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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에바다교회

'Bible Study/People'에 해당되는 글 92건

  1. 2010.07.09 [성경인물 062] 관용의 지도자 빌레몬/ Philemon
  2. 2010.06.18 [성경인물 061] 살렘왕 멜기세덱 / Melchizedek the Priest, King of Salem
  3. 2010.06.04 [성경인물 060] 학사 에스라/ Ezra
  4. 2010.05.21 [성경인물 059] 여제자 다비다 / Tabitha (Dorcas)
  5. 2010.04.30 [성경인물 058] 요단강에 몸울 씻은 나아만 / Naaman
  6. 2010.04.23 [성경인물 057] 하늘에서 불을 내린 엘리야 / Elijah
  7. 2010.04.16 [성경인물 056] 하나님의 영광을 본 마르다(Martha) 와 마리아(Mary)
  8. 2009.11.20 [성경인물 055] 초대 대제사장 아론2 / Aaron
  9. 2009.11.13 [성경인물 054] 초대 대제사장 아론1 / Aaron
  10. 2009.10.30 [성경인물 053] 의심많은 제자 도마2/ Thomas
  11. 2009.10.23 [성경인물 052] 의심많은 제자 도마1/ Thomas
  12. 2009.10.16 [성경인물 051] 제2의 인류의 조상 노아/Noah
  13. 2009.10.09 [성경인물 050] 인류의 조상 아담/Adam
  14. 2009.10.02 [성경인물 049]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 Malachi
  15. 2009.09.25 [성경인물 048] 사가랴와 엘리사벳 / Zechariah & Elizabeth (1)
  16. 2009.09.18 [성경인물 047] 사랑의 선지자 호세아 / Hosea
  17. 2009.09.11 [성경인물 046] 분열후 단독 대제사장이 된 사독 제사장 /Zadok the Priest
  18. 2009.09.04 [성경인물 045] 권위의 종 디도/ Titus
  19. 2009.08.28 [성경인물 044] 세리 마태 / Matthew
  20. 2009.08.21 [성경인물 043] 광야의 외치는 소리 세례요한/ John the Baptist
  21. 2009.08.14 [성경인물 042] 이상을 보는 선지자 에스겔 / Ezekiel
  22. 2009.08.07 [성경인물 041] 레갑족속 / Recabite
  23. 2009.07.31 [성경공부 040] 느브갓네살 대왕 / Nebuchadnezzar
  24. 2009.07.24 [성경인물 039] 낙타 무릎의 야고보 / James
  25. 2009.07.18 [성경인물 038] 자주장사 루디아 / Lydia
  26. 2009.07.10 [성경인물 037] 신앙의 무명용사 아나니아 / Ananias
  27. 2009.07.03 [성경인물 036]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한 하박국 / Habakkuk
  28. 2009.06.26 [성경인물 035] 눈믈의 선지자 예레미아 / Jeremiah
  29. 2009.06.19 [성경인물 034] 바사왕 고레스 / Cyrus
  30. 2009.06.12 [성경인물 033] 우정을 생명처럼 여긴 요나단 / Jonat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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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의 지도자 빌레몬
/ Philemon
(몬 1:7)



1. 인적 사항



'빌레몬'이란 이름의 뜻은 '사랑을 간직한 자'라는 의미이며 바울이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에서 복음을 전할 때, 구원을 받은 자입니다. (행 19:9-10)

그 후 골로새로 이주한 그는 가정을 개방하여 교회 집회 장소로 제공하였으며, 아내인
'압비아'와 아들인 '아킵보'와 더불어 '골로새' 교회를 양육하는 평신도 사역자였습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였던 그는 종들을 두고 살았으며 그 중 한 사람이 '오네시모'
자신의 재산을 훔쳐 달아난 노예의 주인으로, 바울로부터 회심한
노예 오네시모에 대한 용서의 편지를 받는 수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바울의 동역자라고 부를만큼 모범적인 교회 지도자였으며
달아난 종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들이고 용서한 관용의 그리스도인입니다.

2. 주요 생애

빌레몬은 사도바울의 에베소 지역과 소 아시아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할시 은헤를 받고
회심한 그리스도인이며(행 19:26), 그가 살았던 곳은 골로새에서 19Km 떨어진
'라오디게아'로서 이 때에 그의 종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재산을 훔쳐 도망하였읍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 빌레몬의 아들 아킵보에게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골 4:16-17)는 당부를 하였으며
실상 빌레몬서는 라오디게아로 보낸 편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골 4:16)

이 지역의 기독교 도시들 중 '골로새'가 가장 먼저 세워졌고 이어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로서 모두 골로새에서 20Km 반경내에 위치해 있었으며, 이들 중
골로새 교회는 '에바브라'에 의해 세워졌으며 그는 골로새뿐만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를 위해서도 열심히 봉사한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이 당시에는 세개 지역의 교회들은 따로 따로 독립이 되어 있기보다는 거리가 서로
근접되어 있는 관계로 서로 연결된 단일 교회의 성격이 더 강했으며 빌레몬과 아킵보,
오네시모는 골로새 교회에도 많은 사역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클레이 주석 빌레몬서 중)

그는 나중에 오네시모를 바울에게도 돌려보내어 바울의 선교일을 담당하게 한 것으로 보이며
그 후 빌레몬은 감독이 되어 이 지역을 잘 감당하다 A.D. 64년 경에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3. 빌레몬의 신앙생활의 특징

1) 사도바울의 친서를 받은 그는 그리스도의 겸손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11:1)

사도바울과 빌레몬은 주의 종과 평신도 사이의 관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의 친필의
편지에 사도바울은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동역자라는 말을 먼저 언급하였습니다.
이를보는 빌레몬을 일개 작은 지역 교회의 봉사자로서 사도바울의 과분한 사랑과 대우에
많은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사도바울의 청이 일개의 노예였던 자를 용서해 주라는
가벼운 부탁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허락이 없으면 오네시모를 쓰지 않겠다는 양보와
더우기 그에 대한 부채가 있으면 나이 많은 자신에게 배상을 청구하라는 부담을 안주려는
바울의 권면이 더욱 빌레몬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사람은 대개 가리킨 제자와 밀어줘서 성공시킨 사람들에게는 하대를 하는 것이
통례인데 사도바울은 주님안에서는 다 동역자이며, 같은 일군이라는 겸손함을
보여주고 있음으로 빌레몬 또한 그리스도의 겸손함을 본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이같은 마음은 곧장 오네시모를 용서하였을 것이고 바울에게도
되돌려보냄으로 더욱 믿음에 정진하는 일군이 되어 50년 후에는 오네시모가
       에베소 감독으로 성장하게끔 자신도 겸손과 베품을 다 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2) 오네시모의 달라진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얼마나 놀라우신가를 깨달았습니다. (1:11)


하나님의 능력은 회개하여 진심으로 변화된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빌레몬의 온화한 성품 밑에서도 견디지 못하고 재산을 훔쳐 도망간 노예
'오네시모'는 보통 노예보다 더 질이 나쁘고 악을 행할 수 있는 노예일 수도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그의 성품을 잘 알고있는 빌레몬은 바울의 편지를 받고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저를 돌려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11-12)   

오네시모는 빌레몬 주인에게 무익한 존재였습니다. 주인 것을 축내고 오히려
배반하고 도망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주인에게 유익한 존재가
될 것암을 사도바울은 알려주는 것입니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다시 맞이하여
대해본 결과 바울이 유익하다는 뜻을 알았을 것입니다.

첫째는, 주님 사역에 쓰임 받을 수 있는 일군이 되었음을 알았을 것이고,
둘째는, 진정 속죄하는  마음으로 빌레몬을 섬기는 헌신된 자세를 보았을 것이고,
셋째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실한 삶의 모습을 보이는 변화된 생활을 하였을 것입니다.     

생각은 떠오름으로 변화를 시킬 수 있지만, 영혼은 다시 태어남으로 변화를 가져다 줍니다.
새 사람이 되는 것은 달라진 모습보다는 바뀌어진 모습이 더 어울리는 표현일 수있습니다.
빌레몬은 오네시모가 주안에서 진정 영혼이 거듭난 자임을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신의 심복이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심복이란 헬라어로 '스플랑크나'란 단어로 그 뜻은 '내장'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신의 몸같이 귀중히 여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감옥에서 바울을 섬기는 동안 아마도 자신의 생명을 바치기까지 수종들었던
그의 정성에서 이와같이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가장 독한 마음은 가장 충성된 마음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 자신의 체험을 통하여 오네시모를 더욱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심복이 되었듯이 네가 나의 심복으로 변화된 것을 내가 안다' 란 뜻입니다.
바울의 심복이라면 주님이 바울을 통하여 역사하신 것이 틀림없음을 빌레몬은 께달았을 것입니다.

3) 바울의 순교를 보고 빌레몬 자신도 온전히 주님께 자신을 드려야함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작은 믿음은 흩어지지만 큰 믿음은 옮겨 심어집니다.
빌레몬은 사역을 하면서 그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달았을 것이고,
그에 대한 댓가가 감옥에 갇히는 핍박과 고통인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도 흔들릴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 사도바울은 형장에 끌려가 순교를 하게 됩니다. 그 것도 기쁘게ㅡ

이 같은 스승 바울의 태도는 빌레몬에게 영광에 대해서 무언의 기르침을 주었을 것입니다.
육은 썩고 혼은 죄의 경험밖에는 기억 못합니다. 그러나 영은 태어난 아버지께로 갑니다.
인간은 육,혼,영, 순서의 구조로 태어났다가 영,혼,육, 의 구조로 바뀌어 죽게됩니다.

이 땅에서 온전히 이루는 삶, 즉 주님과 같은 영화의 수준에 이르는 삶이
자신이 살아야할 목표임을 이미 완성된 사도바울의 삶을 보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는 드디어 감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화에 이른 삶을 증명할 기회가 왔습니다.

네로의 박해가 드디어 자신에게 까지 미쳤습니다.
사도바울이 스데반을 생각하며 순교에 임했듯이 빌레몬은 사도바울의 모
습을 그리며 순교 현장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순교는 심기어지고 이어집니다.
빌레몬의 이와 같은 모습을 통하여 순교의 피는 다음 사명자에게로 이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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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렘왕 멜기세덱
/ Melchizedek the Priest,
King of Salem

(창 14:18)


1. 인적 사항



'멜기세덱' 이란 이름은 '나의 왕'이란 히브리어 '말키''의'라는 히브리어(채덱)이
결합된 이름으로 그 뜻은 '나의 왕은 의롭다'란 의미입니다.

그는 성경상에 나오는 인물중에서 가장 특이한 족보를 지닌 인물입니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히 7:3)

성경에서는 그의 부모나 족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유대 저작자들은 그를 노아의 아들 '셈'이라고 여기며,
 '멜기세덱'이란 이름은 단지 그의 직책상의 호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신빙성이 부족합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과 셈이
교제를 나누지 않으면서 동일한 땅에 같이 거주했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고,
창세기 저자인 모세가 셈의 족보를 몰라서 이름을 멜기세덱으로 고쳐쓰며
조상에 대하여 기술을 안할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로보건대 멜기세덱은
자기 조상들의 부패한 신앙을 본받지 않은 가나안의 왕일 것으로 보입니다.

A. 세이스의 말에 의하면 동양 고고학자들이 최근에 발견한 '그돌라오멜'
그 동맹국가들의 행한 군사행동에 대한 기사가 역사적인 일로 입증되었으며,
그 당시 멜기세덱의 기사도 확인되었늗데, 그 서신들 가운데 멜기세덱의 후계자인
 '우루살림'은 예루살렘의 왕이었으며 애굽의 봉신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가나안에 있던 다른 애굽의 총독들과는 달리 애굽에 의존하지도,
그의 왕권직을 물려받지도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 에 의해서 그 지위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에따라 멜기세덱도 그가 예배하였던 하나님에 의해 그의 왕권과
직책이 임명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베이커 주석)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멜기세덱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게 하신 것은
멜기세덱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신령한 제사장 제도에 대하여 알려지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라 보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왕이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평강의 왕으로 모든 사람의 십일조를 받았으며, 특히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받고 그에게 축복을 하여주었습니다. (창 14;19)

이는 장차 오실 예수님은 아론의 제사장 직으로부터 온 제사장이 아니시라,
멜기세덱 반차를 쫓은 대제사장이심을 증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의 영원하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된 것입니다.

2. 멜기세덱 신앙 인물의 특징

멜기세덱은 성령으로 감동된 성경의 저자 세 사람인 모세, 다윗, 바울에 의하여
성경에 언급되어진 인물로 첫번째는 창 14:18-20 절로 역사적인 기록이며
두번째는 시편 110편으로 예언적 기술이며, 세번째는 히:5-7장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완성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1) 멜기세덱은 의와 평강의 왕이었습니다. (창 14:18)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기 전에 의의 왕이었습니다.
하나님꼐서는 누구든지 쓰실 때 직분 전에 선택을 행하십니다.
그리고 선택의 기준은 사역성에 따라 구분됩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의 경우 하나님의 백성들의 조상으로 살기 위하여
그의 "믿음"을 기준으로 두셨고 여호수아는 "담대함"을 기준으로 하셨으나
멜기세덱은 "의"를 선택의 기준으로 삼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의가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이념이기 떄문입니다.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 (잠언 14:34)

성경에 기록한 것처럼 한 나라의 지도자가
'의를 지녔느냐 욕심을 지녔느냐'는 참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면 의란 무엇인가요?
'모든 삶의 질서를 위한 최고의 생활가치로'
의로운 행위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가 있는 곳에 질서가 있고 질서가 있는 곳에 평안이 주어지게 됩니다.

멜기세덱은 율법에 맞는 생활과 예배를 하나님께 드렸으며
예루살렘을 평강의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열남이 되었습니다.

2) 멜기세덱은 하나님이 택한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창 14:18)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속죄를 위한 제사를 드릴 중보자를
필요로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기위해서는
일정한 조건과 기준을 갗춘 자라야 선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멜기세덱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가장 강한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죄 많은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함부로 나갈 수 없으며
신적인 속성을 지닌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신적인 속성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와 거룩을 지닌 사람을 의미합니다.
멜기세덱은 바로 이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대적을 물리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위하여 떡과 포도주를
제공한 것은 침략자들을 물리치고 평화를 가져온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함이었으며,
 
그가 아브라함에게 선포한 말은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찬양하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공적을 먼저 칭송하기보다,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창 14:20)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반대로 그 옆에 있었던 소돔왕은 되돌아온 사람들과
탈취물만을 보았습니다. 인간이 영적이냐 혼적이냐의 차이가
바로 이 두 왕으로 구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하나님을 기준하여 행동하는 반면,
혼적인 사람은 사물을 기준하여 판단합니다.

하나님꼐서는 이 같은 우리의 속 마음을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로 향한 영이 열려있는지를요?
그는 영이 활짝 열린 사람이었습니다.

(2) 멜기세덱은 영권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창 14:19)

축복은 높은 사람이 아래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내려 줍니다.
이 같은 행위는 하나님께 축복을 위임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민 6:22-26) 즉, 대제사장만이 이 사역을 허락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위의 것을 받아 백성에게 나누어 주며 또한 백성이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을 받아 올려드리는 가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제사장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당대에 하나님이 선택한 가장 인정받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복의 약속을 내려 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축복기도를 받고 그 권위를 인정하는 뜻에서
전리품의 1/10을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영권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 것은 제사장직을 인정한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인정됩니다.


3) 멜기세덱은 그리스도의 예표였습니다. (히 6:20)

(1)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은 영원한 제사장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난 역사적 사건은 예수님의 관련되어진
사건에 비추어 해석되어져야 의미가 더욱 뚜렷해집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 8:45)

즉,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간접적으로 만날 기회는 멜기세덱을 통하여서만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두사람 마음에 현존하고 계셨습니다.
제사장 반차의 연결은 이 영적인 만남을 가능케 해주는 것입니다.

(2)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준 떡과 포도주는
주님이 성만찬을 성도에게 주신 것과 유사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멜기세덱은 지치고 피곤한 전쟁에서 돌아오는 아브라함과 그의 용사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주며 힘을 돋우어 주었습니다.
이는 신약에서 예수님이 영적으로 지쳐있는 성도들에게 영생의 떡과
포도주인 자신의 몸과 피를 내어 준 사랑의 선례로 볼 수 있습니다.

(3) 그의 족보 면에서 주님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은 족보로서 승계 질서를 갖은 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던 하나님이 임명한 자신만에 고정된 직분이었습니다.
그래서 히 7:3에 "하나님 아들과 방불한 제사장"이라 하였던 것입니다.

혈통이 없는 제사장, 영구적인 제사장,
하나님이 직접 인정한 제사장, 모든 이에게 십일조를 받은 제사장.

이는 바로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예표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신분과 사역을 성도들이 더욱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하여 구약의 예표의 인물을 세우심으로 구속사가 빈틈없이
진행되고 있음을 확신케 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로써 실질적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축복에 감사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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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 에스라

(스 7:6)


1. 인적 사항


에스라 는 히브리어로 '에즈라'이며 그 의미는 '여호와의 도움'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레위 자손으로 아론의 16대 손이며 그의 부친은 '스라야'로 명기되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말씀에 열중한 그는 나중에 모세 율법에 능한 학사겸 서기관이 되었으며
당시 바사왕 아닥사스다의 신임을 얻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제 2차 포로귀환을 주도하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스 7:9,  B.C. 458) 에스라는 백성들에게 계명과 율법을
가르쳤으며 희생제사를 회복시켜 신앙회복에 힘쓴 종교개혁자로 불리어집니다.

그는 느헤미야가 포로 3차 귀환을 인도한 후, 성벽을 모두 완공하고 총독으로 일할 당시
신앙개혁에 함께 전력하였으며 그 후에 에스라서를 기록하였습니다. (B.C,444 이후)
그는 항상 백성들의 죄가 지신의 죄인양 하나님께 회개기도를 드린
중보기도자 로서의 일생을 보냈습니다.

2. 주요 생애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은 B.C. 586년에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였으며, 그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스라야'를 죽이고 시드기야왕의 눈을 뽑아 사로잡아갈시 스라야의 아들 '여호사닥'
바벨론으로 끌어갔습니다. 그 이후 스룹바벨의 1차 포로귀환과 (B.C,536년)
성전 재건이 이루어지기까지 20년이 (B.C,516년)지나고 나서 귀환한 백성들은
뚜렷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점점 타락하여 이방인과 통혼하며
신앙을 잃고 방황하며 어느덧 58년이나 지나게 되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에스라를 택하셔서 제 2차 포로귀환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B.C. 458년)
그런데 이 시기는 에스라의 부모로나오는 '스라야' 대제사장이 죽은지 128년이나 지난
시기임으로 실상 에스라는 스라야의 고손이며 여호사닥의 증손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서에서는 아론의 16대 손으로 명시되어있지만 역대상 6:4-14절에는
아론의 22대 손으로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는 바벨론 지역 중 유대인이 밀집해 살고 있었던 '닙불'에서 회당을 중심으로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교육시키는 바사의 율법 학자로서, '아닥사스다'왕의 신임을
 매우 깊이 받고 있던 중 제 2차 포로귀환을 허락받고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귀환자 수효는 1,800여명에 달했으며 왕으로 부터 각종 성전의 금은
명기를 소지하고 도로로 귀환할 시, 각종위험에 대비하여 오직 금식기도하며 하나님께 의뢰한 결과
4개월만에 무사히 예루살렘에 당도하게 되었습니다.(스 8:32)( B.C.458)

그는 백성들에게 율법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종교개혁을 통하여 희생제사를 회복시켰으며
이방인들과의 통혼을 금지시켰고, 회당제도를 다시 일으켜 신앙을 부흥시키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그는 유대인 성경의 정경을
확립한 사람으로 불리워지고 있으며 느헤미야 총독과 더불어 예루살렘 성벽건축과
신앙회복의 사역을 마친후 에스라서를 기록하였습니다. (B.C. 444년 이후)

3. 학사 에스라 신앙의 특징


1) 에스라는 하나님 말씀만을 중심으로 산 사람이었습니다. (7:10)


사람들은 각자 중요하게 지니고 있는 신념들을 중심으로 살고 있습니다.
특히 포로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의,식,주 해결이 가중 큰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직 삶의 중심에 놓고 산 신앙인이었습니다.

성령에 민감한 사람은 시대의 영적인 필요를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에스라는 율법서를 기록하여 잘 정리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예언자들이 활동하던 때에는 문자로 기록된 율법서가 필요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예언자들을 통하여 계시하시고 전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모든 예언이 거의 끊어지고 포로 생활한지도 12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 때에 율법서의 필요성을 깨달은 사람이 바로 에스라입니다.
그는 율법을 공부하는 한편 모두 정리하여 유대인 정경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것을 백성에게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더우기 그의 신앙생활의 위대한 점은 율법을 다 지켜 스스로 행하였다는 점입니다. (7:10)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의 소중함을 잘압니다. 허지만 지키지는 못했습니다.
그이유는 아는 것만으로는 죄를 막을 수 없기때문입니다. 오직 실천만이 탈선을 막아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라비니즘(rabbinism)에 빠져버렸습니다.
즉 율법의 정신은 망각하고 형식만을 행하는 형식주의로 변하였던 것입니다.

인본주의의 신앙은 형식과 프로그램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성령위주의 신앙은 말씀과 실천이 중심이된 신앙생활을 갖게 만듭니다.
에스라는 진정 성령위주의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2) 사명을 앞두고 그는 금식과 기도로 준비한 사람이었습니다. (8:21)

에스라를 신임한 아닥사스다왕 은 일전엔 사마리아인들의 허위고소를 받아들여
성벽재건을 중지시켰던 사람입니다. (슥 4:17-22)  느헤미야가 3차 포로 귀환을
이루어 성벽건축을 시도한 시기는 B.C. 444년 입니다.

그러므로 그 이전에도 아스라엘 백성은 성벽을 재건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B.C. 464- 444) 사마리아인들의 대대적인 방해공작으로 실행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후 하나님께서는 에스라를 아닥사스다왕의 신임을 받게 하심으로, 그의 마음을
움직여 포로귀환과 각종 금은 명기 모두를 돌려보내려는 마음을 갖게 하신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역의 지시는 에스라에게 직접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이 아니라
왕의 지시인 것입니다. 에스라의 신앙의 신중함은 이 명령을 바로 받아들여 실행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직접 응답을 듣고 행하려는 참된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응답이 떨어졌습니다. (8:23)

응답의 특징은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합니다. 그러나 오직 자신의 믿음만으로
시도하려할 때는 세상의 방법을 동원하게 됩니다. 현재 그들의 상황은 불가능합니다.

첫째로, 그 거리가 무려 1180 Km나 되는 반년이 걸리는 도보여행입니다.
둘째로, 성전의 금은 보화가 자그만치 약 120만 파운드(영국 화폐) 나 되는 금액으르
도적 강도들의 약탈의 목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로, 귀환길에 오른사람 들은 어린아이, 여인들과 합하여 거의 6000명에 가까운데 적들의
공격을 받을 시, 싸울 인원은 단지 1800명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 아닥사스다왕은 군대병력을 동원하여 보호해줄 마음을 갖고 있었으나
에스라는 인간적인 도움보다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택하였습니다. (8:22)
결국 4개월에 걸친 포로귀환은 순조롭게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에스라'
하나닙께서로서부터 난일이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사명의식을 갖고
사역을 시작해야된 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준 사람입니다.

3) 사역을 진행하면서 오직 하나님께 중보기도로 엎드린 사람입니다. (10:1-4)

육적 각성, 혼적 각성은 체벌이나 가르침으로 시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각성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역사하실 때에 이루워질 수있습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을 보고 여호와의 전에 엎드려 울며 그들의 죄를
자복하였습니다. 그는 곧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과 방백들의 마음을 움직여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3일 내에 모두 성전 모이게 하였습니다.

에스라는 성령의 감동으로 백성들이 죄를 지적하고 이방인들과의 통혼에서
돌아오도록 설득하자 모두가 이에 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이고자할 때,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만이 이루실 수 있는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위해 그는 오직 중보기도를 하였습니다.
지도자가 되려면 중보기도를 사명으로 알고 하나님께 드려야함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범적인 예입니다.

성도가 가엾은 죄인으로 보여질 때, 그리고 정죄하려는 마음보다 연민으로 여겨질 때,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되고, 오직 중보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일어나야 모든것이 변화될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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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제자 다비다
/ Tabitha (Dorcas)
(행 9:36)


1. 인적 사항


'다비다'란 이름은 히브리식 이름으로 헬라식 이름은 '도르가'로서 '영양' 또는 '사슴'이란 뜻입니다.
다비다는 집사 빌립의 복음 전파로 세워진 욥바 교회를 섬긴 그리스도의 여 제자로서
복음전도자,특히 구제와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에 헌신한 일꾼이었습니다. (행 9:36)
그녀는 남편을 일찍 여윈 과부로서 남겨진 재산으로 남을 섬기는 삶을 살았으나
너무 과로한 나머지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사도 베드로에 의해서 다시 살아난 부활을 맛본 여인입니다.(행 9:41)

2. 주요 생애


제자들을 포함한 120문도가 오순절날 성령충만함을 받고 베드로의 설교로
많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기독교인들이 되었습니다. 이 때가 A.D.30-40년 경으로
사마리아와 유대전역으로 복음은 확장되기시작하였으며 각처에 세워진
교회는 오순절날 은혜를 체험한 평신도들로 이루워지고 있었습니다.

욥바지역은 예루살렘으로 부터 북 서쪽으로 약 50-60km 떨어진 항구도시이며
초대교회 일곱집사중 한 사람인 빌립집사가 사마리아에 내려가 그 지역을
전도하였을 때, '욥바'에도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모임이 탄생되게 되었습니다.
그 모임의 장소는 다비다가 죽어 누워진 다락방으로 보이며 그 곳을 중심으로
다비다는 구제와 선행을 전적으로 맡아 헌신한 그리스도의 여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풍족한 생활은 아니었으나 옷을 만드는 재봉의 기술이 있었음으로 가난한
과부나 이웃들에게 속옷을 만들어 나누워주는 일을 열심히 하며 성도들을 섬겼습니다.
사역에 무리를 많이한 도르가는 A.D. 37년경 과로로 쓰러져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에 사도 베드로가 욥바에서 19 km 떨어져있는 가까운 도시 룻다에
머물고 있음을 들은 성도들은 그 곳에 가서 베드로를 청하여 욥바로 오게한
 다음 다비다의 죽음을 알렸습니다.

그 때,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고치시던 장소에 함께 있었던 경험이
있음으로(회당장 야이로의 딸) 성령님의 역사에 방해를 받지않기 위하여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홀로남아 무릎을 꿇고 주님께 다비다를 살려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다비다는 죽은지 하루가 지났으나 여전히 다락방에 안치되어 있었고
그녀의 영혼은 아마도 천국에 가서 주님을 뵙고 왔을 지도 모릅니다.
베드로의 기도로 다시 살아난 다비다는 복음 전파의 산 증인이 되어
욥바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이 살아계신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는
전도의 역할을 끝까지 하다가 편안히 주님 품에 안겼습니다.

 
3. 다비다의 신앙생활의 특징


1) 이름에 알맞은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름은 호칭보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도, 야곱도, 이름을 아브라함과 이스라엘로 다시 개명하여 부르셨습니다.

다비다 즉, 도르가는 '영양', '사슴'
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짐승은 성품상 온유하고 자태가 귀엽고 행동이 선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이 동물을 좋아합니다. 마찬가지로 다비다가 죽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며 애통했는지 모릅니다. 그 이유는 역시
도르가의 성품이 온유하고 그녀의 모습이 영혼의 신성미가 나타난 모습이고
행동 또한 구제와 선행을 일삼은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말 중에 '이름 값을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이름(크리스챤 네임)에 대한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비다는 진실로 자신의 이름답게 신앙생활을 한 여인입니다.

