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뉴질랜드 에바다교회


New Zealand / West Side                            Moru




약속의 자녀 / 성령을 따라 난 자!

[갈 4:21-31]





/ By Priscilla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두 자녀는

 단지 육신의 자녀인 계집 종의 자녀와 

하나님이 선택하신 여인인 사라에게서 난 

약속의 자녀가 있지만,




결국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이제 

하나님의 선택되어진 여인에게서 

난 별같이 많은 자손들 중에 속한 

약속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21절을 통해 

율법 아래 묶여 있는 자들에게 호소합니다. 




아브라함의 자녀 중에도 종에게서 난 자와 

자유 한 자에게서 난 자녀가 있듯이 




이들은 언약에 따라 인간의 생각으로 

앞서 자녀를 임의로 취한 계집 종 에게서는 

육체의 자녀를, 자유하는 여인 에게서는 



약속을 성취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녀를 생산토록 역사 하셨음을 일목 요연하게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이 것은 비록 더딜 지라도 끝까지 

순종하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 가운데 

이루워진 약속의 자녀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 수 있고 그런 자야만 하나님의 

기업을 누릴 수 있는 정통 후사가 될 수 있는 것임을 

알리시는 뜻과 섭리이기도 합니다. 




결국 몽학 선생인 율법을 구원의 방법으로 여기고 

선택한 이들은 자신의 믿음에 따라 

법 아래 묶여 버리게 됨으로 스스로 율법 아래 

매인 종속적인 노예의 신분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고, 때문에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마치 부화하지 못한 애 벌레의 

상태처럼 환경과 자신이 만든 율법에 갇혀져 

자유하지 못한 자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종으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고로 우리 자신이 구원의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마음으로 영접하고 받아 들이지 않고




 게다가 예수님을 좇아 사는 삶을 부인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육체의 소욕을 따라 낳은 자요 하나님의 약속의 

후사가 아니요 그 기업을 기대 할 수 없는 

종의 자녀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허지만 실제는 반대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육체의 자녀가 더 강성하여 

성령을 따라 난자 곧 하나님의 기업을 

무를 자인 약속의 자녀를 능욕하고 

핍박하는 일이 오히려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이와같이 그 자녀인 우리에게 

허용하는 것은 나름대로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 모든 일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은 환난과 

어려움 가운데서 기업을 무를 후사로서의 자격을 

반드시 취득 할 수 있도록 고난과 연단을 통해

 달굼질을 하시되ㅡ 




주님을 의지하며 성령님과 동행함으로 

능히 어려움을 극복하고 견뎌나가며 

통과하기를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심을 

반드시 깨닫고 믿어야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현재 약속의 자녀로서 

고난 중에 처해 있습니까? 




실망과 좌절 속에서 때론 신분을 망각하며 

실망에 휩싸여 혼돈과 혼란가운데 

다만 오열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형제여 오늘 지금 이 시간부터 

사도 바울의 권면처럼 용기를 내십시요!




또한 우리는 육체로 난자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 하십시요!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 (v. 31)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믿음으로 나갈 때 성령님의 법ㅡ

심령으로 어두움에 묶이지 않는 

빛의 신분으로서 자유함의 자녀인 것을 

먼저 기억 하십시다. 




 2) 약속의 자녀답게 순결하고 

거룩한 자녀의 의의 옷을 입고 

밝고 맑고 환하게 살아가며 예수님을 

본받아 따르고 기꺼이 하나님의 후사로서 

체통을 가지고 주변 사람들을 섬기십시다. 




3) 세상과 분리해서 살아야하는 것을 

달게 여기고 하나님을 섬기며 나갈 때에 

당하고 겪는 여러가지 핍박과 시험과 곤난을 오히려 

심령을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유익으로 

여기며 기꺼이 감수하고 사십시다. 




기도




주여! 감사합니다. 핍박을 기쁨으로 여기고 

십자가의 도가 안 믿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 같아도 

주님 주시는 그 기쁨과 구원으로 더불어 만족하게 

사는 제가 되게 하소서! 




더 나아가 주님의 자녀로서 손색이 없는 

기쁨의 자녀요, 하나님나라의 기업을 

이을 믿음의 후사가 되게 하소서!






2010/10/11



/ By Priscilla








New Zealand / West Side                            Moru






그리스도를 본 받아 사는 삶

/해산의 수고를 마다 않은 바울 

[갈 4:12-20]





/ By Priscilla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우리 마음 속에 예수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체워지길 원하십니다. 




