신자, 신자 구별 없이 베풀어 주는 마음의 은사입니다.

2) 기적을 베푸는 은사들

[1] 지혜

영적 진리란 연구하여 얻어지기 보다는 성령님과 직접 교통하는 가운데
얻을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하늘에 대한 지식이 열릴 때,
땅에 대한 모든 문제의 해결 방법이 쉽게 발견 되어집니다.
해석이 해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2] 지식

지혜의 말씀이 직접 계시와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지식의 말씀은
객관적인 계시 자료를 파악하고 그 것을
다양한 관계 속에서 적용하는 능력입니다.,
성서 번역이나, 성경강해 등은 지식의 은사를
받음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3] 믿음

일반적인 믿음은 나의 의지에 의해 생겨나는 반면,
은사로서의 믿음은 성경에 기록된 것을 믿는 것을
초월하여 주님과의 구체적이고도 확실한 관계를 성령님께서
베풀어 주심으로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드릴 수 있는 참 믿음입니다.

[4] 병고침

인간적인 수단없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해서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영적인 능력입니다. 특히 불치의 병이나 심한 정신병 등은
건강관리 부실에서 오는 경우도 있지만, 저주로 인한 질병의 영들로 부터
기인되는 경우도 있음으로 주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쫓아낼 수 있습니다.

[5] 능력행함

신유의 은사 와는 달리 온갖 종류의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입니다.
[모세가 애굽사람들에게 내린 재앙, 홍해바다의 갈라짐, 엘리야의 기도로
가뭄과 비가 내림, 엘리사의 죽은 사람을 살려냄의 기적, 주님이 풍랑을 꾸짖음,
오병이어, 사도바울의 엘루마를 저주함으로 장님이 됨…등]

[6] 예언

구약시대에 자주 나타난 은사로 계시의 수단으로 환상과 꿈이
제시 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직접 사무엘에게 들려 주셨듯이
예언자들의 귀에 들려주셔서 미래의 일을 대언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또한 집회시의 갑작스런 성령님의 말씀이나 계시로 임하여
그 즉시 특별 대상에게 주님의 뜻을 전하는 경우도 있으며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들려주기도 합니다.

[7] 영분멸

하나님과 인간과 마귀의 역사함을 구분하여 내는 능력으로
옳은 말과 선행행위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고해도
그 속 마음이 다른 동기로 부터 온 것이면 즉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마술사 시몬, 아나니아와 삽비라,  빌립보에 점치는 여종, 영지주의 이단…등]

[8] 방언

표적방언과[오순절 사도들의 방언) 은사방언(성령님이 은사로 주심)이 있으며
은사방법에는 사적방언과 공적방언이 있습니다. 주로 혼자하는 방언기도에는
 통역이 필요없으며 공적방언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예언의 기능을 가진 방언을 말합니다.

[9] 방언통역

방언의 문자를 일일히 번역하여 전달하는 능력이 아니고
전체적인 의미를 성령님이 깨닫게 하심으로 전달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특히 공적인 방언을 할 경우에는 통역의 은사를 지닌 사람이 필요하나
대개 공적 방언을 하는 사람에게는 통역의 은사도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은사들 외에도 독신, 청빈,
중보기도, 찬양, 축귀…등 여러 은사들이 있으며 각자의
사역 분야에 따라 성령님께서 나누어주십니다.


4. 은사를 얻는 방법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된 세상에서 강건하게
살 수 있도록 주어지는 능력입니다. 이는 죄로 부터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에게는 모두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임재하심과 내 몸 안에서 능력으로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1) 육신의 소욕을 버려야합니다.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 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 속의 마음밭을 성령님께서 임하실 수 있는 토양으로
바꾸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토양은 바로 성령의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마음들 입니다.

성도가 거듭날때 각자에게 은사의 속성은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 속성이 성령님에 의해서 피어날 때는
성화의 수준에 이르게 될 때입니다.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능력을 올바르게 쓸 수 있는
성숙한 자세입니다. 은사는 성화와 더불어 개발됩니다.
즉 성령의 열매와 은사는 보완관계 입니다. 

2) 사모하고(고전 14:1), 구하고(고전 14:12),
 기도해야합니다.(고전 14:13)


인간은 누구나 젊음의 건강과 근육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것은 어린아이 일 때는 누구도 이룰 수 없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성장하게 되면 몸에 관심을 가지고 음식도,
운동도, 지도도 받으면서 강한 체력을 꽃피우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능력도 영적성장과 아울러 말씀도, 실천도,
지시도 받을 때, 나에게 알맞는 영적근육인 은사도
성령님으로부터 부여 받을 수 있습니다.

운동선수들이 특별한 운동에 뛰어난 제능을 가질 수 있음은
자신의 취미와 적성에 맞는 종목을 계속 훈련과 연단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체질도 나에게만 주어진 환경속에서 문제들과
여건에 맞는 분야에 게속 영적 훈련을 쌓게 됨으로
그에 맞는 은사들이 주어지게 됩니다.

성령님은 나의 체질과 속성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주어질
은사부분의 훈련을 환경을 통하여 미리 훈련 시키십니다.
그리하여 그 분야에 대한 은사의 소망을 갖게 하시고 사역의 사명을
깨닫는 동시에 구하는 마음을 통하여 단계별로 허락하십니다.
결국 은사는 활용의 과정을 거쳐 더욱 커지며 강하게 완성되게 됩니다.

3) 성령님께 항상 순종해야합니다.

은사의 주도권은 성령님께 있는 것이지 인간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계획을 모르고 있지만
성령님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인간은 영의 세게에 대하여는
제한 적이지만 성령님은 영의 세계의 주관자이십니다.

은사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마귀와
싸워 승리하는데 있습니다. 이를 위해 나는 성령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사탄마귀는 우리로 성령님보다 앞서 가도록 부추깁니다.
교만으로 성령사역을 전복시키려 합니다.

하루에 1시간이상 성령님께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들게됩니다.
성령님께 순종은 말씀의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매일 매일 말씀 묵상과 실천은 성령님과 동행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성령님은 한번 떠나시면 다시 오시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어떤 댓가를 지불 하더라도 성령님을 놓치면 안됩니다.
오직 순종으로만 나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성령님이 우리안에 오셔서 은사를 베풀어 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성령님을 환영하고 인정하고 모셔들여
성령충만한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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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칭의

[롬 3:24]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가까운 분은 하나닙이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선 만 알때,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악을 알게하는 열매를 먹음으로 선의 세계에서
악의 세계로 빠져버리게 되었습니다.

악의 세계는 선의 세계와는 반대로 불행이 가득한 삶입니다.
이로서 인간은 이중적인 인격의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죄악을 제거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 것은
악의 속성이 온 몸과 마음 속에 혼합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
악을 경험하는 것은 선을 더욱 올바로 알수 있는 기회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천사와 다른 것은 선악을 모두 안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죽음으로 제한을 두신 것은
악의 경험을 제한적으로 허락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타락은 나쁩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타락을 청산하면
더욱 타락과는 먼 올바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이 진정 죄를 싫어하고
타락한 생활을 벗어나 더욱 선한 삶을 살려는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 올바른 구원의 첫 시작이 '이신칭의' 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1. 이신칭의란 무엇인가?


'이신칭의'란 믿음으로 인해 의롭게 여겨짐을 받았다는 의미로
의인의 신분을 얻음으로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에서 벗어난 상태를 말합니다.
죄성을 지닌 인간은 죄를 떠날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상태에서 살게되었습니다.
즉 죄를 짓지않아도 죄의 근원에서는 죄된 생각과 마음을 계속 갖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안지어도 죄의 마음은 심판으로 다스리십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공의의 기준에 의하여 아무리
하나님께 다시 다가가고 싶어도 결국 마음뿐이지
다가가면 심판받아 죽게 되어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되어진 의로 보시기 위하여
대속의 제물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주님만이 인간을 만드신 분이시기때문에 인간 모두를 책임질 수 있으시고,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모든 죄를 다 떠맡으실 수 있으시며
율법을 다 지키신 분이시기 때문에 충분한 의인의 자격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주님을 우리 죄대신 심판받게 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전가시키셔서 대속의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를 보실 때,
죄인이 아니라 주님의 죄 없으신 상태로 율법을 다 지킨
의인으로 바라보게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설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죄를 사함받은 것도 용서함 받은 것도 아닌 죄 자체가 없어진
선 만을 지닌 옛 아담같이 의인이 된 것입니다.

칭의란 죄사함과 용서함과는 다른 말입니다.
죄를 사하여 주었다는 것은 죄지은 것은 그대로 남아있지만
벌주는 것은 용서해준다는 것을 의미압니다.
즉, 벌 받아야 할 근거는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칭의는 벌을 받을 모든 것을 없앨뿐아니라 벌을 줄 수 있는
근거를 아예 없애버린 상태를 의미합니다. 분명히 죄를 지은 죄인인데
의인으로 쥐급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에 사도바울은 칭의의 상태란
어떤 상태인지를 세가지 예를들어 설명하고 았습니다.


1] 법정에서 무죄로 판결을 받은 상태의 경우입니다.

헬라어로 '의로 여기다' 란 단어는 '디아키운'입니다.
'의인으로 취급하고 인정한다'란 의미입니다.

인간이 법정에 서서 심판을 받을시 무죄로 판명이되면 자유인이 되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법정에 재판을 받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가 없는 의인으로의 판결을 내려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된 것입니다.


2] 제사에서 제물을 드림으로 먼저 상태가 없어진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는 부자간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하나님 앞에 법죄함으로
원수간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구약에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제사를 통해 제물을 대신 죄의 댓가로 심판하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물로서의 제물은 그가 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인간의 죄를 담당할 수 있는 자격까지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직접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제물이 되시어 드려짐으로
우리는 죄가 없는 주님의 아들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허물이 완전히 소멸됬음으로 완전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힐라스테리온]


3] 노예제도 에서의 완전 해방을 받은 상태를 말합니다.

속량이란 단어 '아플루트르시스'란 헬라어는 댓가를 치룸으로
완전히 그 상태에서 지불되어 자유롭게 벗어난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죄값을 완전히 치루었으므로 모든 죄와 마귀의 지배에서
벗어난 자유인이 된 우리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로 부터는는 심판을 대신 받으셨으며,
스스로 화해의 제물이 되심으로 아들의 자리에 우리를 앉게 하여주셨으며,
죄의 지배로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마귀의 권세에 대하여
 죄의 삯은 사망으로 모두 지불하여 주심으로 완전히 죄의 노예에서
벗어난 자유인으로 우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칭의는 하나님 편에서의 선언입니다.
우리의 상태가 어떻든 하나님의 선포가 우리에게는 제일 중요합니다.
그 것을 알고 칭의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인 것입니다.


2. 우리는 의롭다 여김을 받기 위하여 어떤 믿음을 가져야할까요?


하나님은 인간을 두가지 방법으로 창조하였는데 아답은
근원이 흙임으로 흙의 속성을 지닌 인간으로, 주님은 근원이 생명인
생령의 여인으로부터 성령님에 의해 탄생하게 하셨습니다.
즉, 육신의 탄생과 영의 탄생으로의 구분이 된 탄생 구조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도 두 구조의 탄생과정을 거칠 수 있으며
육적인 틴생에서 영적인 탄생으로 변화될 수 있게 하여주신 것입니다.


1] 이 과정은 대표와 연합의 원리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어지게됩니다.

아담은 전 인류의 조상이자 인간의 대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의 언약을 우리와 맺으신 것이 아니라
대표인 아담과 맺으셨습니다.

허나 아담이 그 언약을 지키지 않자 죽음과 저주와 영벌이 주어지게 됐습니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았어도 우리의 대표가 죄를 지음으로
그의 후손은 자연히 똑같은 저주아레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 것이 육의 탄생의 비극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하신 성도를 구원하시고자
새로운 탄생의 인간을 대표로 삼으셨습니다.
즉 생령의 인간의 몸에서 성령의 역사로 탄생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흙으로 돌아가야할 죽음의 속성이 없으시고
 육신의 죄성으로 잉태하지 않으시고 성령으로 잉태하셨기 때문에
육의 죄된 욕망의 근원이 몸에 없으신 분이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육의 탄생이 의미가 없어진 것은
곧 죽게 되는 삶이기 때문이며 영의 탄생이 중요한 것은
이 탄생으로 영원히 살수 있기 때문닙니다.

[요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이제 하나님께서는 두 대표를 인간의 조상을 삼으시고
육의 연합으로는 아담의 후손으로, 영의 연합으로는
하나님의 후손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새 생명의 구원의 길을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여 놓으신 것입니다.


2] 아담과의 연합은 우리에게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세상사람들이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려고
이 세상에서 행할 수 있는 것과, 구할수 있는 것을 총동원 해보지만
모두 실패하게 되는 이유는 물질 세계에서는 영의 세계의것 영생을
하나님외에는 허락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오직 자범죄는 줄이거나 없앨 수 있어도
원죄는 자신의 생명 이전의 생명에서 유전된 것이기 때문에
마치 인간이 성도, 체질도, 부모와 달리 할 수 없음같이
죄의 유전도 아담과 달리 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즉, 자의건 타의건 아담과의 연합된 육의 탄생은
아담과 함께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죄 속에서 살다 죄 속에서 죽는 삶입니다.


3] 예수님과의 연합은 우리로 죄의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로 탄생되어 영생을 누리는 삶을 살게합니다.


우리가 육으로 아담과 연합되어 있듯이 또한 영으로는
예수님과 연합될 수 있습니다.
이 연합의 과정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주님 안에서
거듭 태어나는 것이며 이 것은 오직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믿음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예정된 성도들에게만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로만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십자가 위에서
육의 아담과의 연합은 죽어 끊어진 것이며,
부활에 의해 주닙 안에서 영생을 얻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거듭남의 증거가 성령의 내주하심입니다.
즉, 죄에서 멀어진 생활을 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열심있는 삶을 살게 만들고 이 세상의 것을 좋아하는 삶에서
하늘의 것을 좇아 사는 삶으로 바꾸어지게 만들어줍니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연합과 '이신칭의'와의 관계는
총 구원의 과정인 : '예지-예정-소명-중생-칭의-양자-성화-견인-영화'의 과정중
에서 중생을 칭의 로 이어주는 중요역할을 하게 하여 줌으로 이 의식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비로서 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3. 올바른 칭의의 인식은 성화와 영화의 과정을 수반합니다.


칭의로써 인간은 죄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인식을 가질수 있습니다.
이 것은 나의 지적인 인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칭의- 전의 과정인 '-소명과 - 중생의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반드시 성령님의 역사로 인한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진 후에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죄사함에 대한 기쁨만 가질 때에는 지적으로 구원과정을 이해했을 때에
생기게되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어떻게 살까?' 하는
성화의 단계를 찾아갈 수 있는 마음은 성령님에 의해서 주어지게됩니다.

이기적인 마음이 있을 때, 성령님은 능력이나
은사의 대상으로 취급되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명적인 마음이 있을 때는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으로
주님의 은혜를 깨닫게 해주시는 분으로 모시게됩니다.
이때 성화의 길을 가야만하는 성숙함의 의무가 생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이 예수님의 은혜를 고백한 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당신은 당신의 겸손으로 은혜가 무엇인지 확증하셨습니다.
은혜가 당신을 비천하게하고 모욕당하게 하였습니다.

은혜가 당신으로하여금 형언할 수 없는 죄의 짐을, 눈물의 짐을,

하나님의 저주의 짐을 지게하였습니다.

은혜는 당신의 옆구리에서 흐른 당신의 피와함께 흘러나왔습니다.

은혜는 채찍으로 맞은 당신의 그곳에서, 가시로 찔린 그곳에서,
그리고 못으로 박힌 당신의 그곳에서 나타났습니다.

천사들을 경탄케한 은혜, 죄인들을 복되게한 은혜,

마귀들을 놀라게한 은혜, 그것이 당신의 은혜입니다."


칭의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구원받은 은혜에만 만족하고
머무는 세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거나 과연 하나님의 자녀로
더욱 성화의 길을 걸어 내 주 예수님을 닮아가야 되겠다는
십자가의 길을 걷는 참 신앙의 삶으로 나아갈수가 있습니다.

성령님을 모신 바른 칭의의 깨달음으로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노력을 다같이 기울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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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Temple'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만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맨처음 만나는 장소로 예비하신 곳이 에덴동산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에덴동산이 최초의 성전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 처소였던 곳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자 에덴동산은 폐쇄되었고
하나님의 임재는 하늘로 떠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일정 장소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만나시지 아니하시고
개인 개인에게 개별적인 관계를 가지셨습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시고 구원 계획을 다시
세우신 하나님께서는 직접 땅에 내려오셔서 인도하심으로
머믈 처소를 예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 땅에 머므시는 처소가
성소 또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성전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모셔야할까요?


1. 구약에서의 성전의 의미


1)  첫 성소로서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출 25:8)

성막의 식양과 규모 설계는
모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지정하셨고
그 의미는 가장 거룩한 것이 첫째 의미였습니다.