2) 사랑에 기초한 구제였습니다.

구제는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입니다.대부분 우리는 생각하기를
좀 더 여유가 있다면 남을 도울 수 있을텐데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라'(눅 6:38)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의미는 '너의 지닌 것이 처음부터 네 소유가 아니라, 빈 손인 너에게 내가 주었기
때문에
생긴 것을 알고 사람들에게 나누워 주면 네 빈손에 내가 더 채워주리라'
하는 말씀이십니다. 다바다는 과부였기 때문에 아마도 수입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사랑만이 자신의 것을 내어 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남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은 예수님께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주님은 아가페 사랑을 지니신 유일한 인간이셨습니다.  

주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주님이 베푸신 사랑을
또한 베풀 수 있다는 것을 다비다의 삶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구제와 사랑과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기본임을 봅니다.

3) 믿음에 기초한 선행이었습니다.

선행을 할 땐 동기가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결과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에 따라
순수여부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즉 투자개념으로 선행을 할 수가 있습니다.
실버타운, 공원묘지, 미개발지역 개척등은 대중에게 편의를 줍니다.
또한 이 일을 행하는 주최측도 유익을 함께 나눌 수가 있습니다.

 아니면 자신의 명예를 위하여 선행을 할 수도 있습니다.
사회사업, 구제위원금, 장학재단, 불우이웃돕기, 등에 많은 기업들과
유명인사들이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그들의 행적은 대다 수 세상 모두에게 알려지게 됩니다.
따라서 평판과 인식이 좋아지게 됩니다. 존경을 받게됩니다.

그런데 순수 믿음 안에서도 선행을 할 수가 있습니다.
대부분 희생과 헌신으로 이루워지게 됩니다.

뉴질랜드에서는 자원봉사자 제도가 비교적 잘 되어 있는 것같습니다.
병원에 자원하여 환자 돌보기, 재소자 방문, 장애자 및 불치병환자 가정방문돕기,
양로원 방문, 가정부부, 자녀문제 상담 보호지원등 봉사자들이 많이 담당하고있습니다.

대부분 믿음을 지닌 사람들이 이 분야에 봉사를 많이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고 이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고후 9:8)

다비다는 믿음에 의한 선행을 한 여인입니다. 영광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생명을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그녀가 다시 살아나지 아니하였어도
하늘에서는 상급이 컸었을 것입니다. 다비다를 통해 봉사의 진 면목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오직 주님을 위하여 일한 여인!
성경에서는 그녀에게만 여 제자란 호칭을 붙였습니디.
이는 틀림없이 죽기까지 헌신했던 그녀의 삶이
주님의 제자로서 합당한 일꾼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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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단강에 몸울 씻은 나아만
(왕하 5:10)



1. 인적 사항

‘나아만’ 이라는 이름은 우가릿어로써 '은혜로운’, '즐거운' 이라는 뜻입니다.
아람왕의 군대장관이며, 나라에 큰 공을 세운 구국공신이었습니다. (왕하 5:1)

문둥병으로 일생 고생하다가 엘리사의 지시로 치료함을 받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었으며,
후에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이방인으로 칭찬을 받은 자이기도 합니다. (눅 4:27)

2. 그의 생애    

그가 속한 아람국은 노아의 손자인 아람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로서 그들의
거주지는 주로 메소포타미아, 수리아, 요단 동편 지역에 거주하였으며
이들의 중심도시는 다메섹이었습니다. (삼하 8:6)

이 민족은 솔로몬 왕 시절엔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있었으나, 분별왕국 후 독립하여
B.C. 856년경 대는 벤하닷이 북이스라엘을 공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실패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이스라엘의 아합왕이 여호사밧 왕과 더불어 길르앗 라못을 빼앗으려 아람국을
침공하자 그 때 나아만은 아합 왕을 활로 쏘아 치명상을 입어 죽게 만든 장본인으로
아람 국가를 구원한 공신이 되었습니다. (B.C. 853, 역대하 18장, 아람어 탈굼역본)

그러나 그는 문둥병자로서 군대장관의 직을 수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몹시 불행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섭리로
이스라엘에서 잡아온 계집종의 간언으로 이스라엘에 가면 선지자가 능히 문둥병을
고쳐줄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을 찾아가게 됩니다. (B.C. 852-841)

 여호람왕은 아람이 북왕국을 칠 빌미를 잡으러 온 줄 알고 극도의 공포감을 가졌으나
엘리사 선지자가 나아만 장군에게 기적을 베풂으로 그가 문둥병을 치료받자 오히려
자신이 섬겼던 태양신인 ‘하닷림몬’을 폐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개종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하나님의 은총으로 편안한 삶을 누리다 죽었으며 그의 신앙과 믿음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그렇게 많은 문둥병자가 있어도 오직 고침 받은 자는
이방인인 나아만 뿐’이라는 인정과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눅 4:27)

3. 이방인인 나아만이 구원을 얻은 특별한 하나님의 은총

1) 나아만 군대장관은 가장 행복하게 보인 가장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부러움에 대상이 되는 경우는 지위, 공적, 명예, 인기, 부, 능력 등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주인공인 나아만은 한 두 가지가 아닌 이 모든 것을 지닌 사람으로 모든 사람들의 존귀의 대상이
되어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몸에 이상한
반점이 생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우려 해도, 감추려 해도 자꾸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문둥병에 걸린 줄 알았을 때의 그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그 이후의
그의 삶은 가장 행복한 상황 속에서 가장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인간이 남에게 말 못할 고민을 지니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 고민을 통하여
그의 교만함을 깨뜨리고 오직 하나님을 찿는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얼마나 그가 자신의 문둥병에 대하여 고민하였으면 집안의 계집종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 말을 따를 정도로 갈급하게 지냈겠습니까? 그 나라에서
가장 높은 지위의 사람이 사로잡아온 가장 천한 노예 계집종의 말을
청종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의 내면의 비참한 자신의 모습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는 세상의 세계에서 높으면 그만일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내면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세계는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세워질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마음이 적국의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가게 만들었습니다.

2) 신적 존엄성에 무릎을 꿇는 인위적 존엄성의 나아만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은 질병은 의술로 고침을 받을 수 있으며 치료에
대하여 대가를 지불해야 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나아만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문둥병을 치료받는데도 치료자에게 사의를 표하기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준비한 선물이 은 십달란트 (약 342kg)와
금 육천개 (약 68.4kg), 예복 10벌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예물을 보면 온 정성을 다하여 자신의 질병을 돌보아 주리라고 여겼습니다.
더우기 자신의 군대장관의 지위는 특별우대를 받기에 충분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엘리사는 방 안에서 나와보지도 않은 채 사환을 보내어 전달하기를
“요단 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명하고는 끝이었습니다.
그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짓밟혀 분노와 함께 돌아갔습니다.

허지만 여전히 문둥병은 남아있습니다. 영적인 치료 방법은 순종할 때 나타납니다.
결국 그는 현실에 직면하여 생각합니다. 낫기만 한다면 무엇인들 못하랴.
그는 일곱 번 요단 강에 몸을 담그고 기적의 치유함을 얻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 앞에 순종하여야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존엄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지만 인위적 존엄성은
세상으로부터 온다는 차이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3) 하나님만을 섬기려는 특심은 성지의 흙을
영원히 보전함으로 거룩을 삼으려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자리,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장소, 이것은 누구라도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곳들입니다. 나아만은 땅도, 물도 다 퍼갔을 것입니다.
 자신의 나라에서는 영원히 없는 성물로 여겼기 때문에서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한가지의 걸림돌이 생겼습니다. 그의 왕이 자신을
의지하여 림모의 당 (아람의 최고의 신)에 들어갈 때에 자신도 함께 들어가
몸을 굽혀야 하는 본의 아닌 섬김의 표를 보여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로 온전히 하나님만을 경외하려는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몹시 마음에 걸렸습니다. 이 때 엘리사는 말하기를 “평안히 가라” 대답합니다.
“너의 본심을 알았으니 양심 따라 행하라”고 한 것입니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나아만의 발걸음, 종들은 기뻐서 이 소식을 빨리 알리고 싶어
 말을 몰았을 것이지만 정작 장본인은 자신의 과거를 회고해 보았을 것입니다.
잘못 살아온 인생, 여호와를 섬기는데 어떤 처신으로 살아야 할까 등
그는 곧 은퇴하여 조용히 살았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육신의 치료함의 기적을 체험한 그는 영혼의 구원도
받았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은 영혼은 세상앞에 서기를
좋아하기보다 하나님 앞에 서는 삶을 더 원하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 그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은 그가 나머지 여생을
어떻게 보내었는지 짐작하게 해줍니다. 그것은 두 가지 '감사'
'거룩'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본받을 자세라고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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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불을 내린 엘리야
/ Elijah
(왕상 18:38)


1. 인적 사항


그의 히브리 이름은 ‘엘리야’라고 표기하며 그 뜻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의미입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대선지자였던 그는 B.C.900년경 납달리에 있는
남쪽지역 디셉지역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가족이 요단 동쪽
길르앗으로 이주해 옴으로 그 곳에서 정착하며 자랐습니다.

길르앗은 황량하고 돌이 많은 산악지대로 선지자들이 하나님과의
신적 교제를 통해 과감한 속성을 키우기에는 합당한 장소로 엘리야도
거친 양가죽옷을 입고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왕상 19:13)

B.C.874년부터ㅡB.C. 842년까지 32년간 북이스라엘 7대 왕 아합과
8대 아하시야, 9대 여호로암 왕 통치 초기까지 활동하였으며
엘리사를 제자로 삼아 사역을 인계하여주고 요단강에서
‘불수레’‘불말’들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가운데
회오리 바람을 타고 산채로 하늘로 승천하였습니다.

2. 그의 생애

엘리야는 유대인들에게 모세에 버금가는 인물로 추앙을 받을 정도로
존경받는 선지자로서 예수님 변화산상에서 주님께 하늘의 위로를 전하기 위하여
모세와 함께 나타났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북이스라엘이 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리며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번성기 시대에
사악한 왕들로 인한 우상숭배가 극심한 종교적 타락 속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아합왕과 이세벨 왕비 (시돈왕의 딸), 그리고 그들이 선지자로 양성하고
있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 모두 더불어 갈멜산에서
종교적 대결을 하여 하나님께서 진정한 여호와, 한 분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아합왕에게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수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음을 예언하였고 갈멜산에서의 영적 전투를 승리로 이끈 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3년 6개월 만에 비가 내리도록 한 능력의 선지자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세벨의 이를 가는 복수의 위협에 그녀를 피하여 호렙산으로
피신 하게 되며 그 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모든 염려와 두려움을 내려놓고
다시 내려가 사명을 감당하라고 명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하고 입맞추지 아니한 자 7천인을 남기었느니라'
라고 위로하셨습니다. (왕상 19:18)

그는 세 번이나 궁중설교를 하였으며 (왕상 17:1, 18:2, 21:20) 그 때마다
생명의 위태로움을 느꼈으나 담대히 왕에게 경고 하였습니다.
구약시대에서 참으로 하나님이 인정하는 성령의 사람이었으며
그가 사역을 마치는 순간에 하늘로서 불수레와 불병거가 내려온 것은 이를
잘 반영하여 주는 증거로 여길 수 있습니다. 이로서 그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승천한 구약의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에녹, 모세, 엘리야)

3. 엘리야 선지자 사역 중 특이사항

1)엘리야는 하나님을 온전히 섬김으로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체험을 하였습니다.(17:1-9)

'섬기다'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아마드'인데 그 의미는 '서다'라는 뜻입니다.
예로 왕 앞에 부하가 부복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즉 충성과 복종의
마음으로 여호와를 모시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올바른 섬김은 하나님의 밀접한 계시를 받습니다.
우상숭배로 타락한 아합왕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는 인도함을 받아 광야에서 3년 6개월을 지내게 됩니다.

  그릿 시냇가에서는 1년동안 (야밈)까마귀의 음식공급을 통하여 생존하면서
오직 공적사명을 감당하기위한 성장의시기로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유지하였으며,
(예: 사울이 아라비아 사막에서 3년 체류), 그후 시돈 지역 사르밧 과부에게로 인도하심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의 전초로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심을 확신시켜주시는 기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믿음의 확신과 경험의 확신 모두 있을 때, 담대히 사명을 이루워 나갈 수가 있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를 공궤함으로 양식이 축복받았음을 믿고 감사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믿음은 기복에 국한 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귀중한 소유인 아들의 생명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곧 시험에 들게 됩니다. 엘리야가 그 아이를 다시 살려주자 그녀는
진실로 하나님만이 전능하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과부로서는 부활의 신앙을 갖게 된 것이요,
엘리야로서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 것입니다.

신앙은 신뢰입니다. 광야생활은 깨어짐과 신뢰를 기르쳐주는 과정입니다.
돌보심은 사역의 시작입니다. 엘리야는 온전한 섬김이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게 한다는 신앙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2)영적 전투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18:36-39)

3년 6개월이 거의 차자 엘리야는 아합왕에게 나타나서 권위로 도전합니다.
'당신의 우상을 섬기는 바알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갈멜산으로 모여
 자신과 대결하도록 그리하여 누구의 신이 진정한 신인지를 증명하자'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아세라 선지자 400명은 참석하지 않았고(시돈 사람들임) 바알
선지자만 참석히여 바알신의 위력을 나타내려했습니다.
 
모두 아침부터 저녁까지 굶고 그들의 광경을 지켜보았으나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자
엘리야는 저녁 즈음에 한번의 기도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온 제단을 모두 살랐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권위로 백성들에게 외칩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그러자
백성들이 일어나 바알 선지자를 모두 잡아 기손 시내로 끌고가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하여 자신의 백성들이 머뭇거리는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는 일, 예수님과 자신을 동시에
주인 자리에 놓는 일, 말씀과 불의를 동시에 저지르는 일,

성령으로 시작하였으나 육신으로 끝맺는 일,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지만
자신의 성공을 위한 일 등, 하나님께서는 전부가 아니면 일부도 허락하지
않으심을 알려주십니다. 엘리야의 기도의 능력은 전부를 드린데서 나왔습니다.

3)영적 침체와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는 엘리야는 마지막 인간의 연약함을 극복하게 되었습니다.

광야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곳인 반면 세상은 세상의 영을 바라보도록 만듭니다.
갈멜산에서 돌아온 엘리야는 이세벨의 영과 직면하게 됩니다. 세상의 권세는 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세는 말씀입니다. 즉 물리적인 힘과 영적인 능력입니다.

인간이 물리적인 현상에 국한될 때, 영적인 능력은 소멸됩니다.
탈진은 영적인 능력이 현실 앞에서 고갈 되었을 떄,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인간으로 돌아온 엘리야는 이세벨의 복수의 영에 사로잡혀 침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침체란 자기 기준, 자기 판단, 자기 사역을 중심으로 할 떄,
빠지게 되는, 늪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아룁니다.

'자기만 열심히 하나님을 위하여 이렇게 사역을 하였는데 왜 이런 위험에 빠지게 하시는 가?'를...
그러나 의외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 외에도 칠천인을 남겨두었다'
알려주시며 (19:18) '먹고 일어나 기운을 차리거라'하며 할 일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인간의 시력은 현상만을 바라볼 수 있으나 하나님의 안력은 가리워진 곳까지 다 보십니다.
믿음이 인간의 시력을 하나님의 시력으로 바꾸어 볼 수 있더록 만들어주는 성령의 안경입니다.
돌보심의 신앙에서 책임져주시는 믿음으로 다시 회복한 엘리야는
마지막 사역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내 인생은 내 책임아래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책임아래 주님이 사는 것입니다.

4)엘리야는 화려한 승천으로 우리에게 휴거가 어떤 것임을 보여준 선지자가 되었습니다.(왕하 2:11)

인간은 누구나 죄로 말미암아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안에 있으면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살아서 영원한 삶으로
옮겨질 수 있음을 엘리야는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신약의 주님이
공중재림하실 때에 성도들도 공중에 들림받아 올라 갈 수 있음을 보여준 증명입니다.
 
다만 예수님안에 있는 삶을 사는 성도에게만 허락되어질 것입니다.
즉 그분이 돌보시고 그 분이 책임져주심으로 온전히 삶을 맡기고 말씀따라
동행하며 사는 삶을 말할 것입니다. 안과 밖은 누구를 위하여 살고 있느냐로 정해질 것입니다.

엘리야는 광야생활에서 승천까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위하여 산 선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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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을 본
마르다(Martha)와 마리아(Mary)

(요 11:40)
 


1. 인적 사항: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다녀오실 때는 항상 베다니 마을에 들리시곤 하셨는데
그 이유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가 주님을 극진히 섬겼기 때문입니다.

마르다는 결혼한 여자로 남편은 예수님께로부터 질병을 치료함 받은 문둥이 시몬이라
일컬음을 받은 사람이며, (마 26:6) 오라비인 나사로와 여동생인 마라아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나사로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의미이고, 마르다란 '여주인'이란 의미이고,
마리아는 '높여진 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섬긴 여인들중에 가장 헌신으로
섬긴 자매들로 베다니 지역에서 상당히 높은 사회적 특권을 지닌 집안이었습니다.

이들은 죽은 오라비 나사로를 주님께서 살리시는 기적을 통하여 더욱 주님께
영광 돌리는 집안이 되었으며 다시 살아난 나사로를 보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 집을 방문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데 중요한 전도의 역할을 하는 집안이 되었습니다.

2. 그들 각자 신앙의 특징들:

1) 마르다:

(1) 섬기는 은사를 지닌 여인 이었습니다. (눅 10:40)

      마르다는 섬기는 봉사를 은사로 승화시켜서 봉사한 모법적인 여인이었습니다.
봉사는 자신의 의지와 성향대로 진행할 때, 자기의 의도 보람도
목적달성도 자신의 기쁨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봉사중에 자신의 뜻대로 안되면 불편한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마르다는 주님이 자신의 집에 머물렀을 떄, 혼자 바빠서 동생 마리아가
돕지 아니한 것을 주님께 불평하였습니다. (눅 10:40),

그러나 그 때, 주님이 하신 말씀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가지만 하든지혹 한가지만 만이라도 족하니라' 하신 말씀을 깨닫고
 '아! 내가 다 하려는 것보다 내게 있는 것 한가지만
이라도 기쁘게 봉사하면 되는 구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나사로가 살아나서 집안에서 잔치를 할 때는 제자들과
주인 삼남매등 모두 17명의 음식을 준비할 때 (요 12:2) 누구에게도
불평없이 혼자서 모든 것을 준비하였습니다.

봉사의 의미를 일에서 대상으로 바꾸는 헌신, 이 것이 참된 은사의 활용입니다.
마르다는 섬김의 은사를 올바르게 보여준 여인이었습니다.

(2) 부활 신앙을 깨우친 여인이었습니다. (요 11:25-27)

부활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과 부활신앙을 지니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마르다는 부활을 믿는 신앙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날에는
죽은 자 모두가 부활할 줄을 아나이다' (요 11:24)
라고 하였읍니다.

그 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날이 아니라 언제든지 죽어도 살아
날 수 있고,
더우기 살아서 공중에 들림받아 영원히 죽음을 겪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한다.
이 것이 부활 신앙이란다' 라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소원과 신앙사이에 의지가 있으면 상황이 비정상일 때는 불일치가 일어나게 되지만,
 하나님이 계시면 비정상일 때도 일치가 일어납니다.

구약의 부활 신앙을 지닌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게
하셨을 때,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음에서 살려 주시던지
다시 태어나게 하실지를 믿고 이삭을 죽이려하였습니다.

마르다의 신앙도 죽은 오라비 나사로가 지금 당장 살아날 수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 들이게 됩니다. (요 11:27)

(3) 하나님의 영광을 본 여인이었습니다. (요 11:40)

믿음의 본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원형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뜻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신 분이었습니다. 주님은
마르다에게 너도 나같은 믿음을가지면 하나님의 기적을 볼 수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사람들은 대개 보아야 믿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믿어야 봄을 말하고 있습니다.(요 11:40)

회당장 야이로도 로마 백부장도 주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러자 죽은 딸이 살아나고,
중풍병들은 하인이 낫음을 보았읍니다. 마르다도 주님의 가르침 을 믿었읍니다. 그러자   
오라비 나사로가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마르다는
여인 중에 최초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서 신앙고백을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 11:27)

2) 마리아:

1) 영성을 사모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눅 10:39)

일반적으로 집에 손님이 오면 제일 중요한 일이 접대입니다.
특히 주인의 일손이 부족할 땐, 함께참석한 사람들도 도와야하는데
하묾며 동생이 언니를 돕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에 벗어난 일입니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예수님의 곁에 앉아 말씀을 듣기를 더 원했습니다.

여기에서 마르다는 주님을 접대해야 할 손님으로 생각한 반면,
마리아는 영생의 말씀을 주시는 구세주로 여겼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육신이 갈급한 자는 음식을 찾고 혼이 갈급한 자는 지식을 찾으나,
영혼이 갈급한 자는 말씀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도 영혼이
가장 좋은 것이 자기에게 가장 좋다는 것을 마리아는 알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마리아에게 주님은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다'고 칭찬 하셨습니다.
좋은 편이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편입니다. 영성은 예수님을 따르려는 마음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영혼을 깨우쳐 줍니다. 말씀을 많이 깨우칠 수록 영성은 깊어갑니다.
신앙은 영성의 깊이로 자라납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신앙을 위하여
항상 영성의 자리를 택하였던 사람입니다.   

(2)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요 12:3)

사람은 각자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표현방법이 다릅니다. 사랑의 정도에 따라 점점 드리기
어려운 것을 내어놓게 됩니다. 마르다는 주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을 자신의 봉사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신 전부를 드렸습니다.

첫째는, 미혼 여성이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향유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 향유의 가치는 300 데나리온 즉, 1년치 임금에 해당되는 금액입니다.
 마리아가 지니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값진 것을 드린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진정한 소유를 지불함으로 가치를 입증하게 됩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소유 전부를 드린 것입니다.


둘째는,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향유를 부은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그 당시 풍습으로는 여인이 머리를 동여 매지 않고 공중 앞에 나가는 것은
부도덕한 여인의 표증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신의 가장 귀한 몸의 지체로
예수님의 가장 낮은 지체인 발을 씻음으로 진실로 경배함을 보였습니다.

사랑은 시선을 초월합니다. 사랑은 관습을 초월합니다.
오직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표현을 행할뿐입니다.   

셋째는, 마리아는 향유를 또한 주님의 머리에도 부었습니다. (막 14:3)

이 때 제자들은 이 행위를 나무랬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큰 돈을 허비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 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그녀는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마 14:6)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주님은 '자선과 경배'는 다르다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신변을 아는 것보다도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눈 앞에 죽음을 앞둔 주님의 마음은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 까지도, 그러나 마리아는 성령님의 조명을 통하여 막연히 알았습니다.
그 행위를 예수님은 자신의 장사를 미리 준비하는 행위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사이에 의지가 있으면 자기 중심적인 마음으로 순수함을 굴절시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사이에 성령님이 계시면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는 예시가 됩니다.
그 당시 마리아만이 진정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인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향해 '네가 좋은 편을 택했고', '좋은 일을 행하였다'하셨습니다.
 
신앙생활에서는 사역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역전에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네가 진정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
그 사랑으로 나를 위하여 네가 일하고 있는 것인지'
를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결여된 사역은 성공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으로 바라보는 사역은 성화를 만듭니다.

결론:

마르다와 마리아는 모두 참 소중한 예수님이 사랑하신 여인들이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녀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오늘날 프랑스 지중해 근처 항구인
마르세이유로 가서 그 곳에서 평생 주님을 전파하다 죽었다고 합니다

한 여인은 섬김으로 한 여인은 헌신으로 자신의 삶을 주님께 드린 아름다운
그들의 신앙은 영원히 그리스도인들의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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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대 제사장 아론 2/Aaron
(히 5:4)



4. 하나님의 은혜로 사명을 감당하는 아론


아론은 동생 모세에 비하면 신앙도 믿음도 학문도 능력도 훨씬 못미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여호와께 여러가지 실수를 저지르는 우유부단 한 성격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초대 대제사장으로 선택을 받게 되었고 끝까지 사명을 잘 감당함으로
가문의 후대에 이르기까지 제사장 직분을 이어받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같은 은혜는 아론의 성품중 하나님께 인정받은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볼 때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자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1) 모세의 대언자로 부르심을 받은 아론 (출 4:14-16)

 모세는 인생의 가장 큰 폭의 두 환경을 산 사람입니다. 즉 왕자와 목동, 인생의 가장
가능성이 큰 환경과 가장 가능성이 없는 삶을 경험하면서 모세는 겸손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 아니라 과거 왕궁에서의 교만했던
자신에 대한 후회와 현실에 무능한 자신의 모습에 대한 일종의 포기의 겸손이었습니다.
즉 의욕상실 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레위지파의 지도자로, 또한 후손에게 이르는
축복도 내려주시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사명을 부득불 사양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입이 어눌하여 말을 잘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한 불순종 이었습니다. 한편 애굽에서 여전히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던 아론도 똑같이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이르시되 광야에 가서 모세를 맞으라 하시매

그가 가서 하나님의 산에서 모세를 만나 그에게 입맞추니.' (출 4:27)

하나님의 부름에 응담하여 모세의 밑에서 기꺼이 일하고자 했던 아론의 순종하는 모습은
하나님께로부터 레위지파를 인도하는 우두머리로 인정을 받는 축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사역은 당대의 자신의 역할만으로 끝나는 반면, 아론과 그 후손들은
대대에 이르도록 레위지파 가문이 대제사장직을 이어내려가는 전통을 만들게되었습니다.
 
'아므람의 아들들은 아론과 모세니 아론은 그 자손들과 함께 구별되어
몸을 성결케하여
영원토록 지극히 거룩한 자가 되어 여호와앞에 분향하며
섬기며 영원토록
그 이름을 받들어 축복하게 되었으며,' (대상 23:13)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인 순종은 평소에 꾸준한 순종의 신앙생활을 배운 태도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동생밑에서 대언자의 역할은 쉬운일은 아니지만, 여호와의 말씀을
자신보다도 우선되어야함을 실천한 겸손한 자세를 아론은 우리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2) 대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은 아론 (츨 40:13)


 
지금까지는 이스리엘 백성들 사이에서 각 가족의 가장이 가족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래서 팔요할 때마다 각자가 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으나 이제부터는 모든 가족이 모여
한 민족을 형성하였기 때문에 성막이 세워져야하고 이에 따른 대표 제사장제도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지도자겸 제사장 직도 함께 겸하였으나 종교의식법이
새로 제정이 되고 성소가 세워졌음으로, 하나님께서 의식법 책임자를 지명하게 된 것입니다.

아론은 성막을 짓기전 하나님으로부터 제사장으로서의 지명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출 28:1)
그러나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 동안 율법을 수여받는 동안 백성들의 요구에 못이겨
금송아지를 만드는 큰 죄악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의도는 아니었을 지라도
지도자로서의 실수를 한 것이었습니다. 이 때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것을
모세의 간절한 중보기도를 통하여 용서받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진노하사 그를 멸하려 하셨음으로,
내가 그 때에도 아론을 위하여 기도하고.'(신 9:20)

아론은 그 때에 이미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중보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아론을 아무런 문책없이 살려주셨을 뿐만아니라 성막이 완성되자 처음 지명하신대로
대제사장직에 그를 취임하게 하신 것입니다. 아론이 하나님께 가장 은혜를 깊이
깨달은 것은 이 때였을 것입니다. 은혜는 복종을 일으키게 합니다.
그로부터 아론은 38년간을 죽을 때까지 맡은 바 책임을 다하게 됩니다.


