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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에바다교회



보혜사 (Counselor)
[요 16:7-14]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는 영생체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영의 세계도 물질의 세계도 동시에 다 누리고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때에는 계시적 지식이 필요 없이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세상에 들어오자 진리의 세계는
문이 닫히고 영생도 잃어버리고 혼과 육만이
살 수 있는 죄 된 물질의 세계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인간은 창조 본연의 뜻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사물에 대한 존재의미를 분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에 거짓이 진리를 대신하게 되었고
죄된 욕망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간은 진리를 다시 찾아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회귀하기 위하여 진리를 계시하여 줄 존재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노아를 통하여
새 창조와 새 질서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점진적 진리의 계시를 위하여 구약에서의 약속을 통하여
메시야의 오심을 증거하였으며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는
신약에서의 약속으로 성령님의 오심을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특징은 진리의 영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성육신 예수님의 구속 사역, 그리고 좀 더 구분되어 마지막 진리의
회귀사역으로 인간의 잃어버린 영의 세계를 계시하여 주심에 있습니다.
진리의 회복이 인간 창조존재의 회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1. 성령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세 가지 일을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1)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하여 그들을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요 16:13]


진리의 특징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자
얻은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죄를 더 깊이 알게 되었고,
또 하나는 영생대신 죽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죄는 거짓된 삶을 살도록 만들었고
죽음은 이 세상에서의 두려운 삶과 지옥에서
둘째 사망을 겪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진리이신 예수님을 증거함으로
죄와 사망에서 건짐 받고 영생을 얻는 길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내가 곧 진리요.” 라고
말씀하신 것을 이해 적용 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2) 세상에 대하여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러 오셨습니다. [요 16:8]


죄를 깨우쳐 주는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셨고,
죄를 판정하는 분은 예수님이시며
죄를 회개하고 구원케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죄에 대하여 책망 하실 때에 '자범 죄'가 아니라
주님을 믿지않고 구원을 거부하고 있는' 교만 죄'를 지적 하십니다.

또한 의에 대한 책망은,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것을 깨닫지 못함”에 대한 책망입니다.

세상의 의는 정직, 준법, 선행, 효, 애국심 등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를 벗어난 의가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의일 뿐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의는 예수님을 정죄한 의 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세상적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는 피고요, 빌라도는 재판장이고, 원고는 제사장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재판 결과 주님께서는 사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땐 빌라도와 제사장들은 피고요,
원고는 주님이시며, 재판장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결과, 세상의 심판을 뒤엎고 주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사탄 마귀의 죄가 심판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을 좋아하고
사탄마귀 에 속해 있는 것을 성령님께서는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하여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요 16:14]

주님의 “성령님에 대한 가르침”은 너무 영적인 것이어서
구약과 신약 모두의 하나님 사역이 진행되는 동안
“성령님께서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그것은 사역의 진행상 뒤에서 일하셨기 때문에
영의 세계에서는 세분이 다 같이 함께 행한 것이었으나
표현상으로는 시작의 주 된 부분만 소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천지창조 시 성령님께서는 수면 위에 운행하심으로 생명체들을 잉태시키셨고,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사역 시엔 동정녀 마리아의 잉태, 사역을 함께하심으로
기적을 베푸심, 부활, 등 주님의 사역에 주 된 역할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구원의 완성 단계에서 성령님께서는
하나님과 주님에 대한 속 사정과 “그분들의 사랑과 은혜”에 대하여
더 자세히 우리들에게 알려주시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즉, 태양이 빛을 비추어야 지구의 모든 창조물이
아름답게 드러나듯이 우리의 영혼 속에 성령님의 조명이
비취어져야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아름다운 계획과 준비하신 모습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또한 주님과 주님의 말씀에 대한 지혜를 성령님이 주셔야
우리는 성육신의 의미와 십자가의 죽음 및 부활하심의
성자 하나님의 참된 은혜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가까이 할수록 특별한 지식을 더 많이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짐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를 위하여 성령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 편에서 성령님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을까요?


