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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에바다교회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눅 2:21-39]



 / By Priscilla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은 노년이 되어서야 
 사모하던 메시야를 그의 품 안에 안고 찬송하며 
 예언의 성취를 다음과 같이 고백하며 감사드린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이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바로 이와같은 '시므온'의 고백 속에서 
그의 생애 가운데 메시야를 고대하던 
그 심중이 과연 얼마나 갈급하여 
메시야를 간절히 칮았는지를 알 수 있다.


'안나' 역시 금식하며 기도로 섬기던 차에 
예수 그리스도를 한 눈이 알아보는 영안이 열려 
이를 세상에 알리는 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이 시간 

님을 간절히 사모하며 찾고 있는가?  



시대적으로 임박한 종말론은 현세에 와서 
더욱 박차를 가하는 때임을 알고 있으나ㅡ나의 삶 자체도 
신랑을 진정으로 밎을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나의 전 소망이요, 

그분을 반나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이요 
바램이 될 것이다."
란 사실이다.  



온전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주님께서 이 땅에 남아 해야 할 사명과 의무를 
무사하게 마칠 수 있기를 끊임 없이 간구해야한다. 


특히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고 

더욱 구체적인 부분으로 주님과 동행하고 나아갈 때,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구원의 역사는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고 복음은 

더욱 놀라운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내가 연약할 수록 더욱 

그분은 강한 역사를 보여 펼쳐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는 점차 도래되어 질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1) 세상에서 나를 이끌어 내어

 불러주신 하나님의 뜻과 의미를 찾자. 

 


2) 하나님께서 나의 심중을 

늘 감찰하고 계심을 인식하며 살자. 


 3) 상황을 관망하시나 하나님의 응답은 

신속함을 인식하며 위로를 얻자.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제게 속한 모든 것들은 다 주님 것이나이다. 
  
제가 너무 부족하여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소서!

 

혹간 병을 허락하시나 상처를 

싸 매어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이다.

 때로 인생 길에서 쓰러지나 다시금 저희로 

일으켜 세우시는 아버지를 기억 하나이다. 



종내 사모하는 마음을 지켰다가 주님을 만났던

 안나와 시므온과 같이 고난 중에서도

 지체들 서로가 믿어주고, 긍휼히 여기며, 

주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케 인도하소서!






 2012/01/02



/ By Priscilla







신약의 여선지자 안나 
[ 2:36]



1. 인적 사항


안나는 히브리어의한나 해당되는 헬라어 이름으로 
 
뜻은은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야곱의 여덟 번째 아들인 아셀의 지파의 후손으로 
 
그의 부모는 마누엘로 이름은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고 
 
곳에 붙인브니엘이라는 ( 32:30) 지명에서 나온 이름으로 
 
뜻은하나님의 얼굴 이라는 의미입니다.

예로부터 아셀은 미녀지파로 
 
흔히 왕비나 대제사장의 아내가 배출된 지파인 것으로 보아 
 
안나 또한 믿음과 미모를 겸비한 여인으로 여겨집니다.

당시 유대인 처녀들은 14세를 전후하여 결혼식을 올린 것으로 보아 
 
안나의 나이는 105 정도였을 것이며 (14+7+84=105)\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하는 그녀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언의 은사를 주심으로 
 
예루살렘에서 여선지자로 ( 2:36)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과부로 지내온 84 동안을 오직 성전 뜰에 기숙하면서
 
성전에 필요한 일이 생기면  일에 언제나 솔선수범으로 
 
나서서 일을 했던 일꾼으로 보입니다.

구약 말라기 이후 300 이상 예언의 영이 끊어졌으나
 
하나님의 영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의 구속을 기다리던 모든 자에게 
 
예수님의 초림을 처음 증거하는 여예언자가 되었습니다.


2. 시대적 배경


B.C.1세기 유대가 헬라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독립시대를 지내다가 
 
다시 로마의 식민통치하에 들어간 시기는 혼란에 혼란을 거듭 시기로 
 
당시 이스라엘인들은 종류로 나누어 종교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부류는 바리새인들로서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대하며 로마의 압제로부터의 해방과 
 
장차 열방에 군림하는 나라로 만들어  
 
탁월한 지도자로서의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부류는 사두개인들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현실에 당면한 유익과 이득만을 누리고 살려는 집권층들이 있었는가 하면, 
 
마지막으로 시므온, 안나와 같은 소수의 경건한 사람들은 
 
구약에서 예언한대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여 
 
영생으로 인도할 메시아를 기대하는 사람들로 나눠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정치적, 종교적으로 암울한 상황 속에서 
 
유대인들에게는 자연히 종말론적 메시아 대망 사상이 크게 무르익게 되었으며 
 
구약의 예언의 성취를 간절히 기다리는 분위기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성령님께서는 경건한 사람 시므온과 안나에게 임하셔서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계시하여 주셨으며 
 
시므온이 아기예수님을 보고 찬미와 예언을 한대 이어 
 
안나를 통하여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증언케 하신 것입니다.


3. 안나 선지자의 신앙 생활의 특징


1) 경건한 신앙 생활을 여인이었습니다. [ 2:37]


그녀는
결혼한지 7 후에 과부가 되었는데 
 
이후로 84 동안을 성전 중심의 생활을 하여왔습니다.

그녀의 생활의 특징은 금식과 기도 생활이었는데
 
대부분 특별한 믿음으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하는 생활을 하였으며 
 
기도는 하루에 번을 정규적으로 드렸습니다.

번째는 오전 9, 번째는 12,
 
번째는 오후 3 번을 드렸으며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는 공식 기도시간이었으나
 
해질 황혼 무렵에 한번의 기도 시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같이 주에 금식하며 하루에 번씩 기도 생활한다는 것은 
 
보통 신앙인들로는 없는 특별한 신앙행위이며
 
이는 다니엘과 같이 어려운 포로생활에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섬겨 
 
하루 기도했던 모습에서도 이어지고 있음을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이와 같이 세월 동안을 규칙적인 신앙생활을
 
날마다 있었던 것은 메시아를 대망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동기가 있을 열심히 하나님께 구하게 됩니다.
 
아니면 특별한 은총을 만났을 하나님께 꾸준히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전자는 안나 선지자의 경우요
 
후자는 바벨론 총리가 다니엘의 경우입니다.

오늘날 신자인 우리들에게는 참으로 
 
실천하기 어려운 경건한 신앙 자세가 아닐 없습니다.
 
안나 선지자는 중보기도 용사로서 백성과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를 보내어 주시기를
 
평생을 기도한 여인이었습니다.


2)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한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 2:38]


당시 예루살렘에는 소수의 경건한 무리들이 메시아를 기다리며 
 
함께 기도하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에서도 안나 선지자에게 성령님께서 임하심으로
 
아기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녀에게만 알려주셨을까요?
 
그것은 메시아에 대한 그녀의 간절한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누구나 믿음을 가지고 있고 누구나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항상 중에서도 선택하는 사람이 있으십니다.
 
선택의 동기가 믿음 위에 충성입니다.

믿음은 충성심으로 진위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
101:6] “ 눈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


이로 신앙생활은 믿음과 함께 충성심이 있어야 함을 수가 있습니다.
 
안나 선지자가 초림의 예수님을 평생 기다려 만날 있었다면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재림의 예수님을 평생을 기다려 뵈올 있도록 
 
충성된 신앙생활을 하도록 성령님께서는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안나 선지자가 예수님을 뵙고 몹시 흥분되어 
 
자기의 동료들에게 메시아가 오셨음을 증거할 때와 같이 
 
우리들도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벅찬 기쁨으로 증거할 있는 기회가 
 
나에게도 주어지기를 기다리며
 
신앙생활을 해야 함을 본받게 하여주는 예입니다.


3) 안나 선지자는여호와 이레예비의 하나님을 체험한 신앙의 여인입니다.


요즘과 같이 사회 보장이 되어있지 않았던 옛날에는
 
고아와 과부는 사회에서 가장 불쌍한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더구나 홀로된 여인이 생활할 있는 수단은 거의 전무한 때였으므로 
 
길은 정말 안나 선지자에게는 막막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의식주를 해결하러 세상으로 나가지도 아니하였고
 
자기의 미모나 젊음을 의지하여 살지도 않았고
 
오직 하나님께 나가 의지함으로 성전 중심의 신앙 생활만을 지속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아픈 마음과 의로움을 위로하여 주셨고
 
예언의 은사를 내려주시므로 여선지자로서 추앙을 받게 하셨습니다.

인생에서는 대개 부와 가난, 신앙과 세상, 
 
그리고 거룩과 욕망의 갈림길 번을 통과하여야 함을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과 자신의 의지하는 것으로 선택을 하려 합니다.
 
그러나 안나 선지자는 세상의 것들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84 동안을 예비의 하나님을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안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그녀는 보게 되었고
 
깨달음을 전할 있는 권능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모든 생활이 공급받게 하신 것입니다.

육신의 양식을 구하는 자에게는 
 
끝없이 양식을 구해야만 하는 노동만이 주어지지만 
 
영생의 양식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성과 능력이 주어져서 육신의 양식을 구한 자들로부터 
 
공궤를 받게 함을 안나 선지자를 보고 깨달을 있습니다.

안나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신을 찾는 자에게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심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이 증명된 삶인 것을 있습니다.
 
일개의 과부 여인이 84 동안을 성전 중심의 신앙 생활을 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신앙이 과연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복도 아니요, 건강도 아니요, 성공도 아니고
 
그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하나님께 상달될 때에 
 
나의 생활의 문제는 저절로 풀려질 뿐만 아니라
 
우리도 모르는 하나님의 은사와 능력이 주어져 
 
더욱 진리의 세계를 증거할 있는 영권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심을 
 
안나 여선지자를 통하여 배울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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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7.11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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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7.11 00:52



겨자씨 비유 / 천국의 비유

[눅 13:10-21]




/ By Priscilla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신다. 
겨자씨는 지극히 적으나 그것이 성장하면 큰 나무가 되어 
그곳에 다른 공중에 나는 새들이 깃들인다는 것과
한편 누록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시다. 


외식하는 자에 대한 행위에 대해서는 

이미 주님께서 힐문하시며 책망하셨다. 


바리새인들처럼 나의 마음 속에 있는 고정 관념의 틀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출발을 해야할 시점임을 직시해야한다. 