3) 싹난 지팡이로 택함을 받는 아론 (민 17:8)



모세의 사촌 고라는 아론이 제사장이 되었다는 것과 엘리사반이 고핫가계의
우두머리로 삼은 일 (민 3: 30)에 대하여 기분이 나빴으며, 르우벤지파의 후계인 다단과
아비람은 유다지파가 이스라엘 진영의 선두에서 명예를 차지 했다는 것에 불만을 품고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였습니다. 이에따라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음에도 나머지
추종자들은 생각하기를 '한 지파의 우두머리가 제사장이라면 왜 레위지파만
제사장이 될 수 있느냐?' 란 불만으로 다시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각지파에서 지팡이 하나씩을 가져오라 하시고 증거궤앞에
두시게 한 후 그 다음날 아론의 지팡이에만 살구나무 싹과 꽃과 살구가 열리게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지명하신 제사장에게는 영예와 그를 통한 축복이 임한 다는 것을 계시한 것입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하나님께서 만나 항아리와 십계명 돌판과 더불어 증거궤속에 영원히
보존하도록 하셨습니다. 모세의 기적을 일으킨 지팡이는 보존이 되지 못하였어도
제사장 지팡이는 보존이 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앞에 존귀함을 입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5:4절에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존귀한 자로 여김을 받은 아론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성도 모두 하나님께 아론과 같이 택함받은 일군이 되어 남은 삶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도록 다 같이 노력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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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대제사장 아론1 / Aaron

(출 28:3)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믿음의 조상을 삼으시고 그의 후손들로
하나님나라의 백성을 삼아 나라를 다스리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같은 신정국가가 이뤄진 시기가 바로 430년후 출애굽을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음으로 드디어 시작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정국가의 체제는 종교의식법을 기준으로 세워져야 했기때문에
백성을 인도할 영적지도자와 아울러 제사를 주관할 의식법 지도자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12지파중 레위 지파를 임명하셨고, 그 레위지파중
고핫자손의 아론가문을 선택하여 종교직의 핵심인 제사장직을 수행하도록
지명하셨습니다. 이에 첫 대 제사장으로 임명받은 사람이 아론이며
이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을 예표하는 첫 제도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1. 인적사항

출애굽의 주역은 레위지파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신 이유는 야곱의
첫째아들 르우벤은 서모와 간통한 죄로 장자권을 박탈당했으며 (창 35:22)
둘째 아들인 시므온은 가나안 여인을 아내로 삼은 연고로 순수성을
잃었기 때문이며 (출 6:15) 셋째 아들인 레위는 충성되고 순수하였음으로
4대를 기술하심과 더불어 모세와 아론을 주역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에 아론은 레위의 아들 고핫의 손자요, 아므람과 요게벳이 낳은
미리암, 아론, 모세 3명의 자녀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출 6:20)

그는 모세보다 3살 위로 유다족 암미나답의 딸 나손의 누이 엘리세바와 결혼하여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 등 네 아들을 둔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모세의 후손들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반면, 아론의 후손들이 끝까지
기록되어 내려오는 이유는 제사장직의 혈통과 성결성 때문입니다.
아론은 나이 83세가 되어 모세의 대변인이 되었으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의식을 대표하는 대제사장으로 위임받은 것은 84세 때이나
취임은 그 다음해인 85세때, 곧 출애굽 2년 1월 1일 성막을
봉헌한 날에 취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출 40:12)
 
2. 생애

모세보다 3년 먼저 태어난 아론은 그 이름의 뜻이 '견식이 있는' 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로보아 아론은 남에게 설명을 잘 할 수 있는 사리분별과 설득력이 있는 은사를
지닌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모세가 애굽에서 도망하여 나온 후에도
계속 애굽에 남아 노예 생활을 해 오다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그 시점에
애굽에서는 모세를 죽이려 하던 바로왕이 죽었음으로, 이를 알리러
모세를 찾아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아론에게 지시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출4:27)

 그로부터 그가 호르산에서 123세의 나이로 죽기까지 40년간 (B.C.1446-1406)
모세와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하였으며 형인데도 불구하고
동생 모세를 추종하며 그를 도운 것으로 보아 성품이 겸손하고
자신이 맡은 일을 꾸준히 하는 사명감의 소유자였습니다.

3. 공적 및 실수

그가 모세를 도와 이룬 공적에는 첫째, 모세의 대언자가 되어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조리있게 전하는 사역을 40년간 하였으며

둘째, 대제사장으로서 종교의식을 거행하는데 성별된 생활과 임무에 충실함으로

후대에 이어내려오는  제사장직의 기초를 새웠습니다.

셋째,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중보기도함으로

재앙에서 건져내 축복을 내려 주시도록 기도하였습니다. (민 6:23-26)  

넷째, 여호와가 모세에게 명한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쳤습니다. (레 10:11)


그러나 이와같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연약함이 있었던 아론은 실수를 져지르게 되었습니다.

첫째,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백성들의 우상 제작 요구에 따라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출 32:1-6)

둘째, 대제사장으로서 제사장직을 맡고있는 아들들을 잘 지휘감독 해야했음에도

불구하고 소홀히하다 나답과 아비후가 제사장 직무수행 첫날, 하나님의 규정을 어기고
마음대로 분향하다가 급사당하는 사고를 방지하지 못했습니다. (레 10:1-5)

셋째, 모세가 구스여인과 결혼한 것을 보고 누이와함께 모세를 원망함으로,
 하나님의 세우신 권위에 맞서
하나님의 진노를 샀습니다. (민 12:1-16)

넷째, 가데스바네아에서 반석을 두번침으로 하나님의 지시를
제대로 순종하지 않아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은혜를 입지 못했습니다. (민 20:10-12)


아무리 훌륭한 신앙인물들일찌라도 하나님을 섬기는데 여러번의 실수를 하게됩니다.
그러나 그 실수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햬를 깨닫고 나서는
감사와 순종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아론도 제사장으로 임명을 받기전 금 송아지를 만드는 큰 실수를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해 주신데 대해
너무 감격한 아론은 충실히 사명을 감당함으로 그의 계통의 혈육들로 하여금
이 영광된 가문의 성직을 이어받게 만들었습니다.

구속사적인 면에서 예수님이 대제사장직을 예표로 하는 구약에서의
종교의식의 대제사장직을 수행한 아론의 행적은 매우 중요한 사역의 시작이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들도 제사장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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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많은 제자 도마2
/ Thomas
( 요 20:25)
  

4. 도마 신앙의 특징

도마의 신앙을 관심있게 보는 이유는
너무나 우리가 그와 같은 신앙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자기 중심적인 신앙으로 출발했을자라도, 나중엔 사도로서
주님을 위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 제자로서의 삶을 살았음은
우리의 신앙에 도전을 줄 뿐만아니라 그의 신앙을
본받게 만드는 감동적인 깨달음을 주기 때문입니다.

1) 도마는 의리있는 정직한 주님의 제자였습니다. (요 11:16)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시도를 멈추었다는 것이요, 대신 믿음으로 주어진 말씀에 따라
살겠다는 것을 받아들인 것을 의미합니다.

즉 주님을 향한 기대가 나의 유익을 위한 것으로 또한 내가 주님께
칭찬받을 일을 함으로 시작했던 신앙의 차원에서 넘어가 주님과
모든 일에 동거동락하는 순종의 마음으로 바뀌어 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도마는 제자들중 제일 먼저 이 비결을 터득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려 예루살렘에 다시 올라가시려 하였을 때,
모든 제자들은 위험을 느꼈기 때문에 만류하였습니다. (요 11:8) 그러나 이 때
도마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 (요 11:16)하고 제일 먼저 따라 나섰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의 예수님을 통한 세상에 미련을 가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세상의 연연하는 미련 때문에 주님을 따르고자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볼 때, 도마처럼 먼저 자신의 미련을 끊고
오직 주님만을 따를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함을 느끼게 됩니다.

도마는 유익을 위하여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의리가 자신의
유익을 버리게 만드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2) 도마는 목적을 위한 의심을 가진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요 20:25)

의리가 깊은 사람일 수록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처신은 상대방의 불행을 보면서
자신도 모든 괴로움과 슬픔을 홀로 감당하려는 성품이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은 도마의 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도마가 스스로의 괴로움을 수습하고
제자들 모임에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결국 도마는 다른 제자들 모인 곳으로
돌아왔고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입니다.
그러나 도마는 이미 예수님께 대한 자신의 입장을 스스로의 괴로움을 통하여
주님의 죽으심에 대해 정리한 마음을 가진 상태였습니다.

단호한 성격을 지닌 그에게는 다른 제자들의 말이 허튼 말처럼 들린 것입니다.
그래서 지신의 이성적, 의지적, 성격은 그들의 말을 믿지않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요 20:25)

도마는 대중에 휩쓸리지 않는 성격을 가졌습니다.
확신이 없는 한 남과 타협하지 않는 성격을 지녔습니다.
도마는 확실하여야만 했습니다. 즉 그는 확신에 이르기 위하여 의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확신에 도달하기만 하면 확신한데로 자기 자신을 맡기는 완벽한 자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의심과 도마의 의심의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즉 목적이 있는 의심과 목적없이 불안한 마음으로서의 의심입니다.
전자를 목적속에 의심을 둔 한 마음이라면, 후자는 믿음과 의심인
두마음을 함께 갖고 있는 상태임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의심이 풀렸을 때, 한 마음속에는 목적만이 남게 되지만
두 마음 속에는 여전히 다른 의심이 들어올 자리가 남아 있게 되어
곧 의심하는 생각이 또 다른 마음에 들어와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전자는 주님이 증명을 보여 주시지만, 후자는 다른 의심을 위하여
자신의 증명을 나타내지는 아니하십니다. 바로 이 것이
도마가 주님을 다시 체험하는 동기가 된 것입니다.

3) 부활하신 주님을 본 도마는 예수님을 올바르게 깨달은 자가 되었습니다. (요 20:28)

신약성경에서 주님을 옳게 표현한 고백이 두번 나오는데 한번은 베드로의 고백으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6)라는 말과,
도마가 고백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 20:28) 사이에
베드로의 고백과 도마의 고백의 차이점은 전자가 복음안에서의 믿음의 고백이라면
후자는 믿음안에서의 증인의 고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더욱 정확히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올바르게 깨달은 표현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도마의 믿음을 온전한 믿음으로 승화시켜 주셨음을봅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없는 자가 되지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 20:27)

이 말씀은 예수님이 없는 자리에서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한 말입니다.
도마의 놀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 마음 속 생각까지도 알고 계시는 분, 주님은 진정 하나님이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결국 도마는 자신의 의지도, 이성도, 감각도 넘어선 신앙을
소유한 사람으로 진정한 믿음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주님은 도마를 통하여 우리에게 진정한 믿음은,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임을 알려주십니다.
믿음은 영적인 것입니다. 영적인 것이 영적인 것으로 되려면 보이지 않는 것이
영적인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에만 바로 이루워지게 됩니다.
믿음이 가시적인 현상과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평안으로 끌어올려줄 수 있는 것은
보지않고도 믿을 수 있는 영적인 믿음이 있을 때 은총으로 받게 됩니다.

지금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신 것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것과 같은 체험은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그러나 영으로 오신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보이시지는 않지만
옛날과 똑같이 역사하심을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계십니다.
결국 주님은 12제자와 초대교회 모든 성도들을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대신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120문도는 영적인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이 순교하였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들이 12 사도들 입니다. 우리도 성령님께 영적인 믿음을 내려주시도록
간구하여 도마와같이 바른 신앙을 갖도록 다 같이 노력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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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많은 제자 도마1
/ Thomas

( 요 20:25)




1. 인적 사항

예수님의 열두제자중 한 사람인 도마는 갈릴리 출신으로
직업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어부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헬라어로는 '디두모'이며 아람어로는 '도마'로 불리었으며
그 뜻은 쌍둥이 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히브리어 계열로는 '테메스'라고 불리어지는데 이는 '의혹을 풀다'
의미가 있음으로 도마는 이름 그대로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다 손에 못자국을
만저보고야 자신의 의혹을 해결한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2. 주요 생애

A.D. 27년경 예수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뒤 3년 공생애 기간동안 주님곁에
수행하였으며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기 위하여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베다니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하셨을 때, 모든 제자들이 위험하다고
만류하였으나 그 때 도마만큼은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요 11:16)하며
용기와 의리를 지닌 모습을 나타내었습니다. 또한 그는 영적으로는 밝지 못한
현실상황에 정직한 성품을 지녔음으로, 예수님께서 즉음을 앞두고 계셨을 때,
제자들의 마음이 근심으로 가득찬 모습을 보시고, '내가 죽으면 아버지께로 가서
너희들의 처소를 천국에 준비하고 다시 데리러 오겠다'라고 위로하셨습니다.

이 때, 도마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자신들을 구원한다는 진리를 알지못한 나머지
예수님께 질문하기를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요11:14) 이 때 도마의 무지적 발언은 주님으로 하여금
구원의 핵심적 진리를 말씀하게 하였습니다.

'내가 곧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또한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도 동료들이 모두 주님을 만났다고 이야기해도
전혀 믿지 못하고 자신의 눈으로 보고 직접 손의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보아야만
믿겠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지나치게 의지하는 타입의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드디어 만난 도마는, 기독교의 핵심을 이루는
 신앙고백을 다음과 같이 하게 됩니다.  

'나의 주시요 나의 하나님 이시니이다.' (요 20:28)

 그 이후 주님의 승천하심을 목격하고 마가다락방으로 돌아와 120 문도들과 더불어
기도하다가 오순절에 성령충만함을 받고 복을을 전하러 떠났다고 합니다.

교부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파르디아에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에뎃사'에서
그리고 말라바해안 지역으로서 후에 시리아인 그리스도인들의 식민지가 되었던
인도의 한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리아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 스스로를 '도마 그리스도인' 이라고 불렀고, 도마는 그들에 의하여
시리아지역 최초의 교회설립자로 인정되었다고 합니다.

3. '도마행전'이라는 외경을 인용하여본 그의 사역

예수님이 죽으신후 제자들은 어떤나라로 복음을 전파하러갈지 제비를 뽑았을 때,
도마는 인도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 때 도마는 거절하기를 자기는 '긴 여행을 할 만큼
강건하지도 못하고 더우기 히브리 사람인 자기가 어떻게 인도 사람들에게
설교할 수 있다는 말인가?'하고 말했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밤에 나타나셔서
 '두려워말라 도마야! 인도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 나의 은혜가 너와 함께 할 것 이니라.'
하셨답니다. 그래도 도마는 '인도에만은 가지 않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답니다. 그런데
이따금 '아비네스'라는 상인이 인도에서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그는 숙련된 목수를
찾아내어 인도로 데려오도록 하라는 '군다 포로스' 왕의 명을 받고 파견하였던 자였습니다.

도마는 목수였음으로 예수님이 시장에 있는 아바네스에게로 오셔서 목수인 도마를 팔았습니다.
그리고 계약서를 쓰기를 '목수 요셉의 아들인 나 예수는 이름을 도마라고 하는 나의 노예를
인도의 군다 포로스 왕의 상인 아바네스에게 팔았음을 인정함'이라 썼답니다.

그러자 이 증명서를 가지고 도마에게로 간 아바네스는 '내가 이분으로 부터 너를 샀으니
 따라 오너라.' 하고 명령하자 결국 도마는 이에 복종하고 따라 갔다고 합니다.

인도에 도착한 도마에게 군다 포러스왕은 궁전을 세우도록 명하고 재료를 사고 노동자를
고용하기에 족한 돈을 도마에게 주었는데 도마는 그 것을 모두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결국 왕이 궁전을 다 세웠는지 확인하자 도마는 말하기를
'당신께서는 지금 당장 그 것을 보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는 날 그 것을 보실 수가 있겠습니다.' 라고 했답니다.

이 말을 듣고 처움에는 왕이 심히 노하였으나 그러나 종국에는 왕도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바 되어 도마로 인도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할 수 있게 하여 주었답니다.

그 후에 전도를 하던 중 주후 72 년경 바라문 교도들에 의하여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고 전해지며 인도 마라폴에 장사되었다고 합니다.
인도의 성(Saint)도마 교회는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상은 전설에 지나지 않으나, 이 전설의 내용에는 일종의 사실이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도마는 한번 승복하기가 어렵지, 일단 승복한 후에는
완벽한 처신으로 자신을 헌신하는 결단력있는 신앙인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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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인류의 조상
노아/Noah
(창 6:9)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으로 멸하신 주요동기 중의 하나가 천년동안이나
죄를 짓고 살고있는 인간의 수명 때문이었습니다. 선한 행위는 오랜 세월동안
보아도 마음이 흐믓할 수 있으나 죄악은 천년동안 한 사람이 지을 때 모두가
다 그 죄악에 물들고 말 것입니다. 술주정, 폭행, 살인, 강탈 등이 한 집안에서
900년동안 지속된다면 모두 다 견디지 못하고 그런 행동을 좇고 말 것입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짧은 생애와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이후에 인간의 수명을 백년도 못되게 줄이셨숩니다. 그리고 이 심판을
통하여 새 인류의 조상으로 선택한 사람이 노아입니다.

1. 인적 사항

노아는 아담의 10대 손이며 셋의 후손으로 '라멕'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라멕은 인간이 죄로인해 삶에 저주가 왔음으로 전생애를 땀흘리고 노동으로
소비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한탄스러움을 느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로 받은 많은 지혜와 재능을 더 훌륭한 삶을위하여 즐겁게
선용할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오직 육신의 생명을 지탱하기 위하여
 모두 소비하는 삶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자녀의 이름을 '노아'라 지었고
그 뜻은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셨으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창 5:29) 라는 '휴식'을 의미한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노아는 500 세가 될 때까지 자녀가 없다가 그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습니다.
500 년간의 그의 생활을 좀더 하나님과의 근원적인 관계를 추진한 삶으로
인간의 존재의식과 거룩함을 추구하는 삶을 살도록
부모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2. 주요 생애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인간들에게 말씀할 필요를 느끼실 때가 있는데
그 시기는 주로 새 일을 계획하시거나 일의 진행을 마칠 때 입니다.
이때 선택되어지는 사람은 외모와 능력의 훌륭한 사람이 선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자격이 있게 됩니다. 즉 성결이
교제의 통로를 열어주게 됩니다. 노아가 나이 480 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120 년후에 이 세상을 홍수로 멸망시키실 것을 들려주시며 그 때를 위해
방주를 짓기를 명하셨습니다. 120 년에 걸친 방주의 완성을 보시고,

노아와 아내 그리고 세 아들과 자부들을 방주에 넣으신 하나님은
 40일간의 홍수를 땅에 일으키심으로 온 지면에 있는 모든 생물들은
 다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주로 댓가를 지불할만한 희생후에
오게됨을 볼 때, 노아의 120 년간의 방주 건축 완성은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고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인지를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홍수 후에 인류의 조상이 된 노아는 그후 350 년간을 새 땅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지키며 잘 살다가 950세가 되어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인류의 3 대 조상인 전 인류의 조상 아담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함께새 인류의 조상 노아가 되어 3대 조상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3. 삶의 특징

1) 의인으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의 완전한 자
그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였으며 (창 6:9)

의로움과 믿음의 성숙은 시간을 거쳐 이루워지는 열매입니다.
노아는 480년 동안을 말씀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 것을 뒷받침하는 말이 v 8절에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라는 구절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게서 늘 동행하시며 돌보아 주셨다는 뜻입니다.
남과 달리 480년간을 여호와만 바라고 살아온 노아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신앙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교제하는 삶에는
항상 양심이 깨어 있습니다. 그 시대에는 오직 양심만이 옳고 그름을
가름하는 판단 기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보고 당세에 완전한 자라 하심은 그가 완벽할 정도로
거룩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시대의 세상 척도로 보았을 때
오직 양심을 따라 산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요즈음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느낍니다. 세상풍조와 신앙조류가
인간 중심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480 년간의 노아의 행적을 보고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불러주셨다면 오늘날 우리의 전생에 80년을 다 드린다해도
노아의 경건한 신앙생활에 1/6도 안되는 기간임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실 수 없는 이유를 알수 있을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을 실망시킨 적이 없이 산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실망
시키지 않는 삶이 의인의 삶임을 노아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2) 120년 동안을 방주를 짓는 일에 헌신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창 6:7)

헌신하는 삶이란 오로지 한 가지 일이 끝날 때 까지 전념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은 공부에도, 회사와 사업에도, 국가에도 헌신하며 지냅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을 위하여 오로지 헌신하는 삶을 살기에는 쉽지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대신관계보다(하나님과의 관계) 대인(사람과의 관계) 및
대물관계(물질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쓰십니다.

사람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제일 먼저합니다. 지치지 않습니다.
 싫증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14년을 수일같이 지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120 년을
오직 방주짓는 일에 헌신 했습니다. 그의 일생의 1/8에 해당되는 기간입니다.

우리에게는 적어도 10년은 오직 하나님의 일에만 전념한 것이 됩니다.
조급한 마음은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나타나지만 인내하는 마음은
하나님 중심의 삶에서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줄 아는 사람이
헌신하는 삶도 살 수가 있음을 방주제작에서 볼 수 있습니다.

3) 갱신된 축복을 누리고 살았습니다. (창 89:1-3)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에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죄와 더불어 축복도 사라졌습니다. 갱신된 축복은
 죄가 멸하여졌기 때문에 다시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예수님이 죄를 씻어주셨기 때문에
축복이 회복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된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노아는 아담에게 주신 축복외에 두가지를 더 받아 누리고 살았습니다.

(1) 육식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자손의 급증은 양식의 결핍을 가져올 수 있고 야생 동물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보다 강건함이 필요하였기 때문입니다.

(2) 무지개 언약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환경이 풍족한 가운데 있었으나,
홍수 이후에는 모든 것이 황폐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 때 위로와 약속으로 무지개를 보라 하셨습니다.

무지개의 일곱색깔은 생육, 번성, 충만, 다스림, 건강, 평안,
심판 없음의 7가지 약속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잃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어진 예수님의 갱신된 축복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오늘 노아의 신앙의 삶을 본받아 참된 의인의 삶을 회복하여
축복가운데 사는 그리스도인이 다같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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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의 조상 아담/Adam
     (창 1:26)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경건한 자녀를 얻어
함께 살기 위해서 지으신 것입니다. (말 2:15)
이 뜻에 따라 처음 지음을 받은 사람은 '아담'이며
그 이름의 뜻은 '붉은 흙'이란 의미로 흙으로부터
인간이 만들어 졌음을 반영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육신적인 부모가 없으며,
하나닙께서 자신의 생기를 직접 불어 넣으셔서
인간으로는 처음으로 살아있는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인류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앞에 불순종함으로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당하여 저주받은 세상에서 아내 하와와 함께
살면서 가인, 아밸, 셋 등의 자녀를 낳고
930년동안 살다가 죽었습니다.

1. 아담의 모습 (창 1:26)

하나님께서 모든 생물들을 지으셨을 때는 당신이 보시기에 좋은대로
창조를 하셨으나 인간 만큼은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영적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형상'이란 그분의 내면적 모습을 의미하는 말로
'의, 거룩, 사랑' 등 속성을 나타냅니다.

2) '하나님의 모양'이란 자신의 외면적 모습을 의미하는 말로
'빛, 인격(지,정,의),영원하심, 전능하심'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았고, 모습도 인격도 능력도 영생도
이어받아 모든 생물을 다스릴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된 것입니다.

2. 아담의 본분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8)

아담이 행복하게 살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능력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복과 능력은
형편과 노력에 달려 있기 보다는 선택에 달려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즉, 하나님을 선택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하고 극복할 수 있는
삶을 살수 있으나, 죄와 자신을 선택하면 모든 삶이 풍족하여도
멸망과 불행속에 살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 축복받은 아담은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한
사명을 받은 삶을 살도록 지음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시고 거룩한 존재로, 그 말씀에 순종하여
경건한 많은 자손을 생산케 하심으로 모두 죽음을 맛보지 않고
생명과일을 먹은 영체가 되어 함께 천국에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인간은 악을 모를 때, 거룩과 경건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것은
유사함에 불과할 뿐이지, 하나님 자신이 지닌 속성과 동질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한계성을 미리 아셨고, 타락한 피조물인 인간을 예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게 하시어 하나님과 같은 동질의 속성을 갖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비록 아담이 악을 아는 존재가 되었을지라도 생육하고 번성하는 삶으로
자손을 많이 생산함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킨자가 되었습니다.        

2) 땅을 정복하라는 개발의 사명을 받은 삶으로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로 받은 계시적 지식과 지혜는 동물들과는 달리
 계속 개발, 성장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원시적인 , 먹고 사는
 본능적인 삶에 국한 된 삶을 살도록 하시지 않고 지,정,의를 주셨음은
이 세상을 천국과 같이 발전시켜나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천국을 닮아 가도록 모든 요소가 갖추어진 곳이기 때문에
아담에게 연구개발하여 천국과 같은 문명과 문화를 이루는 삶을 살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이 이루어논 문명은 죄의 용도만 제외된다면 노예의 홍수로
인하여 폐허가된 이땅에 정말 놀랄만한 편이의 발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든 인간이 살 때 이보다도 더한 개발을 얼마든지
이룰 수 있음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놀고 먹고 게으른 것은
죄로부터 기인된 현상이기 때문에 발전이 없습니다.)

3)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신 목적은 맡기신 모든 것을 잘 관리하여 모두 존재의
목적을 이루며 살도록 보살펴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두 아름답고
황홀한 것으로 가득차있습니다. 본성이 선하시고 아름다우시기 때문입니다.

즉, 독창도 좋지만 합창이 낫고, 합창보다 오케스트라가 더욱 조화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듯 하나님께서도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신 모든 창조물은 계속 자신들이 성숙된
존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께 기쁨과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서 가장 하나님게 영광을 돌리는 독창적인 존재일뿐 아니라 동물들과
합하여 합창하고 온 생물들과 합하여 조화의 아름다움을 더욱 개발해야합니다.    

3. 아담의 타락

아담이 지으심을 받은 후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순종하며 선을 충분히
이룰 수 있을 만큼 영적으로 성숙을 이루지 못하였을 때, 사탄 마귀는
하루빨리 선악과를 따 먹게 함으로 악을 받아들여 아담의 자유의지가
선보다 악을 추종하도록 하나님을 배반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것을 아셨음에도 허락하신 것은 자유의지의 중요성을
깨닫고 온전한 선택을 하여 진정한 순종과 선을 알도록 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악과 사탄의 정체를 아는 자는 더욱 선과 하나님을 추종하는
것이 중요한 일인지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1) 죄는 뱀을 통하여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창 3: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창 3:1)


'간교'란 말은 '교활하고 기회주의 적인 성품'을 말합니다.
고대 중동의 에집트 이야기에 따르면 뱀은 모든 짐승 가운데 가장 미끈하고
화려하며 지혜롭고 멋진 짐승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용의 형상을 건물이나 성곽에 조각하는 것은 그 짐승의
탁월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합니다.

그런데 이 뱀의 특징은 수없이 혀를 날름거린다는데 있습니다.
이는 말하고 싶어 못 참는 성격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사탄은 그에게 인간을 유혹할 지혜를 넣어 주었습니다.

