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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에바다교회

'Bible Study/People'에 해당되는 글 92건

  1. 2011.11.25 [성경인물 092] 제사장 가문의 조상 레위 / Levi
  2. 2011.11.18 [성경인물 091]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여인 레아( Leah )
  3. 2011.10.21 [성경인물 090] 신약의 첫 여선지자 안나 / Anna (2)
  4. 2011.09.30 [성경인물 089] 용단의 여인 리브가 / Rabecca
  5. 2011.09.14 [성경인물 088] 남은 자 / Remnant
  6. 2011.06.24 [성경인물 087] 겐그리아의 일꾼 /뵈뵈(Phoebe) (1)
  7. 2011.06.10 [성경인물 086] 교법사 가말리엘 / Gamaliel
  8. 2011.05.20 [성경인물 085] 아리마대 요셉 / Joseph of Arimathea
  9. 2011.05.06 [성경인물 084]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 / 시므온(Simeon)
  10. 2011.04.29 [성경인물 083] 기업무를 자 / 보아스(Boaz) (1)
  11. 2011.04.15 [성경인물 082] '이스라엘의 어미' / 여 사사 드보라( Deborah)
  12. 2011.03.25 [성경인물 081] 부스러기 은혜에 만족한 / 수로보니게 여인(A Canaanite woman)
  13. 2011.03.18 [성경인물 080] 산자의 어미 하와 / Eve
  14. 2011.02.25 [성경인물 079] 베들레헴에 메시야의 탄생을 예고한 선지자 / 미가 (Micah)
  15. 2011.02.04 [성경인물 078] 불순종의 선지자 요나 / Jonah (2)
  16. 2011.01.28 [성경인물 077] 여호와 '주의 날'을 예언한 선지자 요엘 (Joel)
  17. 2011.01.07 [성경인물 076] 이단을 배격한 유다서의 저자 유다 / Jude (2)
  18. 2010.12.31 [성경인물 075] 불 속에 들어간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19. 2010.12.24 [성경인물 074] 평신도 선교사 빌립 집사 / Philip (1)
  20. 2010.12.03 [성경인물 073] 가버나움의 백부장 / A centurion of Capernaum,
  21. 2010.11.19 [성경인물 072] 하나님을 온전히 좇은 갈렙 / Caleb
  22. 2010.11.05 [성경인물 071] 여리고 기생 라합 / Rahab
  23. 2010.10.22 [성경인물 070]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 / Maria (2)
  24. 2010.10.01 [성경인물 069] 마리아와 결혼한 요셉 / Joseph
  25. 2010.09.17 [성경인물 068] 서원의 모범을 보인 여인 / 한나(Hannah)
  26. 2010.09.10 [성경인물 067] 공의의 선지자 아모스 / Amos (1)
  27. 2010.08.27 [성경인물 066] 15년 생명을 연장 받은 히스기야 / Hezekiah
  28. 2010.08.20 [성경인물 065] 주의 종을 공궤한 사르밧 과부 / A Widow of Zarephath
  29. 2010.08.06 [성경인물 064] 순종의 여인 사라 / Sarah
  30. 2010.07.16 [성경인물 063] 노예로서 감독이된 오네시모 / Onesimus



제사장 가문의 조상 레위 / Levi  
[2:4-6]


1. 인적사항


레위는 야곱과 레아의 셋째 아들로서 그 이름의 원어는
'라아''연합'이라는 뜻의 단어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이는 레아가 남편 야곱의 사랑을 받기 원하여 지어준 이름으로
넷째 아들 '유다'를 낳으면서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란 것으로 보아
레아는
  더 이상 야곱의 무시를 받지 않고 결혼 생활에서
기쁨을 누렸음을 볼 수 있습니다.

레위는 결혼하여 게르솜과, 고핫과 무라리의 세 아들을 낳았으며
또한 고핫은 모세와 아론의 조부가 되었습니다.
레위는 누이 동생 디나가 레위 족속 추장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을 당한 후
세겜성에 유치되어있자 형 시므온과 더불어 이 치욕을 갚기 위하여
세겜성의 남자들에게 할례를 받도록 한 후
성을 급습하여 성안의 모든 남자들을 살해하였습니다. (창 34:25]

그후 레위는 아버지를 따라 가족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갔으며
야곱이
  임종전에 받은 유언기도에서
"네 자손이 흩어지리라.[창 49:5-7] "
라는 저주를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의 정직함과 화평의 마음을 보시고(말 2:6)
그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어주시어 오히려 그의 지파와 후손을
이스라엘의 장자를 대신하는 제사장 가문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민 3:12)
그는 애굽에서 살다가 137세 때에 그 곳에서 죽었습니다. (출 6:16)


2. 레위의 성격과 신앙적인 행위


1) 레위의 젊은 시절은 정의에 불타는 의로움을 지니고 산 삶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20안밖이었을 시절에 어린 누이동생 디나가(약 15세)
가나안 땅 세겜에서 그 마을의 잔치를 구경하러 나갔다가
그 성 추장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고 욕을 본 후
세겜 성에 유치되어있는 것을 보자 불같은 화가 치밀어 올랐으며
그 동생을 위하여 복수할 것을 마음에 품었습니다.

여러 형제들 중 아무도 이에 동참하지 않고 오직
그의 형 시므온과 둘이서 온 성안에 있는 남자들이
할례를 받고 고통 중에 있는 틈을 타서 그 성을 급습하여
추장 및 모든 남자들을 다 죽이고 동생 디나를 데리고 왔습니다.(창 34;26)

나머지 그의 형제들은 학살극에는 동참하지 않았으나 모두 합세하여
그 성안의 재물들을 약탈하였으며 그 성을 폐허화 시켰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레위는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이같은
학살 행위는 잘못이었음을 견책받았으나
레위는 '이는 이방인들이 자신의 가문과 선민
이스라엘에 대한 모욕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정당성을 강조했습니다.(창 34:31)
 

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이같은 일을
완수 할 수 있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동생 디나는 세겜성에 유치된 채
족장 세겜의 정욕의 대상으로 치욕적인 생활을 일생동안 하였을 것입니다.
이는 실로 동생의 아픔을 마음으로 함께 나눈 의로운 오빠의 행위였습니다.
       


2) 레위의 말년 시절은 화평과 정직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제사장 가문으로서의 언약을 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말 2:6)
 

레위는 형제들 중에서 가장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이름을 두려워 한 사람이었습니다. (말 2:5)

 
그는 비록 세겜 학살 사건을 통하여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네 후손이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지리라"는
저주를 받았으나 (창 49:7)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이 흩어짐을 통하여
레위와 그 후손들의 축복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이 저주를 똑같이 받은 형 시므온은 레위만큼
신앙과 성품이 정직치 못하였기 때문에

결국 지파가 흩어지고 감소하여
유다지파로 흡수되었지만 (삿1:3-17)
레위는 하나님께서 종교적 장자로 만들어서
자신의 소유로 삼으시고
제사장 집안으로 임명을 하셨습니다.

레위의 후손은 모여서 성읍을 분배받지 못하고 흩어져 살았음으로
그들의 소속은 오직 각 지파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와 헌물로서 몫을 대신 받게 되었습니다.

각 지파들도 자신의 장자를 모두 하나님께 드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레위 족속이 대신하여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저 자신들에게는 아들과 헤어져 사는 것보다 낫게 여겼기 때문에
이를 모두 허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의 후손들이 레위의 성픔과 신앙을 따라
광야에서 금 송아지 사건 때, 주동자들 삼천명을 모두 죽여
여호와께 헌신 하였음으로 (출 32:28-29)이들을 세워
제사장 집안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민 3:12) 


또한 하나님께서
 
[말 2:5-6]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으로 그에게 준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 하였으며 그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란 
 
 
말씀에 나타났듯이 레위는 형제들 중 누구보다도 이기적인 마음도
 
편파적인 마음도 없이 지냈으며 그는 노아와 에녹같이 여호와 와
 
가장 친근하고 애정어린 교제를 하며 심령과 생활에 
 
흠이 없이 살았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의로움을 보고 
 
죄악에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항상  율법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며 백성에게
교훈하며 제사직을 성취하며 살았습니다. (랑게 주석 말라기 2:6절 참조)
이러한 성품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3. 레위후손들의 구별된 타 지파와의 신앙적 태도


죽음의 홍해 바다를 하나님의 기적을 통하여 건넌 백성들은
여호와를 찬양하며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시내산에 이르러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산에 올라간 사이 40일이 지나자 그 안에 금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그 앞에서 춤추며 경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애굽을 벗어났을 지라도 애굽에서
물들었던 죄성을 다버리지 못한데서 기인한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신앙생활을 하고있을지라도세상의 유혹과 죄성을
유지하고 있는한 30일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세상 죄악에 빠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때에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하나님께 받아서 내려왔습니다.
 


1) 레위의 후손들은 여호와께 헌신한자들이었습니다. (출 32:29)
 

이같은 타락한 백성들의 모습을 본 모세는 자신이 들고있는
십계명 돌판을 금 송아지 위에 던져 둘다 모두 박살을 내었습니다.
이는 이미 십계명 판이 백성들의 우상 숭배로 실효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즉 십계명 1. 2 계명을 어긴 백성들은 곧 죽어야했기 때문입니다.
언약은 파기 되었으며 두 돌판은 무의미한 돌덩이에 불과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세의 감정에 의한 것이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다 멸망 시키지 않으시려는 사랑의 경륜에 따른 것으로 볼수입니다.

그 때 모세는 명령하기를 누구든지 하나님 편에 선 사람은
자기 편에 서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기가 막하게도 레위 자손들만이 모세의 편에 모두 나와 섰습니다.
이 선별된 선택이 결국 레위인들만이 특별히 이 일을 위해
봉사하도록 구별받은 자들이 된 계기기 되었습니다. (민1:47-54)

이들은 누가 우상 숭배를 선동한 주동자들인지를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무섭게 친구든 친척이든 형제든
모두 주모자들은 칼로 처단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삼천명 가량이 처단되자 우상숭배 사건은 수습되었으며
모세는 그들에게 너희가 여호와께 헌신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말은 원문의 뜻은 "너희 손을 채우라"는 말로
'제사장과 같이 죄를 속하여 희생제사를 드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미 이 사건을 통하여
제사장 직분을 행한거나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 헌신한 레위인들을 위하여
'여호와께서 복을 내리시리라'
 
 
하며 축복을 하여주었습니다. (출32:29),

즉 언제나 여호와께 헌신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성별하여주심을 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사업이 가족이 더 소중할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보다 더 소중히 여긴다면
우상숭배자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유부단한 신앙행위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레위인들의 결단과 순종은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하는 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좋은 예로 볼 수 있습니다
 


2) 이스라엘의 제 3대 대제사장이 된 비느하스에게 하나님께서
그와 후손들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주셨습니다. (민 25:12:13)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바로 앞에 둔 싯딤에 머므르게 되었을 때,
모압왕 발락은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하고
여인들로 유혹하였으며 그들로 우상에 제물을 먹게하고
음란을 저지르게 하였습니다.

이에 많은 백성들이 음란에 빠졌으며 우상숭배의 죄를 짓게되었습니다.
마비된 양심은 영적 타락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셔서 염병을 터뜨리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죽은 자가 이만 사천명이나 되었습니다. (민 25:9}
 
 
그러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이 음행에 가담하였는 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제사장 중의 한 사람이었던 비느하스가 회막문 앞에서
백성들의 죄를 탄식하며 울고 있는 가운데 시므온 종족중
한 족장인 시므리가 미디안 창녀를 데리고 진영안으로 들어와
자기 장막 속에서 음란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신분이 높기 때문에 감히 자기에게 사람들이
손을 대지 못할 것으로 여기고 담대하게 음란 행위를 한 것입니다.
이때 비느하스는 시므리의 오만한 행위를 보고
기도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창을 들고 장막 속으로 들어가
그둘을 함께 창으로 꿰똟어 죽였습니다. (민 25:7-8)

그러자 퍼지던 염병이 그치고 하나님의 진노가 멈추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시므리의 높은 지위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었을 때,
비느하스는 용기를 내어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하나닙께서 그의 행위를 기쁘게 여기셨으며
"이일을 저에게 의로여겨 주셨습니다"(시106:31)
또한 그에게 제사장 직분과 그의 후손들에게 제사장 직분이
 상속되도록 언약을 하셨습니다.(민 25:13)

그러므로 그 후손들에게 약속된 대 제사장 직분은 엘리시대에
일시적인 단절 (삼상 2:27-36)을 제외하고는
신약시대 로마가 예루살렘을 초토화시킬 때까지
비느하스의 가문을 통하여 그 명맥이 유지되었다고합니다. (keil)


이와같이 레위의 여호와를 향한 특심과 성실은 그의 후손에게로 이어져 내려갔으며
이는 바벨론 포로 귀환시 그대로 나타나 귀환자들의 42,360명 중
1/10 에 해당하는 4289명의 사람들이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에스라 2:36-42)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각자의 믿음과 행위를 구분하십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위하여 헌신한 사람들에게 
생명과 평강의 언약을 내려주십니다. (말2:5)

우리도 모두 레위를 본받아 제사장으로서의
생명과 평강의 언약을 받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여인 / 레아(Leah) 
  [창
29 : 31]


1. 인적 사항


리브가의 오빠 라반에게는 딸이 있었습니다.


[1]
레아 (암소라는 )

[2] 둘째 라헬 (암양이라는 )


여인의 이미지는 이름의 뜻에서 나타나 있듯이

언니레아 동생라헬 비해 미모가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레아를안력이 부족하다 표현하고 있으며

이는 여성적인 매력이 부족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레아는 메소포타미아 하란에서 출생하였으며

야곱과 결혼한 가나안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죽어 선영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습니다.


비록 동생 라헬보다는 

남편 야곱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하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녀를 불쌍히 여기셔서 

자녀 생산의 축복을 주셨으므로 61녀를 두게 하셨습니다.


[1] 르우벤 (보라 아들이라)        [2] 시므온 (들으심)    

[3] 레위    (연합)            [4] 유다 (찬송함)

[5] 잇사갈 ()            [6] 스블론 (거함)

[7] 디나 (, 심판) 어머니가 되었으며 


하나님의
특별 섭리로 선택된 여인이 되어

그녀의 넷째 아들 유다의 혈통에서 메시야가 태어나도록 

섭리하심을 받은 은총 받은 여인이 되었습니다.


2. 주요 생애


야곱은 이삭의 장자권 축복을 받고 아내를 구하려 

외삼촌이 사는 하란으로 떠날 때의 나이가 77세였습니다.

레아와 라헬은 20 후의 나이로 

야곱과는 나이차가 많이 나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라헬이 야곱을 좋아한 것으로 보아 

야곱은 에서와 달리 숫총각으로 지내면서 

몸단장을 하였으므로 젊은 모습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과 라헬을 얻는 약조  

결혼지참금 대신 봉사대가로 7년을 일하고 

결혼식에 임했을 때는 84세로 늦은 감이 있으나 

그래도 상당한 활력을 지닌 젊은이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결혼식 레아는 아버지에게서 

동생 대신 신방에 들어갈 것을 지시 받았습니다.

레아는 야곱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숨기고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라헬과 같이 행동 하였습니다.


야곱은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며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사랑하는 라헬이 아니라

언니 레아였음을 발견하고 매우 놀라 화가 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외삼촌에게 신부가 라헬이 아니었음을 항의하였으나 

레아를 파혼하지는 않았고 7일간 결혼예식을 치렀습니다.

이는 바로 자신이레아의 입장 같이 

에서 대신하여 이삭을 속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를 감수하고 레아를 거두어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레아가 아버지와 합의하여 자신을 속인 것에 분노하여 

레아를 사랑하지 않은 결과 

그녀는 남편에게서 미움 받고 사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레아를 긍휼히 여기셔서 

태를 열어 자식의 축복을 주셨으므로 

무자 했던 라헬보다는 자녀들로 인한 가족의 기쁨은 

마음껏 누리며 있었습니다.


한가지 자녀로부터의 고민을 경우는 

가나안으로 이주 세겜 성에서 

디나가 추장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당하고 

일로 인하여 시므온과 레위가 앞장서고 

다른 아들들과 더불어 세겜 성을 엄습하여 

남자들과 추장 하몰, 그의 아들 세겜…… 모두 죽임으로 

살륙상을 겪게 되었으며

이로 디나는 불행한 모습으로 어머니 곁에 있는 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레아에게는 마음에 아픔이 되었습니다.


남편의 사랑은 받지 못한 대신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의지한 결과 

야곱의 12지파의 조상 6명을 낳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후 야곱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130세에 애굽에 내려가기 레아는 죽었으며

야곱은 레아를 조상들의 무덤인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습니다. ( 49:31)


결국 라반의 레아와 라헬은 일찍 죽어 야곱의 곁을 떠나게 되었으나 

레아는 하나님의 선택한 약속의 자손 3대의 정식 부인으로 

라헬과는 달리 자신의 자리를 지킨 하나님의 축복받은 여인이 되었습니다.

.

3. 신앙생활의 특징


1) 오직 남편 야곱의 사랑만을 원하며 살았습니다.


부부는 사랑으로 맺어진 사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3:16]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그런데 문제는 서로의 사랑이 식어질 경우

부모가 정한 중매 결혼의 경우 

부부가 서로 의무를 충실히 이행치 못하고 

쪽에서 탈선할 경우가정의 유지를 어떻게 해야 할지 

요즘 우리에게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결혼이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경로를 통하여 결혼이 이루어 졌든지 간에 

믿는 자들의 결합은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이기 때문에 

결혼생활의 과정도 그분께 맡기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레아는 자신이 정당하게 야곱의 아내가 것은 아니며

야곱이 외삼촌의 설득에 따라 아내로 맞이되었고

남편에게서 사랑 받지 못하는 외로운 결혼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레아는 남편을 미워하거나 괴롭게 하지 않고 

자기 마음 속에만 슬픔을 감춘 남편을 사모하며 지냈습니다.


그러자 아들을 낳게 되었으므로

아들 이름을르우벤이라 짓고

이제는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 9:32]

하며 아들로 인한 사랑의 기대를 하였습니다.


또한 셋째 아들 레위를 낳으면서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 9:34]


야곱도 레아만이 아들을 낳았을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비록 아내는 사랑스럽지 않아도 자신의 자녀는 예쁘기 때문입니다.


레아는 비록 남편이 자신보다 아이들을 보러 오더라도 

기쁘게 여기며 살았습니다.

이는 아내가 남편을 항상 사랑하며 순종하는 것이 

가정의 행복을 유지할 있는 방법임을 레아는 보여준 것입니다


야곱이 라헬과 여종 빌하와 실바를 취하여 명의 아내를 두었을 때에도 

그녀는 시기하지 않고 꾸준히 남편의 사랑을 기다리고 결과 

잇사갈, 스블론, 디나의 자녀를 낳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사는 생활이 

괴로움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의 행복은 자녀들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축복을 주신 부분에 주로 감사하고 사는 삶이

기쁘게 사는 삶임을 레아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자신의 외로움을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위로 받고 여인이었습니다.


[v 31] “여호와께서 라헬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 하였더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모두 지니고 

만족하게 사는 것을 기뻐하시기 보다 

부족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며 응답으로 받아 감사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여인의 가장 소망은 미인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과 인기를 받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미인은 사람들의 사랑으로 만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애타게 구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라헬보다는 레아가 애타게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의 괴로움을 자주 고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녀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 36:17]

그녀는 결혼생활의 문제를 세상적인 방법을 통하여 해결하려 들지 않고

하나님을 통하여 해결하려 하였습니다.


그녀가 아들을 낳은 출산이 그쳤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아내를 취하여 아들을 낳게 되어 

관심이 곳으로 다시 쏠리게 되었을 때에도 

레아는 여전히 하나님께 기도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녀의 기도를 들으시고 [ 30:17]

다시 태를 열어 자녀를 주셨습니다.


이는 라헬이 자녀를 생산하지 못하자 자신의 여종 빌하를 통하여 

아들을 낳아 자신의 아들로 삼고자 편법에 대하여 

하나님의 축복으로 자녀를 생산함으로 

레아는 라헬보다 당당하고 떳떳한 우의를 차지함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아의 삶은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삶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아보셨다

그리하여 내게 아들을 주셨도다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자녀의 축복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며 살았습니다.


사람은 때때로 세상의 것을 모두 소유하며 태어나는 것이  

불행한 삶임을 느낄 있습니다.

증거가 왕들이 모두행복한 삶을 살았느냐?하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부족하게 지내는 삶에서 더욱 채워지게 하셨습니다.


레아를 통하여 오늘 나에게 부족한 삶에 처해 있다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기 원하시는 사랑과 축복의 부분임을 깨닫고

 하나님께 레아와 같이 구하여 특별 은혜를 받는 삶을 누리십니다.


3) 하나님의 특별 은총을 받아 

그녀의 후손에서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족보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레아와 라헬의 사랑 싸움은 야곱이 가나안 벧엘로 돌아왔을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 죽음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라헬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드라빔 (수호신) 훔쳐서 가지고 거짓말의 결과이며

당시 야곱은 

외삼촌의 신은 뉘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 31:32]

말한 저주가 라헬에게 임한 것입니다.


결국 레아와 라헬은 결혼생활 14년간을 경쟁자로 지냈으나 

라헬이 죽음으로 레아는 가정의 평화를 찾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녀가 번째 아들 유다를 낳고 고백하기를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말함으로 

그녀의 특별한 신앙심을 야곱은 

그녀에게 많은 감화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적인 결혼생활은 여전히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고 

그녀의 아들 요셉과 베냐민을 가장 사랑했습니다.


야곱이 영적인 눈을 뜨고 죽음에 임박하여 

12 자녀에게 마지막 축복 기도를 하여줄 그는 

유다가 하나님께서 섭리한 메시야의 계보를 이을 아들임을 알고 

그에 대한 축복기도를 하여주었습니다. [ 49:10]


결국 여호와를 찬송하며 지내는 레아를 

정실 아내의 자격으로 인정하게 야곱은

라헬이 죽었을 때는 그녀를 베들레헴에 묻고 묘비를 세워 기념하였으나

40 이상 같이 살아 레아가 죽었을  

조상의 묘인 막벨라 굴에 정실 부인으로 장사 지냈습니다. [ 49:31]


레아의 일생은 오직 남편과 하나님 만을 

존귀하게 여기는 삶을 삶이었습니다.


인생의 삶에는 여러 가지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여성들에게는 미모와 인기, 사랑과 물질…… 외에도 많겠지만

그러나 가장 행복은 가정과 신앙임을 

레아는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욱 여인으로서 후세의 메시야 계보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일생이 생존에만 그치는 삶이 아니라 

후손에게 이르는 연결선상의 삶을 살아야 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삶의 외로움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채워 누리고 레아의 삶을 

우리의 외로운 삶에도 적용하여 

같이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십시다.



 


신약의 여선지자 안나 
[ 2:36]



1. 인적 사항


안나는 히브리어의한나 해당되는 헬라어 이름으로 
 
뜻은은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야곱의 여덟 번째 아들인 아셀의 지파의 후손으로 
 
그의 부모는 마누엘로 이름은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고 
 
곳에 붙인브니엘이라는 ( 32:30) 지명에서 나온 이름으로 
 
뜻은하나님의 얼굴 이라는 의미입니다.

예로부터 아셀은 미녀지파로 
 
흔히 왕비나 대제사장의 아내가 배출된 지파인 것으로 보아 
 
안나 또한 믿음과 미모를 겸비한 여인으로 여겨집니다.

당시 유대인 처녀들은 14세를 전후하여 결혼식을 올린 것으로 보아 
 
안나의 나이는 105 정도였을 것이며 (14+7+84=105)\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하는 그녀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언의 은사를 주심으로 
 
예루살렘에서 여선지자로 ( 2:36)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과부로 지내온 84 동안을 오직 성전 뜰에 기숙하면서
 
성전에 필요한 일이 생기면  일에 언제나 솔선수범으로 
 
나서서 일을 했던 일꾼으로 보입니다.

구약 말라기 이후 300 이상 예언의 영이 끊어졌으나
 
하나님의 영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의 구속을 기다리던 모든 자에게 
 
예수님의 초림을 처음 증거하는 여예언자가 되었습니다.


2. 시대적 배경


B.C.1세기 유대가 헬라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독립시대를 지내다가 
 
다시 로마의 식민통치하에 들어간 시기는 혼란에 혼란을 거듭 시기로 
 
당시 이스라엘인들은 종류로 나누어 종교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부류는 바리새인들로서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대하며 로마의 압제로부터의 해방과 
 
장차 열방에 군림하는 나라로 만들어  
 
탁월한 지도자로서의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부류는 사두개인들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현실에 당면한 유익과 이득만을 누리고 살려는 집권층들이 있었는가 하면, 
 
마지막으로 시므온, 안나와 같은 소수의 경건한 사람들은 
 
구약에서 예언한대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여 
 
영생으로 인도할 메시아를 기대하는 사람들로 나눠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정치적, 종교적으로 암울한 상황 속에서 
 
유대인들에게는 자연히 종말론적 메시아 대망 사상이 크게 무르익게 되었으며 
 
구약의 예언의 성취를 간절히 기다리는 분위기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성령님께서는 경건한 사람 시므온과 안나에게 임하셔서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계시하여 주셨으며 
 
시므온이 아기예수님을 보고 찬미와 예언을 한대 이어 
 
안나를 통하여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증언케 하신 것입니다.


3. 안나 선지자의 신앙 생활의 특징


1) 경건한 신앙 생활을 여인이었습니다. [ 2:37]


그녀는
결혼한지 7 후에 과부가 되었는데 
 
이후로 84 동안을 성전 중심의 생활을 하여왔습니다.

그녀의 생활의 특징은 금식과 기도 생활이었는데
 
대부분 특별한 믿음으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하는 생활을 하였으며 
 
기도는 하루에 번을 정규적으로 드렸습니다.

번째는 오전 9, 번째는 12,
 
번째는 오후 3 번을 드렸으며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는 공식 기도시간이었으나
 
해질 황혼 무렵에 한번의 기도 시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같이 주에 금식하며 하루에 번씩 기도 생활한다는 것은 
 
보통 신앙인들로는 없는 특별한 신앙행위이며
 
이는 다니엘과 같이 어려운 포로생활에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섬겨 
 
하루 기도했던 모습에서도 이어지고 있음을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이와 같이 세월 동안을 규칙적인 신앙생활을
 
날마다 있었던 것은 메시아를 대망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동기가 있을 열심히 하나님께 구하게 됩니다.
 
아니면 특별한 은총을 만났을 하나님께 꾸준히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전자는 안나 선지자의 경우요
 
후자는 바벨론 총리가 다니엘의 경우입니다.

오늘날 신자인 우리들에게는 참으로 
 
실천하기 어려운 경건한 신앙 자세가 아닐 없습니다.
 
안나 선지자는 중보기도 용사로서 백성과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를 보내어 주시기를
 
평생을 기도한 여인이었습니다.


2)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한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 2:38]


당시 예루살렘에는 소수의 경건한 무리들이 메시아를 기다리며 
 
함께 기도하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에서도 안나 선지자에게 성령님께서 임하심으로
 
아기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녀에게만 알려주셨을까요?
 
그것은 메시아에 대한 그녀의 간절한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누구나 믿음을 가지고 있고 누구나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항상 중에서도 선택하는 사람이 있으십니다.
 
선택의 동기가 믿음 위에 충성입니다.

믿음은 충성심으로 진위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
101:6] “ 눈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


이로 신앙생활은 믿음과 함께 충성심이 있어야 함을 수가 있습니다.
 
안나 선지자가 초림의 예수님을 평생 기다려 만날 있었다면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재림의 예수님을 평생을 기다려 뵈올 있도록 
 
충성된 신앙생활을 하도록 성령님께서는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안나 선지자가 예수님을 뵙고 몹시 흥분되어 
 
자기의 동료들에게 메시아가 오셨음을 증거할 때와 같이 
 
우리들도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벅찬 기쁨으로 증거할 있는 기회가 
 
나에게도 주어지기를 기다리며
 
신앙생활을 해야 함을 본받게 하여주는 예입니다.


3) 안나 선지자는여호와 이레예비의 하나님을 체험한 신앙의 여인입니다.


요즘과 같이 사회 보장이 되어있지 않았던 옛날에는
 
고아와 과부는 사회에서 가장 불쌍한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더구나 홀로된 여인이 생활할 있는 수단은 거의 전무한 때였으므로 
 
길은 정말 안나 선지자에게는 막막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의식주를 해결하러 세상으로 나가지도 아니하였고
 
자기의 미모나 젊음을 의지하여 살지도 않았고
 
오직 하나님께 나가 의지함으로 성전 중심의 신앙 생활만을 지속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아픈 마음과 의로움을 위로하여 주셨고
 
예언의 은사를 내려주시므로 여선지자로서 추앙을 받게 하셨습니다.

인생에서는 대개 부와 가난, 신앙과 세상, 
 
그리고 거룩과 욕망의 갈림길 번을 통과하여야 함을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과 자신의 의지하는 것으로 선택을 하려 합니다.
 
그러나 안나 선지자는 세상의 것들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84 동안을 예비의 하나님을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안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그녀는 보게 되었고
 
깨달음을 전할 있는 권능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모든 생활이 공급받게 하신 것입니다.

육신의 양식을 구하는 자에게는 
 
끝없이 양식을 구해야만 하는 노동만이 주어지지만 
 
영생의 양식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성과 능력이 주어져서 육신의 양식을 구한 자들로부터 
 
공궤를 받게 함을 안나 선지자를 보고 깨달을 있습니다.

안나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신을 찾는 자에게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심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이 증명된 삶인 것을 있습니다.
 
일개의 과부 여인이 84 동안을 성전 중심의 신앙 생활을 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신앙이 과연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복도 아니요, 건강도 아니요, 성공도 아니고
 
그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하나님께 상달될 때에 
 
나의 생활의 문제는 저절로 풀려질 뿐만 아니라
 
우리도 모르는 하나님의 은사와 능력이 주어져 
 
더욱 진리의 세계를 증거할 있는 영권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심을 
 
안나 여선지자를 통하여 배울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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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7.11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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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7.11 00:52




용단의 여인 리브가 / Rabecca 
[
창24:58]


1. 인적사항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의 아들 브두엘의 딸로서 
 
이삭과는 오촌간이며 그의 아내가 된 여인입니다. 
 
그녀의 이름의 뜻은'고리'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언약의 
 
혈통을 잇는 역할을 한 인생을 살았으며 이삭과의 사이에서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을 낳은 어미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메소포타미아 출신으로서 오빠 라반의 두 딸인 
 
레아와 라헬을 아들 야곱의 아내로 맞아 들임으로 고모이자 
 
시어머니가 된 여인입니다. 

20살 전후의 아름다운 미모를 갖춘 순결한 그녀는 그 당시 
 
40세인 이삭과 결혼함에 주저없이 승낙한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2. 리브가의 생애


아브라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갈대아우르를 떠날즈음 
 
아버지 데라는 두 아들중 나홀만 데리고 함께 아브라함과 같이 떠났는데 
 
이는 큰 아들인 하란이 일찍 죽어 그의 아들 롯을 자녀가 없는 아브라함이 
 
길렀기 때문으로 데라와 나홀 가족은 메소포타미아지역 \
 
하란에 머므르게 되었습니다. 

그후 데라가 죽자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떠난 후 
 
나홀은 형 하란의 딸이자 자신의 아내가 된 밀가 사이에서 브두엘을 낳아 
 
하란에서 살다 죽었으며 브드엘은 라반과 리브가를 낳고
 
메소포타미아 땅에서 정착하여 부유한 기반을 갖춘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B.C. 2046년경에 태어난 리브가는 가사를 열심히 돌보고 
 
쾌활하고 적극적인 성품을 지닌 여인으로 성장하였으며 
 
아브리함이 보낸 종 엘리에셀(창 15:2)울 통한 이삭의 청혼 소식을 듣고 
 
믿음으로 그를 따라 가난안 땅으로 떠났습니다. 

이삭과 만나 결혼 후 (B.C. 2026)20년동안 자녀없이 지내왔으나 
 
꾸준히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40세가 되어 하나님의 응답으로 
 
쌍동이 아들인 에서와 야곱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 첫 흉년은 
 
아브라함시절(B.C.2090년경)이었으며 
 
아브라함이 사라를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가 
 
흉년은 면하였으나 사라를 누이동생이라 부르게하여 
 
바로왕에게 아내를 빼앗겼던 수모를 겪은 사건과 비슷하게 
 
이삭에게도 대 흉년이 찾아와(B.C.1990년경)할 수없이
 
리브가도 남편따라 팔레스틴땅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애굽으로 내려가지말고 블레셋 그랄 땅에 
 
머므르도록 지시하심을 받고 이삭과 리브가는
블레셋왕 아비멜렉에게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예쁜 자기 아내 때문에 이방 땅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이삭은 아내 리브가를 누이동생으로 주변에
소개하였으며 
리브가 또한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고 지내었습니다. 

이삭이 어느날 리브가를 껴앉은 것을 본 아비멜렉왕은 
 
리브가가 이삭의 아내인 것을 보고 이삭을 질책한 후 
 
자신이 리브가를 범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이는 자신의 선왕시대에 있었던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랄 땅에 머므른 시절에 
 
여전히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동생이라 소개함으로 그랄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하였다가 여호와께로부터 저주를 받아
그의 가족이 자녀생산을 못했던 과거가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고사를 알고 있었던 아비멜렉왕은 그녀를 이삭에게 돌려보내었으며 
 
리브가는 남편의 말에 끝까지 순종한 착한 여인이었습니다. 
 
 
그 후 에서와 야곱이 성장하면서 에서가 40세에 헷족속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자 근심이 된 리브가는 아들 이삭을 
 
위해 배우자를 얻도록 하란으로 보내기를 이삭에게 종용한 후,
 
단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빼앗고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채어 형에서의 분노를 사고있는 야곱을 하란으로 피신 시켰습니다. 

허나 결국 리브가는 야곱을 31년간이나 보지 못하고 떨어져 살다가 
 
야곱의 나이 108세가 되어 이삭에게로 돌아왔을시 그녀는 이미 죽어 
 
가족 묘인 막벨라굴에 안장이 되었습니다. 

그녀가 죽은 후 이삭은 야곱과 12년간을 더 살다가
180세의 나이로 죽었으며
 그역시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습니다. 
 