백성들은 정한때에 제사를 지내야만 했고
이는 성결해야만 하는 둘째 의미였습니다.
즉 성막의 기능은 거룩과 성결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성막을 짓게하신 것은 광야생활에서
손 쉽게 함께 옮겨 다닐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성막의 의미=임마누엘의 하나님)

2) 첫 성전으로 솔로몬 성전을 짓게하셨습니다. (심하 7:13)

다윗이 왕이 된후 법궤를 예루살렘에 가지고 와서 장막안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건립할 계획을 세웠으나
손에 피를 많이 흘린고로 아들인 솔로몬으로 하여금 세우게 하였습니다.
육신의 허물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솔로몬이 하나님의 지명을 받고
성전을 짓기 시작한 첫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식양은 다윗에게 일러 주셨습니다. (대상 28:19)

[1] 장소

솔로몬 성전은 예루살렘의 모리아산 으로서
오르난의 타작마당이 있던곳입니다. (대하3:1).
모리아산은 일찌기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 했던곳이며,
'오르난의 타작마당'은 다윗이 하나님께 범죄한 후
회개의 제단을 쌓은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위치의 의미는
헌신과 속죄의 의미를 지닌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2]구조

기본적으로 모세 성막의 구조를 바탕으로 건축되었습니다.
모양은 직사각형이며 세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각의 넓이는 20 규빗(8.9m) 이었습니다.

즉, 낭실과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되었습니다.
이 모든 내부를 정금으로 임혔으며 또 보석으로 전을 꾸며
화려하게 하였고 모든 기물들을 금으로 제작하여
비치하였음으로 황홀하기가 이를데없었습니다.

[3] 기간

솔로몬 즉위 제 4년인 B.C. 966년에 시작하여
그후 7년후인 B.C. 959년에 완공하였음으로
7년에 걸쳐 건축하였습니다.
이어서 왕궁을 짓기 시작하여 13년이 걸렸으며
모두 20년에 걸쳐 성전과 왕궁이 완성되었습니다.

[4] 의미

히브리어로 '헤이칼'이라는 말은 '성전' '성소' ''왕궁'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전과 왕궁의 이중적인 의미로 결합되어있는 이 단어는
신의 신전과 왕의 왕궁과의 어떤 결속관계를 암시해주는 것이며
신과 왕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따라 솔로몬은 20년에 걸쳐 성전과 왕궁을 모두
최고의 것으로 건축 완공하였던 것입니다.


3) 두번째 성전은 스룹바벨 성전입니다. (고레스왕이 선포= 스1:2)


그러나 이와같이 심혈을 기울여 지은 성전일지라도 한세대를 넘기지 못하고
솔로몬 통치 말년에 우상숭배와 타락으로 성전은 재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고
더우기 위기에 처할 때마다 성전의 금,은 을 벗겨다 대적에게 주었으며,
놋제단도 이방 제단으로 개조하는등, 우상숭배하는 왕들로 인하여
상당부분 훼손 되다가 결국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의 침략으로
남유다가 멸망한 B.C. 586년경에 성전이 완전히 훼파되었고
금.은.놋기명과 보물들은 모두 바벨론으로 옮겨졌습니다.

[1] 과정

느브갓네살왕의 솔로몬 성전 훼파 이후 다시 성전을 재건 할 수 있었던 것은
B.C. 539년 바사왕 고레스가 바밸론을 정복하고 모든 속국의 포로민 들에게
유화정책을 실시함으로 인하여 포로들도 각각 고국으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기 때문입니다.

[2] 성전 지대 건축

이스라엘 포로귀환 제 2년째 B.C. 536년에
스룹바벨이(유다왕 여호야긴의 손자이며 포로귀환후 유다의 총독)
전지대 건축의 책임을 맡고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스3:8).
그러나 그 지대의 크기가 솔로몬의 성전보다 훨씬 작았기 때문에
솔로문의 성전의 크기와 웅장함을 익히 알던 노인들은
슬퍼서 대성 통곡을 하였습니다.

[3] 성전 공사의 증단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전 재건 공사의 동참 요구가 거절되자
바사국 관료들에게 뇌물을 주어 성전재건을 중단케 한 관계로
바사왕 고레스 4년(B.C. 536)부터 다리오 제2년(B.C. 520)년까지
약 16년간 공사가 중단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백성들은 낙담과 이기주의로 인하여 무사 안일주의에 빠져
성전재건의 의욕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4] 성전 공사의 재개

그러나 학개, 스가랴 선지자의 책망과 권고로 성전 재건 공사가
다시 시도되었으며 이어 다리오왕의 성전 재건허가를 받고 공사를 시작하여
4년만인 B.C. 516에 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스4:24)

[5] 의미

이 성전도 솔로몬 성전과 같은 장소에 같은 설계와 양식대로 세워졌지만
성전기구들과 모든 것들이 전에 것만 훨씬 못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성전으로 대표되는 권위는 더 이상 왕의 것이 될 수 없게 되었고
전적으로 제사장의 몫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전의 중요성이 현저히 약화된 것은 성전안에 언약궤가 없었으며,
대제사장도 우림과 둠빔을 소유하지 못했다는데 있습니다 (스2:63).
이는 선민 이스라엘에만 임재하신다는 민족신의 사상에서 벗어나
성전의 실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을 통하여 전 인류가
구원받는 시대가 올 것임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4) 세번째 성전은 헤롯 성전입니다.

B.C. 167년에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왕이
유다사회를 헬라화하기 위하여 여호와 종교 말살정책을 폈음으로
성전을 모독 했을 뿐만아니라 성전을 파괴하고 성소안에
제우스신상을 세웠으며 유다인들로 하여금 돼지를 잡아
그 신상앞에 제사를 드리게하였습니다.

이에대해 마카비 일가가 중심이 되어 혁명을 일으켰으며
성전을 다시 정결하게 하였으나 B.C.63년에 로마 장군 폼페이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을 모욕하는 사건이 또다시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로마 원로원에 의해 유대왕으로 즉위된 헤롯은 자신이
이두메인 으로서 유대인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스룹바벨 성전이 너무 작고 초라하다는 이유로
그 것을 헐고 성전을 재건하였습니다. 이 것이 세번째 헤롯 성전입니다.

[1] 동기

스룹바벨 성전이 이방인들에 의해 수차례 모욕을 당함으로서
대부분의 경건한 유대인들은 성전을 외면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에 헤롯왕은 성전을 크게 재건함으로서 이스라엘의 종교적 구심점을 만들어
정치적으로 더욱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헤롯 성전은 헤롯 왕가를 지지했던 헤롯왕과 헤롯에 의해
임명되었던 대제사장과 그 수하에 있던 종교지도자들에
의해서만 지지를 받는데 그쳤습니다.

[2] 건축

헤롯 통치 18년째인 B.C.19년에 시작되었으며 성소와 지성소로
구성된 성전의 본체와 성전 뜰은 착공한지 약 10년만인
B.C.10년경에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둘러싸고 있는 외벽공사는
성전 건축 개시 46년만인 A.D. 26년경에 완성이 되었습니다.
또한 성전외벽과 각 모퉁이의 망대들까지 모두 완공된 것은
성전건축 개시 86년만인 A.D. 63년경이었습니다.    

[3] 규모

헤롯성전의 전체규모는 솔로몬 성전보다 더욱 크고 웅장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인 본 건물도 솔로몬 성전은 성소의 높이가
30규빗(1규빗=45.6C Cm) 지성소의 높이가 20규빗인데 반해
헤롯성전은 성소와 지성소의 높이는 각각 60규빗이나 되었고
특히 헤롯 성전의 현관의 높이는 100규빗에 이르며
현관 정면과 동편이 금관으로 꾸며져 그 화려하기가
다른 어떤 성전에 비할바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성벽 외벽의 길이가 서쪽 성벽은 479m, 북쪽은 306m,
동쪽은 469m, 남쪽은 276m로 전체 모양은
사다리꼴이며 성벽의 높이는 약 29m나 되었습니다.

[4] 의미

포로기를 거친 유대인들은 성전의 중요성을 전적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많이 생겨남으로 성전 외에도 회당을 지어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데 있으며,
또 한가지는 성전을 장악한 제사장들과 부패된 그들의 행위를
옳게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5] 성전의 파괴

A.D. 65년경 유대 주재 로마 총독인 '플로루스'가 헤롯성전의 창고에서
보물 몇개를 가져감으로 유대인들의 큰 반발을 사
유대전쟁 발발의 요인이 되었으며 마침내 A.D. 70년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의 아들 디도 장군의 예루살렘 함락에 의해
헤롯 성전은 전소되었습니다.

완공된지 물과 7년만에 모두 훼파되었으며 로마군병들 사이에
헤롯이 이 성전을 건축할 때, 돌과 돌사에에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을
숨겨놓았다는 소문에 의해 그 금.은을 찾기위하여
성전의 돌 하나하나를 다 파헤쳤습니다.
이로써 결국 "돌하나도 돌위에 남지않고 다 무너뜨리 우리라"
예수님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것입니다. (눅21:6)


2. 신약에서의 성전의 의미


예수님쎄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성전의 휘장이 찢어짐은
이로인하여 백성들이 하나님께 주님을 통하여
직접 접근 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으로 일컫는 헬라어 '나오스'는 주로
영적 성전을 기리켜 사용 되고 있음을 볼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의 성소의 의미는 세가지로 나타납니다.

1) 성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눅 2:49)

이 것은 제의적 의미로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바로 성전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의 사도들도 모두 성전에 나가 기도하였으며,
성전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사역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2) 성소는 신성한 것이 임하는 장소 보다는,
종교 공동체가 모여
예배드리는 장소로 여겨 졌습니다.

이것의 전형적인 형태가 유대인들의 회당이며,
오늘날 기독교의 다양한 예배처소가 된 교회들입니다.
그러므로 대부분 오늘날 교회에 대한 인식은 예배 보러 오는
건물로 여겨지고 있으며 성소의 특징보다는
성도들의 모임의 장소로서의 다용도 용인 복합건물로
많이 지어 사용하는 경향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설도 무대시설에 조명을 달고, 밴드와 악기들이
강단 중앙에 놓여지기도 하고, 예배의 의미도 많이 희석된 가운데
모인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드려지는 자유형식을
많이 취하는 쪽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3) 성전은 영적인 의미로 성도의 몸이
성령의 전으로 간주되었습니다.(고전 6:19)

교회를 세우신 성령님은 이제 어디든지 임하실 수 있으시기 때문에
건물이든 성도의 마음 속이든 거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의 몸과 마음이 성령님이 임하시는 성전임을
신약에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것으로, 혼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교회는 성령님께서 세우신 기관 임으로
신적인 거룩의 의미와, 죄사함의 성결의 속죄와,
예배의 헌신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있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3. 요한 계시록에서의 하늘의 성전의 의미(계7:15)


하늘 나라에는 죄인이 없음으로 죄를 사함받기 위한 성전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전이라고 일컫는 것은 지성소와 성소이신
하나님과 예수님이 바로 성전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배를 드리는 곳보다는 하나님과 함께 항상
함께 지내고 있음으로 섬기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제 성전의 의미는 땅에서 마음으로 옮겨졌고,
다시 하늘나라 최종 섬김의 장소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즉, 산앙생활이 육신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
점점 변화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영으로 예배를 드릴 때만 가능합니다. (요4:24).
그러므로 하늘 성전에 있는 나의 영혼의 모습을
교회 성전에서 생각하며 항상 예배드리는 삶을 살 때에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 질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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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
/ The Son of Man

[막 14:62]



성경에서 “인자”란 말은 - 구약에서 105회 이상 나오고
 (‘에스겔서’ 에서만 무려 90회 이상 나옴)

- 신약에서는 ‘사복음서’에서만 90회 이상 나오고 있습니다.
 (마태 30회, 마가 15회, 누가 26회, 요한 13회 등)

그러나 같은 단어일지라도 불리어지고 있는 시점과
사용에 따라 그 대상과 역할은 다 다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 “인자”라는 말이
단순히 인간을 의미하는 말인지, 메시아를 의미하는 말인지
구분하여 아는 것이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1. 인자의 의미

인자에 대한 히브리어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벤 아담” 이고, 또 하나는 “벤 에노쉬” 입니다.

전자는 단지 피조물로서의 인간을,
후자는 연약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말하나
모두 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인자”의 바른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자적인 뜻과 함께 히브리인들이 이 용어를 어떻게 사용하였으며
어떤 의미로 쓰여졌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1) 단순히 사람의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시 8:4]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대개 구약에서 사용되는 경우이며,
창조주와 대칭되는 연약한 피조물로서의 개별적인 인간,
또는 인류를 가리키는데 쓰여졌습니다.
이와 같은 경우 대개 나약하고 필연적으로 죽어야 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2) 선민으로서의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가리키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시 5:8]
“인자들아 너희가 당연히 공의를 말하겠거늘
어찌 잠잠하느뇨
너희가 정직히 판단하느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데는
선민으로서 구분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계명, 율법을 지켜야만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 외경인 “에녹서”에서는
이 용어가 “택한 자,” 혹은 “택함 받은 공동체”
가리키는 뜻으로 거의 사용되고 있습니다.


3) 특별한 인물, 즉 선지자를 호칭하는데 쓰여졌습니다.

[겔 2:1]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구약 전체, 거의 ‘에스겔서’ 에서 대부분 사용된 이 단어는
에스겔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되었으며
특별임무를 수행해야만 하는 선지자 같은 특정 인물로
사용이 국한되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인자라는 대중 의미가
특별한 사역을 감당하는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호칭의 의미로 축소 집약된 것입니다.


4) 종말에 하늘 권세를 가지고
도래할 메시아를 가리키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단 7:13-4]
“내가 또 밤 이상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마 26:64]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이 두 구절을 비교하여 볼 때
구약성경에서의 인자의 의미의 점진적 계시는
신약의 메시아로 귀결되어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랜드 주석 누가복음 참조)


2. 인자의 정의

예수님께서 자신을 인자라 지칭하신 것은
“여인에서 났지만 하나님의 아들인 자”
“인간의 육체적 베일 아래 있는 완전한 하나님의 칭호”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자의 칭호에는 메시아가 여인을 통해 나신
신비로운 탄생의 비밀이 포함되어있는 호칭입니다.


1) ‘인자’란 완벽한 두 번째 인간 “아담”을 의미합니다.

“인자”란 명칭은 주의 성육신 덕분에
제대로 된 의미를 갖게 되었는데
이는 예수님은 진실로 하나님이신 동시에
진실로 사람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아담의 타락 때문에
인간의 거룩성, 영원성을 상실해 버림으로 말미암아
창조 당시의 만물과 인간의 본래 모습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하여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롬 19:23)

그러므로 죄의 혈통으로 이어받지 않고
성령의 탄생기원을 가지심으로
죄인 된 우리들 또한 성령의 거듭난 기원을
주님의 완전함 속에서 가질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2) ‘인자’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육신 하신 분”을 의미합니다.

[요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로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즉, 주님께서는 제 2의 성자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위하여 내려오셨으며 장차 다시 회복하여
하나님의 영광된 자리로 돌아가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신인 양면의 주의 사역인 “그리스도론” 을 형성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계획을 이루시는 분으로
자신을 호칭하신 것입니다.


3) ‘인자’ 란 호칭의 가장 특별한 것은
종말론적 성격에서 불려지는
“심판의 메시아”임을 의미하는데 있습니다.

[눅 17:30]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결국 인자의 최종목표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있으며
이를 위하여 이 땅에는 은혜의 왕국이 지속되게 하셨지만
재림 시에는 하나님 나라 완성이신
영광의 왕국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는 주님이 하나님으로 영광을 회복하셨으며
성도 또한 영광의 몸으로 백성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자란 완벽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두 번째 아담으로서 의미가 시작되지만
나중에는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 하나님으로 승귀하시는 메시아의 호칭입니다.


3. 인자의 역할

예수님께서 완전한 인성을 지니신 분으로
사역하셨을 때에는 고난이 지배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인간의 죄와 구원에 완전히 사용되기 위한
제물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1) ‘인자’“십자가의 고난”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막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죄는 아담 한 사람이 지었을지라도
이제는 그 후손들 모두가 죄를 범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 많은 죄인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죄인들의 대표자가 되실 전혀 죄가 없으신 분이 필요합니다.
한 죄인들의 대표가 저지른 것을 한 의인된 대표가 마무리 하기 위하여
완전한 의인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인자가 책임을 져야지만 됩니다.

결국, 인자가 이 땅에 처음 오신 목적은 죽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 역할을 볼 때 인자란 육신적인 몸의 버려야지만 될 역할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2) ‘인자’는 “신적 권위와 능력을 베풀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질병으로 고통 받는 많은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죄를 사하시고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 날 성전에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이 모두는 바리새인과 율법사가보기에 신성모독의 일들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마 12:8)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하신 이유는
인간에게 유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심지어 안식일 마저도 복을 주신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하나님의 날 이지만 또한 안간에게도 복받고 유익한날 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의 법은 하나님의 휴식의 날만을 고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예수님께서는
원래의 뜻대로 안식일은 하나님의 날이자
인간에게도 유익이 되어야 하는 날임을 보이시며
병자를 고쳐주신 것이고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주일로 바꾸셨습니다.
부활하신 첫날이 안식일의 완성임을 보이신 것입니다.