 예수님께서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고 말씀하시며
18년간 뭄을 펴지 못한 여인을 즉시 고쳐 주셨던 것처럼 


이 시간 현재 나를 묶고 있는 나의 모든 생각과 눌림과 
억압과 부자유함에서 또는 내 안에 읶는 연약함과 
환경에서 오는 걱정과 염려와 불안에서 벗어나고 
해방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낙심과 절망에서 소망으로

 연약함에서 강건함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아니 그리스도 안에서 
생의 환희로 전환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오늘부터 나의 의식을 주님께로 더욱 

곧게 펴야함을 깨닫게 하여 주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전에 우선 해야 할 일은 주님의 
긍휼이 임하기를 먼저 간절히 사모하며

 주님께 가까이 나가야 할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자세가 늘 한결같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주님을 부지런히 찾고 문을 두드림으로


"그 결국엔 나의 삶이

 구부러진 삶이 반듯하게 교정되어 질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오늘은 주님께서 

나를 회복시켜주시는 날임을 기억하자. 



주님 앞에 거짓이 없는 삶! 누룩이 없는 삶!
있는 그대로 외식하지 않고 솔직하게 대면하는 삶, 
그것이 오늘 내게 필요한 하나님을 향한 삶이다. 



나의 삶이 별반 자랑 할 것이 없고 겨자씨처럼 
너무도 작아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또 아주 작은 믿음을 지녔을 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소중히 여기시며 겨자씨처럼 나의 삶이 

나중에 자라나 결국에는 영적으로 풍성한 열매가 맺힐 것을 기대하신다. 



예수님께서 사탄의 올무에서 여인을 자유롭게 하셨듯이 
나의 치유되지 못한 상한 감정과 피해의식과 연약함과 
영적인 무지를 고쳐주시려고 나를 찾아 오셨다면 


나는 이 사간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잘못된 삶을 청산함으로 바뀌어져야한다. 


마땅히 다시금 자유함을 얻는 삶으로 도약하는 
이른바 삶의 터닝 포인트가 되는 인생 역전의 계기가 되어야한다.  



주님께 맡기는 삶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답고 

시원하고 명쾌한 삶이란 것인가를 께닫고 
오직 주님께 영광돌리는 삶으로 
전환되어지는 날이 되어야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하여야할까?



1) 환경보다 하나님을 더욱 기대하고 맡기자.
2) 어찌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지를 고민하자.
3) 나의 습관적인 부정적인 낡은 생각들을 바꾸도록

 성령님께 간절히 간구하자.  



기도 



주여 겨지씨의 비유를 잊지 않겠나이다.
저를 기대하시는 주님을 더욱 의지 하겠나이다.


지금은 나 비록 연약함 밖에 자랑 할 것이 없사오나
주님께서 체휼하여 주심으로 


현재의 연약함을 강건함으로 이끄소서!
열매가 풍성한 살으로 인도하소서!




2011/08/29



/ By Priscilla








언젠가 주님을 뵈올 때까지
 [눅 12:35-48]




/ By Priscilla




언젠가 다시 오실 주님을 뵈올 때 

나는 과연 주님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는가?\


 "내가 다시 오마"고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주님께서이 땅에 다시 오실 때, 



그것도 부지 중에 신랑되신 예수님이 오실 때, 
혹여 나는 주님께서 주신 임무를 망각하고 세상에 살면서 



나태하거나 게을러서 오실 시기를 분면치 못해 
그저 당황한 채로 주님을 맞이하는 신부가 되는 
그런 부끄러움을 당하지 말아야할텐데…



주님께서 내게 허락하시고 주신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때론 용기백배한 군사같이 늘 영적인 무장으로 준비하고 있다가 
일단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면 적진에 달려 나아가고, 


때론 달리는 경주 자같이 한 눈을 팔지 않고 길을 이탈하는 일이 없이 
목표를 향해 전력으로 질주하여 달려가며 밈무를 이루고, 


때론 농부같이 열심히 때를 얻던지 못 얻던지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거두는 역사, 선을 심고 가꾸며 
사람들을 돌보는 역사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한다.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위해서 이 모든 일은한 하나님을 섬기며 
오로지 충성된 마음으로 각각 주신 임무와 
이 땅에서의 해야할 책임을 다해야 마땅 할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나의 삶이 무책임하거나 
나의 영적인 게으름이나 미숙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임의로 지연시키고 누를 끼치는 일은 없어야한다. 


무엇보다 내게 주신 은사(Giftt)와 

달란트(Tallent)가 무엇인지를 알아야하고 

주신 선물들을 어떻게 개발시키며 어떤 곳에 
사용되어져야 할지를 분별하여 아름답게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언젠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이를 회계(account)하고 
잘했다 칭찬받는 기쁨의 일군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임박한 종말론을 갖되 마음에 여유를 갖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사모하고 기대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에게 어제와 오늘과 미래를 허락하시고 
준비하여 주신 하나님께서 이같이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자세를 지닌 자녀가 진실로 무엇이나 
간구한다면 그 무엇을 마다하지 않으시겠는가?



단지 나는 하나님의 자녀일진대,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지않는 
기쁨의 자녀가 되어야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순수한 영혼으로 대면하여야한다. 


끝 없는 은혜와 평강을 우리에게 주사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등물을 밝힐 기름잔을 준비하는 한텬, 나에게 주신 능력을 
성령님을 의지하고 더욱 충만케 활용하고 유지하고 보강하여야한다.


특별히 주신 감성과 주님께 대한 열망과 사모함이 
늘 메마르지 않도록 샘물처럼 샘 솟아 오르게 하시고 


또한 은혜를 사모함이 절실하여 도우시기를 바라고,
감시함으로 하나님의 궁정에 들어갈 수 있도록 
간구하며 주님께 한발 한발 나아가야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지세로 나아가야할까?



1) 주님이 오실 때 맞을 기름을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한다. 
그러므로 이 땅에 어두움이 관영할 수록 
 성령충만한 자가 될 수 있도록 기도의 불을 밝하는 자가 되자.



2) 게 주신 달란트와 은사를 적소에 활용할 수 있도록 

늘 계발하고 사용토록 성령님께 지혜를 구하자.



3) 임무에 충성하는 자가 될 수 있도록 영적으로 
방심하거나 나태하거나 교만하거나 게으르지 말자.



기도 



 주여!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립니다. 
  언젠가 주님을 뵈올 때까지 


 주님이 만나고 싶은 아름답고 순결한ㅡ 
주님의 정결한 신부가 되게 허락하소서!





2011/08/22



/ By Priscilla











외식 행위를 금하라 

[눅 11:37-54]




/ By Priscilla




오늘 주님께서는 위선자가 되지말라고 

행위를 비난하시되 경계하게 하신다.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을 조명하고

 통찰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진다.동기가 불순하면 

그 모든 행위조차도 선교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죄에서 부터 

자유함을 얻는다고 했다. 
그들은 무엇보다 행위를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죄는 우리의 심령과 마음에 침투하고 스며들어 

우리를 죄악으로 인도하고 죄를 짓게 한다. 


이재 나는 내면 세계를 더욱 더 청결히하고 

주님을 바라보는 시각을 길러야한다. 


하나님의 삼가 은혜와 진리를 깨달아가는 작업이 

더욱 시급하다고 판단되어지면 하나님의 삼가 하신 
말씀을 선택하여야만 할 것이다. 


바리새인은 외식하는 행위와 대접받고 

높임 받는 것을 선호해 왔고 정당화시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회칠한 무덤같이 취급하신다. 

자신에게 책임을 부과하지 않는 영적 지도자는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잘못된 관념을 가진 선지자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양무리가 희생을 하게되는가?



오히려 선지자중 일부는 형식적인 위선과 외양에 
나타나는 현상에 유혹 당하기 쉽상인 형세를 말하며 
옳게 분변하는 태도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하게된다. 



기도



주님 저의 외식적인 행위를 깨닫고 버리게하소서.
사람을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 말게하소서.


심령으로 주님을 더욱 만나는 제가 되게하여 주소서.
진심을 바라오니 외식하는 무리와 동조하지 않게 하소서!





2011/08/15



/ By Priscilla











경청하기를 배우라

 [눅 10:38-42] 

 


/ By Priscilla




우리의 삶 속에 항상 주님과의 시간을 마련토록 해야함을 느낀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편안히 모시고자 자신의 집으로 

주님을 반갑게 영접하며 손대접하기에 분주하였다. 



그녀의 동기는 선했으나 그녀위 동생 마리아같이 
주어진 기회가 다시 올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지 못하고 
분주한 알에 얽매여 에수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못했다. 


오늘 주신 말씀처럼 나의 삶이 간혹 이처럼 마음으로는 
주닝을 사모하지만 현실적으로 삶이 분주하고 바쁘다는 구실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놓치고 
기회를 갖지 못해 목마른 심정이 되곤 하였던가?. 


그러기에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해본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데 있어 다른 주어진 일에 얽매이다보면 
어떤 삶이 더 중요한지의 그 가치를 망각하고 
우선 순위가 뒤바뀜으로 자칫하면 쉽게 
본질을 떠나 삶의 방향을 잃어버릴 수가 있다. 



많은 근심과 염려는 때로 자신의 의지보다 
하나님의 의지보다 강할 때, 이루워진다. 


나는 하나님을 얼마나 과연 기쁘시게하는 자녀인가? 
삶의 자체가 곧 예배라 생각하면서도 
얼마나 우선 순위를 하나님께 두고 사는가? 


내 삶에있어 진정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라면, 
좋으신 하나님께 충성된 자세로 일관성이 있는 삶, 
하나님을 더욱 위지하고 나가는 삶, 하나님을 초대하여 
당신의 뜻대로 삶을 주장하시도록 나의 자리를 내어드리고 
그 음성에 경청하는 자세의 삶을 살아야할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관심있어하며 경청하여 듣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의 방향을 결정함을 알자.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1) 삶의 우선을 하나님께 두며 살자. 
2) 의지와 신념과 믿음을 구별하여 
나의 의지와 굳은 생각을 주님 앞에 내려놓자. 
3) 하나님의 말씀을 늘 경청하는 지세를 갖고 살자. 



기도 
 


주님 마리아가 주님이 말씀을 경청했듯이 
나의 삶에 주님이 최우선이 되어야 할 줄 어나이다. 

 주님 저의 전 삶이 주님의 것임을 아오니
제게 마라아와 같이 순결한 믿음을 허락하소서!

  나의 귀가 언제나 주님께 열려 있게 하셔서 
주님이 말씀하실 그 때 즉시 반응하게 하소서!







2011/08/08




/ By Priscilla








New Zealand / West Side                            Moru



영생을 얻으려면?

/ 누가 내 이웃이오니까?

[눅10:25-37]




/ By Priscilla





주님께 "영생을 얻기 원합니다.
...내 이웃이 누구이오니까?
"라고
질문하며 주님을 시험코자하는 율법사에게
말씀하신 말씀은 큰 의미가 있다. 


오늘 말씀의 요지는 말로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말고 행동으로 나타내라 하시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되 내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며 사랑하되 또한 동시에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시는 하나님의 명령이심을 기억하자.