 
리브가는 이삭의 정실 부인으로 또한 이삭은 리브가의 오직 남편으로 
 
두 사람의 급실은 아주 좋았으며 평생 둘만의 부부가 되어 사랑을 나누고 산, 
 
그리고 리브가는 남편에게 아주 사랑을 독차지한 여인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3. 리브가의 믿음 생활의 특징


1] 천한 일도 즐겨서하는 봉사정신이 특출한 여인이었습니다.(창 24:47)


[창24:16] "그 소녀를 보기에 심히 아름답고 …"


그녀의 미모는 뛰어날만큼 예뻤습니다. 
 
대부분 인물이 예쁜 여인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유지하기위하여 
 
집안일을 하지 않을 뿐더러 더우기 우물가에 물을 길어 오는 일은 하인이나 할 것이지 
 
주인 아가씨가 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리브가 에게는 자신의 유모와 집안에 
 
일꾼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물길어오는 일을 즐겨하였습니다. 

더우기 우물가에서 만난 낯선 사람의 짐승 낙타에게까지 물을 먹인 
 
선행은 관대한 마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본래 낙타란 짐승은 한번 물을 먹기 시작하면 엄청난 양의 물을 먹고 
 
저장하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 소비와 고생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댓가 없는 선행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마음임으로 일찌기 
 
집안에서부터 베풀어온 행위가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 
이삭의 아내감으로 선택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리브가로부터 실천하는 신앙생활을  본받아야할 점이 있습니다. 
 
외모의 아름다움은 마음의 아름다움으로부터 선행의 행동으로 나타날 때, 
 
고귀한 아름다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위적인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하기보다 
 
마음이 아름다움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신앙으로 
 
단장하는 여인들이 되어야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즉시 순종하는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창 24:61)


[창24:58] "내가 가겠나이다."


아브라함의 종의 설명을 다 들은 가족들은 이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임을 알고 청혼을 승락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종이 당장 떠나야한다는 단호한 요청에 
 
가족들은 결혼 당사자에게 모두 물어 보기를 원했습니다.

한 번 떠나면 다시는 보기 어려운 부모와 가족들과 마음껏 
 
석별의 정을 나누고 싶은 것이 시집가는 딸들의 공통적인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당장 떠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가족들과 정이 없어서였을까요?  

미래의 남편이 그리워서 서둘러 떠나려고 하였을까요? 아닙니다. 
 
그녀는 아브라함의 종 아비멜렉으로 부터의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것을 믿음으로 깨닫고
 
아브라함의 가정의 훌륭한 신앙과 경건의 또 다른 믿음의 분위기를 느꼈던 것입니다. 

 
신앙이 별로 없는 분위기의 자기 백성들과 아버지의 집을 빨리 떠나 
 
참다운 믿음의 분위기로 속히 가기를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믿음에는 결단력이 따르나 , 현실에는 주저함이 따르게됩니다. 
 
믿음은 항상 현실보다 말씀을 더욱 따르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용기와 결단력이 있게됩니다. 

미련은 믿음을 미루게 만들고, 지연은 환경에 더욱 집착하게 만들어줍니다. 
 
환경을 보는 육신의 눈보다, 미래를 보는 영안의 눈을 뜨고 
 
사는 것이 믿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함을 그녀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3] 참된 믿음으로 인내를 하여 응답을 받은 여인입니다.(창 25:21)


리브가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이삭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런데도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녀를 잉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부사이에 자녀가 없으면 몹시 애가타는 쪽은 여자쪽입니다. 

혹시 내 몸에 이상이 있어서 애를 못 낳는 것인지 아니면 
 
남편에에게 문제가 있는 것인지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옛날에는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이 그져 기다려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이삭은 늘 하나님께 기도하였다고합니다.

그런데 그 기간이 장장 20년이나 되었습니다. 
 
사라는 자녀를 10년이나 기다리다 포기하고 
 
남편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시녀 하갈을 취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그 세월의 두배를 묵묵히 기다립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다릴 줄 아는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배우게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부부의 기도를 들으시고 20년만에
 
 
그들로 자녀를 잉태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잉태하면서도 문제가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뱃속에 이는 태아들이 서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오죽 싸움이 심했으면 리브가가 하나님께 여쭈었겠습니까?

이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큰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태아의 속성까지도 다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한 부모밑에 여러 자녀가 있어도 제각기 성격, 능력, 취미든 모두가 다릅니다.
 
 
이는 태어날 때, 부모의 성격중 에서 한부분만을 이어받기 때문입니다.  
이를 볼 때, 에서 는
 아버지의 여러 성격중 남성다운 활달한 성격을
이어 받았기 때문에
 사냥을 하러 돌아다니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이삭도 그의 이러한 성품을 좋아했습니다. (창 25:28)

그러나 야곱은 이삭의 또 다른 성품 즉, 
 
조용함과 어머니의 믿음의 소중한 성품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복중에서도 이삭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를 리브가는 깊이 새겨듣고 믿음쪽의 아들 야곱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됩니다. 

 

4]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위기를 감수하는 행동을 시행하는 여인입니다. (창 27:8-13)


 이삭의 나이 137세가 되었을 때, 이미 장님이 된 이삭은 자신의 
 
이복형 이스마엘이 137세로 죽은 것을 기억하고
자신도 죽을 날이 다가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장자 에서에게 모든 축복과 유업을 물려주려고
 
 
축복 기도를 받을 준비를 해 가지고 오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때 공교롭게도 이사실을 리브가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을 불러 형처럼 대신하여 아버지께 들어가
축복기도를 
받게하였습니다.

이와갘은 리브가의 행동은 하나님의 말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하신 말씀을
어떻게 해서든지
 실현 시키고자 모든 위험과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감행한 믿음의 용단이었습니다.
 

이같은 거짓말을 통하여 장자권을 야곱에게 이어 주려한 리브가는 
 
큰 실수를 한 것이지만 이보다 이 실수를 유발시킨 것은 바로 이삭이었습니다. 

이삭도 죽을 날이 43년이나 넘게 남았으며 장자권은 
 
야곱에게 돌아갈 것을 리브가에게 들어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앞당겨 에서에게 모든 것을 주려고 서두른데 있습니다. 

이를 볼 때 리브가의 행동은 어쩔 수 없이 행한 것으로 보아야합니다. 
 
결국 야곱으로 축복기도를 받도록 거짓 계교를 꾸민 리브가는 자신이 

말한 "내 아들아 저주는 내게로 돌리라."(창 27:13)한 말에 따라 
 
야곱의 나이 77세때에 자기의 친정 하란으로 아들을 보낸 후 
 
다시는 만나보지도 못하고 죽게되었습니다.

그녀가 죽을 때에 야곱을 한번이라도 보고 싶었겠지만 
 
자신의 믿음의 행동으로 야곱이 가문의 장자권을 갖게 된 것에 
 
기쁨을 가지고 죽었을 것입니다.  

리브가는 인생을 용단으로 시작하여 용단으로 마감을 한 여인입니다. 
 
우리는 그녀에게서 믿음에는 용단이 필요함을 다시 한번 배우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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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자 / Remnant
[9:27-28]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대상은 모든 인간들이지만
그 구원 사역의 전개는 스스로 선택하신
소수의 무리들을 통하여 이루어 나가십니다.

이를 '남은 자 사상'이라고 말하며 첫번 째 이 사건이 드러난 경우는
인류를 홍수로 멸하실 때, 남겨 놓으신 노아와 그의 가족들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이어서 백성들이 다시 이 땅에 번성하자, 아브라함을 택하시어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지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구원 사역이 본격적인 전개에 이르러 선택의 범위를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국한 시키지 아니 하시고
신약시대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한
영적 이스라엘 백성으로 확대하셨습니다.

결국 남은 자들이란 구원 사역의 끈을 이어가는
시대의 고리들로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완성시키며
하늘 나라에 가서는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기업을 유업으로 얻을 자들을 의미합니다. [계 21:7]


1. '남은 자 사상'이란 무엇인가?
 

남은 자를 통한 구원사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창 7:23] "모든 호흡하는 생물들은 다 홍수로 죽고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하신 말씀으로 시작되었으나
구체적으로 사상으로 드러나게 된 것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스알야숩"이라고
부르게 한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사 7:3, 8:18]

왜냐하면 그 이름의 뜻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남은 자란 단어의 구체적인 뜻은 무엇일까요?
 


[1] 남은 자란 어떠한 심판에도 구원 받고 남아 있는 축복된 무리를 가르키는 말입니다. 


(1)'솨알': 총 276회나 쓰여졌으며 이 단어의 기본 의미는 '남겨있다"란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멸망 받지 않고 남겨져 보존 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2)'팔랏': 총 80회 사용되었고 그 기본의 의미는 '구출하다"란 뜻이며
'남은 자란 극도의 심판의 혼란에서 꺼내져 구출받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3)'말랏': 총 89회 쓰여졌으며 그 기본 의미는
'도피하다, 안전을 구하다"
  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한 집단 전체가 멸망되는, 인간의 힘으로는 살아날 수 없는 위기에서
안전하게 도피하여 생명을 건지게된 사람들'
을 의미 합니다.
 

(4) '야탈': 총 110여회 사용되었습니다.
그 기본 의미는 '님기다, 잔류하다" 란 뜻으로 '멸망의 위기에서
생존한 자들에게는 주어진 약속의 축복가운데
머므르는 사람들'
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말들을 종합적으로 요약해 보면
"어떠한 위기와 심판에서도 멸망 받지 않고 구출받아
남아있는 축복된 무리
'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랜드 주석 이사야 10장 연구자료 참조)


[2] 남은 자란 주의 말씀을 이 땅에서 이루고 마치는 일을 할 사람들을 말합니다. 

 

[롬 9:27-28]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게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같을 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서 '필하다'란 헬라어 '순텔레오'란 단어로
'완성하다'성취하다'라는 의미이고
'끝내시리라'란 단어는 '순템노'인데 그 뜻은
'단축하다, 잘라내다'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계획하신 것은 신속히 성취하신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일에 택함 받은 사람들이 시대별로 '남은 자'들입니다.


1) 남은 자들은 씨의 역할을 합니다. 


이사야는 남은 자들을 '거룩한 씨'라고 표현을 하였습니다. [사6:13]
 
씨란 미래의 추수를 위하여 뿌려지는 씨앗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로 씨를 뿌리실 때,
씨는 많은 열매를 맺어야 그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 의해서 증명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심은 씨앗인 그의 자녀 이삭은 430년이 지난 후,
200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오늘날 남은 자인 우리들도 믿음의 아브라함이 되어
나의 씨로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 200만이 넘는 역할을
감당하는 일꾼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이는 이삭을 드렸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는 사람들만이 맺을 수 있는 추수입니다.
 


2) 남은 자들을 예수님을 증거하는 역할울 합니다. 


[께 12: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게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구약에서 남은 자의 특징을 믿음을 지닌 자로 표현한다면,
신약에서는 주님을 증거하는 자가 남은 자의 특징이 됩니다.
 
 
요즈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원과 축복 받는 일에
주로 목적을 두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주님의 명령이자
사명을 잊어버린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분은 예수님 증거와 제자 삼는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의 초청과, 택함 받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교회에 참석한 것은 청함받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는 반면,
천국가는 것은 택함 받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마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하신 말씀도 '남은 자'의 특징을 나타내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증거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자신의 유익을 위한 도움만을
도구로 사용하려는 신앙이 되어 택함 받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의 특징은 영적 전투를 한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자신만의 안일을 위주로 하는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미 자신의 유혹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는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여러 방면으로 공격을 해 옵니다.
특히 환경을 어렵게 만듭니다.

오늘날 남은 자의 자세는 환경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자세를 지녀야합니다.
성령님이 마음에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2. 누가 남은 자로 선택될까요?
 

[1] 우상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자가 남은 자로 선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왕상 19: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명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 한 자니라."
 

 

그 당시 아합왕과 이세벨은 '바알'을 우상으로 섬겼음으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면 고통을 당할 뿐만 아니라,
여호와를 섬기는 선지자들을 모두 잡아 죽였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생명의 위협을 무릎쓰고
여호와를 섬겼다는 것은 충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지켜 나가야할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하나님을 위하여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 중에 가장 버리기 어려운 것이 자신의 생명입니다.

그러나 참 믿음이 들어있는 사람들에게는 육신의 생명은
어차피 버려져야하는 생명이고 영혼의 영생이 참 생명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육신의 생명이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포기의 계기가 되면
기쁜 마음으로 바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람들의 특징이며
오늘날은 주님의 부활의 영이신 성령님이 오셔서
성령세례 체험을 한 사람들의 특징으로 나타남을 볼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자가 남은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롬 11:5] "그런즉 이와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똑같이 사랑하셨기 때문에 출애굽을 시키셨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백성을 삼으려 하셨습니다.
그런데 택함을 받아 들어간 사람은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습니다.
이는 은혜받은 것에서 택함을 받는 사이에는 반드시 은혜 받은 것에
대한 증거가 있어야함을 의미합니다.

즉 받은 은혜를 육신적으로만 만족 할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깨달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감사하고
따르는 행위가 있어야함을 말합니다.

대부분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의 삶의 축복 여부에만 국한 시키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게하는데 있습니다.
사람은, 믿으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면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기적과 이사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기 보다는 자신을 더욱 사랑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모세는 하나님을 자신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40년 광야 생활을 믿음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은혜를 받고 느낄 때 마다 항상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믿음보다 더 커야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사랑의 부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은 삶이 하나님 선택의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남은 자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오늘날에는 세상에 사랑 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자신, 돈, 권력, 자녀, 컴퓨터…등을 들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앞선 것은 선택의 조건에서
제외된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야합니다.
 

한국 성도들은 이 시대에 남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점점 이스라엘 백성이 걸어갔던 길을
가고 있음을 봅니다. 주변에 우상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버리실 수 있습니다.

천국의 본분을 잃어버리고 세상에 안주하려는
기복 신앙을 떨쳐버리고 한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
주님을 증거하는 참된 남은 자들이 다같이 되십시다.
 








겐그리아의 일꾼
/ 뵈뵈(Phoebe}

[롬 16:1]


1. 인적사항


'포이베'라는 '뵈뵈'의 이름은 이방여신 '아르테미스'의 이름인데
그 뜻은 '밝게 빛나다' 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방인으로 기독교로 개종했으나,
이름을 바꾸지 아니한 것은 그 지방에서 재력으로 부유하고
시회적 지위가 높은데다가 상업상 여러 지역에
그 이름으로 관계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녀는 사도바울이 제 2차 전도 여행시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와 더불어
고린도에 교회를 세우고 전도하였을 당시 고린도에서 남 동쪽으로
약 11Km 떨어진 겐그리아 도시에도 복음이 들어가 세워진
'겐그리아 교회'의 여집사로 봉사하였습니다.

과부로서 많은 재산을 소유한 그녀는 사도바울 사역에 조력및
물질적인 지원을 많이 한 여인이었으며 특히 바울의 부탁을 받고
로마서 서신을 로마 교인들에게 전달한 여인입니다.


2. 시대적 현황


A.D. 1세기 중반경에는 사도바울의 제 2차 , 제 3차 선교여행으로 인하여
복음이 아시아 및 유럽 지역으로 확장 되던 시기였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고린도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던 바울은
당시 고린도에 복음 사역이 어찌나 힘들었던지 회당의 유대인들은
그를 훼방하며 대적하고 이방인들의 우상숭배와 타락은
심하기가 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에 밤에 주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행 18:9-10] "두려워 하지 말고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니라."

이에 바울은 디도 유스도의 집에서 1년 6개월 동안 말씀을 강론했습니다.
이 때에 바울은 사역의 정진을 위하여 주님께 나실인의 서원을 하였습니다.
나실인의 서원은 평생 나실인과, 일정 기간만 나실인으로 서원하는 두 종류가 있는데
바울은 1년 6개월 동안을 나실인으로서의 서원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나실인의 세가지 금지 사항은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고,
시체에 근접하기 말며. 머리카락을 자르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이같이 고린도에 머물러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동안
주변도시에도 복음이 들어가 여러 교회들이 세워졌으며
 그 중에 한 곳이 바로 겐그리아 교회입니다.

시도바울은 고린도에서의 전도를 마지막으로
수리아 안디옥으로 귀환 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항구도시 겐그리아로 내려가 배를 타고
에베소를 경유하여 가이사랴에 상륙,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가려 하였습니다.

겐그리아에 들린 바울은 자신의 서원의 기한이 끝났음으로
 머리를 그곳에서 잘랐습니다[행 18;18]. 이때에
교회의 일꾼으로 봉사하고 있었던
뵈뵈 집사의 도움을 많이 받게 되었습니다.

일찌기 겐그리아 교회의 일꾼이된 뵈뵈 집사는
이후에도 A.D. 50-58 경까지 바울의 선교에
물질적인 지원과 조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A.D. 57년 경에는 바울이 서신을 로마에 전하는
귀중한 사명을 받고 그것을 로마 교인들에게 전달한
사명을 감당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뵈뵈 여집사의 역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땅 곳곳마다
하나님의 일군들을 예비하여 놓으셨으며
또한 남녀 모두 각자가 할 임무도 부여하여 주셨음을 봅니다.

그들은 내적으로는 교회의 유지를 책임지는 일군들이며
외적으로는 이방인을 향한 복음사명을 감당하는 사역자들 이었음을 봅니다.


3. 뵈뵈 집사의 신앙특징


1) 교회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일군이었습니다. [롬 16:1]

사도바울이 그녀를 일군이라 칭한 것은
이 일군 이라는 호칭이 제 2세기에 접어들어 집사로 불리워 졌음으로
그녀의 일이 집사의 일을 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여집사는 대체로 과부중에서 피택을 하였고
그들의 임무는 병든자와 가난한 자를 돌보며 ,
순교자와 옥에 갇힌 자에게 지원하고 봉사하며, 교리를 가르치고,
여신도들의 세례식 때, 수종드는 일들을 하였습니다.

교회를 하나님의 가정으로 볼 때, 성도들을 다스리고
말씀으로 양육하고 교회를 운영하는 일들은
주로 장로들에게 주어진 일이지만,

성도들을 가족처럼 돌보아주고, 먹이고, 위로와 권면하고,
사랑으로 따뜻하게 대하여 주는 것은 여성도에게
주어진 일로 볼 수 있습니다.

집안에 어머니가 없을 때, 사랑의 손길과 평안함을 느낄 수 없듯이,
교회에서 여성도들의 봉사가 없으면 관계나 분위기가 메말라 버리고 맙니다.
뵈뵈 집사는 교회 내에서 마치 어머니 같은 역할을 한 일군 이었음을 봅니다.

이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나타나는 주님을 위한 헌신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은 교회 헌신으로 나타남을 봅니다.


2) 로마까지 사도바울의 편지를 전달하는 사명감이 있는 일군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오래전부터 로마 교회를 방문하려는 마음이 간절하던 차에
이제 3차 선교여행을 마쳤믐으로 이를 실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교회를 방문하기전에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여 준비한
구제 헌금을 전달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연을 본 서신에 기록하여
겐그레아교회의 참 믿음의 조력자인 뵈뵈 편에
자신의 서신을 로마교회에 전달하게되었습니다.

실상 여인의 혼자 몸으로 처음으로 가는 낯선 도시에
중대한 서신을 지니고 장거리를 여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믿음의 위인들은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주님의 돕는 손길이 있음을 믿고 실천을 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뵈뵈 집사의 삶은 사업, 소유, 편안, 행복 이상의 삶을 살려고 노력 하였음을 봅니다.
이는 그녀가 자신의 삶을 이미 주님께 위탁드리고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사명을 수행함으로서 주어지는 댓가는 수고, 베품, 위기, 피곤, 고생…등입니다.
이는 주님을 위한 마음일 때만 감수할 수 있지, 자신을 위한 삶일 때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명감을 가지기가 어려움을 볼수 있습니다.

더우기 있는 자, 부족함이 전혀 없는자가 이와같은 일을 한다는 것은
가치를 천국에 두고 살지 않는 한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3) 여러사람의 보호자로 칭함을 받을 만큼 선행을 베푼 일군이었습니다. [롬 16:2]


보호자란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은신처와 양식을 제공해주고,
법의 혜택이나 제도 아래 있지 못한 이방인들이나
나그네들에게 가디언이 되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미 그녀는 이같은 일을 겐그레아 지역의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풀어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사도바울이 그 지역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사도바울과 동역자들 일행을 자기 처소로 모시고
따뜻한 정성으로 대접을 하여 준 것은 물론
사도바울이 지친 마음을 쉬게 하여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녀를 표햔하기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는 말의 의미는
사역의 모든 뒷치닥거리를 도맡아서 해주는 역할과
그 이후에도 지속적인 물질적 지원을 하여 주었음을 의미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을 해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표현하며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신앙의 동기나 목적이 사랑과 축복을 받기 위한
 인본주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의 시각으로는 남을 나와 같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모시고 사는 신앙인은 남을
주님의 시각으로 볼 수 있도록 성령님이 감동시켜 주십니다.

이같은 삶은 이 땅에 얼마나 많은 것을 남겨놓고 천국에 기느냐보다,
천국에 가지고 갈 것을 얼마만큼 이 땅에서 준비하고 사느냐에
인생의 목적을 정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성령님의 감동하심입니다. \

그러므로 베푸는 삶을 옳게 보여주고 산 뵈뵈 집사의 삶을
우리도 본받을 수 있는 성도들이 다같이 되십시다.             




  1. 삭개오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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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08 14:30



교법사 가말리엘
/ Gamaliel

[행 5:34]


1. 인적 사항

가말리엘이란 히브리 원어는 '가물리엘'로 그 의미는
"하나님은 나의 보답이시다."라는 뜻입니다. [민 1:10]
그는 유대인들의 율법과 유전을 연구히고
체계화하는 율법학자인 교법사였습니다. [행 5:34]

산헤드린 공회에 바리새파를 대표하는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위대한 랍비 '힐렐'의 손자이며 힐렐학파 의 계승자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를 사모하며 기다리다 예수님을
품에 안았던 '시므온'의 아들입니다.[눅 2:25]

그는 '랍비'(선생)라고 칭해지기보다 훨씬 영광의 호칭인
"랍반"(우리들의 큰 선생)으로 불리워진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수제자 사도바울의 스승이기도합니다. [행 22:3]


2. 그의 생애


가말리엘의 가문은 유대교의 보수파인 "샴마이" 학파와
쌍벽을 이루었던 온건파인 '힐렐'학파의 원조였던 '힐렐'이 조부였으며,
그의 부친은 또한 예수님께서 아기로 성전에 드리어졌을 때,
'그리스도를 보기 전엔 죽지 않겠다'
시므온이 부친인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하였던 그는
조부가 세운 힐렐학파의 계승자가 되었고 랍비가 되었으며
랍비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랍비에게 주어진
7명의 랍반중 한 사람으로 불리어졌습니다.

또한 그의 부친 시므온과 조부 힐렐에 뒤를 이어
랍반의 호칭을 받은 가말리엘은 3대째 랍반 가문의 후예로서
그는 평생에 문하생을 천여명이나 배출을 하였습니다.
그들 중 5백명은 율법사로, 나머지 5백명은 희랍의 지혜를
공부하는 제자들이었다고 합니다.  (탈무드)

이중에는 수제자로 '사도 바울'이 있으며, 또한 전승에 의하면  
'스테반' '바나바'도 그에게서 배운 제자들이었다고합니다.

그는 성전에서 가르치기를 좋아해서, 주님이 어렸을 당시
부모와 더불어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성전에 남아 랍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을 시기에 주님과 대화를 나누었던
선생들 중 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눅 2:46]
또한 바로 그 때에 예수님에 대하여 특별한
인상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나중에 주님의 기적을 일으카는 사역을 통하여
그는 점점 그 도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으며
니고데모와 아리마데 요셉과 더불어
주님의 숨은 제자로 전승에는 전해지고 있습니다.

더우기 그의 온전하고 관대한 성품은
산헤드린의 극단적인 분위기에 말려들지 않고
오히려 그 분위기를 진정시키는 역할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이미 그는 주님의 도를 따르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만년에 그의 아들 아힙과
니고데모와 함께 베드로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바리새인으로서의 바른 행실과 그의 높은 학문,
온화하고 관대한 성품은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살았으며,
그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라반 가말리엘이 돌아가셨으니, 이제는
율법에 대한 존경도 없어졌고 순수성과 금욕도 가버렸도다.
"
라고 하며 많이들 아쉬워 하였답니다.

그의 제자이며 개종자인 탈꿈학자 '몽켈로스'는 그를 추모하면서
두로돈으로 70미네의 향료를 제공하였으며
위대한 위인의 장례절차에 따라 장례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그는 비록 나타나지 않은 그리스도의 제자였으나
말년의 세례는 그로 평안히 구원받은 기쁨으로 임종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이 파괴되기전 (A.D. 70) 18 년 전에 죽었으며,

그의 죽음에 대하여 '미쉬나'에 기록되었으되
"그의 죽음으로 토라에 관한 경의도 끝났고 순결과 절제도
그와 함께 묻혔다."라고 표현되어있다 합니다.


3. 그의 신앙의 특징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메모는 공회에서 주님을 잡으려는
쟁론이 한창일 때, 말하기를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전에 판결하느냐?"[요 7:51] 함으로
그들의 행위를 은근히 저지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이미 예수님을 따르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말리엘도 마찬가지로 공회에서 사도들을 붙잡아
처형하고자 했을 때, 그 일에 대하여 과거 행해진
'드다'와 '유다'의 사건을 예를 들어, 또한 공회의 결정을
저지한데에는 이미 그의 마음 속에
주님을 따르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 가멜리엘은 하나님의 뜻만을 따르려는 신앙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신앙은 운명과 자유 의지를
한데 묶은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하면서도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했으며,
"모든 것이 예비되어져 있으나 인간에게도
선택의 자유가 주어져 있다." 라고 믿었습니다.
(바클레이 주석 참조)

이같은 그들의 신앙태도는 오히려 정치적, 종교적,
기득권을 옹호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보다
현실적인 위치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삶을 살게 만들었으며
주님이 행하신 모든 기적을 오히려 바알세블에 힘입어
행한 귀신의 역사라고 왜곡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같은 마음과 생각은 자신의 유익을 위한 지위 및
신분 유지 로서의 신앙을 필요로 하는 삶을 살게 만들어준 반면에,

가말리엘은 그의 직분과 직책은 이미 온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랍반의 위치 인데다가,
그가 이미 주님의 행하신 기적과 말씀으로
참 신앙의 길을 찾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행실에 대하여 주의와 경고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즉, "너희들의 자유 의지와 행실은 생활면에서는 허락될지라도
신앙면에서는 허용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의 뜻을 지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일을 막는다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됨을
알아야한다." 고 엄히 나무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같은 신앙에 있으면서도 타교단과
이웃 교회에 역사가 일어나는데 대하여
비판과 정죄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단에 대한 경고는 바람직하지만, 기적과 이사는
교리에 의해 해석되기 어려운 부분들임을 감안할 때,
기도하며 성령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시는 지를
기다리며 주시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말리엘은 신앙의 변화에 대하여 신중하였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는 행위가 되지 않도록
좀더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신앙도, 인격과 지식과 덕망이 배양되어
있을 때 더욱 존경받는 신앙인이 됨을 배울 수 있습니다.


2) 가말리엘의 신앙은 현상보다도
과거의 하나님의 역사를 근거로한 신앙이었습니다.


우리들이  현실에 당면한 문제로 미래를 예측할 수 없을 때,
바른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행하셨던 일과 인도하셨던 역사를 돌이켜보면
현실을 이해할 수 있고 미래를 예측할 수가 있습니다.

가말리엘은 많은 학문과 지식 못지않게 신앙 안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도 면밀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드다'라는 사람과 '유다'라는 자가 사람들을 미혹하고
난을 일으켰을 때에 장본인을 잡아 처형하자 그를 뒤쫓았던
무리들이 저절로 해체되었던 사건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소행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모세처럼 하나님께서 난 것이면
바로왕이 아무리 방해를 해도 결국은
자신에게 불행만 주어졌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세가 죽었어도 여호수아를 통하여
모두 이루어졌음을 보고, 기득권의 치리를
옹호하려는 무리들의 감정적이고 선동적인
동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는 주제를 주입시켜
흥분을 가라앉힌 것입니다.

왜 그들은 모두 가말리엘의 주장을
반대하지않고 순순히 따랐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가 한 말 중
"너희들이 하나님의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v.39]
라고한 그의 결정적인 일침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의 기적과
이사와 부활하심을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일종의 죄 의식과 불안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가말리엘은 그 같은 그들의 정곡을 찌른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이 지금이 아나라.
예전에 주님을 죽였을 때, 이미 저지른 죄를 알고
더 이상 하지 말라."라는 의도를 지난 말이었습니다.  

거짓 무리들은 이익을 중심으로 할 땐 함께 모여듭니다.
그러나 불리한 결과가 초래할 땐, 서로가 등을 돌리고 맙니다.
가말리엘은 그들과 함께 더 이상 동조하지 않고
살다가 (A.D. 52)년 경에 일생을 마감하였습니다


3) 가말리엘의 신앙은 주님의 말씀을 숨어서 지키는 살이었습니다.  


[행 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이 말씀은 공회 의원들일지라도 주님의 재자가
많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 그리고 가말리엘이었습니다.

그 이유로서 그는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이었으며
제자들의 기적과 기사는 확실히 하나님께로서
기인한 것이며, 학문 없는 그들이 구약을 인용하며
대제사장들에게 변론하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능력을 주셨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기전에 제자였던 사도바울을 만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대한 그의 간증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죽기 전에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기 위하여
아들과 더불어 사도 베드로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는 바울도 사도였으나 제자로 부터 세례를 받기보다는
주님의 정사도인 베드로와 요한에게 받는 것이
더 이치적이었을 것입니다.

이와같은 내용과, 제사장들 중 주님께로 향한
허다한 수의 사람들의 아름은 가리어져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제자들에게 세례를 받고 숨은 제자들로 살았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말리엘이 보여주는것은, 진리는 지식보다 앞서며,
신분과 지위도 주님의 종들인 사도보다 결코 높을 수 없으며,
백성들에게 받는 존경과 인정도 주님으로 부터 받는 인정보다
훨씬 못하다는 것을 그는 몸소 보여준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겸손입니다.
참된 신앙은 드러내 보이는 것보다 주님과의 내면의 관계가
더 깊고 중요한 부분을 조용히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요즈음은 보기 드믄 일들이라 여겨집니다.
이 시대에 모두 요구되어지는 것도 드러내지않고
숨은 제자로서의 진리를 따르는 진실된 모습일 것입니다.

그의 부친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아보고 눈을 감았지만,
가말리엘은 성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마음에 모시고 눈을 감았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의인을 옳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아리마대 요셉
/ Joseph of Arimathea
[눅 23:50]



1. 인적사항


70 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위원
공회의 결의와 행사에 가담하지 아니한 선하고 의로운 자
사무렐의 출생지인 라마다임 출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린 사므온과 안나 선지자 같은 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요구한 자
주님을 자신의 묘실에 모실만큼 부자인 자
예수님의 숨은 제자 (마 27:57)
니고데모와 함께 향품과 향료로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한 자 (요 19:39)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 장례식 행사 때 의외에는
성경에서 그에 대하여 언급되어져 있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이 주님의 숨은 제자로서 매우 가치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후대의 성도들은 그를 흠모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에 관한 미흡한 언급을 대신하여
전해 내려오는 전설로 많은 사람들이 위로 받기도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주후 61년에 빌립에 의해서
영국으로 파송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글래스턴버리 (Glastonbury)로 왔고 그 때에
그는 최후 만찬때에 사용되었던 잔을 가지고 왔는데
그 안에 그리스도의 피가 들어있었다 합니다.
이 잔이 성배가 되었으며 아더왕의 기사들은
그것을 찾는 것이 꿈이었다고 합니다.

요셉이 글래스턴버리에 이르렀을 때는 그는 피로에 지쳐
지팡이에 의지하여 쉬려고 지팡이를 땅이 깊이 박았는데
그 지팡이에 싹이 나서 해마다 크리스마스 날이면
꽃을 피우는 숲이 되었다 합니다.

성 요셉의 숲은 아직도 글래스텐베리에서 꽃피고 있으며
오늘까지도 그 점지를 온 세상에 내보내고 있다 합니다.
영국 최초의 교회는 글래스텐베리에 세워졌고 대 수도원과
고대 건물에는 성요셉 예배당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곳은 순례자들이 즐기는 순례지이자
휴양지가 되고있다고 합니다.
(바클레이 주석 씨리즈 눅 p. 404 참조)


2. 신앙의 특징


1)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산 자였습니다. (눅 23:51)

예루살렘의 공회는 70명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그 중 24명은 제사장들의 대표자들로
24명은 이스라엘 국민들을 대표하는 장로들로
나머지 22명은 율법을 배운 세기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공회의 기원은 광야에서 모세를 도와주었던
 70인 장로들을 본받아 이루어졌다고하며
그들의 권한은 예루살렘의 시정, 종교적 가르침,
치안의 확립,  성전 내의 각종 업무 집행들을 수반하였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당시 국민의 대표 중 한 사람의 장로로써
공회에서 일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와같은 정치, 종교의 지도자역에 가담하면서
그는 시므온과 안나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며 지내던 중
예수님을 만나게 되자 약속된 구세주가 바로 예수님임을 믿게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와 시므온과 안나 선지자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의 공동특징을 보게됩니다.
그것은 바로 선하고 의로운 성품을 지녔다는 것입니다.
(눅 2:25, 23:50)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날
우리들에게 행한대로 보응하리라 하셨습니다. (롬 2:6)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에서의 위로를 바라며 살고 있습니다.