즉, 구약에서 인간의 삶은 쉼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제 죄사함 받은 모든 인간은
부활의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부터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
오순절 (안식일 다음 날) 성령 강림하심으로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주님께서 보내신 성령님께서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신 것입니다.


3) ‘인자’는 “승천 및 재림하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러 오십니다.

[막 14: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대속사역’이였지만
천상 사역은 구원사역의 완성인 ‘심판사역’입니다.

‘대속사역’은 죄 값을 치르는 죄인의 입장에서의 사역이지만
‘심판사역’은 마귀를 심판하는 하나님 입장에서의 사역입니다.

우리는 이제 구속 주 예수님을 바라 볼 때가 아니라
진정 인자의 뜻인 “하나님의 아들 심판 주 예수님”
바라보고 기다려야 할 때입니다.

주님께서는 가장 높은 위치에서 가장 낮은 위치로 오셨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가장 낮은 죄인의 위치에서
가장 높은 하나님의 자녀의 위치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이 신분과 새 삶의 완성이 주님의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자신을 이 땅에 오셔서 인자라 부르신 주님.
죄인 된 우리를 높여주시기 위하여
낮은 자신의 모습을 보이신 호칭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베일 속에 숨겨있는 하나님의 속성은
육신의 베일을 벗으시면서
능력의 인자로, 부활의 인자로, 재림의 인자로
승귀하시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전부 감수하신 것입니다.

다시 나를 찾아오실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인자의 모습,
그 것이 인자의 참 의미이자
나의 신랑 되신 영원한 주님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 때는 인자라 하시지 않고 성자라 하실 것입니다.
인자이신 주님 성자로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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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날'
/ The Day of the LORD


1. 여호와의 날의 예언 배경

요엘서에서 처음 인용된 이 말은
구약 선지서에서 모두 16회정도 예언되고 있습니다.
그 말의 의미는 "구약적 종말 사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분열왕국시대 말기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극심한 우상숭배와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심판의 경고를 보내셨습니다.

또한 이 시대의 주변국가들의 상황을 보면
앗수르, 바벨론, 헬라…… 등, 대 제국들의 부상과 패권 다툼으로 인하여
근동지역과 애굽 지역에 잇는 길목에 있었던 이스라엘은
항상 전쟁의 소용돌이 가운데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위급 상황은 백성들로 하여금 불안과 위기의식을 조성하였으며
여호와의 날에 대한 이들의 인식은 자신들은 구원받는데 비해
주변국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 받게된다는
안심 사상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2. 여호와의 날의 정의

"여호와의 날"이란 여호와께서 현재 진행되고있는
역사의 한 순간에 직접 개입하셔서 심판하시되
악인들은 멸망시키시고 의인들은 구원을 행하시는
"심판과 구원의 날" 임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의 이용어가 사용되어진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적 범죄와 타락을 기반으로
선포된 것이기 때문에 자국의 징계, 재앙 및 멸망의 인식등이
백성들에게는 더 깊이 인식이 되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그 증거들이 남, 북 이스라엘 국가들의 멸망,
침략국들의 멸망, 포로귀환등에 적용을 많이 하여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소극적인 국가의 재앙뿐만아니라
확대적인 인류의 종말계획을 함께 계시하신 말로써
앞으로 인류가 겪어야 할 '대 심판의 날'의 의미를
포함 시켜놓고 있는 계시였습니다.

다만 구약시대의 선민의식에 대한 인류의식의 결여,
메시야에 대한 인식 및 시대적 상황결여,
하나님의 새 창조에 대한 이해 부족...등으로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을 바르게 표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로 접어들면서
주님께서 자신의 재림의 날을 설명하심에 따라
좀 더 구체적으로 종말의 현상이 드러나게 되었으며
"여호와의 날"이라는 구약시대의 표현이
"주의 날"로 발전되게 되었습니다. (눅 17:30)

그러므로, 구약의 "여호와의 날"이 주로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역사를 기리킨 것이라면,
신약의 "주의 날"은 전 인류를 대상으로
현 역사의 최종 종결과 새로운 창조 및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심판의 날'로 확대되었습니다.


3. 신.구약의 '여호와의 날'과 '주의 날'의 일어날 상황 비교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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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주석 아모스서의 여호와의 날 참조)

여호와의 날,"
, "주의 날"은 양면성을 지닌 말로
악인에게는 멸망과 심판이 내려지는 저주의 날인 동시에,
의인에게는 구원과 약속된 축복이 이루어지는 기쁨의 날이 될 것입니다.

이에 신.구약간의 구원의 차이점에 대하여
구약에서는 부활신앙이나 성령충만으로 인한 신령한 몸에 대하여는
주님께서 오시기 전임으로 계시의 미흡함에 따라
현 시점에서의 축복을 제시하고 있는 반면,
신약에서는 구원의 완성인 영광된 신령한 몸의 변화와
부활의 기쁨을 맛보고 주님과 함께 휴거되어 지낸다는  
영적인 구체적인 축복이 명시되어있습니다.


4. 여호와의 날의 의의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완성은
구약에서 "여호와의 날"로 거듭 예언되어져왔으며
실제적으로 신약에서 "주의 날"로 계시되어
세상 끝날의 대 종말을 이룸으로 성취할 예정으로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내일이라도 당장 대 종말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주님의 재림이 곧 일어날 것임을 항상 인식하고 살아야함을
강력하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있는 신앙관은
"현실론적 기복 신앙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약이나 신약에서나 신앙의 초점은
여호와 앞에 서는 날을 기점으로 살아야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위 "실존론적 종말 신앙관"을 가지고 살아야 함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성경에 다음과 같이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살전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5. 주의 날을 맞이할 성도들의 자세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벧후 3: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이르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1) 거룩한 행실을 하며 살아야합니다.

인간에게는 거룩함이 없습니다.
죄를 짓는 순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모두 깨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룩함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셨습니다.

[히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마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즉, 거룩함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주님께서 주신 거룩함을
내가 내 안에 얼마나 받아들이고 사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자로서의 삶의 완성은
오직 주님과의 바른 관계에서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2: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거룩이란 열매는 예수님의 거룩한 뿌리를 내 안에 심을 때,
열릴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 안의 뿌리가 자아이면 우리는 거룩을 모방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아로인한 거룩은 조화일 뿐입니다.
오직 주님을 나의 삶에 뿌리인 근원으로 모시고 살 때,
거룩한 삶은 저절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2)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경건은 두가지로 표현되어집니다.

첫째, 말을 조심하며 사는 삶이며

[약1: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 것이라."

둘째,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며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약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 것이니라."

사람은 이기적일 때 말이 많아지고,
이타적일 때 행동이 많아지게 됩니다.
경건은 이타적인 마음에서 이루어집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상과의 관계보다 소중히 여기고 살 때 나타나게 됩니다.
즉, 버는 삶보다 사용하는 삶에 초점을 두고 살 때,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이 경건이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사모하고 살아야합니다.

시골집에 살던 사람이 신도시 아파트 청약에 당첨 되어
모델하우스를 보고 온 후부터는
그의 삶은 1년후 입주할 새 아파트를 간절히 사모하고 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사모함 속에는 그 것과 어울리고
일치하려는 마음이 일어나게 만듬으로
그는 사용하던 모든 생활도구를 바꾸게 됩니다.
습관도 바꾸고, 옷차림과 모습, 신분과 언행도 수준에 맞게 바꾸게 됩니다.

우리의 변화도 마찬가지로
주님의 재림을 사모함으로 지금의 나의 삶이 바뀌어질 수 있습니다.
육신의 욕망에서 신령 한 몸의 행실로,
세상의 죄된 더러움에서 영적인 깨끗함으로,
죽음의 그늘에서 영생의 기쁨으로, 욕심에서 자비로,
쾌락중심에서 말씀 중심으로...등,
이 땅의 소망에서 휴거의 소망으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삶의 초점이 달라지게됩니다.


4)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야합니다.

[벧후 3: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 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점이란 날 때부터 생긴 것이고, 흠이란 살면서 생긴 것이고,
평강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가 모두 해결이 되기 위해서는
온전히 거듭남으로 밖에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즉, 나의 온전한 모습은 그리스도안에 살므로
거듭난 삶을 살게되는 것이고,
부활의 주님이신 성령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살므로
평안을 누리는 삶을 살 수가 있게됩니다.

온전히 거듭남이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에게 얼마큼 효능을 주었느냐에 따라
거듭남의 가능성을 가질 수 있고
주님의 부활하심이 얼마나 내 생명에 영향을 주고 있느냐에 따라
나의 삶의 가치도 달라지게 됩니다.

인간은 육적으로 가까이 지내는 대상도,  혼적으로 기까이 지내는 대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대상은 모두 세상에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가까이 지내는 대상도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하늘에 있습니다.
주의 날을 기다리는 삶이란 혼과 육의 원하는 대상을 줄이고,
영의 원하는 대상을 바라보고 사는 삶을 말합니다.
순간보다 영원을 볼줄아는삶이 진정한 신앙생활입니다
영안의 눈을 뜨고 주의 날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다같이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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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이름
[빌 2:9-11]



‘이름’이란 물질세계에서는 ‘호칭’을 말합니다.
그러나 영의 세계에서는 ‘계시”로 나타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물질세계의 이해를 통하여 영이신 자신을
이해시키시기 위하여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제한된 물질의 세계에서는 한 대상에 한 호칭만으로 충분하지만
무한한 영의 세계에서는 상태, 역할, 목적, 시기 등이 다르기 때문에
그것에 알맞은 호칭도 여러가지를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서도 호칭의 이름 (하나님)이 있는가 하면
속성의 이름 (여호와)과 관계의 이름 (아버지)을 지니시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자신의 이름을 여러가지로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이름의 바른 이해는 관련을 깊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면 주님의 이름의 뜻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1. 주님의 호칭의 이름은 예수님이십니다. (외적으로 사용되는 이름)

1)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이며
그 의미는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을 사용할 때는
반드시 존경의 표시로 부르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 17:11-12]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여 지키었나이다”


그 이름은 본래 하나님의 이름이었는데
자신의 이름을 아들에게 주어
하나님을 믿듯이 믿고 부르게 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 이름이 하나님 이름이시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와 같이 하늘에서 직접 주님의 이름을 계시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는
경의의 마음이 항상 있어야 주님께서는 높힘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우리의 마음가짐이어야 합니다.


2) “예수”라는 이름은 권세와 권능을 지닌 이름입니다.

[빌 2:9-10]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이 우주에는 세 가지 세계가 있습니다.
즉, 천국, 지옥, 그리고 지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세가지 세계를 예수의 이름으로 모두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이 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예수라는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이신 증거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육신으로 오셨던 지상사역은 끝마치시고
전 우주를 다스리시는 천상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막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우리는 대개 안수기도를 할 때 소리를 크게 지르거나
안수한 손에 힘을 주어 누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으로
그 이름에 권위를 두고 나에게
이 권세를 맡기셨다는 믿음을 가지고 선포한다면
반드시 역사하심이 일어날 것입니다.


3)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보증입니다.

[요 14:13-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삶에 필요한 모든 것보다도
더 많은 축복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받아 누리려면
오직 예수님 이름으로 구할 때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 내용이나 헌신한 행위에
영광을 받으시는 것보다 예수님께서 죽도록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신 성취에 대하여 인정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나 헌신이 주님의 헌신에 일부분이 될 때
주님의 추천으로 다시 영광을 기쁘게 받으시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에 대한 유일한 근거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라는 것을
전적으로 확신하고 기도드릴 때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것이 5만 번의 기도의 응답을 받은
죠지 뮬러의 기도응답 비결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주신 것은
마치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를 주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많이 사용할수록 많은 문을 열수 있듯이
예수님 이름을 실질적인 삶에 열심히 부르고 사는
의지하는 삶이 성공적인 삶이 될 것입니다.


2. 주님 이름의 속성은 다섯 가지입니다. (내적으로 적용되는 이름)

[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1) 주님은 “기묘자”의 이름을 지니셨습니다.

“기묘자”란 모든 자연의 법칙을 초월한
놀랍고 기적적인 분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인간이 불행한 이유는 세상의 지배를 받고 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세상의 지배하에서 벗어나 살기 위해서는
세상의 지배를 초월하신 분이 다스려 주어야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세상을 초월하신 분이십니다.

인간의 몸이시되 성령으로 잉태하셨고
인간의 생명을 니지셨으되 영생을 사셨고
음식을 먹고 지내셨으되 질병 없는 삶을 사셨고
죽으셨으되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주님 안에서 거듭날 수 있음은
예수님께서 기묘자의 능력을 지니셨기 때문입니다.


2) 주님께서는 “모사”의 이름을 지니셨습니다.

모사란 어떤 문제든지 풀어낼 수 있는 지혜를 지닌 사람을 의미합니다.
지혜의 부족이 문제의 원인입니다. 아담에게는 지혜가 많음으로
영생의 삶을 지녔어도 문제가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시적 지혜가 없어지자
머리에만 의존하는 지식만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지식은 생활에는 도움을 주어도, 삶의 문제에는 소용이 없습니다.

[예] 부자 관원 니고데모도, 다섯 번 결혼한 사마리아 여인도
예수님을 찾아와 만난 이유가 바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인생의 문제를 풀려면
모사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3) 주님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지니셨습니다.

구원사역은 하나님께서만이 이루실 수 있는 사역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아니시면
우리의 죄와 구원의 문제를 풀어주실 수 없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는데도 죄의 문제로 시달리는 이유는
마귀의 유혹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죄의 영역에 있을 때,
유혹이 행위를 유발시키고, 의의 영역 속에 있을 때,
성령님께서 열매가 맺혀지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보혈의 공로로
우리 마음속은 죄성이 씻음 받게 되었습니다.
죄성이 일어날 때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할 때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4) 주님께서는 “영존하시는 아버지”의 이름을 지니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가시적으로 만들어 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태어날 수 있는 길은 예수님 안에서입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보혈의 고통은
피 흘리시고 해산하는 어머님의 고통과도 같은 것입니다.
영의 자녀는 죄가 없이 태어나야 되기 때문에
흘리신 보혈이 나의 깨끗한 영적 탄생을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부모와 같이 사랑하시고 돌보시고 양식을 제공해주십니다.


5) 주님께서는 “평강의 왕”의 이름을 지니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라들이 오래 존속하지 못하는 이유는 싸움 때문입니다.
또한, 가족, 친구, 이웃과도 멀어지는 이유는 다툼 때문입니다.
이는 모두 우리 마음속에 이기심으로 인한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욕심을 부리지 않으시는 이유는
모든 것을 다 지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강을 주실 수 있는 이유도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게 해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적인 소유는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오직 영적인 소유만이 만족을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평안입니다. 평안은 영생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의 이름의 의미는 “임마누엘”입니다. (관계 속에 함께 지낼 수 있는 이름)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서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도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 대한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뜻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님의 동행의 목적은 생활은 물론, 사역을 위한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생활에는 고난이 따를 수 있으나, 사역에는 위험이 따르게 됩니다.
이는 대적의 영과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우리를 연단하게 만들 뿐이지만 전투는 우리를 패배시킬 수 있습니다.
패배는 하나님의 자녀가 지니고 살 위치는 아닙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함께 도우셔서 승리케 해주십니다.

내가 풀 수 없는 것이 고민이고 내가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풀 수 있고 해결하실 수 있음을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만일 계속 고민과 염려 속에서 지내고 있다면
임마누엘의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미국의 저명한 작가 케네기 씨가 헨리포드씨 말년에 회견을 가졌습니다.
그는 세계 최대의 사업을 일으킨 노경영인의
일생의 철학을 들을 수 있을까 하여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당년 78세의 포드는 “일생에서 가장 고민 했을 때가 언제였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고, “없군요. 내가 믿건대 온갖 일은
하나님께서 지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의견이 필요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을 다 져주시는 한
만사는 결국
최악의 상태가 되더라도 믿는 것입니다.

그럴 바에야 고민할게 뭐가 있겠습니까?” 대답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형편은 제각기 다 다릅니다.

자신이 주인의 자리에 있는 삶과 주님을 주인의 자리에 모시고 사는 삶과의 차이입니다.
주님을 위로 모실 때에만 위에서 밑으로 내려오는 것이 있게 됩니다.
밑에 서는 위로 보낼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
주님을 바로 모신 삶을 다 같이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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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2
/ 새해 첫날 행하신 것을 바라보라!
(사 43:18-19)




신년의 첫날이 중요한 이유는
그 해의 전체를 대표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역사적인 일들은
초하루에 행하셨던 것을 볼 수 있으십니다.

또한, 행하셨던 그 일에는
여전히 그 상징적인 의미가 주어져 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순종으로 받아들일 때
베푸셨던 역사하심 또한 나에게도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정월 첫날 행하셨던 일들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1. 새 시대에 새 환경을 열어 주셨습니다.

[창 8:13]
"육백일년 정월 곧 그 달 1일에 지면에 물이 걷힌 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 물이 걷혔더니 ---".

하나님께서 타락한 세상을 홍수로 멸하신 후에
새로운 환경을 만드셨습니다.