2) 죄는 여자를 통하여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사탄이 여자를 미혹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말씀에 대한 토대가
약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들었으나,
하와는 아담이 말씀을 들었을 때, 아직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남편을 통해 간접적으로 들었습니다.
아담은 사탄에게는 강하나 아내에게는 약한 반면,
여자는 사탄의 유혹에는 약하나 남자에게는 강합니다.
사탄의 최후 목표는 아담을 미혹하는 데 있으나, 직접 유혹하면
넘어가지 않을 것을 알고 여자를 통해 아담을 미혹케 한 것입니다.

3) 아담을 통하여 죄가 들어왔습니다.  
 
에덴동산에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음성이 들렸습니다.
ㅡ'하나님의 음성, 뱀의 음성, 하와의 음성'

하와는 하나님의 음성보다 뱀의 음성을 더 좋아했고
아담은 하나님의 음성보다 아내의 음성을 더 좋아했습니다.
즉 죄는 가까운 사람들을 통하여 들어오는 것을 보여준 예입니다.

아담의 타락은 땅이 저주를 받고 영이 죽음을 받고 육체의 죽음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아담이 지은 원죄로 인하여 온 이같은 결과는
그의 후손인 우리들에게 모두 임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첫째 아담에 속한 인간은 소망이 없는 존재가 되었으나,
둘째 아담인 예수님에 속한 인간은 영생, 부활, 축복의 은혜를 회복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아담을 통하여 인간은 홀로 설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를 통하여 악을 체험한 인간은 온전한 선을 찾기 위해 오직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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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
/Malachi



'말라기' '하나님의 사자'라는 뜻의 히브리 이름인
'말라기야'의 단축형으로 스스로 자신의 이름에 맞는
 사역을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말 3:1)

그는 B.C.444년 제 3차 포로귀환 때부터 시작하여
말라기서를 기록한 B.C.430년까지 14년동안
활동을 하였습니다. 제 3차 포로귀환을 주도한
총독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함으로
신정국가의 정치적인 면모와 종교개혁을 통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위상을 높이려는 개혁운동에
동참하여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일을 마치고 잠시동안
아닥사스다의 궁정으로 돌아간 사이, 백성들은 옛날에
범했던 악행과 타락으로 다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즉, 제사장들의 집안에서 이방인들과 혼인을 맺은 일로
유다를 대적한 주모자인 '산발랏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가 무시되었고, 안식일에 물건나르는
 일등, 율법과 규례가 허물어진 상태로 타락하였던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여호와께로부터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에
경고하기 시작한 때는 바로 이러한 때였습니다.(말 1:1)

선지자 '학개''스가랴'는 성전건축을 도외시하고 각자 세상을
즐기고 먹고 사는데 취한 백성들을 꾸짓기 위하여 보내진데 반하여,
'말라기'는 성전과 성벽이 지어진 후에 백성들이 성전예배를 더럽히고
하나님을 모독할 뿐만아니라, 성적으로 타락한 죄를 꾸짓게 하려고
보냄을 받은 선지자였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스불론' 족속이었고
짧은 사역을 마친후 젊어서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렇다면 그의 사역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1.부정한 결혼에 대한 개혁이었습니다. (말 2: 14-16)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찌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말 것은...'(신 7:3)

하나님께서 이방인들과의 혼인을 허락하지 아니한 것은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은 우상의 자녀들이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종교인들의 결혼만이
영적인 성결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욕망으로 인한 감정의 결합이
 이루워진다면 그 것은 쾌락을 위한 결합이요, 세속적인 삶을 위한
결합이요, 편의상의 결합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헌신하는 영적인
삶과는 완전히 대적하는 세상신을 따라가는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방인들과 결혼하기 위하여 이혼하는 사례가 벌어지자
이에대해 결혼의 신성함에 대하여 가르쳤습니다.

1) 사랑의 완성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으로만
이루워질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 2:15)   

인간은 반쪽으로만 지니고 태어납니다. 그리고 자신의 짝은
또 다른 자기의 반쪽이기 때문에 오직 합할수 있는 것은
하나의 상태일 때만 가능합니다.

깨어진 잔은 다시 붙여 서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깨어진 흠을
지닌 상태에서는 새것 즉 순수한 것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깨어진 상처로는, 회복은 할 수 있어도 완성은 어렵습니다.
이유는 금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아담을 위하여
 한 하와를 만드신 이유는, 아담이 다른 여인을 취하여
그녀로 시기케 하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또한 아담이 여러 여자를 거느리고 산다면 각 여인의 요구에
시간과 정열을 쏟아야만 할 것이고, 여러여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 보다는 아담을 치리하려는 욕망때문에
서로 질투하고 싸우기에 바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의 신성함은 둘이서 하나님만을
함께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것이 결혼의 행복입니다.

2) 결혼은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손을 얻기 의하여'
만드신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말 2: 15f)

부부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 때, 그들의 자녀 또한 부모를 본받아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본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인 사랑을
배우고 본받기 위해서는 진정한 사랑의 대상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이유는
사랑의 결실인 자녀가 하나님게 드려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로 천국을 채우고 그들과의 생활로
만족하지 아니하심은 자녀들을 얻기 위함이십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낳아져야만 하고, 낳은 자녀는
번성해야 하기 때문에 결혼제도를 만드신 것입니다.

부부가 깨어지면 자녀들도 똑같이 깨어지기 쉽습니다.
그 이유는 경건보다 깨어짐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들의 죄악은 혼과 육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영에서는 하나님 계신 곳이기 때문에 죄게 생기지 않습니다.
혼과 육이 자신의 영을 배반할 때, 그는 이미 모든 것을 다 배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배반하는 마음을 싫어하십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노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궤사를 행치 말찌어다.' (말 3:8-10)  

말라기 선지자는 결혼에 대한 '거룩한 자녀'를 얻기위한 개념을
처음으로 선포한 선지자였습니다.

2. 성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말 3:8-10)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말 3:8)

십일조는 성물이며 하나님의 것임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27:30절에
'땅의 십분의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하신 것입니다.

성물이란, 하나님께 드려진 거룩한 물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가 성물이란 하나님께로 구분돤 소중한
부분이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바쳐진 것에는
'파괴되도록 드려진 것'이란 '체렘'의 뜻이
 포함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물은 소중히 여겨져야 하는 반면에
잘못할시 저주의 징계가 내려짐을 알고 있어야합니다.

(예: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점령할 때, 정복한
모든 것은 다 그들의 소유로 줄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지정한 어떤 성읍은 '체렘'으로 구분되었음으로
그곳은 완전히 파괴되고 멸망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만 했습니다.
이 성읍이 바로 '여리고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리고성에 있는 것은
모두 다 불태워 없애고 죽이고 나머지 은금은 하나님께 드려야만 했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소유로 주지 않게 하었습니다.  
 
이 때, 이 '체렘'을 어기고 아간이 은금과 외투를 훔쳤기 때문에

온 백성이 '아이성'에 패하는 저주를 받게 됩니다. )

이에 말라기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물을 드리지 않는 것은 도적질 하는 것임으로,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거니와, 온전한 십일조는
하늘의
문을 열어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신다' (말 3:9-10))


얼핏 생각하기에 십일조는 구약의 법이라 신약에서는 해당
되지 않는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율법이
생기기 400년전에 이미 아브라함과 야곱이 하나님께
 서원하고 드렸던 규레이며, 신약에서 은혜에 따라 드리는
마음은ㅡ성령을 선물로 받은 '신약의 성도들'
'구약의 성도들'보다 더 큰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1/10 뿐만아니라, 2/10, 3/10 까지도
은혜롭게 드려야함을 말한 것입니다.

때로는 성령을 받지못한 마음이- 1/10도 드리기가
아까운 마음을 갖게하며 성물로서의 헌금을
막음으로 축복의 길을 가리우기도 합니다.

3. 신약시대를 여는 세례요한에 대한 예언을 하였습니다.
(말 3:1, 말 4: 5-6)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면 사람들 상호간에도 멀어지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사기에서 하나님과 멀어지자 이방 민족에 지배를
받게되고 삶이 힘들자 서로간의 사랑과 나눔도 다 식어지고 말았습니다.

특히 엘리야시대에는 아합왕과 이세벨왕비의 바알숭배로 말미암아
3년 6개월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가물자 식량이 모자라는 백성들은
급기야 굶주려 죽기까지 하는 상태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때, 선지자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제사장
850명을 갈멜산에서 모두 없애자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고 아합왕도 순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말라기는 이 패역한 세대를 위하여 하나님게서
오실 텐데 그 분으로 백성들이 은혜받게 하기 위하여는
회개의 선포가 있어야하며 이를 위하여 '신약의 엘리야'인
'세례요한'이 올 것을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고달픈 구약의 생활을 마감짓고
진정한 구세주 예수님이 오실 것 (말 4:2)을
예언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오늘날 타락한 세상에서 우리들도 그의 징계의
말씀을 마음속에 담아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다같이 노력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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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랴와 엘리사벳
 /Zechariah & Elizabeth

(눅 1:6)


1. 인적 사항


'사가랴'는 히브리어 이름으로 '스가랴'라고 하며, 그 의미는
'여호와께서 기억하고 계시다'란 뜻입니다. 또한 '엘리사벳'
아론의 아내였던 '엘리세바'와 같은 이름으로 그 뜻은
 '내 하나님은 멩세의 하나님이시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들 부부는 모두 제사장 가문의 출신으로 그 당시에는 가장
영광스러운 가계 혈통을 지니고 있었으며, 세례요한이
태어나 선지자로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가문이었습니다.

사가랴는 그당시 24반열로 구성된 제사장들 구룹중에
여덟번 째, '아비야' 반열에 속한 제사장 이었으며, 각 반열은
1년에 두번 성전봉사를 맡아 하되 한번에 8일간씩
성전에 머물러 맡은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성전봉사중 가장 성스러운 의식은 하나님께 분향하는 일로서
당시 한 반열에 9백명 정도 제사장들 중에서 제비뽑기로 선정된
한 사람만이 성소에 들어갈 수 있음으로, 일생에 단 한번
있을까 말까한 영광스러운 툭권이었습니다.

그가 성전분향에 선택돤 것으로 보아 사가랴는 하나님의
특별은혜를 받은 제사장이 아닐수 없습니다.
또한 엘리사벳은 마리아와 친척관계가 됨으로, 자연히 예수님과
 세례요한은 친척관계가 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녀들은 가문의 혼인관계로 인하여 서로가 친척의 관계를
맺게 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나님께서 이 부부를
세례요한의 부모로 세우신 것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들임을 알수 있습니다.

2. 주요 생애

구약의 말라기 선지자를 끝으로 (B.C. 430) 이스라엘은
영적 암흑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당시 헤롯대왕은 에서의 후손인
'이두메' 태생의 이방인으로써 로마제국 원로회에 실권자인
'옥타비우스''안토니오'를 뇌물로 매수하여 온
팔레스틴 지역전체를 치리하는 분봉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지략과 용기가 탁월한 정치가였기 때문에, 유대 백성들의
마음을 회유시키고자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 하였으며 많은 공공건물을
세우고, 심지어는 로마의 비호아래 대제사장의 임명과 폐위까지
간여하여 종교적인 타락이 만연한 시대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는 온전히
하나님만을 섬기며 당시 율법과 계명 613가지의 규례를 다 지켜
행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의인이라는 칭호를 얻고 산
믿음의 경건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한편 이 의인이란 말은 선민 이스라엘에서 가장 탁월한
칭찬의 말로 여겨진 호칭으로 구약에서는 아브라함에게
신약에서는 율법에 흠이 없었던 바울에게
해당되어졌던 칭호였습니다.

당시 제사장 계급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타락한 사두개인들과는
달리 묵묵히 자신의 삶을 순종으로 일관해온 그들에게
이미 자녀를 잉태하기는 불가능한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세례요한을 낳게 해 주셨으며,

그는 나실인으로서 술과 삭도를 금하였고
하나님의 회개의 메세지를 온 백성에게 전함으로
많은 백성들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약 400년이나 지속된 이스라엘의 영적침체기를
마감하고 예수님이 메시야로 오시는 신약의 시대를 여는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를 마련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3.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삶의 특징

1) 사가랴는 세가지의 특별체험을 갖게 되었습니다.

(1) 하나님의 특별 임재를 체험하였습니다. (눅 1:11)

기독교의 특징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시는 종교라는데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아브라함, 모세에게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셨으며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성육신하시어 이 땅에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은 의인을 찾으시며 사랑으로 우리를 자녀삼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사가랴가 성전분향을 위하여 성소에 있을 때,
이 날은 사람이 많이 모인 것으로보아 안식일이었을 것입니다.

아비야반열의 제사를 맡은 날을 계산해 본다면(라이트푸트 박사),
3월달의 17일 날이 되어 그날이 회당에서 읽혀졌던 율법과 예언서는
당시 성전에서 행해지는 일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생각해 볼 때,
'민수기 6장이 나실인에 대한 율법''사사기 13장 삼손의
잉태'에 대해 말씀이 주어졌음을 봅니다.

즉, 가브리엘 천사가 분향단 우편에 나타나 세례요한의 탄생에 대한
소식과 그가 나실인으로서 살아야함을 들려준 것은 (눅 1:15)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세세히 이루워지심을 보여주는 예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실 필요없이그냥 잉태케하여 역사를
진행시키실 수도 있으셨지만, 먼저 기쁨의 소식을 전해 주신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간구기도를 다 듣고 계시며,
때가 되면 더 많은 것으로 내려주시는 분이심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사가랴의 일생에
이같이 큰 기쁨은 없었을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예정한 특별 응답의 아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눅 1:13)

사람마다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 듣고 계십니다.
응답을 언제 어떻게 주시느냐는 구한자가 하나님의 뜻과 맞는 기도였을 때,
내려주시는 것이 하나님 응답의 방법입니다. 즉 우리들의 기도와 응답은
반드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어야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나도 오랫동안 자녀를 구하였습니다. 자녀를 갖고 싶어
소원하였지만 나중에는 하나님게서 주시면 그 자녀는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임으로 다시 돌려 드린다는 서원을 하자
응답을 내려주셨습니다.사가랴의 기도도 아들을 구한 것과
이스라엘의 메시야 도래를 위하여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태어날 아이에 대한 이름 까지도 세밀히
말씀해 주시며 '요한'이란 이름은 '하나님은 자비하시다'라는
의미로 암흑 속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구원의 자비가 베풀어
질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사가랴의 개인 기도는 전 민족이
축복을 가져오는 기쁨으로 응답받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의인은 전체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는 입술이 되었습니다. (눅 1:67-79)

입술이 영혼을 대언할 때는 믿음의 고백이 나오지만, 생각을 대언할
때는 현실적인 상황을 표현함으로 상반된 말을 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믿음이 좋은 아브라함도 '내년 이맘 때에 아들이
있으리라'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엎드리어 웃었습니다.      
 
          이와같이 인간은 초 자연적인 사건이 발생하면
죄인된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을 믿게 하기보다,
익숙해진 상황을 따르게 만듭니다.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한 입술은 벙어리가 되어 10개월간을 침묵으로
지내는 징계를 받게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이 태어난 후 입술이 풀리자
그 입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높으신 뜻을 대언하는
 거룩한 입술이 되었습니다. 이에 사가랴가 깨달은 것은
불신의 입술은 하나님께서 봉하시지만 찬양의
입술은 성령충만을 내려주신다는 진리였습니다.

'이에 그의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눅 1:64)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눅1:67)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입술로 부정적인 말이나 욕설, 거짓말,
음란, 시기, 질투, 정죄, 판단 등의 말을 할 경우에 오히려 주님을
바라보는 감사와 찬양하는 입술이 되도록 노력하는
버릇을 기르는 것이 중요함을 알려주십니다.

2) 엘리사벳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체험하였습니다.

(1) 임신이 불사능한 몸에 하나님의 권능이
임한 체험을 하였습니다. (눅 1:24)


이 세상의 여인들 중에서 사라를 제일 이해했던 사람은 아마도
엘리사벳이었을 것입니다. 이는 죽은 몸을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조용히 이 아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묵상하는 생활을 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5개월간을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장소로 옮겨가 경건한 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큰 은혜를 체험하게 되면 하나님 과 단둘이 있고 싶어
집니다. 그 것이 기적일 때는 아무 것도 안중에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엘리사벳도 그러한 마음에 젖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이 아이에 대하여
세속적이고 부정한 일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에 세상과의 관계를 멀리
하였습니다. 그 아이는 나실인으로 살아야할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2) 세례요한은 태속에 있을 때, 성령체험을 한
아이 였음을 알았습니다. (눅 1:41)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 왔을 때,
제일 먼저 엘리사벳에게 일어난 사건은 복중의
태아가 뛰는 것이었습니다. (눅 1:41)

이같은 사실은 성령님께서 태아를 충만케 하심으로 세례요한은
메시야 예수님이 마리아 몸속에 계신 것을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엘리사벳도 성령이 충만하여 이미 마리아가 주님의
모친인 것을 알아보고 마리아를 영접했습니다. (눅 1:43)

엘리사벳은 제사장 집안의 아내이요, 나이가 마리아보다
훨씬 많은 여인인데도 불구하고 자기보다 훨씬 어리고
모든 면에서 낮은 처지에 있는 마리아를 보고서
겸손하게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이다.'라고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눅 1:43)  

즉 성령이 충만함을 입은 사람에게는 예지와 겸손이 따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성령충만함이 저절로 임함을 알려주는 사건입니다.

의인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사가랴는 신약에서
첫번 째로 천사와 교분을 가진 인물이 되었으며, 엘리사벳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는 체험을 은혜로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은헤로 의인이 된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의인다운 행동을 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성령의 임재는 의인다운 행동을 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내리신다는 사실을 이들 에게서 배워 진정한 의인으로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다같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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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2.19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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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선지자 호세아/Hosea
(호 12 : 6)



1. 인적사항

'호세아'라는 이름은 여호수아나 예수와 동일한 어근에서 파생한 단어로
그 의미는 '여호와여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의 부친 '브에리' 도 선지자로 여겨지고 있음으로
 선지자 집안에서 태어난 호세아는 북 이스라엘 지역에서 B.C. 755-725년,
사이 여로보암 2세 때에 약 30년간을 활동한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음탕한 여인인 고멜과 결혼하였으며, 세 자녀인
이스르엘, 오루하마, 로암미 를 둔 가족의 가장으로 살았습니다.
 
2. 활동시기

호세아가 사역하기전 북 이스라엘 에서 활동한 선지자는
아모스였습니다. 이 때는 여로보암 2세가 남쪽으로는
유다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었고 북쪽으로는 아람국을 공격하여
그 수도인 다메섹을 정복하고 영토를 크게 확장한 시기였습니다.

그러므로 대외적으로는 안정기를 맞은 한편 내부적으로는
큰 번영을 이룰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과 백성들은
이같은 번영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이 이룬 것으로 여겨 삶을 즐기는데 치중하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고 쾌락과 음행을 저지르며 (호 4;12)
제사장들은 형식적인 제사행위만 하면서 백성들의 뇌물을
즐기며 그들과 분위기에 동참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공의의 선지자였던 아모스가 허영과 사치에 물든 백성들에게
공법과 정의를 선포하자 백성들은 그를 거부하면서 그의 출신인
유다땅으로 가도록 추방하였습니다. (암 7:13) 이때가
B.C. 760-755 년경으로 그의 뒤이어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불러 사역케 하신 것입니다.

이 때부터 30년간 호세아는 끝까지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로 백성들이 돌아오기를 간곡히 권고 하였으며
자신의 결혼생활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를 그들에게 호소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우상과 죄악에 물들은
백성들은 그의 외침도 외면한 채 타락의 길을 걷다가
B.C. 722년에 앗수르의 침공으로 인하여 모두 멸망당하고
말게 되었습니다. 호세아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깨우쳐 주는 것은
물질적인 번영은 인간 중심의 가치관과 형식적인 종교행위를
유발시킴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자신의 것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결국 세상을 따르는 삶을 살게함으로, 하나님을 떠나 멸망하고
만다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3. 사역의 특징

하나님께서 일꾼들을 선택하여 사용하시는 데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중요한 것은
사역전에 준비과정으로 그 사역에 합당한 훈련을 시키신 다음에
 일을 맡기신다는 것입니다. 즉 모세에게는 광야훈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광야생활을 40년 하였습니다.

사도바울 또한 약 14년간의 아라비아 사막과 다소에서의 은둔
훈련을 통하여 험난한 선교사역을 준비토록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는 모두 하나님의 뜻과 주님의 마음을 깊이 이해시키기
위하여 공감과 동의 인식을 같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 역시 하나님의 특별한 훈련을 받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는 가운데 자신의
사역을 헌신적으로 실천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1) 음녀인 아내를 용서하는 사랑의 남편이었습니다. (호 3:2)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모압땅에 사는 창기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결혼생활 중에도 음란한 생활을
계속 하였음으로 누구의 자녀인지 모를 자녀를 낳았기 때문에
자녀의 이름도 여호와께서 불러주시되 첫째 아들은 '이스르엘'로,

그 뜻은 '하나님께서 다 흩어 놓으신다.'란 의미이며
둘째, 딸의 이름은 '로루하마' '긍휼을 받지 못하다'는 란 뜻입니다.
마지막 아이는 '로암미'이며 '내 백성이 아니다'란 뜻입니다.
결국 자녀이지만 내 자녀가 이닌 자녀를 두고 살고있는
처지의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내의 부정을 보면서도 미워할 수도, 심판할 수도,
버릴 수도 없는 그러면서도 사랑으로 끌어안을 수 밖에
없는, 결혼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그 크신 사랑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참고 견디고 살던 어느날 그 아내는 집을 떠나 간부를 좇아갔고
결국은 창기로 팔려 볼모가 되어 붙잡힌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돈을 준비하여가서 몸값을
지불하고 다시 찾아 오라고 하십니다.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내가 은 열다섯게와 보리와 한 모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 (호 3: 1-2) 

은 열 다섯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은 30 세겔에 해당되며
이는 그당시 여종의 몸값에 준한 금액입니다.

이는 아내가 종의 신분과도 같은 천하고도 절망적안 처지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아내를 데려오는 것은 남편으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굴욕과 수치를 느끼는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배우자의 부정으로 인한 배신은 인간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상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괴로움은 잊을 수도, 치유될
수도 없는 아픔으로 간직되어지는 고통입니다.
이를 통해 호세아는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남자를 사랑해 쫓아가는 행위는, 나의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나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사업이나, 취미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 대신 그 것들을 우상
으로 섬기는 행위이며, 사회생활에서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꺼리끼는 행위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행위 임을 볼 때, 고멜은 다름아닌 우리들 자신임을 알게되고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의 아픈 마음을 또한 가지고 계심을 느낄수 있게 해줍니다.

호세아가 고멜을 30 세겔에 값을 지불하고 찾아 오듯이, 예수님도
은 30냥에 가롯 유다에 팔려 가심으로 하나님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우리를 다시 사서 찾으신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듯 애틋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2) 호세아는 인간의 가장 큰 슬픔은 하나님을 모르는 일임을 알았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 도다. (호 4:6)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일을 아는 것은
영적인 시각으로만 알 수 있지 혼적인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를 않는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혼적인 삶으로 세속화되어진 사람은 도덕적이지만 경건이 없고
정직하지만 회개가 없고, 친절하지만 용서가 없는, 그리고 그리스도인이지만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립니다. 즉 영에 속한 일들은
다 결여가된 모습만 지닌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그 때 그들이 오직 추구하는 것은 행복이며 그 것을 채우는
도구들이 물질, 쾌락, 권세, 지식, 건강, 등이 되어 이들이 바로
인생의 목적이 되어 모두들 그 것을 취하려 달려가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그 것을 다 취해도 만족함이 없이 모두 남에게
넘겨주고 죽는 것이 인생임을 알지 못합니다.

영으로 인해 태어난 인간은 결국 영으로만 남아서 하늘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영혼을 주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내가 돌아가는 길을 아는 것이
되며 돌아갈 곳을 확실히 안 것이 나의 평안이자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호 6:3)

태양은 빛을 가져오며 빛은 아침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밝음은 모든
것을 소성하게 하여 줍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마른 땅을 적시며
만물에게 생명을 공급하여 줍니다. 이 두가지를 누가 보내시는 지를 알면
내 생명이 하나님에 의해서 운영되어짐을 알 수 있고 또한
생명을 보존시켜 주시는 그 분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게됩니다.  
  
3) 이스라엘이 사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 밖에 없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 찌니라.' (호 12:6)
야곱과 에서는 한 형제였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버림받고 야곱은
선택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에서는 세상을 선택한 반면,
야곱은
하나님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다음과 같이 언약을 하셨습니다.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될 것이다.' (창 28:14)
'내가 네 후손에게도 이 땅을 주리라.' (창 35:12)

이 약속을 받은 사람들은 야곱의 12지파이며 이들은 바로 당신들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선택하여 오늘날 이 모든 약속이 이루워진 것이라면
당신들이 에서 조상을 선택한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야곱 조상을
선택한 길을 갈 것인가?ㅡ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께서 '나는 야곱의 하나님' 이시라 하신 것처럼
'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시다 라고 부르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고 호세아 선지자는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멸망의 길을 택했습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
입니다. 유대인이 버린 예수님을 우리는 선택한 사람들 입니다.
오직 세상길로 가면서 예수님을 멀리 바라보고만 살고 있다면
지금이 예수님께로 돌아올 때입니다. 그 길만이 오직 살 길 입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 들려주는
성령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여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참 그리스도인들이 다같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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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후 단독 대제사장이 된
사독 제사장'/
Zadok the Priest
(왕상 2 : 35)



1. 제사장직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열국중에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그들을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율법에 따라 제사를 드림으로, 죄가 용서함을 받는 예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이 제사를 드리는
사역을 맡은 사람을 '제사장'이라 부르고
이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임명하신 사람들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12지파중 레위지파를 택하셨고,
그 중에서도 '아론' 가문을 제사장 가문으로 택하시고 아론의
직계 장자로 대제사장 직을 맡게 하셨습니다. (출 28:1)

그러므로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중개역할을
갑당하는 거룩한 자로 하나님의 뜻을 항상 알기 원하여
'우림과 둠빔'을 대 제사장의 에봇이 달린 흉패안에 넣고
지니고 다녔으며, 제사장들은 평상시에는 백성들에게
삶과 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이들은 1년에 2주동안 성전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어 왔으며, 모두 24 반열로 나뉘어 차례대로 봉사할 수
있도록 다윗의 시대에 제정 되었습니다. (대상 24: 7-18)

2. 분열된 제사장직

아론에게는 본래 네 아들이 있었습니다.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이 있었는데,
이 들 중 장자 '나답'과, 둘째 '아비후'는 임의로 준비한 불로
성소에 분향하다 죽임을 당하였음으로, (레 10:1-2) 제 삼남인
 '엘르아살'이 장자 계숭의 원리에 따라 아론에 뒤이어
제 2대 대제사장 직으로 취임 하였습니다. (민 20:25-28)

그리고 '엘르아살'계열의 계승 언약이 성립된 것은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싯딤에서 모압여인들과
간음사건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백성들을 모두 진멸하려
하셨을 때, '비느하스'가 모압여인과 간음한 자들을 처형함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인 죄를 제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와 언약을 맺으사 그 후손들로 하여금 영원한
대 제사장 직분을 잇도록 하신 것입니다. (민 25:10-13)

이 때에 아론의 4남인 '이다말'의 후손들은 제사장으로서만 직분을
수행하였는데 가나안 정착후 사사시대를 거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타락하였고 엘르아살 계통의 대제사장직을 대신 맡은 사람이 너무 어려
그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자 '이다말' 계열의 제사장 중에서
임의로 대제사장직을 대신 맡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계열의 대표적인 후손 대제사장이 '엘리' 대제사장 입니다.
한편, '엘르아살'-'비느하스' 계열의 대제사장은 사울의 통치기간
까지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사울왕이 죽고 다윗이 돌아오자
12지파의 대표자들이 모여 다윗을 왕으로 추대할 때
사독이 22명의 용사들을 이끌고 처음 나타났으며 (대상 12:28)
그가 지금까지 숨겨져 있었던 엘르아살 계통의 대 제사장직을 이어받을
 정통적인 후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이다말'의 후손인
'아비아달'이 대제사장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피하여 도망의 길에 올랐을 때
성막이 있는 제사장의 성읍인 '놉'에 들러 그 때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아히멜렉'의 도움을 받아 양식과 골리앗의 칼을 받음으로 은혜를
입고 떠난후, 이 사실을 안 사울왕이 분노하여, 대제사장 아히멜렉과
그와 함께 있는 85명의 제사장들은 모두 죽였습니다.