주님께 "영생을 얻기 원합니다.
...내 이웃이 누구이오니까?
"라고
질문하며 주님을 시험코자하는 율법사에게 
말씀하신 말씀은 큰 의미가 있다. 


'누가 과연 나의 이웃인가?' 에 대한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답변하신다. 



"너도 들은바대로 …선한 사마리아인같이...
세상에 나가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며 살라."
 라고


 '어찌하면 영생을 얻겠냐?'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예리하고 놀라운 답변이시다. 



그만큼 믿음이 좋다고 할지라도 현실 속에서 

실제적인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며 산다는 것이
이처럼 어렵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오늘 이 시간 나는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섬김은 물론 이거니와
사람에게도 실제적인 관심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주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나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에게
지속적으로 끊임 없이 얼마나 관심이 많으신지…


사랑에 대한 지론이 말로만 하기쉬워도
그러나 한편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리고 진정 영생을 얻고자 한다면 좀 더 진중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우리가 되어야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행해야할까?



1) 하나님께대한 우리의 생각과 시야와 관점을 다시금 점검하자. 

그리하여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을 한결같이 소멸시키지말자. 



2) 하나님을 사랑하되 동시에 사람을 보는 시각을
제한시키지말고 폭넓게 넓이도록 하자.



그렇다면 '나의 가장 가까운 이윳은 누구인가?'

바로 나의 자장 가까운 이웃은 가족임을 안다.


내게 맡겨진 일들과 사명감, 책임감,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충성심들이 어우러져서 아름다운 열매를 삶 속에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실천하며 사는 삶이 되길 소망하자.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삶에서부터 더 확장되어 하나님과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우리 자신이 되어야함을 느낀다. 



그러므로 가족들을 더욱 애정으로 살갑게 대하자. 

상대방의 실수를 정죄치말고 허물을 오히려 덮어주는 자가되자.




기도
 
 

주님 진정으로 주님을 좇아 위로는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며
옆으로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며 주님 말씀대로
주님의 사람을 실천하며 살기를 원하나이다.
도와 주소서 



2011/08/01

/ By Priscilla









파송할 자의 자세

 / 필요를 채위주시는 하나님

[눅10:1-16]





/ By Priscilla





70인 제자의 파송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선교지나 복음의 현장에 보내실 때눈 

반드시 우리를 책임져 주실 것이다. 



추수 할 곳은 많으나 추수 할 일군이 적음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각자 부르심의 종착지로 

제자들을 파송하시되 둘씩 짝지워 보내신다.  



오늘날 영적으로 주님의 제자인 우리 역시 

동일하게 적용되어지는 부분이다. 



영적으로는 평안의 복음의 신발을 신고, 파송될 때,  

예수님께서 모든 필요한 것을 그때 그때 채워 주실줄을 



마음으로 신뢰하고 의심치않고 믿음으로 

한발 한발 내 딛어 종착지까지 

행보하기를 원하신다. 



그렇다면 파송할 자의 자세는 무엇인가?



1) 대 주머니 신을 가지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치 말라는 것이다. 



2) 어느 집에 들어가던지 평안을 선포하라는 것이다. 


3) 집에 유하여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는 것이다. 



4) 일군을 접데하며 예수님의 복음을 받는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을 통보하고 대항하고 거스리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의 날을 상기시켜야 할 것이다.



사리사욕이나 사심을 제하며 오직 하나님의 사명을 갖고 

출발할 때, 행하여야할 자세를 잊지말자. 

자랑이나 허탄 얘기에 자신의 갈 방향을 잃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순례자의 길은 오직 사명을 먼저 생각해야할 것이다. 



일군이 그 삸을 얻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따르는 자에게 

그 생사를 주장하시고 생활까지도 책임져 주신다. 



주님을 따르기위해 포기하고 희생하는 부분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일군은 목표지에 홀로 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하나님 나라의 왕국을 획산코자 

파견되는 것임을 명심하여 위로함을 얻으라고 하신다. 



또한 이집에서 저집으로 옮기지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준행함이 요구된다. 

 일군의 말을 경청하는 자는 순종을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에 대하여 불순종에 대한 상벌를 받게 될 것이다. 



일군은 하나님께서 선별해서 보내는 위임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요를 채우시며 일군으로서 택정하여 

선교지로 명하여 보내실 때는 이미 하나님의 손 안에서 

전 생애를 책임지고 계심을 알고 기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군이 되자.



고로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일군이 되자 전파자가 되기 위해서는 

오직 주님을 전폭적으로 위지하고 나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파송할 자의 자세를 잘 따라 행하며 

주님을 기쁘시게하는 자가 되도록 충성하자. 

 


기도



마땅히 파송할 자로서 주님의 뜻에 의한 목적을 완수하고 있는지를 

다시한번 점검케하여 주시오니 감사합니다. 



주여! 이 시간 제게 깊은 깨달음을 주소서! 

쥬님을 더욱 신롸하나이다. 

오직 부르심에 답하오니 모든 것을 책임져 주소서! 






2011/07/18




/ By Priscilla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라

[눅 1:26-38]





/ By Priscilla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과연 능치 못하심이 없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임하므로- 

기꺼이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다. 



마리아에게 성령이 임하자 그녀는 

기꺼이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늘날 내게도 성령이 임하고 그 크신 사랑이 임하게 되었는데 

나는 과연 기꺼이 순종하며 하나님의 사명과 

부탁하신 일들을 잘 감당해내고 있는가?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다. 

또한 하나님께서 세워주사면 능치 못할 일이 없다.



[v.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가장 불가능한 자를 선택하신 하나님! 

예수님의 제자들 조차도 부족한 자들을 

들어 사용하셨던 것을 생각해본다.  




소자라도 주님 손에 붙들리면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얼마나 큰 이로가 되는가? 



지혜 없는 자를 사용해서 지혜 있고 

높은 신분과 문벌과 학식을 겸비한 자들을 

부끄럽게 할 자로 쓰시기에 합당하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할까?



1) 하나님께 지혜를 간구하며 기꺼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한다. 




2)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임으로

 하나님울 경외하며 신뢰해야한다. 



3) 인간적인 생각에서 오는 많은 두려움을 제해야한다. 



4) 은혜를 받은 자의 증거를 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해야한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반응 해야할까?



(1)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오직 감사드리자. 



(2)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는 자가 되도록 

더욱 하나님을 간절히 찾자.



(3) 기도와 묵상을 통해 말씀의 진리를 

더욱 깨닫는 지혜로운 자가 되자. 




기도




주님!  주님께 더욱 간구하오니 주님이 원하실 때, 

주님의 제자의 길을 순종으로 갈 수 있도록 도우소서.



그리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제자의 삶이 되도록 도우소서! 

특별히 주님의 지혜를 허락하소서!






2011/07/11



/ By Priscilla








아리마대 요셉
/ Joseph of Arimathea
[눅 23:50]



1. 인적사항


70 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위원
공회의 결의와 행사에 가담하지 아니한 선하고 의로운 자
사무렐의 출생지인 라마다임 출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린 사므온과 안나 선지자 같은 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요구한 자
주님을 자신의 묘실에 모실만큼 부자인 자
예수님의 숨은 제자 (마 27:57)
니고데모와 함께 향품과 향료로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한 자 (요 19:39)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 장례식 행사 때 의외에는
성경에서 그에 대하여 언급되어져 있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이 주님의 숨은 제자로서 매우 가치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후대의 성도들은 그를 흠모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에 관한 미흡한 언급을 대신하여
전해 내려오는 전설로 많은 사람들이 위로 받기도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주후 61년에 빌립에 의해서
영국으로 파송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글래스턴버리 (Glastonbury)로 왔고 그 때에
그는 최후 만찬때에 사용되었던 잔을 가지고 왔는데
그 안에 그리스도의 피가 들어있었다 합니다.
이 잔이 성배가 되었으며 아더왕의 기사들은
그것을 찾는 것이 꿈이었다고 합니다.

요셉이 글래스턴버리에 이르렀을 때는 그는 피로에 지쳐
지팡이에 의지하여 쉬려고 지팡이를 땅이 깊이 박았는데
그 지팡이에 싹이 나서 해마다 크리스마스 날이면
꽃을 피우는 숲이 되었다 합니다.

성 요셉의 숲은 아직도 글래스텐베리에서 꽃피고 있으며
오늘까지도 그 점지를 온 세상에 내보내고 있다 합니다.
영국 최초의 교회는 글래스텐베리에 세워졌고 대 수도원과
고대 건물에는 성요셉 예배당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곳은 순례자들이 즐기는 순례지이자
휴양지가 되고있다고 합니다.
(바클레이 주석 씨리즈 눅 p. 404 참조)


2. 신앙의 특징


1)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산 자였습니다. (눅 23:51)

예루살렘의 공회는 70명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그 중 24명은 제사장들의 대표자들로
24명은 이스라엘 국민들을 대표하는 장로들로
나머지 22명은 율법을 배운 세기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공회의 기원은 광야에서 모세를 도와주었던
 70인 장로들을 본받아 이루어졌다고하며
그들의 권한은 예루살렘의 시정, 종교적 가르침,
치안의 확립,  성전 내의 각종 업무 집행들을 수반하였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당시 국민의 대표 중 한 사람의 장로로써
공회에서 일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와같은 정치, 종교의 지도자역에 가담하면서
그는 시므온과 안나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며 지내던 중
예수님을 만나게 되자 약속된 구세주가 바로 예수님임을 믿게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와 시므온과 안나 선지자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의 공동특징을 보게됩니다.
그것은 바로 선하고 의로운 성품을 지녔다는 것입니다.
(눅 2:25, 23:50)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날
우리들에게 행한대로 보응하리라 하셨습니다. (롬 2:6)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에서의 위로를 바라며 살고 있습니다.

그 결과 재산, 권위, 명예, 권세, 소유, 치리 등에 중심을 둔
신앙생활을 하고있는 것을 봅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그대로 본받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신앙생활은 하나님 나라를 염두에 둔
참된 믿음의 생활은 아님을 요셉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의란 본래 재판자리에서 필요한 것으로서
의를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재판자리에 서 있다는
인식을 항상 갖고 바르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즉, 의란 선행과 일치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고
고아를 위해  신원하며 과부를 위해 변호하고 (사 1:17)
공평을 지키는 것임을 (사 56:!)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예수님을 처형할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그는 아에 처음부터 그 같은 불법적인 모임에
가담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에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결정은
만장일치였기 때문입니다. (막 14:64)
그의 이와같은 행동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사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빌라도에게 주님의 시신을 요구한 담대한 신앙을 가진 자였습니다. (눅 23:52)


성경에서 요셉과 니고데모를 주님의 숨은 제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 27:57)
이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지만 자신들의 소속과 사역속에서는
떳떳히 제자의 신분을 노출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1] 산헤드린 공회원이란 신분과 지위는, 그들로 자격을 박탈당해야만 하는
주님의 제자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못하는 처지에 있게 하였으며

[2] 유대교사회에서의 축출과 재산의 몰수 등은 큰 위험임으로
숨은 제자로서의 신앙인으로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재판받는  자리에서와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담대한 믿음과 순종을 보고 그들의 마음은 강하게
믿음으로 자리잡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특이한 사건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1] 주님꼐서 돌아가시자 성전의 휘장이 찢어져 둘이 되었으며
무덤들이 열리고 죽은 성도들이 다시 살아났으며
부활의 몸으로 돌아다니는 역사가 일어난 사건 (마 27:51-52)

[2]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강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심을
나타내는 표현을 어느 누구도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옆에 달린 강도가 고백했습니다.