그 결과 재산, 권위, 명예, 권세, 소유, 치리 등에 중심을 둔
신앙생활을 하고있는 것을 봅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그대로 본받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신앙생활은 하나님 나라를 염두에 둔
참된 믿음의 생활은 아님을 요셉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의란 본래 재판자리에서 필요한 것으로서
의를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재판자리에 서 있다는
인식을 항상 갖고 바르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즉, 의란 선행과 일치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고
고아를 위해  신원하며 과부를 위해 변호하고 (사 1:17)
공평을 지키는 것임을 (사 56:!)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예수님을 처형할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그는 아에 처음부터 그 같은 불법적인 모임에
가담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에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결정은
만장일치였기 때문입니다. (막 14:64)
그의 이와같은 행동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사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빌라도에게 주님의 시신을 요구한 담대한 신앙을 가진 자였습니다. (눅 23:52)


성경에서 요셉과 니고데모를 주님의 숨은 제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 27:57)
이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지만 자신들의 소속과 사역속에서는
떳떳히 제자의 신분을 노출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1] 산헤드린 공회원이란 신분과 지위는, 그들로 자격을 박탈당해야만 하는
주님의 제자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못하는 처지에 있게 하였으며

[2] 유대교사회에서의 축출과 재산의 몰수 등은 큰 위험임으로
숨은 제자로서의 신앙인으로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재판받는  자리에서와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담대한 믿음과 순종을 보고 그들의 마음은 강하게
믿음으로 자리잡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특이한 사건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1] 주님꼐서 돌아가시자 성전의 휘장이 찢어져 둘이 되었으며
무덤들이 열리고 죽은 성도들이 다시 살아났으며
부활의 몸으로 돌아다니는 역사가 일어난 사건 (마 27:51-52)

[2]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강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심을
나타내는 표현을 어느 누구도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옆에 달린 강도가 고백했습니다.


[눅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찮은 죄인인 도둑만이 예수님을 구주로 외치고 있는데
자신은 정작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자로서
자신의 신분을 더 이상 감추고 있는 것이 신앙 양심에
어긋나는 일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현실 위주의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천국 백성으로서의 신분을 깨닫고 담대하게 처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빌라도에게 가서 주님의 시신을 요구하였습니다.
이 같은 행동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자세일 뿐 아니라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려놓은 온전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보인 행동이었습니다.


세상 속에서의 삶은 신앙행활에 많은 걸림돌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전혀 걸림돌이 되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왜나하면 나에게 주어진 모든 형편은 나의 노력과 능력으로
얻어진 것이기보다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맡기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란 주인공의 인식이 주님이라는 중심의 삶으로
바뀌는 것이  참된 신앙임을 요셉은 보여준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시신을 자신의 무덤에 안치하여 장사지낸 자입니다. (눅 23:52)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 다음에 12 제자들과 같이
주님 곁에서 많은 말씀을 듣지 못하는 대신 주님에 대한
구약의 말씀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서에 대하여 늘 자신의 정원을 거닐면서 묵상을 하였습니다.
그 때, 그는 마음에 와닿는 한 구절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 53:9] "그는 강포를 행치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이 말씀 가운데 과연 그 부자란 누구일까요?
그 말씀은 그의 마음을 파고들었으며 마침내 그는
자신이 장본인이 되어야 함을 점점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주님께서 돌아가시자 지체하지 않고 빌라도 총독에게
달려가 주님의 시신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제자들도,  평소에 은혜를 많이 받았던
  장본인들도 없었습니다.
오직 같은 공회원인 니고데모가 가지고 온 백근에 해당되는
몰약과 침향으로 주님의 몸을 닦고 세마포에 싸서
둘이서 주님의 장례를 치룬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위하여 마련해 둔 돌무덤에 시신을 안치하였습니다.
신앙에는 시작시점과, 성장 시점과, 완성시점이 누구나 다 다릅니다.

먼저 시작한 신앙인에게도 자신의 할 사명이 주어져 있고 나타난
제자된 사람들도 해야할 때가 있는 반면 늦게 부르심 받은 사람도,
숨어있는 제자의 삶을 산 사람도 주님의 떄가 되면
할 일들이 주어지게 됩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순종하려는 자세로
말씀을 늘 묵상하며 깨달음을 갖는 신앙생활이 중요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마지막 주님을
온전히 모신 것도 구약을 늘 읽고 묵상하고
하나님을 말씀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자신의 믿음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 중에 사명적인 삶은 말씀을 중심으로 묵상하고
의미를 깨닫도록 노력할 때 성령님의 계시하심으로 이룰 수 있습니다.

시므온과 안나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그들에게
성령님꼐서 임하셔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계시를 주셨듯이
아리마대 요셉에게도 성령님께서 주님의 마지막 장례에 대하여
계시히여 주셨을 것입니다.

그는 숨은 제자로서의 신앙생활을 시작하였지만 나중에는
정식 제자들보다도 더 큰일을 해낸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그의 신앙을 본받아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마지막 떄에
감당하는 성도들이 다 같이 되십시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
/ 시므온 (Simeon)
[눅 2:25]


1. 인적사항


시므온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들으셨다"라는 의미 입니다.
그는 유명한 유대인 랍비 힐렐의 아들이요,
 가말리엘의 아버지요, 
A.D.13년에 산헤드린 회장이었습니다.

그는 일생을 메시야를 기다리다 성령의 계시로
 예수님을 처음 본자가 되었으며,
이에 감동하여 하나님께 메시야에 대한 찬송인
 '눈크디미티스' 를 올린 자가 되었습니다.


2. 시대적 배경


말라기 선자자 이후 400년 동안이나 이스라엘에는
영감받은 선자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상황은
B.C. 1세기경 유다가 헬라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다시 로마의 식민지 통치 하에 들어감으로
정치적, 종교적으로 암울한 침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유대인들 사이에는 종말론적 메시야 대망사상이
크게 무르익게 되었으며 대부분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이
적국의 압제에서 벗어나 정치적 으로 해방을 가져다줄
지도자로 서의 메시야상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그럴 즈음에 소수의 경건란 신앙인들은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야의 상' 그대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할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시므온과 안나 여선지자 였습니다.
시므온은 메시야의 오심을 간절히 기도하며
성전 중심의 생활을 한 결과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가 죽기전에 메시야가 오는 것을 보리라 알려주셨습니다. (눅 2:26)

 그는 이 위로의 말씀을 붙들고 기다린 결과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처음 알아보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 감사, 찬송 드리는 시므온의 고별송을 지었고
이 노래는 마리아의 찬송과, 사가랴의 찬송과 더불어
5세기 이후 저녁예배 용으로 많이 불리어졌으며,
또한 임종시에 찬송으로 사용되어졌습니다.

그는 유대역사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시므온은
 주님을 뵌 이후에도 훨씬 오랫동안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이미 메시야를 보았은즉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음을
하나님께 고백드렸으나 하나님께서는
노후의 평안의 생활을 오랫동안 보장해 주신 것입니다.


3. 신앙적 특징


1)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 자였습니다. (눅 2:25)


사람이 의롭다는 것은 사람들에 대한 그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고,
경건 하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그의 성품을 나타낸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그는 '예언자의 영을 받은 자요'
더우기 메시야의 현세적 왕국에 대한 해방의 지도자로
유대인들이 품고 있었던 견해와는 달리,
영혼 구원의 메시야로써 그들과 반대되는 증언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위를 빼앗겼다고 합니다.
(메튜헨리 p.118)

이로 보아 사람이 의롭다 하는 것은 사람의 행동을
기준으로 하는 의로움과 불의를 보고 따지려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한 믿음과 순종 여부에 따라 하는 행동에
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경건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투명하게 보이고 맡기는 삶을 의미합니다.

예전, 독일에 '고틀리프'(하나님의 사랑이란 의미)이라는
늙은 농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지나가던 그리스도인이 사과를 줍고 있는 그를 보고
 '고틀리프씨 피곤하지  않으세요?'하고 인사를 하자
익은 사과를 건네주면서 그가 다음과 같이 말했답니다.

 '나는 피곤하지 않아요. 나는 지금 단지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오.
생각컨대 나는 이제 거의 다 익었어요.
머지않아 나도 땅에 떨어질거야.
그 땐 아마 하나님께서 날 주워 올리시곘지?'
(싸이클로 피티아 예화 중에서)

시므온은 메시야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항상 성전에서 기다렸습니다.
죽음 보다도 더 소중한 메시야를 보기를 원하면서
소망을 기다리는 것과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는것 모두 경건한 삶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메시야를 뵙기 위해서는
성결이 요구 되어진다는 점입니다.

율법에서 흠이 없는 자, 산앙에서도 흠이 없는 자,
성결한자,  결국 그는 신약에서 처음으로 성령강림 전에
성경의 충만함을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2) 성령의 지시를 받은 자였습니다. (눅 2:26)


성령의 임재는 성결 위에 임하시고, 성령의 충만하심은
믿음위에 예언의 영으로 시므온에게 임하셨습니다.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전에 죽지 아니하니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구약의 말기 400년간의 성령님의 침묵 가운데
시므온에게 임하셨음은 그의 성결과 믿음이 얼마나
좋았는 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시므온에게 있어서의 삶이란 하나님을 섬기는 기간이자,
하나님의 뜻이 자신에게 이루어지는 때이며,
죽음이란 평안으로 맞이하는 하늘의 부르심으로 여긴 삶이였습니다.

그에게 남은 인생의 한가지 하나님의 뜻은
메시야를 보도록 허락하신 축복의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아기 예수님이 성전에 오르시는
그 시간에 시므온을 감동시켜 미주치게 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으나 그들은 생후
몇주 지난 어린 아기와 가난하고 미천한 부부가
성전으로 들어오는 것으로만 보였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의 영의 눈에는 아기 예수님이 바로 구세주시요,
이스라엘의 위로자이심을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사람의 눈이란 생각 속에  있는 것만 현실에서
찿아내어 볼수있게 되어 있습니다.
시므온의 마음 속은 오직 메시야만을 그리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찾는 성도들도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전에 들어올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영의 눈과 귀가 열려 주님의 임재하심을 체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므온은 신앙생활이란 성전 생활이며 예배란 전적으로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예배임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3) 메시야에 대한 예언 찬송을 부른 자였습니다. (눅 2:29-32)


구원이란 즉 주님을 보는 것임을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체험 모두를 구원으로 여기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4) 구원은 온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은혜임을 그는 알았습니다. (눅:31)


'만민 앞에 예비된 것'이란 인간 종교가 아닌
하나님의 구원의 길임을 예견한 말입니다.
또한 구원의 역사를 두 가지로 나타내었는데, 
이방인에게는 빛의 역할로,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으로 표현을 하였습니다.

이는 주님을 모르고 사는 이방인들은
무지와 어두움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빛이 어두움을 몰아내는 구원으로 표시한 것이며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지만
천대와 멸시 속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메시야의 탄생으로 인한 영광의 회복이
이루어 질 것이 필요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시므온의 메시야의 찬송은
마리아의 찬송과 사가랴의 찬송과 더불어
이름다운 찬송의 하나로 5세기 이후
 저녁예배시 찬송으로 불리었으며
또한 임종시의 찬송으로 사용되어졌습니다.
(누가복음 주해 이상근 박사)

노년이란 오랫동안 산 삶에서 오는 것이기 보다는,
신앙 속에서 산 삶에서 오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인생의 열매는 육신에서 열리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서 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므온의 신앙의 열매를 보면서 인생의 마지막을
신앙 속에서 열매를 맺는 삶으로
좀 더 변화되어 져야겠다는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업무를 자
/ 보아스(Boaz)

[룻 3:13]


1. 인적사항


'보아스'는 광야에 있을 때, 유다 지파의 한 방백이었던
 '나손'의 손자였고, 여리고 기생 '라합'에게서 난 '살몬'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와 '엘리 멜렉'과의 관계는 랍비 전승에 의하면
그는 엘리 멜렉의 조카였다고 합니다.

'보아스' 란 그의 이름의 뜻은 '그에게 힘이있다' 라는 의미로
 시리아 역본에 의하면 그는 '율법에 있어서 유력자'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유력한 자'(2:1)로 표현 한 것으로 보아
신앙과 재력 모두를 갖춘 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엘리 멜렉의 기업을 물어줌으로 모압 여인인 '룻'과 결혼하였으며
'오벳'을 낳아 '다윗'의 증조부가 되었습니다. (4:13)


2. 시대적 배경


B.C.1390-1050년 사이를 사사기 시대라고 하는데
이 당시의 이스라엘은 도덕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몹시 타락해서 제각기 살기에 바쁜 시기였습니다.

이때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는데
'엘리 멜렉'(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
'나오미'(기쁨)부부는 베들레헴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이스라엘과는 적대 관계에 있었던 모합 땅으로
양식을 얻기위하여 이사를 하였습니다.

이는 신앙 중심의 삶에서 벗어난 환경 중심의 삶으로
경제적 추구를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어느덧 그곳에서 십년의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엘리 멜렉이 죽고 이어서 두 아들 '말론'(질병)
'기룐'(상실하다)의 두 아들도 이어서 죽어버렸습니다.

결국 나오미와 젊은 두 며느리인 말론의 아내 '룻'(친구)
기룐의 아내 '오르바'(돌아오는 자)만 남게 되었습니다.(룻 4:10)

나오미는 그제서야 자신과 남편이 모압 땅에 이주해 온 것이
잘못 되었음을 깨닫고 고향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두 며느리입니다.
결혼한지 몇년 되지도 않아 청상 과부가 되었으니
그들의 젊음이 너무 아까와 고향으로 돌아가 인생을
다시 출발하도록 권하였습니다.

그 두 며느리는 이스라엘 집안으로 시집와 모압에서
 섬겼던 우상과는 다른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배우게 되었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신앙의 열매가 룻에게 나타납니다.
둘째 자부 오르바는 고향 땅으로 돌아가고
룻은 결단코 시어머니를 좇아 베들레헴을 돌아오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의 신앙의 결단으로 세 가지로 포기하였습니다. 

1) 자신의 청춘의  인생을 포기하였습니다.
2) 고향과 민족을 등졌습니다.

3) 시모 봉양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런데 룻이 이같이 결단한데는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삶을 살려고
하나님을 선택하고 살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룻은 신앙을 선택함으로
인생이 바르게 열릴 것임을 믿은 여인이었습니다.

한편 보아스는 베들레헴 근교에 많은 밭을 가지고 있는
부유한 지주로서 그 지방의 유력자 였습니다. (룻 2:1)

이 '유력 자'란 뜻은 히브리어 성경에는 '큰 용사'로 표기되어 있으며
이는 '용맹스러운 영웅이다'라는 뜻으로서
이 말은 보아스가 적들과의 투쟁을 통하여 이름난 용사였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의 위치는 그 지방에서 '영웅적이며 부유한 지주'
충분히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어느날 베들레헴의 자기 밭으로 와서 밭의 추수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자기 밭에서 이삭을 열심히 줏고 있는 여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신앙의 눈은 동시에 신앙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주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룻에 대하여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룻에게 한 말을 보십시요.

[룻2:12]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보아스는 이미 모합 여인 룻이 시어머니를 좇아
이곳에 온 것과 늙은 시모를 봉양하는 효성과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살기로 결정한 것을
다 전해듣고 전해 듣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날개 아래 머물려는 가련한 작은 새에게
날개와 같은 은혜를 네 가지로 베풀어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1] 날개는 보호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는 룻에게 다른 곳을 가지말고 이 곳에
안전하게 머물도록 허락하였습니다.

[2] 날개 안은 따뜻합니다.

[룻 2:12]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고…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말씀대로 이는 위로와 안심을 주는 장소를 제공했습니다.

[3] 세째는 보장입니다.

그녀를 위하여 일꾼들에게 이삭을 다 베지말고
오히려 조금씩 뽑아버려 그녀로 넉넉히 줏게 하였습니다.

[4] 네쩨는 배부름입니다.

주인의 자리에 함께 참석하여 요리한 곡식을
마음껏 먹게 한 것입니다. (룻 2:14)

룻기에서 주인공은 룻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일을 맡아 시행하는 남자 주인공은 보아스입니다.
룻기에서 가장 하나님의 섭리를 먼저 깨달은 사람은 나오미입니다.

그 때문에 룻이 보아스의 밭에 이른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임을 알았고
룻이 보아스와 결혼을 하여야할 것도 제일 먼저 알아서 지시한 사람도 그녀입니다.

보아스는 룻을 탐한 것도 소유하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판단이나 의지대로 행하지않고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오직 행하며 베풀고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는 보아스로 룻을 통하여
다윗의 증조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말씀 따라 사는 삶이 섭리따라 사는 삶이며
섭리 따라 사는 삶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사는 길임을
보아스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날 나에게 위기가 있다면 오늘의 주신 말씀을 따르십시다.
우리의 앞에 계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업을 물어주실 것입니다.


3. 보아스 신앙 인품의 툭징



1) 부를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남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부의 남용이란 무엇일까요?

[1] 자기만의 소유를 위하여 부를 사용하지 않고 보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의 고통을 외면하고 그것으로 자기만의 기쁨과 위로를 느끼고 사는 것입니다.


[2] 자신에게 주어진 부를 더 쌓기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예컨대 값싼 노동력,
과도한 이자 적용, 상대방의 약점을 자신의 유익의
기회를 삼고
생대방의 재산을 헐값으로 매입하는…등
가난한 자와 무지한 자들의 소유를 착취하는 것입니다.

[3] 부를 미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입니다.

즉, 불법, 불의, 정욕, 향락, 지배, 군림, 핍박, 학대…등을 일삼으며

약한 자들을 부리며 자신의 농락거리로 여기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딤전 6:17-18]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보아스는 자기 부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쓰여지기를 원하며 산 사람입니다.
그 중에 한 가지가 선한 일과 선한 사업에 자신의 부를 사용한 것입니다.
자신이 룻의 기업을 물으려면 재산상의 손해를 감수해야합니다.
결국 자기 돈으로 산 기업은 나중에
일리 멜렉의 소유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는 계대 율법에 따라 이방 여인 룻을 취할 경우 그 집안은
남자가 모두 죽은 저주의 집안일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에도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혼 적인 삶보다 영적인 삶을 선택했습니다.
부란 혼 적인 삶에서는 군림의 역활을 하게되는 세력이 됩니다.
그러나 영적인 삶에서는 좋은 일에 사용되어지는 도구가 됩니다.
보아스는 자신의 부를 선한 일의 도구로 사용하며 산 사람입니다.


2) 신앙으로 자신의 욕망을 잘 다스리고 살았습니다.



[신 25:7-9]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취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거든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내게 행치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이를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 취하기를 즐겨 아니하노라 하거든
그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할 것이며."


이에 따르면 남편이 죽은 여인은 형제에게 나아가
죽은 형제의 대를 잇게 해 달라고 간청할 수 있는
관습이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 법을 잘 알고있는 나오미는 룻에게 그 법대로
보아스에게 나아가 간청하도록 지시를 하였습니다.

이에 룻은 몸을 단장하고 추수가 끝나는 날
타작 마당에 나아가 보아스 곁에 가만히 누었습니다.
그때 보아스가 놀라 일어나자 룻은 자신의 간청을 말하였습니다.

 더우기 이 시대는 도덕적, 신앙적으로 타락한 시대였기 때문에
서로가 허락한 남녀 관계는 얼마든지 져지르면서도
죄책감없이 살 수 있는 분위기엿습니다.

더군다나 룻은 젊은 여인이자 예뻤고
마음 또한 착한 정숙한 여인이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소유하고 싶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현실의 개인적인 욕망이나 충족보다
미래적 상황 전개를 말씀에 따라 행동하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제일 적격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자기보다 기업을 무를 수 있는 더 가까운 친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룻의 간청을 거절로 부끄럽게 만들지 않기 위하여
먼저 위로의 말로 안심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였습니다.

[룻 3:11] "네가 현숙한 여자인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다만 네 기업 무를 자가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
먼저 그에게 묻고 나서 거절하면 내가 무르리라."

그리고 룻의 겉 옷을 펼치게 하고 보리를 여섯번 되어
부어주고 룻으로 하여금 시모에게 갖다주도록 하였습니다.

이 사건에서 가장 궁금하게 여기고 있는 사람은 시모 나오미입니다.
보아스는 나오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섯번이나 보리를 달아준 것입니다.

이는 단지 그가 먹을 것을 풍성히 보냄으로 현실적으로
나오미에게 배가 고픈 것을 위로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여섯번이란 숫자의 의미를 전하게 한 것입니다.

즉, 여섯이란 숫자는 '노고와 봉사'를 의미하는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그러나 일곱의 수는 '안식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안식년은 6년 봉사후 7년 째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나오미에게는 안식년의 때가 이른 것임을
보아스의 암시를 받은 것입니다.

보아스의 사랑은 육신에 속한 것도, 혼에 속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영에 속한 사랑을 룻과 나오미에게 베푼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에 따른 책임과 도리를 지키는 신앙인에게서만
나타날 수 있는 사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3) 보아스는 오늘날 나의 기업을 물어주시는 예수님의 예표적 인물이었습니다.


구약은 항상 신약의 예표로 쓰여졌습니다.
그러므로 룻기에서 또한 보아스의 역할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형이요,
우리들에 대한 하늘나라의 기업을 물어주신 것의 예표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아스가 룻의 근족이었듯이
주님은 우리들의 가장 가까운 하나님 가정의 형제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받은 이 세상을
마귀의 유혹과 계략에 빠져서 모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더우기 성도들 중에는 지금도 사단의 세력에 눌리며
삶을 억울하게 갈취를 당하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단 마귀가 덤벼들어 빼앗으려들면
우리의 힘으로는 그 세력을 막을 수도 지킬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욥'도 하루 아침에 재산, 가족, 건강, 모두를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보아스는 이방인 룻을 자신의 신부로 맞아들였습니다.
주님도 이방인인 우리들을 자신의 신부로 맞아 들이십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기업을 찾아 주었습니다.
주님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업을 받게 하여주셨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통하여 자녀를 낳아 하나님의 족보를 이루게 하였습니다.
주님 또한 우리로 영적인 자녀들을 낳아 하나님의 가족을 이루게 하여 주시고 계십니다.

보아스는 후손인 다윗으로 이스라엘의 왕을 삼는 조상이 되었습니다.
주님 또한 우리와 후손들로 재림하여 이 땅을 다스리실 때에 우리와 후손들로 왕같이
이 세상을 다스리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업을 잃고 위기와 방황 속에 있는 성도분들은 지체치말고 속히
오늘 나에게 기업을 물어 주시러 오신 예수님을 만나십시요.

룻과같이 하나님을 선택한 나의 바른 신앙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비록 지난날 한 때 나의 잘못된 판단과 선택의 실수로 잃어버렸던 기업들을 
오늘 보아스처럼 오신 주님이 친히 나서셔서 모두 찾아 물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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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27 01:11






'이스라엘의 어미' 여 사사
/ 드보라 (Deborah)
[삿 5:7]


1. 인적 사항



이스라엘의 네번 째, 사사인 드보라는 잇사갈 자손으로(삿5:15)
랍비돗의 아내였습니다. (삿4:4). 그녀의 이름 드보라는 "꿀벌" 이라는 뜻을
지닌 이름으로 그 이름처럼 부지런하고 지헤로운 여인이었습니다.

유태의 율법학자들에 의하면 그녀는 성전의 등의 심지를 만드는 일에
종사 하였다고 하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 쓰임받아
그 백성들을 밝혀주는 조명의 여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이스라엘의 여자사사가 되어 40년을 백성을 통치 하였으며(삿 4:4),
그녀는 주로 사마리아 남부 에브라임 산지의 라마와 벧엘 사이에 있는
 종려나무 아래 거하며 말씀을 선포 하였음으로 이 나무를 나중에
'드보라의 종려나무' 라는 명칭으로 불리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왕 야빈의 지배아래 20년간 학대를 당하고 지내자
여사사인 드보라는 당시 이스라엘의 장군이었던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초청하여 가나안 군대를 물리치도록 명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은 장본인 입니다.

승리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드보라의 노래'를 지어 바락과 함께 불렀습니다. (삿 5:1)


2. 시대적 배경


드보라는 젊어서 성전의 등의 심지를 만드는 일에 종사하였던 여인으로
지식이 많고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랍비돗과 결혼하여
평범한 가정의 여인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사사로 부르심으로
여선지자로서의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먼저 사사였던 에홋이 죽은 후 백성들이 악을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가나안 왕 야빈을 통하여 납달리 지파와 북부지역
이스라엘을 심히 압제하게 만들었던 시기인 B.C. 1216년 경이었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뒤 예전에 사무엘 선지자가
라마와 벧엘 사이를 오가며 직무를 수행하였던 그 장소에서
한 종려나무가 서있는 넓은 공중 집회 장소를 택하여
그곳에서 법령을 베풀고 백성들을 재판하여 주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의 명을 받고 당시 이스라엘의 장군이었던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초청하여 당시 가장 학대를 받고 있었던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들중 일만명을 뽑아
가나안 왕과 전투하기를 명하였습니다.

드보라는 여자였기 때문에 직접 군대를 소집하거나
지휘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음으로 당시 백성들로부터
명성을 얻고 있었던 바락을 지명하였습니다.

당시 철병거 900승등 탁월한 군사력을 가지고 20년동안
이스라엘을 지배하여 왔던 군대장관 시스라는 백성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비록 선지자의 명령이며 하나님의 말씀이었지만
바락 자신도 출전에 많은 부담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바락은 드보라에게 함께 출전하기를 건의 하였습니다.

이와같은 분위기는 모든 군사에게도 또한 많은 부담을 가져왔을 것입니다. 
더구나 적군인 시스라는 철병거 외에도 10만명이 넘는 병력을
철병거와 함께 넓은 평지인 기손 강가에 모았음으로
그 위세에 많은 긴장감을 이스라엘 군사들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의무적으로 전쟁에 참여 하였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신앙적인 마음으로 출전하였기 때문에
드보라의 담대한 하나님 말씀의 증거와 하나님의 신이 임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두려움이 떠나가고 그녀의 말 대로
 "일어나라 이는 여효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붙이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의 앞서 행하지 아니하시느냐" 란 말에
  의해서 승리의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드디어 산에서 내려와 시스라가 운집해있는
평지로 돌진 하였으며 전혀 기습하리라 생각지도 못했던
가나안 병사들은 놀라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더우기 하늘에서 별들이 도왔음으로 (5:20)
거센 우박 줄기와 폭우가 쏟아짐으로 철병거도 무력하였을 뿐아니라
큰 우박에 맞은 적군들은 쓰러져가고 멸망하였습니다.

오죽 다급했으면  적장 시스라도 철병거를 버리고 도보로
도망을 쳐 버렸습니다. 바락과 함께 승리한 드보라는
승전가를 지어 바락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녀는 B.C.1216 년부터 B.C.1176년까지 40년간을 사사로
이스라엘을 통치하였으며 미리암 (출 15:20)과 훌다(왕하 22;14)와 같이
이스라엘의 3인의 여선지자의 영예를 누리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3. 드보라의 신앙의 특징


신앙생활에서의 한가지 특기할 사항은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과
그 삶을 계속 유지해 나갈 것과는 별개라는 것입니다.
시작은 여러가지 동기에 의해 출발하게 되는데 (질병, 고난, 문제,
축복, 갈급…등) 이 문제들은 곧 해결 받을 때가 오게 됩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의 지속은 필요성을 잃게 되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태평하면 하나님을 떠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시 괴로움을 주시곤 하십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시대의 사사는, 참된 신앙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귀감이 되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러면 드보라는 사사로서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요?


1) 드보라는 담대한 용기를 지닌 여선지자였습니다. (삿 4:8-10)


가나안 민족과 왕 야빈은, 여호수아가 가난안땅 정복전쟁을 할 당시
하솔의 도읍과 그 당시 왕 야빈을 칼로 쳐 죽이고 도성을 불살랐으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그 도성은 회복이 되고 세력은 재 규합되어
마침내 야빈은 하솔의 왕이 되었으며,  그 군대장관 시스라는
 과거의 땅을 빼앗겼던 울분과 자신의 조상들을 죽였던
이스라엘에 지독한 적개심을 가지고 그들을 억압하였습니다.

이 잔악한 지배는 20년이나 계속되었고 견디다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구하여 주시기를 부르짖었습니다. (삿 4:3)

이때 하나님께서 드보라를 세워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셨는데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하였을뿐 아니라.
직접 전쟁에 참여해 군사들을 격려하며 사기를
북돋아준 용감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의 담대함은 믿음으로 부터 나왔으며, 그녀의 믿음은
현실을 바라보는 대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였기 때문에
그녀의 눈에는 적군의 군대장관 시스라와 그가 거느린 철병거 900승의 군대도
안중에 보이지 않았고 자신들의 군사가 만명인데 비해 적군은
10만-20만명이 집결된 것을 보고도 바락과 군사들에게 명하여
선재공격을 하도록 명한 여 전사 였습니다.

드보라의 믿음의 확신과, 군사들을 향한 하나님 말씀의 증거는
모든 군사들에게 승리의 확신을 불러 일으켰고 그녀가 외친 한마디
"여호와께서 너의 앞서 행하지 아니하시느냐?"(삿 4:14) 라는 구호는
일만명 군사가 10만병의 군대를 향하여 돌진하는 용기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누구에게나 위기의 때는 주어지게 됩니다.
우리도 공격이냐 후퇴냐를 결정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만일 상황 위주로 산 경우에는 100% 후퇴하기를 결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씀따라 산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입니다.
대부분 하나님의 뜻은 불가능한 현실에 믿음으로 대응하여
나가도록 명하십니다.

여 선지자 드보라는 이 점에 있어서 조금도 세상이나 상황을 따라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왔음을 보여준 여인이었습니다.
믿음이 담대함을 산출함을 보여준 여사사였습니다.   


2) 자신의 믿음을 실제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증명한 능력의 여사사였습니다. (삿 5:20-22)

여호수아가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모세가 산상에 올라 기도함으로
이스라엘이 승리를 하였듯이 드보라 또한 다볼산에 올라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역사를 베푸시사 대적을 패하게 하셨습니다.

[1] 별들로 돕게 하셨습니다. (삿 5:20)

[삿 4:15]"여호와께서…패하게 하시며…" 란 말씀에서
어떻게 드보라의 기도에 응답하셨는지를 과거의 인용된 문구로부터
도우심의 구체적인 예를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여호수아가 아모리 다섯 왕과 싸울 때,
"여호와께서 패하게 하시므로"[수10:10) 에서 하늘에서 큰 덩이
우박을 내리시므로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 많았더라."하였고(수10:11)

또 그 다음은 [삼상 7:10] "여호와께서 블레셋사람에게
큰 우뢰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 지라." 하였음으로
큰 우뢰가 비와 더불어 내렸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과거 사건들로 미루어 보아 바락이 시스라 군대들과 싸운 날에도
하늘에서는 큰 우박덩이가 쏟아졌으며 비바람과 천둥번개가
내려침으로 철병거들은 진흙 바닥에 묻혔고 우박과 번개를 맞은 적군은
비명과 함께 모두 혼비백산하여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2] 기손강 으로 돕게 하셨습니다. (삿 5:21)


하늘로부터 돌연 엄청나게 쏟아진 폭우는 시스라군대가 집결해 있는 지역으로
흘러넘쳤는데 그 지점은 바로 강들의 거대한 합류지역 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홍수는 사람, 말, 병거들을 덮쳐버렸고 수장시켜 버렸습니다.

이는 마치 애굽 병사가 이스라엘 백성을 쫓아 홍해 바다 갈라진 길을
추격해 왔을 때, 여호와께서 바다를 합류시키심으로
모든 병거와 군사들이 수장 되었듯이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는 기손 강이 '옛 강' 이라 불리어진 이유가 바로
시스라와 군대를 멸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예정 해 놓으신 강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성령님의 은사중 능력 행함의 은사가 있습니다.
드보라 선지자는 이같은 성령님의 큰 역사를 체험한 것으로 보입니다.


3) 하나님께 진심으로 영광을 올리는 선지자였습니다. (삿 5:1-31)

드보라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왕 야빈을 물리치신 기쁨으로
영광의 개선가를 지어 불렀습니다.
이 노래는 승리의 사건들이 직접적이고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감사와 찬양으로 표시되어있습니다.
이 노래는 사사시대의 시들 중에서 지금까지 보존 되어진 유일한 시입니다.

특히 31절에 이스라엘의 승리사건이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우리의 삶에 똑같이 적용되어질 예표적인 사건임을 드보라는
표현하고 있음으로, 참된 신앙인의 마음가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이와 같이'
란 말을 가나안 왕 야빈이 진멸된 것과 같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대적하고 핍박하는 무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모두 심판 받게 될 것임을 소원하는 기도로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있습니다.

또한 주를 위하여 영적전투를 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놀라운 승리의 축복을 받을 것임을 확신케 하여 줍니다.

'해가 힘있게 돋움같이 하옵소서' 란  이 세상의 어두움은
강한 밝은 빛으로 완전히 축출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겐
활력과 승리가 주어짐을 확신하는 표현입니다.

많은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기적들을 우리에게
간증하여 줌으로 믿음을 더욱 지닌 신앙인으로 성숙하게 자라나게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드보라 여 선지자는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승리가
오늘날 우리들의 승리가 되기를 하나님께 구하고 있으며 우리들로 하여금
해같이 빛나는 의인이 되어 대적을 물리치는 승리자가 될 것을
기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감동을 주는 참 선지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드보라의 신앙을 본받아 다같이 해 같이 빛나는
 의인들이 되어 세상의 어두움의 세력을 이겨나가는 승리자들이 되십시다.
(그랜드 종합주석과 QA 성경연구 시리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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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러기 은혜에 만족한

/ 수로보니게 여인
(A Canaanite woman of Tyre and Sidon.)

[마 15:28]




1. 인적사항


1) 가나안사람: 수로보니게 족속, 헬라인
2) 귀산 들린 딸을 둔 어머니
3) 이방인으로 기독교로 귀의한 여인
4) 그녀의 이름은 '유스타'이며 딸의 이름은 '베니게'
5)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이 큰 여인으로 인정받은 여인


2. 시대적 배경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고조되고 있는 유대종교 지도자들의
긴장을 느끼시고 유대인의 거주지와 헤롯의 관할권에서 벗어나
갈릴리 호수로부터 약 50-60 Km 떨어진 서북쪽 지역인
지중해 연안도시 '두로'와 '시돈'지방으로 나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는 옛날 가나안 땅에 살던 가나안 족속이
살고 있었으며 그들은 옛날 수리아 영역 보니게 지역에
보니게인들 속에 섞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수로보니게 인'이라 불렀습니다.