그리스도 인의 삶은 날마다 재 훈련을 통하여 

성취 할 수 있는 값비 싼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이 

병중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기쁨으로 그를 맞아 드리고 

환대를 하고 천사를 대접하듯이 맞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마음이 식어지자 

이전에 지냈던 관계성이 깨어져 버렸으며 바울이 

참된 복음의 말씀을 전파하므로 원수 지간처럼

좋지 않은 관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 났을까요?




믿는 자와의 관계에서도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이기에 

종종 그런 반문을 해 붑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도

 내게 그 것을 물어 보십니다. 




"변하지 말라고,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고..."




같은 성도간 에서도 좋은 교제가 

되지 못 하도록 열심을 내며 그가 가르치는 복음에서 

떼어 놓으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디에고 열심 당원들이 있어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데 해를 끼치는 경우도 있지만 

사람들의 행위를 보지 아니하고 이제 

'해산의 수고'까지 마다 않으려는 바울의 심정에서 

탕자를 둔 아버지의 애끓는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거듭 외칩니다. 

"좋은 일에 열심을 내라"고...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수고를 아끼지 않겠다"고... 





그러면 우리는 어찌 해야 할까요?





1) 바울의 자세를 본 받아야 합니다. 

그분이 예수님을 본 받아 닮아 가려 했기에ㅡ




2) 나 자신의 열심이 늘 이기적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3) 관계 개선에 힘쓸 때,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기도



주여! 저희는 늘 부족합니다.

해산의 수고를 마다 않았던 

 바울같은 넓은 마음을 주시옵소서!







2010/10/04



/ By Priscilla








New Zealand / West Side                            Moru

                                           
 

율법의 참 뜻 / 하나님의 자녀

[갈 3:19-29]




/ By Priscilla





율법은 우리의 죄를 드러내보여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합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참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부담스럽게 여기고 어려워하는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몽학 선생입니다.  




때문에 성경은 모든 인간에 대한 구속과 

죄에 대한 사실을 알리기 위한 방책으로 

쓰여졌고, 하나님의 계시가 있기 전까지 

인간에게 허락하신 것이 율법입니다. 



이같이 율법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기위해 안내하는 기준, 



즉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안내하며 

믿을 수 있는 믿음의 생성될 때까지 

도움을 주는 척도가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는 한 사람도 

구원을 행위로 받을 수 없습니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로 시인하고 믿는 

믿음의 자녀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까지 

주셨음을 우리는 이 시간 깨달아야합니다.




율법은 믿음이 자녀에게 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죄의 실체를 깨닫게 하여 주는 이정표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이 하는 일은 우리의 죄가 

얼마나 깊은 가에 대하여 말해줍니다. 




믿음의 결과는 어떻습니까?




1)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가 주어졌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이미 그분을 구세주로 영접한 

우리에게도 '의의 옷'이 옷 입혀 졌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함을 얻었습니다. (26절)

남녀 노소 빈부 차가 없이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국적에 상관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모든 면에 기업을 이어 받을 수 있는 

상속인이 된 것으로 기뻐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1)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으로 기뻐하며 율법을 

무조건 거부하거나 정죄하지 말아야합니다. . 


(2)  나자신을 자랑하지 말아야합니다. 




기도 




주여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한 실체를 

우리로 하여금 몽학선생인 율법을 통하여 

알게 해 주시고 또한 그 죄에서 해방 시켜 주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인생에게 보내 주셨음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10/09/27



/ By Priscilla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리스도인의 정의

(갈 2:20)



사람들은 사물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살아있다고합니다. 즉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삶에는 한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즉 생명이 육신에 필요하듯이,  영생은 영혼에 필요합니다.
이 두가지가 합한 삶을 살아있는 삶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계3:1)

그러므로 첫째로, 살아있으나 죽은 것같이 사는 삶이 있고,
(예) 죄수, 병자, 독재하의 주민들은 몸은 살았으나 영혼이 묶여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죽은 삶입니다. (약 2:26=" 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두번째는 살았으나 죽어가는 줄을 모르고 사는 삶이 있고,
(예) 세상사람들은 영은 죽고 혼과 육만 살아있는 상태임으로 죄의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음)
(딤전 5:6)="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마지막으로 산자가 마치 영원히 죽지 않을 것같이 사는 삶이 있습니다.
   (예) 그리스도인들은 영, 혼, 육이 다 살아있는 상태입니다.
(요 11:25)="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사람이 죽음을 생각하고 사는 삶과 나는 결코 죽지않고 영원히 산다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삶과는 삶의 본질이 크게 다릅니다. (시각, 시야, 가치관...등)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와 같은 삶을 보여주셨고,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은
바로 주님을 본받고 사는 사람들이여야함을 성경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같은 삶을 직접 체험한 사도바울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본문에서 정의를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이란 죽음의 체험을 한 사람이어야합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나니..."
사람은 살면서 여러가지 체험을 많이 하고삽니다. 고난을 많이 받으면
하나님의 율례를 깨닫게되고(다윗) 인내를 오래하면 온유한 성품을 배양할 수 있고(모세),
자녀를 양육하고 희생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아브라함)