[눅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찮은 죄인인 도둑만이 예수님을 구주로 외치고 있는데
자신은 정작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자로서
자신의 신분을 더 이상 감추고 있는 것이 신앙 양심에
어긋나는 일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현실 위주의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천국 백성으로서의 신분을 깨닫고 담대하게 처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빌라도에게 가서 주님의 시신을 요구하였습니다.
이 같은 행동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자세일 뿐 아니라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려놓은 온전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보인 행동이었습니다.


세상 속에서의 삶은 신앙행활에 많은 걸림돌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전혀 걸림돌이 되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왜나하면 나에게 주어진 모든 형편은 나의 노력과 능력으로
얻어진 것이기보다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맡기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란 주인공의 인식이 주님이라는 중심의 삶으로
바뀌는 것이  참된 신앙임을 요셉은 보여준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시신을 자신의 무덤에 안치하여 장사지낸 자입니다. (눅 23:52)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 다음에 12 제자들과 같이
주님 곁에서 많은 말씀을 듣지 못하는 대신 주님에 대한
구약의 말씀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서에 대하여 늘 자신의 정원을 거닐면서 묵상을 하였습니다.
그 때, 그는 마음에 와닿는 한 구절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 53:9] "그는 강포를 행치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이 말씀 가운데 과연 그 부자란 누구일까요?
그 말씀은 그의 마음을 파고들었으며 마침내 그는
자신이 장본인이 되어야 함을 점점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주님께서 돌아가시자 지체하지 않고 빌라도 총독에게
달려가 주님의 시신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제자들도,  평소에 은혜를 많이 받았던
  장본인들도 없었습니다.
오직 같은 공회원인 니고데모가 가지고 온 백근에 해당되는
몰약과 침향으로 주님의 몸을 닦고 세마포에 싸서
둘이서 주님의 장례를 치룬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위하여 마련해 둔 돌무덤에 시신을 안치하였습니다.
신앙에는 시작시점과, 성장 시점과, 완성시점이 누구나 다 다릅니다.

먼저 시작한 신앙인에게도 자신의 할 사명이 주어져 있고 나타난
제자된 사람들도 해야할 때가 있는 반면 늦게 부르심 받은 사람도,
숨어있는 제자의 삶을 산 사람도 주님의 떄가 되면
할 일들이 주어지게 됩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순종하려는 자세로
말씀을 늘 묵상하며 깨달음을 갖는 신앙생활이 중요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마지막 주님을
온전히 모신 것도 구약을 늘 읽고 묵상하고
하나님을 말씀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자신의 믿음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 중에 사명적인 삶은 말씀을 중심으로 묵상하고
의미를 깨닫도록 노력할 때 성령님의 계시하심으로 이룰 수 있습니다.

시므온과 안나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그들에게
성령님꼐서 임하셔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계시를 주셨듯이
아리마대 요셉에게도 성령님께서 주님의 마지막 장례에 대하여
계시히여 주셨을 것입니다.

그는 숨은 제자로서의 신앙생활을 시작하였지만 나중에는
정식 제자들보다도 더 큰일을 해낸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그의 신앙을 본받아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마지막 떄에
감당하는 성도들이 다 같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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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Christmas) 
/ 성탄절

[눅 2: 10-14]


크리스마스란 영국의 고어 “Christes Maesse” 라는
용어에서 유래된 말로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예배의식으로서
12월 25일을 기준하여 전 세계적으로 지켜지고 있지만
예전에는 동방정교회에서는 1월 6일을 기념일로 지키어 오다가
A.D.336년에 동,서양 교회간 합의에 의해
12월 25일로 정해지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날을 예수님 탄생일로 부르고 축제를 삼는
풍조가 있으나 크리스마스는 인간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 아니라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고 대속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 이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라는 이름은 이 땅에서 사역하시던
33년 동안 육신의 몸을 입고 있던 주님의 명칭이지만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명칭이기 때문에
단지 사람이름의 탄생 의미와는 구분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탄절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이유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1. 예수님이 오신것은 성도들에게 기쁨의 근원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와 뜻을 사람에게 나타내는 것을
'계시'
라고 하며 성탄절에 베푸신 계시는 천사를 통하여
목자들과 동방박사들에게 들려주신 두 가지가 있습니다.
[눅 2:10, 마 2:1-2]

주변 목자들에게 알려준 말씀은
“예수님 탄생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이라는 것이었고
동방박사들에게는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다스릴 왕”
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참 기쁨의 사람들이 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이유는 주님 오시기 전의 인간은 타락한 존재이며
세상은 죄와 저주로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란
불안 속에 위로일 뿐이지, 진정한 기쁨은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것은 항상 죄의 무게에 눌려 있는 상태의 종속된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기쁨이 있기전 행복이 주어지는 것으로
행복이 흘러 넘치는 것이 기쁨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 것을 사도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살전 5:16-18]
말씀으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주님 오시기 전에 인간은 죄를 피하여 있을 장소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이 세상에 죄가 없는
피난처를 제공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에덴동산을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주님은 하늘의 에덴동산을 이 땅에 가지고 오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주님 안에 영생, 부요, 유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안에서 회복된
참 기쁨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눅 2:14]

만일, 인간이 죄를 짓지 않고 에덴동산에서 계속 살았다며는
주님은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에덴동산과 하나님 나라는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다스리는 분도 한 분이신 하나님, 함께 지내는 기간도 영생,
거룩한 자녀를 생산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 허락하신 에덴동산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한 세계가 두 세계로 나뉘게 된 것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음으로 이 세상을 마귀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인간의 삶은 하나님 대신 마귀가, 선대신 악을, 부요대신 저주를,
영생 대신 죽음을 맛보는 어둠의 세상에서만 살다가
죽는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1) 예수님의 탄생은 땅과 하늘의 세계를 하나로 이루어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 위해서는 다시 하늘나라에
소속되는 회복이 이루어짐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장벽이고 사단 마귀는 죄의 근원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주장하는 것은 아담의 원죄로 인한
인간의 모든 죄를 없애기까지는 이 세상은 아담에게서
넘겨받은 자신의 정당한 소유라는 것입니다.

즉, 죄지은 인간이 있는한 이세상은 자신이 다스릴수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요구를 들어주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1)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인간을 만드신 부모와 같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2)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대신 맡아 처리하실 수 있으신 분이시며,
(3) 죄로 인한 모든 저주를 대신 짊어지고 벗겨 주실 수 있는 분 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죄의 책임을 맡으시고 대신 죽으신 성자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 땅에서 마귀의 합법적인 세력을 몰아내고 백성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통치아래 회복을 시켜주신것입니다.
이 것이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된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게 하셨습니다.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컽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사 43:7]

하나님께서 지으신 우주 만물은 모두 하나님께
감사 드리며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장 영광 받기 원하는 대상은 인간입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자녀인 우리에게 내어주며
우리가 진정 기뻐하고 감사,영광 돌리는 모습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자녀인 우리를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자녀가 하나님을 버리고 죄를 찾아 마귀를 쫓아가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6일에 걸쳐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의미가 모두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마음에 큰 아픔을 가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들 모두에게 저주를 내려야만하며, 더우기 인간을
자신을 닮은존재로 너무 사랑하심 에도 불구하고 징계를 내리셔야했기 때문입니다.
그 것은 만들어진 대상들이 모르는 오직 만든 사람만이
지니는 애정과 공들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오셔서 죄인인 옛사람은 죽고 주님 안에서
새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들을 모두 거듭나게 하시어
아버지 하나님께 다시 영광 돌리는 자녀로 데리고 오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이 얼마나 크시겠습니까?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을때 보다도 더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또한 이 땅에 평화를 주시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대상들 간의 관계를 좋게 유지시켜 주는 반면
죄는 서로를 불화시킴으로 불행한 관계를 일으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죄가 있는 한 인간이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대상과는 평화를 누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1)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에덴동산 에서는 하나님과 좋은 교제를 나누었으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었고

2) 마귀를 쫓으매

선한 하나님 편의 천사들과는 대적의 관계가 되어버렸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을 천사들이 대행하여
이 땅 인간들에게 내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인간과 인간과의 다툼입니다.

죄는 남의 것을 남겨주는 것이 아니라 빼앗으려는 마음을
갖게 하기 때문에 서로는 생존경쟁 대상들일 뿐입니다.

4) 인간과 자연과의 대적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관리책임이 없어지고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된 자연은 인간에게 좋은 것을 많이 제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5) 인간과 인간 본성인 양심과의 불편한 관계입니다.

양심은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한 영에 속한 부분이기 때문에
죄된 자아와 양심은 항상 대결구도에 있게 됩니다. 결국, 이 같은
불행의 근원은 죄와 죄를 사주하고 있는 원수 마귀 때문이며,
그들에게 굴복 당하고 있는 인간은 이세력을 물리칠 수가 없습니다.
물질의 세계는 영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방법은 마귀의 영보다 더 강하신 하나님의 영이 있어야 바로
이 같은 세력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몸소 오셔서
죄의 문제를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해결하셨고
부활하심으로 마귀의 세력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승천하신 후에는 하나님의 영이시자 자신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시어 우리 안에 함께 머물게 하심으로 죄와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의 성품으로 바꾸어 평안을 누리며 살도록 해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아버지가 되셨고 천사들은 성도들을 시중드는
섬기는 무리가 되었으며 성도들 끼리는 주 안에서 형제 자매가 되었고,
자연만물은 쉼터가 되었고, 자아와 양심은 하나님을 섬기는 동반자가 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이 분리된 가운데 살았기 때문에 불행했듯이
각자 마음속에서도 선과 악의  두 세계가 있어서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 주님은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환원시키셨고 우리의
마음속의 두 세계도 하나의 세계로 통일시켜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우리 마음속에 주인으로 모셔 들인다면
우리는 진정한 평화를 누리며 이 땅에서 살 것입니다.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모셔드리는 날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는 자들'로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v14]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참된 축복은 조건부적으로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모두 사랑하시지만 인간 모두가
천국에 들어오는 축복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자들에게만 허락하십니다.