이들은 아프리카 사람들과 시리아인 혈통으로 갈라져 있는 가운데
이 여인은 시리아인 지역의 사람들에게 섞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알신과 아스다롯 신을 숭배하는 이방인들로서
비옥한 골짜기와 지중해 연안 평원에 대단히 부요한
고대 문명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는 도저히 인간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귀신들린 딸이 있었는데 이 귀신을 쫓아내려고 그 지역 우상들을
다 섬기면서 고침을 받기를 노력하였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 여인은 예수님에 대하여 전해듣기 시작했습니다.
병자를 고치신 능력도, 오병이어를 베푸셔서 오천명이 먹고
남은 부스러기가 12 광주리나 남았다는 기적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하여 더욱 알아본 결과 다윗의 자손으로
올 메시야란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자라났고 그 믿음은 우상숭배를 버리고
기독교로 귀의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께서 자기가 사는 지역으로 오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그녀는 주님을 뵙고 딸의
귀신들린 병을 고침 받을 각오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주님을 쉽게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람들을
예수님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막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먼 거리에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하고
큰 소리를 질러 예수님께 호소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이 자기에게 다가올 줄을 알고 계셨습니다.
구세주이신 주님이 지니신 영혼은 구원을 받기 원하는
영혼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서 그 여인의 영혼이
예수님께 나아올 것을 이미 아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 여인이 주님께 나아오기를 허락받자 가까이나와
무릎을 꿇고 예수님께 직접 아뢰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 여인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한한 신성을 느끼게 되었고
입으로 나온 첫 말이 '주여 나를 도우소서!'란 말이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에서 '주님'(Lord)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주님은 이 여인이, 위대한 능력을 베푸는
한 인간에게 부탁하는 것으로부터,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간구로 변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 때 주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더욱 자라나게 하시기 원하셨습니다.
즉, 그녀의 간구를 거절한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하셨습니다.

이 때, 이 소리를 들은 여인은 그 말씀이 자신을
도와 주신다는 확신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개라고 표현한 단어 - '퀴나리온'이라는 말은
경멸적인 들개나 사나운 개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집안에서 기르는 애완용의 강아지를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 그 여인은 순간적으로 '오병이어 기적'에서
유대인들이 먹고 남은 부스러기가 무려
12 광주리나 된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렇게 배불리 먹이시고도 부스러기를 열두 광주리나
남게 하신 주님의 풍성한 은혜를 받고 싶었습니다.
그레서 예수님께 부스러기를 청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이 온전히 자라났음을 아시고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며
그녀의 딸을 말씀으로 고쳐주셨습니다.
이와같이 주님은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멀고도 먼
이방 땅, '두로'와 '시돈'지방까지 가신 것입니다.

만일 우리에게도 주님을 찾아야만 되는 믿음이 있다면
주님은 오늘도 땅끝까지 이르러 나를 찾아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인의 믿음을 본받아 우리의 믿음을 키우십시다.


3. 수로보니게 여인의 신앙의 특징


1) 사랑이 많은 여인 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딸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침묵하심을 보고도 소리질러 도움을 요청한 것도,
주님이 이방인을 개로 표현하시면서 '떡을 줄 수 없다'
거절 하심을 받으면서도, 주님께 매달린 것은
병든 딸을 어찌하든 고치고 싶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즉, 이 여인은 딸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여기고 살았던 것입니다.
결국 딸의 병을 고친 것은 그녀의 사랑이었습니다.

누구나 가정마다 환난이 있습니다.
가난, 질병, 재난…등 이같은 문제들을 풀기 위하여
세상적인 방법을 동원해 봅니다. 그러다 아무리 애를 써도
해결이 안되면 포기 해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 때에 포기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상대를 포기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신을 포기하는 마음입니다.

나자신을 희생할 때, 남은 살아납니다. 이것이 사랑의 법칙입니다.
때때로 신앙에는 자신을 버려야할 때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 대상을 올바로 찾아가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희생의 대상은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완성은 오직 주님을 위하여
자신을 포기함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딸을 사랑함으로 자신을 희생하였지만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시 자신을 희생하는 참다운 믿음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2)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믿음이 모든 사람들애개 똑같이 귀중하지만
각자 지닌 믿음의 분량은 똑같지가 않습니다.
믿음의 분량은 예수님을 얼마큼 신뢰하고 있느냐에 따라
주님의 역사하심도 나에게 차등 적용됩니다.

예수님께서 정작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나타내신 것은
제자들과 유대인들에게 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적과 이사를 목격하였음에도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본다고 믿어지는 것은 아님을 봅니다.
'주님께서만이 나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다는 마음'에서
믿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두 사람을 주님은 칭찬하셨는데
한 사람은 로마 백부장이며,
또 한 사람은 바로 오늘의 성경 인물인
'수로보니게 여인'입니다.  
   
그들은 둘다 이방인이었지만 유대인들보다 믿음이 컸습니다.
그러나 둘 중에서도 믿음이 더 큰 사람은 바로 수로보니게 여인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두 사람 다 '주님이 말씀만 하시면
모든 질병이 고침을 받는다'
는 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 거주한 환경은 정반대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은 유대인들과 함께 살고 생활하였으며
회당을 지어주는 등, 상당히 주님의 역사하시는
환경에 속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이 여인은 전혀 다른 우상 숭배 지역에서
오직 자신의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또한 백부장의 하인은 중풍병 환자였지만,
이 여인의 딸은 흉악한 귀신에 사로잡혀 남에게 해를 주는
심각한 발작병 이었습니다.

병의 원인이 육신의 연약함에 있는 것과
사탄 마귀에 있는 것과는 치료에 대한 기대가 다릅니다.
즉, 약한 것은 강하게 하면 됩니다.

그러나 마귀를 쫓아내는 것은 육신을 강하게 하는 것 외에
흉악한 세력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주님께 대한 믿음은
이미 귀신을 쫓아 낼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지니신 분'으로
여긴 믿음이었습니다.

가능과 불가능한 사이에는 여러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가능 쪽으로 갈 수록 믿음은 커지지만,
불가능한 쪽으로 갈 수록 믿음은 적어집니다.

그런데 상황에 따라 커졌다 적어졌다 하는 믿음은
사실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입니다.
불가능한 것이든 가능한 것이든 변함없이 믿는 믿음이 생길 때,
바른 믿음을 소유한 것이 됩니다.


3) 인내의 여인이었습니다.

인내는 희망이 있을 때만 존재합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일찍 포기하게됩니다.
이 여인은 딸의 병고침의 소망을 오직 주님께 두고 산 사람입니다.

환경과 상황은 마치 밤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은 마치 태양 빛과 같은 대낮과 같습니다.
 "내가 절망의 밤에 속한 사람이냐?", 아니면
 "희망의 낮에 속한 사람이냐?"
내가 어느 것이든 바라보는 쪽에 달려있습니다.

믿음이란 낮이 밤을 없앤다는 생각이고,
포기란 밤이 낮을 이긴다는 생각입니다.
즉 환경이 환경을 지으신 하나님을 이긴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밤같은 절망 속에서도 낮이 올 것을 바라본 여인이었습니다.
주님이 오시면 자신의 불가능한 문제가 해결된다는 소망을 가진 여인었습니다.
드디어 이 소망은 모든 것을 참고 견디게 해주는 힘이 되었습니다.

'인내의 끝' - 즉, 결과는
그 소중함의 참 가치를 아는 사람이 마침내 지닐 수 있는 덕목입니다.
그리고 그 끝을 알려주는 계시가 말씀입니다.

반면에 포기란 끝을 절망으로 잘못 알고았는 사람의 불안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삶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도록 예비하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결과가 좋던 나쁘던 모든 것이 결국엔 선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지금의 형편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 것을 믿을 때, 우리는 인내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릴 수 있었던 것도,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사도바울이 죽음을 무릎쓰고 복음을 전도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랑도, 믿음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인내란 열매를 맺을 때, 참 인 것이 드러납니다.

지금 현재 인내의 한계에 직면해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현재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소망을 희망으로 바꾸십시요!
이 여인처럼 딸이 병에서 치료된다는 소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바뀌어진 환경 속에서 내가 바라는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고 있는 행복의 희망을 바라보십시요!

상황의 변화 단계를 벗어나 결과의 승리의 단계로 바로 뛰어 넘으십시요!
수로보니게 여인은 딸이 고침받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집에 돌아가 본 것은 건강한 모습의 딸이 달려나와
어머니를 맞이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완성의 결과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다같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기적을 응답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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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의 어미 하와/ Eve
[창3:20]



하나님은 여성을 아담과는 달리 거룩하고 오묘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 증거는 하와는 재질이 흙이 아니라 아담의 생령이 된 몸의 갈빗뼈를 취하여
재료를 삼으셨고 에덴동산에서 창조하셨으며,
그녀의 역할은 아담의 '돕는 배필'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근원은 한 뭄이 두 분신으로 나누어져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한몸을 이룰지니라."[창2:24]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몸을 이루는 과정을 죄를 짓고 난후에,
낙원을 떠나 나온 후부터 시작하게 하십니다. [창 4:1]
이로써 인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1. 하와의 특기사항

하와는 인류최초의 여자로써, 그녀의 출생은 부모없이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창조물로 민들어졌으며, 재질은 아담의 갈빗대입니다.

아담이 그녀를 보았을 때, 이르기를 여자라 칭한 것은
남자의 뼈와 살로 지음받았기 때문이며 -후에 하나님이 각자의
지은 죄에 대한 규제의 언약을 받은 후에,
여자는 아담의 종속과 종족의 계승의 임무가 있음을 깨닫고
'생명의 전달자'
라는 뜻의 '하와'로 다시 개명하여 불렀습니다. [창 3:20]

나중에 이 이름을 헬라식으로 '이와'라 붙여졌고
영어식 표기로는 '이브'로 불리어졌습니다.

그녀는 낙원에서 쫓겨난후 아담과 동침하여 가인과 아벨, 셋... 등
많은 자녀와 딸들을 낳았으며 아담이 셋을 낳은후 80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은 것으로 보아 [창 5:4] 하와도 함께 자녀를 낳고 지내다
아담이 930세에 죽었을 즈음에 비슷한 연령에 죽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2. 하와의 생애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최초로 거하실 처소를 만드셨는데
그곳이 바로 동방의 에덴 지역이었으며 에덴지역 중앙에 작은 동산을 만드시고
그 곳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두셨습니다. [창 2:8-9]
아담은 그 동산 밖에서 지음을 받았고 에덴동산의 흙이 아니라 보통 진흙으로
만들어졌으며 동산에 들어 오기전까지는 그 밖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하나님의 동산으로 이끌어 그 땅에서
살게하였으며 하나님의 소유들을 다스리게하셨습니다. [창 2:15]

아담은 낙원의 모든 것을 은혜로 물려받았으며 오직 그 축복을
누리는 데는 한가지 언약 인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말라는 조건을 지키면 되었습니다.

바로 이 금지령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동산에서는
거룩함이 유지 되어져야하기 때문에
육은 감각적인 쾌락을 멀리하고, 혼은 욕망과 호기심에서 떠나
오직 영이 하나님과의 교제로 인하여 거룩하고 성결한 상태를
유지함으로 혼과 육이 따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께서 동물들을 이끌어 오시며
그들의 이름을 지어주도록 하셨습니다. 그때 아담 앞에 나오는 동물들은
모두 암수 두마리가 함께 나왔고 이를본 아담은 자신에게 짝이없는것을 느끼고
고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아시고 "혼자있는것이 좋지 못하니
너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셨습니다 (2:18)."
그리고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빗뼈를 꺼내어 하와를 지으셨습니다.
이로서 하와는 아담과 다른 두가지 특징을 지닌 인간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구성은 흙이 아닌 남자의 살이며- 하와의 탄생은
아담같이 세상에서 지음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의 처소인
에덴동산 안에서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의 탄생이 생령의 몸과 거룩한 처소에서 나아야만 했던 이유는
후에 예수님께서 이 몸을 빌어 이 땅에 오시기 위한 조건을
갖추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보는 순간 기뻤으며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이 벗었어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몸이 생령을 통한 거룩한 몸이었기 때문에
육신의 쾌락과 마음 속의 욕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때 하와가 혼자 있는 틈을 타고 사단이 뱀을 통하여 접근합니다.
그리고 하와를 유혹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게 만듭니다.

하와는 아담으로부터 '저 열매는 먹으면 안된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왜 먹지 말아야 되는 지는 잘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뱀이 그녀에게 물었을 때, '먹으면 죽는다고 하더라' 라고
마치 남의 말처럼 말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때 틈을 본 마귀는 순간에 하와의 마음 속에 새 느낌을 주입시켰습니다.
즉, '절대로 안 죽는다' 는 두려움을 없애 주려 한 것과, 또한
'먹으면 오히려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된다'
는 교만의 유혹이었습니다.

순간, 하와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담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들은 말보다
마귀의 직접적인 해명과 설득력이 더욱 영향력있게 다가왔습니다.
이미 이 말은 그녀의 생각 속에 들어왔고 그 생각을 통하여 바라보는 눈은
실제 그 것이 자기에게 일어나게 해줄 대상물로 보였습니다.

그 결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었고 또한 아담에게도 주면서 먹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몸이 벗은 것을 깨닫고
수치스러움을 느껴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창 3:7]

여기서 '눈이 밝아졌다' 란 -다시말해 지금까지는
영이 지배하는 육신의 눈에서 거룩함만을 보아오다가
갑자기 죄가 들어와 육신이 죄를 지을 부분들이 보여지게 되었고
이미 선악과를 먹은 중독증은 육신에 욕망을 강한 성향으로
 발동시켰기 때문에 육신 중심의 삶으로 변화된것을 말합니다.  

이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으며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하나니의 저주받은 삶을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3. 하와에게 주어진 운명


화와는 선악과를 바라보고 그 열매를 따 먹었을 때,
마음 속에 가지고 있었던 두가지 욕망
즉, 쾌락(먹음직)과 교만(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럼)의
죄과에 대하여 처벌의 댓가를 받게되었습니다.

1) 육신의 쾌락에 따르는 고통이 수반되었습니다. [창 3:16]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성을 허락하셨을 때는
거룩한 자녀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말2:15]
또한 거룩한 자녀는 거룩한 삶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 잉태와 출산의 과정에서는 고통도 불편함도 없이 기쁨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육신이 쾌락을 추구하는 죄가 들어가자 쾌락에 따르는
징계가 따르게 된 것입니다. 그 것이 바로 잉태와 출산의 고통입니다.

여자는 남자와 함께 아이를 갖습니다. 그러나 아기를 임신함으로
육신의 불편함과 입덧등 괴로움은 여자 혼자만 겪습니다. 더우기
출산시의 고통은 생명을 걸고 그 순간을 넘어야 할만큼 큰 것입니다.  

2) 마음의 교만에 따르는 벌로 순종과 지배를 받는 삶이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지혜롭게 되려는 마음은 높아지려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더 낮아지는 형편으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여자가 바라는 것의 대상이 남자가 되는 것이며,
그 대상으로부터 다스림을 받고 살아야하는 불편을 겪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남녀를 평등하게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아내를 무시합니다. 학대하고 심지어 마구 부리려합니다. 
이 것은 여자만이 겪는 고통입니다. 그러면서도 참고 살아야합니다.
그 이유는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의 고통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죄의 결과로 온 것입니다.

하와는 남편과 930년 사는 동안 이 두가지를 겪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이 저주들은 예수님이 오셔서 여자의 원죄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해방이 되었습니다.


4. 하와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특별섭리[창3:15]


1) 여자와 뱀은 원수가 되었습니다.

여자와 뱀은 선악과를 따 먹기전까지는
서로를 도와주는 친밀하고도 다정한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뱀으로 인해 범죄한 것을 알게되자 그들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그런 이유로 뱀은 남자보다도 여자가 더 징그러워하고 싫어합니다.

그 이후로 뱀은 여자를 공격할 때, 기껏해야 발뒤꿈치를
무는데 비해 여자는 뱀의 머리를 밟을 수 있게 됩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죄를 중심으로한 연합은 서로가 나중에 원수가 되며
서로 멸망시키는 복수로 바꾸어진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즉 죄를 통해 마귀가 타락한 인간과 이 세상에서 쾌락가운데 함께 지냅니다.
그러나 결국은 인간을 타락시키고 지옥으로 보내는 장본인이 됩니다.

하와는 자기를 죄로 유혹한 뱀을 미워하게 되었고,
그 배후의 세력인 사탄을 싫어하게 되었음으로 오늘날 남자들보다도
여자들이 더 신앙심이 많고 교회신자 비율이 높은 것은
바로 이러한 성향이 여자들에게는 있기 때문인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영적전쟁에 있어서 여자가 큰 역할을 담당하게됨을 의미합니다.

2) 하와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뱀과 하와와의 관계는 실상은 배후에서 조종한 사탄마귀과 인간과의 관계였습니다.  
그러므로 각각 후손들이 원수가 된다는 것은 마귀의 세력들과
여자 후손인 마리아에게서 나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귀를 대항하여 싸워 이기려면 두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한가지는 원죄가 없으셔야되고, 또 한가지는 죽음을 능가할 능력이 있으셔야만 됩니다.  
만일 주님이 원죄를 지니고 있는 마리아의 몸의 속성을 그대로 이어 받으셨다면
주님의 죽으심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으신 것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또한 주님은 마음속으로 지은 죄도 죄라 하셨기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정욕등을 가지고 계셨다면 역시 죄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죄는 그냥 남아 있게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전혀 죄가 없는 상태의 인간의 몸에서 태어나게 위해서는
하와가 죄를 짓기전 에덴동산에서 거룩하게 창조되어진
그 상태에서 태어나야만합니다. 그  역할을 하신이가 성령님이십니다.

[눅 1: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이 말씀 중에서 '능력이 이를 덮으시리라"란 말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을 덮을 때 [출 40:38]를 의미하는 것과 같으며 이 뜻은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새로운 역사가 일어남을 의미합니다.

즉 마리아는 원죄를 지니고 탄생한 여인이지만 
성령님께서 하와가 탄생하여 죄를 짓기전 거룩한 여인의 상태와
마찬가지의 상태로 마리아를 되돌려주시는 가운데 잉태의 역사를 일으키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인을 통한 인성은 지니셨으되 원죄가 없으시고,
원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심판에 해당이 되지 않으시고 이렇기 때문에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여 다시 살아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와의 창조형태가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와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녀가 죄를 지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통하여 더욱 회개하고 돌아올
참 믿음의 후손들을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하와는 특별한 상태에서 아담과 구분되는
탄생의 역사를 지닌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와가 죄를 먼저 지었어도 그녀를 통하여
다시 구원얻는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육신의 사건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130세에 셋을 낳고 셋이 아담의 족보에
장자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창 5:4] 비록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은
잃어버린 자신들 이지만 마음과 생각은 신앙을 간직한 상태로
지냈음으로 모두 하나님 나라에 갔을 것입니다.

여자로 시작된 영적 전쟁은 결국 여자의 후손으로 인하여 마무리 됩니다.
하와는 비록 죄를 불러들인 최초의 여인이었지만 죄를 마감짓고
시탄을 물리치는 주님의 조상이 되었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큰 역할을 담당하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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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들레헴에 메시야의 탄생을 예고한
선지자 / 미가(Micah)



1. 인적사항


히브리어로 '미가'라는 말은 '미가야'로서(렘26:18)
그 뜻은 '여호와와 같은 자가 누구이냐?'란 의미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서쪽 블레셋 성읍 가드와 근접한 시골에 있는 -
'가드모레셋'에서 태어났으며, 귀족 출신의 선지자 이사야와는 달리
서민적 삶을 통해 사회부조리를 몸소 체험하고 겪은 선지자입니다.

미가는 호세아 및 아모스(북 이스라엘), 이사야(남유다) 와 동시대에 활동한
남유다의 선지자였으며, 그가 사역한 시기는 남유다 11.12, 13대 왕인
요담(B.C.747-731년), 아하스(B.C.731-716년), 히스기야(B.C.715-687년)등
세명의 왕들시대에 걸쳐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는 B.C.700년 경에 미가서를 썼으며 예루살렘에서의 말씀 선포는
히스기야왕으로 하여금 종교개혁을 단행하도록 영향을 끼친 선지자였습니다.


2. 시대적 배경



11대 유다의 왕 요담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도를 행하였음으로 나라도 강성하고
융성하였으나 그의 아들 아하스가 왕위에 오르자 선왕이 뒤를 쫓지않고 우상숭배와
악행을 저지르므로 아하스는 다윗왕가의 가장 사악한 왕이 되었습니다.
이에 특권계급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난한자들을 핍박해 재물을 착취하였으며,
제사장들은 물질과 뇌물에 눈이 어두어 귀에 듣기 좋은 말만 지껄이는
거짓 선지자들이 되었습니다. (3:11)

내적으로 백성들이 부패가 극에 달하였을 때, 외부적으로는 북방의 신흥제국인
앗수르가 본격적인 남진 정책으로 디글랏 빌레셀 3세(B.C.745-727년),
살만에셀 5세(B.C.727-722년), 사르곤 2세 (B.C.722-705년),
산헤립(B.C.705-681년)등이 남.북 이스라엘 두 왕국을 끊임없이 공격해왔으며
그 와중에 북왕국은 B.C.722년에 멸망하였고 남왕국은 B.C.701년에
산헤립의 침공으로 멸망직전의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남유다는 물론 북 이스라엘까지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선포하였습니다.


3. 사역의 업적


1) 최초로 메시야가 탄생할 장소를 베들레헴으로 예언한 선지자로 이는
                             700년이나 앞선 예언이었습니다. (5:2)
2)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한 최초의 선지자였습니다. (3:12)
3) 백성들의 우상숭배와 타락에 강한 책망을 통해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선지자였습니다. (대하 29:5-11)
4) B.C.700년 경에 예언활동을 마무리하면서 미가서를 기록하였습니다.


4. 신앙의 특징


1) 미가는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참 선지자였습니다. (3:8)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하나님의 일꾼들은 세상에서의 자격을 얻는 것보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자격을 얻는 것이 중요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근거는 여호와의 신의 임재입니다.

지성의 힘이 강할 때, 교리적인 가르침에 치중할 수 있고,
재능이 강할 때 프로그램적인 사역에 치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성이 강할 땐, 죄와 구원에 관한 메세지가 전달되게 됩니다.

미가 선지자가 '여호와의 신에 감동된 사역자'인 것은
담대함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죄를 책망하는 자는 항상 위협에 직면하게 됩니다.
심지어 죽음 까지 감수해야 합니다.
또한 경제적인 빈곤과 핍박에 처해지게 됩니다.

그러한 이유때문에 많은 사역자들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유리한 말을 증거함으로 반발이나 대적을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선포는 대부분 죄와 믿음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듣는 이 모두가 회개를 해야만 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용기와 능력이 주어져야만 온전히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미가 선지자는 자신이 여호와의 신으로부터 세가지를 받아서
그 힘으로 사역을 한다고 말하고있습니다.

(1) 권능을 채움받아 사역을 한다고 선포합니다.

권능은 인간을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람들이 주의 종을 두려워 하는 것은
주의 종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 선포는 사람들의 마음을 찌르고
그 속에 있는 어두움을 밝히고 쫓아내게 만듭니다.
그 어두움이 질병이면 나음을 입을 것이요,
더러운 영이면 해방을 얻을 것이며,
죄악이면 회개를 할 것입니다.

구태여 제사장이 삯을 바라고 사역을 하지 않아도
은혜받은 사람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립니다.
여호와께 드려지는 예물이 없을 때, 주의 종의 사역은 직업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의 고용에서 사람들의 고용인으로 바뀌어지게 됩니다.

주의 일을 하는 사역자가 제일 조심해야 될 부분이 물질입니다.
하늘의 공급을 의지하지 않고 일하면 권능히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2) 공의로 채움 받아 일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구원을 목적으로 신앙 생활할 시는 주로
내면적인 삶에 중심을 두게 됩니다. (기도, 말씀, 전도 등)
그러나 세상적인 삶을 주로한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 할 때
외면적인 삶에 치중하게 됩니다. (행사, 프로그램, 성공, 업적 등)

그러므로 종교적으로 가장 부패했던 중세시대 때,
교회건물이 가장 웅장하고 찬란했으며 ,
의상은 더욱 품위 있는 예복으로, 강단과 강대상은 높아지고, 
내면은 화려하게 꾸며지곤 하였던 것입니다.

공의란 일을 올바르게 처리한다는 뜻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진실과 거짓을 구분해내는 영적인 통찰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알고 지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드러나지 않은 죄가 많이 있을 때 이미 그 마음은 하나님을 떠나
세상의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 것이
당시,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현대의 그리스도인의 모습들일 수 있습니다.


(3) 재능으로 채움 받아 일한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힘으로” 라고 되어있습니다.
즉, 담대함과 용기를 말합니다.

성령충만한 사역자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않고 중심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일 수록 외모는 권세, 재력, 위엄, 품위 들로 포장 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 때 그 세력을 보면 말문이 막히게됩니다. 그러나 그 내면에 죄를 보게되면
성령님은 죄를 지적하게 만드시기 때문에 서슴없이 말할수 있습니다.
그 것이 담대함입니다. (예:나단선지자가 다윗왕이 밧세바를 취한 것을 꾸짖음).

미가 선지자의 이같은 담대함은 히스기야왕으로 하여금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2) 교회창설을 예언한 사역자 였습니다. (4:2-3)

하나님은 언제나 장래의 모습에 합당한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주님은 시몬을 베드로 '반석'이라 불러주셨고,
세리장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불리어지는 이름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자신의 처지를 개발하도록
자극을 주기 깨문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제 신앙의 공동체가
교회란 이름으로 탄생될 것과 그 역할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1) 교회는 가장 높은 곳에 굳게 세워질 것입니다.
 
[v.1]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서며
작은 산들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고 몰려갈 것이라."

이 세상에는 높은 곳이 많습니다. 빌딩도높고, 지위,제도, 세력, 문화, 과학…등
도시에 나가보면 온통 높은 것들의 경쟁이 집합되어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교회 건물은 낮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가장 높아질 수 있을까요?
죄악의 세력이 틈타지 못할 때, 영적인 건물이 되어 세상 건물보다
시공을 초월한 높임을 받습니다. 건물이 언제 든든합니까?
그 것은 기초가 튼튼할 때입니다. 어떤 건물도
'예수 그리스도를 반석으로한
기초'보다
더 튼튼한 기초로 세워진 건물은 없을 것입니다.

영생을 얻기위한 각 만족들이 몰려올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거의다 '다민족 교회'입니다.
이 것을 미가 선지자는 예언하고 있습니다.


(2) 교회에서 여호와의 말씁이 풍성히 선포될 것입니다 (4:2).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말씀의 선포와 배움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더 많이 알면 알 수록 그분을 더욱 영광되고
기쁘시게 해 드릴 수있습니다.       

구약의 성전은 예배중심의 처소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의 교회는 말씀중심의 처소가 될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생활에 비하여 요즈음은
얼마나 많은 말씀을 듣고 배울 수 있습니까?
진리의 선포는 하늘나라를 계시하여 줄뿐아니라,
주님의 구원에 완성에 대하여 선명한 믿음을 갖게 해줍니다. (재림)

(3) 교회만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옵니다. (4:3)

[v.1]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나라와 저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아니하고…"


세상의 싸움은 인간이 노력으로는 해결 할수가 없는 문제입니다.
이 세상 모든 나라가 내분과 외적의 시달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지구상에는 살생의 무기가 쌓을 곳이 없도록
각 나라마다 저장해놓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류가 무엇으로 이 위기를 막을 수 있습니까?
그 길은 하나님께서 다스려주시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교회의 역할에 중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지도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3) 불굴의 신앙을 가진 사역자였습니다. (7:8)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데는 믿음이 자랄수록
문제도 점점 커진 것들이 다가오게 됩니다.

(1) 엎드러지는 경우입니다.

즉, 대적의 공격, 비방, 멸시, 핍박을 받는 경우입니다.
이 것은 주로 주변 경쟁자로 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단이 가장 가까운 자를 도구로삼아 쓰러 뜨리려는 경우입니다.

(2) 어두운데 앉아있는 경우입니다.

절망의 상태를 말합니다. 환경은 닫쳤습니다.
구원의 손길은 끊어졌습니다.
내몸의 기운도 소진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낙심, 의심, 절망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표시입니다.
모든 시련과 환란은 그 목적과 의도를 지니고 있으며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제한 적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온전히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셔들이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기다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에게 상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시련속에서도 감사를 드릴 때,
가장 빛나게되고, 성도의 기쁨은
 "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살 때,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미가는 서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크게쓰신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그 비결이 오직 여호와만을 우러러 본데있습니다.
우리들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바라보십시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 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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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순종의 선지자 요나
/Jonah [욘 1:3]



1. 인적 사항


요나는 이방나라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의 구원을 위해
택함을 받은 북 이스라엘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가드헤벨이라는 지역
(나사렛에서 약 4Km 북동쪽 지역) 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부친은 스불론 지파의 후손인 '아밋대'
'나의 진리'라는 뜻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그의 이름으로 보아
신앙의 가문이었음을 알수있으며 아들의 이름을 '요나'(비들기라는뜻)
로 지어준 데는 '하나님 앞에서는 비둘기같이 순결하며
죄와 재난에 대해서는 비둘기처럼 슬피 울어야 함'
상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요나는 여로보암 2세의 통치시기였던
B.C.793-753년까지 북이스라엘에서 사역한 선지자였으며
그의 말년에 요나서를 쓰고 삶을 마무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히브리인 전승에 의하면
그는 엘리야가 살려준 사렙다 과부의 아들이었고
그 후에 엘리야를 따라 다녔으며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해 보냈던
그 소년 (왕하 9:1-6)이라고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2. 시대적 배경

요나는 북 이스라엘 여로보암 왕 2세의 통치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이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어귀에서 아라바 바다까지 이르리라" [왕하 14:25] 란 예언으로,
당시 이스라엘이 수리아의 억압을 받고 있을 때,
이 예언은 참으로 희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하맛어귀란 북쪽 수리아의 주요도시로
이스라엘과 북방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곳이며
아라바 바다란 사해바다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는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의 원래
영토를 (요단 동편까지) 되찾게 됨을 나타내주는 말입니다.

이 예언대로 하나님께서 회복을 이루어주심에 따라
요나는 북이스라엘의 선지자 로써 인정과 호감을 받고 있었음으로 자신의
사역은 오로지 조국을 위해서만 부르심을 받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 니느웨로 가서 사역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는 의식적으로 피하여야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말씀에 불순종하고 니느웨와는 반대방향인 다시스로 떠났습니다.

한편 당시 앗수르는 잦은 왕들의 통치 변화가 이루어졌던 시기로
- 살만에셀 3세: B.C. 783-773,
- 앗술단 3세: B.C. 773-755,
- 앗술리나리 2세: B.C. 755-745년
이전 왕들의 통치시대에 비해 국력이 약화되어 있었으며
특히 북방의 신흥국가인 '아라랏'과의 전쟁이 장기화 됨으로
나라가 침체 국면에 접어든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택하사
 니느웨로 보내셔서 그들을 회개시키게 하셨는데
이 시점에는(B.C.765-759) 나라에 큰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B.C.763년 6월 15일에는 완전한 일식으로
앗수르 땅에 칠훍 같은 어둠에 휩싸이는 불길한 징조로 인하여
민심이 상당히 불안한 가운데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므로 요나 선지자가 단 하루 동안만 선포한 심판의 메시지로도
왕과 백성및 니느웨전체가 회개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랜드 주석 요나서 참고)


3. 요나의 성품

사람의 성품은 자신의 일생을 결정하는 주요요소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쓰여지느냐에 따라
좋은 결과 또는, 나쁜 결과도 맺게 됩니다.
만일 자신의 유익만을 위하여 쓰여진다면
이기적인 삶이 될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쓰여진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품의 주인인 자아를 버리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자기 멋대로 행하게 됩니다.
요나 또한 자신을 온전히 버리지 못한 특별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1) 시기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욥 1:2]

북 이스라엘 백성에겐 앗수르는 언제나 싫은 적국입니다.
단 한번도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도움이나 혜택을 준 적이 없고
오히려 언제나 지배하려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나를 항상 대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결코 좋아할 리가 만무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와 그사이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내가 싫어도 하나님께서 택하신다면
나의 감정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요나의 마음속에는 국내에서의 사역이 잘되어지고 있으므로
안주하고 싶었던 마음과 아울러 또한,
 적국의 나라가 하나님의 은혜로 축복받으면
결국 자신의 나라가 불리해지기 때문에 오히려 징계와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와같은 마음은 그의 사명을 져버리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에게도 탐심, 안일, 시기심은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임을 알고
고난이 닥치면 이 부분들로부터 회개하며 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2)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대개 말씀을 중심으로 삽니다.
그리고 말씀을 중심으로 판단합니다.
그 결과 정죄합니다.
그리고 단언합니다.

즉, 불신자들은 지옥에 가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당신들은 멸망 받아야만 된다고 단언하는 것'은 안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고정관념이란 인식한 것이 행동으로 나타날때 표면화 됩니다.
우리는 단지 현재만을 판단하여야 마땅할 뿐
미래에 대한 일은 단정하면 안됩니다.
사람과 환경은 언제나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스라엘을 적대시하는
이방국가들은 징계를 받고 멸망되어야만 된다는
고정 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결과 그의 고정관념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은 싫으면 부분순종,  아니면 억지로 반 순종을 하며 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은혜나 축복이 줄어들 뿐, 징계는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불순종은 다릅니다.

고치면 살고 고치지 않으면 심판을 받습니다.
 [예: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 요나는 자신의 고정관념을
바다 속에 던져짐을 당하는 징계를 받음으로 버려야만 했씁니다.


3) 의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 드립니다.
그러나 오랜 응답이 없이 계속해야지만 되는 기도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기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느 세월에나 응답 받게 될까?”
또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무응답이겠지”…… 등등)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하셨습니다. [막 11: 24]

즉, 성급함이 의심을 갖게 만들어줌을 버려야 함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는 성급한 마음을 지녔기 때문에 결과가 궁금했습니다.
정말 40일만에 멸망이 주어질지,
구원이 주어질지 기다려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자신이 선포한 구원의 반대 현상이 이루어지길 바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깨우쳐주시기 원하셔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고생하지 않도록 박넝쿨을 자라게 하시어
그늘에 앉아 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도 잠깐, 박넝쿨 잎사귀가 곧 시들어버림으로
그늘이 없게 하시고 더욱 뜨거운 햇빛을 쪼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면 당장은 고통을 받지 않습니다.
안일하다고 생각할 때, 큰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고통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바로 '성화의 은혜'입니다.

당면한 문제는 언제나 내가 자라면 지나가게 됩니다.
요나는 자신이 아끼는 박넝쿨과
하나님께서 아끼시는 니느웨백성 12만 명의 영혼을
비교해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 성숙하게 자라게 됩니다.  