이 모두가 다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 위하여는 꼭 필요한 경험이지만, 정작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기 위해서는 죽는 체험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왜냐하면 삶의 가장
큰 변화인 죄로부터의 해방은 죽음의 체험을 통하여야만 생기기 때문입니다.   

1) 그리스도인은 죄의 문제를 처리한 사람들입니다.

율법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였던 구약의 사람들은 죄의 전가의 개념이 전부였습니다.
즉 지은 죄를 제물로 옮겨 보내면서 다시 씼음받고 산다는 속죄관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는 오직 제물만 드리면 된다는 의식적신앙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이 것은 자신은 영원한 죄인이라는 인식하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때문에 백성으로서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전가된 죄를 위하여 제물이 되신 것이 아니라, 죄덩어리인 우리 자체를
자기의 죽음 안에서 함께 죽게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전1:30)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거듭난 우리는 삶의 새 출발이
예수님안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혈통과 족보를 지닌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그안에서 함께 죽은 것입니다.
 
마치 내가 죄를 짓지 않은 상태에서도 나의 죄돤 생명이 아담안에 있음으로 죄인으로
전수되어내려온 것같이,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안에서 아담의 죄된 생명이 끊어지고
죄에서 벗어난 새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나에게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은 매일 자신이 죽고 새로 태어남을 인식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유대인들은 하루에도 세번이상 성전에 나가 기도하였습니다.
 즉 매일 예배드린 것을 의미합니다. 그 때마다 자신은 죽었고 새로 탄생된
하나님의 자녀임을 아뢰고 감사를 드리라고 사도바울은 말씀하십니다.
즉 죽음의 인식이 없이는 새 생명의 체험이 생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 마르틴 루터가 스칼라 상타 성당앞에 예수님이 밝고 올라가셨던 빌라도
법정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며 죄사함의 기쁨을 얻으려 애를 썼지만
아무런 감동이 오질 않았습니다. 그 때에 루터의 귀에 번개처럼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는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크게 깨우치기를 죄사함은 살아있는 육신을 고생시킴으로 죄가
씼겨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죄된몸은 죽었다는 믿음으로 죄가 처리되었음을 인식하고
살 때에 그 믿음이 나를 의롭게 하여 의인으로 살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 그가 부르짓기를 (1) Sola Fide(오직 믿음으로)
(2)Daily Baptism(매일 세례)
를 외치고 살았으며 그의 이와같은 매일 죽음의 인식과
의인으로서의 믿음의 삶은 드디어 종교개혁을 완성시키게 만든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을 나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갈 2:20)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사도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삶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었고, 삶의 방법이 율법준수였습니다. 결국 그 삶은 하나님을
 믿는 삶이었지만 예수님을 핍박하며 구원의 길을 부인한 삶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주님을 핍박하고 구원의 길을 무시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즉 사도바울과 같이 자기자신이 주인이 되어 세상 쫓아 살면서
자기 의를 나타내고 사는 삶이 바로 구원의 길을 부인하는 삶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주신 생명을 지니고 산다는 것은, 예수님을 자신의 삶의 주인이심을
모시고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때 주님은, 우리의 연약한 육신과 죄된 마음으로부터 벗어나
영의 자녀로서 주님의 삶을 본받도록 우리를 인도하신 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주인의 바뀜없이 삶의 바뀜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체험을 한 사도바울은 성경에 말씀합니다.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전 1:30)
죄된 자아의 주인은 우리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한 삶을
살게 만들지만 (그리스도인 일지라도) 예수님으로 우리의 삶의 주인을
삼고나면 다음과 같은 삶으로 변화시켜주십니다.  

1) 우리로 지혜로운 삶을 살게 만듭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근본으로 삼고 살도록 해줍니다. (잠9:10)
삶의 목적을 바로 알고 살게 만들어줍니다.

2) 우리로 의로운 삶을 살게하십니다.

의로움이란 죄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죄가 없는 상태에서
 살게 해주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 죄를 짓고 싶은 마음과
죄책감에 시달림은 나의 죄된 자아가 주인으로 있음으로 오는 자연 현상입니다.
죄 가 없으신 분이 다스리는 곳엔 죄도 있을 수 없습니다.  