마찬가지로 평화도 인간 모두에게 허락하셨으나 누릴 수 있는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만 허락하시고 계십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면서도
평안을 누리고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가 될 수 있을까요?

1) 진실히 행하는 자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잠언 12:22]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히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진실의 반대는 거짓입니다.
그리고 거짓의 아비는 마귀입니다. [요 8:44]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도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에
타는 못에 들어간다 말씀하셨습니다. [계 21:8]

하나님께서는 진리 자체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을 '진리의 영'이라 부르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진리의영 이신 성령님을 내려주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속성을 닮은 진리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짓을 말하지 않는 유일한 길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을 모시고 살 때 뿐입니다.

행위의 수정보다는 근본적으로 근성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거짓의 아비를 내쫓고 성령님을 모시고 진실된 삶을 산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자가 되어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삶을 살수있을 것입니다.

2)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로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롬 14:18]

우리가 자녀와 이웃 자녀들과 사랑을 줄 때 구분되듯이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자녀와 불신자들을 사랑하시는데도 구분을 두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섬긴다”는 말은 주인으로 모신 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주님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기쁜 날입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기쁨이요, 나 개인을 위한 주관적인 기쁨은
이 죄 된 세상에서 나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구세주 하나님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주님을 겉으로 모시기 보다 안으로 모셔 들이는
기쁨의 성탄절이 다같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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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삶
(눅14: 26- 27)



신약에서 ‘제자’ 라는 단어는 269회 나오고
그리스도인 이란 말은 3회이며 신자란 단어는 2회만 나옵니다.
이와 같은 회수는 성경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특별한 의미를 주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교회의 임무는 그리스도인이나 신자를 만드는 것보다도
제자를 삼는 일이 가장 중요한 임무이며 성도 또한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신앙자세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주님을 좇은 무리들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권능과 이적으로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고 떡을 먹이시고 하시자
따르는 무리들은 영혼구원과 천국에 관한 관심보다는 당면한 현실인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해방 시켜줄 정치적 지도자로 추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구원의 대상’ ‘영혼’이며 구원의 방법은 ‘복음’이었지
무력이나 반란을 일으켜 육신을 해방 시키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복음을 영혼보다는 육신에 관계하여, 그리고 천국보다는
현실의 처지 해결을 위한 방편으로 삼는 신앙생활을 할 경우에는 구원보다는
기복신앙 쪽으로 본질이 바뀌어지는 믿음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제자로써의 삶에서 벗어나 인본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됨으로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가 되는 조건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로 하여금 제자를 삼는 삶을 살라고 명하셨습니다.


1. 그러면 주님이 말씀하신 제자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1)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눅14: 26]

세상의 어느 대상도 예수님 보다는 덜 사랑해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부모 친족을 덜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현상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롬 5:5]

예수님을 제일 사랑하게 되면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심으로 예수님도 더욱 아가페적 사랑으로 섬기고 사람들에게도
더욱 폭 넓고 깊은 신앙 안에서 사랑하게 됨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생과 영혼의 중심이십니다. 나 중심에서는 나의 역량만 발휘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나의 인생에 중심으로 모시게 되면 주님의 역량이 발휘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님의 역할입니다. 가장 큰 은사인 사랑으로 부어주십니다.

2)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27]

그리스도인에게는 누구나 자신들에게 주어진 십자가와
짊어질 십자가가 있습니다. 즉, ‘생활의 십자가’‘사명의 십자가’ 입니다.

[예] 신체적인 결함, 병든 부모, 배우자 및 자녀의 수발,
대가족 양육부담, 시댁 시집살이… 등

이 같은 현상들은 나를 연단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짊어지게 하신
생활의 십자가 입니다. 이를 통하여 인내와 겸손을 배우게 되고
죄 된 욕망의 길로 가는 것을 막아줍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말씀은
한걸음 더 나아가 주님 때문에 겪는 어려움을 감수 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사명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희생과 고통을 겪는 것을 말합니다. 그 것은 전도, 양육, 교육, 섬김, 봉사,
구제, 선교, 등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할 때 생기는 어려움 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환경에 주어진 십자가도 피하고 싶은 게 사람의 심정입니다.
그러나 짊어질 십자가를 외면할 수 없는 것은 주님이 내 처형 받을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셨기 때문에 주님께서 대신 짊어지라고 허락하신 작은 십자가일 망정,
남을 위하여 나도 져야 함을 깨달음으로 자진하여 질 수 있게 됩니다.


3) 자신의 소유를 아낌없이 내려 놓을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14: 33]

예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교회에
헌금하거나 구제로 가난한 자에게 나눠 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유를 올바르게 사용 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의 축복을 주심은 소유의 기쁨을 위하여
주신 것이 아니라 사용의 기쁨을 위하여 맡기신 것 입니다.
그러므로 소유냐, 사용이냐의 물질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제자도의 진실성을 가늠하는 척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 부자청년)


이를 위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물질의 궁핍함을 한번은 겪게 하십니다.
온전히 주님을 의지 하는 법을 배우게 하신 후에 넉넉함의 축복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야 물질에 얽매이는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2. 주님이 말씀하시는 제자로서의 임무는 무엇일까요?

1)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 제자의 임무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13: 34-35]

[예] 경건한 '사무엘 러더포드'라는 목사는 토요일 저녁이면
가족과 성경공부를 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어느 토요일 저녁, 누군가 문을 두드려서 열어 보았더니
낯선 사람이 하루 쉬어 가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함께 들어와 성경공부를 하는 가운데
가장 쉬운 질문을 그에게 하였습니다.

“계명은 모두 몇 가지 있지요?” “네. 열 하나입니다.”
그러자 그는 그 손님이 당황하지 않도록 “10 가지겠지요.”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손님이 말하기를 “거기에 하나 더, 예수님께서 새 계명으로
‘서로 사랑하라’ 하신 것이 추가되어 11계명입니다.” 하였습니다.

이튿날 주일 아침, 러더포드 목사는 울타리 뒤에서 나오는
기도 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참으로 진실한 기도에 감동되어 한참
기다리다 기도가 끝나자“당신은 누구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예, 저는 아일랜드 대주교 ‘어셔’ 입니다. 당신의 경건이 널리 퍼져
직접 확인해 보려고 이 방법을 썼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은 선택이 아니라 계명적 순종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의지적 행위보다는 계명으로 지켜 행하는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명령으로서의
근거는 자신의 십자가의 사랑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사랑을 감정으로 행하려고 할 때는 차등이 작용하게 됩니다.
계명으로 행하려 할 때에 평등함으로 모두에게 베풀 수 있게 됩니다.

2)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것이 제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요 15:8]
열매에는 두 가지의 영역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내적인 영역의 열매”
‘회개의 열매’와(마 3:8) ‘성령의 열매’(갈 5:22)가 있고,
또 한 가지는 “외적인 영역의 열매”‘복음의 열매’가 있습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 4:35]


내적인 열매는 '성숙에 관한 문제'이고, 외적인 열매는 '상급'에 관한 문제'입니다.

자녀가 어렸을 땐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지만 성인이 되어 철이 들면
부모의 뜻대로 하려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 안에서 성숙하게 되면
주님의 뜻을 이루며 살려고 하게 됩니다. 그 것이 바로 전도의 삶입니다.

미성숙할 땐 말로 하려 하지만 성숙하면 행위로 합니다.
미성숙은 '양' 위주로 목표을 채우려하지만, 성숙은 '내용'을 위주로 합니다.

미성숙은 '인도'하면 끝이지만, 성숙은 '바로 설 때까지’
보살핍니다. 전도의 동기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3) 날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이 제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이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1]

대개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는 - 나에게 위로를 줄 약속의 말씀을 보기 위함이요,
그 다음에는 용기를 얻을 능력의 말씀을 찾기 위함일 때가 많습니다.

이 때는 대개 나의 처지가 어려운 환경에 지배를 받고 있을 때의 신앙의 경우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양식과 묵상으로 매일 꾸준히 먹고 그 말씀을 간직하고 사는 삶은
신앙이 환경을 다스리는 상태가 되어 형편을 넘어선 평안함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생명은 취사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의 문제이기 때문에 매일 양식을 먹어야 유지됩니다.
거듭난 생명은 매일 말씀을 양식으로 먹고 묵상으로 말씀을 간직하며 살게 만듭니다.

순종은 말씀이 온전히 내 것이 되었을 때 나타나는 표현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너도 가서 제자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의 마지막 사명은 결국 제자 삼는 삶입니다.
이는 주님의 마지막 명령을 지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 28:19)

3. 제자로서의 삶은 우리에게 영원한 영광의 삶을 약속하십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로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요 12:26]

1) 제자의 특권은 주님께서 항상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떨어져 사는 세상이지만 주님과 다시 한 번
이 세상에서 사는 기회는 반드시 오게 됩니다.
그 기간은 "천년왕국"입니다.

그 때는 주님과 더불어 왕 노릇 한다고 하였습니다.
참 제자가 되는 기회는 바로 이 시간 밖에 없습니다.
이 시기에 삶은 그 시대의 삶에 준비기간입니다.
우리의 삶이 세상의 삶으로 마감되지 않습니다.
천국에서 기다리시는 주님을 생각하며,
제자가 되어 다시 이 땅에 내려와 주님의 나라를
세우고 다스리는 기쁨을 기대하여 보십시오.

지나간 세월은 아깝지 않고, 남은 세월은 귀중하며, 어서 천국 가서
주님과 함께 완전한 행복의 삶을 사는 기쁨 속에 살게 될 것입니다.

2) 제자의 기쁨은 하나님께서 저를 귀중히 여기시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귀중히 여기실 존재가 못됩니다. 하나님을 배반했고
죄를 더 사랑하며, 천국보다 세상을 더 좋아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용서는 받아도 의인으로서의 인정은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 때문에 우리를 귀중히 여기신다 하셨습니다.
즉, 주님께 대하시는 태도로 우리에게도 대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 것은 아브라함, 다윗, 다니엘에게 베푸신 은총보다도 더 귀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우리에게 맡겨주시는 것입니다.

천년왕국 후에는 하나님의 후사가 되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미래를 위한 것입니다. 참 믿음의 생활이 미래를
결정합니다. 그 것이 바로 '제자로서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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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으로 사는 그리스도인
(눅 9:23-24)



인간의 육신이 욕망과 관계되는 것이라면,
혼은 의지와 관계되는 것입니다.
또한 욕망이 본능에서 벗어난 것이라면,
의지는 하나님의 뜻에서 빗나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할 때에 성경에서는
‘정과 욕망은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 (갈 5:24) 고 말씀하고 있고,
‘의지는 부인해야 한다’ (눅 9:23) 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이제는
혼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정리할 차례입니다.