4. 요나 신앙의 특징

신앙생활이란 계단을 올라가는 것과 같아서
한번에 쭉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올라가다가는 쉬고, 또 가다가는 힘들어 뒤로 내려오고
그렇다가는 또 올라가고 이렇게 하면서
결국 끝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쉴 때는 세상일에 심취할 때이고,
뒤로 갈 때는 세상일에 바빠 빠져있을 때이고,
올라갈 때는 말씀 따라 살 때입니다.
영적인 민감함은 성령님을 의지하고 있을 때,
바로 바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멈춰있는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요나 선지자는 우리에게 신앙에 뒤쳐졌다가
다시 회복으로 올라가는 신앙의 모습을 보여준 선지자였습니다.


1) 자신의 잘못에 책임을 질줄 아는 선지자였습니다. [욘 1:12]

사람의 죄악은
하나님께서 제일 잘 알고 계시고 그 다음은 자신입니다.
만일 인생에 고통이 닥쳐왔다면
그 원인을 하나님을 의식하고있는 자신이 제일 먼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 을 피하고, 자신이 먼져 해결하려 듭니다.
그러나 문제의 해결에 관한한 하나님의 개입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의 방법만을 고집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했던 행동을 보면 잘알수있습니다.
결국 그들의 최후는 멸망으로 끝나게됩니다.
또하나는 다윗왕이 행하였던 행동입니다.
그는 범죄후 하나님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죄를회개함으로 용서를 받게됩니다.

항상 내 자신의 방식은 고통 없이 말로 쉽게 지나가려는 방식이고
하나님께 맡기는 방식은 징계를 감수하는 방식입니다.

요나는 풍랑이 자신의 죄로 인하여 온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남은 선원들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을 바다에 던지우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자신을 맡긴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우상을 숭배했던 선원들을 구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다가 잠잠해지는 기적을 본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제물을 드리고 서원하였습니다. (욘 1:16)
신앙은 죄에대한 책임에 대해서는 항상 하나님앞에 맡김으로
해결해야함을 요나 선지자는 보여준 것입니다.


2) 하나님께 철저히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키는 선지자였습니다. (욘 2:1-9)

성도의 가장 큰 괴로움은
육신의 고통도, 환경의 어려움도, 대적의 위협도 아닙니다.
그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시고 떠나셨다는데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어떤 어려움도 잠시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버리신 고통은
지옥에 가서 영원히 겪어야 되는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살아야 할 것은
내가 하나님의 버리심을 받지 않도록 늘 회개하고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쫓겨났음을 알았습니다. (욘 2:4)
그리고는 회개를 하였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성전을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참된 회개기도의 특징은
죽음의 처지에서도 감사를 드린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드린 기도를 히브리어로 '팔랄' 이라고 부르고
이는 감사기도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요나는 감사기도를 드리게 되었을까요?
물고기 뱃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바다 속에서 3일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물고기 속에 큰 공기 허파나 부레가 있는 곳은 견딜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일입니다만, )

진정한 회개는 가장 불행한 처지에서 감사를 드릴 수 있는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죽게되도 천국은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하면 용서를 받는다는 것을 알기때문입니다.

요나는 절망속에서 회개기도를 드림으로 고난에 감사하는 마음이
진정한 회개임을 우리에게 보여준 신앙인이었습니다. (욘 3:4)


3)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욘3:4)

선교지의 특징은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 풍속, 문화, 사고…… 등이 다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요나는 자신 신변의 염려와 적국의 분위기에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대로를 걸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습니다.
담대함이 없이는 선교사역은
이루어질 수 없음을 보여 준 행위입니다.

담대함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따릅니다.
소심함에는 인간의 애쓴 노력만 남습니다.
주의 일을 할 때나 세상 속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를 위축시키는 세력이나 핍박하는 분위기가 많습니다.
그러나 굽히면 안됩니다.
대적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거역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물질, 권세, 무력…… 등은 우리를 능히 해코지 할 수 있습니다.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들과의 관계를
세상적인 유대 관계하에서 풀어나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안에서 세상과의 관계를 풀어나가려고 합니다
한번한 타협과 양보는 자위를 갖게 해줌으로
계속 내 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주님께 순종하는 믿음은 어느때든
성령중심 신앙생황을 하게 만들어줍니다.

즉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따르는 생활입니다. 
요나 선지자는 결국 니느웨백성 십 이만 명을 구하는
이방인 선교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긴
구약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1. setban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합니다! 은혜로운 글 잘 보고갑니다.

    2013.03.03 04:42
  2. 빛나는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관리자의 승인을 기다리고 있는 댓글입니다

    2017.03.14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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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주의 날'을 예언한

/ 선지자 요엘 (Joel)


1. “요엘” 이란 인물에 대하여

요엘은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는
영성을 지닌 선지자였습니다. 메뚜기의 재앙을
하나님의 심판의 징조로 보았으며,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는 모습을
여호와의 날로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 아래서 그가 선포한 내용은
자연히 회개에 대한 것과 심판을 피한
구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부어주심으로 시작되는 여호와의 날은
모든 적들에게는 멸망의 날이 되지만 성도들에게는
신령한 모습으로 변한 구원의 날이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엘서’
가 중요한 이유는 성령 강림에 대하여
처음 예언한 책으로서 성령시대의 도래를 선포하여
신약의 오순절 성령강림을 계시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2. 그의 인적 사항의 특징:

[1] 그는 독실한 신앙의 집안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요엘'이란 이름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란 의미로
“요”'여호와'를 뜻하며,
“엘”'하나님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친인 “부두엘”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의
“부두엘”이란 이름은 “하나님에 의해서 강권 되었다”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두엘을 신앙 안에서 살도록 강권하셨다면
자연히 그는 자녀에게 신앙의 인물이 되도록
“요엘”이란 이름을 지어주고 신앙으로 양육하였을 것입니다.

[2] 요엘은 예루살렘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가 외치고 있는 대상은 시온의 자녀들이며
외치는 지역은 시온입니다.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시온은 예루살렘에 대한 별칭이므로 예루살렘이
시온 산에 있었고 그 산 위에 성전이 있었기 때문에
‘성산에서 나팔을 분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남유다의 선지자로 사역하며 살았습니다.

[3] 요엘은 제사장이었을 것입니다.

이는 그가 제사장들에게 특히 회개를 강조하고 있으며
금식일을 정하고 장로들과 이 땅의 거민들을 모아
여호와께 부르짖기를 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14)
그의 심중에 몹시 안타까워했던 것은
그들이 소제와 전제를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는 아픔이었습니다. (1:13)

이와 같이 온전한 제사를 드리지 못한 이유와 근거는
하나님을 온전히 모시지 않고 형식적이고
타락한 마음들 때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2. 시대적 배경

요엘이 활동한 시기는 이스라엘의 남북 분열 왕국시대의 중반기로서
주변 정세가 다소 안정된 평안한 시기였습니다.
이때 남유다에서는 일대변혁이 일어나
제 7대의 왕이 된 아합의 딸, 아달랴를 몰아내고
7세밖에 안된 어린 요아스를 왕 위에 옹립하는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이를 시행한 대제사장 여호야다는 바알숭배를 제거하고 성전을 수리하며
백성들로 여호와 신앙을 갖게 하는데 온갖 힘을 기울여
국가가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야다가 죽은 후,
유다 왕 요아스는 죄악에 빠져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하여
여호와의 진노를 사게 되었습니다.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왕께 나아가,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며
스스로 형통치 못하게 하느냐. 너희가 여호와를 버린고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대하 24:20] 라고 대언하자
요아스 왕이 여호야다의 베푼 은혜를 생각지 아니하고
그 아들 스가랴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대 메뚜기 재앙을 보내셔서
백성들은 기근과 가난으로 고통을 겪는 반면
외적의 침입으로 멸망의 심판이 있을 것을
요엘을 통해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요아스 왕의 재위기간인 B.C. 835-796 년 사이
유다에서 사역하다 B.C. 830 년경
요일서를 기록하고 그의 일생을 마쳤습니다.

3. 신앙적 특징

대개 선지자들의 예언은 당대의 흥망성쇠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요엘 선지자의 예언의 경우는 종말론적이라는데 특징이 있습니다.
종말론적 예언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예언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비하는 삶을 살게 만들어 준다는 의미에서
요엘 선지자의 예언은 큰 의미가 있다고 보겠습니다.


1) 그는 여호와의 날을 첫 번째로 선포한 예언자였습니다. [1:15]

“오호라 그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여호와의 날”이란 개념은 구약에서 약 16회 언금 되고 있으나
그 중 최초로 요엘서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여호와의 날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1] 여호와의 날이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직접 나타내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에 간간히 모습을 드러내셨고
그때마다 시대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노아의 홍수 사건입니다.

이제 다시 여호와의 날이 오게 되면 제2의 심판이
또한 이루어질 것이고 심판과 구원이 구분될 것입니다.
앞으로 올 여호와의 날은 불로 인한 심판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2:30)

요엘이 예언한 이 날은 일차적으로
B.C586년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이며
이차적으로는 예수님의 재림 시에 이루어질
최후의 심판의 날을 가리키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여호와의 날”의 특징

첫째, 어둡고 캄캄한 날입니다. (2:2)

햇빛은 희망을 상징하는 반면 어두움은 절망을 암시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애굽에 내린 어두움의 재앙입니다.
3일간 캄캄한 가운데 사람들이 일어날 수도 없는
공포의 재앙이었습니다. (출 10:22)
또한 검은 구름이 빽빽이 낀 날이란
천둥번개가 내려치는 천지개벽의 날이 될 것입니다.

둘째, 불로 온 땅이 태워질 것입니다. (2:3)

천둥, 번개와 아울러 화산, 지진이 일어나게 되면
온 땅은 화재로 가득 찰 것입니다.
어느 곳도 안전한 곳은 없으며 화산을 피하면 지진 속에 묻히고
지진을 피하면 번개로 온 땅과 건물이 허물어져 내릴 것입니다.
결국 이 땅 위에는 안전한 곳이 없게 됩니다.

세째, 여호와의 날의 특징은 파멸이 아니라 구원에 있습니다 (2:28).


그 증거가 심판 전에 만민에게 성령강림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백성들로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기다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고통과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다만 마귀를 멸하실 계획이시지만 인간은 다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아무리 악한 죄인일지라도 마음을 돌이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난 후 심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2) 성령강림에 대하여 제일 먼저 선포한 예언자입니다. (2:28)

구약시대에서는 성령님의 역할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된 사항이 없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특별한 일에 지정된 사람에게만 임하셔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만 베푸시고는 다시 떠나있곤 하셨습니다.
그 결과, 자력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는 인간들은
결국 하나님을 점점 등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삶,
인간의 속에 내주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보내어 주셔서
더 이상 죄의 굴레에 속해있지 않고 죄에서 해방시켜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구, 신약을 거쳐 오직 예수님께서만이 성령님의 내주하심으로
죄와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승리하신 분이시지만
주님 이후부터는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를
우리 모두에게 허락하여 주실 것을 요엘 선지자는 예언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120문도 위에 성령강림이 이루어졌으며
오늘날은 성도 모두가 성령님을 모실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에는 나타나는 특징이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 중생을 시키시며,
둘째, 성화의 실로 인도하여 자라나게 하시며,
셋째, 선교를 위한 권능과 은사를 주십니다.

이 일은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위하여는 주님 안에 살아야 하고,
성화를 위하여는 성령님을 주인이자 자신을 다스리시는
주관자로 모셔야 하고, 권능을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절대 순종함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성령강림의 “이른 비”로,
주로 선교를 위한 권능의 임하심이 주축이 되어 진행되고 있는 반면,
주님의 재림 전에 늦은 비로 오실 성령충만은
성화를 위주로 한 성령의 열매가 풍성히 열리는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일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닮은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연단과 훈련이 주어지며
이 때마다 성령님의 도우심과 깨우쳐주심으로
많은 성도들이 주님을 닮아갈 것입니다.


3) “남은 자” 구원 사상을 선포한 예언자입니다. (2:32)

“남은 자”란 패역한 세대에 타락과 변질로 이어지는 성도들의 변심으로
하나님의 사역이 단절될 위기에 처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각 시대마다 그 시대의 오염으로부터 남겨놓으신
소수의 의인의 무리를 가리키며
이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구원사역을 완성시켜나가신다는 사상입니다.

그 예로 천지창조 시대에선 노아와 그의 가족을 남기셨으며
가나안 시대에선 바벨론 포로귀환자들을 남기셨으며
신약시대에선 그리스도인들이며
미래의 7년 대환난시기에는 666표를 받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이 남은 자 가운데 있기를 항상 원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위하여 우리 속에 있는 탐심, 교만, 음란을 철저히 버리고
이 세상에서의 미련을 정리하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에는 성공이 없습니다. 성취만이 있을 뿐입니다.
성공이란 자신이 주최일 때 달성되는 표현이고
성취는 주님께서 주최일 때 이루는 표현입니다.

성공적인 교회사역의 주의 종이나 교회 지도자들이 되면
이권과 치리권에 관한 다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 반면, 성취적 교회사역이 되면 남겨주고 떠나게 됩니다.
바로 예루살렘 초대교회 같은 모습들이 될 수 있습니다.

“남은 자”란 믿음만 남고, 남은 것은 정리한 사람들입니다.
“남은 자 중에서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
요엘 선지자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 받을 자가 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시험을 통과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이 시대는 우리 모두가 실험 속에 있는 시대임을 알고
마음속에 오직 주님만을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다 같이 노력할 때입니다.
“남은 자” 가 되기는 쉽지 않지만 가장 영광스러운
대열의 사람들이 되어야 함을 요엘 선지자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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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을 배격한 유다서의 저자
/유다(
Jude)
(유다서 Jude 1:1)


1. 인적 사항및 생애


그는 예수님 형제 중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난
야고보, 요셉, 시몬에 이어 네 번째로 태어난 동생이며,
주님이 그리스도의 자격으로 일하시는 것을 보고
어려서 한 가정에서 함께 자라온 그들로서는
형제로서의 감정들로 인하여 믿으려 하지를 않았습니다.

주님의 사역이 끝나기 6개월 전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가셨을 때까지도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들 입장에 있었습니다. [요 7:5]

그러나 그 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부활하시어 야고보에 맨 처음으로 나타나셔서 [고전 15:7]
그의 의심을 깨우쳐 주시자 먼저 야고보가 변화되었고,
그 후에 500여 형제에게 나타나심으로 그 가운데 함께 있었던
유다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형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으로 있을 당시
교회 지도자로 지냈으며, 역사가 유세비어스의 말에 의하면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은 2대가 '시므온' 3대가 야고보의 아들 '유다'
그리고 15대(최후)가 '유다'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의 나이 70세 가량이 됐을 때, 소 아시아와 수리아 지역에
심하게 퍼지고 있던 '영지주의''헬라 철학의 도덕 폐기론'
성도들을 미혹시키고 있는 위협을 보고 유다서를 작성하여
공동서신으로 보내어 믿음 위에 굳게 서기를 강조 하였으며,

이 유다서를 쓴 후 A.D.70-80년 사이에 믿음을
굳게 지키다 순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생전에 결혼하여 아내와 같이 선교여행을 다니면서
복음을 증거하였으며 [고전 9:5] 그의 사후에는 후손들이
뚜렷한 복음의 전도 역할은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헤기시퍼스'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로마의 '도미니안' 황제 때
기독교 탄압 시에ㅡ로마 당국에 예수의 후손이 아직도 살아있으며
그 중 유다의 손자도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 사람들은 이들이
주위에 폭동을 일으켜 기독교 혁명을 다시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하여
유다의 손자 2명과 주변 사람들을 황제 앞에 끌려 나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난한 농부 차림과 굳은 손을 보고
소박한 농민으로 여겨 석방하였다고 합니다.

유다는 주전 4년보다 몇 해 후에 태어나서 순교하기까지
약 75년 간을 살았으며, 유다서를 집필할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도들은
이미 다 순교하고 요한 사도만 남아있을 때였습니다.

그는 홀로 남아 예루살렘 성전을 지키면서 유다 서신을 쓰며
주변의 이단사상을 철저하게 막으려는 그의 참된 믿음은
오늘날 많은 이단 사상에 미혹 되어있는 우리들에게
참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믿습니다.


2. 시대적 배경

'이단'이란 말은 '처음은 같은데 나중이 다르다'는 뜻으로,
성령강림 후 초대교회의 복음이 능력과 함께 힘차게 전파 되어 나가자
복음을 사모하는 순수한 성도들 외에 타종교나 우상을 섬겼던
사람들도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문제가 되는 부분이 회개 부분으로 참 회개를 통하여 거듭나야 하는데
대부분 기복신앙이나 신비를 추구하던 자들은 여전히 기독교에 참여 하면서도
유익과 능력만을 소유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런 부류 중의 대표적인 사람이 사마리아 성의 마술사 '시몬'으로
빌립 집사의 기적 행함을 보고 기독교로 전향하였으나,
베드로의 안수로 사람들이 성령충만을 받는 것을 보고
그 능력을 돈으로 사려고 제안 하였다가 베드로로부터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행 8:18-23]

이에 앙심을 품은 시몬은 자신의 시몬파를 만들었고
'영지주의(Gnosticism)'를 창설하여 (이레니우스 주장)
초대 교회의 기독교인 들에게 많은 악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외경 '베드로 행전'에서는 베드로를 극히 반대하여
로마에까지 따라와 로마의 기독교인들을
거짓된 가르침으로 타락시킨 자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영지주의는 계속 번져나가 20-30년 후 B.C. 70년경에는
교회내의 가장 해를 주는 이단 사상으로 침투하여
유럽, 아시아, 모든 교회에 성도들을 미혹하고
타락시키는 물의를 빚는 세력이 되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 베드로, 요한......등은
영지주의의 허구성을 교리적으로 논박하는 서신을 교회마다 발송하였으며,
또한, 유다는 그들의 서신과는 달리
성도들의 도덕적 부패성에 대해서 집중 공격하는 서신을 썼습니다.

이는 이미 수신 지역의 교회가 이단으로 말미암아
심각한 도덕적 방종에 빠져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 무법주의 자들의 영향

이들은 성령의 복음을 육체의 복음으로 전락시킨 자들로
"자신들은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음으로
율법은 더 이상 효력이 없다" 라고 주장하며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 속하여 있음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기들도
모든 것이 또한 자기들의 것이기도 하다" 는 인식하에
'육신이 원하는 바는 상대방이 불쾌감을 갖지 않는 한
마음대로 행해도 좋다'고 행하고 다녔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편한 사상을 불러들임으로
많은 타락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2) 영지주의의 영향

이들 또한 "이원론적 우주관"을 주장함으로 "영혼과 물질을 구분하였으며,
영혼은 본질적으로 선하나 물질은 본질적으로 모순 덩어리이고
악하며 불완전한 것"이라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깨끗하심으로 악한 물질을 직접
다루실 수 없으며,
자신으로부터 영체들을 방사하여 최 하위의 영체가
이 세상을 창조하였다."
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은 더러움으로
욕망대로 행하도록 내어버려 두어도 죄가 되지 않고,
중요한 것은 마음임으로 지식으로 더욱 높은 영체의 단계에 접근하면
고귀한 상태로 올라갈 수 있다'고 보았기에
영성 훈련과 지적 훈련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결국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것으로서
"주님은 다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영체들 중의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존재일 뿐이다.
그러므로, 자신들도 노력하면 주님을 추월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계시를 받는 영체들이 될 수 있다"
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신비주의를 사모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흥미와 관심을 갖게 하는 거짓 교리가 되었습니다.


3. 극심한 이단들의 침투에 대항한 유다의 신앙

1) 믿음의 도는 절대적인 것이라는 신앙의 자세를 지녔습니다. [v3절]

인간의 모든 사상이나 학문은 지능이 발달할수록
꾸준히 발전되어 왔습니다. 그 것은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단번에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입니다.
인간이 발전시켜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 것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단이란 진리를 지식으로 인간 편에 유리하게
재 해석해 놓은 사상입니다.

구원은 예수님만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이 외에 다른
구원받는 길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단은 이 진리를 부인하고
"다른 길에도 구원이 있다."라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유혹의 바탕에는 육신의 욕구와 혼의 교만을
충족시켜주는 성향이 깔려있기 때문에 죄를 지으면서도
구원받는 쉬운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혼과 육을 즐겁게 해주기 위하여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죽은 영을 깨우쳐 죄에서 돌이켜 구원받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만일 설교가 인간 편에 초점이 맞추어 진다면 혼과 육신이 기뻐할 것이요,
예수님께 초점이 맞추어 진다면 영혼이 기뻐할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성도들로 하여금 혼과 육을 만족 시키려는
이단 사상과 힘써 싸우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영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짐을
단호히 주장하는 신앙인 이었습니다.


2) 육체의 복음을 전적으로 배격한 신앙인 이었습니다. [v11절]

교회가 분열이 되고 깨어지는 이유는 이간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간자들은 주로 자신의 개인 욕망을 추구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에
자기 편을 만들기 위하여 거짓말, 회유, 미혹, 유익, 등을 제시함으로
주님 중심의 신앙에서 자기 중심의 신앙으로 이기적 신앙관을 갖게 만듭니다.
그 예가 '가인''발람', '고라' 형의 이간자들임을 유다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1] 가인형 = 시기하는 형입니다.

자신이 으뜸으로 중심인물이 되어야 하고,
사랑과 인정을 제일 많이 받아야 하는 성품입니다.
애찬에 참석하여 맛있는 음식이나, 자기 동료들과만 어울리고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과는 전혀 개의치 않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쉽게 교회를 불평하며, 하는 일마다 불만스러워하고,
주로 허풍을 많이 떠는 사람들입니다.

[2] 발람형 = 이익 추구형 입니다.  

신앙생활은 오직 자신이 잘 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물질, 건강, 형통의 축복이 목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유명하거나 신령한 곳이 있다 하면 금방 몰려갑니다.
또한, 교회 내에 외부의 이야기만을 퍼뜨림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시킵니다.
신앙을 자신의 욕망의 시녀로 여기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3] 고라형 = 교만 추구형 입니다.

지도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지닌 사람들은 권위에 잘 순종하지 않습니다.
분수를 넘어 부당하게 지위를 소유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질서를 현실의 당면한 문제를 구실삼아
대적하고, 무너뜨리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 합니다.

유다는 이와 같은 자들에게 경고합니다.
세 사람 모두 심판 받아 멸망한 것 같이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도록 악에서 돌아서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3) 마지막 때를 대비하고 산 신앙인이었습니다. [vv. 17-18절]

마지막 때에 나타나는 특징은
성령이 없는 자들이 판을 치는 교회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요즈음 세상은 십계명을 거의 무시하고 지내는 성도들이 많아 졌습니다.
또한, 순결, 정조의 기준이 무너지고
해어짐이 만연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대부분, 하나님의 은혜가 크기 때문에
자신의 죄는 덮일 수 있다고 쉽게 생각하고 있음으로
성경말씀을 기준으로 살기 보다는
자기신앙 기준으로 살고 있는 경향이 점점 만연되고 있습니다.

도덕법의 무시는 새 성도덕을 낳아 성의 자유화를 가져오고
성공위주의 인생관을 신앙관 보다 우의에 둠으로
돈이란 물질의 '맘몬'의 영에 지배 당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진리와 물질을 한자리에,
진리와 영광을 동시에 소유하려는 풍조가 마지막 때의 풍조입니다.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천성문 바로 앞에서도 지옥으로 가는 길이 있음을 꿈 속에서 보았다."

마지막 때란,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에 실족을 많이 하는 시대임을 말합니다.
육신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린다 하였습니다.
욕심이 차면 찰 수록
성령님은 멀어짐을 이 시대의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유다는 성령이 있는 자가 되라고,
바로 이 점을 우리에게도 지적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chris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보았습니다 ^^

    2013.10.05 22:04
  2. 다니엘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관리자의 승인을 기다리고 있는 댓글입니다

    2016.09.18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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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속에 들어간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단 3:17)


1. 인적 사항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는 바벨론식의 이름이며
이들의 본명은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 입니다
 
그들의 나이 15세가 되었을 때,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애굽을 쳐서 격파하고 고대 근동의 패권을 차지 하게되었을 당시
애굽의 바로왕에 의해 즉위 된 유다 여호야김 왕도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때에 왕족과 귀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이 세 소년들도 다니엘과 함께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B.C. 605년)

 바벨론으로 송환되어진 그들은 왕궁에서 3년간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그들의 이름이 바뀌어지게 되었으며, 이 같은 개명 정책은
정복자들이 피 정복자들의 문화와 민족성을 말살시켜
지배국에 동화 시키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행하여 졌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이름도 의미도 바뀌어지게 된 것입니다.

즉, '하나냐' (주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
'사드락'(월신의 명령
) 으로,
 '미사엘' (하나님과 같으신 이가 누구인가?)
'메삭' (므로닥 같은 이가 누구인가?)
으로
'아사랴' (여호와는 돕는 자이시다)
 '아벳느고'(느고의 종)
하나님과 관계된 의미를
모두 우상 신과의 관계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교육기간 3년 동안 다니엘과 더불어 우상에 바쳐진 음식으로
몸을 더럽히지 않고 채식 만하여 하나님으로 부터 지식과 명철을 받아
지혜와 총명이 남보다 뛰어남으로 도지사급 수준의 직분을 받아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에 이들을 시기하고 그들의 자리를 탐내는 무리들로 인하여
참소를 받게 되었는데, 그 사건은 바로 금신상을 세워 모두 절 하여 왕을
우상숭배 하도록 만든 칙령을 어긴데 대한 처벌을 받도록 한 것입니다.

이 때 그들의 나이는 34세 정도로 바밸론에 끌려온지
19년 째되는 (B.C. 586년경)이었습니다.

그러나 풀무불 속에 들어가는 신앙의 결단은
하나님의 특별한 기적을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통하여
더욱 높임을 받아 쓰임받는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그 후 B.C. 538년 경까지 다니엘과 더불어 꾸준히 신앙을
지키는 생활을 한 뒤 바벨론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2. 신앙의 두 종류

믿음은 내면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자신의 믿음을 알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확실히 깨닫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고난과 시련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시련의 고비에서 보여진 믿음이 바로 자신의
믿음의 수준임을 스스로 알게 하여주십니다.

그 이유는 참 믿음만이 하나님과 동행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을 지내면서 느브갓네살 왕의 믿음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믿음을 비교하여 나타내 줌으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도록 기회를 주시고 계십니다.

1) 느브갓네살 왕의 믿음은 감동적인 믿음입니다.

다니엘이 느브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하자 큰 감동을 받은 왕은
다니엘에게 이르되,"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단 2:47)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17년이 지난 후 그는 꿈에서 본 금신상을 크게 만들어
'두라' 평지에 세우고 모든 사람들로 절을 하게 하며
스스로 우상이 되어버리는 믿음이 되어버렸습니다.

(1) 감동이 회심에 이르기 위해서는 회개가 있어야 함을 알려주는 경우입니다.

감동은 감정의 영역으로, 의지의 영역인 욕망과는 다른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군인도, 정치가도, 재벌도, 학자도 다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권력, 권세, 재력, 지력등은
감동받은 믿음과는 별개로 마음 속에 유지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 속에는 두 영역이 공존하게 됩니다.

감동받은 신앙의 영역과 현재 소유하고 있는 욕망의 영역이 함께 있어
자신의 삶이 욕망의 범주에서 만족을 누릴 때는 그 편에 머물지만
인간의 한계를 느껴 갈급하게 되면 종교의 영역으로 옮겨가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스윙적인 마음을 갖고 살게 됩니다.

이때, 자신은 하나님과 공존 상태에 있게 됩니다.
회개만이 이 공존 상태가 교만임을 깨닫게 해주어 하나님 한분 만으로
자신의 삶의 모두를 종속시키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예: 세리장 삭개오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재물에 대한
반대의 결과가 무엇이지를 보여준 예로 볼 수 있습니다.)

(2) 감동적인 믿음은 신앙영역 까지도 자신의 주관하에 놓이게 만듭니다.

다니엘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통하여 국정이 안정되고
번영이 되자 왕은 다시 교만한 마음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꿈속에서 본 금신상이 자신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섬김의 대상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결국 교만한 마음은 은혜로이 받은 하나님의 축복을 자신의
유익을 의하여 반역의 계기로 만들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권세, 물질, 인기등 세상의 소유는 육신에 속한 부분들입니다.
인간에게서 제일 먼저 없어지는 부분이 육신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에 속한 부분은 세상에 있을동안 가장 섬김을 받으려 합니다.

믿음은 영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육에 속하지도, 육신에 속한 것에도
속해 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믿음에 의해서 축복받은 육신은 믿음을
내 보내고 자신이 주어진 것의 주인이 되어 천년만년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느브갓네살 왕은 풀무불 사건이 있은 17년 후(B.C. 569)
왕궁 지붕을 거닐며 자신의 위엄과 영광을 드러내다가
하나님의 징계로 짐승과 같이 되어 7년을 고생하고 지냈으며, 다시
하나님을 주권자로 깨닫고 돌아와 B.C. 562 년에 삶을 마감 하였습니다.

인생의 부귀영화는 30-40년 이면 지나갑니다.
감동의 신앙은 그 사는동안 욕망의 시녀로서의 범주에
머물 수 있을 뿐입니다. 느브갓네살 왕의 신앙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대변해주는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2)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믿음은 헌신적 믿음 이었습니다.

헌신이란 그 일에 대하여 제일 우선 순위로 자신의 정성을 다 기울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을 살 때에도 생활의 우선 순위가 있듯이, 신앙생활 에도 믿음의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
그 것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이 두 분야를 실 생활에 바르게 적용시키고
살게하기 위하여 세가지의 시련이 오게 됨을 봅니다.

첫째, 참소의 시련을 겪게 됩니다.
(v. 8="갈대아 사람들이 유다 사람들을 참소하니라.")

참소의 특징은 시기심, 거짓말, 욕심입니다.
그리스도인 들이 참소를 받게되면 억울함 때문에 참기가 어렵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참소의 누명을 벗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벗겨주시는 때를 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내로 지내는 동안 교만이 깨뜨러지게 됩니다. 
참소의 시련은 주로 교만을 깨뜨리기 위하여 주어집니다.

둘째, 위기의 시련을 겪게 됩니다.
(v.11="극렬히 타는 풀무가운데 던져 넣음을 당하리라.")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고통의 특징은 육신의 고통과,
소유의 상실과, 생명의 위협, 등입니다.
이들은 우리의 삶에 낙심, 침체, 절망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이 고통을 통하여 욕망을 버릴 수 가 있습니다.
 고통은 내세를 바라보게 만듭니다.

셋째, 타협의 유혹을 겪게 됩니다.
(v.15="이제라도 너희가 절하면 좋거니와")    


타협의 유혹은 우리로 하여금 마음 속에 자위나 명분을 갖게 만듭니다.
"그까짓 것 한번이면 어때? 다음에 잘 되면 더 크게 값으면 되지..."
"상황이 상황인 만큼 시대의 조류를 따르는 것이 현명한 일이지" ...등,

그러나 유혹은 우리의 의지적 믿음을 참 믿음으로 구분하거나,
바꾸어 주거나 하는 기회가 됩니다. 이 세가지의 상황을 맞이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그들의 진정한 믿음을 다음과 같이 보였습니다.

(1) 그들의 믿음은 결단의 믿음이 었습니다.
(v.16="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그들은 신상에 절하느냐, 마느냐에 대하여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십계명은 그들에게 절대적인 표준이었기 때문입니다.

절대 명령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타협에 의해서 세워질 수 없습니다.
말씀에 순종으로만 세워지고 승리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믿음은 영원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하여 영원을 포기하는 것은
믿음이 아님을 그들은 보여준 것입니다.

(2) 그들의 믿음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한 믿음이 었습니다.
(v.17="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능히 건져 내시겠고")

이들은 다니엘과 함께 하나님께서 왕의 꿈을 보여주셨던 체험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여러번 경험 하였으면서도 어려움이 올 때마다
흔들리고 시험에 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를 열번이나 더 시험한 무리들 이다" 라고 말씀하시고
'너희가 말한 그대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환경과 믿음은 상반 관계에 있습니다.
한번 믿으면 끝까지 믿어야지 환경따라 믿게되면
 환경이 하나님이 되어버립니다.
이 세 사람은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그 순간 환경은
영광에 이르는 코스에 불과하게 되었습니다.

(3) 그들의 믿음은 내세를 바라보는 믿음이었습니다.
(v.18="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성도가 불도, 물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은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창조 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창조주 하나님께서 불도 끌 수 있고, 물도 말릴 수 있고,
생명도 살릴 수 있는 분이심으로 의지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밖에는 없습니다.

결국 그들은 풀무불 속에서도 타지않고 살아나왔습니다.
이는 성경에서 약속 하심과 같이
"네가 불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 (이사야 43:2)
하신 말씀을 그들에게 증명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이유는 예수님 닮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의 것을 잡으려 든다면 다 놓치게 만드시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같이 저 세상의 것을 잡으려 든다면
저 세상도, 이 세상의 것도 다 허락하실 것입니다.
이들의 신앙을 본받아 참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도록 함께 배워 나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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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선교사 빌립 집사
/
Philip
                                       [행 8:5-7]   


 
1. 인적 사항과 주요 생애

'빌립'이라는 이름은 '말을 사랑 하는자' 라는 뜻입니다.
빌립은 헬라파 유대인으로 각처에 흩어져 살다 돌아온
유대인들 중 한 사람입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유대교 사회로부터 소외 당한 사람들로
예루살렘교회의 빈민구제에 대부분 의존하고 살고 있었으나
히브리파 과부들로부터 푸대접을 받은 관계로 말썽이 생기자
사도들은 이 구제사역을 모범집사 일곱을 택하여 맡기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빌립은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 그의
온전한 믿음과 신앙은 주님의 능력을 덧입게 되어 스데반(순교자)집사와
더불어 주님 사역을 이루는(전도자) 일꾼이 되었습니다. (행 21:8)

스데반의 순교 후 핍박이 심해지자 사도들 외에는 다 교회를 떠나
각 지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는데 빌립은 이 때, 사마리아 성으로 내려가
복음을 전하며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한
'최초의 평신도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또한,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그는 주의 사자의 인도를 받아
가사로 내려가서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고 있는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여 줌으로 북아프리카 선교의 문을 열은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세 번째 선교지로 가사에서 동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지중해 연안 4.8Km 내륙지방인 '아소도'로 올라가
그 곳과 주변 여러 해안지방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였고
마지막으로 '가이사랴'로 옮겨가 그 곳에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이사랴'는 빌립의 사마리아 선교사역의 종착지이자
고넬료의 개심에 의하여 믿음의 문이 처음으로 이방인들에게
열려진 장소에서 네 딸의 자녀와 더불어 지내게 되었습니다.

