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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에바다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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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아들의 비유2

/재미있는 성경상식3
[누가복음 15장]




 / By Esther





세 번째 비유 잃어버린 아들2


 


앞서 살펴 본 비유들은 잃어버렸던 생명을 도로 찾음으로써

기쁨으로 막을 내리는 반면, 마지막 세 번째 비유는 독특하게 진행됩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어 줍니다.

특별한 날, 또는 귀한 손님을 위해 잡는 살진 송아지가 준비되고

악기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춤을 추며 기뻐하는 대 규모의 잔치.

 



살진 송아지는 귀한 손님 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초대되어 넉넉히 기쁨을 나누는 행사입니다.




풍류와 춤은 가족 외 많은 인원이 모임을 나타내며

이는 가족범위가 아닌 큰 규모의 잔치였음을 알려줍니다.



 

마침,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는 형이 궁금해 하다

자초지정을 알고 무척 화가 나 집에 들어가길 거부하죠.




열심히 아버지를 섬기고 명을 어긴 적도 없었는데

아무것도 주지 않았으면서 이 아들이 돌아오니

위해 송아지를 잡았다고 투덜거립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많은 이들이 봉사, 섬김으로 일하는 가운데

가끔씩 허탈하고 억울하거나 화날 때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있지만 궂은 일은 다 맡아 하는데 피곤하고

 



큰 아들을 본다면 이해도 되고, 화가 날 수 있겠지만

여기서 섬기다의 원어를 살펴본다면

헬라어 <둘류오>는 '종과 같이 섬겼다'  뜻으로

아버지를 섬김보단 그저 상전을 섬기듯 복종했음을 의미합니다.

 


 

, 이렇게 투덜거리며 화가 난 아들에게

아버지께서 슬그머니(?) 등장하여 함께 들어가길 권유합니다.

어디서 오셨을까요?

 



지금은 행사가 한창 진행 중이고 웬만큼 부유한 아저씨라 한다면

비슷한 지위 혹은 높고 부유한 상류층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파티를 주최하여 열었다면 마지막 손님이 떠나는 시간까지

그들과 함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예의일 텐데

손님을 버려두고 아들에게 왔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행동입니다.

 



여기서 갑자기 궁금해 집니다.

왜 큰 아들은 자기 집인데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일까요?

그저 자기 방에 가서 잠을 잔다던지 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죠.




과연 집에 들어갔을 때 어떤 상황에 놓이느냐...

아버지는 주최자, 동생은 주인공

그렇다면 큰 형의 입장은 어떻게 될까요?

 



아버지는 어른 분들 상대로, 동생은 모두가 보이는 곳에서,

결국 형이 행사에 돌아가는 나머지 모든 것을 관장해야 합니다.




재산 탕진하고 빈털터리로 돌아와 다시 아들행세 하겠다는 것도 그렇고

심기가 불편하데 그를 위해 잔치를 진행하다니 생각만 해도 화가 납니다.

 



마침내 분노로  동생을 이 아들이란 말로 표현하는데

별 뜻 없어 보이는 이 호칭은 실은

동생에 대한 멸시와 경멸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형제보다 별개의 존재이며 적대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불평하는 큰 아들 옆에 다가온 아버지.

더군다나 빨리 자리로 돌아가는 것 보다

투덜대는 아들에게 화를 낸다거나 언성을 높이지 않고

계속해서 그를 부드럽게 권면합니다.

 



내 소유가 다 네 소유잖니 말씀 하시며

동생에 대한 ‘이 아들의 호칭을 네 동생이라 정정하십니다.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고 화낼 이유가 없다는 것과

동생도 남이 아닌 누릴 권리가 있는 같은 신분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거죠.

 



할 일이 있음에도 불과하고 모든 것을 떠나 이 중요한 시간에

아들의 투정을 받아주고 계시는 대목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작은 아들이 돌아올 때 그를 위해 달려가 입을 맞춘다던지

큰 아들을 위해 시간을 할애하고 계신다던지

계속 예의에 어긋난 행동만 하시는 아버지.




타인의 시선에 의해 행동하는 것 보다

각각 아들들의 마음 본질과

그들의 내면 깊은 곳까지 마음으로 다가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과연 큰 아들은 어떤 선택을 하였을까요?




정답은,
아버지의 권유를 마지막으로 스토리가 끝나 버리니
그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답 없이 읽는 이로 하여금 답을 내라 한다면

과연 누가 결론을 내야 할까요?