1. 그러면 혼적인 신앙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혼은 주로 이성, 감정, 의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중에서 감정이 모든 결정에 영향을 주는 요소로
혼의 역할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혼 적인 신앙이란 –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감정이 더 영향력을 미침으로
순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행위를 하는 믿음생활을 말합니다.

예) 모세가 흥분하여 반석을 두 번 침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음 (신 32:51-52)

심지어 모세 같은 훌륭한 신앙인도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렸다면 연약한 우리들은 더욱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느낌을 중요시 할 때 감정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영향을 느낌이라 하고
안으로부터 표출되는 반응을 표현이라고 할 때
감정이 풍부한 사람은 환경에 아주 예민하여
느낌 표현이 잦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죽어있는 영이 살아난 사람으로
환경보다는 말씀에 예민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있는 새 생명은 이성이나 감정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내 영 속에 속한 것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려 할 때마다
이성과 감정은 몹시 반발을 일으키게 됩니다.

즉, 외부환경이나 상황을 생활의 기준으로 삼고 이성과 감정은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는 슬픔, 낙심, 근심, 무서움, 화냄, 염려, 환희 등,
이 같은 삶을 정상적인 삶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느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들이 아님으로
주님은 이들 모두를 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사명을 맡은 사명자들은 어떤 형편에 놓이든지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 전쟁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너는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하라” (수 1:6)
이는 믿는 자들에게는 환경은 넘어가야 할 고비이지 묻혀버릴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느낌은 말씀으로만 바꿀 수 있습니다.

2)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감정적인 삶을 살게 만듭니다.

거듭나기 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위하여 믿음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하면서도 돈, 명예, 인기, 권력, 지위,
능력 등을 소중하게 여기고 살게 됩니다.

즉, 내 안에 혼이 나를 사랑하는 감정을 통하여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역시 사랑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은 나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감정은 불쾌한 표현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 야고보,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가 아들들을 위해
주님께 좌편과 우편의 앉을 높은 자리를 부탁하자,
나머지 제자들이 분노하였음. (마 20:21)

나에 대한 사랑은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실 때
주님 사랑으로 바뀌어질 수 있습니다.
그 전까지는 수 없이 미워하고, 분노, 불평, 원망,  포기,
낙심하는 마음이 없어지질 않습니다. 표현은 내 안에
주님을 모실 때 바르게 나타낼 수 있습니다.

2. 자아가 혼적인 신앙의 주인공입니다.

인간의 감정이 느낌과 표현을 나타내는 자극기관이라면,
의지는 방향과 목적을 정해 끌고 나가는 추진기관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개의 상반된 커다란 의지가 들어있는데
하나는 거룩한 하나님의 의지이고, 또 하나는 타락한 사탄의 의지입니다.

인간에겐 자유의지가 주어져 있기 때문에 이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선택하면 순종이 되고, 마귀를 선택하면 불순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사탄의 의지를 선택했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는 불순종의 의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떠나고 자신이 책임을 지게 되자
그 책임을 맡은 역할이 자아인 것입니다. 자아가 혼의 실체입니다.

그러므로 자아는 철저히 자신에 유익이 된다고 여겨는 것은
다 취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도, 사탄의 유혹도 자신에 도움이 된다면
언제나 바꿔가면서 모두를 취하며 살도록 만듭니다.

성령세례 받기 전까지의 신앙생활은 자아 중심 신앙생활이기 때문에
갈등을 많이 겪게 됩니다. 즉, 교회에서는 축복을 받기 위해 말씀을 따르나
세상에 나가면 유익을 취하기 위해 역시 세상풍조를 따르며 살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어떤 힘으로도 처리되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에게서 떠나신 하나님의 영이 오셔서
다스릴 때만 자아는 순종하게 됩니다.
이는 성령님이 오셔서 하시는 2 대역활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거듭남의 역할이요, 또 한가지는 능력세례 역할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연합과 충만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주십니다.

연합은 생명과의 관계이며 충만은 성숙과의 관계입니다.
주님을 구세주로 모시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생명과 연합이 된 사람이자 새사람으로 탄생된 것입니다.
이것은 내적 연합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통하여 혼적의지가
영적 의지로 변화되게 되면 외적 연합이 이루어져 거룩한 자가 되어
주님의 사명을 이루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 사울에서 바울로 변신

이때 자아는 떠나가는 체험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의지는 자아의 영향에서 놓임을 받아 평안 속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모든 형편에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말씀이
완전 자아의 영역에서 벗어난 삶을 가리킨다고 생각이 됩니다.

3. 성경에서는 혼은 어떻게 살아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가?

1) 나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육신의 죄와 욕망은 십자가에 처리된 주님의 속죄사역 한번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갈 5:24)
그러므로 이미 이루어진 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혼의 생명처리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죽을 수가 없어 매일 개선되어 나가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자아는 혼의 하나님을 모릅니다.
내가 거듭나는 것은 내 속에 영이 살아나 성령님이 계신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은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영에 교육을 받고
이제는 자아의 소속에서 벗어나 영의 소속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은 성령님에 의해 구원, 천국, 영생, 부활, 기업, 영광, 후사 등에
대하여 계속 배워 예수님 분량까지 자라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혼이 자아의 그늘에 있을 땐 듣기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영의 영향하에 있을 땐 실천의 영역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2) ‘십자가를 매일 지고 살아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란 나의 삶의 경계선입니다. 즉, 세상 나라에서는 끝이고 하나님
나라에서는 시작인 곳입니다. 십자가를 지나야 짊어지고 살게 됩니다.

십자가 전까지의 삶은 싫고 무거운 것은 질 수가 없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즉, 남을 위해서나 주님을 위해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으로 들어가게 되면
핍박, 모함, 배신, 방해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현상은 장차 받을 상급의 과정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성령님께서는 동행하시며 능력을 주십니다.
십자가의 짐 속에는 성령님의 역사도 함께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희생, 헌신, 봉사, 용서, 베풂, 나눔, 섬김 등, 혼의 의지는 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옮겨지고 난후, 영의 의지는 져야 된다고 말합니다.

성화는 오직 혼을 위한 길입니다.
영생의 삶에 합당한 혼의 생명을 키우는 삶은 오직
성령님에 의해 말씀으로 교육받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혼을 육신의 생명기간까지만 가르치고 인도하십니다.
혼은 육신의 장막을 벗기까지 주님을 본받는 삶을 살도록 부지런히
노력해야 될 부분인 것입니다. 생존보다 변화가 중요할 때입니다.



                                                              


New Zealand / West Side                            Moru




배움의 기회 

/ 계속 배우는 자의 자세 

[눅 2:41-50]





/ By Priscilla 





어린 예수님은 배울 기회가 주어졌을 때, 

확신을 가지고 그 기회를 놓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좇는 우리 역시 계속 적으로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어린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 선생들에게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시며 배움의 기회를 활용하는 모습을 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 역시 그런 자세를 본 받으라고 하십니다. 




세상 적인 방법으로 이해하려 들지말고 주님 안에서 꾸짖지 아니하시고 

후히 모든 지혜를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간구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우리 앞에 진설 해 놓으신 하나님의 잔치에 참예하고 

배설 해 놓으신 음식을 망서리지 말고 성의를 다해 들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스스로 본을 보이셨듟이 날이 갈수록 총명과 지혜가 

뛰어난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요청 하십니다. 

이 때 하나님 앞에 다윗과 같이 마음이 합한 자가 되어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 주님을 만나는 참된 자가 되길 바라십니다.




주님 품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님 안에서 

이 모든 공부에 충실하며 준비된 자가 될 때, 

주님께서는 모든 일에 충만한 은총을 허락 해 주시고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나의 인본적인 생각으로 공부를 하려한다면 

그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계획하시고 훈련시키시기에 힘이 들어도 나의 영혼은 

어떠한 환경을 이겨낼 놀라운 새 힘을 발할 것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요?




1) 배우는 자세를 일생 놓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2)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늘 간구하는 우리가 되어야합니다. 


3) 깊은 묵상을 위해 기도해야할 것입니다. 




기도 




주여! 바쁜 과정 속에서 인생의 원리를 

알게 해 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일평생 배움을 위해 탐구하려는 열심과 수고를 

아끼지 않는 우리 되게 하여 주소서!  



주님이 주신 기회를 놓치지 않는 

부지런한 일군되게 하소서.





2010/03/01



/ By Prisc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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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눅24:13)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그 곁에는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와와 막달라 마리아가
서 있었습니다(요19:25) 이중 글로바는 알패오라는
이름과 동일인이며, 예수님이 제자중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라고 부르는 제자의 아버지 였습니다.

안식후 첫날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실의에 빠진
아내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서북쪽으로
12km 떨어진 엠마오(따뜻한 우믈)라는
그들의 고향으로 내려가는 중이었습니다.

이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과 동행하며 이해의 눈을 열어주시고 난후,
그들에게 육신의 눈을 열어주시어 예수님
자신이 부활하셨음을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그직후 그들은 고향으로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른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이들의 신앙의 여정은 바로 우리들이 따라야할 여정임을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알려주시고자 하십니다.


1. 엠마오로의 여정은 슬픔의 여정이었습니다. (눅24:17)



그들이 정든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가는 데는
더이상 그곳에서 예수님과 함께 지낼수 없다는
그분을 잃은 슬픔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에 목표가 없어져 버렸고 마음속에
소망으로 지녔던 대상이 사라져버리자 허전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을 그들은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같은 상태에 있었던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서 동행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전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왜 그들은 곁에 있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1) 상황이 그들의 앞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시련과 고통을 당하면 그 어려움만을 바라보고
생활하느라 아예 다른 것은 보고 생각할 겨를이 없게 됩니다.
글로바와 아내 마리아도 예수님이 없는 상황에서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사태에 빠지자, 판단과 구별의 능력이
그만 마비가 된 것입니다.

(2) 불신하는 마음이 그들의 눈을 가리웠습니다.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가 전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그리고 또한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전에,
자신이 죽어 장사한지 삼일만에 부활하시리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믿음으로 듣지 않았기 때문에 잊어버리고만 것입니다.  
이처럼 불신은 눈을 멀게 만듭니다.

(3) 무지함이 그들의 눈을 멀게 만들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고난받고 피흘려 돌아가실 것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사53장)
또한 구세주가 나타나심은 이스라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여 주실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마1:21)

그러나 그들은 구세주는 이른바 '나라를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하며
민족을 승리케하여 왕국을 세우는 지도자'로서의 예수님을
오직 기대했습니다. 결국 오판은 현상을 착각하게 만듭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들이 깨닳아야할 점은
그리스도의 임재를 인식하지못한 신앙생활은 슬픔이나
고난등의 상황에 압도당한 삶을 살게되며
마음속에 의심과 불안이 쌓이므로
침체된 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우리의 여정을 슬픔에서 기쁨으로 바꾸워 주십니다.