약 25년간 복음전도자의 사역을 수행하고 있을 당시 사도바울이
세 번째 전도여행에서 가이사랴를 방문했을 때,(A.D.58 년경)
빌립집사는 사도바울과 누가 등 주요 사역자들을 영접하여
자신의 집에서 오래 동안 머물게 하였으며
예루살렘에 대한 많은 소식을 전하여 주었습니다.

빌립과 사도바울의 인연은 참으로 희한해
처음에는 원수의 관계에서 헤어졌지만,
25년이 지난 후에는 주의 일에 동역자가 되어
함께 돕고 지내게 되는 인연으로 맺어지게 됩니다.

그 후 전도자 빌립은 '리디아''트랄레스' 감독으로 옮겨가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였으며
재직하던 중 그 곳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2. 신앙의 특징

1)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평신도였습니다 (행 6:5)

믿음에는 믿는 대상과의 관계에 따라 그 정도에 해당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경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마가복음 16:17)

빌립이 사마리아성에 내려가 복음을 전했을 때에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았다고 했습니다 (행 8:7).

귀신의 특징은 붙었다가 떨어졌다 합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자기에게 귀신이 붙어있는지 아닌지 모릅니다.
다만 귀신은 더럽기 때문에 붙어있는 사람에게 생각도, 언행도 더럽게 만듭니다.

사람들이 이중생활 하는 경우들 대부분은 더러운 귀신들의
사주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귀신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들의 ‘심판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빌립 집사의 믿음이 큰 이유는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심으로
귀신들이 놀라 떨어져 나간 데 있습니다.
또한, 믿음은 대상과 함께 있게 만드는 원천이지만
한편, 성령님의 능력을 방출하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그 결과 성령의 역사로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았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내 안에 성령님의 내주 하심이
가득 찬 것을 의미합니다. 외부로 나오는 능력이 병 고침이요,
내부에서 일하시는 사역이 인도하심입니다.

빌립은 사마리아의 사역에 이어 가사로 내려가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고 있는 내시에게 나아가도록
성령의 지시를 받습니다. (행 8:29)
그리고 이사야를 읽고 있는 그에게 '어린양'
"예수님"이 심을 알려주었습니다.

여기에서 빌립의 전도에는 특징이 있음을 봅니다.
그 것은 오직 주님만을 증거하였다는데 있습니다.
사마리아 성에서도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하였고 (8:5)
에디오피아 내시에게도 오직 주님만 증거하였습니다. (8:35)

빌립집사의 신앙을 보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믿음이 강하면 주님을 증거하는 반면
믿음이 약하면 전도할 때 교회자랑, 축복, 응답, 병고침…등으로
외부 여건을 가지고 전도하려 드는 경향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참 믿음은 내 안이 예수님으로 가득 찬 상태를 말합니다.
이같은 믿음은 주님을 나의 신앙생활에 수단으로 여길 때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일입니다. 오직 나의 주인으로,
나의 삶의 주관자로 모실 때에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때에 내면에 가득찬 주님의 역사하심이 나옵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 대신 내 생각이 가득차 있으면 내 것에 주님이 실려 나오지만,
주님이 가득 차 있으면 주님에 대한 밀씀만이 나오게 됩니다.

신앙의 부수적인 것들이 나올때는 내 안에 자신으로 가득 차 있을 때입니다.
빌립은 자신의 마음을 주님으로 가득 채운 신앙인이었습니다.


2) 사역을 성공보다는 영혼구원에 초점을 둔 신앙이었습니다.

빌립은 혼자서 사마리아 지역으로 내려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역을 개척한 것입니다. 주님의 기적과 이사가 나타나자
그의 사역은 크게 부흥하였습니다.
그 성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 좇았습니다.
그는 이제 그 곳에서 안주하여 부흥된 사역을
편안히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그에게 70km나 떨어진 서 남쪽,
애굽의 길목인 '가사' 로 가서 전도하라 하셨습니다.
그 것도 그 곳엔 오직 이방인 내시 한 사람을 상대로 한 사역이었습니다.

수 많은 추종자를 둔 능력 있는 주의 종의 입장에서는
그 사역보다 사마리아에 남아 더 많은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시 한 사람의 영혼 구원만 보신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이디오피아 전체를 구원하실 계획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사역의 성공은 나를 중심으로 일 할 때 중요하게 여겨지지만
사역의 성취는 주님을 중심으로 일할 때 중요한 것임을
빌립 전도자는 순종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는 내시의 전도가 끝나자 다시 사마리아로 돌아 온 것이 아니라
가사 지역에서 동 북쪽으로 40km 더 들어간 지중해 연안 지역인
'아소도'로 가서 그 곳 여러 성을 (룻다와 욥바)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의 복음의 열매는 그곳에서도 자라나 후에 베드로가
룻다와 욥바를 방문하였을 때 그 곳에 이미
기독교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나있습니다.

그 후 그는 '가이사랴' 라는 지중해 연안에서 가장 중요한 요충지이며
로마 총독이 거주하고 있는 그 곳에 머무르며
많은 주의 일꾼들을 대접하는 사역을 행하였습니다.

주의 일을 하면서 사역의 대가를 받는 길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늘 나라에서의 상급과, 이 땅에서의 성공적인 사역으로 인한 축복입니다.
교회의 대형화, 성도의 다수화로 인한 물질의 축복은
이 땅에서의 축복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것을 하늘나라의 상급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길 시에,
영혼구원의 초점을 둔 사역은 이 땅의 축복을 누리려는 마음에 의해서
변질되어 소중한 영생의 축복을 잃어 버릴 수가 있습니다.

빌립 전도자는 우리에게 물질, 명예, 안일을 기대한 사역이 아니라
오직 영혼구원을 위한 깨끗한 마음의 사역을 한
진정한 신앙인 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 인내와 겸손을 겸비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성의 강한 기적과 이사의 역사가 있은 이후로
빌립에게는 이렇다 할 역사하심이 나타나지 않은 채
가이사랴에 머물며 20년 이상을 지내야만 했습니다.

주의 종은 나타나는 사역은 아무리 힘이 들어도 힘든 줄 모르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숨은 사역은 못 견디게 힘든 법입니다.
그 기간이 자그마치 20년이 넘게 흘렀습니다.

또한 그는 가이사랴에 있는 백부장 고넬료가 회심하는데
“왜 주님께서는 가까이 있는 자신을 통하여 역사를 일으키게 하시지 않고
먼 거리에 있는 (욥바) 베드로를 청하여 회심케 하셨는지?"
이에 대하여 의문을 갖지 않았습니다.

사역으로 말하면 빌립이 항상 개척해 놓은 곳에
사도 베드로가 뒤따라 옴을 보았을 때 그도
사도와 버금가는 영적 사역의 기득권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흔히 사역에는 비교가 따릅니다. 시기가 따르며,
분열이 생깁니다. 오늘날에도 벌어지고 있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서는 한번도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 모두 온전히 순종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즉, 기다리게 하시면 기다리고, 남을 쓰시면 도와주고,
다시 명령하시면 순종하고 하는 진정
 '주의 종' 으로서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역은 시험을 동반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성령님을 동반합니다.
결국, 사역은 성령님의 주관 하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20년 이상 숨은 사역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은
오직 그의 주의종 으로서의 겸손 이었습니다.
그의 '가이사랴' 에서의 기다림의 사역의 마지막으로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바울과
그의 일행을 영접하는 사역이 주어지게 됩니다.

빌립의 접대로 인하여 가장 유익을 얻은 사람은 누가였습니다.
그는 빌립으로부터 20년 동안 있었던 예루살렘 성전의 일과
사도들의 행적에 대하여 자세히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것은 나중에 사도행전을 집필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25년 전에 원수로 헤어졌던 빌립과 바울.
그러나 지금 동역자로 재회의 순간이 있게 하기 위하여
자신을 가이사랴에 머물게 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

또한, 다시 헤어져서 마지막 복음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각자의 갈 곳으로 깨달아 인도하시는 성령님!

그 때 빌립의 딸들이 바울을 향해 아가보라 하는 선지자와 함께 예언 하기를
'예루살렘에 가면 핍박이 기다리고 있으니 가지 말라' (21:12)
권면하였습니다.  이 때 사도바울이 대답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v13)
하고 믿음의 담대함을 보였습니다.

믿음은, 의지하고 순종하며 주님을 위해 자신을 드림으로
완성되는 것을 빌립은 보았습니다.

바울은 순교를 향한 길을 택했습니다.
빌립 또한 자신의 생명을 드릴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 것은 바로 '리디아의 트랄레스 지역'의 감독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빌립은 그 곳에서 자신의 생명을 주님께 드리게 됩니다.

유명한 일을 하였음에도, 유명한 이름으로 나타나지 않은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진정한 복음 전도자인 집사 '빌립’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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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7.28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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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버나움의 백부장
/ A centurion of Capernaum,
         (마 8:5-13, 눅 7:1-10)      
   


세상에서는 사람을 평가할 때, 외모와 능력을 기준으로 합니다.
그러나 신앙에서는 오직 믿음 하나로 평가됩니다.
그 이유는 세상은 육신적인 삶의 터전이요,
신앙은 영적인 삶의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천국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실제 현실은 신앙인으로 세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 사람으로 참신앙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음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마8: 11-12].

천국은 혈통과 신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한 것임을
이방인 백부장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1. 성경에서 나오는 믿음의 백부장들의 예

백부장이란 직분은 로마 군단 소속 장교의 호칭으로 약 100명의
병사들을 직접 지휘하는 중대장 급의 계급으로 하는 일은
주로 점령지의 치안유지, 반란폭동 제지, 식민지 백성들을
지배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는 항상 적대관계였으며
대부분 로마 병사들을 잔인하고 난폭한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다섯 명의 백부장들에 관한 특별한 언급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1) 이달리야의 백부장 고넬료는 기도와 구제를 많이 하여
하나님께 그의 행위가 상달된 사람이요. [행 10:22]

2) 예루살렘의 백부장은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서 폭도들에게
위험을 당할 시 천부장이 채찍질하려 하자 로마사람 임을 전하여
위기를 막아주었으며 [행 22:26)

3) 아구사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는 사도바울을 로마로 우송할 시
그에게 모든 편의를 베푼 백부장이고 [[행 27:1]

4) 발라도의 명령으로 십자가형을 지휘한 백부장은 주님 돌아가심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한 백부장이고 (막 15:39)

5) 가버나움의 백부장은 주님께서
그의 큰 믿음을 칭찬하신 백부장입니다. [마 8:10]    


2. 가버나움의 백부장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는 전시에는 어느 곳이든 상부의 명령에 따라 목숨을 걸고 나가
싸웠으며 그의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거칠고, 짓밟고,
난폭한 기질의 성향이 강한 분위기 속에서 사는 군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지극히 작은 정복지
이스라엘의 촌 갈릴리 지역에 배치되었다는 것은
그에게는 출세에서는 벗어난 퇴역군인과도 같은
암담한 현실에 놓여있는 것과 같은 실정이었을 것입니다.

전혀 종교에 무관심하게 지냈던 그의 인생은
기대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하자 생활에 바빴던 삶에서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가지고 지낼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삶이 달려갈 때는 무시됩니다.
그러나 멈출 때는 스며들어오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부장은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서
듣기 시작하였습니다. [눅 7:3]

문둥병자를 낫게 하신 일 (마8: 2-3)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 (요 2: 1-11)
왕의 신하를 고치신 일 (요 4: 46)
더욱이 중풍병자를 고치신 일 (눅 5:18) 등이

모두가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서 일어난 일들 임으로
유대인의 종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주님의 말씀과 기적은
그로 주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사람은 신앙의 눈이 열리면 그전엔 보지 못했던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통과 아픔을 볼 수 있고, 허무와 진실을 볼 수 있고,
천국과 영생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정복당한 민족을 긍휼이 여기게 되었고
그들을 압제하는 자세에서 벗어나
사랑과 이해로 도와주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대교로 개종하게 되었는데
이 당시 개종자에는 초보적인 "문의 개종자, Proselyte of the Gate"
할례를 받은 "의의 개종자, Proselyte of the Righteousness"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그룹에 속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회당을 지은 것으로 보아 의의 개종자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이 같은 신앙생활은 그 주변의 백성들과 장로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로 삶이 바꾸어지게 되었으며
그의 사랑하는 마음은 심지어 종일지라도 질병의 고통을
어떻게 해서든지 고쳐주려고 주님께 몸소 찾아나가
무릎을 꿇고 부탁을 하는 겸손한 사람으로 변화시켜주었습니다.

지금도 가버나움에는 유적으로 보이는 '텔훔'(Tel Hum)에 아름다운
대리석의 옛 회당의 유적들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이 회당이 바로 이 백부장이 건립한 것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역사가들은 추축하기를 백부장의 건립한 회당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그의 신앙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1) 사랑을 실천하고 사는 신앙인이었습니다. [마 8: 6]

종은 노예와 마찬가지로 돈으로 사오거나 전쟁에서 사로 잡아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대개 종을 사람으로 취급하기 보다는 도구로 여깁니다.
지금 병든 종도 어떻게 종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주인이 군인인 것으로 보아 포로로 잡혀진 자로 보입니다.
그가 하는 일은 백부장 곁에서 갑옷과 투구를 닦고, 방을 청소하며,
음식을 만들고 심부름하는 그의 시중드는 일꾼이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그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고 나서는 인간에게는
당연한 권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시작은 "나의 권리는 없다" 라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
"모든 권리는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알고 살므로
바른 신앙생활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물질도, 능력도, 건강도)
그랬을 때에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백부장이 지닌 것은 권력, 소유, 능력입니다.
그는 그 것을 어디다 써야 할지를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내가 해야 할 일을 찾게 만들어줍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들을 위하여
회당을 지어 주고 싶은 마음으로 봉사를 하게 만들었고
종을 사랑하는 마음은 예수님을 찾아나가
사랑하는 자의 생명을 간절히 호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같이 진실된 사랑은 지신의 체면 위신을 넘어서게 만듭니다.
그 것도 하찮은 종의 생명인데 진정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고서는
지배자가 직접 주님께 무릎 꿇고 사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과 이웃사람들의 시선을 제일 많이 의식하고 삽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하나님의 시선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고 살려는 사람입니다.    
   실천되는 사랑만이 하나님의 시선을 중심으로 여기고 산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 그는 군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셨을 때는
하나님의 훌륭한 자녀로 인정하셨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삶의 본질,
사랑이 우리의 지니고 있는 지위, 신분, 명예, 소유보다
근본이 되어야 함을 보여준 참 신앙인이었습니다.

2) 겸손을 실천하고 산 신앙인이었습니다. [마8:8]

겸손은 ‘상대방이 누구인지’ ‘내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 때에 갖추어 지는 예의입니다.

예를 들면 모세는 능력의 지도자로
이스라엘 200만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이끌어냈으며
권능으로 홍해바다를 갈랐고 성막과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직접 대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위대한 인간이었으나 항상 겸손하고 온유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이 주님께 아뢰기를

"주께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한 말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확실히 깨닫고
겸손으로 대답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은 이방인이며, 살인한 죄인이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던
불신자였던, 반면에 주님은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거룩하신 능력의 주님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베드로가 주님의 지시로 고기를 많이 잡은 후에 아뢰기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며 자신을 깨달은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사람은 이성 중심으로 신앙 생활할 땐ㅡ 주님은 '말씀으로
깨달음을 주시는 훌륭한 종교가'로 여기게 됩니다.

또한 감각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할 땐ㅡ주님은
'응답 주시는 능력을 지니신 분'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중심에 신앙이 되면 주님은 내 죄를 사하시고
나를 천국으로 구원하시는 구세주로 깨닫게 되어
죄인과 그리스도의 위치를 정확히 지켜 겸손해 지게 만듭니다.

신앙의 출발은 각자 당면한 문제로부터 출발하지만
신앙의 생활은 죄를 깨달음으로부터 거듭난 생활로 실제화됩니다.

이방인인 백부장은 율법을 지키고 산 유대인보다
훨씬 자신이 더러운 죄인임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죄는 주님을 두려워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회개는 주님을 소중한 분으로 여겨 사랑과 겸손으로 섬기게 만듭니다.

3) 주님까지 인정한 가장 큰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마 8: 10]

백부장은 권세에 대하여 군인생활을 통하여 배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가 인용하는 권세란 말도 로마 황제의 권한을 가리키며 한 말입니다.

즉, 자신은 로마황제의 권세를 위임 받은 사람임으로
백부장의 명령이 황제의 명령과 동일시되어, 백성들이 따르듯이
주님 또한 하나님의 권세를 지니신 분임으로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대변하는 효력을 갖춘 말씀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직 말씀만 하시옵소서." 라고 믿음의 표현을 한 것입니다.    
 
백부장이 주님을 생각했을 때 가시적인 것보다
비가시적인 존재이심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을 봅니다.
이와 반대되는 예로는, 문둥병 걸린 나아만 장군이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병을 고치러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 갔을 때
그는 기대하기를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상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왕하 5:11]
하였습니다.

이는 믿음과 신념을 혼동한 데서 오는 결과입니다. 즉, 신념은
확신에서 비롯되며 확신은 경험과 확인으로부터 생기게 됩니다.
즉, 혼과 육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워지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은 말씀으로부터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심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말씀을 진리 (레마)로 우리 영혼 속에 살아있도록 심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는 주시는 "계시""말씀"
일생을 통해서도 잊어버리거나 희미해지지 않습니다.
심어져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알 때에 믿음이 바로서게 되고 믿음이 바로서면
말씀을 어떤 외형적인 것보다 우선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 [요 20:29]
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믿음의 분량만큼 은혜와 축복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백부장에게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마 8:13]
하신 것입니다.
말씀과 인격을 동일시 여기는 믿음, 이 믿음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음으로 어떤 때는 믿기도 하고
어떤 때는 믿기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과 하나님의 인격을 동일시하지 않고,
말씀과 내 인격을 연결해서 읽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쪽 편에 서서 읽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말씀이 능력으로, 위로로, 계시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주님의 말씀과 주님이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깨달아 하나임을 확신한 믿음입니다.
오늘날 도마와 같은 우리에게 믿음을
새롭게 해주는 참신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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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온전히 좇은 갈렙
/ Caleb
      [민 14:24]  
     


1. 인적 사항

갈렙은 유다 지파의 여분네의 아들로 가나안 12 정탐꾼 중 한 사람입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개’ 라는 의미로 충성을 의미하나
또 다른 큰의미는 '온 마음’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여호수아와 더불어 가나안 땅, 정복전쟁의 선봉장이 되어 대적을 물리쳤으며
‘기랏세벨을 쳐서 그 것을 취하는 자에게 딸 악사를 주리라’ 한 약속에
사사 옷니엘이 이김으로 그를 사위로 맞아들였습니다.

가족으로는 이루와 엘라, 나암, 엘라의 자손과 그나스가 있습니다. (대상 4:14)
가나안의 안정 후 그는 갈렙 (갈멜) 족속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삼상 25:3)

2. 주요 생애

갈렙은 B.C. 1485년 애굽에서 태어난 인물로 그의 조상은
그니스이며 (수 14: 6) 그 조상은 일찍이 팔레스틴 주변에
거주하고 있었던 에돔 족속의 한 부족의 장이었습니다. (창 36:15)

그럼에도 갈렙이 유다 지파로 (민13: 6) 표기된 것은
실상 그는 순수한 히브리 혈통은 아니었으나, 그의 선조가
과거에 유다 지파로 유입이 되어 개종함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예: 호밥, 라합, 룻, 헤벨, 등과같이)

그러므로 그들의 삶은 형통으로 이어진 가계가 아니고
신앙의 결단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더욱 확고한 신념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갈렙은 그의 선조 '에서'가 이삭의 예언에 따라
'칼을 의지하며 사는' (창 27:40) 혈통을 이어받아 용감성이 강했으며
이같은 성품은 군사적인 삶에 많이 반영이 되어 유다 지파의 대표로
12명의 정탐꾼중 한 사람으로 가나안땅 정탐에 참예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가 그의 나이 40세로 약속의 땅을 향한 큰 포부를 지니고
헤브론을 정탐 후 희망을 가지고 돌아왔으나,
동료 정탐꾼 10명이 가나안 땅의 진격을 부정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
정탐일 40일이 40년으로 환산된 광야생활을 명령받자 이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결국, 정탐 전 2년 동안 시내산에 머물렀던 시기를 빼면
38년간을 진노 받은 백성들과 더불어
광야에서 연단을 받는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한 마디 불평, 원망도 없이 하나님께 순종하였으며
20세 이상 출애굽한 백성들이 광야에서 다 죽자 광야에서 태어난
2세들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러 여호수아와 함께 진격하였습니다.

7년 전쟁을 통히여 가나안의 주요성읍 31개와 왕을 진멸시킨 후
그의 나이 85세 때에 여호수아에게 나아와 헤브론 산지에 거주하고 있는
거인들인 아낙자손을 물리치기를 요청을 하였습니다 (수 14:6-12).

이에 여호수아는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약속을 허락하였으며
갈렙은 드디어 헤브론을 정복하고 그 곳을 기업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각 지파 별로 배당 받은 지역 안에는
진멸해야 될 소수민족들이 많이 남아 있었으므로 전 지파별 전쟁은
끝났어도 각 지파별 지역전쟁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여호수아가 죽기까지
8년 동안은 제2차 정복전쟁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때 유다 지파도 헤브론 서남쪽 13Km지점에 위치한
드빌을 점령하기 위하여 군대를 동원하여 공격할 시점에, 갈렙은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위하여 제일 먼저 성을 취하는
공로자에게는 포상으로 자신의 딸 악사를 주기로 약속하여
그의 조카 웃니엘이 공을 세움으로 그를 사위로 삼게 되었습니다.  

비록 생명을 걸고 얻은 헤브론 성이었지만 갈렙은 나중에 그 곳을
자기 자손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레위지파의 분깃으로 지정 되었을 때
제사장 몫으로 내어놓았으며 또한, 그 후에 도피성에 대한 여호수아의
제안이 있었을 때 (수 20:1-2) 하나님께 이 성을
바침으로 유다 지파의 도피성이 되었습니다. (수20: 7)

여호수아가 15년 전쟁을 마치고 110세에 죽은 후
얼마 안있어 비슷한 시기에 갈렙도 죽었음으로 가나안
정복전쟁은 더 이상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가나안 족속을
다 좇아 내지 못한 가운데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3. 그의 신앙의 특징

1) 하나님을 온전히 좇는 신앙이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 사람의 생각에 의해서 채워집니다.
생각이 많은 사람은 마음 속도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잘 정돈되어있는 사람은 마음 또한 잘 정돈되어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정돈의 기초는 신앙이며 골격은 말씀일 때에
그의 인생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는 올바른 삶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갈렙을 칭찬하시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던 이유는
그의 믿음도 용기도 훌륭하였으나 그보다도 더욱, 그의 온전한 마음이었습니다.

[민 14:24]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1) 온전히 좇는 마음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 이루어지는 마음입니다.

갈렙이 에돔의 후손인 이방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 된 것은
그의 선조들이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유업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조상 이삭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같은 증명이 어디에서 나타나느냐 하면
바로의 무리가 핍박하였을 때도, 홍해 앞에 다다랐을 때도,
백성이 금 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을 때도,
광야의 38년 연단 생활 속에서도 한번도 흔들리거나
불평을 한 적이 없었던 것으로 증명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갈렙의 마음은 그들과 달라서" 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선을 베푸십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간직할 수 있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베푸신 것임을 깨달았을 때 간직이 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사랑 중심으로
하나님이 당연히 해준 것으로 생각하는 마음에는
은혜가 지속되지 못하고 곧 잊어버리게 되며
당면한 처지에 불만족한 마음인 불평과 원망이 생기게 됩니다.

갈렙은 하나님께서 애굽에게 내리신 열 가지 재앙을 보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체험했고 홍해를 가르시는 권능을 보면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그들의 생명을 구원하셔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온전히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랑하는 마음이 온전한 마음을 갖게 해준 원인이 되었습니다.
우리 생명을 구해주신 예수님을 우리도 진정 사랑한다면
이 마음이 우리도 온전한 마음을 갖게 만들어주는 원인이 될 것입니다.

(2) 온전히 좇는 마음은 믿음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살 때 이루어지는 마음입니다.

12 정탐꾼이 바라본 상황은 똑같았습니다.
그러나 열명은 현상만을 본 반면, 갈렙은 현상을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보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현상을 통하여 깨닫고 감사드린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현실은
세상을 지배하는 세력의 위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됩니다.
결국, 신앙이 세상의 시녀가 되어 환경에 순응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열명의 정탐꾼과 같은 행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갈렙은
"저들은 우리의 밥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들을 두려워 말라." [민14: 9] 라고 말하였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환경은 우리의 밥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믿음이 있으면 담대해집니다.

갈렙의 믿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온 것입니다.
사랑은 믿음을 수반합니다. 믿음이 부족하다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적어서일 것입니다.
갈렙은 이점을 우리에게 보여준 신앙인이었습니다.

2) 하나님의 명령을 용기로 실천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수 14: 10-12]

갈렙은 애굽땅에서 태어나 38년 동안을 노예로 살았고 출애굽 후,
2년 동안 시내산에서 머물다가 40세 때에 정탐꾼으로 선발되어
가나안 땅을 탐지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38년간을 광야에서
생활하였으며 여호수아와 함께 7년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주요 전투를 다 끝냈음에도 이제 85세가 되어
102세가 된 여호수아에게 나아와 아직도 산악지대에
거민들인 아낙자손이 점령하고 있는 헤브론을
공격하기 위하여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나이 많은 노장이면서 가장 물리치기 어려운
거인들을 상대로 먼저 나아가 싸우기를 자청하는 용기는 진실로
남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로를 주는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와 같은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40세 때나 80세 때나 여호와께서 생존케 하여주신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수 14: 10-11]

늙음의 증상은 노쇠, 나약, 안정인데 반해ㅡ갈렙은 강건, 능력,
용기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헤브론 땅을 아직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사는 사람은 자연의 섭리로 주어지는 것을 받는 것보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받는 것을 더욱 귀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은 용기를 가지고 실천할 때에 이루워주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약속이 클수록 이루는데도 많은 용기와 댓가가 지불되어지며, 적은
약속일지라도 끊임없는 노력이 이루어질 때 성취를 할 수가있습니다.
여리고성이 여호수아에게 가장 난관이었다면, 헤브론은
또한 갈렙에게 가장 큰 난관이었을 것입니다.

각자가 주어진 사명과 약속에 따라 용기로 실천 하였음을 봅니다.
사명은 기다림을 수반하는 반면, 실천은 용기를
수반하여야 함을 갈렙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실천할 때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장애를 향하여 오늘 갈렙과 같이
용기로 도전하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3)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드린 섬김의 신앙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것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남에게 주는 것을 싫어합니다.
더욱 자신의 생명을 걸고 얻은 것은 더욱 남에게
넘겨줄 수 없는 자신의 보물일 것입니다.
갈렙은 생명을 걸고 아낙 자손과 싸워 헤브론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레위 자손들이 여호수아에게 자신들의 기업을 요구하자
각 지파의 성읍들을 제비를 뽑아 주도록 하였습니다.

이 때, 유다 지파에는 헤브론이 뽑혔으므로
갈렙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성읍인 헤브론을
레위 자손 그핫 가족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그핫 자손들은 헤브론 성에 거주하면서
성읍 주변 2천 큐핏(약 912m) 내의 목초지를 소유하고
 살았으며 나머지 성읍에 딸린 촌락과 농경지는
여전히 갈렙 자손이 거주하며 살았습니다.

또한,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요단 동편과 서편에
각각 3곳의 도피성을 지정하라 하셨을 때
헤브론을 또한 도피성으로 내어주었습니다. [수 20:7)

이렇게 내어 준 6개의 도피성은 신약 에서의 예표로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구약에서의 영적 의미가 주어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정 삼각형의 구조를 이루고있는 위치는 완전성을 의미하며,
그 성들의 이름의 뜻은 예수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음을 봅니다.


(1) 게데스: ‘거룩한 장소’란 뜻
= 하나님의 성전 되시는 그리스도를 상징 [요 2:19]

(2) 세겜: ‘어깨’ '짊어짐의 뜻 = '정사를 ‘어깨에 맨 한 아들’은
예수님을 상징 [사 9:26]

(3) 헤브론: ‘연합’의 뜻 = 성도를 하나님과 연합시키는
그리스도를 상징 [고후 5:18-19]

(4) 베셀: ‘튼튼한 요새’ 란 뜻= 피난처이자
요새이신 그리스도를 상징 (시 91:2)

(5) 길르앗라못: ‘높은 곳’ 이란 뜻
= 하늘 보좌에 앉아계신 성자 하나님을 상징 (롬 8:34)

(6) 골란: ‘기쁨’의 뜻 = 성도의 참된 기쁨이 되는
그리스도(요 15:11)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메튜 헨리)

구약이 신약으로 연결되어 있듯이 구약의 성도들도
신약의 성도들과 연관이 되어져 있습니다.
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구약의 위대한 신앙인들입니다.
갈렙은 바로 그 신앙인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신약의 진정한 도피성인 예수님을 위하여
구약에 예비된 도피성인 헤브론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가장 소중한 것을 서로 교환할 때 완성됩니다.
사명을 다 이루면 이룬 것은 또 다시 하나님께로 되돌려 드려야 함을
보여준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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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고 기생 라합
/ Rahab

(약 2:25)


1. 인적 사항


라합은 아모리 족속의 이방 여인으로 여리고성에 사는 기생이었습니다.
그녀는 부모와 형제 자매들은 있었으나 남편과 자녀는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의 이름 '라합'은 히브리어의 '폭 넓은'이란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 이름의 의미대로 두 정탐꾼중의 하나인 유다지파 살몬과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았고
그의 후손인 다윗의 고조모가 되었습니다. 또한 '라빈스'는 그녀에게서
8명의 선지자와 제사장이 나왔다고합니다. 이로 인하여 그녀는 메시야의 족보에
오른 네 이방여인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 다말, 라합, 룻, 밧세바 (마1장)

2. 주요 생애


일설에 의하면 그녀는 직물을 염색하는 일로 생계를 이어 가던 여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여리고 성으로 이주하여서는 선술집을 운영하는
기생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교육도, 지위도, 가문도 낮은 신분으로 태어나 자랐음으로
신앙에 대해서는 오직 우상을 섬기어 복 받으려는 이방 종교
아세라(다산의 여신)때문에 기생의 직업을 갖었는 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과정 중에서 선술집의 운영은 많은 이방인들이 드나들며 여러각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로 적합한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자주 들을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 믿음을 생기게 만드시는 일은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이심으로 라합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하여 기적과 이사를
나타내시는 하나님을 점점 참 신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코 잎에 그 민족들이 들이 닥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생사를 선택하여지만 하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민족을 선택하느냐? 믿음을 선택해 구원을 받을 것이냐?ㅡ 두 갈림길에서
그녀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선택하였습니다. 즉, 두 정탐군이 자기 집에
유하였을 때, 그들을 숨겨주고 대신 자신의 가족을 살려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서로의 약속은 이루어져 그 밤에 성벽에서 줄로 달아 내린 붉은 줄이 증표가 되어
이스라엘 민족이 이 성을 쳐들어 오는 날 이 창가에 그대로 드리워 내리도록 한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은 여리고 성에 도착하여
일곱번을 돌고 함성으로 성벽 들을 무너뜨리고 성안에 침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라합의 집은 지켜주셨기 때문에 그녀가 있는 집의 성벽은
안전하게 유지되었고 매달아 놓은 붉은 줄 또한 눈에 뜨이게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이 때 두 정탐군으로 파견되었던 두 사람은 여리고 성을 공격하는 즉시
라합의 집으로 달려가 그녀와 가족들을 모두 구원하였습니다.

결국 구원을 받은 그녀와 가족은 이스라엘 민족에 동화되어 살게 되었으며
그녀의 참된 신앙생활은 두 정탐 중의 한명인 유다지파의
살몬의 마음을 움직여 서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생명을 구원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남편의 축복까지 받은 라합은 자녀인
보아스를 신앙으로 잘 양육하였으며 이는 보아스가 이방여인 룻을 보았을 때,
믿음으로 하나님을 택한 자신의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며느리 룻도 시어머니 라합과 더불어 여호와 신앙을 더욱 돈독히
간직하는 여인이 되어 믿음을 전수한 결과 이 유전은 결국 다윗을
낳은 예수님 족보의 조상이 되는 명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3. 라합의 신앙특징

1) 믿음에는 결단이 따른다는 것을 보여준 여인이었습니다.

여리고 성에는 왕부터 수많은 백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믿지 않았습니다. 용감한 용병들과
철옹성의 성곽은 그들이 충분히 의지하고도 남는 방어력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라합외에는 이성이 모두 허물어지고 함락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또한 정탐군을 숨겨두었다가 발각이 되면
죽음을 면치 못하는 데도 추적자를 따돌리고 두 사람을 살려주었습니다.

여기에 라합의 신앙의 특징이 있음을 봅니다. 모든 사람이
신앙생활을 나를 위하여 합니다. 이 때는 신앙의 중심은 내가 됩니다.
그러나 신앙이 깊어지면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 때는
하나님이 나의 신앙의 중심이 됩니다. 즉 나의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중요하게 여겨짐으로 나에게 불이익이 오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자기의 유익을 포기하는 체험과 용단이 없이는
갖추기 어려운 신앙의 자세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포기 해야만 했던 과거를 지닌 여인이었습니다.

즉, 그녀가 자신을 포기하고 기생이 되었을 때, 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자신의 일생을 기생이란 직업을 선택함으로 포기 해야만 했던 말 못할
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경험이 그녀로 다시 한번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좇는 용단을 내리게 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생명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귀하게 여긴 것같이,
라합도 민족의 운명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귀하게 여긴 것입니다.
자신을 하나님을 위해 포기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인물을 귀하게 쓰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이나,성을 공격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의 여부를 알고 난후
확신을 가지고 진격을 하였었습니다. 이제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정탐군을 보낸 이유는 결정적인 확신의 기회를 갖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라합을 통하여 승리의 확신을 그들에게 들려 주셨습니다.
9절에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 말은 바로 정탐꾼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승전보와 같은 말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을 공격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선택한 라합은
도구로  쓰임받아 이스라엘 군대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역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한 용단은 기적을 수반한다는 그녀의 믿음은 참으로 본받을 믿음입니다.