3) 거룩한 삶을 살게 하여 주십니다;

거룩함이란 성결을 의미합니다. 죄의 짝은 마귀입니다.
죄된 자아는 마귀를 좋아합니다. 타락된 세상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신부가 된 성도는 신랑되신 예수님을 좋아합니다.
이는 성결한 신부로서의 삶을 살게 만들어줍니다.

4) 구속받은 삶을 살게 만들어줍니다.

이는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즉 종에게는 노동, 짐, 부자유, 복종, 정죄가 주어져 있는 반면,
자녀에게는 자유, 부요, 기업, 축복, 사랑이 주어지게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진정한 기쁨과 행복한 삶을 살게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불행한 삶을 사는 것은 내 안에 불행한 내가 나를 다스리고 있기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행복한 삶을 사는 것도 내안에 행복한 주님을 모시고 살면됩니다.
사도바울의 자족한 삶의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음을 봅니다.


3. 그리스도인이란 믿음으로 사는 사람임을 의미합니다.

"내가 이제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사랑이 있어야 함께 살기를 원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살지 못하는 이유는
그분을 진정 사랑하고 있지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읋 따라 살지
못하는 이유는 그분의 말씀이 영생의 말씀임을 믿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성은 과학과 상식을 선호합니다. 그러므로 혼은 영의 세계를 알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다시 말해 영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영으로 산 다는 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본성이나, 이성의 지식으로는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유도
섭리도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알 수 있는 길은 영생을 이해할 때,
비로서 주님이 나의 영생의 길을 위하여 죽으셔야만 했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신데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오직 나의 죄를 위하여 바쳐진 제물의 의미밖에는 없습니다. (구약신앙처럼)

주님은 나와 같이 천국에서 영원히 사랑하는 신랑과 신부로 살기 위하여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가장 값비싼 댓가를 치루는 것으로 증명이 됩니다. 나를 위하여 어느 누구도
죽을 사람은 없습니다. 부모, 형제, 자녀, 친구 누구도 마음은 있어도 행동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죽음후에 이어져야할 내세의 아무런 보장 없이 끝나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부활하셔서 내세에 나와함께 할 삶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간직하고 사는 삶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삷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의 빛을 갚고 신부가 되는 기회는 오직 이 땅에서의 남은 삶의 기간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신부임을 깨닫고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임을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나의 남은 삶을 신부의 자격을 얻는 기간으로 여기고 다같이 성화의 삶을 함께 열심히사십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성령의 열매 희락
(갈 5:22)


기쁨이란 무엇인가?
질문은 쉽지만 표현하기에는 난해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쁨이란 포괄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밀러'란 사람이 말하기를 '기쁨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들에 대해 우리가 좋은 쪽에 반응하는 것이다' 라고 했고
'스윈돌''기쁨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다. 즉, 바람은 항상 동일하게
불지만 그 바람을 타고 한 척의 배는 동쪽을 항해 가고 다른 배 한척은
서쪽을 향해 간다. 우리에게 갈 길을 정해주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방향을 선택한 돛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데이비슨''기쁨은 은사인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여러가지 은사들과 마찬가지로 극히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평안함을 느낄 수 있는 은사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분들의 말씀이 다 맞는 말들입니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구분해 본다면

1. 기쁨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음을 성경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자연적인 기쁨입니다.

세속적인 기쁨을 말하며 '유푸라이 네스타이'라 부릅니다.
즉, 내가 원하는 것을 소유할 때 생기는 기쁨으로 만족이라 표현합니다.
(장막, 자동차, 물질, 결혼, 성공 등), 또 내가 추구하는 것을 달성했을 때의
기쁨은 환희라 표현하며 (우승, 인기, 복권당첨, 발명, 발견 등)
또는 쇼나 코메디 등에 참석하거나 시청함으로 오는 기쁨은
유흥이라 표현하며 희극물, 오락물, 묘기연출, 파티 등이 있으며
이 기쁨들을 묶어서 상황적 기쁨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눅 12:16-19)

2) 보람적 기쁨입니다.

선한 일을 행함으로서 느껴지는 기쁨으로 보람 또는 흐뭇함이라
부릅니다. 예를 들어 구제, 간병, 장학금, 헌혈, 베품, 나눔 등으로
마음이 편안함을 의미합니다. (눅 10:34-35)

3) 영적 기쁨이 있습니다.