사람의 마음은 주제의 내용중 슬픔부분에 초점을 맞추면
슬퍼지고 기쁜쪽에 초점을 맞추면 기뻐지게 됩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십자가 사건을 슬픔과
 절망쪽으로 해석을 하여 슬픔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주어진 문제들에 대해,
이해하고 지나가는 눈과, 관찰하고 파악하는 눈을
구별하여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말을 다 들으신후
 첫 말씀이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하신 것이 바로 믿어야할 것은 무관심하고, 지나쳐야될 것이
주의를 기울이고 있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1) 믿어야할 것은 성경 말씀입니다.

구약에서 예수님을 예표한 구절은-출애굽시 유월절 어린양(출12),
광야의 놋뱀(민21),임마누엘(사7), 고난받는 종(사53),
 겸손한 왕(슥9), 등이 자신에 관한 것임을 들려주시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수난' '부활의 영광'
대하여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첫째, 메시야는 고난을 받음으로 구속자가 될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고난과 죽음이 모든 죄의 댓가를 치르는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부활로만 예전의 영광을 되 찾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있기전의 주님의 원래 영광스러운 자리였습니다.
그분이 영광을 되찼았기 때문에 예언의 말씀이 완성된 것이고,
주님 자신이 약속한 구원과 재림과 심판이
확실히 이루워짐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2) 성경말씀이 마음속에 들어오면 마음이 뜨거워 집니다.(눅24:32)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성령의 감동으로 믿음으로 들어올때
가슴이 벅차게 되고 우리를 위해 주님이 고통중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낄땐 큰 감명을 받게 됩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상황과 이성간의 교제를 통하여
세상이 머리속에 슬픔으로 들어왔으나, 부활하신 예수님과
영적교제를 통하여 신앙이 마음속에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그러자 영안이 열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한번만 뵌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이들은 바로 그 기쁨을 체험한 것입니다.


3. 예루살렘으로서의 여정은 기쁨의 여정이었습니다.(눅24:33-34)



인간의 속을 밝혀주는데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식의 빛'이고 또 하나는 '진리의 빛'입니다.

지식의 빛은 과학을 근거로 비추워 주지만,
진리의 빛은 영생을 근거로 비추워 줍니다.

과학이 발견한 법주는 인간의 일생으로는
태양계의 별 까지도 도착할수 없다는
큰 우주만을 알고 있을 뿐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우주보다도 훨씬 높은 곳에 계시며,
먼 거리에 있는 지구상의 모든 일들을 주관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은 때때로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너무 제한하여
과소평가할 때가 많습니다.

과학은 부활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지식은 승천을 이해하지 못홥니다.
더 나아가 인간은 하나님을 도저히 알 수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알려주고, 보여주고,
이 사실을 증명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두 제자가 부활을 믿었음은 진정으로 거듭난 영적인 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영의 맛과 비밀을 안 사람은 더이상
지체하지 않습니다. 또한 더이상 연연하지 않습니다.
이미 관심이 땅에서 하늘쪽으로 옮겨갔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인정은 천국을 향한 실질적인 신앙의
첫 발자국을 내 딛는 것입니다.
밤중에 서둘러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그들의 발걸음은 아마도 날아갈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주님이시지만 영으로는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삶에는 낙심이 있습니다. 의심도,불안도, 체념도 있습니다.
신앙의 중심인 예루살렘(교회)을 떠나 세상쪽으로 갈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같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나타나셨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이같이 영으로 나타나셨음을 알려주십니다.

지식과 이성의 빛으로 밝할수 없는 내 영혼을
진리의 빛으로 밝히어 영안의 눈을 뜨고
믿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다같이 힘쓰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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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아들의 비유2

/재미있는 성경상식3
[누가복음 15장]




 / By Esther





세 번째 비유 잃어버린 아들2


 


앞서 살펴 본 비유들은 잃어버렸던 생명을 도로 찾음으로써

기쁨으로 막을 내리는 반면, 마지막 세 번째 비유는 독특하게 진행됩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어 줍니다.

특별한 날, 또는 귀한 손님을 위해 잡는 살진 송아지가 준비되고

악기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춤을 추며 기뻐하는 대 규모의 잔치.

 



살진 송아지는 귀한 손님 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초대되어 넉넉히 기쁨을 나누는 행사입니다.




풍류와 춤은 가족 외 많은 인원이 모임을 나타내며

이는 가족범위가 아닌 큰 규모의 잔치였음을 알려줍니다.



 

마침,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는 형이 궁금해 하다

자초지정을 알고 무척 화가 나 집에 들어가길 거부하죠.




열심히 아버지를 섬기고 명을 어긴 적도 없었는데

아무것도 주지 않았으면서 이 아들이 돌아오니

위해 송아지를 잡았다고 투덜거립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많은 이들이 봉사, 섬김으로 일하는 가운데

가끔씩 허탈하고 억울하거나 화날 때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있지만 궂은 일은 다 맡아 하는데 피곤하고

 



큰 아들을 본다면 이해도 되고, 화가 날 수 있겠지만

여기서 섬기다의 원어를 살펴본다면

헬라어 <둘류오>는 '종과 같이 섬겼다'  뜻으로

아버지를 섬김보단 그저 상전을 섬기듯 복종했음을 의미합니다.

 


 

, 이렇게 투덜거리며 화가 난 아들에게

아버지께서 슬그머니(?) 등장하여 함께 들어가길 권유합니다.

어디서 오셨을까요?

 



지금은 행사가 한창 진행 중이고 웬만큼 부유한 아저씨라 한다면

비슷한 지위 혹은 높고 부유한 상류층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파티를 주최하여 열었다면 마지막 손님이 떠나는 시간까지

그들과 함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예의일 텐데

손님을 버려두고 아들에게 왔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행동입니다.

 



여기서 갑자기 궁금해 집니다.

왜 큰 아들은 자기 집인데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일까요?

그저 자기 방에 가서 잠을 잔다던지 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죠.




과연 집에 들어갔을 때 어떤 상황에 놓이느냐...

아버지는 주최자, 동생은 주인공

그렇다면 큰 형의 입장은 어떻게 될까요?

 



아버지는 어른 분들 상대로, 동생은 모두가 보이는 곳에서,

결국 형이 행사에 돌아가는 나머지 모든 것을 관장해야 합니다.




재산 탕진하고 빈털터리로 돌아와 다시 아들행세 하겠다는 것도 그렇고

심기가 불편하데 그를 위해 잔치를 진행하다니 생각만 해도 화가 납니다.

 



마침내 분노로  동생을 이 아들이란 말로 표현하는데

별 뜻 없어 보이는 이 호칭은 실은

동생에 대한 멸시와 경멸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형제보다 별개의 존재이며 적대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불평하는 큰 아들 옆에 다가온 아버지.

더군다나 빨리 자리로 돌아가는 것 보다

투덜대는 아들에게 화를 낸다거나 언성을 높이지 않고

계속해서 그를 부드럽게 권면합니다.

 



내 소유가 다 네 소유잖니 말씀 하시며

동생에 대한 ‘이 아들의 호칭을 네 동생이라 정정하십니다.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고 화낼 이유가 없다는 것과

동생도 남이 아닌 누릴 권리가 있는 같은 신분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거죠.

 



할 일이 있음에도 불과하고 모든 것을 떠나 이 중요한 시간에

아들의 투정을 받아주고 계시는 대목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작은 아들이 돌아올 때 그를 위해 달려가 입을 맞춘다던지

큰 아들을 위해 시간을 할애하고 계신다던지

계속 예의에 어긋난 행동만 하시는 아버지.




타인의 시선에 의해 행동하는 것 보다

각각 아들들의 마음 본질과

그들의 내면 깊은 곳까지 마음으로 다가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과연 큰 아들은 어떤 선택을 하였을까요?




정답은,
아버지의 권유를 마지막으로 스토리가 끝나 버리니
그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답 없이 읽는 이로 하여금 답을 내라 한다면

과연 누가 결론을 내야 할까요?

 



예수님 시대 때는 형 입장이었던 바리새인일 수 있겠고,

지금은 성경을 읽는 사람 모두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선 그 시대로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의 크리스챤들에게

2000년 동안 동일한 질문을 하고 계시지만
 우리의 대답은 각각 다를지도 모릅니다.

 



 2009/03/31


/ By Esther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1
/재미있는 성경상식2
[누가복음 15장]





/ By Esther





잃은 아들 (11-32)
'잃어버린 죄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란 주제의 마지막 비유



‘돌아온 탕자’로 잘 알려진 이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땐
다른 무엇보다도 예의 없고, 철 없는 이로 각인되었던 아들이었습니다.


 혼전까지 부모의 보호 아래 있는 한국 문화를 배경으로는 본다면 불효 막심! 이겠지만
 이스라엘, 특히 예수님 시대를 배경으로 일어난 일이라면 이야기는 좀 달라집니다.



이 시대 아버지는 생전 자식들에게 적당한 재산을 선물로 주곤 했으며,
맏아들일 경우 다른 아들들의 두 배를 받도록 되어있었습니다. (신 21:17)



특히, 재산 상속은 아버지 임종이 임박할 때 행해졌으므로
 둘째 아들은 형 몫 이외 나머지인 1/3을 요구했을 것이고
이 것은 이스라엘의 관례와 예의에 어긋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문화는 신용과 믿음이 바탕으로 되어있어
 사회에서 손가락질 받기 시작하면 그 곳에서의 생활이 어려워집니다.



유대와 사마리아인의 관계에서나
'죄의 유무를 가려 공식적으로 돌로 쳐 죽이는 법'을 보면 잘 나타나듯
사람들의 죄인에 대한 반응이 너그럽지 않으며
한번 죄인으로 낙인 찍힌 사람은 그 사회로부터 철저히 고립되게 됩니다.



그럼, 돌아오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반응을 살펴보겠습니다.



멀리서 돌아오는 아들을 발견한 아버지는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목을 안아 입을 맞춤이란 노예가 아닌 동등함을 인정하는 것이고,
제일 좋은 옷은 명예로운 손님에게 주는 그 집의 가장 귀한 예복이며,
반지는 아들의 권위 회복을,
신발은 노예가 아닌 자유인의 신분 회복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 ‘달려가’란 대목입니다.



성화에서 많이 등장하는 긴 예복을 보면
속옷이야 어찌되었든 보통 겉으로는 길게 늘어진 원통 옷이 대부분으로
건조한 땅을 먼지 나게 뛰어다니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니며
(걸리적 거리는 옷을 양손으로 살짝 집어 달릴 수도 있겠고)
어른이 되어 옷을 발목위로 걷어 올려 뛰어다닌다는 것은
팔레스틴 사회에선 굉장히 품위 없는 행동으로 여겨졌습니다.