2) 살몬과 결혼할 정도로 모범적인 신앙인이었습니다.

살몬이 정탐을 마치고 라합고 헤어질 때, 서로의 약속은
첫째, 창문에 자기가 타고 내려온 붉은 줄을 매달아 놓아 다른 집과 구별해 놓는 것이었으며
둘째, 그녀의 가족이 문밖으로 나올 때는 죽임을 당할수 있으니 집안에만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세쩨는 만일에 그 일을 누설할 경우 많은 사람이 붉은 줄을 달아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음으로
비밀을 지켜야함을 서로 약속하였습니다. 여리고 전투가 끝난후 다시 만난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살몬으로 부터 자세히 들었을 것입니다.
그 때, 중요한 사건이 유월절의 사건이며 그 사건이 라합에겐 자신의
유월절 사건으로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붉은 줄이 그 집만 쳐져있고, 집안에만 있다가 즉시 그 곳에서 나와야만
하는 과정은 하나님의 구원시역이 얼마나 비슷하게 적용되었는 지를
깨닫고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그 이후로 기생이란 직업도 정리하고
새로운 선민이 되어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자,
살몬이 감동하여 결혼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장 큰 빚을 탕감받은 자가
가장 크게 사랑하느니라." (눅 7:47)
하신 것과 같이
기생이었던 라합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겼을 것입니다. 이를통해,
신앙에는 용단이 있은 다음에는, 온전한 섬김이 뒤따라야함을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인 중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3) 온전한 신앙교욱을 자녀에게 시킴으로 보아스가 룻을 선택하여
다윗의 가계를 잇도록
자부와 더불어 축복받은 여인입니다.

라합의 첫 아들인 보아스는 자라면서 어머니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의 축복을 수없이 듣고 자라났을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대를 이어 신앙이 전수되어 내려가도록 최선을 다하는 삶일 것입니다.
그 것이 가장 값진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배우고 자란 보아스는 룻을 처음 만났을 때,
"룻의 효성과 고국을 떠나 하나님을 선택하여 이 땅에 온 신앙을 분명히 들었다고" (룻 2:11)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 하실 것과 네게 상 주시기를 원한다"(2:12)
라고 축복을 해 주었습니다. 이는 분명 같은 이방인이었던 어머니 라합의 경우를 회상하면서
동정하는 마음에서 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룻에게도
축복을 허락하시사 보아스로 아내를 삼게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룻과 전 남편 시어머니인 나오미에 관한 것만 나오지만,
내막적으로는 현 남편의 시어머니인 라합과 많은 시간을 대화하며
보냈을 것입니다. 이 때 룻은 시어머니의 신앙적 용단과 하나님의 섬김의
헌신을 더욱 본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여인을 선택하였을 때,
다말과, 밧세바는 남편들인 유다와 다윗을 중심으로 하여 허락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직접 선택한 여인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라합과 룻은 그녀들과는 다릅니다. 남편을 보고 그들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녀들의 믿음을 보고 당사자들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인 우리들도 믿음을 보시고 직접 천국의 기업을
상속받을 대상자로 하나님 께서 선택하실 것입니다.


라합은 신분이 천하고 배우지 못한 이방여인 인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신앙은 율법을 전수 받은 백성보다 더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녀의 신앙의 3요소는 바로, 믿음의 용단, 철저한 순종,
신앙의 전수, 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행함으로 인정받은 믿음입니다.

행함이 부족한 오늘의 우리 신앙에 많은 도전을 주는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만을 가장 소중히 여겨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사는 라합과 같은 신앙인들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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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
(눅 1:35)




1. 인적 사항

‘마리아’‘존귀한 자,’ ‘높여진 자’ 란 뜻이며
모세의 누이 ‘미리암’과 같은 이름입니다.

그녀는 다윗의 직계 후손인 야곱의 딸로 왕가의 후손이었으며 (마 1:16)
태어나서 자라난 곳은 조용한 시골 동네인 나사렛 북쪽 ‘세포리스’였습니다.
같은 사촌 지간인 목수 요셉과 정혼한 사이, 성령으로 잉태하여
예수님의 모친이 되었으며 그 후에 남편 요셉과의 사이에서 네 아들인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과 여러 딸을 두었습니다. (마 13:55-56)

그녀는 아론의 후손인 엘리자벳과 외가 쪽으로 친척 관계였으며 (눅 1:36)
요셉이 결혼 한 지 18-19년 만에 죽음으로 (A.D. 14년경)
30대 후반부터 주님을 의지하고 살게 되었습니다.


2. 주요 생애

마리아가 살았던 나사렛은 작은 산들로 둘러싸인 평온한 분위기의 동네로서
전설에 의하면 그녀가 어린 시절에 그녀의 부모가 마리아를 데리고
성전에 올라간 일이 있었다 합니다. 그녀는 거기서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성결한 삶으로 선택되어진 생활을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그녀의 삶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바 된 대로 (사 7:14)
성령님에 의해 예수님이 수태하게 되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은 마리아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도록 순종하였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잉태한 엘리자벳의 소식을 듣고
그 동네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때까지 마리아는 잉태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으나
성령의 감동으로 태아가 (세례 요한) 복중에서 뛰놀음과
충만함을 입은 엘리자벳은 마리아를 보자 “주의 모친”이라 부르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하며 즉각 알아보았습니다. (눅 1:42-43)

이에 위로를 받은 마리아는 세 달간 그곳에 머무르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감사 찬양하며 믿음으로 돌아와
정혼한 남편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요셉은 마리아의 말은 믿을 수 있었으나
정작 초자연적인 잉태와 나실 메시아의 부모가 된다는 두려움은
감당할 수 없어 조용히 파혼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꿈속에 나타나 현몽하여 줌으로
마리아는 요셉의 아내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 마리아는 남편 요셉과의
사이에서 6-7명의 자녀를 낳게 되었는데 그녀의 이 바쁜 가정생활은
예수님이 특별잉태로 태어난 사실을 많이 잊고 살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12살 되던 해 유월절 행사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
미쳐 파악을 못한 결과 3일만에 주님을 성전에서 발견하고 되찾아오는
경우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도 마리아는 말하기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눅 2:49)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께서 대답 하시기를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매 주님의 신분을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후부터 마리아의 갈등은 더욱 깊어져 예수님과 동생들간의
관계를 명백히 구분 지어주지 못하고 자신만 알고 지낸 결과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까지 주의 동생들은
형을 구세주로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마리아의 어려움을 알고 계신 주님은 자신이 죽고 나면
불신자 동생들과 마리아가 갈등 속에서 살기 보다 자신의 특별 제자요,
이종사촌 동생인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의 봉양을 부탁한 것입니다. (요 19:27)

그로부터 마리아는 요한의 집에 머물게 되었으며 11년 후에 (59세)
요한이 에베소로 옮겨가 사역하자 함께 그곳으로 이주하여
오랫동안 봉양을 받은 뒤 늙은 나이에 죽었다고 합니다.


3. 신앙생활의 특징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인간 구원의 진행에는 전능하심의 기적이
단계적으로 진행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하실 것을 미리 알고 계셨으며 이에 대한 최종구원계획으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성육신’ 하여야 할 것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렇기 위하여는 ‘창조주’가 ‘창조물질 인 흙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과
‘남자가 지니고 있는 욕망을 지니지 않고 성부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야 한다’는
두 가지 필요 충분 조건을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이에 인간창조 진행을, 흙으로부터 취한 육신인 인간과, 하나님의 영을 받아
살아있는 생령의 물질된 아담으로부터 취한 하와와, 성부 하나님의
속성을 지닌 예수님을 여자 에게서 성령의 잉태를 통하여 낳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로 주님은 ‘남성 으로서의 속성’은 신성인 성부 하나님을 닮게 되었고
‘인간 육신으로서의 속성’ 성결한 마리아를 닮고 태어나게 되신 것입니다.


1) 마리아는 인간으로서는 유일하게
동정녀로서 수태를 체험한 여인이었습니다. (눅1: 35)

어느 날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대는 지극히 은혜를 받은 자” 라는 설명과 함께
성령으로 아기를 잉태할 것이란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 일이 자신에게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 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구약의 예언인 ‘메시아’
처녀에게서 나실 것이란 말씀을 알고 있었고,(사7: 14) 가브리엘 천사가 일러준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하는 말을 믿음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세키나=성막에 임하셨던 하나님).

성령님의 임하심은 성결과 거룩을 의미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이 덮으신다는 것은 직접 신적인 기적을
일으키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자신이 잉태 한다는 인간적인 개념보다는
자신의 몸 안에 하나님의 새 생명 창조의 기적이 생길 것이란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몸이 성육신 하시는 예수님의 도구로
쓰여진다는 것을 깨달은 마리아는 고백하기를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하며 순종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인간의 생리작용의 과정을 밟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죽은 자를 살리실 때나 암환자를 고치실 때
심장의 기능이 회복되고 근육이 회복되는 절차를 취하거나,

힌피톨에 백혈구가 갑자기 많아져서 암세포를 잡아먹음으로
생리적 현상을 통하여, 살아나거나, 치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지나감으로 생기고 없어지고 하는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즉, 육신의 기능인 난자를 통하여 잉태되는 과정이 아니라
마리아 몸 자궁 안에 신적인 생명이 직접 창조된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성령으로 깨끗해진 마리아의 육신을 지니게 되셨고, 속성은 인간의 속성이 아닌
하나님의 속성을 지닌 완전한 인간으로 성육신 하게 되신 것입니다.

많은 이단들이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셨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도 지녔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는 성육신의 탄생 과정을 잘못 인간적인
방법의 적용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 자신도
자신의 몸을 죄 된 몸인 ‘사르크스’라 하지 않고 죄 없는 깨끗한
몸인 ‘소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고전 11:24-29) 마리아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르게 받아들인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2) 마리아는 목자들과 동방 박사들이 전한 구주에 대한 소식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산 여인이었습니다. (눅 2:19)

마이라는 자신의 해산을 자기 집, 자기 동네 나사렛에서 일어날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마리아를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인도하심으로
그리스도가 이미 예언된 데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미가 5:2)
이는 갑자기 호적을 올리라는 명령에 따른 것으로 만삭이 된 마리아는
나흘 이상이나 걸리는 길을 남편을 따라 가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베들레헴에 숙박할 처소가 없었고 더더군다나 마구간에서
혼자 출산을 하여야 하는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데 있습니다.
경험도 산파도 없는 가운데 혼자 출산을 해야 한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여인의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더군다나 해산에 대한 아무준비도 없는 상태였습니다.마리아는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했고 태어난 아기는 모두에게 버림받은 느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마구간 구유 속)  이 때 그 지경에 목자들이 천사들의 방문을 받고
그리스도가 탄생하여 구유에 누워계심을 알게되었고
하늘의 천군 천사가 기뻐 찬송하는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목자들이 서둘러 찾아와 이 아기에 대한 천사의 계시와
하늘에서의 영광을 다 전해주었습니다. (눅 2:17) 이에 마리아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받게 되었고, 또한 자신의 잉태 경험도 함께 나눔으로 평안을 찿게 되었습니다.

수일이 지나, 집으로 옮겨가 산후 조리를 하는 가운데 동방에서
온 박사들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에게 경배하고
지참한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마 2:11)
이를 통해 마리아와 요셉은 이 모든 일어나고 진행된 일들이
하나님의 역사하심 이었음을 확실히 체험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즉, 하늘에서의 큰 일은, 지상에서는 보잘것없어도 예비된 곳에서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영광은, 보잘것없는 인간이지만 참순종으로 행하는자로 부터 받으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3) 마리아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자신의 동정녀 시절,
성결한 처녀적 신앙생활로 돌아가 평생을 거룩하게 산 여인이 되었습니다.

마리아가 결례의 날이 차 예루살렘 성전에 아기예수를 위하여 제사하러
올라갔을 때 ‘시므온’ 이란 경건한 사람이 주님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마리아를 보고 예언하기를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눅 2:35) 하였습니다.

마침내 그 날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현장에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 모인 어느 누구도 마리아 처럼
칼 맞은 마음을 지닌 아픔을 겪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 것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인 것입니다.

주님의 손과 발이 못에 박히시고 흘리시는 피는 바로 자신의 고통과
흘리는 피의 아픔의 실감을 갖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비명을 질렀다든지 옷을 찢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는
행위는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눈물을 흘리며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는 마리아가 예수님은 구주이심을 확신했고, 다른 누구보다도 주님이 말씀하신 부활을 믿고 있었기때문이었 습니다. 즉, 그 믿음과 기대가 그녀를 침착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이때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
이 말씀은 마리아로 하여금 자신이 주님을 잉태할 당시
성결한 여인의 신앙을 회복하게 하여 주었습니다.

즉, 자신이 낳은 자녀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여기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주님의 이종사촌이자 제자였습니다.
불신앙의 자녀들과 함께 지내기보다 참 신앙의 제자인
아들과 지내는 것이 그녀에게는 신앙안 에서의 평안이었습니다.

평안은 세상에 있는 것들에 연연하는 마음을 정리할 때 생기게 됩니다.
그 즉시 사도 요한은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고 봉양하였습니다.
주님의 사역을 하는 현장에 마리아는 늘 함께 있게 된 것입니다.

11년 동안을 예루살렘에서 지내고 그 이후, 사도 요한이 에베소로
사역을 옮겨 일할 때 함께 모시고 가서 요한의 사역을 다 보고
장수하며 살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노년에 그녀에 대한 언급은 성경에서는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돌아가실 때 그녀의 나이를 50세로 보면
자신이 죽을 때까지 20-30년을 마리아는 주님의 참된 어머니로서의
은혜 입은 여인으로 돌아가 거룩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성령의 잉태하심으로 시작한 마리아의 인생은
예수님의 부활로 마감하는 육신의 삶을 가졌습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침착한 모습을 다시 회복하여 고백하기를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했던
순종의 모습으로 끝까지 살았을 것입니다.
마리아, 그녀는 인간이면서 가장 많은
하늘의 영광을 차지한 여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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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29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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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29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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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와 결혼한 요셉
/ Joseph
(마1:18-19)



1. 인적 사항


요셉은 '하나님께서 더하신다"는 뜻으로 그의 혈통은 다윗의 후손입니다.
요셉의 조부는 '맛단'이며 후손으로 두 아들인 야곱과 헬리를 낳았으며,
야곱은 와딸 마리아를, 헬리는 요셉을 각각 낳았는데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함으로 야곱의 법적인 아들이 되었습니다. (호크마 마 1:16)

그는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함으로
예수님의 법적인 부친이 되었으며 직업은 목수였습니다.
예수님 탄생 이 후, 마리아와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통하여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등 네 아들과 여러 딸을 낳았습니다. (마 13:55-56)

그는 베들레헴 출신으로 나사렛 동네에서 살았으며 중년나이에 일찍
죽었음으로 (A.D,14 년경) 주님께서 목수일을 하시며 가족을 부양하였습니다.


2. 주요 생애


요셉은 젊어서 마리아와 부친들의 동의에 의해 결혼하기로
약속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혼과정으로 먼저 약혼이 있었으며
이는 흔히 어릴때 이루워졌습니다. 그 이후 결혼 적령기가 되면 정혼을 하게됩니다.

이 기간은 1년동안 지속이 되며 대외적으로는
남편과 아내로 알리워지지만 동거는 하지 않는 상태로 지내다가
정혼기간이 끝나면 정식으로 결혼을 하게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할 시기는 바로 요셉과 정혼한 기간이었음으로
요셉으로는 괴로운 나머지 이 사실을 조용히 수습하고자
이혼장을 써주므로 마리아의 실책을 가리워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꿈 속에서 천사를 통해 크신 섭리를 계시하여 주심으로
마리아를 아내로 데려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였을 때, 헤롯왕의 시기로 아기를 죽이려하자
꿈에 주의 사자가 나타나 헤롯의 음모를 알려주면서
애굽으로 피신하도록 하였숩니다. (마 2:13)

이에 대해 예수의 어린 시절을 기록한 외경 "예수 유년기의 복음" 에는
약 3년간 애굽에서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 당시 유대인 탈무드에 따르면 애굽에는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유대 회당이 있었고 함께 모여 생활하는 가운데
 요셉 가족도 도움을 받아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 헤롯이 70세의 나이에 괴질에 걸려 죽게 되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현몽하여 가로되 '돌아가라'함으로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와 '나사렛'이란 동네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라나서 12살이 되었을 때, 해마다 행하는 유월절 행사에 참여코자
요셉은 예루살렘으로 가족을 동반하고 주변 이웃사람들과  더불어 올라갔습니다.

예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 하룻길이 지난 다음에야 무리 중에 주님이 없는 것을 보고
 다시 하룻길을 걸려 돌아가 성전을 두루 두루 살펴 주님을 찾았습니다.

드디어 3일 만에 성전 안 뜰에서 율법을 강론하고 있는 저명한 율법학자들인
 '힐렉', "샴마이", "가말리엘",
등과 율법을 토론 할 시 선지자들이 계시한
난제들은 해석하여 주시고 또한, 천문학, 의학, 물리학, 철학등도 논의하며
삼일을 보내시면서 모두에게 놀라움을 주고 계신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몹시 당황하고 놀란 요셉과 마리아는 어찌 여기 있었는지 나무랐지만
주께서 말하기를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였나이까?"
하신 말씀에서 예수님의 신분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탄생 이 후, 요셉은 마리아와의 결혼생활에서 6-7명의 자녀를 낳아
부양하는 가장으로 살다가 예수님께서 성년이 되셨을 즈음에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동안 주님께 목수일을 잘 가르쳐 주었음으로
주님이 요셉의 가업인 목수직을 이어받아 동생들과
어머니를 봉양하며 지내었습니다.


3. 요셉의 신앙인물의 특징

1) 요셉은 의로움을 갖춘 신앙인이었습니다. (마 1:19)

"의롭다''디카이오스'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정직하고 곧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요셉의 외로움에는 하나님의 구약의 율법외에
신약의 사랑과 은혜가 합하여진 온전한 의로움이었음을 봅니다.

대개 법을 고수하면 사랑과 용서가 부족하고 사랑과 용서가 많으면
법의 고수가 지켜지지 못할 때가 많으나, 요셉은 이 두기지를 모두
겸비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어느날 요셉은 정혼한 아내로부터 자신이
 임신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때 요셉은 마리아의 순결에
대하여는 믿고 이해를 할 수 있었지만 잉태되어진 과정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한 아내,' 그렇다면 조용히
성령님께로 보내어 주는 것이 바람직 하다고 여기고,
이혼장을 써줌으로 자신과의 관계를 정리하려 하였습니다.

그의 이와같은 태도에서 우리는
첫째, 감정을 신앙으로 다룰 줄 아는 사람임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정혼녀의 배신감에 따른 남자로서의 질투와 복수심을 잘 갈무리하여
불행을 만들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고,

두번째는, 이 사실을 율법으로 처리하는 대신 사랑으로 마무리 하려했던
이혼의 문제입니다. 즉, 그 이혼이 그녀의 최대의 행복을 보장해주는
선처의 방법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째는, 성령에 대한 그의 인식이 두려움을 나타내는 행동으로 표현되어진
이성과 지식의 한계를 넘어선 그의 태도에 있습니다.
만일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 사실이라면 요셉은 자기 아내의
거룩함과 잉태된 아기의 성스러움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엄두가 나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괴로워 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기적을 대하는 태도에는 선입관이 매우 크게 작용합니다.
지성적 선입관을 가지고 있을 땐, 현상과 이해 범주의 제한된 차원 안에서만
신앙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신앙이 인격하에 통제되는 경우입니다.

또 한 가지는 신앙적 선입관을 기지고 있는 경우입니다. 이는 인간의 체험의
 차원을 넘어선 말씀의 세계의 차원을 이해의 근거로 삼고 있기 때문에
신앙이 인격을 이해 시킬 수 있는 경우입니다.
(예: 의로운 자, 노아는 산에 방주를 지었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렸습니다.)

요셉이 당면한 '정혼녀 성령의 잉태사건'은 보통 신앙인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의 의로운 자세인 율법과
이해와 사랑의 조화된 신앙은 하나님의 섭리를 잘 받아들이는
승리의 신앙자세임을 볼 수 있습니다.

2) 요셉은 순종함을 갖춘 신앙인이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주님의 관계에서 네번의 천사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첫번째는 마리아 성령잉태사건에 대한 설명의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입니다.
요셉은 그로부터 이 일이 이미 구약에서 예언 되어진 구세주의 탄생임을 믿게되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v23)

이 말씀은 요셉에게 이사야서 7:14절에 이미 예언되어진 말씀임을 깨닫게
해주었을 것입니다. 예언의 실현은 확신을 갖게 만들어줍니다.
 확신은 즉시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게 해줍니다.
요셉은 즉시 마리아를 데려왔습니다. (v 24)

두번째는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했을 때 주의 사자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애굽으로 피하라고 알려주었습니다. (2:!3)

잉태와 출산의 임무는 마리아에게 주어졌으나 보호와 돌봄은 요셉에게 주어진
임무였습니다. 이제 요셉은 이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인도를 받는 자가 책임자입니다. 순종은 계속 인도를 받게 만드는
겸손의 자세입니다. 그는 즉시 밤에 일어나 떠났습니다.

완전한 순종없이 인도는 받지 못합니다. 그의 완전한 순종은
 세번째 주의 사자의 방문을 받습니다. (2:19-20)

헤롯이 죽었으니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는 계시힙니다.
그러나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하는 그에게 다시 한번 꿈에 나타난 주의 사자는
요셉에게 갈릴리 지방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도록 지시를 하였습니다.
요셉의 일생을 통하여 특히 배울 점은 바로 이같은 순종입니다.
 
그는 자신의 벌어진 기막힌 일에 대하여 한번도 하나님께 불평 원망
의심을 하지 않았습니다. 즉 이의가 없는 것이 순종입니다.
 이의가 있으면서 따르는 것은 굴종입니다.
우리는 대개 굴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진실로 순종한 사람입니다.

3) 요셉은 성숙함을 갖춘 신앙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은혜의 체험을 여러번 베푸십니다.
응답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전능하신 삶의 주관자이심을 믿습니다.
그러나 체험을 아무리 많이 하였어도 신앙의 성숙함이 없으면 어린아이와 같아
환경이 어려우면 곧 의심과 불평으로 믿음에서 떠나버리곤 합니다.
(예: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

그러나 신앙이 성숙하면 체험후엔 반드시 더 깊은 믿음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됨으로 환경도 상황도 초월하는
신앙인이 되게됩니다. (예: 풀무불 속의 다니엘의 세 친구)

요셉은 주의 사자의 첫번째 방문과 계시를 받고는 그의 신앙은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즉, 천사가 요셉을 부른
 "다윗의 자손 요셉아" 라는 말에서 입니다.

이 말은 요셉에게 "너는 다윗의 혈통이며 메시야 또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지 않겠느냐
'란 확신을 갖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성숙함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자신의 존재를
인식함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요셉은 더 이상의 의심과 지체함 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환경이 어려울 수록 하나님의 예정 안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재확인 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자신의 인식이 사명을 확고히 갖게 만들어주고, 사명의 확고함이 섬김의
자세를 만들어 온전히 섬김이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갖추게 만듭니다.
요셉은 구약의 율법도 신양의 은혜도 두루 갖춘 주님의
부모로서의 성숙함을 갖춘 신앙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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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의 모범을 보인 여인
/ 한나(Hannah)
 (삼상 1:11)

1. 인적 사항

'한나'라는 이름의 의미는 '요염', '총애'라는 뜻이고 신앙적 의미로는
 '은혜'
임을 말합니다. 그녀가 오랫동안 자녀를 생산치 못하자 남편 '엘가나'
후처인 '브닌나'를 얻어 자녀를 생산하였습니다. 이는 한나에겐 많은 심적인
고통이 되었으며 하나님께 더욱 간절히 기도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결국 사무엘을 얻음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대 선지자의 어미가 되었으며
서원기도에 따라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므로 그 후 3남 2녀의 자녀의 축복을
 풍성히 받아누린 말할 수 없는 행복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2. 주요 생애

한나가 엘가나와 결혼한 후 자녀를 잉태하지 못하였음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v 5)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특별한 섭리가 있으실 때는 택하신
인물에 대한 탄생에 결부된 여인들의 삶에 어려운 심적 고통을 허락하십니다.

이는 믿음의 영적 성숙이 태아의 출생과 양육에 커다란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ㅡ예를들어 사라, 라헬, 신약의 엘리자벳 등은 이삭과 요셉, 세례요한 등
특별 사역을 준비시키시기 위한 신앙 연단과정을 겪은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엘리 제사장이 지도하고 있던 사사시대 말기에는 이스라엘이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심각한 타락의 위기에 놓여있었고
잦은 블레셋의 침공과 지배로 (B.C. 1120-1080) 항상
위기적인 분위기 속에서 지내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한나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강력한 영적 지도자
사무엘을 탄생시키기 위하여 서원 기도를 하게 하셨습니다.

한나는 서원에 따라 사무엘을 3년간 양육 후 평생을 하나님을 섬기도록
엘리 제사장에게 양도하였습니다. 이를 기쁘게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그 후에 한나의 태를 열어 3남 2녀의 풍성한 자녀를 주셨음으로
남편 엘가나와 더불어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더우기 놀라우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여 감사의 찬양시를 지었으며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쓰여진 찬양시 가운데는 장차 의로 통치하실 왕의 출현을
예언하는 기름부음받은 메세야에 대한 언급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삼상 2:10)

3. 한나 신앙의 특징

한나는 엘가나의 정실부인이었으며 레위인 집안의 전통에 따라 자녀를 잘 양육할 수
있는 신앙의 인품을 가진 여인이었이었으나 정작 소중한 자녀는 없었습니다

한편 브닌나는 첩으로 욕심과 시기가 많은 여인으로
신앙과는 거리가 먼 여인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자녀가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한 집안에서 살았습니다. 괴로움은 없는데서 요인되기보다는
자극 받는데서 불거지게 됩니다. 무자와 멸시를 첩으로부터 받는 수모는
여인들의 불행 중 가장 큰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자신의 불행을 영적으로 해결한 여인이었습니다.

1) 한나는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심령의 기도를 통하여 풀었습니다.

기도는 흔히 영혼의 대화라고 말합니다. 즉, 표현으로 이루어지는 교류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한나의 기도의 특징은 아무 말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줄로 생각한지라" (1:13)

한나도 처음엔 자신의 원통하므로 인하여 울며 브르짖었습니다.
(v 10) 그러다가 결국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서원기도는 모든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호소의 기도입니다.
 
사람들은 기도를 할 때 의지에 의한 기도를 많이합니다.
설명, 원인, 이유, 목적, 요구, 해결 등... 이 상태가 한참
진행되면 감정이 유입된 기도가 나오게 됩니다.

의문, 강청, 포기, 조건, 원망, 의심 등 그래도 응답이 없게되면 체념
또는 단념하게 됩니다. 이 때 감성의 영향이 강하면 단념하게
되고 이성의 영향이 강하면 체념이 되게됩니다.

그런데 영성의 영향이 강하면 묵념의 상태로 있게됩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 8:27)
즉, 심령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 속을 모두 감찰하시어
알고 계심으로 오직 내 심령 안에서 성령님이 나의 의견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여 주신다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한 일을 예비하셨을 때는 이 같은 심령의
기도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한나는 금식기도, 부르짖는 기도,
통곡의 기도를 지나 심령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 때 느끼는 것이 평안함임을 보여줍니다.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1:18)
응답 전에 인식이, 인식 후에, 평안함이 오면 이어서
응답이 주어짐을 볼 수 있습니다.

2) 한나는 서원의 문제를 즉시 이행함으로 더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레위인의 아들이 태어나면 성소에서 의무적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그 때의 나이가 25세에서 50세까지입니다. 그런데 한나는 두 가지를 서원에
포함시켰습니다. - 아이를 평생 하나님의 집에서 봉사하도록 하겠다는 것과
-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음으로 나실인이 되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v 11)

이 서원은 즉시 응답되어 사무엘을 얻게되었습니다. 이 때 한나의 나이는
젊은 여인의 나이였습니다. 사라 같으면 죽은 몸에서 태어났으니
하나님의 응답으로 여길 수 있지만, 한나는 젊은 여인임으로
잠시 늦었을 뿐이지 정상적인 임신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서원의 어려움이란 수행을 막는 합리적인 현실이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좀 더 자란 후에 보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보내고 나면 다시 쓸쓸한 처지가 될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나는 젖을 떼자 3년 된 아이를 엘리 제사장에
완전히 맡기고 더 이상 개인 감정으로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이 같은 한나의 신앙에는 모든 소유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하나님 주인 의식 신앙'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관계는 언제나 받기만 하는 피조물은
받은 것을 하나님께 되돌려 주는 것 뿐이지 받지않은 내 것은
없다는 빈 마음의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아이를 맡기셨다가 약속대로
하나님께서 되찾아가신 것입니다. 여기에 한나의 믿음에 위대함을 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주어진 자유의지를 온전히 하나님 안에서
내려놓은 상태의 믿음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3남 2녀의 더 큰 자녀의
축복을 받게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을 일찌기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릴 때
보았습니다. 자유의지를 가졌지만 선택이 필요없는 의지는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만 온전한 의지가 됨을 보여주는 예들입니다.

3) 한나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하나님 찬양의 시를 썼습니다. (2:1-10)

성령의 감동으로 지어진 시는 그 시가 자기본위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한나의 시의 특징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과 미래에 대한 예언이 포함되어져
있다는것입니다.  그녀가 성령의 감동을 받은 것의 분명한 증거가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로 지칭한 최초의 여인이었기 떄문입니다.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이
여종을 돌아보시고......" (1:11)
그녀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감사 찬양의 시를 네 가지로
하나님의 영광의 특성을 나타내었습니다.

(1)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1절)
소극적인 면에서는 자신의 어려운 상태에서 구원하여 주심에 기쁨으로 감사드리나,
거시적인 면에서는 사무엘을 통한 영적, 도덕적 타락에서 백성을 구원하는 여호와의 사랑

(2) 여호와의 거룩을 찬양하였습니다. (2-3절)
하나님께서는 절대적 성결성과 도덕적 완전성을 지니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인간의 모든 죄악을 감찰하시며 선악간에 공의로 판단하시는 거룩한 분이십니다.

(3) 하나님께서는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4-8절)
감옥과 궁전, 도망자와 왕, 전쟁과 평화 모두 한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인생의 바닥과 천장입니다. 요셉, 다윗, 여호수아 등은 이 같은
극한 상황들을 겪은 사람들입니다. 마찬가지로 한나도 작지만 자신의
인생의 반대측면을 겪은 여인임으로 하나님을 높히며 찬양했습니다.

(4) 하나님은 선악간에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10절)
여호와를 대적하는 무리들은 심판하시되 기름부음을 받은자로
행하신다는 것은 장차 후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주가 되시어
하나님께서 정하신 심판의 날에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이 한나의 시는 훗날 예배 모임시에 낭독이 되었다고 합니다. (시 113:7-9)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섭리를 통하여 한 인간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으십니다.

한나는 멸시를 받던 상태에서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사무엘 선지자의
어머니가 되는 영광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가장 많이 이해한 여인 중 한 사람이 된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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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의 선지자 아모스/ Amos
(암 5:24)

1. 인적 사항

'아모스'라는 이름의 의미는 '짐을 진 자 또는 짐꾼'이라는 뜻으로 선지자
이사야의 아버지 '아모스(강한 자)'와는 음역은 같지만 원어는 전혀다릅니다.
그는 유다 베들레헴 남방 약 10Km 떨어져있는 고을 '드고아' 출신으로
빈농의 가난한 목자였으며 생계를 위하여 뽕나무를 경작하였습니다. (7:14)

그는 선지자도 아니었고 제사장 가문도아닌 무명의 목자이자 농부였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남쪽 유다출신이 었지만, 북 이스라엘을 위하여
예언사역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사역이 하나님의 인자하심보다
공의와 심판을 통한 엄격성을 띄우고 있는 것은
그의 훈련받은 삶에의 한 성격때문으로 보입니다.

드고아는 광야와의 접견지경이며 주변에는 거칠고 메마른 산들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주식은 가나안 땅에서 산출되는 모든 과일가운데 질이 가장 낮고
식물로는 부적당한 가운데 하나인 무화과 열매였습니다.

  '광야의 외치는 소리'사역을한 세례요한과 비슷한 광야의 강인한 성격을 지녔음으로
타국까지 가서 위험을 무릎쓰고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2. 그의 생애

아모스는 호세아보다는 조금 앞섰으나 그와 동시대의 인물이었으며,
요엘 선지자보다는 나이가 어려서 자신의 글을 쓰기전에 요엘의 글을
많이 읽고 자신의 글에도 인용을 할 정도로영향을 받았습니다. (1:2. 9:13)

그는 여로보암 2세가 왕위에 올라 41년간 통치한 세월의 2/3 기간을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이 시기는 유다왕 아마샤 통치 14년과 그의 아들
웃시야 통치 27년에 해당하는 시기로 B.C.780년 경부터 27년동안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직접적인 예언과 활동은 B.C. 760-755년 사이로 보입니다.

이 시대의 특징은 북 이스라엘이 최대 번성기를 누리는 시기로, 그동안 북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아람 왕 벤하닷 3세가 앗수르 에 의해 패배하여 자체 회복에만 힘쓰게되자
여로보암 2세는 용기있는 의욕적인 왕으로 이 틈을 타 다메섹을 점령하고
영토를 확장하여 '하맛'에 이르기까지 세력을 넓혔습니다. (왕하14:28)

이로인하여 이스라엘은 경제, 사회. 문화등이 부흥하였으며 백성들은
번영에 만족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종교적, 도덕적 부패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겨울궁과 여름궁이 있었고 상아궁도 있을정도로 계절마다
집을바꿔 살며 호의호식 하는삶을 살았읍니다.

이 때에 하나님은 아모스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도록 북 이스라엘에게 경고하게 하셨습니다. 이에 아모스는
세가지 환상을 통해 여호와의 진노를 그들에게 전하였습니다.