이 때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대제사장의 상징인
'에봇'을 가지고 다윗에게로 도망하여 왔을 때, 다윗은 그를 영접하여
그의 아버지와 제사장들이 죽은 것은 자신 때문이라고 깊이
뉘우치며 안타까와 했습니다. 다읫이 즉위한 후, '기브온' 산당에는
사독을 제사장으로 봉직하게 하였고 여호와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와
장막에 모신다음 '아비아달'로 대제사장으로 삼아 직분을 수행하게
함으로 대제사장이 이분화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이분화된 사역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사사시대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엘리 가문이 멸망될 것을 사무엘에게 예언 하심으로 (삼상2:27:36)
마침내 솔로몬왕 시절에 '아비아달'을 끝으로 이다말 게열의
대제사장은 사라지고 '엘르아살 계열의 사독 가문만' 정통적으로
대제사장직을 수행하도록 일원화시키셨습니다

3. '사독' - 인물의 특징

1) 불의를 쫓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왕이 늙어 나이가 많이들자 네쩨 아들인 '아도니야'
스스로 왕이 되려고 모반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에게는 '암논'이 맏아들 이었으나 '압살롬'에게 죽고
압살롬 또한 반역을 일으켰으나 싸움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세째 '길르압'은 어려서 일찍 죽음으로 남은 아들중 최연장자는
아도니야 자신이었음을 인식한 그는 왕위에 오를 욕심으로
모반을 계획하게 되었고, 이 때 다윗의 측근 지도세력을
포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군대장관인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이었으며,
셋이 공모하여 (왕상 1:7) 다윗대신 '아도니야'를 왕으로 추대하고
다윗왕의 사후에도 자신들이 권세를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따라서 군사적 권세와 종교적 권한을 갖은 두 사람이 같이 포섭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때 제사장 사독은 아도니야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에 하나님게서는 솔로몬으로 왕을 삼으시고 제사장으로서는
하지 말아야 할 일 즉,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왕을 모반하는 행동과,
하나님의 뜻도 묻지않고 기름부음을 받은 차기 왕 솔로몬을 무시한
행위는 하나님의 공의에 의해 처단되어진 것입니다.
 
솔로몬 왕에 의해 파면된 아비아달은 고향으로 돌아가 유배되어진
삶으로 인생을 마쳤고  이로써 엘리의 집에 하신 예언이
80년이 지난후 모두 성취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삼상 2:35)

사독 재사장은 압살롬의 반란 때에도 언약궤를 매고 다윗을 따르다가
다윗의 명령으로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가지고가 그 곳에 머물면서
압살롬의 계략을 다윗에게 알려주는 역할을해  다윗왕의 안전을 도모했고,
아도니야의 모반과 음모에도 가담하지 않고 다윗왕의 편에서 기름부음받은
솔로몬왕을 즉위시키는데 공헌을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로써 그의 성품은
하나님께는 순종을, 다윗왕께는 충성을다한 사람으로 보여줍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시대에 필요한 인물을 선택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역사에 필요한 일꾼을 또한 세우십니다.  
사람들의 선택은 선택된 사람의 능력을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기름부어 구분하신 다음에 사용하실 때에는
능력을 내려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능력에 의해 사람들에
선택된 사람은 그 능력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려는 마음이 있는
반면에 하나님께 기름부음받은 사람은 자신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데 주어진 모든 것들을 사용하는 사람이 됩니다.

'사독 제사장'은 그의 조상들이 한동안 쓰임 받지 못하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쓰임을 받을 때까지 참고 기다렸습니다.
 인내와 순종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의 기본자격이며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준비되어진 사독 제사장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2) 충성된 그의 헌신은 그 자손들에게 축복을 받게 하였습니다.

'이 땅으로 사독의 자손중 거룩히 구별한 제사장에게 돌릴지어다.
그들은 직분을 지키고,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할 때에, 레위
사람의 그릇 한 것처럼 그릇하지 아니 하였느니라.' (겔 48:11)

바벨론에 의해 이스라엘이 멸망하기전 타락한 백성들과 함께
제사장 직분을 맡은 레위인들은 그들을 책망하고 온전한 여호와 신앙으로
돌이키도록 촉구하는 영적지도자 역할을 감당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백성과 더불어 우상을 숭배하는데 앞장섰으며 선지 예언자들은
거짓 예언을 백성들에게 함으로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더욱 타락하는 상황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에스겔 40: 45-46절에 성전을 수직하는 제사장들과 제단을
수직하는 제사장들의 임무를 사독의 자손들에게 위임시켰시켰음을 봅니다.
본래 성전과 성물을 관리하는 책임은 레위지파중 게르손, 고핫, 므라리,
자손들이었으나 타락함으로 직분을 빼앗기게 되었고, 또한 희생 제사시에
제단에서 수종드는 제사장들은 아론의 후손에게 주어진 것이 었으나
새 성전에서는 사독계열의 제사장 에게만 별도로 위임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족속의 땅 분배에 있어서도 제사장 지분은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 사이에 동서로 13.75 Km , 남북으로 5.5 Km 의 직사각형 모양의
거룩한 땅을 사독 제사장 후손들에게 주게 된 것입니다. (겔 48:10)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시기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모두 구원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상급수여는 헌신한 자들을 선택하여 베풀어 주십니다.
오늘날에도 성도인 우리들이 다 구원받은 대열에 동참할 수 있을지라도
탈락과 선택은 순종과 헌신에 달려 있음을 '사독 제사장'에게 배워
충성과 직분 완수에 최선을 다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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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의 종 디도 / Titus
(딛 2:15)



1. 인적사항


디도는 기독교로 개종한 이방인으로서 '디도'란 
그의 이름의 뜻은 '공경하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바울의 사역초기에 복음을 영접하였고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후 할례에 대한 언쟁이 일어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갈 때, 디도도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동행하였으며 할례가 구원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과에따라 할례받지 않은
헬라인으로서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갈 2:3)

디도는 사도바울과 운명을 같이 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으며 디모데와 함께 바울이 사랑받는 믿음의 아들이 되어
대 사도의 명령에 따라 사역을 수행한 부사도와 같은 삶을 산 사람입니다.

그가 사역한 곳은 안디옥과 고린도교회 였으며 마지막으로
이단과 세속적인 혼란을 겪고 있었던 그레데섬의 사역을
마지막으로 복음 사역을 끝맞쳤습니다.

2. 생애

디도는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과 신실한 동역자가 된 이후로
바울의 제 2차 전도여행 이후 그와 같이 계속 동행하였으며
 그는 디모데보다 강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던 까닭에
바울은 디모데가 있었던 고린도 교회를 디도에게 맡겨 분쟁을
종식하도록 하였으며 디모데는 에베소를 주관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일을 위하여 디도는 3차에 걸쳐 바울의 서신울 지니고
고린도 교회에 파송 되었으며 결국 고린도교회는
안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디도가 감독으로 한 곳에
상주하였다는 가록을 없으나, 만약 그 당시 그가 감독의
지휘를 가졌다면 가장 고생하던 고린도교회가 그에게는
최대의 적임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이후 디도는 바울의 첫번째 투옥에서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바울과 함께 그레데 섬에 동행하여 복음을 전하였으며
바울이 그 섬을 떠난 후에도 디도는 그 곳에 남아
사역을 완성시키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 일은 첫째, 성마다 좋은 장로를 세우는 일이며
둘째, 거짓 교사들을 좇아내고 올바른 교훈을 가르치는 일 이었으며,
셋째 선행을 통하여 그레데 섬의 불법 부도덕한
사회를 바로 잡는 일 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사도바울이 순교가 가까와 짐에 따라 로마감옥에서
디모데에게 두번 째 편지를 쓰는 가운데 디도를 달마디아로
보내어 사역을 하도록 함에 따라 그 곳에서 복음을 전한 후, 
그레데로 돌아와 교회의 감독으로 목회하다가 94세의 고령으로
헌신된 복음 사역을 마쳤다고 합니다(이상근,목회서신 총론).

그러므로 그레데 사람들로 부터 '그레데 섬을 보호한
성자'란 칭호를 받았으며, 그 섬의 중요한
위치에 있는 두 교회가 그에게 바쳐졌습니다.

3. 사역의 특징

그레데는 그리스 바다에 있는 큰  섬으로 약 100개 정도의 도시가 있었습니다.
한 때 전성기에는 곡류, 포도류, 올리브유를 풍부하게 생산하였으나
선원 생활들를 많이 하는 풍조 때문에 성품들이 차차 무례하고
난폭하고, 이기심이 강한 결점들을 지닌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레데 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돠 그레데 인들은 항상
거짓말 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 장이라.' (딛 1:12)

즉, 거짓말이 심하여 서로 믿고 살 수가 없는 분위기와
땀을 흘리기를 싫어하고, 불로소득을 바라며, 욕심이 많아
서로 빼앗으려는 탐욕의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디도의 사역 중
특징은 ‘선한 생활에 대한 실천’이었습니다.

즉,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는 삶의 현장에서 경건하고
의로운 모습으로 선한 삶을 살아야 함을 전한 것입니다.
그 결과 그레데 섬에서는 로마제국에 저항하는 훌륭한 지도자가
생겼고, 주의 종들이 세워졌으며 큰 교회가 설립되었고,
악하고 게으른 환경이 믿음의 사회로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 사회를 변화시킨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1) 올바른 지도자를 세웠습니다. (딛 1:5)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 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딛 1:5)

그레데에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었으나
그 곳의 교회 조직은 매우 불완전했습니다.
이리하여 교회 책임자를 세워 각 교회를 돌보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습니다.

디도는 이를 위하여 첫째, 지도자의 소명과
둘째, 자질을 신중히 점검하여 온 도시에 교회를
다스릴 장로들을 세워 교회를 안정시켰습니다.

즉, 장로의 내적 자격은 첫째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일꾼이라는 소명의식이 있는가’였습니다.

만일 사람들에 의해 선출되면 그들의 관심사를
살피기에 신경 쓸 것이고, 임명 받으면 윗사람에게
추종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지도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말씀을 전하는 것을 제일 중심으로 여기는
사람이어야만 참된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둘째, 지도자의 사명의식

소명의식이 있는 지도자에게는 주님께서 맡기시는 사명이 있습니다.
사명감이 있는 지도자라야 주님의 일을 위하여 자신과
세상의 일에 너무 연연하지 않을 수 있고, 교회를 위하여
 헌신할 수 있게 됩니다. 교회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사명의식이 있는 사람입니다.

셋째. 섬김 의식

지도자는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 마음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대통령이 장관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을 위해
일하듯이 교회 지도자도 성도들을 위해 섬김의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낮은 마음은 가장 연약한 성도도
관심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듭니다.

이를 위해 디도는 기도하고, 점검하고, 많은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성령님이 택한 사람들을 장로로 뽑았습니다.

2) 바른 교훈을 가르쳤습니다. (딛 2:11-15)

신앙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바른 교훈이란 ‘버림’, 간직’, ‘기다림’
이 세가지를 지키는데 있음을 가르쳤습니다.

첫째, ‘버림’ –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의 정욕을 다 버려야 합니다. (딛 2:12)

인간이 세상을 떠날 때는 두고 갈 것과 지니고
 갈 것으로 구분된 것만 소용이 있게 됩니다.
즉, 세상에서 얻은 것은 다 두고 갈 것이요,
하늘 나라에서 얻은 것은 다 가지고 갈 것들입니다.
버릴 것의 대표적인 것들이-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 하였습니다 (요 1서 2:16).

둘째, ‘간직’ – 근심함과 의로움,
경건함을 지녀야 합니다. (딛 2:12)

신앙은 죄를 피하는 것만큼 의를 행하여야 거룩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 것이 근신과 의와 경건입니다.

-근신함이란 –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내면의
욕망을 제어하고 절제하는 삶을 말합니다. 이는
'썩지 않는 면류관'을 받는 길이기도 합니다. (고전 9:25)

-의로움이란
– 사회 생활에서 진리에 따라 공정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가장 손 쉬운 방법은 양심에 따라
행할 때 지켜질 수 있습니다.

-경건함이란 –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죄사함 받은 것을

보이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불신자들은 진노의 대상이지만
자녀들은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에 자신의 속성을 유지하고
사는 가를 관심 있게 바라보고 계십니다.

셋째 ‘기다림’ – 예수님이 오실 것을 소망으로
기다리는 삶을 의미합니다. (2:13)

현세의 고난은 주님 재림 시 상으로 보상 되어질 것이며
육신의 연약함은 주님 재림 시 신령한 몸으로 변화 될 것입니다.
“잘 하였도다 충성된 종아, 내 즐거움에 참예하라” 하시는
칭찬을 받을 소망을 가질 때 우리는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루살이를 보면 생명이 아니듯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실 때도 생명이 아닙니다.
영생이 곧 생명이며 기다리는 자에게 옵니다.

3) 선한 일에 힘쓰는 삶을 살았습니다. (딛 3:8)

무슨 일을 하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 두 가지 마음 가운데 행하게 됩니다.
즉, 잃는 마음과 주는 마음입니다.

자기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은 – 남을 위한 일을 할 때는
다 잃는다는 마음으로 행하게 됩니다. 시간을 잃고, 물질도 잃고,
정력도 낭비했다 등 이로 생긴 휴우증이 아깝고 짜증나고,
원망과 후회가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 ‘주님이 이 일을 나에게 하도록 맡기셨다,
주님 대신 나로 베풀게 하시는구나’ 생각하게 됨으로 도와주고,
 기쁘고,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즉, 선한 일이란 –

나의 유익보다 남의 유익이 되는 일입니다.
이는 중생으로 거듭난 사람의 삶의 태도입니다.
육신의 자녀는 육신의 부모를 닮고 태어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되어있습니다.
자비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비로운 자녀가 되길 기뻐하십니다.
초대교회 성령 역사하실 때 예루살렘에서 은혜 받은 성도들이
그레데에 살면서 디도의 삶을 통하여 선행이 번져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온 섬은 변화되었습니다.

이를 보건데 디도는 이론뿐만 아니라 실천에 강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그를 권위 있는 종이 되라고 당부하였습니다.
(딛 2:15) 그러므로, 디도를 본받아 세상을 변화시키는
권위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같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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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 마태 / Matthew

(마 9:9)

 

1. 인적사항


알패오의 아들로 태어난 마태는 '레위'란 이름으로
불리워졌으나 예수님을 따르면서 마태란 이름으로 바꾸어졌으며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선물'이란 의미입니다.

그의 직업은 세리였으며 당시 네 부분으로 분할되어 있는 지역들 중
서로 인접한 지역 경계선에서 교역물품에 대한 검사와 세금부과및
통행료를 징수하는 관리로, 당시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증오와
미움을 받은 것은 정해진 금액보다 많은 세금을 거두어
로마 군인들에게 상납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부유층과 중류층을 주로 징수 대상으로 삼았고
하류층 사람들은 심하게 착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료와
주변 하류층 중에는 추종자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큰 잔치를 베풀었을 때, 소외 당한 계층들을 불러 함께 자리한
것으로 보아 유대인들의 영혼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이유도 동족에 대한 사랑으로,
메시야를 증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 생애

예수님이 돌아가신뒤 15년 동안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복음을
선포하였으며 과거의 자신이 세리로 지내었던 생활에 반성하는
의미에서 육식을 피하고 식물과 열매만으로 생활하는 금욕주의적인
삶을 삶으로 '에세네파'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후로 그는 주변도시인 마게도니아, 수리아, 파사, 팔티아,메대
등지에서 전도생활을 하였으며 마지막 이디오피아에 가서
끝까지 전도하다 목베임을 당해 순교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죄인처럼 멸시받는 자신을 불러주신 주님께 항상 감사하며 사도들의
서열에서도 주목받지 못한 자리에 있었으나 묵묵히 순종하였으며
이는 나중에 마태복음을 기록하면서도 자신을 여전히 세리 마태로
표현함으로 겸손함을 지닌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 9:9-10)

3. 사역의 특징

초대교회가 겪은 최대의 시련은 유대교도들의 반대와 핍박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유대인 신자들중에서 신앙을 버리고 유대교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었고 글라우디오황제가 죽은뒤 정치적 혼란은 유대에도
파급되어 총독 벨릭스 등은 자신의 안일과 부귀만을 쫓는
생활을 함으로 거의 무정부상태의 사회가 되어 갔습니다.

이에 복음이 더 이상 전승에만 의존할 수 없음을 깨달은 마태는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야이며
이스라엘의 왕이시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마태복음을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그의 인식은 세가지로
표현되어지고 있는데 그점이 마태복음의 특징입니다.  

1) 예수님은 메시야 이십니다. (마 1:16)

구약에서 메시야는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임과 동시에 신적으로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호칭이 스스로 자신을 '인자'라 부른 이름과
하나님께서 '나의 아들'이라 부르신 호칭을 중요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1) '인자'란 하나님의 뜻을 지닌 완벽한 인간임을 의미합니다. (마20:28)

마태복음에는 인자란 말이 30회, 마가에 15회, 누가에 25회,
 요한에 13회 나타나고 있으며, 인자란 호칭은 예수님 스스로가
자신을 가리켜 부른 이름임을 마태는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 칭호는 구약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의미있는 호칭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또 밤 이상중에 보았을 때, 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단 7: 13-14)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마 26: 64)
이 말씀들을 비교하여 볼 때, 주님께서 자신을 인자라
자칭한 것은 그냥 인간이라는 의미를 벗어난 메시야적
호칭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주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신 신비로운 탄생과, 십자가에 죽은신 후 삼일만에
부활하심과 하늘로 승천하심을 직접 성도들에게 보이셨습니다.

(2) '하나님의 아들'이란 하나님이 하늘에서 직접 말씀하신 이름입니다.
(마 3:17)

'인자'라는 호칭이 메시야의 의미를 지닌 인성면을 나타내는 이름이라면,
'하나님의 아들'이란 주님의 신성면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직접 부르신 호칭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는 이 호칭을 중요하게
여겨 12회나 그의 복음서에 기록하였습니다.

즉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주신 호칭이며 (마 3:17),
변화산에서 변형이 되었을 때, 들려주신 이름이며 (마 17:5)
또한 제자들에게서 (마 14:33), 베드로의 고백에서 (마16:16) 심지어
마귀에게서도 (마 8:29, 마 4:3) 이와 같이 불리어졌음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일생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사하시는 사역으로
나타내신 삶이셨으며 특별히 주님은 죄인들의 죄를 사하시는 권세와
(마 9:6), 천사를 지배하시고 (마 24:31) 천국의 왕권을 지니신
분이시며 (마 16:28) 제자들에게 메시야 왕국의 열두보좌에
제자들을 앉힐 것을 약속 (마 19:28)하셨습니다.

또한 승천하실 때, 최후에 주신 명령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 (마 28:19) 말씀하심으로
성자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이 것이 마태가 유대인들에게 알리고 싶은 가장 중요한
예수님이 메시야 되심을 전하고 싶었던 점입니다.        

2) 교회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반석으로 세워진 곳임을 나타내었습니다.
(마 16:16-18)

마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 나타나지 않는 교회란 단어를 유일하게
세번이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마 16:18절 에는 교회설립의 기본을 말하고,
마 18:17절에는 교회 생활에 대한 가르침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8)

교회는 이 땅에 세워진 천국의 예표이며,
그 곳은 메시야이신 주님이 영적으로 다스리는 곳이라
흑암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특별한 영역인 곳입니다.
그런데 이 반석이란 무슨 의미인가하면 헬라어로 '페트라'라는 여성형
명사로 베드로에 해당되는 반석 '페트로스'(남성형) 와는 다른 큰 건물의
기초가 되는 '큰 암반을 기리키는 것'으로 남성형,
'페트로스'가 의미하는 작은 바위와는 다른 뜻입니다.

즉 베드로의 신앙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라.'(마 16:16)
이 말씀 위에 교회를 세우신 다는 약속이시며,
마 16:19절에 천국열쇠를 주신다 하셨음은
앞으로 신약교회가 증거할 복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머리는
예수님이 되심을 처음 기술한 것입니다.

3)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심판주로 다시 오심을 강조하였습니다.
(마 24-25장)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초림으로 시작되었지만 재림으로 완성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더 이상 기다리시지 않고 성도에게는
상을 주시려고 악인에게는 심판하시려고 곧 이 세상에 다시 오십니다.

그리고 오시는 시기는 다음과 같은 징조가 나타날 때가
그 시점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 징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미혹하는 일이 성행합니다. (마 24:5) : '플라나오'
단어의 뜻은 '속여서 길을 잃게 만든다'라는 뜻입니다.

둘째, 시험에 드는 일이 많아집니다. (마 24:10) : '스칸달리죠'란
단어의 뜻은 '죄의 올무에 걸려서 신앙을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셋째, 불법이 성행합니다. (마 24:12) : '아노미아'라는 단어의 뜻은
'마음이 혼란하여 소욕대로 행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넷째, 사랑이 식어집니다. (마24:12) : 식어지다 란 단어-'프쉬코'
이기심에 사로잡혀 '꺼진다' 란 뜻입니다. 

2천년전에 이미 마태는 이 사실을 증거했습니다.
또한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준비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것은 오직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 24:42)
'언제든지 주님을 알아볼수 있는 상태에 있으라'란 말입니다.
 
사람이 상대방을 제일 먼저 발견할 수 있는 때는, 바로 사랑할 때 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였어도 그러나 자녀나 애인이나 부모님은
금방 발견해냅니다. 또한 인기척만 들어도 누가 왔는지 단번에 알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제일 먼저 주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대상은 항상 나와
생명의 관계와 속성을 함께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자녀는 육신의 옷을 입고 있을 때 까지만 이 관계가 유지 되지만,
예수님과는 나에게 영생의 생명을 주신 것과, 하나님의 속성 성령의 열매를
함께 공유하고 있는 영원한 관계의 사랑의 대상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더욱 소중하신 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태는 당시의 소망을 잃어가고 고난속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 사실을 들려주며 주님이 곧 오셔서 '주님의 잔치에 참여시킬 것'
(마 25:21)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하심'(마 25:34)
을 알려주고 믿음을 굳게 하기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위대성은 바로 이 세가지의 그리스도론과, 교회론과,
종말론에 있습니다. 말세인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현 시점이
어디에 와 있으며 무엇을 바라보고 준비하고 살아야함을 깨달아 주님의
재림을 기준으로 사는 삶을 살으로 주님을 영접하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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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ㅡ광야의 외치는 소리

세례요한/ John the Baptist
(마 3:3)



성경에서 요한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여러명인데 그중에서
예수님의 제자 요한, 베드로 아버지인 요한, 세례요한 등이 있습니다.
이중 사도요한과 구분하여 세례요한이라 불리는 이유는,
 그의 사역이 대부분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이란 헬라어 '요안네스''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란 뜻이며,
이는 탄생전에 계시하여 그에게 붙여진 이름입니다.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이었고, 어머니
'엘리사벳'은 아론의 자손이었으며 두사람 모두 거룩하고 성결한 가문의
후손들이었으나 늙도록 자녀를 두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의 오랜 기도끝에 기적적으로 하나님의 특별섭리에 의해
세례요한은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눅 1:5-13)

1. 세례요한의 생애

이스라엘은 말라기 선지자를 끝으로 400년간 하나님의 소리가
그친 암흑의 시기에 있었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기 6개월 전에 주님의 모친 마리아와 친척인 엘리사벳을 통하여
세례요한을 탄생시키셨습니다. 그는 성장하자마자 광야로 나가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약대털로 만든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살았습니다.

이는 그가 나실인으로서의 철저히 구별된 정결한 삶을 산 것을 말하며
 더우기 율법을 지키는 철두철미한 삶을 살므로 당시의
탐욕과 부정으로 가득찬 유대 지도자들과의 삶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삶이었습니다.  

이와같은 생활은 염세주의나 고행을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연단과 훈련과정 이었습니다.

그 결과 심령이 강하여지고, 죄를 씻는 회개를 외치며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선지자의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사역은 백성으로 하여금 회개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었으며
이는 마음을 정결케 한 자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예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회개와 천국의 소식을 들은 많은 백성들이
물세례를 받으러 요단강으로 몰려왔으며 심지어는
종교지도자들도 나와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진의를 가리려 확인하려 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담대함으로 죄를 지적하였는데
그중 한가지가 갈릴리 분봉왕 헤롯이 동생의 아내를 취한 죄를 책망하자,
헤롯은 괴로와 그를 감옥에 가두웠고, 양심에 가책을 받으면서도
세례요한의 말을 들은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져지는 권위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을 증오했던 헤롯왕의 아내 '헤로디아'
헤롯의 생일날 자신의 딸 '살로메'를 무희로 남편앞에서 춤을 추며
남편을 사로잡게 만든후,선물을 약속받는 자리에서 세례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자 고민하던 헤롯은 드디어 세례요한을 처형하고
그의 머리를 약속대로 주었습니다.

그후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의 몸을 가져다가 무덤에 장사하였으며,
비록 1년도 되지않은 짧은 공생애 기간의 사역이었지만 백성들에게
끼친 영향은 많은 사람들로 애도를 표하게 만들었습니다.

2. 세례요한의 역할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였습니다. 선구자란 앞서가며
뒤에 오는 이를 위하여 통로를 여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1) 세례요한은 소리를 외치는 선구자였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하라. (사 40:3)

비벨론 포로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올 때,
저희 하나님께서 같이 돌아오시고 그의 선구자가 앞에서
오시는 하나님을 위해 길을 예비하라 외친 것인데,
이는 포로생활의 귀환을 배경으로하여
장차 오시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한 말씀입니다.

즉, 죄의 포로가 된 인류를 놓아주시기 위해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길을 예비하고 평탄케하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광야에 외치는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주의 첩경을 예비하라.' (마 3:3)

세례요한이 외치는 것은 '소리(포네)'이고, 예수님이 전하는 것은 '말씀(로고스)'입니다.
     다시말해 말씀이 뒤 따르지 않는 소리는 무의미하며 사라지지만,
말씀이 뒷받침되는 소리는 정녕 능력있는 선구자의 외침이 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이 사명을 목숨을 걸고 실천으로 외쳤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속에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상태를 깨운 것입니다.

2) 세례요한은 신약의 엘리야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 아비에게로
돌리키게 하리라.' (말 4: 5-6)


구약시대 때 가장 위대한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엘리야는
북왕국 이스라엘 당시 바알 우상에게로 향했던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켜 신앙들을 회복시키는데
전심전력을 기울인 선지자였습니다.