방주 안에서 거의 일년 동안을 갇혀서 생활하던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참으로 새 세상으로
나오는 기쁨을 마음껏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처음 비가 쏟아지는 40일간은
두려움과 한편 안심함으로 긴장 속에서 지내었습니다.
그러나 300일이 넘는 기간을 폐쇄된 장소에서만 지내게 되었을 때
참담, 암울, 지루함, 기다림, 궁금함, 답답함…… 등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의 해방을 보며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것은
환경은 인간이 변화 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를 내리심, 물이 차올라 지면을 덮으심, 물을 걷으심,
새 땅이 드러나게 하심,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임)
그렇다면 인간이 해야 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직 순종뿐입니다.

방주는 비가 오고 홍수 났을 땐 필요한 것이지만,
물이 없을 땐 방주 속이 답답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지내온 환경이
내 인생의 소용돌이 속에서는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년도부터는 환경의 방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첫째, 가정의 방주로부터 나와야 하고,
둘째, 숨막히는 교실의 방주로부터 나와야 하고,
셋째, 닫혀진 사업장 의 방주로부터 나와야 하고,
넷째, 꽉 막힌 사역의 방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새 환경의 문이 열릴 것을 기대하며 신년을 맞이하십시오.


2. 구속과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스 7:9]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스룹바벨의 1차 포로귀환은 “육신적인 해방”이었으나,
에스라의 2차 포로귀환은 “영적인 해방”을 의미합니다.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생활, 습관, 개성, 언어, 자유……등
모든 것이 상실됨을 의미합니다.

현대생활에서 눌림 받는 것 또한
나를 누르고 있는 지배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금전, 가정, 사업, 건강, 자녀, 진로, 비자, 사역문제…… 등)
하나님의 선한 손길이 함께 하심으로 풀려지게 하십니다.

1,440 km 의 4개월에 걸친 긴 여행 길에서 강도로부터 보호하시고,
대적의 세력으로부터 지켜주시고, 질병과 사고로부터 지켜주신
하나님께서는 나도 모든 대적의 세력으로부터 지켜주실 것입니다.

[20절]
"그 외에도 네 하나님의 전에 쓰일 것이 있어서
네가 드리고자 하거든
무엇이든지 왕의 내탕고에서 취하여 드릴지니라".

특히,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재정의 문제 또한 해결이 됨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땅에서 기도함으로 하늘의 창고를 여시고
하나님의 일에 넉넉히 부어주실 것을 바라 보십시오.


3. 새로운 성전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출 40: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정월 초 1일에 성막 곧 회막을 세우라".

1) 성막을 정월 첫날에 세운 의미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의 시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의 처음은 하나님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초 태생, 첫 열매, 장자…… 등)
처음을 그분께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표시입니다.

더욱이, 첫 예배를 하나님께 초하루에 드리는 것만큼
기뻐 받으시는 예물은 없을 것입니다.
이는 나의 삶에서
하나님을 가장 소중한 분으로 모시겠다는
고백이기도 한 것입니다.

2) 오늘날 나에게 명하시는 성소는
마음 속에 성령의 전을 세우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선
백성 한가운데 머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우리 마음에 와 계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성령님께서는 정월 초하룻날 내 안에 머무시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세속적인 일에서 벗어나
성령의 임재 하심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금년 한 해가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고 사는
능력의 한 해가 될 줄로 믿습니다.


4. 하나님께서 예언의 말씀을 하여 주셨습니다.

[겔 29:17]
"제 이십칠 년 정월 초 1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하나님께서 예언의 말씀을 에스겔에게 들려 주셨습니다.
정월이라는 새해의 기쁨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새로운 사명의 기쁨으로 시작 될 것입니다.

옛날 선지자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말씀, 꿈, 환상, 음성으로 계시하여 주실 것입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 탄생인,
-사명적 탄생이 이루어 질것을 기대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바로
청결한 마음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육신은 정욕이 가라앉을 때 혼의 지배를 받습니다.
혼은 또한 자아인 의지를 포기할 때 영의 지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나의 노력보다
성령님께 의지함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미 나에게 오신 성령님께서는
나의 간구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2011년 새해를 맞이함에 있어서 새 환경, 새 신분,
새 사람, 새 사명을 받는 새해가 될 것을 기대하며
준비하는 송구영신의 뜻있는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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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1

/ 지난 날을 상고하라!
(신 4:32)


“송구 영신”이란 지난 것은 보내고 새 것을 맞이한다는 뜻입니다.
대개 한 해를 마치면서 새해를 맞이하기 전 시점을 가리키는 말로
‘옛 것’‘새 것’을 어떻게 구분하여 개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통찰의 시간을 갖는 것을 의미 합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이 시간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
 "지난 날을 상고"
하여 보는 일입니다.

사람은 때때로 광야의 생활을 할 때가 있습니다.
즉, 현재 나의 삶이 불투명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경우입니다.
그 때는 인생의 원점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에
어떻게 개입하셨는지를 회상해보면 현재를 이해 할 수 있고,
미래를 바라 보는데 큰 그림의 구도를 그려 볼 수 있게 됩니다.

1. 지난 날 하나님께서는 나를 어떻게 교훈 하셨는지를 상고 해보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한가지 비밀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르치신다는 것 입니다.


[욥 33:14-16] “사람은 무관히 여겨도 하나님은 한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의 이상 중에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 교훈 하시나니”

인간은 교육을 시키지만 하나님께서는 교훈을 주십니다.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생활의 문제를 풀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러나 교훈은 삶의 문제를 풀도록 도와줍니다.
사람은 생활의 문제가 해결 되었다고 해서
삶의 문제도 자동적으로 해결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생활의 문제가 더욱 잘 풀리면 잘 풀릴 수록
인간의 삶의 방향은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더욱 가까워지게 됩니다.
교훈의 필요성은 바로 저지르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는데 있습니다.

[예] “욕망의 뒤안 길" 이라는 책을 쓴 김광수 전 KBS 관현악단 지휘자
모태 신앙으로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를 맡은 사역자였었는데
미국으로 이민을 가 명성과 실력을 바탕으로
할리우드 한복판에 샹하이 나이트 클럽을 개업하여
금방 이름난 사교장으로 급 부상 시켰습니다.

사업이 번창 할수록 신앙생활에서 멀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님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내가 이렇게
사업에 성공했듯이
신앙에도 성공할 자신이 있어요.
10년 후에는 예전의 나로 돌아올 테니 두고 보세요." 라고...

그러나 5년 동안 잘되던 사업이 6년째 되면서
인근에 유사업종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자
내리막길로 치닫기 시작 하여 안간힘을 썼어도
적자만 누적되어 10년 만에 도산하고 말았습니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고백하기를 -  
"하나님 제가 잘못 했습니다".

‘이제 무얼 해서 먹고 사나?’ 생각하며
장롱을 뒤져 족히 10만 불은 될만한 아내의 패물을 다 꺼내
“이 패물로 재기하면 더 좋은 것 사 줄게” 라고 하며 팔러 가는데
갑자기 등뒤에서 권총을 든 흑인강도가 나타나 꼼작 없이 빼앗겼습니다.
넋을 잃고 주저앉아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정말 너무 하십니다. 철저하게 저를 버리시는군요"
이 때 머리 속에 떠오르게 하신 말씀이 있었다고 합니다.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렘17: 11)

“내가 잘못 살았구나!” 깨닫는 순간 마음에 평안함이 오더랍니다.
개척교회 나가 봉사, 전도, 헌신하며 "욕망으로부터 벗어난 자유
그 것이 바로 행복이다" 라고 깨달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절망에 빠질 때도 낙심할 때도 있습니다.
그 때마다 불행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불행은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지 못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을 모르는데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잊고 사는 것입니다.

지금은 바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셨던 교훈을 생각할 때입니다.
그러면 아마도 교훈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지금까지 나를 어떻게 인도하여 주셨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느 신학자가 말하기를 "인간은 도상의 존재다" 라고 하였습니다.
즉, 탄생과 죽음의 사이에 길을 가는 존재요,
육신의 삶에서 영원의 삶으로 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까지 어떻게 오게 되었을까요?
나의 노력으로 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왔다고 인정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할 수 없이 오게 되었다면 떠난 자리는 분명히
큰 사고가 날 자리임이 분명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것은
가나안 땅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가나안"
이란 히브리어로 "크나안"인데
그 뜻은 "여호와의 상속재산"이라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왜 인도하십니까?
그 이유는 우리로 이 땅에서나, 천국 에서나 유산을
상속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이 상태가 광야 같은 상태라면 준비시키시는 과정이며,
고난이 주어지고 있다면 성장을 위하여
연단과 훈련을 받고 있는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법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신 8:3]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직도 자라야 할 부분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38절] "너보다 강대한 열국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너를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 것을
네게 기업으로 주려 하심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믿음이 장성하지 못할 땐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찾아서 다니게 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인도함 받은 것을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찾아 다녀도 어디까지나 광야일 뿐입니다.
가나안은 인도와 순종으로 들어가는 곳임을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게 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생활대책.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비 하신 것은 기업임을 알 때
인도하심의 귀중함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3.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씀 하셨는가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40절]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없이 오래 살리라."


현재에서 미래를 보면 보이지 않지만 과거로부터 보아오면
선명히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입니다.
인간의 축복의 근거는 자신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의 근거는 순종입니다. 우리가 세상사람들과
구분이 되어야 하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그리고 불가능 한가운데서 나타나야 하는 것이 믿음의 특징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여호와의 기업을 맡기시겠는가?
믿음이 있는 자에게 입니다. 땅에 기업을 받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진정한 천국 기업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원하는 것이 축복입니까?
하나님께서 예비 하신 것은 후사입니다.
후사가 누릴 수 있는 축복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하심의 끝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오늘 "상고하라" 란 말은 하나님의 역사 하심을
다시 한번 기억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역사하심의 과정 가운데는 항상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한 해를 보내는 이 시점에서는 오직 약속의 말씀만을 간직할 때 입니다.

그러므로, 내일의 미래의 과정이 어떠하든지간에 하나님께서는
내 생각보다 훨씬 유익한 것으로 예비해 놓으셨다는 것을 인식히고
과거의 역사하심을 통해 다시 한번 감사하는 마음으로 약속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한 해를 마무리 하는 마지막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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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의 여 선교회

                [눅 8:1-3]                



세상에서 역사에 남을만한 큰일이 이루어 졌을 때는 그 이면에
반드시 숨은 공로자들이 있었음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여성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성들에게는 용기를 보시지만
여성들에게는 섬김을 보십니다.

[예] 오순절 성령강림이 임하셨던 마가 다락방에도
120명의 문도가 모여있었으나 그들의 생활을 돌본 사람들은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와 주님을 쫓았던 여인들이었습니다.

또한 사도바울이 이방인 선교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자주장사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성들의 섬김이 두드러질 때
교회의 사역은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1. 그러면 오늘날 교회에서의 여 선교회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겠습니다.

1] 여 선교회의 기원

본래 한국 여 선교회의 기원은 1906 년도에
'정동교회'에서 미국 여 선교사인 '프라이' 양이 '보호여회'로 모임을 시작하여
어려운 여인들을 돌보기 시작함으로 발단이 되었습니다.
10년 후에 '마커' 선교사가 그 이름을 "여 선교회"로 개명하였고
초대회장에 '손메리' 여사가 취임하여 정식으로 발촉하게 되었습니다.

한 달에 한번 모이는 '월례회'를 제정하여
회원들이 모일 때마다 1전 내지 2전씩 모아
담임목사 생활비를 돕는 일과 가난한 여성들을 돕는 일에 사용하였습니다.
그 사역이 활성화 되자 9년 후인 1925 년에는
복음전도를 지원하는 사역으로 확대되어
'만주할빈'과 '인도'에 선교사를 지원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주일날에는 회원 두 사람이 짝을 지어
축호(심방) 전도를 다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참고하여 볼 때
여 선교회 사역은 네 가지로 요약이 됨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주의 종을 돕는 일
둘째, 가난한 이웃여성을 돕는 일
셋째, 해외 선교사를 돕는 일
넷째, 전도 하는 일 등 이었습니다.

2] 그런데 오늘날 이 사역이 교회를 부흥 시키는 일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 이유는 교회가 커지면서
교회 자체 내에 전담부서가 다 생겼기 때문입니다.
구제부, 전도부, 선교부, 봉사부…… 등
각종 행사부서가 생겨 자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이외로 외부사역은 일꾼들이 많이 모이는데 비하여
교회 내 사역에는 일손이 오히려 모자라는 현상을 빚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 선교회가 독자적으로 활동을 했던 과거의 사역에서 벗어나
내부사역에 충분한 지원을 하여줌으로 목사님을 중심으로 봉사사역을 맡아
교회가 부흥되는 역할을 중점적으로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명을 잘 깨닫지 못하면 남, 여 선교회가
또 다른 교회내의 사역단체가 되어 목사님과 불협화음 내지는
교회사역을 비판하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주로, 각 교회의 남, 녀 선교회의 설립취지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남 선교회]
"본교회의 예배질서와 보전을 위한 봉사기관으로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받들고 교회 발전과 성도의 친교를 도모 하는데 있습니다"

[여 선교회]
"영혼구원을 활발히 전개하며,
교회발전과 부흥을 위하여 적극봉사 헌신 하는데 있습니다."

이것을 요약 해보면, 남녀 선교회는
첫째, 목사님 사역이 활발히 전개될 수 있도록 내부 일을 돕는 봉사사역과
둘째, 영혼구원을 활발히 하여
교회부흥을 일으키는 전도사역임을 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구제사역이나 선교사역 등은 해당부서와 상의하여
중복되지 않게 풀어나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주님은 남 선교회를 사용하셔서
교회가 큰일을 수행 할 수 있게 하시고 (예 - 성전건축)
여 선교회를 사용하셔서 교회의 부흥을 가져오게 하십니다.
(예 - 봉사, 전도활성)


2. 교회 내에서의 여 선교회 봉사사역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1] 교회내 여 성도들에게 관심을 불러 일으켜
알맞은 봉사에 참여 시키는 일입니다.

목사님 사역이 어려운 이유는 항상 할 일은 많은데 일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른 설문조사에 의하면 교회의 평균적인 봉사범위는 10% 만이
봉사에 참여하고, 40%는 관심이 있으나 봉사는 안하고 있는 그룹이고,
50%는 사역과 봉사에 관심이 없는 성도들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힘들어 할 때는 10%의 봉사자만 헌신할 때이며
교회가 활발하고 부흥이 이루어 질 때는
40% 군이 봉사에 참여 할 때라고 합니다.

성도들은 누구나 달란트가 있거나 자기 재능을 개발하고 싶어합니다.
단지, 누군가 길을 열어주고 기회를 주지 못하기 때문에
참여 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 선교회 회장단이 제일먼저 할 일은,
먼저 전 성도 한 사람씩을 심방하여 충분히 성도들의 애로사항을 듣고
그 문제를 풀어줄 수 있는 일을 사역의 우선순위로 정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예] 미국 텍사스 에있는 성서교회가 부흥하게 된 이유는 바로
여 성도들의 사역봉사 참여 때문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참석 성도들의 구성을 보면
남녀 비율이 = 4:6 또는 3:7 정도로 여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목사님들의 설교내용과 예화는 남성위주의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여성들의 공감대를 얻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여성들의 관심사는 대부분 임신, 낙태, 갱년기 장애, 암 정기점검,
부부갈등, 딸과의 불화, 시댁관계, 비만, 음식요리,
여성들 만의 취미생활, 자녀양육 문제…… 등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의 특별사항은 여성만이 그 필요를 채워줄 수
있다는 착안아래 설문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 당신의 관심 분야를 고르시오. ----
(구제, 심방, 병원 환자 돌보기, 꽃꽂이, 찬양, 기도,
성경공부, 경노봉사, 새신자 봉사, 전도, 선교, 음식봉사,
교사, 성가대, 실내장식, 상담…… 등)

그리고 선택한 사람들을 그룹별로 형성하여 9시30분에 모이면
간단한 다과교제 및 분야별 활동과 찬양으로 오전에 끝냅니다.
"마음과 마음" 이라는 이 여 선교회의 활동은 점점 활성화가 되어
목사님께 지원을 받아 1년에 한번씩 전 여성도 수련회를 개최하면서
영적으로도 교회가 크게 부흥 하였습니다.

요즈음 교회마다 문화교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이 교회부흥을 일으키거나, 봉사차원에서 성도를 참여시키기 어려운 것은
주로 '프로그램'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 선교회 활동은 관심이 주최가 되어야지
행사가 주최가 되면 부흥이 안됩니다.

2] 여 선교회 봉사 운영을 위한 기금모금 활동이 필요합니다.
 
선교회는 교회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운영하기보다는
자체의 재정으로 운영하도록 노력할 때 부흥이 옵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께서 직접 공급해 주심으로
이루어 지는 게 원칙입니다.