이 기쁨을 성령의 열매인 '카라' 라고 부르며 기쁨의 대상인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상황과 여건에 관계없이
영생에 관계된 기쁨입니다. (하박국 3:17-18)

자연적 기쁨이나 보람적 기쁨은 마음과 육신에 즐거움을 줍니다.
그러나 영혼에 기쁨을 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이 세상의 것을 다 소유하고
누리고 살았어도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고백한 것은
영적인 기쁨이 없음으로 영혼이 공허해졌기 때문입니다.

2. 희락은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롬 14:17)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자 그 분의 자녀들입니다.
이 세상과는 다른 상황 속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즉,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 분 안에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1) 영생을 얻는 기쁨으로 살게 하십니다.

이 세상에 고난과 슬픔이 많은 이유는 저주 때문이며
질병과 죽음의 두려움이 있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또한 죽은 후에도 인간들을 기다리고 있는 곳은 지옥입니다.
지옥의 고통은 이 세상의 어떤 고통보다 훨씬 더 괴로운 것입니다.

유황불 타는 못에 떨어져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죄사함이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새롭게 탄생되어 사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어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게 하시고,
구원을 얻어 하나님 나라에서 살도록 영생을 얻게 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을 어머니 뱃속에 있는 10개월이란 기간 동안
태아로서의 삶에 비교한다면 천국은 태어난 자녀가
평생 사는 것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사는 기쁨을 주십니다.

우리가 자녀로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가문, 성명, 체질도 부모에
속한 것을 이어 받고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세상에서 성공한 부모일
경우에는 자녀 또한 성공의 분위기를 누리며 살게 되고, 만일 부모가
실패한 경우에는 자녀 또한 실패의 상황 속에 갇혀 살게 될 것입니다.

이 같은 현상은 영적인 탄생에도 똑같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탄생되면 천국의 분위기를 누리며 살게 되고
마귀의 자녀로 있게 되면 저주 아래 속하여 살게 됩니다.

모든 성공 중에서도 가장 큰 성공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 것은 물론이려니와 천국까지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능력있는 삶을 살도록 은사를 내려주십니다.

권세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주어지고, 권위는 예수님의 일을
순종함으로 주어지지만 권능은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주어집니다.
권세와 권위도 중요하지만 권능이 소중한 것은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열한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권세와 권위를 다 지닌 사람들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권능이 없었음으로 현실에서 위기를 겪을 때 권세와
권위를 다 팽개치고 도망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는 그들에게는
세상의 세력을 감당할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승천하실 때 당부하시기를
'위로부터 능력을 덧입을 때까지 기도하라'고 하셨고
오순절 날 권능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체력, 지력, 재력, 권력을 의지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영력을 의지하고 살고 있습니다.
영력이 지상 어떤 세력보다 우위인 것은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이
다니엘 앞에 두 번이나 엎드려 절한 것으로 증명이 된 것입니다.
영적 싸움을 승리할 수 있는 삶이 진정으로 능력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3. 희락은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흡수하여 줍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마음과 생각은 내가 주관한다고 다스려지지 않습니다. 예를들어
내일 죽을 사형수가 오늘 마음을 아무리 평안하게 가지려해도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일 수 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일 죽으실 것을 아시면서도 평안을 가지셨고
오히려 제자들에게 위로하여 주십니다. 그 이유는 이생과 내세의 일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지나야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본래의 영광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에 현재
당하실 고통을 참으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즉, 고통이 기쁨의 통로이고, 고난이 상급의 기회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도 그 많은 어려움을 견디면서 말하기를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2)

하며 기쁨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인간의 심령은 우주와 같습니다.
우주에는 대기권, 대류권, 무중력권이 있습니다. 대기권 아래 있을 땐
 - 비, 바람, 천둥, 번개, 중력 등이 강하게 작용합니다.

그러나 대류권 층으로 올라가면 비 천둥 등을 벗어난
구름 바다 위에서 잔잔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우주 속으로 더 울라가면 - 그 곳은 무중력 상태이자 더 이상
지구의 영향을 받지 않고 고요함 속에 머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속에도 심령의 성충권이 있습니다.

감정이 지배하는 층에는 - 희, 노, 애, 락의
대기권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성이 지배하는 층에는 - 냉철한 기류가 흐르듯이
지식, 이성, 경험등이 마음을 지배하게 되고
믿음이 지배하는 층으로 올라가면 - 성령의
분위기 안에 평안의 성층권 속에 임하게 됩니다.