   또한 세례요한도 예수님이 오시기전,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하면서 온잦 불의와 탐심을 일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개시켜
참 신앙을 회복시킴으로 영적으로 엘리야와 동일한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모양도, 차림도, 생활도, 사역도 매우 유사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세례요한을 그를 보고 엘리야라 말씀하셨습니다. (마 11:14)

특히 그가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푼 것은 엘리야의 사역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봅니다. 이 강은 엘리야가 승천한 곳이요(왕하 2:6)
그의 제자엘리사가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을 씻어
문둥병을 깨끗히 한 기적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왕하 5:10)
그러므로 세례요한의 요단강 사역은 선진들의 뒤를 이은
후계자 사역의 일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

3. 세례요한의 사역의 특징

세례요한의 사역의 특징은 두가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1)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사역을 하였습니다.(눅 3:3)

요한의 사역에는 세례가 주어졌기때문에 그의 이름에도
세례라는 말이 붙어 세례요한으로 불리워졌을 정도입니다.
세례는 요한이 베풀기 전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 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 불결을 씻기 위한
결례의 방법으로 세례를 받았고 아브라함의 자녀인
자기들은 이미 깨끗한 자들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경고는 하나님의 진노가 너희들에게 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려면 회개를 하고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멸망받지 않음을 전했습니다.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여 너희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 (겔 18:30)

백성들은 세례요한의 세례는 하늘의 내린 권세로 받아들였고
부자도, 세리도, 군병들도, 백성들도 세례를 받으러 몰려들었습니다.
여기에서 요한의 회개의 세례의 성격을 보면 구약의 세례와 그리스도의 셰례의
중간적인 단계로 볼 수 있으며, 멸망을 받지 않는다는 구약의 개념과,
죄 사함을 받기전의 믿음의 표현으로서 준비과정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을 빛으로 증거하셨습니다. (요 1:7)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세례받으러 오실 때 알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요1:33)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과 친척관계였음으로
(눅 1:36) 분명히 그는 예수님과 친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말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분인지를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성령의 계시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고 있을 때는
바로 성령님이 나에게 임하실 때, 확실히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전 까지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로 이해하지만, 인식이 되면 '나의 주인'으로
모시게 됩니다.

(1)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세상죄를 지고가는
어린 양이라 증거하였습니다. (요 1:29)  

이는 유월절의 어린 양을 기리키는 말이며,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에서 구원했던 출애굽의 어린 양을 말합니다.
그리고 죄가 없으신 분이 자신의 세례를 받아 정결케 되시기
원하신 것은 백성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아사셀의 희생 염소가 되어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떠나실 것을 알았습니다. (레 16: 21)

(2) 예수님이야말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증거하였습니다. (마 3:11)

요한은 성령세례를 두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 자신의 물세례는 사람들을 물속에 담그는 것이나,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성도들을 성령안에
푹 담그게 하시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성령세례는 불세례라고 말하는데, 이는 불의 속성과
같은 현상이 주어짐을 말한 것입니다. 즉, 뜨거움은 능력을,
태움은 정결을, 밝음은 중생(거듭남)을 말함으로,
오순절날 임하신 성령으로 모두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은 30세에 순교하였습니다.
그가 사역한 기간도 1년이 채 안됩니다.
그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일하였지만 사명은 신약의 문을 여는 예수님 선구자의 역할을 한,
구약과 신약의 다리 역할을 한 위대한 사역자였습니다.

이제 그의 광야의 외치는 소리는 주님의 재림을
예비하는 소리로 받아들일 때 입니다.
그러므로 새 시대를 연 세례요한의 말씀을
다같이 기억하여 재림을 맞이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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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을 보는 선지자 에스겔 / Ezekiel
(겔 1:1)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불러서 사역하게 하실 때는 그로 하여금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기적을 나타내는 힘이 아니라,
믿음과 순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자신의 처지에
연연하기 보다는 말씀의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는데
헌신하는 사람들입니다. 고통속에 부르짖는 말씀이
죄악을 깨뜨릴수 있기 때문입니다.

1. 인적사항

에스겔은 '엘' '하자크'가 합하여 만들어진 '예헤즈켈' 이란말로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실 것이다'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아론가문의 사독계열의 제사장 '부시'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바벨론에서 포로시대 초창기에 22년간 활동한 예언가 였습니다.

환상과 이상을 많이보고 예언하였음으로 '환상과 소망의 선지자'
불리어 지고 있으며 사랑하는 아내가 일찍 죽는 불행을 겪었으나,
이에대하여 공적으로 자신의 슬픔과 애통을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이 곧 멸망할 것을 예고하는 것으로 그들의 죄때문에
이 환난이 닥쳐올 것이라는 것을 백성에게 알리는 것이었으며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슬퍼하지 말라' (겔 24:16-17)
하셨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의 이같은 신앙적인 배경과 그의 강인한 영적성품은
그로하여금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보다 훌륭히
수행해 나가게 만드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2. 주요생애

에스겔은 B.C. 597년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을
2차 침입했을 때에 '여호야긴' 왕과 방백들, 그리고 만여명이나 되는
백성들이 강제적으로 바벨론으로 끌려갔을 때 함께 끌려갔습니다.

이때는 예루살렘 도시와 성전이 파괴되기 11년전이었으며
그당시 에스겔은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포로기간중
'그발'강가에 있는 '텔아빕'에서 거주하였습니다.  

그 강은 느브갓네살왕이 지시하여 만들은 운하로 보이는데
포로의 신세로 전락된 유대인들이 그 강변에 앉아
과거의 회상과 현실의 노고로 눈시울을 적시며
노래를 불렀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시기는 포로로 잡혀가기 5년후인
 B.C.593년 때였으며, 그룹들의 환상을 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때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네가지 성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셨는데
인간의 모습은 지적임을, 사자의 모습은 위엄을, 소의 형상은 자비와
 성실을, 독수리 형상은 신속함을 나타내셨으며, 이는 구원계획을
이루워 나가시는데 적용되어질 속성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든일에 형통하고 삶이 풍요할 때는
누구나 미래에 대하여 밝은 기대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암울한 날들이 계속되어지고 도무지 내일의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미래의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비록 백성들이 죄로 인하여 포로생활의 징계를
받았을 지라도, 죄를 뉘우치고 돌이키면 하나님께서
회복시켜주신다는 것을 알고있는 에스겔은 백성들에게
회개와 회복의 소망을 열심히 증거하여
희망을 심어주려 하였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리기 위하여
좌편으로 누워 390일, 우편으로 누워 40일을 지냈으며
(겔 4:4-8)머리털과 수염을 깎았고(겔 5:1-4),
손뼉을 치며 발을 구르며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겔 6:11)

그러나 죄악에서 돌이키지 않는 백성들을 보자 그들을
책망하게 되었고, 분노한 백성들은 에스겔을 쳐서 쓰려뜨려
골수가 쏟아질 때까지 그를 돌 위에 끌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는 22년동안 담대히 사역을 수행하였으며, 범죄한
자기 백성의 죄를 질책하다 그들에게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한 것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려고 오셨다가
자기 백성에 의해 십자가 형을 받으신
'예수님의 수난의 길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3. 사역의 특징

에스겔은 많은 이상을 보았습니다.
그중에서도 '네 생물과 네바퀴 보좌와 그룹'(겔 1-3장),
'마른뼈 이상'이라고 하는 -'해골 골짜기의 마른뼈들이 살아남' (겔 37장),
'회복된 성전'(40-48장)에 대한 환상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엄하게 심판하시지만, 자신의 무한한 긍휼과 자비로 인하여 자기백성을
친히 구원하시는 심판의 하나님이심과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알게되었습니다.   
 
1) 그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보았습니다.

세상의 형편은 에스겔의 마음에 빛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망국의 슬픔과
포로신세의 고난과 백성들의 신앙을 떠난 자포자기의 타락된 생활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져버리게 만들었습니다.
 
 탈진되다시피한 이때에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새 계획은 인간의 무너진 마음위에 세워지게 하십니다.
에스겔은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세상의 모든 통치의
어떤 상황도 넘을 수 있는 확신과 희망이 된다는 것을,
또한 세상에서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듯 변함이 없어도
하늘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에 대한 목적을 성취하기위해
큰 능력을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본 형상은 무엇이었을까요?

(1) 네개의 큰 차륜(wheel)을 보았습니다. (겔 1:15-21)  

유다는 애굽의 말과 병거를 섬겼고, 바벨론의 군마는
애굽의 병기를 무찔렀습니다. 이스라엘의 공포는 강대국의 막강한
군사력입니다. 이 때에 에스겔은 하늘의 병기와 군사를 본 것 이었습니다.
또한 눈이 가득 달린 바퀴는 모든 것을 다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즉시 달려갈 수 있는 기동성을 갖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막강한 위세는 이 땅에 어떤 세력도 두렵지 않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는 병거를 둘러싼 눈이 오늘날도 항상
우리를 보고 달려올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 궁창위에 있는 보좌의 한 형상을 보았습니다. (겔 1:26-28)

지협적인 땅의 편협함에 비하면 광활한 하늘의 영원한 궁창에
보좌가 세워있음을 보았을 때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즉 인간인 느브갓네살왕의 보좌는 그에비해 너무나
초라했고 왕의 위엄또한 허수아비처럼 느껴졌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초월성과 웅대성을 깨닫게 되자, 이 땅에서의 인간들의
아귀다툼은 한낱 모기들의 윙윙소리에 불과하다는 것과 또한
보좌를 둘러싼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은 언약으로 인간을
굽어 살피시고 끝까지 보호하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장엄한 영광을 체험하게 될 때,
왜소했던 신관에서 벗어나 참된 경배와 이 땅에서
참 소망을 갖고 살게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해골골짜기의 뼈들이 큰 군대가 됨을 보았습니다. (겔 37:1-10)

바벨론의 유대인들은 죽어있는 마른뼈와 같았습니다. 삶의 의미도
소망도 끊어진 내면이 죽은 목숨만 남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뼈들은 하늘의 시선하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에스겔은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들이 능히 살겠느냐? '
때로는 절망의 환경이 하나님의 기적을
확신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에스겔은 자신의 믿음보다
하나님께 결론을 미루었습니다. 이같은 상황에서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1) 믿음으로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겔 37:6)

새로 거듭난 자들이 되는 과정도 이와같이 죽어있는 내 영혼의 모습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나야하며, 그 속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사망에서 부활에 이르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몸이 영생의 부활로 회복될 것이며, 영혼이 죄의
사망에서 의의 생명으로 거룩하게 변화될 것이며,
세상의 만물들이 저주에서 벗어나 창조주의 섭리에 따라
변화된 모습으로 하늘나라에 존재할 것입니다.

(2)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로 부터만 오는 것입니다.

'주 여호와의 밀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하라 하셨다 하라!.' (겔 37:9)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라 산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시선하에 있는 자들은 모두 산 자들이며 하나님의 생명의 숨은
언제든지 때에 따라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창조시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신 하나님은 마찬가지로
부활시에도 죽은 자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실 것입니다.

한편 마른뼈들이 살아나 큰 군대가 된 것은 이방 땅에 사망의 삶을 살고있는
유대인 들이 다시 힘을 얻고 용기를 되찾아 회복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같은 성취는 70년후 고레스왕의 칙령을 통하여 성취되었습니다.

우리에게 환난이 오래 계속되고 희망이 무너져 모든 대상에 대한 신뢰가
사라질 때, 우리의 심령은 낙담됩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바로 새생명으로 채워지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에게 주시는 새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3) '여호와 삼마'이신 하나님이 새 성전을 보여주심을
체험하였습니다. (겔 40:48)

하나님께서 성전의 모형을 보여주신 예는 모세와 에스겔 두사람
이었으며 모세에게는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해방과 자유선민으로서
여호와를 섬기는 백성됨의 증표로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에스겔 에게도 바벨론의 포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으로 삼으신다는 성전의 계시는
구약과 신약시대에 모두 중요한 계시임에 틀림없습니다.

(1) 성전회복의 의미 (겔 40-43장)

하나님께서 우리들과의 영적관계를 회복하신다는 의미이며
이는 성전에 임하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를 만나는 장소로
예배와 찬양을 받으시겠다는 약속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성전이란 언약의 백성임을 증명하는 것'이고
사실상 그들에게 성전보다 더 큰 위로는 없을 것입니다.

(2) 성전 보좌의 의미 (겔 47장)

하나님이 계신 곳은 생명수가 공급되는 곳이요, 그곳에는 생명의 회복이
일어나게 됩니다. 또한 회복된 생명은 소성과 번성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같은 현상은 오늘날에도 일어납니다. 교회를 건물로만 여기기보다
성전이란 개념을 갖는 다면 생명의 은혜가 더욱 차고 넘칠 것입니다.

(3) 성전 지역의 의미 (겔 48장)

'하나님의 떠나심은 영광을 거두심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임재는
영광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사실로
이스라엘의 존속은 이에 달려있었음을 봅니다.
결국 땅의 분배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회복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여호와 삼마'라는 말의 뜻 그대로
'그 곳에 항상 그들과 함께 거하시겠다'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겔 48:35 )


그러므로, 우리들의 황폐되어진 환경속에 함께 하시는 여호와께서
각자에게 주시는 언약에 따라 나라를 일으키게 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에스겔과 같은 회복의 자녀들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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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갑족속 (Recabite)
(렘: 35:18-19)



이방민족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수종들고 지키는 일을 한 종족은
'레갑족속'
밖에 없으며, 그들은 마치 레위지파 같은 취급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는 그들이 얼마나
선조 요나답을 본받아 하나님께 충성된 삶을 살았는지를
오늘 말씀에서 보여줌으로 알수 있습니다.

유다가 멸망한 B.C. 586년후에는 그들위 거취에 대한 언급이 없으나
바벨론으로 함께 이주한 것으로 보이며, 그후 포로귀환시 돌아와
'벧학게렘'지방(예루살렘 남쪽 3.4km 지점에 위치한 장소로
 오늘날의 '라멧라헬'임)에 모여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느헤미야가 성전을 건축하는 사역에 참가하여
레갑의 아들 '말기야'를 중심으로 '분문을 중수하는 사역'을 맡아
완성하였음을 성경에서 보여줍니다. (느 3:14)

오늘날에는 레갑족속에 대하여 유대인 선교를 한 'Wolffc' 가 예멘에서
그들을 만났다고하며 예멘광야를 중심으로 여전히 레갑족속의  
후예들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숫자는 약 6만명으로
추산되며 그들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아들 '호밥'에게서
출발했다고 주장한다고 합니다.  

1. 레갑족속의 기원

 '이는 다 레갑의 집 조상 '함맛'에게서 나온
'겐'족속 이더라
'(대상 2:25)
 여기서 함맛이란 사람의 이름이기 보다는 지명으로 보이며,
이 지역은 납달리 족속의 영토에 속한 한 성읍으로 (수 19:35)
겐 족속인 '헤벨'이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입성후
이주하여 살았던 곳입니다. 그러므로
레갑 족속은 헤벨의 후손으로 여겨집니다.

한편 겐 족속의 유래는 미디안 광야의 유목민으로
 그 이름의 뜻은 '장막생활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불려졌으며
모세의 장인 이드로도 이들에 속해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할 당시 처남인 '호박'
모세의 권유에 따라 (민 19:29)함께 동행함으로
가나땅으로 올라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울왕 시대에도 아말렉 족속들에서 떠남으로 멸망받지 않았으며 (삼상 15:6)
이 겐 족속중 한 집안의 명칭이 '레갑(Recab)'이었는데, 이는 그들 조상중에
'레갑'이란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한 명칭입니다.

이 레갑족속이 철저히 유목민으로서의 삶을 살게 된 것은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 의한 것이었는데, 이는 그 당시 이세벨과 아합왕의
극악무도한 통치아래 온 백성이 타락한 삶을 사는 것을 보고,
그들의 삶에서 떠나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삶을 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요나답은 그당시에 경건과 지혜로 유명한 인물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예후를 통하여 아합왕의 가계를 무너뜨릴 때,
예후는 '요나답' (한글 성경에서는 '여호나답')과 같은 명망있는 인물을
함께 자신의 병거에 동승시킴으로 (왕하 10:15-16)바알선지자들을
척결하는데 백성들의 마음을 회유하기도 했습니다.

2. 요나답의 명령을 따르는 레갑족속의 순종

소수의 민족이 강대한 민족가운데서 살아남기 위하여는 자신들의
독자적인 보존방법을 모색해야하며 이는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더욱 열심인 신앙적인 방법이어야만 함을 요나답은 알았습니다.

이에 그는 민족의 멸망이 사치와 부요와 무절제로부터 기인되는 것을
보고 다음 이 세가지를 지킬것을 후손들에게 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레갑 족속은 근 3백년이 지나도록 이 명령을 지키고 살았습니다.

1) 그들은 포도주를 절대 마시지 않는 생활을 하였습니다.(렘 35:8)

포도주는 사람의 마음에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 적당히 마시면
기분도 건강에도 유익이 될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콜의 특성상
중독으로 인한 갈증을 더욱 유발 시킴으로 도가 지나치게 되고,
본인과 주변 사람에게 해를 끼치게 됩니다.

요나답은 당시의 도덕적인 타락들이 술취함으로 인한 것을 보았고,
특히 에브라임 족속들 가운데는 주정꾼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자신의 백성들이 그와 같이 물들어 타락하지 않을까 염려가 된 것입니다.

술에 대한 부작용으로는ㅡ
첫째, 사치와 무절제를 불러오고,

둘째, 망령된 행동으로 이웃에게 해를 끼치고,
셋째, 몸과 영혼을 마비시켜 혼탁하게 만들므로 하나님을 욕되게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엡 5:18)하였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맑고 건전한 몸과 정신을 유지하여 스스로
편견을 갖지 않고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경건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이 말한
 '너희 몸은 성령의 전인줄 알지 못하느냐?' (고전 6:19)를
구약에서 지킨 정결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2) 장막을 치고 살면서 유랑생활을 하였습니다. (렘 35:9)

집에 비하면 장막은 보잘것 없는 거주장소입니다.
불편함을 줌으로 안일함에서 벗어나게 하며, 추위와 바람을
막지 못함므로 그들에게 강인함을 지니게 해 주며,
치장없는 검소함은 그들을 겸손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장막생활이 세상에 정착 한다거나
뿌리를 내려 안연히 거주하려는 생각을 절대로
갖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순례자의 여정으로 여기고살 때, 우리의 눈은
부귀영화 쾌락에 연연하지 않게 되며 우리의 생각은
영원한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의 대부분은 이땅에서의 소유와 명예를 위하여 소비되어 집니다.
다시 말하면 반대로 소유와 명예를 위하여 살지 않는다면 그 비중은
천국을 위한 준비하는 삶으로 쓰여질 것입니다. 

음식이 몸의 정결을 위한 것이라면, 순례의 삶은 행위의 거룩을
만들어 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3) 농경생활을 금하고 유목생활을 하였습니다.(렘 35:9)

사치와 부는 인간을 탐욕으로 부추기고 결국은 싸움의 근원이 되게 만듭니다.
재산을 소유치 않고 소박한 유목민으로 사는 습관은 그들로 하여금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이삭이 블레셋 사람의 미움의 대상이자 탈취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그가 소유한 부요때문임을 생각할 때, 요나답은 참으로 검소와 겸손의
겸비한 삶이야말로 생명을 오래 보존할 수 있는 길임을 알았던 지도자 였습니다.
레갑족속은 부모에 대한 효도와 순종으로 하나님의 약속말씀따라
장수의 축복을 받을 만한 민족이 된 것입니다.

3. 레갑족속의 삶에 대한 성경적 의의

1) 그들은 시험을 이겨낸 하나님 백성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 1:12)

레갑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지자인 예레미야로 부터 초대를
받았고 그 장소 또한 성전의 부속실인 방에서 성의로
준비된 포도주의 대접으로 환영을 받았습니다.

여기에는 아무런 의심도 있을 수가 없었고 그런데도
그들은 예레미야의 청을 거절했습니다. 더우기
미안해 하며 대 선지자앞에서 변명하지도
입장을 호소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포도주를 거부한 이유는- 선조 요나답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에 어떠한 타협도 할 수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의 고귀함을 보게 됩니다.

오늘날 신앵생할에서 세상과 더불어 변명, 타혐, 자위 등 쉽게
이루고 지내는 것을 보게 될 때에 참으로 본 받아야될 생활로 보입니다.
믿음이 세속화될 때 고귀함을 잃어 버리게 되고, 더우기
하나님도 잃어버린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2) 시험의 승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축복으로 받는 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렘 35:19)

레갑족속은 이스라엘 가운데 나그네와 객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족속이 존속하는 한
그들도 존속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더더군다나 제사장 , 레위인도 될 수 없는 그들로
성전을 섬기는 일의 직분을 감당하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네 앞에 설사람'이란 말은 '오메드 레파나이'란 단어로
그의미는 일반적으로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자를 가리키는 말'
이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축복은 레갑족속으로는 큰 영광이 아닐수 없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인 우리들도 레갑족속의 삶을 본받아
시대의 흐름에 편성하기보다, 부패한 사회에 믿음의 모습을
떳떳이 보여줌으로 모든 시험에서 이기고
하나님의 인정과 축복을 받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도록 다같이 노력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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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브갓네살 대왕

/Nebuchadnezzar
(렘:25:9)


                                      
하나님께서 이방국가의 왕을 '내 종'이라 부르시며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사용하신 예는 '고레스'
'느브갓네살왕' 뿐이었습니다. (렘 25:9)

그는 이방신을 섬기는 이방인이었지만,
그의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간섭하심으로 변화되어
온 땅에 여호와 하나님 한분만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1. 생애

'느브갓네살'은 갈대아 왕조의 창건자인 '나보폴라살'의 큰 아들로서
왕이 되기 전부터 주변국가들을 정복하는 전쟁에 참가하여
많은 공적을 남겼습니다. (B.C. 604 팔레스타인 제패)

왕이 된후, (B.C. 605-562년까지 43년 동안 바벨론을 통치하였으며
메디아왕국의 '아스티아게스'왕의 딸인 '아미티스'와 결혼하여
'아멜마르둑'이란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는 군사적인정복 사업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건축사업도 추진하였습니다.
 바벨론 성에 있는 호화스런 왕궁과 에사길라 신전을 수축하였으며,
세계적인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인 '공중정원'
부인인 '아미티스'를 위해 건축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통치 기간중 34년에 '하나님의 징계의 꿈'
(순찰자가 나무를 자름)을 꾼후 1년 후에 정신병에 걸려
('리간드로피아': 자신을 짐승으로 여기고 짐승같이 생활하는 병)
7년간을 고생하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건강을 다시 회복하여
마지막 통치 기간에 하나님을 높이는 조서를 썼고
그후 2년간 살다가 재위 45년 되는 해에 죽었습니다.

2. 하나님의 징계의 도구로 사용되어졌습니다.

느브갓네살은 유다의 패역에 대한 징계의 도구로 선택된 자로서
유다를 멸망시켰을뿐 아니라, 포로로 잡아간 이스라엘 민족을
70년간 머므는 동인에 하나님의 역사를 여러번 체험함으로
그 백성들을 높여 주었으며 하나님을 찬양했던 사람입니다.
'보라 내가 보내어 북방 모든 백성과 내종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을 불러다가 이땅과 그 거민과 사방 모두 나라를 쳐서
진멸하여 그들로 놀램과 치소거리가 되게하며
땅으로 영영한 황무지가 되게 할 것이라.'(렘 25:9)
1) 바벨론의 유다 제 1차 침공은 (B.C. 605년)에 여호야김왕 3년에
이루어졌으며 왕을 생포하여 바벨론으로 끌고갈 때,
하나님의 전의 거룩한 기구들을 탈취하여 그의 정복의 기념품으로
 예전 바벨탑을 쌓였던 시날땅의 '자기 신의묘' 에 보관하였습니다.
이 때 1차 포로로 접혀간 왕족들 중 한 사람이 '다니엘'이었습니다.

2) 제 2차 침공은 (B.C. 597년)에 이루어졌으며, 여호야김왕이 풀려나
돌아와 3년동안 조공을 바치며 바벨론을 섬기어오다 배반하였는데
8년째 되던 해에 바벨론이 다시 침공하여 함락되었으며,
그 때가 그의 마지막 생애로 붙잡혀 수도에서 살해 되었고
그의 시체는 성문밖에 던져져서
'나귀같이 매장함을 당했다'라고
 전해집니다.(렘 22:19)

3) 제 3차 침공은 (B.C. 597년) 3개월 후 여호야김 대신 왕이된 아들
여호야긴이 부친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악을 행하자, 
느브갓네살 왕의 신복들이 돌아와 '여호야긴'과 선지자 '에스겔'
모든 왕족들과 권세자들을 다 잡아 여호와 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모두 바벨론으로 옮겨갔습니다.

4) 마지막 제 4차 침공은 (B.C. 588년)으로 여호야긴대신 섭정왕으로 임
명해 놓은 시드기야가 애굽의 후원을 얻어 바벨론을 배반하자, 2년동안
예루살렘 성을 공격하여(B.C. 586년) 함락시키고, '시드기야왕'
두 눈을 뽑고, 아들들을 그의 보는 앞에서 죽이고 모든 백성들을
다 사로잡아 가는 바람에 유다는 멸망하게 되었으며
드디어 다윗의 왕가도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3. 바벨론에서의 이스라엘 포로들과의 관계사역

느브갓네살 왕은 전쟁을 통해 정복한 나라에서 유능하고 지혜있는
사람들을 데려다 자국의 학문과 기술을 가르쳐 바벨론 왕국에서
일 하도록 정책을 펴 나갔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니엘'을 얻게 하시는 기회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느브갓네살 왕은 다니엘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달아 가기 시작하는 주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까요?

1) 큰 신상의 꿈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계시의 체험 (단 2 : 31)

꿈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는 3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자연적인 꿈(전5:3) 둘째: 영적인 꿈 (창28:12)과
셋째: 악한 꿈 (렘23:32)-점치는자, 복술자의 경우입니다.

특별히 느브갓네살 왕이 꾼 꿈 즉, (꿈 속의 신상)
하나님이 주신 계시적인 꿈이었습니다.

(1) 머리: 정금- 바벨론
(2) 가슴과 팔: 은- 메대와 바사
(3) 배와 넙적다리: 놋 - 헬라제국
(4) 종아리: 철- 로마제국
(5) 발가락: 철과 진흙- 열 나라  
(6) 뜨인 돌: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  

이는 바벨론 나라 이 후에 앞으로 장차 도래할 나라들을 말합니다.    
다시말해 앞으로 도래할 나라들이란, '바벨론 왕국'이후에는
'메대와 바사 왕국'을 그 뒤에는 '헬라 제국'이, 그 후는 '로마 제국'이,
이어서 10 나라와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차
 '예수님에 의해 다스려질 나라가 장차 도래할 것'

예고하여 그에게 끔으로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일반 역사로 보면 강대국들이 천년만년 지속될 것 같지만,
1-2백년 길어야 몇백년이면 제 아무리 강대국이란 할지라도
결국 허무하게 다 무너져버리고 만 것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리엘은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단일국가로 남아 있음을 봅니다.

그럼으로 주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는 영원히 지속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섭리를 느브갓네살 왕은 보게
된 것입니다. 계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삶이 편안함니다.

그리고 온전해 지기 위하여는 변신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고통과 연단이 오더라도 계시는 축복입니다.

2) 금신상 사건을 통한 하나님 능력의 체험 (단 3:25)

다니엘의 꿈해석을 통하여 큰 감명을 받은 왕은 곧 이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신상을 만들어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절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감동이 믿음이 되기 위해서 또 다른 깨우침이
있어야함을 느브갓네살 왕을 통해 오늘날에도
모든 믿는자에게 촉구하여 보여주는 것입니다.  

(1) 감동이 회심이 되기 위하여는 성격을 바꾸는 것이 뒤따라야 합니다.

왕된  자의 특징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소유하고 있음으로
인간의 한계를 느낄 때만  종교성을 느끼는
경향이 있습니다. 유익에 따라 마음을 갑작스럽게
변화시킬수 있는 변덕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소유하려는 마음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가 아닌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유익으로 바꾸려는 교만한 마음을 버려야합니다.