그래서 항상 주님께 기도로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그 사역에 도움을 주십니다.
이를 위해 회장단은 교회와 여 선교회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말씀 3절]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헌신에는 상급이 주어집니다.
그것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출 32:2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예] 주님을 열심히 섬겼던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났고,
요안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두 천사로부터 통보 받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일생에 몇 번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 중 한 기회가 나에게 헌신이 주어질 때입니다.
여 선교회는 바로 이 기회가 주어지는 시기임을 알고
열심히 주를 위하여 일할 때입니다.

일할 때 필요한 것이 물질입니다.
그래서 재정을 모으기 위해 회비를 걷고 있습니다만
금액을 정하여 걷기보다는 자율적으로 내는 것이 바람직하며
회원들이 고통을 겪는 일에 앞장을 서 기도하고 도와주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지원금을 보내주십니다.

그 외의 방법으로는 게라지 세일, 기금모음, 음식바자회,
여 선교회 지원을 위한 특별강사 집회를 통해 기금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회원들을 위하여 돌보는데 쓰여지다 보면 점점 외부적으로 확산됩니다.  

3. 봉사를 통해 주어지는 유익은 무엇이 있을까요?

1] 하나님께서는 봉사를 통하여 우리를 온전케 만드십니다.

[엡 4:11-12]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사람이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뿌리로서 예수님 안에 심기어진 것을 말합니다.
성도가 봉사를 한다는 것은 나무의 줄기로서 뿌리로부터 받은
영양분을 열매를 맺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믿음의 뿌리가 아무리 깊어도 줄기인 봉사가 없으면
열매 없는 나무가 되어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행해져야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만 전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지 않으셨다면
구원의 열매는 없었을 것입니다.
열매가 바로 나무의 온전한 모습이듯이 행하는 신앙생활은
또한 성도의 온전한 모습인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봉사를 통하여 교회를 성장 시키십니다.

[행2: 46-47]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며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리라."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듯이 주님의 몸 된 교회도 역할이 여러가지 입니다.
특히 여 선교회 봉사는 성전청결에 헌신을 많이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성전임으로
레위인 직무와 같은 사명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느 교회에 미국에서 큰 교회의 여 선교회 일행이 다녀갔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자신들의 사역을 열심히 소개 하였습니다.
그러나 방문한 임원들이 눈 여겨 본 것은 그들의 활동을
본 것이 아니라, 교회의 화장실과 주방 이었습니다.

그 두 곳만 보면 이 교회성도들이 얼마나 올바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지와 영성이 얼마나 있는지를 알 수 있다고 하였답니다.
즉, 여 선교회 수준이 그 교회의 수준인 것입니다.
가장 하찮은 일부터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봉사정신입니다.

마25장 에서 주님은 달란트 비유를 말씀 하십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이 땅에서 보는 무지개는 반달 모양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올라가서 보면 무지개는 동그란 원입니다.

신앙생활 에서도 봉사 없는 생활은
실제 것의 반밖에는 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나의 헌신을 통하여 교회가 부흥되는 것을 이루는 봉사는
온전한 하늘나라의 축복을 누리는 삶을 살게 하여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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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Christmas) 
/ 성탄절

[눅 2: 10-14]


크리스마스란 영국의 고어 “Christes Maesse” 라는
용어에서 유래된 말로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예배의식으로서
12월 25일을 기준하여 전 세계적으로 지켜지고 있지만
예전에는 동방정교회에서는 1월 6일을 기념일로 지키어 오다가
A.D.336년에 동,서양 교회간 합의에 의해
12월 25일로 정해지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날을 예수님 탄생일로 부르고 축제를 삼는
풍조가 있으나 크리스마스는 인간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 아니라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고 대속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 이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라는 이름은 이 땅에서 사역하시던
33년 동안 육신의 몸을 입고 있던 주님의 명칭이지만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명칭이기 때문에
단지 사람이름의 탄생 의미와는 구분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탄절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이유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1. 예수님이 오신것은 성도들에게 기쁨의 근원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와 뜻을 사람에게 나타내는 것을
'계시'
라고 하며 성탄절에 베푸신 계시는 천사를 통하여
목자들과 동방박사들에게 들려주신 두 가지가 있습니다.
[눅 2:10, 마 2:1-2]

주변 목자들에게 알려준 말씀은
“예수님 탄생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이라는 것이었고
동방박사들에게는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다스릴 왕”
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참 기쁨의 사람들이 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이유는 주님 오시기 전의 인간은 타락한 존재이며
세상은 죄와 저주로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란
불안 속에 위로일 뿐이지, 진정한 기쁨은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것은 항상 죄의 무게에 눌려 있는 상태의 종속된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기쁨이 있기전 행복이 주어지는 것으로
행복이 흘러 넘치는 것이 기쁨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 것을 사도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살전 5:16-18]
말씀으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주님 오시기 전에 인간은 죄를 피하여 있을 장소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이 세상에 죄가 없는
피난처를 제공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에덴동산을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주님은 하늘의 에덴동산을 이 땅에 가지고 오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주님 안에 영생, 부요, 유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안에서 회복된
참 기쁨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눅 2:14]

만일, 인간이 죄를 짓지 않고 에덴동산에서 계속 살았다며는
주님은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에덴동산과 하나님 나라는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다스리는 분도 한 분이신 하나님, 함께 지내는 기간도 영생,
거룩한 자녀를 생산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 허락하신 에덴동산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한 세계가 두 세계로 나뉘게 된 것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음으로 이 세상을 마귀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인간의 삶은 하나님 대신 마귀가, 선대신 악을, 부요대신 저주를,
영생 대신 죽음을 맛보는 어둠의 세상에서만 살다가
죽는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1) 예수님의 탄생은 땅과 하늘의 세계를 하나로 이루어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 위해서는 다시 하늘나라에
소속되는 회복이 이루어짐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장벽이고 사단 마귀는 죄의 근원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주장하는 것은 아담의 원죄로 인한
인간의 모든 죄를 없애기까지는 이 세상은 아담에게서
넘겨받은 자신의 정당한 소유라는 것입니다.

즉, 죄지은 인간이 있는한 이세상은 자신이 다스릴수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요구를 들어주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1)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인간을 만드신 부모와 같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2)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대신 맡아 처리하실 수 있으신 분이시며,
(3) 죄로 인한 모든 저주를 대신 짊어지고 벗겨 주실 수 있는 분 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죄의 책임을 맡으시고 대신 죽으신 성자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 땅에서 마귀의 합법적인 세력을 몰아내고 백성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통치아래 회복을 시켜주신것입니다.
이 것이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된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게 하셨습니다.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컽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사 43:7]

하나님께서 지으신 우주 만물은 모두 하나님께
감사 드리며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장 영광 받기 원하는 대상은 인간입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자녀인 우리에게 내어주며
우리가 진정 기뻐하고 감사,영광 돌리는 모습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자녀인 우리를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자녀가 하나님을 버리고 죄를 찾아 마귀를 쫓아가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6일에 걸쳐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의미가 모두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마음에 큰 아픔을 가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들 모두에게 저주를 내려야만하며, 더우기 인간을
자신을 닮은존재로 너무 사랑하심 에도 불구하고 징계를 내리셔야했기 때문입니다.
그 것은 만들어진 대상들이 모르는 오직 만든 사람만이
지니는 애정과 공들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오셔서 죄인인 옛사람은 죽고 주님 안에서
새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들을 모두 거듭나게 하시어
아버지 하나님께 다시 영광 돌리는 자녀로 데리고 오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이 얼마나 크시겠습니까?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을때 보다도 더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또한 이 땅에 평화를 주시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대상들 간의 관계를 좋게 유지시켜 주는 반면
죄는 서로를 불화시킴으로 불행한 관계를 일으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죄가 있는 한 인간이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대상과는 평화를 누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1)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에덴동산 에서는 하나님과 좋은 교제를 나누었으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었고

2) 마귀를 쫓으매

선한 하나님 편의 천사들과는 대적의 관계가 되어버렸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을 천사들이 대행하여
이 땅 인간들에게 내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인간과 인간과의 다툼입니다.

죄는 남의 것을 남겨주는 것이 아니라 빼앗으려는 마음을
갖게 하기 때문에 서로는 생존경쟁 대상들일 뿐입니다.

4) 인간과 자연과의 대적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관리책임이 없어지고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된 자연은 인간에게 좋은 것을 많이 제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5) 인간과 인간 본성인 양심과의 불편한 관계입니다.

양심은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한 영에 속한 부분이기 때문에
죄된 자아와 양심은 항상 대결구도에 있게 됩니다. 결국, 이 같은
불행의 근원은 죄와 죄를 사주하고 있는 원수 마귀 때문이며,
그들에게 굴복 당하고 있는 인간은 이세력을 물리칠 수가 없습니다.
물질의 세계는 영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방법은 마귀의 영보다 더 강하신 하나님의 영이 있어야 바로
이 같은 세력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몸소 오셔서
죄의 문제를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해결하셨고
부활하심으로 마귀의 세력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승천하신 후에는 하나님의 영이시자 자신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시어 우리 안에 함께 머물게 하심으로 죄와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의 성품으로 바꾸어 평안을 누리며 살도록 해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아버지가 되셨고 천사들은 성도들을 시중드는
섬기는 무리가 되었으며 성도들 끼리는 주 안에서 형제 자매가 되었고,
자연만물은 쉼터가 되었고, 자아와 양심은 하나님을 섬기는 동반자가 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이 분리된 가운데 살았기 때문에 불행했듯이
각자 마음속에서도 선과 악의  두 세계가 있어서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 주님은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환원시키셨고 우리의
마음속의 두 세계도 하나의 세계로 통일시켜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우리 마음속에 주인으로 모셔 들인다면
우리는 진정한 평화를 누리며 이 땅에서 살 것입니다.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모셔드리는 날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는 자들'로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v14]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참된 축복은 조건부적으로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모두 사랑하시지만 인간 모두가
천국에 들어오는 축복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자들에게만 허락하십니다.

마찬가지로 평화도 인간 모두에게 허락하셨으나 누릴 수 있는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만 허락하시고 계십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면서도
평안을 누리고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가 될 수 있을까요?

1) 진실히 행하는 자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잠언 12:22]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히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진실의 반대는 거짓입니다.
그리고 거짓의 아비는 마귀입니다. [요 8:44]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도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에
타는 못에 들어간다 말씀하셨습니다. [계 21:8]

하나님께서는 진리 자체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을 '진리의 영'이라 부르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진리의영 이신 성령님을 내려주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속성을 닮은 진리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짓을 말하지 않는 유일한 길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을 모시고 살 때 뿐입니다.

행위의 수정보다는 근본적으로 근성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거짓의 아비를 내쫓고 성령님을 모시고 진실된 삶을 산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자가 되어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삶을 살수있을 것입니다.

2)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로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롬 14:18]

우리가 자녀와 이웃 자녀들과 사랑을 줄 때 구분되듯이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자녀와 불신자들을 사랑하시는데도 구분을 두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섬긴다”는 말은 주인으로 모신 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주님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기쁜 날입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기쁨이요, 나 개인을 위한 주관적인 기쁨은
이 죄 된 세상에서 나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구세주 하나님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주님을 겉으로 모시기 보다 안으로 모셔 들이는
기쁨의 성탄절이 다같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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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

(잠 3:9-10)




"네 제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리하면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첫번째되는 수확을 받기를 즐겨하십니다.
그 이유는 만물의 씨앗을 이 땅에 심으신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추수감사절은 이 뜻을 따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수확을 올리며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1. 추수감사절의 제정



오늘날 지켜지는 추수감사절은 맨 처음 미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것이 세계적으로 전파되어 각국 마다 교회의 행사로 드려지고있습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17세기 중엽 영국의 제임스 1세때 부터
찰스 2세때 까지 약 1백년 동안 영국왕정 에 신교에서 카톨릭으로
복귀하려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카톨릭의 의식을 배격하고 순수하고 경건한 신앙생활을
추구하던 신도들은 정부의 심한 핍박을 받게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박해를 피하여 화란으로 이주하였고 마침내 이 청도교들은
신앙의 자유을 찾기위하여 1622년 102명이 '메이플라워' 라는 작은 법선을 타고
63일동안 대서양의 험한 풍랑을 헤치고 북미 대륙 동부
플리머스 항구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힘들고 험한 항해와 도착지에 풍토병, 추의 및 인디안의 습격으로
44명이 죽게 되었으며 그들의 고생과 희생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굽히지 않고 뜨거운 신앙의 열정으로 땅을 개간하고
옥수수를 심어 가을에는 풍작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믈을 흘리며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고 호의적인
인디안들을 초청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들의 생존과 수확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워진 것임을 깊이 감사하는 제사였습니다.

이로부터 매년 감사드리는 이 행사가 미국의 정식 국경일이 된 것은
미국 초대 대통령 죠지 워싱톤이 1789년 11월 26일을 추수감사절로 정한 때 부터이며,
1941년 미국의회가 대통령과 합의 아래 11월 네째 주의 토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정하고 이날을 휴일로 공포함으로 공식화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1904년 이후에 11월 10일을 장로교회 단독으로 추수감사절을 지켰으나
그 후 1914년 각 교파 선교부 회의를 거쳐 미국 선교사가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한 날을 기념한 매년 11월 세째 주의 수요일을 감사일로 정하여
예배를 드리다가 그 후 수요일을 일요일로 변경하여 매년 11월
세째 주일을 추수 감사절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쉐마 p. 402 추수감사)

그러나 한국의 전통적인 수확기는 추석이므로 11월에 드려지는
추수감사절 예식과는 시기가 일치하지 않음으로 일부 교회에서는 추석을 전후한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이 때 지난
교회적 행사로 지켜 지기 보다는 우리나라에 일맞은 추수절기인 추석과 연계 되어진
의미를 갖춘 행사가 되어 드려지는 것이 한국의 현실과는 맞는 축제가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2. 감사절의 성경적 유래


"너는 너의 추수한 것과 너의 짜낸 즙을 드리기에 더디게 말지며
너의 처음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  (출 22:29절)

이 말씀과 더불어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심은 것에
수확을 하나님께 추수감사로 드리게 되었는데, 4.5월의 보리추수를 드리는
초막절(출 34: 18-20) 과, 6월의 밀 추수를 드리는 칠칠절/오순절(출 23:16)과,
10월의 포도추수를 드리는 초박절(출 23:16), 등을 매 절기마다 지켰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성도들에게 알려주는 신앙생활을 1년 내내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심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드리는 생활을 하여야함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 감사드리는 생활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이심을
인정하는 것임으로 하나님께서 감사생활을 명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것으로 자기에게 고맙게 여기지 않습니다.
남의 것으로 도움을 받을 때, 고맙게 여깁니다. 그러므로
나의 소유의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릴 때면 감사하는
마음보다 아까운 마음이 들게 됩니다.

오늘날은 자기 중심적인 삶과 물질에 대한 지나친 욕심으로 인하여
1년에 한번 드리는 추수감사절도 부담을 느끼는 현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감사는 세상에 속한 마음을 다시 하나님 께로 향할수 있게 만들어 주는 기회입니다.

2) 감사를 드리는 생활이 하나님 으로 부터 계속적인 더 큰 축복을 받는
삶 임으로 하나님께서는 감사생활을 명하시는 것입니다.

"네 제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잠 3:9-10)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 하시는 길에는 두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무조건적인 축복의 길이요, 또 하나는 조건적인 축복의 길입니다.
무조건적인 축복은 구원과 자녀삼음과 기업을 주시고자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의 축복이요, 조건적인 축복은 생활의 축복입니다.

함께 지내면서 순종할 때 마다 아버지로서 그 때 그 때 베풀어 주시는 축복을 말합니다.
그 중에서 우리의 삶이 풍성 하도록 축복 받는 길은 네 소유와 소산물의 처음 수확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입니다. 이 첫수확을 드리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앞으로
수확될 것들의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며 또한,
첫수확은 '제일 좋은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가장 좋은 것을 드린다는
정성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 욥="여호와께서 욥의 노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 (욥 42:12).
욥은 하나님 말씀을 철저히 순종하며 열심히 제사를 드리는 생활을
한 결과 말년에 두 배의 축복을 받게 되었음을 봅니다.

3. 추수 감사절의 영적인 의미

1) 열매는 나의 부활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씨와 열매는 다릅니다. 모습, 역할, 생활, 가치등 열매가 훨씬 귀중합니다.
우리의 삶도 이 땅에 뿌려져 심겨진 씨앗들입니다. 이 다음 하나님께서
추수하실 때는 우리의 모습이 열매로 변한 부활의 모습이
되어야만 추수대열에 설수 있습니다.

"유다여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호 6:11)

그러므로 성도들은 육신인 씨앗을 주님 안에 심어
거듭남의 속사람이 자라나 성숙한 성령의 열매가 맺고 있어야만 합니다.
이 것이 땅에서의 부활이고, 이 부활이 열매로 인정되어

하늘나라에 가면 하나님께서 완전 부활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도 이 땅에서 부활된 모습을 보여 주셨으며 하늘에 오르사 완전 부활로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2) 나의 부활의 열매는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만 맺힐 수 있습니다.