올라가는 것은 세상의 영향을 벗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올라가지 않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육신과 이성은 올라가서는 못삽니다. 믿음만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믿음이 머무는 곳이 곧 평안과 기쁨이 있는 곳입니다.
즉, 성령님 안에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테레사 수녀가
한 말을 희락의 삶의 예로 소개합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을 잊어버릴 정도로
당신을 슬픔과 고통에 빠지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요'
다 같이 성령님이 주신 희락을 누리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십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절제
(갈 5:23)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랑으로 시작하지만 끝은 절제로
완성하도록 성경에서는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성령의 열매 8가지를 모두 아름답고 견실하게
맺게 해 주는 역할이 '절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일지라도 절제를
완성하지 못하므로 불행을 겪은 예를 얼마든지 볼수 있습니다.
(예: 아브라함/이스마엘, 다윗/밧세바,
모세/반석 사건으로 가나안에 못들어감)

이분들은 모두 성령의 열매의 성품을 지닌 분들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모두 지닌 남보다 훨씬 훌륭한 믿음의 의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절제에서는 열매를 맺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삶의 영역에서 만은 불행을 겪은 분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절제란 무엇이며 왜 열매 맺기가 어려운지를 알아보겠습니다.

헬라어로 '엥크라테이아'로 불리우는 절제의 의미는
'자기조절 능력'을 말합니다.
즉 자신의 욕구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 잘 다스릴 때,
내속에 심기어져있는 모든 기능들이 조화를 이루워
아름답게 삶에 나타나게 됨으로 완성된 인품의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인간에게 본능을 주실 때 절제도 함께 명하셨습니다.

인간이 절제에 실패하는 이유는 죄의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16-17)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본능에는
절제를 주심으로 인격으로 본능을 다스릴 때, 행복과 기쁨을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은 절제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격이 욕망의 지배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부터 인간에게는 자기를 다스릴수 있는 힘이
없어지게 되었고 불행과 비극은 계속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예: 가인이 동생인 아벨을 죽임)

 1) 첫 아담에 실패한 절제는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에 의하여 회복되어졌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절제를 무너뜨린 마귀는 예수님에게도
접근하여 유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식욕, 명예욕, 소유욕,
모두를 채워줄 것을 유혹하였으나 예수님은 믿음을 가지고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절제의 실패와 성공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죄우가 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유혹을 물리치고 절제를 지킬 때에 마귀는 물러가게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임하시게 됨을 성경에서 알려줍니다.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동안 떠나니라.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눅4:13-14)

2) 인간의 절제의 능력은 예수님 안에
있음으로 회복되어질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욕망을 꺾기 위하여
입산 수도, 금식, 고행 등,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영혼육은 갈등만 일으키고, 인간은
의지와 욕망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리는 이중구조의 삶에
괴로움을 지닌채, 살아갈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바울'입니다.
몹시 괴로워하던 바울은 어느날 성령남으로부터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즉 '절제에 실패한 아담의 속성에 속해 있는 한 결코 욕망을
절제할 수 없고 절제에 승리하신 예수님 안에 속해 있을 때,
비로서 나는 승리할 수 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었음이라.' (롬 8:2)

그래서 성경에서는 본능을 선천적 선물이요, 절제는
후천적 선물이며 본능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보편적인데 반해
절제는 거듭난 자에게 주어지는 개별적인 은혜가 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2. 예수님 안에서의 절제는 3가지 영역에서 적용합니다.

오늘날 이 세대를 가리켜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시대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통제를 잃어버린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며 더욱 나아가서는 영혼육을
파멸로 이끄는 힘에 빠져 사는 것을 말합니다.

1) 절제의 첫번째 영역은 육신적 욕망의 부분입니다.

  육신의 본능에는 식욕, 성욕, 수면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능의 분수는 먹는 것은 채소와 열매로,
부부생활은 아담과 하와 배우자 만으로, 잠은
밤에 쉬는 것으로 허락하셨습니다.
이 것이 영생의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죄성을 이어받은 아담의 후손들은 타락하기 시작하여 욕망대로
살게 되었는데 그것을 성경에서는 '인간의 패괴함, 강포함이라'(창7:11)
하였고, 노아의 홍수 사건으로 인간이 멸망하게 된 것 입니다.

'패괴함'이란 '타락하다'란 뜻으로 '거역, 불순종, 방종'을 말합니다.
'강포함'이란 '해치다'란 뜻으로 '살인, 약탈, 강간, '등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모두 행위로 저지르는 죄임으로, 육신의 욕망을
다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란 그리스도께 소속된 사람들이며
그 소속감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죽은 육신의 상태를
나에게도 적용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고 회개했습니까?
그러면 육신은 죽은 것입니다.
육신의 절제는 이렇게 이루워질 수 있습니다.

2) 두번 째 영역은 정신적 욕구의 분야입니다.   