1) 메뚜기의 환상 (7:1-3)

이는 풀이 움을 돋우려고할 때, 황충떼가 몰려와 모든 풀을 다 먹어 치우는 환상으로
장차 임하게될 외세의 침략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초토화 될 것을 예언한 것이며

2) 불의 환상은 (7:4-6) 바다와 육지를 다 삼키는 공포

이는 불이, 주로 '가뭄'의 현상을 비유로 나타낸 것으로 온 땅이
가뭄의 재해를 만나 흉년과 기근이 퍼짐을 예언한 것이고

3) 다림줄 환상 (7:7-9)

여로보암왕 가문을 칼로치고 멸망시킬 것이며 , 이미 다림줄로 재었은즉
온 성과 산당을 허물어 버리리라는 심판의 경고였읍니다.
이 경고는 당시 벧엘에 금송아지를 모시고있는 제사장 아마샤의 마음을
 두려움과 격동을 일으키게 만들었고 그는 즉시 왕에게 아모스가 모반을
일으키고 있다고 모함하여 그를 처벌하게 만드는 한편 아모스에게 말하기를

'너는 유다땅으로 도망하여가서 거기서 예언하고

다시는 밷엘에서 예언하지 말라.'라고 위협하였습니다.

거짓 선지자, 삯군 목자의 대표적인 특징은 자기구역, 자기위치, 고수에 있는 것을 봅니다.
이에 아모스는 대답하기를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본토에서 떠나리라." (7:17) 하였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아모스는유다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이스라엘은
아모스의 예언 후 60년이지나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3. 신앙의 특징

1) 자연속에 하나님의 섭리를 신앙의 중심으로 삼은 선지자였습니다.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5:24)
'미쉬파트'로 표현되는 '공법'은, 삶에 적용되는 윤리적인 율법이며,
정의는 '체다카'라는 말로 생활에 율법의 적용으로 나타나는 바른 결과를 의미합니다.

공법이 물같다는 말은 드고아 옆에 있는 커다란 사해바다가 은빛으로 넘실거리는
풍요함을 인용한 것이요, "정의가 하수같이 흐른다"란 생명의 강물이
메마른 곳곳에 흘러 내림으로 모든 만물이 생기를 얻어 소성하는
자연의 모습을 그리며 인용한 말입니다.

목자이며 농부였던 그는 하나님의 성품을 자연의 법칙에서 많이배웠읍니다.
그러나 나누어 주어야 할 물이 흐르지 않고 고여있거나 흘러도
한 곳으로만 적셔지곤 한다면 하나님은 비 바람 폭풍우를 내리셔서
고정된 한계를 깨뜨려 버리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율법이라는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있었읍니다. 또한 선민이라는 모범, 우월의식이 있었읍니다.

그런데 율법은 시행되지않아 사해 같이 썪었고 모범 의식은 세상 풍속을 좇아
타락하였음으로 이방 민족같이 되버렸읍니다. 이제 남은건 천둥, 번개, 세찬
비바람만 남았읍니다. '이 심판을 두려워해야한다' 고 아모스는 경고하고 있읍니다.

신앙생활에 넘치는 물질이 썩고있거나 세상적인 삶의 교제와 유익을 위하여
교회를 다니는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됨을 깨우쳐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2) 하나님의 일은 사역이지만, 인간의 일은 지역임을 분명히 구분하는 신앙인이었읍니다.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서나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 하지말라 하매
네 땅은
줄 띄워 나누일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본토에서 떠나리라 하셨느니라. "(7:12-17)

삯군 목자는 떡이 나오는 데서만 일을 합니다. 그러나 참된 선지자는
자기가 필요되어진 곳에서 사역을 합니다. 이 때문에 권력에 아첨하는
사역자들은 대중의 기호쪽에 맞게 행사에 관심이 많은 반면, 사명자들은
기도와 말씀을 전하는데 성실함니다. 권세는 사역을 탄압합니다.

어두움의 세력이 빛의 자녀를 미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 세력은
세상 사람보다 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보다는 약합니다.
말씀의 대언은 말씀의 주인이 보장합니다.
말씀의 주인은 세상세력을 심판하는 권능의 세력입니다.

이 것을 알고 지닌 사람은 세상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종교가 세상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종교 대상의 부재때문입니다.
이 때 서로의 공존을 위하여 세상과도, 다른 종교와도 모두 짝하게 됩니다.
마땅히 섬겨야할 대상의 부재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모스는 세상권세 권력인에게 담대히 선포합니다.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더러운 땅은 타락과 죄로 뒤덮힌 세상입니다. 하늘에서 살 사람은
땅에 머무는 것에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이 것이 아모스의 참된 신앙입니다.

3) 진정으로 무서운 기근은 영적 기근임을 잘 알고 있는 신앙인 이었습니다.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못한 기갈이라."(8:11)

 기갈은 생명이 느끼는 고통입니다. 육신이 죽으면 고통도 없습니다.
 즉, 영이 죽은 자는 말씀의 기갈도 없습니다.

바로 세상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영혼이 산자는 가장
큰 기갈이 영적 기갈임을 압니다. 사울왕도 사무엘 선지자를
그 토록 찾았으며, 밧세바를 범한 다윗왕도 성신을 자기한테서
거두지 말기를 괴로움 속에서 간절히 간구하였습니다.  

그런데 한편, 영적 기갈이 있는 가운데 가장 번식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거짓교리와 이론입니다. '영적기갈을 혼적인 풍요로 채우려는 시도'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부인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구하지 않습니다. 비과학적이며
비상식적인 것을 배제합니다. 지식과 과학에 의존합니다. 철학과 명상에 의존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인간이 되어버립니다. 주님은 언제나 가장 높임을 받으시다가는
가장 하찮은 존재로 전락되십니다. 바로 영혼이 죽어가는 자들에 의해서입니다.

이 때가 바로 신앙을 착각속에서 살 때입니다. 착각의 결과는 실패입니다.
신앙의 실패는 멸망입니다. 구원을 착각으로 여기고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시십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아모스 선지자는 우리들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영적인 기갈을 느끼지 못하고
신앙생활하고 있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풍성히 먹어 '영의 탈진에서 벗어나라'고 경각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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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05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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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생명을 연장 받은
/ 히스기야 (Hezekiah)

(왕하 20:6)



1. 인적 사항

히스기야란 이름은 '여호와는 나의 힘'이란 뜻입니다 그는 유다의 '아하스'왕과
스가리야의 딸 '아비야'사이에서 태어났으며 25세때 유다의 13대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그후 29년 동안을 통치하면서 종교개혁을 일으켜 신앙을 회복시킨, 여호와께
칭찬받는 왕이었으며 39세때 자녀없이 죽을 병에 걸렸을 때, 벽을 보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결과 하나님께서 그의 공적을 돌아보시고
15년의 생명을 연장시켜주셨을 뿐만아니라 므낫세란 아들을 낳게하시어
대를 이어주셨음으로 54세때에 12살된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죽었습니다.

2. 주요 생애

히스기야가 왕으로 즉위하던 B.C. 728년에는 부친인'아하스'의 우상숭배로인한
온 백성들의 종교적 타락과 대외적으로는 앗수르의 위협에 눌려 조공을 바치며
속국의 신세로 지내던 시절이었습니다. 이에 그는 왕이 된 즉시 종교개혁을 단행하여
우상들을 철폐하였는데 특히 산당, 주상, 아세라목상, 놋뱀 이 네 가지를 척결하였습니다.

이 가운데서도 산당은  솔로몬 시대이후로 계속 존속되어오면서 종교혼합 현상과 우상숭배의
위험을 지니고 있는곳 이었음으로 성전을 중심으로 신앙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그들 모두를
폐쇄시킨 일은 여호아의 인정을 받게 되었으며 이로인하여 그는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 하시며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습니다.'(18:7)

이어서 그는 부친 아하스가 블레셋의 공격을 받아 빼앗겼던 성을 모두 탈환하였으며
이는 종교적 부패를 일소하자 하나님께서 내리신 승리의 축복을 받게 된 것으로
이사야 14:28-31에 예언 되었던 일 이기도합니다.

그러나 앗수르왕을 배척함으로 인한 산헤립의 분노로 1.2차의 침공을 받게 되었으며
이 때, 이 침공을 대비해 예루살렘 성 밑으로 수로를 뚫어 성밖의 기혼 샘으로부터
성안의 저수시설인 실로암 못까지 물을 끌어드리는 큰 기적의 공사를 일으켰는데 그 지하
수로의 총 길이는 570m이고 수로의 높이는 2m 폭은 80 cm 에 이르는 대 공사였습니다.

그러나 북 이스라엘이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되고, 이어 유다까지 침공하기에 이르자
히스기야왕은 그에 굴복하여 금 30달란트와 은 300달란트를 배상금으로 바침으로
1차 침공은 물러갔으나 2년후 다시 2차 침공을 (B.C. 699)받게 되었습니다.

이 때 히스기야는 베옷을 입고 성전에 올라가 간절히 기도한 결과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퉁하여 '여호와께서 한 영을 속에 두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한 다음
칼에 죽게 하리라'란(19:7)응답을 들려주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게서 친히 천사의 손을 통하여 앗수르 군대 185,000명을
하룻밤 사이에 멸하심으로 전쟁을 승리케하셨습니다.
그러한 전쟁의 시기가운데 히스기야왕은 병이 들었는데 이 병은 죽을 병이라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이란 이사야의 전갈을 듣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15년의 생명을 더 연장 하여주셨으며
이에 감사하여 그는 하나님께 찬양의 글을 올렸습니다.(사 38:9-22)

그러나  회복을 축하하러온 바벨론의 사자들에게 기뻐서 온왕궁과 군기고 및 내탕고에있는
모든 기물들을 그들에게 다 보여주자 이시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되
'보여준 모든 것이 바벨론으로 옮겨질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되었습니다.

그 이후 그는 15년간 잘 지내다 54세에 죽게 되었으며, 이사야의 예언은
100년이 지난 후에 유다의 멸망으로 성취되었습니다.

3. 신앙의 특징

대체로 의인이 나타나는 시기는, 외부적으로는, 대적의 위협이나 상황이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고 내부적으로는, 정치, 종교, 문화가 타락하여
무질서와 혼란이 만연한 시대입니다. 이 때, 나라를 바로잡고 위협적인
외부의 세력에 대처해 나가기 위해서는 그 비결을 히스기야왕이
실천한 신앙의 행동을 보고 우리들은 배울 수가 있습니다.

1) 그는 우싱을 철폐하는 신앙의 단호함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즉위하였을 때, 그의 왕국은 대적 원수들에게 둘러쌓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으나 그는 부친 아하스가 했던 것처럼 이방나라를 의지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게서 이스라엘의 보호자이심을 믿고 앗수르에 바치던
조공도 단절하고 국내의 우상숭배척결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 중에 산당 아세라 목상등을 척결하는 데에는 명분이 뚜렸하여 진행이
잘 될 수 있었으나 모세의 놋뱀을 부수는데는 많은 용단이 필요했습니다.
그 이유는 백성들이 놋뱀을 우상으로 여기지 않고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출애굽 당시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백성을 위해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모세가 만들은 놋뱀은 백성들이 성물로 여기게 있었으며 이는 팔레스틴, 애굽,
메소포타미아에 널리 퍼져있는 뱀 숭배사상과 혼합이 되어 우상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상 모세 당시의 구리뱀은 800년전 것이고 그 때까지 놋뱀이 보존되어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는 것으로보아 없어졌을 것이 분명함으로 보며
당시 숭배햇던 놋뱀은 여부스족속의 제사장이었던 사독이라는 자가
자기 족속의 전통적인 성물이었던 놋뱀을 지성소에 두어
숭배를 받게 했다합니다. (성경연구 4. 강병도) 그러므로, 히스기야왕은
놋뱀을 '느후스단' 즉, '놋 조각'으로 부르면서 모두 부숴버린 것입니다.

신앙이 세속화되는 이유는 민심과 물질이 종교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며
여호와 신앙의 온전한 수효자는 본질과 비 본질의 구분을 마음 속에
뚜렸이 갖고 대중의 인기나 탐심의 유혹에서 벗어나
말씀만을 따라야함을 히스기야왕은 보여 준 것입니다.

2) 앗수르의 대군을 하나님을 의지한 신앙의 믿음으로 물리친 인물이었습니다.

앗수르왕 산헤립은 유다 1차 침공시 금 30달란트와 은 300달란트의 배상금을 받고
철수하였으나 곧 이어 2년후 B.C. 699년에 군대 지도자인 다르단과, 환관장
랍사리스와 군대장관 랍사게를 보내어 예루살렘을 공격하였습니다.

 이 중 '랍사게'라는 유대전승에 의하면 배교한 유대인으로서, 유창한 히브리어를 통하여
백성들을 회유하는데 이 것이 '여호와의 뜻'임을 거짓으로 강조하고 항복하기를 권하였습니다.
이에 히스기야왕은 베옷을 입고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께 이 모든 위기를 아뤄웠습니다.
또한 선지자 이사야에게 제사장들을 보내어 기도하여주기를 간절히 부탁하였습니다.

모든 상황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위기는 모두에게 두려움을 줍니다.
당황하고 대책을 강구 하느라 걱정하기보다,그는 하나님께 아뢰고
 믿음을 갖임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믿음에 하나님은 응답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군대 185,000명을 역병으로 쓰러뜨림으로
모두 패배하게 되었으며 산헤립왕은 니느웨로 돌아가 거기서 머물다가
산당에서 경배하는 도중 아들들에 의해서 살해당했습니다.
선택은 용단으로 내릴 수 있으며, 위기는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음을 히시기야왕은 보여준 것입니다.

3) 생명의 존폐를 신앙의 기도로 응답을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외우내환이라는 말과같이 앗수르의 침공이 이루워진  B.C.701- B.C.699년 사이에
히스기야는 중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병은 역병으로 보여집니다.
앗수르군대를 모두 멸망시켰던 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역병을 취하여
원수들에게 옮겨 죽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메튜헨리 주석 12권)

문제는 역병에 걸린 히스기야왕의 태도입니다.
그는 하나님앞에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첫번째 호소는, 지금껏 자신이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서 행한 것을 지억하여 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두번째 심히 통곡한 사유는, 그 왕국이 멸망받을 위기에 있을 때,

자신이 죽어야하는 슬픔과 아직도 후손이 없는 상태에서 죽는 다는 것이
다윗의 언약을 이어받지 못하고 대가 끊어진 다는 것에대한 슬픔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앗수르 군대도 물리쳐주셨고
3년후 아들 므낫세도 태어나게 하셨으며 15년간 생명을 연장시켜주셨습니다.
이 응답과정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20:5)
하셨습니다.
히스기야왕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죽을 병을 고쳐주실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자신의 태도가 문제였음을 알고 전적으로 매달린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인의 기도는 전적으로 매달려야됨을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일영표의 그림자를 뒤로 10도 물리신 증거를 보여주신 것은
얼마나 자신이 전능하신 주관자이심을 인간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불분명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요즈음, 히스기야왕의 용단과 믿음과 기도는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주어 우리로하여금 바른신앙을 갖도록 만들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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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종을 공궤한 사르밧 과부
 / A Widow of Zarephath  
(왕상 17:12)



1. 사르밧 과부의 내력

사르밧은 두로와 시돈 가운데 위치한 지중해 연안 도시로
그 명칭의 의미는 "염색하다"란 차르파트에서 온 명칭입니다.
그러므로 두로와 시돈 등과 같이 훼니키아의 명물인 염료 생산지였습니다.
이 지방은 이세벨의 부친인 시돈왕 엣바알이 다스리는 지역으로 바알우상 지역입니다.

그러함에도 여호와께서 이방지역의 과부를 기억하신 것은
그 과부의 신앙을 알고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로 미뤄보건데, 그녀는 이스라엘에서 탄생하여 그곳으로 이사한 것으로 보이며,
이미 하나님을 알고 그곳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살았을 것으로 보입니다.[랑게주석]
가족으로는 어린아들이 있었으며 먼 친척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v17:15]

엘리야 선지자가 그릿시냇물이 말라 그곳으로 간 시점이
가뭄이든지 1년 이상된 시점으로 볼 때
사르밧 과부는 2년 이상을 엘리야를 공궤한 것으로 보입니다.

주의 종을 헌신적으로 수종든 것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통의 가루와 기름병이 차고 넘쳤으며
더우기 죽은 아들을 엘리야가 살려줌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 아이는 커서 엘리야의 사환이 되었으며, [18:43]
예수님께서 칭찬할 정도로 신앙이 좋았던 과부여인이었습니다. [눅 4:26]

2. 사루밧 과부의 신앙의 특징

하나님께서 기억하신 바 된 신앙인들은 그 나름대로 특성이 있음을 봅니다.
즉, 아브라함은 믿음, 여호수아는 용기, 다윗은 충성 등으로 쓰임받았으며,
사르밧 과부는 헌신으로 기억된 바 되었습니다.
그녀는 실제로 2년 이상 엘리야를 공궤하였습니다.

1) 엘리야를 처음 만났을 때 겸손함을 보였습니다.

가난한 자는 재해가 닥칠 경우 제일 먼저 생계의 위협을 받습니다.
이때 제일 원망하는 것이 환경이며 그 다음이 환경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과부의 생계는 1년 이상 가뭄으로 거의 바닥이 나
양식이라곤 한 움쿰의 밀가루와 반죽할 기름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녀가 나가서 뗄감의 나뭇가지를 주웠을 때 엘리야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엘리야의 부탁을 받습니다.
"청컨데 나에게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왕상 7:10]
이 말을 들은 과부는 물을 가지러 갔습니다.
물은 그 당시 가장 소중한 생명수입니다.
더우기 그녀의 입장은 곧 굶어죽을 입장에 놓여있었습니다.
불평이나 욕이나 거절이 충분히 나올 수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말 없이 순종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 여인이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알아보았다는데 있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v12]
만일 이 여인에게 신앙이 없었다면 엘리야는 천대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이 기억하신 바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의를
끝까지 갗출 수 있는 신앙의 자세를 갗춘 여인이었습니다.

신앙은 빙산 같아서 드러나 있는 부분보다 숨겨져 있는 부분이 더 많습니다.
사람들은 드러난 1/10을 보고 평가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숨겨져 있는 9/10을 보고 계십니다.

절박한 위기의 순간에도 순종을 보인다는 것은
진정한 겸손의 자세가 아니면 나타낼 수 없는 신앙의 덕목입니다.

2) 엘리야의 무리한 청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저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저를 불러 가로대
청컨대 네 손에 떡 한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v 11)

엘리야 선지자가 요구한 떡은 이 과부에게는 마지막 양식이었으므로
그녀는 이 사정을 엘리야에 아뢰었습니다.
"나의 마지막 것까지도 원하십니까?"

어느 누가 자신의 마지막 것을 요구할 때 침묵으로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 마지막이 되기 전 다른 방도를 강구해두고
기회를 기다리는게 우리들의 행위이지만, 아무런 대책 을 강구함이 없이
주님의 요구를 들을 때에 말씀이 주어지게 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v 14)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과부는 이 말씀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여기에 믿음은 결단임을 보게됩니다.

일반적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우리가 버려야 될 것들이 많이있습니다.
그런데 결단의 부족으로 10년이나 20년이 지나도
그대로 세상의 것을 유지하면서 신앙생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단의 보류는 응답의 보류와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설득은 결단의 모습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즉시 과부의 가루통과 기름병을 채워주셨습니다.

3) 엘리야의 기적을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신앙의 준비는 믿음이지만 신앙의 성립은 신뢰입니다.
과부는 엘리야 선지자를 믿음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변하자 믿음도 변하게 되었습니다.
즉, 아들이 죽자 엘리야를 원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믿음은 신앙과 달라서 내 편에서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내 생각이 변하면 믿음도 변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은 대상이 중심임으로 환경이 아무리 변할지라도 대상이신
하나님은 변하시지 않기 때문에 신앙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는 이미 신뢰의 관계가 성립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과부의 회개를 원하셨고
그녀가 더욱, 깨끗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과부에게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죽자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하려고 내게오셨나이까"
[17:18]
하였습니다.

이 말로 미루어 보건대 이 아이와 관계된 자신의 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에 엘리야 선지자는 아이를 데리고 자기 방에 올라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결과 아이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 순간 과부는 참으로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체험하고 경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로 인하여 아이는 엘리야의 사환이 되었으며 과부도 이를 기쁨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믿음은 항상 가장 중요한 것을 포기하는 절망의 봉우리를 넘어야
정착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야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기 전의 믿음은 여러번 죽을 고비를 맞아 흔들리지만
부활 신앙으로 넘어가면 오히려 고비가 하나님의 좋은 섭리로 받아드려져
평안함을 유지할 수 있게됨을 봅니다.
가장 천하고 나약한 사르밧 과부의 믿음을 본받을 수 있는 신앙인이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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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의 여인
/사라(Sarah)

(벧전 3:6)


1. 인적 사항

사라는 아브라함의 아버지인 데라와 후처의 몸에서 태어난 딸로
아브라함에게는 이복누이 동생입니다. (창 20:12)
그녀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하면서 믿음의 오라버니인
아브라함과 결혼을 하게 되었으나 불임녀이었던 관계로
자녀를 갖지 못하고 지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먼저 이름이 사래인 것은 "나의 공주란" 의미로
당시 그녀의 모양을 잘 나타내주고 있으며, 후에 하나님꼐서 그녀의 나이 89세떄
나타나셔서 이름을 "사라"라고 개명하여 주신 것은 그녀가 "공주"에서
"열국의 어미"
인 "왕비"의 뜻으로 믿음의 어미가 되도록
하여 주신 것입니다. (창 17:15-16)

하나님의 약속대로 90세에 잉태하여 이삭을 낳았으며 37년동안
이삭을 기르며 아브라함과 행복하게 살다가 그녀의 나이
127세를 마지막으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2. 주요 생애

사라는 B.C.2156년경 갈대아 우르에서 태어났으며 성인이 되어
이복오빠인 아브라함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 나이 65세가 될떄까지 자녀가 없음으로 성경에서는
그녀를 불임녀로 서술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75세에 축복을
약속하셨을 때 "큰 민족"을 이루리라 하신 말씀에 힘입어
남편을 따라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땅은 기근이 심하여 정착하지 못하고 차차 남쪽으로 내려가다
 결국 나일강으로 풍족한 수원이 있는 애굽까지 가게되었습니다. (창 12:9-11)
그러나 이국땅에서의 위험은 그 당시에는 여인과 재물이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불러 자신의 이복동생으로 언행하도록 지시하고
사라는 남편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그 결과 애굽인들에 의해 그 미모가 알려지게 되었고
결국,바로왕의 후궁으로 선택되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창 12:15)

그러나 하나님의 간섭으로 큰 전염병을 돌게하사 바로왕으로 사라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계시를 통하여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내임을 알게 하여주셨습니다. 이에 되돌아온 사라는 아브라함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무사히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후 10년이 지나 75세가 될 때까지 자녀가 없자 사라는
애굽에 내려갔을 당시 궁궐에서 자신의 시녀로 수종을 들었던 여인이 함꼐 나와
여종으로 있음에 젊고 아리따운지라 남편 아브라함에게 권하여
그녀로 잉태케 한 결과 이스마엘을 얻게 되었습니다.

행복할 줄로 기대했던 자녀 출산은 여종 하갈의 업신여김을 통하여
무척 마음고생을 하게 되었으며 괴로운 세월을 지낸지 13년 후 89세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약속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창 17:15-16)

이 때에 자신의 이름도 사래에서 사라로 개명하여 주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즈음에 아브라함에게는 위험한 일이 닥치게 되었는데
헤브론으로 헷족속이 침입해 들어온 것입니다. (청 23:3-5)

그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다시 온 식솔들을 이끌고 남방으로 옮겨
그랄 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아내 사라로 자신을 오빠라
부르게 함으로 그랄왕 아비멜렉은 부유하고 강력한 족장인 아브라함과
동맹을 맺기 위하여 누이동생 사라를 부인으로 맞아들였습니다.

다시한번 이방왕의 부인이 되기까지 순종한 사라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안전하게 남편에게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창 20:7)
그러자 하나님꼐서는 두번의 사라의 순종을 보시고 사라에게
잉태를 허락하시사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90세에 이삭을 낳은 사라는 37년간을 행복의 기간으로 누리고 살다
127세가 되어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고 그랄에서 다시 돌아와
살던 헤브론 땅 막벨라 동굴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창 23:19)

3. 사라의 신앙생활의 특징

1) 남편 아브라함을 주로 섬길 정도로 순종하는 믿음과 사랑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사라가 아브하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벧전 3:6]

사랑은 희생으로 증명되고 희생은 순종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순종한 것은 진정으로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말을 따라 누이동생으로 행세한 결과
바로왕의 후궁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여인으로서 가장수치스러운 일은 사랑하는 사람을 놔두고
다른 남자에게 자신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희생을 감수하는 이유는
사랑하는 남편 아브라함을 위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버려서까지도 남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희생 하려는 진정한 사랑의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희생은 14년 후에 다시 한번 반복하게 됩니다.

그 장소는 그랄 땅으로 아브라함의 권유로 다시 그랄왕
아비멜렉의 후궁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하나님꼐서는
애굽 왕 바로에게 내렸던 전염병으로 사라를 지켜주셨듯이 아비멜렉에게도
꿈에서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쫓았으되 사라는 아브라함을 쫓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실수하였어도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순종합니다.
그리고 그 순종은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다시 보상받게 됩니다.
여인의 아름다움은 순종에 있다는 것을 보여 준 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일로 사라의 사랑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2) 남편 아브라함을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를 버리는 여인이었습니다. (창 16:2)

바로왕과 아비멜렉 왕에게 간 것은 아브라함의 생명을
위험하지 않게 하기 위한 자신의 희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몸종 하갈을 통해 자녀를 얻고자 하는 사라의 권고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이으려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포기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일전에는 자신의 몸을 포기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대개 여인들은 자신의 몸은 남편을 위해서 희생하여도, 남편이 다른
여인을 사랑하는 것은 죽기보다 참기 어려운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갈이 이스마엘을 난 후 아브라함은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즉, 그는 자녀의 기쁨과 또한 여인의 사랑을 받으면서 더욱 만족한
생활을 한 반면, 사라는 잃어버린 부분이 많은 상태에서 지냈을 것입니다.

그녀는 14년간을 행복도 불행도 아닌 상태에서 억지로
현실에 만족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라의 헌신을 보게됩니다.
그래도 남편이 즐거워한다면 자신의 삶이 희생되더라도 남편의 즐거움을
지켜주는 것으로 만족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진실로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면 결코 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기적을 체험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여호와꼐서 그 말씀데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창 21:1]

"권고하셨다"란 하나님의 때가 되매 역사를 이루셨다는 말입니다.
사라는 90세가 되어 자신의 몸도 포기하고 의지도, 기대도 포기하였고
그녀에게는 불가능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꼐서는
이 때가 하나님의 때라 하십니다.

그 이유는 기대할 수 있을 때 나타나는 것은 기적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전혀 불가능한 상태에서 나타나야 기적이며 그래야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을 전적으로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라는 89세 때에 천사들이 아브하람에게 한 말을 들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창 18:14)

모든걸 포기한 사라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밖에는 의지할 데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진정으로 믿었습니다. 그러자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잉태할 수 있는 몸으로 회복이 되고, 출산할 수 있는 힘과 젖을 먹여
양육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히 11:11절"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 능력을 수반할 수 있을 때는 하나님 아버지 한 분만을 의지할 때입니다.
참된 믿음은 참된 기쁨을 맛보게 합니다. 사라의 믿음은 이삭의 기쁨으로 보상받습니다.
그녀가 얼마나 기쁘고 이삭을 사랑하였으면 죽을때까지 아들을 곁에두고
살았음을 볼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사라가 죽은지 3년후에 리브가와 결혼하게 됩니다
사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남편 아브라함을 자신의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고 산 여인입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의 축복을 후손에게 내려주는 열국의 어미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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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서 감독이된 오네시모
/Onesimus
(몬 1:11-12)



1. 인적 사항

'오네시모'란 이름의 뜻은 '유익하다'란 의미입니다.
그는 골로새에 있는 빌레몬이란 사람의 노예로서
주인의 재물을 훔쳐 달아났다가 로마에서 붙잡혀 감옥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그는 그 곳에서 사도바울을 만나 거듭나게 되었으며 바울은 그를
투옥중에 복음으로난 아들이라 불렀습니다.(몬 1:10)

감옥에서 풀려나 다시 빌레몬 주인에게로 돌아간 그는 이제는 노예가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하는 골로새 교회의 일꾼이 되어 빌레몬과 더불어 사역동역자가 되었습니다.

2. 오네시모의 생애

노예로서 인생을 살아온 오네시모는 어떠한 연유에서인지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자신의 인생을 바꿔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어느날 주인의 재물을 훔친 후
도망을 쳤습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모습을 숨기기 위하여
대 도시 로마에 들어가 많은 군중속에 파묻혔습니다.

오네시모의 마음은 불안했고 삶에 대한 갈등이 그로하여금 비천한 자리,
그러면서도 동정심과 가난한 마음들이 있는 곳을 찾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발견한 곳이 바울이 갇혀있는, 빌려쓰고 있는 셋집에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바울의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을 가장 사로잡은 것은 신분의 변화와 죄의 용서에 관한 복음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전심으로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인으로 영접하게 되었고 거듭난 그는 그 다음부터
바울이 갇혀있는 감옥이나 셋집에 기거하면서 바울의 온갖 시중을 다 드는 일꾼으로 살게되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에바브로가 로마에 오게 되었습니다. 에바브로는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노예였음을 알아보았습니다. 이미 양심의 가책을 받은 오네시모는
자신의 과거를 낱낱이 고벡하고 진심으로 형을 받을 것을 각오하였습니다.

그 후 절도의 형기를 다 마친 오네시모는 바울의 권유에 따라 두기고와 함께 골로새 교회에
바울의 서신을 전하는데 함께 따라가서 (골 4:7-9) 주인 빌레몬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는 빌레몬의 용서와 사랑으로 노예에서 해방이 되어 함께
주님을 섬기는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전심으로 평생을 헌신했는지는 50년후에 위대한 그리스도인 순교자
이그나티우스의 편지에서 입증이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로부터 로마로 처형당하기 위하여 연행되는 도중에
이그나티우스는 소아시아의 여러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그 때에 에베소교회에 쓴 편지에 감독에 대한 놀라울만한 높은 평가를 하였는데,
그 감독의 이름이 '오네시모'였습니다.
결국, 오네시모는 후년에 에베소의 고명한 감독이 되어
자신의 일생을 주님의 노예로 헌신하며 바쳤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장 짧고도, 개인 서신인 빌레몬서가 성경에 정경으로 수록 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바울서신의 최초수집이 에베소에서 행하여지기 시작했습니다. 수집되고 편집되고
새로출판되던 시절 바로 그 무렵은 오네시모가 에베소의 감독으로 있었던 시절입니다.

그는 빌레몬서를 매우 소중히 여겼습니다. 비록 중대한 교리나 이단에 대한 경고등
대중에 필요한 내용은 없을지라도, 한 개인 노예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어떻게 이와같이
변화될 수 있는 지를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위하여 사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감독인 자기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밝히면서까지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주님의 역사하심을 모든 믿는 자들에게 알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결국, 빌레몬서는 성경에 포함되어진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기록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네시모는 하나님께 한 없이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일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3. 오네시모의 신앙생활의 특징

신앙은 변화를 기본으로 이루워집니다. 그리고 그변화는 생각의 변화,
행동의 변화, 삶의 변화로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역활을 한다는데 중요성이 있습니다.

1) 오네시모는 사도바울을 만남으로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장 갈급해 하는 부분에 부딪쳐야 영향을 받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네시모는 사랑에 목말라 있었습니다. 노예신분으로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도 선대도 받을 수가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느날 사도바울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자신의 치부인 노예의 신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어 주신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네시모는
드디어 자신의 생명의 새 삶을 찾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새삶을 찾은 사람은 옛삶에 연연하지 않게 됩니다.
환경과 여건은 안바뀌어도 더이상 환경에 묶여있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발견하고서는 이 세상은 단지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어지기위한 훈련과정에 불과할 뿐입니다.

가장 낮은 삶을 체험한 자가 가장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진실된 감사는 그러한 처지의 자신을 하나님이 아시고 도와주신 것을
 진실로 고맙게 느껴질 때,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하여 우리를 때때로 낮추십니다.
오네시모의 낮은 삶은 하나님의 사랑에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는
체험을 위하여 주어진 것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2) 오네시모는 복음을 들음으로 자신의 일생에 예정된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간 것은 하나님의 예정속에 요셉의 일생에 계획된 한 부분이었습니다.
이 것을 깨달은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깨
달을 때, 하나님의 섭리대로 순종하며 살게 됩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 주인의 집에서 재불을 훔쳐 도망 나온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서보면 로마에 있는 사도바울을 만나기
위한 하나님의 예정속에 한 기회였습니다.

오네시모는 복음 속에서 자신의 과거를 해석할 수 있었고 또한 자신의
일생을 새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 사도바울은 이야기 합니다.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함으로
네게 저를 돌려보내노니...'(V. 11)

자신의 일생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살도록 예정되어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사람의 노예로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노예로서 살아야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삶의 목적을 찾았을 때, 주님을 바로 모시고 살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그의 삶에 주인이심을 비로서 알았기 때문입니다.

3) 오네시모는 주인 빌레몬을 통하여 자신의 사명을 깨달았습니다.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종으로서가 아니라 동역자로서 대하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양육시키듯 오네시모를 양육하였을 것입니다.
드디어 로마의 네로황제의 핍박이 그 곳까지 밀어닥치자 그 곳에 감독으로
있었던 빌레몬은 의연히 순교자의 길을 갔습니다.

이 때, 그는 오네시모에게 사역을 당부하였을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사명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레몬은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바울에서, 자기에서, 이제는 네차례임을 그리고 주님이 부르실 때까지
그 자리에 있다가 자기를 따라 와야 된다는 것을 들려주었을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알았습니다. 직분이 사명감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명감이 직분을 갖게 만든다는 것을, 결국 예베소의 감독직을 맡은 오네시모는
 어느 지방 감독들보다 더 훌륭히 직분을 감당해 냈숩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사명을 깊이 깨달을 수록 자신을 주 앞에서 낯출 수 있습니다.
결국, 주님의 뜻을 더 이루게 되고 이루워 진 것이 높여짐을 받게 만들어주는
것임을 오네시모는 깊이 체험한 진정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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