"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우선 너희의 곡물의 첫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 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 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레 23:10-11)

하나님게 열납되는 요제의 제사는 제물은 흔드는 행위와, 안식일 이튿날에
드려져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물을 흔들어 드리는 요제는 주로
농산물을 제물로 드릴 때, 사용하는 제사방법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들어올리므로
그 제물의 중요성을 더욱 부가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 첫 열매가 왜 그렇게 중요하며 들어 올렸을까요? 그 것은 신약에서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귀한 의미와 연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
고전 15:20)

첫 열매중에 가장 고귀한 열매는 주님의 부활의 열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부활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주님안에 있어야만 합니다.
그 다음 안식일 이튿날에 드려야한다는 것은 주일을 의미합니다.
주일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추수감사절의 영적의미는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날 주님과 함께 주님안에 있는 부활된 나의 모습이 하나님께 열납
되어지도록 사모하며 드려지는 예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씨가 토양에 심기워질 때, 흙 속의 온도와 영양분이 씨를 발화시켜 속생명이
자라나게 하듯이 우리의 영혼도 주님안에 심기워지면 예수님의 보혈의 토양과
성령님의 영양 공급을 통하여 속 생명이 탄생되어 자라나게 됩니다.
이와같은 의미를 깨닫고 성숙한 나의 모습을 드리도록 노력한다면
나의 영,혼,육이 모두 하나님께 열납 되어지는 기쁨을 맛볼수 있을 것입니다.

3) 주님안에서 열리는 나의 열매는 풍성한 열매입니다.

씨앗과 열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씨앗은 낟알 이지만 열매는
무수히 많이 열린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앞에 드려지는 열매는
곡식의 한 알이 아니라 한 단 이었습니다. 한 씨앗의 결과를 모두 드린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나로 인하여 많은 열매가 맺혀진 단을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추수의 모습이 되어야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살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5).

열매에는 두가지의 열매가 있습니다. 첫 째는 자신이 성숙하게 익은
내적인 자신의 열매입니다. 이를 성령의 열매라 하고 나의 성숙한 모습안에
사랑, 희락,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모습으로 성화된 열매입니다.

즉, 주님을 닮은 모습을 말합니다. 두번째는 복음의 열매가 있습니다.
나로 인한 복음이 전파되어짐으로 구원의 많은 열매가 맺히는 것을 말합니다.
이 것이 나로 인하여 맺혀지는 외적인 열매들 입니다.

사도바울 은 이 외적 열매를 얼마나 많이 맺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골 1:6절에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중 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 도다." 하였습니다.

그는 온통 복음의 씨앗을 세계적으로 뿌려 수많은 복음의 열매를
맺게한 위대한 씨앗의 역할을 하신 분이십니다. 감사는 과거로부터 출발하지만
완성은 미래에서 이루워집니다. 즉 구약은 감사의 시작이요, 현재는 감사의 진행이요,
천국에서는 감사의 결과가 이루워지는 추수완료 시기가 될 것입니다.

생활의 감사는 영혼의 축복으로 주어지고, 구원의 감사는 부활의 축복으로 주어지고,
부활에 대한 감사는 영화의 열매맺는 결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모든 익은 열매가 나의 거듭난 신앙 열매의 모습으로
그리고 또한, 한 덩이의 포도송이가 내가 맺은 복음이 열매로 하나님께
기쁘게 드려진다는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추수감사 예배를 드린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에 성령의 역사하심이 풍성히 임하게 되어 각자
주어진 삶에 꽃을 피우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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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일
(롬 1:7)


이 세상에는 변화를 필요로 하는 것과
변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 두 가지 상태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원성에 속하는 것은 변화의 필요가 없는 반면,
계속성에 관한 것은 변화를 통하여 진전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점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다르기 때문에 변화의 과정을 통하여
좀 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쪽으로 완성되어 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능이 발달해 감에 따라 정치, 경제, 문화, 과학 등도
과거에 비해 무척 발전되었습니다. 이 같은 현상은
인간의 가치관을 변화시키고 이 변화된
가치관은 종교에도 많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난 것이 14세기에서 시작된 문예부흥운동으로
사회 전반에 걸친 인간중심의 문화적 성취와,
새 삶의 구현의 새 시대를 열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더 깊은 학문적 탐구와 더 높은 도덕적 정서와
민족적, 자긍심 등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종교계는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었는가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만든 원인의 한 부분이 된 것입니다.


1. 종교가 세상에 목적을 둘 때, 더 이상 영적인 사역을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종교는 지식이 아니라 진리이기 때문에 머리로 가르치기보다,
마음으로 가르쳐야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란 신앙의 대상이 자리잡고 있는 곳으로,
그 사람의 언행이 바로 신앙의 대상을 증거하는 행위로 표현 되는 곳입니다.
만일 성직자들의 마음 속에 주님 대신 세상의 것이 들어있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다 해도
더 이상 성직자로서의 자격은 상실된 것입니다.

1) 탐심은 세상의 유익을 위하여 종교를 이용하게 만듭니다.

15세기의 로마 카톨릭은 성직매매를 통하여
자격이 없는 자들이 득세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거금을 교황청에 주고 자리를 얻은 관계로
부정부패를 통하여 자신의 유익을 챙기는 무리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 같은 현상은 백성들로 하여금 교회가 더 이상 구제 보호처가 아니라
착취처로 반감을 사게 만들었습니다.

2) 음란은 육신의 정욕을 위하여 권위를 남용하게 만듭니다.

향락생활에는 반드시 음란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성직자들이 독신으로 지내야 하는 것이 교회의 공식적인 규칙인데도 불구하고
주교들과 신부들은 사생아를 낳아 그들을 수도원 수녀원에서 기르거나
또한 그들이 커지면 그들로 수도원장, 수녀원장을 임명하여
금욕주의 경건생활과는 먼 연회와 파티의 무대로
전락을 시켜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예로 인문주의 자들의 왕자로 불렸던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도
신부와 의사의 딸 사이에서 난 사생아로서
평생 이러한 자신의 출생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3) 교만은 권세를 위하여 과도한 업적을 이루도록 만듭니다.

1500년도에 당시 교황은 레오 10세로 그의 야망 중 하나는
쥴리어스 2세가 시작하였던 성 베드로 대 성당을 완공 하는 일이었는데
이 건축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면죄부를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를 판매하는 성직자들은 '이 면죄부는 죄인들을 세례보다
더 깨끗이 만들며
타락이전의 아담보다 더 순결하게 만든다.'
라고 선전했을 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을 위해서는
'헌금함 바닥에 동전이 딸랑하고 떨어진 순간에 연옥에 갇혀 있던
영혼은 화살처럼 솟아오른다.'
등의 감언이설로
주민들에게 막대한 판매대금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가 시작될 때에는 경고를 주시지만
죄가 만연할 때에는 징계를 하십니다.

즉, 이 징계는 바로 종교개혁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2. 종교개혁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 말씀중심으로서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종교개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마르틴 루터 입니다.
그리고 그가 카톨릭 교회의 죄상을 밝힌 95개의 신조문을
만성전 전날 발표하였는데 이날은 1517년 10월 31일이었으므로
이 날이 종교개혁일로 기록되어 오늘날 지켜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개신교를 '프로테스탄트'로 부르는 이유는
1523년 '누렘베르그'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결의된
'루터 주의자'들에 대한 융화 결정이,
루터를 이단으로 결정했던 과거 윔스 칙령이
또다시 1529년에 재 승인되므로 루터를 지지하는 이들이
공식적 항의문을 제출함에 따라 '저항하는 자들'
즉, '프로테스탄트' 란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1) 마르틴 루터의 회심

루터는 1483년 독일의 아이슬레벤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아들을 법률가로 만들기 위하여 법학을 전공시켰으나
졸업을 앞두고 친구와 더불어 학교로 돌아가던 중- 비를 피하여
큰 나무 밑에 서있는 순간, 갑자기 번개가 나무에 떨어져 그 옆에 있었던
친구가 순간적으로 감전되어 재로 변해 죽어버리는 사고를 당하게 되자
하나님께 서원하기를 자신을 살려주시면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함으로,
22세 때에 어거스틴 수도원으로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유달리 죄의식이 강한 사람으로서
그 의식에서 벗어나고자 갖은 노력을 다 기울였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의 고해성사와 나중에는 로마로 가서
주님이 끌려 올라가셨던 빌라도 28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며
회개와 죄 사함을 받기를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엔 평화가 오지 않는 가운데 깨달음이 오기를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의인이 될 수 있는 길을 몰랐던 그는
1515년에 로마서 강해를 공부하던 중  
[롬 1: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이 구절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그 때까지 잘못 깨달았던
하나님의 공의 즉, '심판 하실 의'가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 행하신 공의로서 내가 그 것을 믿고 인정하여
주님을 받아들이면 죄인인 내가 값없이 의인이 된다는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당시 기존 교회가 시행하고 있는 근본적인 모순들을
95개 조항으로 작성하여 당시 면죄부를 판매하고 있는 성직자들과
영주들의 행위를 지적하는 문서를 비텐베르그 교회 정문에 붙였습니다.

2)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내용

루터는 면죄부 판매에 대하여
만일 교황에게 영혼들을 연옥에서 해방시킬 힘이 있다면
그는 이러한 힘을 예배당 건축과 같은 하찮은 일에
면죄부 판매를 위하여 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성당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위해 구제금으로 써야 하며
죄인의 영혼들을 위하여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사용해야 한다.
(82조) 라고 공시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결과로 그는 1521년 윔스에 소집된 의회에 소환되었습니다.
이 때 황제가 질문하기를 '그대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는가?'란 질문에
대답하기를ㅡ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사로잡힌바 되었습니다.
나는 철회 할 수 도 없으며 철회하지도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양심에 불복하는 것은 옳은 것도 안전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ㅡ아멘' 하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또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1) 성경의 권위가 교회의 권위 위에 있어야 합니다.

카톨릭에서는 성경의 정경성 여부를 교회가 결정한 만큼
교회가 성경보다 우선적인 권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루터는 반문하기를 교회가 성경을 만든 것도 아니고, 성경이 교회를
만든 것도 아니며, 성경과 교회 둘 다를 존재하게 한 것은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라 하였습니다.

따라서 최종적 권위는 성육신 하신 하나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시며, 그분의 말씀이어야 함을 주장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말씀하실 땐 그분의 능력도 함께 하심
- 천지창조 이것이 최종 권위의 증거임)

(2) 율법은 죄를 위하여 주어지기보다 죄를 안 짓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며, 복음은 지은 죄를 해결해주는 유일한 길입니다.

율법은, 복음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때는
심판과 정죄의 역할로 다가오기 때문에 두려운 징계로 여겨지나
복음의 은혜를 깨닫고 나면 율법의 성격이 변하여 오히려
나에게 죄를 안 짓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할 일을 가리켜주는 인도의 역할을 하게 됨을 깨달았습니다.

다시 말해 죄인에게는, 지은 죄가 거론이 될 때마다
마음에 죄책감을 유발시켜 싫지만 의인에게는
어떤 죄목이던지 마음에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고
오히려 '그런 죄를 왜 짓나 착한 일을 해야지'
하는 마음이 드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의 대속으로 의인이 된 신자는 믿음 안에서
모든 죄에서 해방이 됨을 느끼고 감사하며 살게 됩니다.

(3) 성찬의 의미는 ‘화체설’이 아니라 ‘공재설’임을 주장하였습니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성찬식 시 직접 떡이 주님의 몸이 되고,
포도주가 피가 된다는 "화체설"을 주장하고 있으나,

루터는 떡은 계속 떡이며 포도주는 계속 포도주이지만
주님께서, 내 몸과 피로 제정한 것이기 때문에
이제 신자는 떡과 포도주를 마시는 행동을 통하여,
믿음으로 주님의 몸과 피의 혜택을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공재설" 이라 하며 성찬의 공재설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위의 세가지 주장은 신학적으로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으며 개신교의 태동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3. 종교 개혁의 결과들

루터의 세 교리 주장을 필두로 많은 신학자들이
성경의 진리를 새로 정립하는 활발한 활동들이 전개 되었으며
이에 가장 유명한 사람이 존 칼빈이었습니다.
그는 여러가지 프로테스탄트의 교리를 한데 묶어
체계를 이룩한 위인이었습니다.

1) 존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칼빈주의를 낳게 했으며
장로교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칼빈은 루터보다 26년 후인 1509년에 프랑스의 '노용 '이란 도시에서
이 곳 성당의 참사회원으로 있는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이미 20세에 위클리프, 후스, 루터의 가르침에 통달한 명석한 젊은이였으며
그 때까지 취급되지 않았던 삼위일체, 성육신, 성령론 등을 정리하여
4권 80장에 이르는 기독교강요 전집을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성찬에 대한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하여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그러나 진정으로 성찬에 임하신다는
'영적 임재설'과 장로들로 구성된 당회를 통한 교회 운영등과,
이미 구원 받을 영혼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여 놓으셨다는,
예정설은 장로교의 기본교리가 되어 운영되게 되었습니다.

2) 요한 웨슬리의 모라비안의 경건과 개혁파의 특징인
사회적 활동을 결합시킨 사역은 감리교를 창설케 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사무엘 웨슬리 사제와 스잔나 사이에서 15번 째 아들로
태어난 아들로 옥스퍼드 대학에서 "홀리 클럽"이란 모임을 만들어
한 주에 한번 성찬과, 개인적 경건의 시간을 가지며,
정기적으로 감옥을 방문하여 죄수를 위로하고, 매일 오후,
한 곳에 모여 3시간씩 성경공부를 하는 단체를 운영하였습니다.
주변에서 이들의 모임을 '메소시스트'라고 부름으로
오늘날 감리교 명칭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평신도를 지도자로 삼아 11명씩 감당하게 하고, 특히 영국
국교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 여성들을 지도자로 세워,
여성들만을 인도하는 기회를 줌으로
많은 여성 사역자 들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웨슬리 자신은 감독이라는 명칭보다는
"슈퍼 인텐텐트"의 호칭을 사용하기 원했으나
미합중국 내의 감리파가 감독중심 교회를 조직함으로
감독체제로 운영되는 감리교회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칼빈의 예정설 과는 달리 만민구원설과 (알미니안주의),
성찬위주의 예배는 감리교의 주류가 되었습니다.
이외에도 많은 교단과 교파가 각자에 알맞은 교리 위에 세워져
개신교 시대의 막을 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종교 개혁일을 맞는 각 교회 성도들은
이 날을 계기로 많이 변질 된 개신교의 모습을
다시 성경중심으로 되돌아가는 기회로 삼아
참된 신앙의 회복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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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삶
(눅14: 26- 27)



신약에서 ‘제자’ 라는 단어는 269회 나오고
그리스도인 이란 말은 3회이며 신자란 단어는 2회만 나옵니다.
이와 같은 회수는 성경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특별한 의미를 주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교회의 임무는 그리스도인이나 신자를 만드는 것보다도
제자를 삼는 일이 가장 중요한 임무이며 성도 또한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신앙자세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주님을 좇은 무리들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권능과 이적으로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고 떡을 먹이시고 하시자
따르는 무리들은 영혼구원과 천국에 관한 관심보다는 당면한 현실인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해방 시켜줄 정치적 지도자로 추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구원의 대상’ ‘영혼’이며 구원의 방법은 ‘복음’이었지
무력이나 반란을 일으켜 육신을 해방 시키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복음을 영혼보다는 육신에 관계하여, 그리고 천국보다는
현실의 처지 해결을 위한 방편으로 삼는 신앙생활을 할 경우에는 구원보다는
기복신앙 쪽으로 본질이 바뀌어지는 믿음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제자로써의 삶에서 벗어나 인본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됨으로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가 되는 조건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로 하여금 제자를 삼는 삶을 살라고 명하셨습니다.


1. 그러면 주님이 말씀하신 제자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1)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눅14: 26]

세상의 어느 대상도 예수님 보다는 덜 사랑해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부모 친족을 덜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현상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롬 5:5]

예수님을 제일 사랑하게 되면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심으로 예수님도 더욱 아가페적 사랑으로 섬기고 사람들에게도
더욱 폭 넓고 깊은 신앙 안에서 사랑하게 됨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생과 영혼의 중심이십니다. 나 중심에서는 나의 역량만 발휘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나의 인생에 중심으로 모시게 되면 주님의 역량이 발휘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님의 역할입니다. 가장 큰 은사인 사랑으로 부어주십니다.

2)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27]

그리스도인에게는 누구나 자신들에게 주어진 십자가와
짊어질 십자가가 있습니다. 즉, ‘생활의 십자가’‘사명의 십자가’ 입니다.

[예] 신체적인 결함, 병든 부모, 배우자 및 자녀의 수발,
대가족 양육부담, 시댁 시집살이… 등

이 같은 현상들은 나를 연단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짊어지게 하신
생활의 십자가 입니다. 이를 통하여 인내와 겸손을 배우게 되고
죄 된 욕망의 길로 가는 것을 막아줍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말씀은
한걸음 더 나아가 주님 때문에 겪는 어려움을 감수 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사명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희생과 고통을 겪는 것을 말합니다. 그 것은 전도, 양육, 교육, 섬김, 봉사,
구제, 선교, 등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할 때 생기는 어려움 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환경에 주어진 십자가도 피하고 싶은 게 사람의 심정입니다.
그러나 짊어질 십자가를 외면할 수 없는 것은 주님이 내 처형 받을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셨기 때문에 주님께서 대신 짊어지라고 허락하신 작은 십자가일 망정,
남을 위하여 나도 져야 함을 깨달음으로 자진하여 질 수 있게 됩니다.