육신적 욕구에 이어 절제가 필요한 곳은 마음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 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잠 25:28)

성벽이 없으면 주인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즉 아담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주인으로 계셨을 때는
'사랑, 평안 , 기쁨, 밝음, 선'등의 하나님의
속성이 가득 찼었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하나님이 떠나시자 죄성이 가득 들어차게 된 것입니다.
 ㅡ시기, 질투, 미움, 분노, 정죄, 교만, 탐심, 음란,
두려움, 염려, 불안, 등 그런데 나에게 새 생명을 주신
주님이 내안에 주인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마음을 주장하시게 되었습니다.
자연히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셨습니까? 그러면 성령님이 나를
다스려 내 마음을 절제하여 주실 것입니다.

3) 세번 째 영역은 영적욕구의 분야입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양심만이 유일한 영적 대행 부분이었으나,
거듭난 영에게는 성령님에 의한 역사하심이 임하게 됩니다.
주로 은사 부분으로 지혜, 지식, 믿음, 신유, 능력, 예언, 영분별,  
방언, 통역, 등, 특히 오늘날에는 성령님의 역사가 많이 일어나게
됨으로 영적교만이 부작용으로 크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은사가 본능에 의해서 사용될 때, 악한 세력이 틈타는 기회를
만들어주게 됩니다.(예: 고린도교회, 분열, 분쟁)
또한 의식에 따른 금식이나, 예복을 입고 대중앞에 나타나는
종교지도자들을 주님은 회칠한 무덤이라 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계 22:12)

예수님의 재림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기쁨입니다.
그 이유는 받을 상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상받는 대열에서 제외되는 자들은 바로
이 땅에서 자신이 영광을 다 받은 자들입니다. (마 6:2)  
 
그러므로 재림신앙으로 기대하며 살 때,
영적교만은 절제되어 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신 성품중에는
하나님을 닮을 수 있는 공유적 성품과 도저히 닮을 수 없는
비 공유적 성품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공유적 성품인
반면에 비공유적 성품은 전능, 초월, 편재성 등입니다.
절제는 하나님의 성품을 공유한 것이므로 베드로사도는
이것을 지닌 사람을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가 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벧후 1:4-7)

즉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승리는 마지막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로 끝이 나야
진정 승리하는 것이 됩니다.

세상의 악한 세력도, 어두움의 세력도 모두 이겼어도
자신에게 지면 다 패배하고 마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절제가 중요한 것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김으로
모든 것을 이길수 있는 조건이 내안에 구비되어졌기 때문입니다.

절제의 생활을 통하여 매일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어
다같이 승리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리스도인의 자유
(갈 5:1)



세상에는 수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리고 무신론자도 자기와 선을 기준으로 삼고
살고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기독교와 다른점은 구원의 기준을
인간의 행위에 기초로 하고 있는 점이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구원하심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행의 결과로서 죄의 문제의 해결과
믿음으로서 실제적으로 어떤 방법이 맞는 길이냐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이를 위하여 '마르틴 루터'의 체험을 기준으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22세 때에 수도사가 되기 위하여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엄격한 규율에 따른 육신의 욕망을 줄이는
고행의 훈련과 탐구하는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였으며,
죄를 범하지 않은 언행을 철저히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심한 내면의 갈등을 겪게 되었습니다.
고행의 훈련을 행하던 어느날 한 말씀을 깨닫게 되어
그 훈련에서 벗어나 진정한 해답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말씀으로 말씀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서1:17)

그래서 그는 그 깨달음으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말할나위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더 할수없이 충성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는 도저히 인간이 해결할수 럾는 3가지 면에서
자유함을 얻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그리스도인은 죄로부터 해방된 자유인 입니다.  

수도원에서의 그의 선행과 고행은 충실한 수도사로서
하나님앞에 의롭다는 판결을 받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본인은 죄악성은 사라지기 커녕, 더 또렷이
죄에 대한 의식이 강하게 나타나게 되는 체험을
하게 되자 '고해성사'를 자주 드렸습니다.

그러나 '고해소'를 떠나는 그 순간에 죄의 생각은
다시 들어오고 미쳐 고백하지 못했던 죄들은
떠오르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고백을 해도 마음속에 남아있는 죄를 다 비울수
없다면 결국 남아있는 죄 때문에 구원에 이를수
없다는 결론에 그는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죄만 안 지으려는 생각과 철저히 조심하며
행동해도 없앨 수가 없는 잠재되어 있는
하나의 상태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0년이 지난 어느날 '로마서 1:17절'을 문득 생각해낸
마르틴 루터는 이 깨달음을 좀 더 깊이 이해해 보려고
몇일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1) 복음과 하나님의 의에 대한 관계에 대하여 의문이 생겼습니다.