주변의 아첨하는 무리들로 자신을 신격화 시키려는 충동에 사로잡힌 왕은
바로, 자신의 꿈에서 본 신상에 금을 입히려는 착상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3)  거짓 신앙은 죽음을 넘어선 신앙을 봄으로 도전을 받게 됩니다.

믿음은 영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지, 이세상에 있는 것들
때문에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하여
영원을 포기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예컨대,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느브갓네살 왕을 무서워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었습니다.

(4)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의 고정관념을 바꿉니다.

불은 바벨론이 섬기는 신이요, 불의 위력은 절대적입니다.
 그런데 세 사람들은 불속에 들어갔어도
몸은 커녕 옷자락 하나도 그슬리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이 왕과 신하들에게 충격을 준 것은
불의 위력을 무시하고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하신지를 그들에게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5)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자만이 하나님을 공경하게 됩니다.

계시를 보았을 때는 놀라움으로 신기함을 느꼈지만
능력을 보고 나서는 왕은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단 3:29)

'설만히'란 의미는 '소홀히 하다, 불경스런 언행을 하다'를 뜻하며
누구든지 그럴 경우에는 중벌로 다스리겠다는 정도로 그는
이같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3) 순찰자의 꿈의 실현을 통한 인간의 무능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단 4:10)

하나님을 아는 것과 대우해 드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직접 관계적인 삶이 연결될 때 신분에 맞는 행위가 나오게 됩니다.
느브갓네살 왕이 금신상을 세운지 10년이 지나 그의 인생의 말년쯤에
도성을 바라보며 자신의 위업에 대해 자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금 까지는 이방인중에서
택함받은 종으로 낮추었으나 이제는 그를
구원받을 자로 낮추시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그를 7년동안 짐승과 같은 삶을 살게 하심으로
창조주와 피조물의 신분의 차이를 개닫게 하셨습니다.
왕으로 있을 때 그는 세상을 바라보며 지냈습니다.
세상의 위로는 하나님의 징계의 대상이 됨을 그는 몰랐습니다.

짐승이 되었을 때 그는 하늘을 바라보며 지냈습니다.
하늘의 위로는 세상의 존귀함을 얻는 일임을 알았습니다.
그러자 제정신으로 돌아온 왕은 하나님께
마침내 온전한 영광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 느브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심으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 '(단 4:37)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의로우심과 주권을 깨달아
피조물인 인간은 오직 겸손으로 순종하여야됨을
깨달은 그는 마침내 참 회개를 통하여
 비로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끝으로 하여 마침내 그는 2년동안
평안한 여생을 누리며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의 70평생 동안 오직 이 기간만이 참 인생의
가치와 평안의 삶을 누리며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겸손하게 순종하는 자를
선대하신 다는 하나님의 자비를 오늘날
그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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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타 무릎의 야고보 / James
(약 1:22)


야고보란 이름은 야곱이라는 이름의 변형으로서
'발꿈치를 잡다'란 뜻을 지닌 이름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야고보’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으로
여러 명의 사람들이 이 이름으로 불리워졌습니다.
먼저 '세베대의 아들'로 헤롯에 순교당한 야고보가 있습니다. (행 12:2)

다음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있는데,
그는 열두명의 제자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12 사도 중 한명인 '유다의 아버지' 야고보 (눅 6:16)와
그리고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 (먁 6:3)가 있습니다.

1.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의 인적 사항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 요셉, 시므온, 유다와 형제였고 (마 13:55)
 부모는 요셉과 마리아 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은
형제들과 더불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습니다. (요 7:5)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 후 (고전 15:7)
예수님의 증인 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 이후 베드로, 요한과 더불어
교회의 인정받는 지도자가 되었으며, 나중엔
예루살렘 총회의 의장격인 감독으로 일하였습니다.
그는 야고보서를 기록하였으며 순교하기 전까지
예루살렘 교회를 30년간 인도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2. 생애


그는 어머니의 태 속에 있을 때부터 거룩한 사람으로 태어났으며,
입에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않았고, 살아있는 것을 먹지 않았으며,
자신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았고, 기름도 바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소에 들어가도록 허용된 유일한 인물이었는데
이는 그가 모직으로 된 옷을 입지 않고 오직 세마포 옷만 입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항상 홀로 성소에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그의 백성들에 대한 용서를 간구하였으며,
이로 인해서 그의 무릎은 마치 낙타의 무릎처럼 딱딱해졌다 합니다.

특히 그는 율법의 모든 규례를 하나도 어김없이 다 지켰으며
이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고 의인이라는 칭호와
"오블리아스" (백성들의 보루)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습니다.

그가 이와 같이 모든 율법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해서 새로운 힘을 얻었기 때문으로 말하고 있으며,
이 같은 그의 삶은 구약과 신약, 율법과 은혜를 잇는 교량 역활을 하는데
큰 기여를 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한 예로 공회지도자들이 야고보에게 청하기를
"오, 의로운 자시여!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모여드는 백성 앞에서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님을 천명해 주시요!" 라고 부탁하고
그 날 성전 꼭대기에 세워 말씀을 증거케 한 자리에서 야고보는
담대히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요,
지금 하늘 나라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장차 구름을 타고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라고
큰소리로 외치자 군중들은 이 소리를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여"라고 환호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당황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를 성전에서 밀어
떨어뜨렸으나 죽지 않자 돌로쳐 죽였습니다.
그 때 야고보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를
"주가 되시며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이시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저들이 하는 행동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며 잠들었습니다 (A.D. 62).

그들은 야고보의 시신을 성소 옆에 묻었고
그의 묘비는 아직도 그 곳에 남아있다 합니다.
그는 유댜인들과 헬라인들에게 예수꼐서 그리스도 이심을 증거하며
최후를 마친 참 된 증인으로서의 삶을 산 사람입니다. (유세비우스)
 
3. 사역

그가 예수님 생애 동안에는 그 분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다가
나중에 그리스도의 순교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고전 15:7)

히브리어 복음서 (제롬에 의해 쓰여진 기사)에 의하면
"야고보는 예수의 부활이 있기 전까지는
결코 먹지 않을 것을 맹세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가리고 있는 육체를 벗어버림으로
야고보로 하여금 자신이 구세주임을 깨닫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자마자 그의 형제인 야고보에게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야고보에게 "식탁을 준비하고 빵을 가져 오라" 하시고,
그 빵을 축복한 후 야고보에게 주시며 "나의 형제 그대여 빵을 취하라,
인자는 잠자는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노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야고보는 그 후 일생동안
오직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불렀으며
죽을 때까지 온전히 주님만을 섬겼습니다.

특히 그의 특출난 역활은 오순절 성령 사건으로서 초대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사마리아 팔레스타인,
유럽으로 확산되어 가던 때에 울법과 복음과의 관계,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관계에서 혼란을 겪고 있는 신앙적 문제를 신학젹으로
정리 해주는 역활을 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행 15:19-20)

기독교에 대한 유대교의 종교적 박해와 네로 황제의 기독교인 탄압에 대한
로마의 정치적 박해가 심해지는 때에 예루살렘 교회를 지킨 기동같은 인물로써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시험을 이기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야고보서를 통하여 진지한 당부와 위로를 전하는 사역을 하였습니다.

4. 사역의 특징

1) 이방인 할례에 대한 문제 해결 (행 15:19-20)
 
안디옥 교회에서의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
유대인들의 주장에 따라 유권 해석을 위하여
예루살렘 공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 때 의장격으로 있던 야고보는 이 문제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잘 처리함으로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는 신앙의 전환점을 이루었습니다.

(1) 율법보다 중요한 것은 이방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 (15:16-17)

베드로의 고넬료 가정 구원과 사마리아에서의 빌립 전도등으로
이미 이방인들의 구원을 하나님께서 시작하셨으며
그들의 성령충만함의 체험은 율법준수와 관계없이
이루어 진 것임을 먼저 인식시켰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반드시 두 가지 현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먼저 믿음에 관한 신앙적인 문제이고 또 하나는
생활에 관한 믿음 적용 문제입니다. (제사, 음식, 풍속 등)

구원은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수정하기에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문화의 문제는 수정이 가능함으로 야고보는 율법에서도
특히 하나님이 명령하신 금지 사항만을 선별하여 결정 내렸습니다.

(2) 성령님의 결정과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행 15:28)
 
문제가 해결된 것은 자신들의 회의나 토론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성경의 말씀을 토대로 성령님이 한 마음을 주셨기 때문임을 야고보는 주장했습니다.
세상은 급하게 돌아가는데 성령님의 뜻은 깨달을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어떤 때는 성령님의 뜻이 필요 없이 모든일이 잘 나가고 있는데
갑자기 지시하실 때도 있습니다. 성령사역, 성령 생활은 성령님과 항상
동행, 동역, 연합, 의식의 삶 임을 야고보는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2) 고난 중에 오는 시험에 대한 문제 해결 (약 1:2-4)  
 
세상에서는 문제가 없는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그 것은 무난한 상태의 삶을 사는 것에 불과합니다.
정작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상태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며 그 분의 은혜로써 여기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인내의 삶을 사는 것이 온전한 삶을 사는 비결입니다. (약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 1:4)
인내는 인간편에선 고통이지만 하나님 편에선
믿음으로 소망을 갖게 만드는 깨우침입니다.
고난은 인간에게 삶을 신앙적인 해석을 할 수 있도록
깨우쳐 주는 기회입니다.

그래서 불행을 많이 겪은 사람이 행복하게 산 사람보다
인생의 깊이를 더 많이 알 수 있고 그 밑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그분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 요셉, 다윗)

(2)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사는 삶이 시험을 이기는 삶입니다. (약 1:5)

시련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해하게 되면 시험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교 신봉자로서 기독교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을 때
싸움과 핍박과 대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주님이 택한 이방인의 그릇임을 깨닫고 난 후
 ‘자신의 인생길에 어떠한 시련이 와도 이 다음에 상급으로 받을 것’이란
기쁨과 또한 고난을 그리스도의 흔적으로 여기고 살았습니다.
지혜란 하나님은 좋은 분이심을 믿고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3) 행하는 믿음으로 인한 신앙의 성취 문제 해결 (약 2:22)

인간이 착각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자신에 대한 평가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실상은 가진 것이 없고,
무언가 능력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일에 부딪쳐보니 무능력하고,
믿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위기가 오자 그만
말씀과 행동이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꼐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22)
자신의 믿음의 크기는 자신이 하나님을 아는 것 만큼
행한 행위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 예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롬 4:17)
이 고백은 사라의 죽은 태의 몸에서 이삭을 얻었으며,
사랑하는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는 행위에서
그의 믿음을 인정받고 고백한 간증인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에 1/10 이 행함이면, 믿음은 1/10 이고
행함이 9/10 이면, 믿음도 9/10 입니다.

과연 아브라함은 10/10 의 믿음을 증명하여 보였고
신앙의 성취를 이룬 인물이 되어 마침내 그 결과
하나님께서 ‘나의 벗’이란 (사 41:8) 칭호와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의를 얻었습니다.

야고보는 오늘날 행함이 부족한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죽은 믿음에서 벗어나 산 믿음을 갖도록 우리에게
귀중한 권고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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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주장사 루디아 / Lydia
(행 16:14)



빌립보는 B.C. 4세기에 알렉산더의 부왕인 빌립이 지은 도시 이름이며
약 2세기 동안 헬라의 식민지였다가 B.C. 1세기 말에 로마 식민지가 되어
많은 퇴역 군인들이 그 곳에 자리 잡고 살고 있는 도시입니다.
마게도냐의 네개 지역 중 제일 큰 도시로 루디아는
사업상 이 도시에 머물며 살고 있었던 곳입니다.

1. 루디아의 인적 사항

루디아란 이름은 '생산'이라는 뜻이며 고향이 루디아 였기 때문에
'루디아 출신의 여인'으로 불리워진 이름입니다.(예, 수원댁, 청주댁 등)
그녀는 두아디라에 염색 공장이 있었고, 그 공장의 상품을
마게도냐로 가져와서 파는 이른바 대리점 경영주의 신분으로
남편이 일찍 죽어 자신이 사엽하는 여인이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두아디라 성의 자주장사로 불리워 졌고,
본명은 "유오디아" 혹은 "순두게"로 추측됩니다. (빌 4:2)

2. 신앙배경

이방인이었던 그녀는 당시 철학이나 종교로는 마음의 빈 공간을
채울 수가 없었음으로 유대교로 개종하였으며 유대교에서
그녀는 자신의 생활과 수고에 시달린 영혼을 잠시
쉴 수 있는 안식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공허감은 해소되지 않았으며
스스로 풀어보려고 강가에 나가 기도모임을 베풀고 위로 받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바울의 제 2차 전도여행으로 빌립보에 들렀을 때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으며, 예수님이 자신이 바라고 원했던 구원자이시자
자신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일생의 주인이신 것을 깨닫고 나서는
큰 공허감은 즉시 메꾸어 지게 되었습니다.
즉, 자신의 영혼의 주인이신 사랑의 주님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3. 사역활동

A.D. 50년경 복음이 아시아 및 유럽으로 전파되어 가는 가운데
루디아는 빌립보에서 처음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여
빌립보 교회를 세우는 인물이 되었으며 또한 두아디라에
내려가서 두아디라 교회를 세운 자로 여겨집니다.

이 같은 복음전파 활동은 유럽에 교회가 세워지는데
기초석을 놓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으며,
가장 모범적인 선교 활동으로 바울의 전도 사역에
기금을 후원해 주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빌 4:16)

4. 루디아의 신앙 생활의 특징

1) 루디아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인이었습니다. (행 16:14)

이방 여인으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유대교인이 된 것은
그녀가 종교심이 깊은 사람임을 나타내며 이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강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녀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고백하였으며
십계명을 지키려 노력한 경건한 여인이었기 때문에 안식일날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강가에 기도모임을 준비하였습니다.


(1) 그녀의 하나님을 공경하는 방식은 유대교적 방식이었습니다.

- 유대교적 방식: 율법을 따르는 방식으로 행위를 위주로 한 신앙생활이 주가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하여 이웃에 선을 베풀거나 근면하고
도덕적인 생활을 함으로 죄에서 벗어났다고 여기고 사는 삶을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 아무리 율법을 지켜도 없엘수 없는 어둡고도 황폐한 공간이 있습니다.
그 곳은 자신이 태어나서 지은 모든 죄들이 쌓여져 있는 창고같은
빗장이 결려 닫혀져 망각되어진 공간입니다.

유대교는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을 모시는 생활입니다.
아무리 섬겨도 충분하지 못한 이유는 마음속의 죄를 처리하지 못한데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도 편안한 이유는
하나님과 나와의 허물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2) 그녀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식은 기도와 말씀을 중심으로한
생활 태도였습니다.


유대교인 중에 더욱 하나님을 깊히 섬기기 원하는 사람들은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고 말씀의 갈급함을 호소하게 됩니다.
고넬료도 루디아도 마찬가지 심정이었습니다.

이들은 말씀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기 원했고
율법에서 좀 더 영혼이 해방되기를 갈구하였습니다.
이때 사도 바울의 복음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죄악을 다 씻어 주시고 다시 자녀가 되어
화목하기를 원하신다"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
지금까지 망각 속에 묻어두려 했던 죄악의 창고에
한 줄기 빛이 비쳐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진리를 찾는 과정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귀히 여기는 자를 귀히 여기신다"는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2) 루디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열어주시는
체험을 한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지으신 분이시며, 또한 마음의
주인이시기도 합니다. 특히 인긴에게 심어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열으실 때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여야 그 문이 열려지게 됩니다.
루디아의 마음은 주님에 의해서 세가지가 열려지게 되었습니다.

(1) 말씀을 깨달을수 있는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을 때 그들이 처음 보고 들은 것은
하나닙의 말씀이셨습니다. 불순종의 죄가 그 마음을 덮어 말씀과의 차단을
시켜 놓았기 때문에 진리와 마음은 서로 만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죄의 덮개를 벗길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주님께만 있습니다.

바로 보혈의 공로가 이에 적용되어 지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진리와 접하게 되면 뜨거워 집니다. 자신의 생명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근본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 24:45)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32)


(2) 귀를 열어 죄악을 깨닫게 하여 주십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열려 진리를 받아들이면 마음은 기쁘고
활성화되어지는 반면, 귀를 열어 주시면 나의 죄에 대한 참 회개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수없이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계시나 귀가 속이는 말로
막혀있는 우리에게는 진리에 대해서는 귀머거리 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아오게 하시나니'(욥 36:10)
죄를 깨닫고 회개한 마음은 다시는 뒤로 돌아가지 않고
선한 마음이 주님을 더욱 좇아가게 만듭니다.
'주 여호와깨서 나의 귀를 열으셨음으로 내가 거역지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사 50:5)

루디아는 바울일행을 집으로 모셔 대접하며, 복음의 말씀을 더욱 경청하였습니다.

(3) 믿음의 문을 열어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행 14:27)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살후 3:2)

하신 말씀과 같이 우리의 믿음과 주님이 허락하신 믿음은 서로 차이가
있음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문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교인의 집에서 태어났어도 믿음을 소유할 수가 없는 반면,
루디아같이 복음을 몰라도 믿음의 문이 열리면 자신뿐만 아니라
온가족을 구원받게 만들수 있습니다. (예: 고넬료와 그의 가족)

3) 루디아는 빌립보 교회를 세워 바울의 선교사역을 지원하는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영혼이 구원받은 기쁨과 주님이 주신 사명을 깨닫고 나면 복음전도사역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느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역에 지원을 하려는 마음이 우러나와
사역자를 돕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자신을
후원하는 행위에 대하여 두가지로 칭찬을 하였습니다.

첫째: 하나님 사역을 위하여 베푸는 것은
하늘에 심는 것임을
알려주었습니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빌 4:17)
약한자를 도와주는 행위는 하늘나라에 심는 일임을
알려주면서 바울은 그들이 번성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주시리라' (잠 19:17)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사역을 할때 선교헌금을 보냈고 바울이 로마감옥에
갇혀있을 때, 그를돕던 모든 사람들이 떠났으며 모든것이 부족한 가운데
습기찬 감옥에서 긴 겨울을 보내야하는 사실을 알게된 빌립보 성도들은
즉시 헌금을 모아 에바브로디도편으로 보내어 주었습니다.

복음의 열매는 하늘에 심는 행위입니다.
이땅에서의 기대를 넌어선 마음이 선교를 할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베푼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기로운 재물임을 알려주었습니다. (빌 4:18)

과부가 두 므나를 연보궤에 넣는 것을 아무도 몰랐으나 예수님께서는 아시고
자기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고 말씀하셨으며,
사르밧과부가 엘리야 선지자에게 마지막 밀가루 한웅큼으로  
떡을 만들어 대접할 것을 하나님께서는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기로운 제물이란 아끼는 마음을 넘어선
헌신의 마음으로 드리는 예물을 말합니다.

헌금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구원에 대한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루디아는 사도바울을 통해 이 사실을 깨달은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었음을
보여준 여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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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무명용사 아나니아
/ Ananias
(행 9: 17-18)




사도바울이 주님의 종으로 세계를 복음화시킨 이면에는 배후에서
그를 사도로 세우는데 기여한 숨은 공로자가 있습니다.

첫번 째 인물은 아나니아고, 두번 째는 바나바 였습니다.
 그중에서도 아나니아의 공적은 핍박자 사울을 사도바울로
변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별로 각광을 받지 못한 인물로 지내었습니다.
그래서 윌리암 바클레이는 아나니아를 '기독교 교회의
잊혀진 영웅들중 하나'라고 하였습니다.

1. 인적사항 : 그의 이름 '아나니아'는 '안나스'라는 이름과 마찬가지로,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하나니아'
헬라어 표식입니다. 이 이름을 지닌 사람이 성경에서는 세 사람이 나오고 있는데,
초대교회의 삽비라의 남편 아나니아가 있고(행5;1), 대 제사장 아나니아가
있으며(행 23:2) 본문에 언급한 아나니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름의 뜻이 부합된 인물은 바로 본문의 아나니아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본래 다메섹 출신의 사람으로서
복음을 받아들여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드린 사람으로 사도나 제자서열에는
들지 않았지만 주님의 택함 받은바 주의 종으로 임무를 수행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는 끝까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경건한 유대인(행 22:12)으로
밑은바 직분을 다 하였으며 전설에 의하면 그는 후에 다메섹의 주교가 되어
사명을 다 하다 순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2. 사명 : 어느날 주님이 환상중에 아나니아를 불러 말씀하시기를,
직가 라는 동네 유다 집에 가서 사울을 찾아 안수기도 하여 주라는(행 9:10-11)
명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신 것에 놀라지않고 즉시
대답하기를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한 것으로 보아, 그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전능하신 이의 환상을 본 것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고,
여러번 경험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런 놀램이나 두려움없이 대답을 하며 무슨 명령이든지
행할 준비가 되었음을 아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명의 특성상, 첫째는 쉬운일이 아니며,
들째는 내 뜻과는 전혀 다른일을 행하여야만 하는 명령이 사명이기 때문에,
사명자에게는 충성심과 복종이 꼭 필요한 요소가 아닐수 없습니다.           

첫째, 사울은 자기와 같은 사람들을 잡으러 온 사람이고(행 9:13)
둘째, 그는 철저히 기독교를 박해하는 유대교 사람이기 때문에, 선대를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행 9:14)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도 내가 택한 나의 그릇'이라는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사울에게로 나갔습니다.

3. 사역의 특징 :

1) 그는 예수님을 닮은 성품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를 닮았을 때, 제일 먼저 알아보는 사람은 닮게 한 사람입니다.
즉 부모는 자녀가 자신 어디를 닮은지를 제일 잘 아는 사람임과 마찬가지 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 -주님과의 개인관계가 깊이 이루워진 상태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중- 그는 주변의 사람들이 이를 알게되어
다음과 같은 두가지의 평판을 얻게되었습니다.

(1) 그는 흠이 없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행 22:12)
사도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며 율법에 대하여
완전한 자라' 칭한 적이 있었는데, 아나니아가 바로 이와같은 사람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소속이나 족보, 전통에 속하여 있기 때문에,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 운명을 안고 지키는 것과, 자신이 자원하여
지키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면에서 아나니아는
   대단히 절제의 열매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2) 그는 유대인 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행 22:12)

유대인들은 아무나 존경하지 않습니다. 존경의 대상이 되려면
먼저 랍비 이상의 신분이 있어야하며, 하나님 말씀에 많은 지식과
사회에서의 지위가 높아야 인정하기 대문입니다.
그리고 회당에서 모든 예배를 주관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나니아는 그런 신분을 지닌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예루살렘에서 파견한 사람도, 70인 제자중
한 사람이라는 말도, 랍비나 공회회원 이었다는 말도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다메섹에 아나니아란 제자가 있다라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온 유대인은 그를 칭찬하고 존경하였습니다  
 
칭찬은 그의 행위가 얼마나 의로운가를 나타낸 말이요,
존경은 그의 인격을 인정하는 말 들입니다.
즉 언행이 일치한 주님 닮은 그리스도인이란 뜻입니다.

2) 아나니아는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행 9:10)

(1) 예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사이는 특별한 관계입니다. 남에겐 줄 수없고 보일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당사자에게는 다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는 예수님으로부터 이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기도하면 응답주시고, 귀를 기울이면 들려주시고, 궁금하면
환상으로 보여주시고, 예수님과의 깊은 관계는 그 만이 간직한
비밀의 관계였습니다. 사랑은 비밀입니다. 교제는 기쁨입니다.
순종은 행복입니다. 주님은 아나니아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2) 예수님의 특별한 부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를 위해서는 빌립을 보내셨고 고넬료를 위해서는
사도 베드로를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최고의 이방인의 사도가 될 바울에게는
일개의 무명인인 자신이 보내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것도 예수님 자신이 직접 모든 계획하신 것을
자기에게 들려 주었습니다.

첫째, '그는 내가 택한 나의 그릇인데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증거가 될 사람이다.'  

들째, '특별한 고난을 당하기 위하여 택하여진 사람이다.'

-즉, 지금까지 박해를 해 왔던 이상으로 박해를 받아야 할
사람임을 알려주었습니다.


셋째, '임금들 앞에서까지 주님의 이름을 전하여야할 사람이다.'

ㅡ뵐렉스, 베스도. 아그립바, 가이사 등

넷째, '내가 사울에게도 너가 가서 안수하여 다시 보게 될 것을

이미 알려 주었다'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믿으십니다. 반면 우리는 주님을 때때로 의심합니다.
그러면 설명해 주십니다. 들으면 부끄러워집니다. 주닙의
나에 대한 믿음과, 나의 주님에 대한 믿음이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3) 아나니아는 능력의 주의 종이었습니다.

(1) 그는 치유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아나니아가 그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행 9:18)

아나니아는 자신의 안수와 기도로 사울이 눈병이 나을줄을 알았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그렇게 하도록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능력은 주님께로 오며 말씀에 순종할 때,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는 바울에게 말하기를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를 다시 보게 하신다.'
라고 치료함을 선포하며 안수기도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눈을 가리웠던
비늘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주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면 바로 이와같은 치유가 일어날 것입니다.
바로 이 것이 믿는 자의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막 16:18)

(2) 그는 성령충만한 사역자였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행 9: 17)
성령님이 임하신 충만한 사건은 지금까지
특별한 사도인 베드로에 의해서만 이루워 왔습니다.

ㅡ첫째로,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내려가 믿는 자들에게
안수하였을 때, 성령충만함이 이루워졌고,
ㅡ두번째가 아나니아에 의한
바울에게 내린 성령충만이며,
ㅡ다음이 고넬료집안에 베드로에 의해서
내린 성령충만함 이었습니다.
 
이를볼때 바울로 12사도대열에 서게 하기위한 주님의 계획은
사도들에 의해 안수받게 하지 아니하시고, 아나니아를
택하여 성령충만을 내려주신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바울을 사도로 변하시키는데 결정적
성령사역의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겸손하여 자신을 나타낸 적도 없고
아무에게도 안수함으로 성령충만을 남용한 적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능력이 있는자는 능력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허락하실 때 순종으로 합니다. 그리고 조용합니다.    
        즉, 성령충만한 사람은 분수를 지킬줄 아는 사람입니다.
아나니아는 신앙의 참된 용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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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한 하박국
/ Habakkuk
(합 3:17-18)



1. 인적사항: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서 찬양하며 악기를
연주하는 사명을 지닌 레위지파의 악대에 속한 사람으로 아마도
시온 성전의 성가대 지휘자였을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 이유는
당시 성가대 지휘자는 성전에서 어떤 시편과 찬미가를 부를지
노래를 결정할수 있는 특권이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합 3:19)

그의 이름 하박국은 히브리 원전의 제목 '하박쿡'에서 유래 된 것으로
'껴안는자', 또는 '매어 달리는 자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그는 '민족을 껴안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의롭게 만드실 것이라
위로하는 사람' 인 반면에, '하나님께 신앙적인 문제를 가지고,
매어달리며 산 사람'이라는 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2. 사역 : 그는 남유다의 선지자로서 앗수르 제국이 멸망한
B.C. 612년과 애굽이 갈그미스 전투에서 패배한 B.C. 605년 사이에
바벨론의 유다 침공을 앞두고 백성들의 종교적, 도덕적 타락이 극에 달하자,

하박국은 하나님께 공의의 심판이 속히 도래하기를 간구하는 한편,
백성들의 고통을 위로하고 어떠한 불의의 상황속에서도 더욱 믿음으로
살 것을 격려하기 위해 예언을 선포하는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는 요시아(B.C. 640-609), 여호아하스(B.C. 609),
여호야김(B.C. 609-598)의 통치시대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스바냐와 예례미아(B.C. 627-580), 선지자와 거의 동시대에 활약한
선지자로 보입니다. 특히 오바댜는 에돔에 대하여, 요나와 나훔은 니느웨에
대하여 예언 하였으나, 하박국은 바벨론에 대하여 주로 예언을 한 사람이며,
요시야왕 때 일련의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짧은 부흥의 기간이었지만,
예언서를 쓰면서 노래를 지어 하나님을 찬미하는 활동을 한 선지자 였습니다.   