3) 자신의 소유를 아낌없이 내려 놓을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14: 33]

예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교회에
헌금하거나 구제로 가난한 자에게 나눠 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유를 올바르게 사용 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의 축복을 주심은 소유의 기쁨을 위하여
주신 것이 아니라 사용의 기쁨을 위하여 맡기신 것 입니다.
그러므로 소유냐, 사용이냐의 물질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제자도의 진실성을 가늠하는 척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 부자청년)


이를 위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물질의 궁핍함을 한번은 겪게 하십니다.
온전히 주님을 의지 하는 법을 배우게 하신 후에 넉넉함의 축복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야 물질에 얽매이는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2. 주님이 말씀하시는 제자로서의 임무는 무엇일까요?

1)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 제자의 임무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13: 34-35]

[예] 경건한 '사무엘 러더포드'라는 목사는 토요일 저녁이면
가족과 성경공부를 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어느 토요일 저녁, 누군가 문을 두드려서 열어 보았더니
낯선 사람이 하루 쉬어 가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함께 들어와 성경공부를 하는 가운데
가장 쉬운 질문을 그에게 하였습니다.

“계명은 모두 몇 가지 있지요?” “네. 열 하나입니다.”
그러자 그는 그 손님이 당황하지 않도록 “10 가지겠지요.”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손님이 말하기를 “거기에 하나 더, 예수님께서 새 계명으로
‘서로 사랑하라’ 하신 것이 추가되어 11계명입니다.” 하였습니다.

이튿날 주일 아침, 러더포드 목사는 울타리 뒤에서 나오는
기도 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참으로 진실한 기도에 감동되어 한참
기다리다 기도가 끝나자“당신은 누구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예, 저는 아일랜드 대주교 ‘어셔’ 입니다. 당신의 경건이 널리 퍼져
직접 확인해 보려고 이 방법을 썼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은 선택이 아니라 계명적 순종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의지적 행위보다는 계명으로 지켜 행하는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명령으로서의
근거는 자신의 십자가의 사랑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사랑을 감정으로 행하려고 할 때는 차등이 작용하게 됩니다.
계명으로 행하려 할 때에 평등함으로 모두에게 베풀 수 있게 됩니다.

2)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것이 제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요 15:8]
열매에는 두 가지의 영역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내적인 영역의 열매”
‘회개의 열매’와(마 3:8) ‘성령의 열매’(갈 5:22)가 있고,
또 한 가지는 “외적인 영역의 열매”‘복음의 열매’가 있습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 4:35]


내적인 열매는 '성숙에 관한 문제'이고, 외적인 열매는 '상급'에 관한 문제'입니다.

자녀가 어렸을 땐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지만 성인이 되어 철이 들면
부모의 뜻대로 하려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 안에서 성숙하게 되면
주님의 뜻을 이루며 살려고 하게 됩니다. 그 것이 바로 전도의 삶입니다.

미성숙할 땐 말로 하려 하지만 성숙하면 행위로 합니다.
미성숙은 '양' 위주로 목표을 채우려하지만, 성숙은 '내용'을 위주로 합니다.

미성숙은 '인도'하면 끝이지만, 성숙은 '바로 설 때까지’
보살핍니다. 전도의 동기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3) 날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이 제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이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1]

대개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는 - 나에게 위로를 줄 약속의 말씀을 보기 위함이요,
그 다음에는 용기를 얻을 능력의 말씀을 찾기 위함일 때가 많습니다.

이 때는 대개 나의 처지가 어려운 환경에 지배를 받고 있을 때의 신앙의 경우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양식과 묵상으로 매일 꾸준히 먹고 그 말씀을 간직하고 사는 삶은
신앙이 환경을 다스리는 상태가 되어 형편을 넘어선 평안함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생명은 취사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의 문제이기 때문에 매일 양식을 먹어야 유지됩니다.
거듭난 생명은 매일 말씀을 양식으로 먹고 묵상으로 말씀을 간직하며 살게 만듭니다.

순종은 말씀이 온전히 내 것이 되었을 때 나타나는 표현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너도 가서 제자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의 마지막 사명은 결국 제자 삼는 삶입니다.
이는 주님의 마지막 명령을 지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 28:19)

3. 제자로서의 삶은 우리에게 영원한 영광의 삶을 약속하십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로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요 12:26]

1) 제자의 특권은 주님께서 항상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떨어져 사는 세상이지만 주님과 다시 한 번
이 세상에서 사는 기회는 반드시 오게 됩니다.
그 기간은 "천년왕국"입니다.

그 때는 주님과 더불어 왕 노릇 한다고 하였습니다.
참 제자가 되는 기회는 바로 이 시간 밖에 없습니다.
이 시기에 삶은 그 시대의 삶에 준비기간입니다.
우리의 삶이 세상의 삶으로 마감되지 않습니다.
천국에서 기다리시는 주님을 생각하며,
제자가 되어 다시 이 땅에 내려와 주님의 나라를
세우고 다스리는 기쁨을 기대하여 보십시오.

지나간 세월은 아깝지 않고, 남은 세월은 귀중하며, 어서 천국 가서
주님과 함께 완전한 행복의 삶을 사는 기쁨 속에 살게 될 것입니다.

2) 제자의 기쁨은 하나님께서 저를 귀중히 여기시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귀중히 여기실 존재가 못됩니다. 하나님을 배반했고
죄를 더 사랑하며, 천국보다 세상을 더 좋아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용서는 받아도 의인으로서의 인정은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 때문에 우리를 귀중히 여기신다 하셨습니다.
즉, 주님께 대하시는 태도로 우리에게도 대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 것은 아브라함, 다윗, 다니엘에게 베푸신 은총보다도 더 귀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우리에게 맡겨주시는 것입니다.

천년왕국 후에는 하나님의 후사가 되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미래를 위한 것입니다. 참 믿음의 생활이 미래를
결정합니다. 그 것이 바로 '제자로서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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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정의

(갈 2:20)



사람들은 사물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살아있다고합니다. 즉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삶에는 한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즉 생명이 육신에 필요하듯이,  영생은 영혼에 필요합니다.
이 두가지가 합한 삶을 살아있는 삶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계3:1)

그러므로 첫째로, 살아있으나 죽은 것같이 사는 삶이 있고,
(예) 죄수, 병자, 독재하의 주민들은 몸은 살았으나 영혼이 묶여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죽은 삶입니다. (약 2:26=" 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두번째는 살았으나 죽어가는 줄을 모르고 사는 삶이 있고,
(예) 세상사람들은 영은 죽고 혼과 육만 살아있는 상태임으로 죄의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음)
(딤전 5:6)="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마지막으로 산자가 마치 영원히 죽지 않을 것같이 사는 삶이 있습니다.
   (예) 그리스도인들은 영, 혼, 육이 다 살아있는 상태입니다.
(요 11:25)="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사람이 죽음을 생각하고 사는 삶과 나는 결코 죽지않고 영원히 산다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삶과는 삶의 본질이 크게 다릅니다. (시각, 시야, 가치관...등)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와 같은 삶을 보여주셨고,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은
바로 주님을 본받고 사는 사람들이여야함을 성경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같은 삶을 직접 체험한 사도바울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본문에서 정의를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이란 죽음의 체험을 한 사람이어야합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나니..."
사람은 살면서 여러가지 체험을 많이 하고삽니다. 고난을 많이 받으면
하나님의 율례를 깨닫게되고(다윗) 인내를 오래하면 온유한 성품을 배양할 수 있고(모세),
자녀를 양육하고 희생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아브라함)

이 모두가 다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 위하여는 꼭 필요한 경험이지만, 정작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기 위해서는 죽는 체험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왜냐하면 삶의 가장
큰 변화인 죄로부터의 해방은 죽음의 체험을 통하여야만 생기기 때문입니다.   

1) 그리스도인은 죄의 문제를 처리한 사람들입니다.

율법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였던 구약의 사람들은 죄의 전가의 개념이 전부였습니다.
즉 지은 죄를 제물로 옮겨 보내면서 다시 씼음받고 산다는 속죄관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는 오직 제물만 드리면 된다는 의식적신앙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이 것은 자신은 영원한 죄인이라는 인식하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때문에 백성으로서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전가된 죄를 위하여 제물이 되신 것이 아니라, 죄덩어리인 우리 자체를
자기의 죽음 안에서 함께 죽게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전1:30)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거듭난 우리는 삶의 새 출발이
예수님안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혈통과 족보를 지닌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그안에서 함께 죽은 것입니다.
 
마치 내가 죄를 짓지 않은 상태에서도 나의 죄돤 생명이 아담안에 있음으로 죄인으로
전수되어내려온 것같이,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안에서 아담의 죄된 생명이 끊어지고
죄에서 벗어난 새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나에게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은 매일 자신이 죽고 새로 태어남을 인식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유대인들은 하루에도 세번이상 성전에 나가 기도하였습니다.
 즉 매일 예배드린 것을 의미합니다. 그 때마다 자신은 죽었고 새로 탄생된
하나님의 자녀임을 아뢰고 감사를 드리라고 사도바울은 말씀하십니다.
즉 죽음의 인식이 없이는 새 생명의 체험이 생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 마르틴 루터가 스칼라 상타 성당앞에 예수님이 밝고 올라가셨던 빌라도
법정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며 죄사함의 기쁨을 얻으려 애를 썼지만
아무런 감동이 오질 않았습니다. 그 때에 루터의 귀에 번개처럼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는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크게 깨우치기를 죄사함은 살아있는 육신을 고생시킴으로 죄가
씼겨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죄된몸은 죽었다는 믿음으로 죄가 처리되었음을 인식하고
살 때에 그 믿음이 나를 의롭게 하여 의인으로 살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 그가 부르짓기를 (1) Sola Fide(오직 믿음으로)
(2)Daily Baptism(매일 세례)
를 외치고 살았으며 그의 이와같은 매일 죽음의 인식과
의인으로서의 믿음의 삶은 드디어 종교개혁을 완성시키게 만든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을 나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갈 2:20)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사도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삶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었고, 삶의 방법이 율법준수였습니다. 결국 그 삶은 하나님을
 믿는 삶이었지만 예수님을 핍박하며 구원의 길을 부인한 삶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주님을 핍박하고 구원의 길을 무시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즉 사도바울과 같이 자기자신이 주인이 되어 세상 쫓아 살면서
자기 의를 나타내고 사는 삶이 바로 구원의 길을 부인하는 삶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주신 생명을 지니고 산다는 것은, 예수님을 자신의 삶의 주인이심을
모시고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때 주님은, 우리의 연약한 육신과 죄된 마음으로부터 벗어나
영의 자녀로서 주님의 삶을 본받도록 우리를 인도하신 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주인의 바뀜없이 삶의 바뀜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체험을 한 사도바울은 성경에 말씀합니다.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전 1:30)
죄된 자아의 주인은 우리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한 삶을
살게 만들지만 (그리스도인 일지라도) 예수님으로 우리의 삶의 주인을
삼고나면 다음과 같은 삶으로 변화시켜주십니다.  

1) 우리로 지혜로운 삶을 살게 만듭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근본으로 삼고 살도록 해줍니다. (잠9:10)
삶의 목적을 바로 알고 살게 만들어줍니다.

2) 우리로 의로운 삶을 살게하십니다.

의로움이란 죄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죄가 없는 상태에서
 살게 해주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 죄를 짓고 싶은 마음과
죄책감에 시달림은 나의 죄된 자아가 주인으로 있음으로 오는 자연 현상입니다.
죄 가 없으신 분이 다스리는 곳엔 죄도 있을 수 없습니다.  

3) 거룩한 삶을 살게 하여 주십니다;

거룩함이란 성결을 의미합니다. 죄의 짝은 마귀입니다.
죄된 자아는 마귀를 좋아합니다. 타락된 세상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신부가 된 성도는 신랑되신 예수님을 좋아합니다.
이는 성결한 신부로서의 삶을 살게 만들어줍니다.

4) 구속받은 삶을 살게 만들어줍니다.

이는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즉 종에게는 노동, 짐, 부자유, 복종, 정죄가 주어져 있는 반면,
자녀에게는 자유, 부요, 기업, 축복, 사랑이 주어지게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진정한 기쁨과 행복한 삶을 살게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불행한 삶을 사는 것은 내 안에 불행한 내가 나를 다스리고 있기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행복한 삶을 사는 것도 내안에 행복한 주님을 모시고 살면됩니다.
사도바울의 자족한 삶의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음을 봅니다.


3. 그리스도인이란 믿음으로 사는 사람임을 의미합니다.

"내가 이제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사랑이 있어야 함께 살기를 원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살지 못하는 이유는
그분을 진정 사랑하고 있지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읋 따라 살지
못하는 이유는 그분의 말씀이 영생의 말씀임을 믿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성은 과학과 상식을 선호합니다. 그러므로 혼은 영의 세계를 알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다시 말해 영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영으로 산 다는 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본성이나, 이성의 지식으로는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유도
섭리도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알 수 있는 길은 영생을 이해할 때,
비로서 주님이 나의 영생의 길을 위하여 죽으셔야만 했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신데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오직 나의 죄를 위하여 바쳐진 제물의 의미밖에는 없습니다. (구약신앙처럼)

주님은 나와 같이 천국에서 영원히 사랑하는 신랑과 신부로 살기 위하여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가장 값비싼 댓가를 치루는 것으로 증명이 됩니다. 나를 위하여 어느 누구도
죽을 사람은 없습니다. 부모, 형제, 자녀, 친구 누구도 마음은 있어도 행동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죽음후에 이어져야할 내세의 아무런 보장 없이 끝나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부활하셔서 내세에 나와함께 할 삶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간직하고 사는 삶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삷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의 빛을 갚고 신부가 되는 기회는 오직 이 땅에서의 남은 삶의 기간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신부임을 깨닫고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임을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나의 남은 삶을 신부의 자격을 얻는 기간으로 여기고 다같이 성화의 삶을 함께 열심히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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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절(The Advent)


강림절이라고도 불리우는 '대강절'은 영어로 'The Advent '도래''출현'이라는 의미로써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초림과 오실 재림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의 시작은 크리스마스 4주 전부터 시작이 되며
2010년에는 11월 28일부터 시작이됩니다.

 대강절이 성도에게 중요한 이유는 이 날이 영적인 새해로 지켜지는 의미 때문입니다.
새해가 1월1일 부터 시작되듯이 교회력은 대강절부터 새해가 시작이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처음과 나중이시기 때문이며
모든 것이 그분으로부터 시작이 되었으며
또한 그분이 오심으로 마감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절기의 시작은 A.D. 4세기경 성 안드레 기념일인 11월 30일을 기준하여
지켜지기 시작했으며 이 날에 제일 가까운 주일부터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1. 강림절에 담긴 의미는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1)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기간입니다.

대개 성탄절은 전날 밤과 당일 날에 큰 행사로 지켜지고 있습니다만,
주님 오신날만 중요하게 여기기 보다는, 오시기까지 하나님과 성령님의 인간 구원을 위한
사랑의 예비과정이 천국에서 역사적으로 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의 천군 천사가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도 성탄절 전에 하늘에서의 영광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주님 탄생일을 기쁨으로 맞이하면
구원받은 것에 대한 고마움이 생겨
나의 기쁨의 행사의 날이 아닌 주님을 귀히여기는 마음으로 지내게 됩니다.

2) 예수님의 영광중에 다시 오실 재림을 기다리며 고대하는 기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주님이 오심으로 시작되었으나 완성은 재림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재림의 시기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현재 일에 더욱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개인의 구원의 시작은 거듭님으로 출발하지만 주님이 나를 알아보시기 위해서는
성화의 길을 부지런히 걸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오실 때, 주님이 부르실 사람은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뜻대로 행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에게
아무리 선지자 노릇과 권능을 행하였어도 주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3) 하셨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일한 일군들도 이럴진대
세상 먹고사는 일에 정신없이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겐 어떻겠습니까?
그러므로 적어도 이 기간 만큼은 주님을 사모하며 이 세상의 미련을 줄이고
천국소망을 바라보며 살 때에 주님은 나를 기억하며 오시는 날 부르실 것입니다.

3) 부활의 영으로 오신 예수님을 마음속에 꼭 모시고 사는 기간입니다.


초림과 재림은 가시적인 현상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러나 그 중간기간 동안은 주님이 우리를 떠나 안계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영으로 오셔서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고 게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중요역할 중, 한 가지가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깨닫게 하심과 체험을 주시는 사역입니다.   

대강절 기간동안 특히 부활하신 주님이 내 안에 함께 계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지낼 때에 우리의 마음은 창조시부터 새창조시까지 한 흐름속에 연결이 되어있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구원과정 전반을 이해할수 있게 될것입니다. 즉 현실 속애 살고있지만
과거도, 미래도 모두 소중하게, 지내온, 지나가는, 지나갈,과정으로 여기며 은혜로
 천국을 사모하면서  영생을 누리는 삶을 살수 있을 것입니다.