"복음이란 기쁜 소식인 구원을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의는 죄를 심판하는 공의이기 때문에 만약 복음이
좋은 소식이라면 하나님게서 심판하심이 없어야 되는데,
말씀 속에는 왜 오히려 복음속에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난것이 기쁜소식이라고 되어있는가?'ㅡ더군다나

'나타난 공의가 오히려 믿음을 갖게 만들고
더욱 참된 믿음으로 이끌어 의인이 되어
살게 만든다'란 말씀은 무슨 뜻일까?"
그는 깊이 묵상하였습니다.

결국 그가 깨닳은 것은 복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공의는
나를 심판하려는 공의가 아니라 나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징계하셨음으로 모든 죄악이
이미 심판되어진 공의입니다.

이 공의를 이해하는 사람에겐 더이상 자신의 죄에 대하여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의 죄에 대한 대속 하심은 나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대속한 것입니다.

사람의 죄는 없앨 수도 안 지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죄의 댓가로 심판받은 예수님은
생명을 지불하셨음으로 나의 과거의 죄는 물론
일생의 죄가 모두 씻음받게 된 것입니다.

생명의 대속이 나의 전 생명의 삶에 있는
모든 것을 상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 하리라.'
(요8: 34-36)

그러므로 예수님의 대속으로 나는 깨끗한 의인이 되었으며
이 진리를 믿는 삶이 죄에서 해방된 삶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 감격을 다음과 같이 표현 했습니다.

'나는 마치 내가 새로 태어난 것처럼 느꼈다. 그리고
천국의 문이 활짝 열린 것처럼 느꼈다. 성경 전체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 '하나님의 정의는 내 가슴속에
두려움이나 미움대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달콤한 사랑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있다'

2. 그리스도인은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인 입니다.

구약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말씀인 율법은 사람의 모든 죄를
발견해 내는 역할을 해 줍니다. 늘 죄를 지니고 사는
인간에게는 율법은 말없이 큰 부담을 안겨 줍니다.
십계명 조차도 완전히 지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생각하면 마치 운전할 때 경찰차가 뒤에
따라오는 것을 보고 있는 느낌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을 모두 지키신 분 이실뿐
아니라, 은혜로 완성을 하여 주신 분 이십니다.

'때가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심이니라'(갈4:5)

즉, 담임 선생님이 훈육 선생님에서 어머니로
바뀐 것과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채벌을 위주로 점검, 검사, 지적을 하는 선생님 밑에서
벗어나 사랑으로 이해하고 권면하는 어머니의
용서함 가운데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잘못은 두려움이나 죄의식이 아니라,
 엄마가 싫어하는 습관으로 고쳐나가야만 할 버릇인 것입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스스로 고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같은 생활을 도와주기 위하여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3)

진리는 복음이며 복음은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말씀이십니다. 그 안에서 나도
윱법에서 완성된 내가 되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은 사탄 마귀로 부터 해방된 자유인 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서재에서 명상하고 있을 때,
마귀가 나타나서 지금까지 범한 자신의 죄를 다 내보이며
'이래도 네가 구원을 얻겠다고 생각하느냐?'하고 조소하였습니다.

이때 루터가 말하기를 '네 말대로다. 그러나 이 모든 죄는
벌써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 받은지 오래다.'
라고 말하자 마귀는 나가 버렸다고 합니다.

요한 1서 3:8절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죄인이 되어서 형무소에 들어가면 자유가 없어집니다.
모든 행동에 간수의 간섭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명령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가
사면이 된후에는 더이상 간수가 이래라 저래라
하지 못합니다. 이미 죄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일도 마찬가지 입니다. 죄에서 해방된
영혼은 사탄이 간섭할 권한이 없습니다.
이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신앙생활할 때 예수님과 따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 등 어느 위치에 자신을 두고 있는지에 따라
주님의 말씀하신 적용 범주도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해 주신것은 우리에 대하여도
우리를 위하여도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안에 속하시고
자신안에 우리를 속하도록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오직 그 안에서만 이루워진 것을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시기 때문입니다.

창살없는 감옥의 느낌을 생활속에서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오늘은 모든 구속을 철폐시키는 날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즐겁게 사십시다.





1 
BLOG main image
뉴질랜드 에바다교회
뉴질랜드 에바다교회입니다

카테고리

Menu
Notice
Sermon
Christian Life
Bible Study
Media
Life
Resource
Scho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