2. 성령님께서는 모든 구원 사역에 앞서
우리에게 보혜사의 역할을 하러 오셨습니다. [요 16:7]



아기가 태어났다고 해서 그의 인생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성인이 되어 올바른 삶을 살 줄 알아야 인생을 완성 할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주님 안에서 거듭 태어났다고 해서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따라 살 줄 알아야
올바른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앙이 완성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이렇기 위해서는 아기에게 어머니가 필요하듯이 우리에게도
어머니와 같으신 보혜사 성령님의 보살펴 주심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보혜사로 불리어지는 성령님의 호칭을 바르게 이해함으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역할도 온전히 받을 수 있습니다.


1) 보혜사란 “어떤 사람 곁으로 오도록 부름 받은 자” 란 뜻입니다.


이 단어 “파라클레토스” 는 어원적으로
“파라"(곁에) 와 “클레토스” (부르다) 단어가 결합된 말입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오도록 청함을 받았느냐?”
하는 것이 우리에겐 궁금한 부분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부르실 때 '또 다른 보혜사'
(요 14:16) 라고 부르신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헬라어에는 “다른” 이란 단어가 두 가지인데
[1] 알로스: 첫 번째 경우와 똑 같으나 다른 하나”라는 의미이며
[2] 헤테로스: 전혀 처음 것과 다른 어떤것” 이란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성령님을
자신과 같은 "알로스" 즉,다른 분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님께서는 예수님과 똑같은 분이십니다.
똑 같은 일을 하시지만 효능과 방법에서 다르게 하실 뿐입니다.

즉, 주님께서는 육신으로 제한 된 지역에서만 사역을 하신데 비해
성령님께서는 영으로 활동에 제한을 받지 않고
전 세계적으로 확대 사역을 하신다는 것과

주님께서는 일일이 사람들을 만나 말씀을 들려주심으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들려주신 데 비해
성령님께서는 동시에 어느 지역 어떤 사람들을 막론하고
계시와 꿈, 음성, 기적과 이사, 은사를 나누어 주심으로
더욱 천국과 영의 세계를 깊이 계시하여 주신다는 데에 있습니다.

결국 범위는 확대되었지만 우리를 향한 본질은
예수님과 같은 역할을 하시는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대신 성령님을
보내 주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2) 보혜사 성령님의 적극적인 사역은 우리 곁에서
격려하고 권고하여 주시는 역할을
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곁에서 능동적인 역활과 수동적인 역활을 하시는데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언제나 사단 마귀의 공격과 방해를 받아
성도들이 신앙생할을 하기에 낙심과 위협을 겪게 됩니다.

이  반대 세력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이겨나갈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주님께서 떠나신 후 사도들에게는 의지할 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회에 잡혀갔고더 이상
사역을 하지 못하도록 위협과 채찍을 맞고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한 자리에 모여 기도하였고, 이때 모인 곳이 진동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담대히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행 4:31)

성령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은 사도들은 주님을 모시듯 성령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살았기 때문에 더 이상 낙심이나
주저하지 않고 담대히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결과로 각 지역의 교회에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행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성령의 위로란, 성령님께서 격려해 주시고 든든히 서도록 시켜주셨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들 사역의 원동력이 되어주십니다.
이 힘이 우리로 하여금 사역의 고난과 위기, 영적 싸움을 모두 이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사도들을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게 하신 그분의 도우심인 것입니다.


3) 보혜사 성령님의 소극적인 사역은 친구와 같이 항상 동행하며 함께 도와주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제부터는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말씀하셨습니다. (요 15:15)
친구이기 때문에 나의 비밀모두를 너희에게 다 들려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참 좋은 친구를 만나 서로 사귀고
도와가며 지내는 것처럼 기쁜 일이 없습니다.
더욱이 주님을 친구로 삼았던 사도들은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그런데 사도들이 영으로 거듭 태어나자
육신의 친구대신 영의 친구가 생긴 것입니다.
육신의 친구는 만나야지만 함께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의 친구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같은 기쁨은 영으로 나에게 오신 성령님께서 만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시며, 함께 주님의 일을 하시고 도와주시며,
하나님께 우리를 위해 대언하시고 변호해 주시며,
우리를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연단 훈련시키셔서 성장, 성숙하게 자라나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신부가 되도록 자라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님의 성화의 길에서 열매를 맺게 해주심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3. 우리는 우리에게 오신 보혜사 성령님을 어떻게 모셔드릴 수가 있을까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려면 우리의 몸을
성령의 전이 되도록 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이유를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한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육체의 소욕은 =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술수, 원수,
분쟁, 시기, 분냄, 당 지음, 분리,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 등이라 하였습니다. (갈 5:19-20)