2. 에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1) 죄인인 우리들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


인간은 죄를 타고 탄생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죄인인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면 양심속에 느꼈던 가책이
모두 심각한 죄로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이는 세상의 의를 기준하고 사는 사람에게는 정직한 것이 의인인 줄 알고 살기 때문에
깨우치기가 어려우나, 세상 속에서 천한 직업가운데 살고있는 세리나, 창기나, 노동자들에게는
바리새인, 율법사들에 비해서 상당한 죄의식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주님은 죄를 느끼고 있는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죄 의식을 벗겨주시고 천국복음의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전해주셨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느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 자체가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나를 부르십니다. 응답하면 나도 멸망과 죽음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2) 부른 자들에게 더욱 풍성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

'더 풍성히'란 말은 -어느 비교 대상보다 더 나은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생명을 처음 지닌 아담의 생명을 비교하여하신 말씀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아담의 삶과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다를까요?
피조물의 삶과 자녀의 삶이고,
이 땅에서의 삶과 천국에서의 삶이며,
죄 속에서의 삶과 성령안에서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으로 인하여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 삶이 영생을 주심으로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3) 마귀의 일을 멸하려 오셨습니다.

"하나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1서 3:8)

예수님은 우리 죄를 씻어주려오셨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죄를 더 짓지 않도록
마귀의 일을 물리쳐주시는 것입니다. 마귀의 최대의 무기는 죽음입니다.

마귀가 제일 무서워 하는 것이 부활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무기가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죽음 후에 오는 것이며, 죽음은 피를 흘려야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피는 죄의 댓가의 피이기 때문에 마귀의 죽음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보혈은 의로운 보혈임으로 죄에 속할 수가 없는 보혈입니다.
오히려 죽음을 이기고 부활을 가져온 승리의 보혈이 된 것입니다.

주님 살아계셨을 때는 직접 마귀의 일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의 보혈의 공로로 마귀를 이기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이천년 전에 오신 주님의 세가지 공로 즉 구원, 영생, 죄의 승리는
이 땅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아담보다 더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이유도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오십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속으로 끌려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 16-17)

우리는 죽어있던 살아있던 우리의 구원은 주님이 오실때 완성이 이루워집니다.
즉 구원을 받은 상태에서 천국에서 누리는 삶으로 바꿔지는 것입니다.

2) 이 땅에 천년왕국을 세우려 오십니다. (계 20:4)

천년왕국의 주인공들은 주님을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고 먼저 죽은 자들과
 휴거되어 올라간 성도들입니다. 선택되어 상받을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는 여전히 마귀가 무저갱에 갇힌 가운데 죄가 없는 세상에 선한
그리스도인들이 남아 살게됩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천년동안 왕 노릇하는 성도들은
영생과 부활의 능력을 덧입은 신령한 몸이 된 성도들입니다.
 마지막 새창조된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예비사역이 될 것입니다.

3) 마귀를 감금하러 오십니다. (계 20:1-3)

마귀는 두번을 큰 죄를 지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배반하여 대적한 죄이고,
두번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면 먼저 주님의 심판이 이루워집니다.
이 것이 천년동안 무저갱 감금이고, 그 후에 다시 풀려 나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영원히 불과 유황못에 던져지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로인해 예수님만이 구원자이며 심판주 되심을 증명하실 것입니다.
ㅡ 주님 어서 오셔서 증명하여 주시옵소서.

4. 주님을 기다리는 옳은 자세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1) 주님과의 바른 관계를 정립하고 있어야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주인, 세례주, 영혼의 신랑되시는 분이십니다.
이 네가지 관계를 믿음과, 섬김과, 순종과, 사랑으로,바로 정립하고 살 때에
대강절 의미는 나에게 참 소중하게 지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2) 성령님 인도하심 따라 살아야합니다.

성령님의 이 땅에서의 활동은 주님 재림 전까지 입니다.
주님 오실 때 교회도 성도도 다 들림받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 모든 사실을 알고 계신 분은 성령님이시요,
우리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성화를 적용시켜주시는 분도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순종과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령님을 모실 때, 우리를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를 위해 대강절은 전체 나의구원을 이루는 주님의 놀라우신 역사를 기대하는 기간으로
여겨지게되며 ,소중히 사모하면서 지낼 때에 구원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넘쳐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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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신앙
(요 11:25-26)



화가 '아더 브레스베인' 의 작품중에 '유충들의 장례식'이란 그림이 있는데
물 속에서 한 유충의 허물을 관에 넣고 검은 옷을 입은 유충들이 모여 울고 있는 장면이
있는 반면 물위 하늘에서는 껍질을 벗고 아름다운 잠자리가 되어 하늘을 날으며
그 장례식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는 안타까운 표정을 그린 그림입니다.

화가 '아더'는 이그림을 통하여 우리에게 천국에서 우리의 시신을 놓고
울고있는 모습을 내려다보는 부활로 변화된 천국에 간 성도의 모습을
그려보도록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신앙이란 무엇일까요?

 1. 완성된 모습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사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바로 하나님의 세계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사는 것과 세상속에서 나를 바라보며 사는
시각과의 차이입니다. 만일 유충같이 물속에서 자신의 모습과
삶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라면 유층체질의 건강과 물속에서의
배부른 삶이 바라는 것의 전부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속에서 자신의 모습과 삶을 전부로 여긴다면
우리 또한 육신의 건강과 이 세상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소망이 전부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썩어질 것과 신령한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생물체에 한 생명이지만 이중구조의 모습, 능력,
삶이 구분되도록 변화를 두신 것입니다.

즉 식물의 씨와 형체는 전혀다르고 유충과 성충의 모습도 전혀다릅니다.
버드나무씨는 먼지덩이같고, 코스모스씨는 때묻은 손톱 조각같고, 애벌레나 유충은 징그러운
벌레같지만   완성된 그들의 모습은 얼마나 화려하고 능력있는 삶을 사는 지 모릅니다.

그러면 씨가 진짜인가? 꽃의 형태가 진짜인가요? 유충의 모습과 삶이 진짜인가?
나비와 잠자리의 모습이 진짜인가요? 물론 완성된 모습이 진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육신의 모습과 삶이 진짜일까요? 부활의 모습과 삶이 진짜일까요?
하나님의 예정하심은 부활의 모습과 삶이 진짜인 것입니다.

뇌성마비 시인-'송명희'양은 1963년에 출생했습니다. 뇌성마비로 태어났기 때문에
몸도 얼굴도 가누질못하는 전신 지체 장애자입니다. 슬픔속에서 지내던 어느날 너무 자신이
원망스러워 자신을 이렇게 빚으신 하나님을 만나보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하나님 저를 만나주세요.
그러면 저의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수없이 부르짖던 어느날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나주셨습니다.  

고전 15:10="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자신이 그와 같이 된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이제 나는 이런 몸이라고해서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나는 이 몸으로 이 땅에서 할 일이 있고 그 후에는 나는 변하여
부활의 영광된 모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후로 장애인들을 위햐여 일하고 위로하고 성도들에게 부활신앙을
간증, 시집, 수기...출판을 통하여 자신의 참된 신앙을 보여주며 살고있습니다.
부활된 모습과 삶을 간직하고 사는 믿음은 자신의 삶을 이기고 생명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참된 신앙생활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2. 부활신앙이란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사는 신앙생활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은 초상집에 갔을 때, 마르다가 말하기를 '마지막 날 부활에는
오라비가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하였을 때, 주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하셨습니다. 마르다를 위로하기 위하여 나사로를  살려주실려면 생명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생명이요, 부활이니'하셔야 될텐데 그렇지앟고 부활을 생명보다
앞서 말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원형의 삶을 기준으로 이 땅에서 살고 있으시기 때문이고
우리들은 유충의 삶을 기준으로 이 땅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마르다에게
알려주기위하여 부활이 생명보다 중심이 되어야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1) 부활신앙이란 사후가 아니라 현실에서 적용되는 신앙입니다.

마르다는 마지막 부활 때, 다시 산다는 신앙을 지닌 미래 부활신앙의 소유지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녀에게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요11;40) 하시면서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하고 큰 소리로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죽은 나사로가 베를 동인채 걸어나왔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이해를 세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이 사건이 2천년전에 일어난 과거 부활 사건으로 보는 것과
둘째, 예수님 재림 때 모두 부활할 것을 믿는 종말론적 부활신앙과,
셋째, 주님은 언제든지 부활을 이루신다는 현실적 부활신앙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우리에게 현실적 부활신앙을 갖도록 보여주신 것입니다.

2) 부활신앙은 말씀과 믿음사이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신 신앙입니다.

믿음에는 대상을 말씀으로 바로보는 경우가 있고, 어떤 경우애는 말씀과 대상사이에
상황이 끼어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믿음사이에 내 의지가 끼어있게되면
비정상적인 상황이 닥칠 땐, 믿음은 현실적인 것이 되어버리고맙니다. 그러나
 중간에 내 의지대신 신앙이 있으면 비정상적일 때도 믿음은 말씀따라 가게됩니다.

(예) 아브라함은 이삭을 24년간 기다리다 지쳤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99때에 나타나셔서 "내년 이 맘 때에 아들이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이 생각하기를 "백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90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이스마엘이나 하나님앞에 살기 원하나이다."
하였습니다. 이 때는 말씀-의지-믿음=불신앙의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삭이 자라나 소년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려라.'하셨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의 고백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 (롬4:17) 하면서
순종하였습니다. 이 때는 말씀-부활신앙-믿음=순종이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도 불가능하고, 죽음에 직면하는 일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 때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고살면 주님의 부활의 역사가 오늘날에도 일어날 줄 믿습니다.

3. 부활신앙의 완성은 오순절 성령강립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12제자들은 주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더더군다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직접 나타나신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의심했던 도마조차도 부끄러워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베드로와
일곱제자들은 바닷가에 물고기를 잡으러 간다고 사명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즉,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부활이요, 나는 나대로 먹고 살아야겠다는
현실위주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나중에는 새롭게 변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이 되었고 모두 죽기까지 부활신앙으로 살다가 순교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부활절과 증인이 된 사이에 무슨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것이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 이었습니다.

부활절은 역사적인 객관적 사건입니다. 그러나 각자에게 임한 성령 강림사건은
개인적인 주관적 사건인 것입니다. 이 두 사건이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합하여 질 때,
부활신앙으로 바뀌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하시는 두가지 역할이 있습니다. 복음사역과 성화사역입니다.
즉 외적사역과 내적사역입니다. 그리고 외적사역은 두가지로 이루워집니다.

1) 성령님은 예수님을 증거하러 오셨습니다.

즉 복음전파의 완성을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15:26에 "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하였습니다. 그분은 복음사역의 주관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령님을 사역의 주관자로,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 때,
부활신앙의 준비를 갖출 수가 있게 됩니다.

2) 성령님은 우리를 사역의 동역자로 선택하시고 그 일을
완수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명은 사명자가 되었을 때 그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능력과 경험이 많다해도 그 일에 관심이 없으면
목숨걸고 할 수가 없습니다. 성도가 일단 성령님을 사역의 주관자로 모시게 되면
성령님은 이에 따른 각자의 사역구분과 수반되어지는 능력을 내려주십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충만을 받은 120문도는 그 후 모두 흩어져
세계각지에 복음을 능력있게 증거하여 책임을 완수하고 삶을 마쳤습니다.

그러므로 사역과 능력은 전적으로 성령님께 속해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능력을 구히지 않아도 성령님이 쓰시는 사역을 맡았을 경우는
그 곳에 필요한 은사가 주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로
주님의 증인이 되도록 함께 동행하십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이 부활신앙으로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 성령님의 강립사건. 성도들의 증인사역이
온전한 부활신앙으로 열매맺는 삶이 되도록
다같이 하나님게 은혜를 구히고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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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재정
(고후 9:8)



사람이 살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생명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일까요?

설문조사에 따르면 돈이라고 합니다.
약 80% 이상이 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돈을 벌려는 의욕 때문에
밤낮을 쉬지 못하고 일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물질이 얼마나 중요한지
신약에서 2,084 구절이나 인용하며 설명하셨습니다.
믿음은 215 구절, 구원은 219 절인데 비해
물질은 거의 10배나 더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바른 물질관을 가지고
생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1. 돈이란 무엇인가요?

런던 한 신문사에서 1천 파운드의 상금을 걸고
“돈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현상공모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때 신문배달 소년이 당선되었는데 그에 의하면 돈의 정의는:

첫째, 돈은 천국 외에는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세계적인 여행권이다.
둘째, 구원을 제외한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세계적인 공급자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는
이만큼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돈의 개념에 대하여
세 가지로 구분하여 말하고 있음을 봅니다.

1) 첫째는 부입니다. (Riches)

부는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예: 솔로몬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였을 때)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왕상 3:13)
그러므로 성경에선 부란:
땅, 건물, 가축, 금은 보석, 남종, 여종 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심으로 그가 육축과 은, 금이 풍부하였더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부를 주심으로 항상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하시면서 부를 약속하시고 내려주셨습니다.

2) 재물 (wealth) 입니다.

이는 우리를 위해 일하고 있는 돈을 말합니다.
 “네 하나님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신 8:18)

즉, 재물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모을 수 있는 것인데
생활비 이상의 잉여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직접 일해 버는 돈보다도 잉여분의 재물이
나를 위해 벌어주는 돈이 더 많음을 의미합니다.

이삭은 농사할 때마다 백배나 수확을 거두었고
우물을 팔 때마다 샘이 솟아 났음으로
네 곳이나 파서 그의 재물이 번성함을 얻었읍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좋은 경영법으로 이윤이 많이 나는 사업이나,
잉여이익 분에 대한 투자 (주식 증권, 저축, 부동산 건물 등)
가치가 상승함으로 자산증대가 되는 경우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아도는 재물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 쓸 수 있도록 준비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사람이 재물을 다루는데 훈련 받지 못하면
그 풍요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많은 재물을 모으려는데 초점을 돌리게 되어
욕망이 그 사람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예) 눅 12 장의 부자:
추수가 넘쳐나 보관할 데가 없어 고민하다
곳간을 헐고 크게 지어 그 속에 쌓아놓고
“평안이 쉬고 먹고 즐거워하리라” 하고 잠든 사이에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데려가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하셨습니다.

3) 말 그대로 돈 (money) 입니다.

돈은 단순히 상품을 거래하기 위해 사람들이 만들어 낸 교환수단입니다.
돈 자체에는 본질적인 가치가 없으며 권세도 없습니다.

대부분 신자들도 돈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돈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며 세상 체제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돈을 사랑하지 말라 합니다.
그 이유는 돈 사랑이 바로 세상 사랑이 되기 때문입니다.

2.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돈에 대하여 어떤 개념을 가져야 할까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길 것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

이 말씀 중에 재물은 영어로는 “money” (돈)으로 되어있고
헬라어 원본에는 “맘몬”이라 쓰여있습니다.
그런데 “맘몬”이란 갈대아 사람들의 “부의 신의 이름”입니다.

1) 예수님이 맘몬이라 지적하신 것은
돈을 부리는 영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맘몬은 하나님과 같이 섬기는 대상으로
사람 속에 자리잡을 수 있는 우상의 영이란 의미입니다.
만일 맘몬이 단지 돈을 의미한다면
돈을 무시하고 지내면 마음이 편안할 것입니다.
돈에 대해 자유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못 가서 근심, 두려움, 그리움,
사모함, 욕망 등이 일어나 돈을 찾아 다니게 됩니다.
그러므로 맘몬이라는 영은 사람들이 돈을 사랑하고 섬기도록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세력인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생활을 돈에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 의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대개 사람들은 악한 영에 의해 영향 받는 것은 쉽게 느낄 수 있어도
맘몬의 영에 의해 지배 받고 있는 것은 알아채지 못합니다.
축복받은 것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맘몬의 영의 증세를 보면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맘몬의 영은 가질수록 욕심을 내게 만듭니다.
즉, 사용보다 소유에 집착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부자가 되었어도 끊임없이 버는 일에 열중하게 하는 나머지
바빠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둘째, 맘몬의 영에 사로잡히면 인색한 마음이 되어버립니다.
또한 변덕이 심해지며 약속한 것을 취소하거나 지키지 않게 됩니다.
자신의 삶을 돈의 보유여부에 두고 있기 때문에
소비는 궁핍을 가져온다는 두려움 속에 살게 만듭니다.
애경사나 헌금에 관계없이 무조건 쓰는 것은 싫어하게 만듭니다.

셋째, 돈을 가진 것에 대해 과시하는 마음을 갖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부자’ 하면 부러워하고 그 사람이
어떻게 부를 소유하게 되었는지 관심을 가지고 듣고 싶어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소유한 자는 소유한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부를 과시하게 됩니다.
그래서 렘 9:23 절에는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하였고,

예수님께서는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눅 12:15)
하셨습니다.
생명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면 삶도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도
먹이시고 입히신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돈은 사용하라고 맡기신 것이지 사랑하여 소유하라고
주신 것이 아님을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3. 하나님의 재정법칙을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물질관입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의 경제 운영 법칙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