3. 내용 : 그는 신앙적 회의가 많았던 사람으로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구약의 도마'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하나님께 질문을 많이 한 선지자로 특히
하나님은 왜 악을 허용하시는가? 왜 유다보다 더 악한 이방인
비벨론으로 하여금 심판을 하게 하시는가?
이 혼탁한 시대속에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등의 신앙문제로 심각한 고민에 빠졌었으나,
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라는
진리의 말씀을 듣고나서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신득의'의 위대한 진리를 처음으로 선포하는 자가 되어
오직 여호와 한분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나중에 바울의 인용으로 인하여 신약성경의
주제들 중 하나가 되었으며(롬 1:17, 갈 3:11, 히 10:38),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의 기본신조가 되어 루터에 의해
구교에서 신교로 넘어가는 계기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4. 하박국 선지자의 신앙특징:

1)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오직 믿음으로만 살수있다는 진리를 말합니다. (합2:4)

이세상 만물들은 똑같이 생명이 주어졌고 그 생명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유지가 됩니다.
그러나 인간을 제외한 생물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지하고 따를 뿐이지 하나님을 알고,
이해하고 그분이 영광스런 존재이심은 모릅니다.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사랑하심과 인간을 구원하심을 아는 존재로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 들이는 것이 믿음이며 그것은 내 안에서 새생명의 근원을 제공해주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주고 그분의 약속의 말씀을 우리가 적용받을수 있도록
역사하는 능력으로 작용하게 해 줍니다. 특히 '의인은 그 믿음이란' 말에서
'그'가 가리키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생명을 시작하고 유지시키는 동기
즉,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특별부분을 기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생명이 믿음으로 부터 말미암는 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하나님께서 바벨론 멸망을 작정하시고 그 사실을 계시하여 주실 때 오직
믿음을 가진자만이 살게 될 것을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합2:3)
 
2) 아무리 환경이 황폐되었어도 하나님은 반드시 부흥시키신다는
    진리를 말합니다. (합 3:2)

(1) 주님의 뜻이 서는 것이 부흥입니다. 부흥은 쇠퇴함을 전제로 합니다.

쇠퇴함은 타락으로 인하여 오게 됩니다. 그리고 타락한 곳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오게 됩니다. 즉 주님의 뜻이 사라진 곳에 주님의 뜻을
소망하는 자들에 의하여 새롭게 회복시켜 지는 것이 부흥인 것입니다.

따라서 부흥은 내뜻이나, 내 소망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부흥을 원하는 사람은 먼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하고
간구기도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무엘 시대의 미스바 부흥은
백성들이 이방신들을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사무엘의 기도에 백성들이 금식하며 회개하자 블레셋은 진멸되고 다시는
침략하지 못했습니다. 느헤미야의 성벽재건 부흥은 성전과 예루살렘성을
중건하여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그분의
뜻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느헤미야가 금식하며 기도하자 130년동안
무너져 방치돼왔던 성을 52일만에 완성시켜주셨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의 부흥운동은 말씀 중심의 삶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할 때 입니다.
 자신이 주인이고 말씀이 시녀인 자기신앙에서 벗어나,  예수님 중심의 삶으로
돌아와야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수 있습니다.

마지막 추수 때인 이 시대에 주님은 알곡을 찾아
거두시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2) 주님의 때를 믿고 기다리는 것이 부흥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생명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즉 생명력으로 모든 삶이 확신에 차서 활기있게 살 때를 의미합니다.
이를 위하여 성령님은 우리에게 말씀 또는 계시로 임하십니다.
그리고 각자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도록 인도하여 주십니다. 그 때
대부분 우리는 서두르게 됩니다. 조급하게 행합니다.  

부흥은 감정으로 고양된 상태에서 오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속을 비우고 전적으로 주님께 맡기는 자세에서 맞이할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바랄 때 부흥이 이루워지면 성령님의 주도권을
내가 지고 나가려는 교만에 빠지기 쉽고, 반대로 늦어져
포기하고지칠 때 이루워지면 순종과 믿음을 잃는 경우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정하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우리에게 적합한 때에
역사하십니다. 주님의 때를 믿는 사람은 서두르고 조급하지도,
낙심하고 포기하지도 않는 법을 신앙안에서 배우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박국은 수년내에 부흥이 될 것을 알았고 수년이란 몇년을 말한 것
이라기 보다는 70년 동안 징계아래 있는 기간중 가장 적당한 때에
이루워 주실 것을 의미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반드시 나의 가정, 교회 사회 국가에 하나님의 부흥이 올 것을 믿고
받은 말씀을 꼭 붙들고 지금은 기다리는 자세를 갖출 때 입니다.

3)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는 삶임을 깨달았습니다. (합3:17-18)

'안식에 이르는 참된 길은 모든 두려움을 통과하는 길 뿐이다.'(칼빈)라는 말이 있습니다.
육신은 감각으로 통과합니다. 혼은 느낌으로 통과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환경의
범주내에서 머물고 맙니다. 그러나 영은 환경을 통과하여 영원속으로 들어갑니다.

없어지는 것은 환경속에 있는 것들입니다. 안없어지는 것은 하나님 속에 있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인생의 의미는 내가 부름받아 하늘나라에 갈 때의 시점을
기점으로 가치를 두고 살 때에 바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0년후, 10년후,
아니면 오늘 부르신다면 나는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간작하고 있어야 될까요?

떠날 환경속에 있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아침 새벽에 만난 하나님만이 가장 소중할 것입니다.
아버지깨로 가서 나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영원한
새 환경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세상에서의 환경을 초월한 믿음으로 산 구약의 인물입니다.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하나님은 그의 권능을 빛과 같이
자신의 손으로 비추워 주시는 분임을 체험한 그는,
 하나님의 영광만으로 기쁨을 삼고 산 사람이 되었습니다.
' 그 광명이 햇빛같고 광선이 그 손에서 나오니
그 권능이 그 속에 감취었도다.'(합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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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아
(옘 31:33)



1. 인적사항

예레미아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세우시다'란 의미로
그는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로 베냐민땅 아나돗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5.6 Km 떨어진 곳으로 제사장의 성읍이었으며
아론의 넷째아들 이다말과 엘리계통의 마지막 제사장이었던
아비나달의 후손으로 태어났습니다. (왕상 2:26)
(엘르아살의 계통의 사독 대제사장 계열이 아님)

2. 사역


그는 나이 20세가 되던 요시야왕 13년(B.C. 627)에
선지자의 소명을 받았으며 요시야와 함께 종교개혁을 하는 둥, 18년동안
사역을 하였고, 그후 여호야김 통치기간중 11년동안 하나님의명령을 거슬려
애굽왕의 봉신이 되려는 왕밑에서 고달픈 사역을 하다가, 시드기야가 왕이되자,
바벨론에 투항하라는 반민족적 언사 때문에 원수와 공모하여 자신들을 해롭게하는
매국노로 낙인 찍혀 말할수 없는 곤경을 11년 동안 겪게 됩니다.

이로써 그의 사역은 유대 땅에서 약 40년동안 지속되었으며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멸망되자 당시 남아있던 군대장관 요하난이 백성들을 이끌고 강제로
애굽으로 내려 갈시 예례미아와 바룩도 끌려 내려갔습니다.

예레미아는 애굽에서도 백성들이 모압의 여신 아스다롯을 위한 축제를
베풀고 여호와를 떠나자 이를 책망하고 멸망할 것을 경고함으로
결국 백성들의 미움을 사서 돌에 맞아 순교하게 됩니다.

애굽에서의 사역 11년을 합하여 그는 근 50년간 하나님의 사역을
완수하고 70세가 되어 죽어 애굽의 다바네스에 묻혔으나, 그후 세월이 지나
알렉산더가 애굽에 들어갔을 때 거기에 묻힌 예레미아의 뼈를 취하여,
알렉산드리아로 옮겨 그곳에 묻었다고 합니다.

3. 특징

그의 사역의 특징은 유다 백성들이 멸망될 것을 알면서도
백성들을 향해 회개를 선포하여야만 했으며, 여호와께서 이미 그들을
버리셨음에도 끝까지 그들을 사랑해야만 하는 어려운 사명을 감당해야
했기 때문에, 이 틈바구니에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따라서 그에게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으며,
마지막까지 죄에서 돌이키지 않는 백성들에게 결국 70년동안
바벨론의 포로가 될 것을 예언을 하였습니다. (렘 25:11)  

그리고 예루살렘이 갈대아인에 의하여 멸망될 때, 그는 하나님의
지시로 법궤와 향단을 취하여 그것들을 느보산으로 가지고 가서,
거기있는 어떤 굴 속에 숨기고 문을 막았습니다.

그뒤로 그를 따른 자들이 그 장소를 표시해 두었으나 그 장소는 발견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로 예레미아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 집니다. (마카비 2서 2:4)
예레미아는 그 것을 찾는 자들을 책망했고, '그 장소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시 모으실 때까지 알려지지 않으리라'고 말 했다 합니다.

4. 본문주제

1) 새 언약 예언 (옘 31:31-33)

성경에서 하나님을 지칭하기를 언약의 하나님이라 하는 이유는,
약속을 끝까지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과의 관계에서도 우리들이 신실하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최고의 것을 주시려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약한 인간은 수없이 언약을 파기, 배교하여 왔기 때문에
결국은 멸망에 이르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모든 것을
다 용서하고 무조건 받아들이시는 사랑으로 은혜의 언약을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 은혜의 언약이 '새 언약' 인 것입니다.

(1) 새 언약은 내적원리로 이루워집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옘31:33)

  옛 언약은 돌판에 새겨져 있으며 율법을 양 미간과 손목에 새기며,
문설주에 기록하고 보았습니다. 율법은 명령을 말하고
백성은 순종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지시받기 싫어하는
백성들의 마음은 율법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이에 따라
행동도, 순종하는듯 하다가는 멀어지고 만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은 은혜로
녹여지고, 녹으면 저절로 순종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아무 조건 없이 먼저 나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의 희생은 글자로 써붙이지 않아도 마음이 압니다.
감사는 스스로 순종하게 만듭니다.
 

 (2) 새 언약은 심령을 성장시킵니다. (옘 31 : 34)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교사로부터 하나님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단지 지식에 그칠 수 밖에 없었음은 내부로 부터의 이해를 위한 성령의
조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하의 영적인 교사는 주님의 영이심으로
그분이 마음에 감동으로 말씀의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부음이 너희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요1서 2:27)

  (3) 새 언약은 모든 죄를 용서하십니다.(옘 31 : 34)

구원은 용서로 시작 되어야 합니다.
판결로는 멸망을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이 은혜의 언약인 것은 예수님을 통한 심판이 나의 값없는
구원으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아래 사는 우리는
율법하에 있었던 삶을 늘 회상하며 감사하고 살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진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옘 33:2-3)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 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못한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옘 33:2-3)

하나님이란 명칭 대신 여호와란 이름만 사용한 이유는ㅡ
하나님의 계획된 일을 진행하실 때 일하시는 여호와로, 그리고 능력을
주실 땐,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각기 다르게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1) 아브라함의 경우- 백세에 이삭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

(2) 모세의 경우-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이르려 하노라'(촐 3:7)

구원과 인도를 진행하시는 하나님은 출애굽때와 마찬가지로 바벨론 포로귀환을
이루실 것이며, 주님의 재림을 통하여 죄로 관영한 이 땅에서 우리를
완전히 인도해 내실 것입니다. 그분은 위대한 여호와시기 때문입니다.  

  3) 메시야의 소망을 전하였습니다. (옘 23:6, 33:14-18)

예레미아는 유다의 포로에 대한 암담한 상황을 에언함과 동시에
회복의 소망을 외쳤습니다. 이는 신앙생활에 있어 믿음과 사랑도 소중하지만,
소망의 중요성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것은 찬란한 미래가 현재의 고난을
잊게 해주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1) 구원의 날이 옵니다.
'그날에 유다가 구원을 얻겠고' (옘 33 : 16)

예수님의 초림으로 우리 모두는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이미 받았습니다.
이제 곧 재림으로 오시는 그날에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구원의 완성이
이루워질 것입니다. 특히 말세인 요즈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재림의 신앙으로 사는 생활일 것입니다. 

(2) 메시야는 우리의 의가 되시며 우리를 의롭게 하십니다.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옘 23:6)
죄가 없으신 의로운 분, 예수님은 우리가 바라보고 소망하는 영원한 의가 되십니다.
그런 의를 우리에게 넙겨 주시고 대신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그것을 이루실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은 바로 여호와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구원사역을 진행하시고 이루시는 주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여호와로 부르는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크고 비밀한
성령의 역사하심이 임할 것입니다.

예레미아는 구약시대에 신약을 바라본 선지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전해준 분입니다.

고난이 깊을 수록 말씀에 대한 확신도 깊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사랑을 깊이 체험하지 못하면 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아가 극심한 박해로 인해 사명을 포기 하고픈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나,
끝까지 독신으로 말씀에 순종하여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다름아닌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사역을 맡은 일꾼들인 우리도,
 여러가지 고난과 고통으로 사역을 포기하고 싶은 충동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장애물로 여기고,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며
예레미아 선지자를 본받아 끝까지 사명을 완수하는 자들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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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사왕 고레스 / Cyrus

(스 1: 1-3)



페르시아는 B.C. 3,000 년경 까지는 셈족계통의 엘람 사람들이 국민의 주종을
이루었던 나라였었는데 B.C. 2,000년경에 남부 러시아의 스텦지역과
인더스강 서쪽에서 이동해온 아리안족에 의하여 지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늘날 이 나라의 명칭은 이란이며, 이 국명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레자 샤 팔레비'(1925)에 의해서였습니다.
'고레스'란 이름은 바사어인 '쿠루스'의 히브리어 음역으로
그 뜻은 '태양처럼 빛나는 자' 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 동부의 소국 '안산'왕국의 킴비세스 1세의 아들로 B.C.559 년에
그의 부친이 죽자 왕위를 이어받아 페르시아 민족의 통합 작업에 착수,  B.C.550 년에
'메대'를 통합하고, B.C.539 년에는 바벨론 제국을 정복함으로서
페르시아 대 제국을 건설한 인물입니다.

이로서 그는 대왕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고, 정복한 나라들마다 그는
피 지배국의 환심을 얻기 위하여 앗수르나 바벨론과는 달리
그들에게 관대한 종교정책을 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바벨론 포로 징계를 내리시기에 앞서
2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포로귀환에 대하여 예언케 하셨는데,
그때 고레스를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케하리라'(사44:28)
하며 그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어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우상을 섬기며 약 490년간을
안식년을 지키지 않았는데 포로기간을 70년(B.C. 605- B.C.537)으로 정하신 것은
70번의 안식년을 지나쳐 갔던 만큼 그 죄에 대한 응보였다고 볼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 기간을 통하여 얻은 것이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우상숭배를 근절했습니다.
둘째: 그들의 종교를 유지하고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회당을 만들었습니다.
셋째: 성경의 권위와 가치를 재삼 깨닫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연단을 끝마치기 위하여 비록 이방인 왕이었지만
오늘의 주인공인 고레스를 택하시고 사용하여 포로귀환 뿐만이 아니라,
성전건축까지도 다 허락하게 하셨습니다. (스 1:2)

그는 끝까지 싸우는 전사로서 일생을 살았으며, 또 한번의 북방 원정 도중 전장에서
숨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보고 영광스런 승리의 죽음이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어쨋든 고레스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소명을 부여받아 그 사명을 신실히 수행한 하나님의 일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고레스의 특징을 살펴보기로 할까요?      

1. 그는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스1:1)

고레스는 하나님께서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예정하여 놓으신
그분의 도구였으나 그가 그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것은 다니엘로 인한 것으로 봅니다.
다니엘은 고페스왕 원년까지 총리로 국사를 맡고 있었으며, 왕과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그 당시에 맺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때 고레스왕은 '다니엘의 하나님'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는데, 특히 자신에 대한 예언을 이시야서를 통하여
직접 깨닫게 되자, 이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자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마음가운데 열망을 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1) 그는 의인으로서의 행동을 하였습니다.

'누가 동방에서 사람을 일으키며 의로 불러서 자기 발앞에 이르게 하였느뇨?

열국으로 그 앞에 굴복케하며 그로 왕들을 치리하게 하되 그들로 그의 칼에
티끌같게 그의 활에 불리는 초개 같게 하매' (사 41:2)
이 말씀을 따라 모든 나라를 정복하고 그 제국들을 통치함에
있어서 공의를 행했던 매우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주었던 것은 매우 의로운 행위로,
그는 그 이후에 우상숭배를 폐지시키기 까지 하였었다고 합니다.

2) 그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행동하였습니다.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사44:28)

나의 목자란 호칭은 오직 다윗과 고레스와 메시야로서의 그리스도 뿐이었는데
이 귀중한 호칭을 고레스왕은 매우 좋아하였으며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훌륭한 목자가 그의 양떼들을 안녕과 안전을 도모하고
유용하게 쓰임받게 하듯이, 훌륭한 왕도 그의 백성들을 행복하고 안전하게 도모하고
모두 유용한 일꾼들로 양육시키는 일에 열심인 사람이 되기를 노력했습니다.
   
3) 그는 하나님의 기름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받은 고레스의 오른 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사45:1)
이방나라의 왕인 고레스가 기름부음 받은 것은 특이한 일로, 관례적인 것으로 보면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자는 이스라엘의 '제사장' '왕''선지자',
그리고 '메시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처럼 관례를 깨고 고레스를
기름받은 자가 되게 하신 것은 특히 '자신의 백성을 바벨론에서 해방 시킬 자'로
'앞으로 오셔서 인류를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구원할 메시야 그리스도로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고레스왕을 신앙으로 준비시키신
다음에 때가 되자 직접 그에게 계시를 하셨던 것입니다.

아마 밤에 꿈이나 환상을 통해 '그는 나를 명하사 유대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다'(스1:2)라고 직접 말씀을 받은 것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직접 받는 것은 그가 참으로 인정받은 자임에 틀림 없습니다.

2. 고레스왕은 하나님께서만이 참 하나님 이심을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스 1:3)
   
이사야 45장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고레스의 손을 잡고 도와주시되 모든 열국을
항복케하고 성문들을 열어젖히고 모든 험한 곳을 평탄케하고 놋문과 쇠 빗장을
꺾고 흑암중에 보화와 은믈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신다' (사 45:1-3)
고레스왕은 예전엔 서방으로 진출한 적이 없었는데 이후로 제일먼저 리디아제국을
무찌르고 바다를 건너 구브로와 애굽까지도 점령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고레스는 그의 길을 지시하시고 그의 발걸음을 함께 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게 되었으며, 모든 일을 성취하게 되자 비로서 자기나라의 신인 '오르 무스'
신이 아니라 '히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자기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한 것은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바사인들이 신인
오르 무스의 신전을 건축하기 보다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함이
참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기 때문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3. 고레스왕은 성전건축을 위하여 직접 도와줌에 참예하였습니다. (스 1:4)

백성들에게는 귀환하는 유대인들에게 선물들을 줌으로서 그들을 도와주라고
명하였으며 고레스왕 자신도 내탕고에서 예전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 보관하고 있는 모든 모든 여호와의 전기명과 금은 보화를 다 돌려보내
주었으며 그 숫자를 2499개로 (9-10절)적고 있으나, 11절에서는
금은 기명의 도합이 5400개로 기록이 된 것은 고레스왕이
추가로 충분히 지원하여 주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막을 짓게 하셨을 때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노획물로 세워지게 하셨고, 이번에는
성전건축을 갈대아인들의 헌물로 세워지게 하심은 때가오면 이방인들도 교회로
다 들어오게 하실 것을 시사해 주는 예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비록 이방인의 왕이었으나 역대왕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이 되었으며 여호와 하나님을 참 신으로 믿고 섬긴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의와 사명을 지닌 일꾼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성도들이 되어
마지막 시대에 고레스와 같이 쓰임 받는 삶을 사는
우리모두가 되기를 다같이 노력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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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을 생명처럼 여긴 요나단
/ Jonathan
(삼상 18: 3-4)




요나단은 사울왕이 낳은 여섯아들 중(부인 아히노암에서-
요나단, 아비나답, 말기수아, 이스보셋과 첩 리스바에서
알모니와 므비보셋을 낳음)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버지를 이어
왕위에 오를 이스라엘의 두번째 왕이 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사울왕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된 가문의
운명속에서도 그는 하나님과의 신앙의 관계를 끝까지 믿음으로 지켰고,
부모와의 인연관계에서 순종으로 생명을 걸고 따랐으며, 친구 다윗과의
우정관계에선 사랑의 언약을 지킴으로 흠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요나단에 대하여 지적한 곳이 한군데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부모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집안의 자녀로서의 믿음을 지키는 처신과
부모가 친구를 원수로 여기고 미워하는 사람을 친구로 우정을 나눈다는 것,
그리고 아들인 자신을 미워하는 아버지를 모신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환경속에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록 그가 30대 초반에 인생을 마감하였을지라도
그의 삶은 오늘날 어려운 상황속에서 고통과 고민에 쌓여 살고있는
현대인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씩씩한 믿음의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자신의 삶을 지혜롭고 담대하게 풀어 나갈수 있었을 까요?


1. 요나단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용기 있는 신앙인 이었습니다.(삼상 14:1)



전쟁의 위기 속에서 무기인 칼을 가진 사람은 오직 사울왕과 왕자인 자기뿐 이었고,
적군인 블레셋 진영은 3대로 나누인 많은 병력을 지닌 반면에, 사울왕은 오직
6백명의 군사만을 거느리고 있었음으로 공격은 엄두도 못내고 다만 어쩔 수없이
진영을 지키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에 요나단은 적진까지 걸어서
자기의 병기를 들은 소년과 단독 싸움을 전개 하였습니다.

1) 지도자는 수동적으로 처신하는 자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사람입니다.


부모인 사울왕과 요나단의 차이는 우유부단함과 결단력을 지닌것에 차이가
크게 나고 있습니다. 우리도 대부분 상황이 불리하거나 위태로우면 섣불리 행동
할 수가 없듯이 사울왕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책임을 맡고 있는 자는 침묵만을 지키고 있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사울왕은 이번에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나중에 골리앗과의
싸움에서는 수모를 견디며 침묵을 또 다시 지키게 됩니다.
이 때에는 요나단이 구원의 빛으로 나타나게 되어 위기를 모면하여 주었으나,
두번 째는 다윗이 등장함으로 패전을 승리로 이끌어 주었던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불의를 보면 거룩한 분노와 용기를 자아내게 만듭니다.
요나단은 바로 이러한 신앙인으로 둘이서 블레셋 진영에 쳐들어가 적군을
물리치는 담대함을 보인 신앙인 이었습니다.

2) 지도자는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목적을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어차피 전쟁은 싸움으로 끝이 나야합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승리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는 인간의 노력과 힘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적인 승인과 도우심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요나단은 첫째,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들이 만일 이같이 말하기를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하면 우리가 올라갈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붙이셨음이니 이것이 우리에게 표징이 되리라.'
(삼상 14:10)

즉시, 이 표징은 블레셋의 올라오라는 행동으로 나타났고, 요나단은 이것이
하나님의 승인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임재와
능력을 베푸시기 원하시나, 나타내시기 전에 반드시 그 사람의 믿음과
용기가 충분한지를 시험하시고 확인하십니다. (예, 여호수아)

결국 용기있는 요나단의 행동은 절망을 기쁨으로 바꾸는 승리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겨주게 되었습니다.

 
2. 요나단은 아카페적 사랑을 친구에게 베푼 우정의 사람이었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왕과 친구 다윗 사이에서의 어려운 삼각관계를
참으로 잘 풀어나간 사람입니다. 공경해야 될 부모로서,
충성해야 할 신하로서, 악신과 미움에 사로잡힌 아버지와
어떻게 신실한 아들로 지낼 수 있으며 (삼하 1:23, 효도와 충성)
 
또한 좋아하는 의로운 친구를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도와주어야
위기를 모면할지를 번민하며 하나님께 수없이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말씀으로 인한 기쁨이 왔을 때 자신의 생명은 아버지께 드리고,
자신의 지위와 신분은 다윗에게 아낌없이 준다는 결심이 서자
담대히 우정을 지켜 나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1) 요나단은 다윗과 영웅적인 기품을 나누기 원했습니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사상과 기품과 용기가 서로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맨손으로 골리앗을 싸워 쓰러뜨린 용기는 요나단이
단신으로 적군 진영으로 쳐들어가기 위하여 바위를 기어넘어가
수 많은 적군을 쓰러 뜨린 용기와 일맥 상통하였고,

다윗이 골리앗에게로 달려 가면서,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한 믿음의 의뢰는 마찬가지로
요나단에게 적군 진영으로 쳐들어가면서
"여호와꼐서 그들을 우리 손에 붙이셨음이니" 한 믿음과 통한
한 마음이었습니다. 이들의 나이가 20대 전 후인 것을 보면
참된 우정은 청소년 시절에 순수한 마음에서 더욱 우러남을 봅니다.

2) 요나단의 우정은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친구에게
넘겨주는 아낌없는 사랑이었습니다. (23:17)


요나단의 우정은 - 진정 친구의 능력을 인정하고 존경하는 우정이었습니다.
자신은 블레셋 진영을 공격하는 용기는 지녔지만, 골리앗 앞에서는
여호와 모독에 의한 울분의 신앙을 갖지를 못하였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어호와를 위한 경외심이 자신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자신이
왕으로서의 갖춘 자격보다도 다윗이 갖춘 자격이 훨씬 뛰어남을 알았습니다.

요나단은  또한 백성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백성이 더 잘되려면
그들이 자신보다 다윗을 더 인정하고 좋아하는 사람임으로 그를 왕으로
세우는 길이 그들을 더욱 유익하게 만드는 일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이 많을수록
마음을 넓어집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중한 것을 백성과
친구를 위하여 다 내어주었습니다. (예, 예수님의 사랑)


3. 요나단은 일생을 영원한 상급에 두고 산 사람이었습니다. (삼상 31:2)


요나단은 블레셋이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인 사울왕이 몹시 두려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신하를 데리고 신접한 여인을 찾아 갔을 때, 따라가지 않았을지라도
돌아온 신하들이 사무엘을 만난 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라" (삼상 28:19)

이러한 분의기를 알고도 그는 효성과 충성을 다하기 위하여
아버지를 따라 전장에 나갔습니다. 자신이 행한 행위에
잘못함이 없어도 죽어야 한다면 하나님께서 이 보상을
하여 주실 것이란 믿음으로 그 길을 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비록 죄가 없는 자라 할지라도 가족들의 운명이나
국가의 운명에 함께 멸망시키실 수 있으십니다.
그리고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과 함께 당하는 희생은
사후의 세계에서 보상하여 주십니다. (계 22:12)

이를 요나단은 믿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었습니다.
요나단은 짧은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보여 준
삶의 깊이는, 위대한 신앙 인물도 따르기 힘든
사랑의 실천의 본을 보여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부모와 친구, 백성을 모두 사랑한
요나단을 본받아 다 같이 사랑의 그리스도인들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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