이 같은 소욕을 없애기 위하여는 성경에 기록된바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속이 성령의 전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속에 자신의 정과 욕심을 못박은
십자가를 지니고 있을 때에 가능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성령님 오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행 1: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나의 노력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준비로 받는 것이고
나의 욕망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으로 받는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노력으로 받게 되면 소유 개념이 생겨 남용하게 되고,
욕심으로 받게 되면 과시하여 교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나를 쓰시도록
선택하실 때까지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오시면 우리로 오심을 알게 하십니다.


1) 성령님께서 바람과 같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바람과 같이 성령님이 오실 때 숨으로 마음껏 들이마셔
내 속에 가득 채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을 바람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요 3:8]

헬라어로 성령을 “프뉴마”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뜻은 "호흡"내지는 "바람"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임하셨을 때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행 2:2) 하였고
예수님께서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성령을 받으라 말씀하실 때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요 20:22) 하셨습니다.

즉, 주님의 숨을 불어내신 미풍은 성령 강림절 날 임하실 강한 바람의
성령님의 임재 하심의 보증으로 제자들에게 불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바람 미풍을 체험하였다면
강한 성령충만의 바람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풍이 불어올 때마다 마음껏 들이마셔야 됩니다.
나의 영혼육이 성령의 호흡으로 가득 찰 수 있도록
제자들과 같이 들숨을 채워야 합니다.


2) 성령님께서 강물같이 오실 때 마음껏 들이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마실 물을 달라 청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요 5: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라.” 하셨습니다.
이는 성령을 주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우리는 말씀으로 은혜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한 없는 회개와 눈물이 쏟아집니다.
성령님께서는 말씀의 위로로 마음껏 평안으로 채워주십니다.

말씀이 강물같이 선포됩니다.
진리의 깨달음이 넘치고 말씀에 대한 체험과 확신이 생깁니다.
이때 성령님의 조명을 더욱 받기 위해서 말씀을 많이 먹어야 합니다.
먹은 말씀만큼 성령님의 역사가 따르게 됩니다.


3) 성령님께서 불 같이 오실때 기도로 계속 받아야 합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오신 성령님께서는 불 같이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행 2: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에게 임하여 있더니”

성령님의 임재 하심에 바람으로 오심은 “동행과 인도하심”
생수로 오심은 “은혜와 평안함”을
그리고 불같이 오심은 “능력을 통해 사역을 감당 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불이 아니더라도, 바람도 태풍으로,
생수도 홍수로 오실 때는 그 위력도 상당히 큽니다.
그렇지만 불의 위력은 무엇보다도 제일 강합니다.

그리고 영적 전투에서 꼭 필요한것은 불 세례입니다.
이를 위해 금식기도로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늘에서 번개가 칠 때 피뢰침이 번갯불을 흡수할 수
있는 것은 '전류를 흡수할 수 있는 피뢰침'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성령의 불을 받기 위해서는 기도 침이 있어야 됩니다.
“기도 침”이란 한마디로 기도의 영을 말합니다.
나의 혼적인 생각이 아닌 영적인 욕구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영으로 기도를 많이 한다 하였고 
그리고 그 기도를 방언기도라 하였습니다.(고전 14:14-18)
기도는 성령을 불 같이 끌어들이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에게 임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나와 함께
가시적으로 계시는 것 같이 성령님을 대우해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14: 16-17] '성령의 오심'을 “우리의 같이” (메타, v16)
“우리와 함께” (파라, v17) “우리 안에” (엔 v17)
그 분의 위치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성령님과의 관계를 매일 교제를 함으로,
매일 동행함으로, 매일 의지함으로 우리로 어떻게
성령님을 모셔야 됨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는 성령강림절을 맞이하여
성령님을 바르게 모시는 성도들이 다 같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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