탕자 아버지처럼 연로하신 분이 뛰어다닌다는 것은
더욱 더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란 말이죠.



이처럼 사회적 지위가 있음에도 달려가 아들을 맞이함엔 많은 의미가 담겨져있습니다.



첫째,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아들을 만나기 위한 것이며



둘째, 입을 맞춤으로써 아들의 죄를 용서하고,
 그의 신분을 인정한다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대인 사회로 볼 때 이 아들은 분명히 손가락질 받을 것이므로
아들이 다른 이들에게로부터 죄인 취급 당하기 전
(앞서 설명했듯이 죄인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습니다)
말보다 행동으로 아버지가 아들을 용서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즉, ‘아들을 치려면 나를 먼저 거쳐라’ 란 뜻이 포함 된 행동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회개하는 자들을 향해 먼저 발견하시고
 달려가 죄를 용서해 주시며 (시 34:18;51:17; 사 66:2),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녀로서의 권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롬 8:15)




2009/02/24

/ By Es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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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은전의 비유

/ 재미있는 성경상식1

[누가복음 15장]



/ By Esther





이 장은 '잃어버린 죄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란 

한 주제 아래 3 가지 비유로 구성되어져 있습니다.




잃은 양 (1-7)
잃은 은전 (8-10)
잃은 아들 (11-32)



누가복음 15장은'돌아온 탕자'의 비유로 유명하지만 특히,

 이곳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잃은 은전'의 비유는

짧은 구절로 부언 설명 없이 각 절마다 이벤트를 가지고 있으며,


은전을 찾는 여인의 절박함이 깔려 있는 것 같은데 

이 것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가 있기에 이 정도로 다급하고 절실한지...

본문만으로 전체적인 문맥 상 큰 감동을 느끼기는 어렵죠.




성경 자체가 이스라엘 문화이기 때문에

 부언 설명 없이 이해하기 어려운 건 당연한 일이며,


이것은 곧 이 시대에 유대인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문화 상식이였을 것입니다.



잃은 은전 (15:8-10)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 하겠느냐  


또 찾은 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로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여기서 잃어버린 동전 '드라크마 (Drachma)'라는 말은
 신약 중 유일하게 이 곳에서만 나오는 헬라 화폐 명칭으로,


당시 한 드라크마는 로마 화폐

 한 데나리온 (Denarins)의 가치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1 데나리온 X 10 = 열흘 품삯

한 달 생활비 생각해서 높게 300만원이라 잡고 열흘이라 치면 1/3,

300만원 x 1/3 = 100만원

그 중 1/10을 잃어버렸으니

 100만원 x 1/10 = 10만원



좀 더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따따블 시키더라도
 10~30만원의 값어치 하는 동전을 잃어버린 후 여인은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았다',
즉, 쉬지않고 온 집안을 샅샅히 뒤져가며 살폈을 것입니다.

 


그렇게나 중요한 물건을 집 안에서 잃어버렸다면
왜, 가족이나 벗의 도움 없이 혼자 고생해가며 찾고 있을까요?



또한, 넉넉한 부자가 아니고서야 대략 10만원,
많게는 30만원 정도의 고가품을 잃어버리고 나몰라~라 하진 않겠지만
내 물건, 내가 찾고나서 기쁨을 이웃과 함께한다는 말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웃 초대 및 대접하면 음료수만 내놓지 않는 이상, 
음식은 기본으로 나올 것이고... 하면

 그 돈이 그 돈이지 남는게 뭐가 있다고 신나서 손님 대접하며 좋아라 할까요?



이 정도의 상황이라면 그 은전의 가치는 그녀에게 있어서 특별히 의미있었을 것이며
 소중하게 여기고 있던 물건이란 뜻인데...
당시, 유대 이스라엘 사회 풍습에는 결혼할 때 남자가 아내를 맞아들이는 '증표'
 가이사의 화상이 새겨진 드라크마 열 닢을 꿰어 머리에 두르게 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드라크마는 낱개보다 열 은전이 한 세트로  
결혼을 기념하며 화폐나 재산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때 여인의 지위는 지금과 다르게 당당하게 자신의 뜻을 전하지 못했으므로
 만약 결혼한 여인, 혹은 결혼을 앞둔 신부가
 사랑하는 사람의 증표 중 하나를 잃어버렸단 것은 굉장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겠죠?




= 잃어버렸다 =
= 의미를 두지 않고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
= 그들의 사랑을 얼마나 값지게 여기는지의 대한 신뢰 져버림 =




한 예로,미래의 신랑이 식 전에 신부를 찾아왔는데
그녀의 머리에 오직 아홉개의 은전이 메달려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완전하지 못한 아홉은 의미를 부여할 수 없으며
곧 은밀한 거절의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동전의 의미가 당연했던 이스라엘 사회에서
만약 내가 사랑하는 이와 결혼을 앞두고 
그 사람 모르게 사랑의 증표를 잃어버렸다면,

 이 일로 인해 헤어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가 날 찾아온다면?
 혹여나 물어보기라도 한다면 어쩌나,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여러가지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그녀의 마음은 얼마나 절박했을까요?



따라서 이 상황은 어떤 이유던간에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만큼
 누구에게도 말 못하는 혼자만의 문제였으며
 잃어버렸던 한 드라크마를 찾았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쁜 일이었겠죠.



이러한 상황을 알고 성경을 읽는다면
'잃은 은전'의 의미가 좀 더 크게 다가오지 않을까요?

       



2009/01/27

/ By Esther








영성

[눅 24:49]



/By Paul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 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눅 24-49)


영성이란 신자 개인이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의하여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갈수 있도록 영력이 함양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능력이 필요한데
이 능력은 인간이 지닌 잠재 능력을 개발함에 의해
힘이라는 물리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첫째, 육체를 개발하면ㅡ건강이 주어지는 활력이 생기게 됩니다.
   둘째, 머리를 개발하면ㅡ지식이 주어지는 지력이 생기게 됩니다.
   셋째, 소유를 개발하면ㅡ물질이 주어지는 재력이 생기게 됩니다.
   네째, 지위를 개발하면ㅡ권세가 주어지는 권력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힘은 땅에 속한 것이며
또한 이 힘 만으로는 인생의 문제를 다 해결 할 수가 없습니다.
(예: 느브갓네살 왕과 바로왕)


그러므로 인생의 문제는 인간의 능력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은 능력이 합하여 질때 비로서
쉽게 풀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 요셉과 다니엘)


이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부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믿음을 소유하여 영력을 얻는 삶을 추구하여야합니다.


1. 영력이란 무엇 일까요?


1) 영력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약속한 선물임을 믿어야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버지 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인 신분을
확실히 인식할때 실현되어지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2) 영력은 에수님 께서만이 내려주시는 능력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 승천을 확신하는 성도에게
주어지는 세레주 에수님의 역활입니다.


3) 영력의 주어짐은 마치 갑옷을 입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임재로 임하시는 분이시지,
소유 되어지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과 육과 혼을 입고 있기 때문에
이 세개의 성향중 가장 강한쪽의 욕구를 따라 살게 됩니다.
 

      (1) 육신의 본능이 강하면ㅡ'본능 주도적'인 삶을 살게 되고
     (2) 지성과 지식이 강하면ㅡ'이성 주도적'인 삶을 살게되고
(3) 영성이 강하면ㅡ'성령 주도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며
우리에게 능력을 덧입을수 있도록 축복을 주시는 세레주 이십니다.


오늘 나의 삶이 힘겨운 삶이 되고 있다면,
바로 이때가 세레주 예수님을 더욱 가까이 모시고 살 때임을
우리는 반드시 깨달아야만 할 것입니다.


2. 영력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1) 거듭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인간에게 임하실 때는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 것은
바로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의 되살아난 영입니다.
그동안 없었던 영의 역할이 시작되면서 성령님은
더욱 그 역할을 활성시켜줍니다.
 

즉 영적으로 느끼고, 분별하고, 계시를 받고 하는 것을 개발시켜줍니다.
또한 하나님께 기도하고 뜻을 이해하고 말씀을 깨닫는데 영감을 주시고 죄를
깨닫고 거룩함을 유지하려는 영의 상태를 투명하게 하여주십니다. 


2) 육은 죽이고 혼은 훈련시켜야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한 육신을 변화시킬 수는 없으시나, 
인간 스스로 육을 극복할 수 있도록 생명력을 주셨습니다. 
그 것이 새 생명입니다.


죄된 부모로부터 죄된 육신이 탄생되었듯이 
거룩한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영의 속사람이 탄생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곁사람은 죽어가는 것이요, 
속사람은 점점 살아아게 하셨습니다.
 

그 것을 겉 사람이 빨리 깨닫고 
욕망과 의지를 내려놓게 하신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을갈 5: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박았느니라.'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영이 수용할 때, 주님의 보혈은 좌와 욕망을 
처리하고 성령님은 자아와 의지를 다스리게 됩니다. 


거듭나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님이 주도하시지만 
육과 혼을 변화시키는 것은 혼이 말씀을 붙들고 성화의 길을
걸음으로 성령님으로 활동의 영역을 넓혀 드릴 때, 가능하게 됩니다.


3) 영의 영역을 넓혀야합니다.


성도가 거듭나고 육과 혼을 훈련시킨다 하여도 
여전히 마귀는 우리를 유혹하고 공격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쓰러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육의 죄는 비밀로 숨겨진 가운데 저지르게하고 
혼의 죄는 합리적으로 드러난 가운데 저지르게 만듭니다.
 

그 것이 숨겨진 탈선이고, 대외적인 명분입니다. 
즉 세상의 제도와 풍습을 나의 영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한 위로로 여겨 동참하게 만듭니다.


진정 하나님을 위한 것인가 아닌가는 
성령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밝혀지게됩니다. 
 즉 주님을 본 받지 못할 때는 영은 명분상 주인일뿐 
실질적인 세력은 믿음으로 가장된 혼과 육입니다.


우리는 이 것을 오직 기도로만 가려낼 수 있숩니다. 
큰 사역을 하면서 기도를 적게 하는 것만큼
 사탄이 좋아하는 것은 없습니다. 


성령님은 사역을 중요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사역을 올바르게 할 수 있는 바른 영혼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반드시 죽는 체험으로 예수님을 내 영혼의 주인으로 
모셔들인 영혼이 되어야 성령님은 활발히 활동하십니다. 


성령님과 영혼이 함께 공존하는 수준이
바로 영성의 수준이 됩니다. 
이는 오직 영화의 수준을 바라보며 성화의 길을 
열심히 걸을 떄, 점점 이루워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영성을 소유하여 능력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008/11/20

/By Pa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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