 



예수님 시대 때는 형 입장이었던 바리새인일 수 있겠고,

지금은 성경을 읽는 사람 모두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선 그 시대로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의 크리스챤들에게

2000년 동안 동일한 질문을 하고 계시지만
 우리의 대답은 각각 다를지도 모릅니다.

 



 2009/03/31


/ By Esther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1
/재미있는 성경상식2
[누가복음 15장]





/ By Esther





잃은 아들 (11-32)
'잃어버린 죄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란 주제의 마지막 비유



‘돌아온 탕자’로 잘 알려진 이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땐
다른 무엇보다도 예의 없고, 철 없는 이로 각인되었던 아들이었습니다.


 혼전까지 부모의 보호 아래 있는 한국 문화를 배경으로는 본다면 불효 막심! 이겠지만
 이스라엘, 특히 예수님 시대를 배경으로 일어난 일이라면 이야기는 좀 달라집니다.



이 시대 아버지는 생전 자식들에게 적당한 재산을 선물로 주곤 했으며,
맏아들일 경우 다른 아들들의 두 배를 받도록 되어있었습니다. (신 21:17)



특히, 재산 상속은 아버지 임종이 임박할 때 행해졌으므로
 둘째 아들은 형 몫 이외 나머지인 1/3을 요구했을 것이고
이 것은 이스라엘의 관례와 예의에 어긋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문화는 신용과 믿음이 바탕으로 되어있어
 사회에서 손가락질 받기 시작하면 그 곳에서의 생활이 어려워집니다.



유대와 사마리아인의 관계에서나
'죄의 유무를 가려 공식적으로 돌로 쳐 죽이는 법'을 보면 잘 나타나듯
사람들의 죄인에 대한 반응이 너그럽지 않으며
한번 죄인으로 낙인 찍힌 사람은 그 사회로부터 철저히 고립되게 됩니다.



그럼, 돌아오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반응을 살펴보겠습니다.



멀리서 돌아오는 아들을 발견한 아버지는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목을 안아 입을 맞춤이란 노예가 아닌 동등함을 인정하는 것이고,
제일 좋은 옷은 명예로운 손님에게 주는 그 집의 가장 귀한 예복이며,
반지는 아들의 권위 회복을,
신발은 노예가 아닌 자유인의 신분 회복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 ‘달려가’란 대목입니다.



성화에서 많이 등장하는 긴 예복을 보면
속옷이야 어찌되었든 보통 겉으로는 길게 늘어진 원통 옷이 대부분으로
건조한 땅을 먼지 나게 뛰어다니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니며
(걸리적 거리는 옷을 양손으로 살짝 집어 달릴 수도 있겠고)
어른이 되어 옷을 발목위로 걷어 올려 뛰어다닌다는 것은
팔레스틴 사회에선 굉장히 품위 없는 행동으로 여겨졌습니다.



탕자 아버지처럼 연로하신 분이 뛰어다닌다는 것은
더욱 더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란 말이죠.



이처럼 사회적 지위가 있음에도 달려가 아들을 맞이함엔 많은 의미가 담겨져있습니다.



첫째,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아들을 만나기 위한 것이며



둘째, 입을 맞춤으로써 아들의 죄를 용서하고,
 그의 신분을 인정한다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대인 사회로 볼 때 이 아들은 분명히 손가락질 받을 것이므로
아들이 다른 이들에게로부터 죄인 취급 당하기 전
(앞서 설명했듯이 죄인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습니다)
말보다 행동으로 아버지가 아들을 용서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즉, ‘아들을 치려면 나를 먼저 거쳐라’ 란 뜻이 포함 된 행동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회개하는 자들을 향해 먼저 발견하시고
 달려가 죄를 용서해 주시며 (시 34:18;51:17; 사 66:2),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녀로서의 권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롬 8:15)




2009/02/24

/ By Es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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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은전의 비유

/ 재미있는 성경상식1

[누가복음 15장]



/ By Esther





이 장은 '잃어버린 죄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란 

한 주제 아래 3 가지 비유로 구성되어져 있습니다.




잃은 양 (1-7)
잃은 은전 (8-10)
잃은 아들 (11-32)



누가복음 15장은'돌아온 탕자'의 비유로 유명하지만 특히,

 이곳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잃은 은전'의 비유는

짧은 구절로 부언 설명 없이 각 절마다 이벤트를 가지고 있으며,


은전을 찾는 여인의 절박함이 깔려 있는 것 같은데 

이 것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가 있기에 이 정도로 다급하고 절실한지...

본문만으로 전체적인 문맥 상 큰 감동을 느끼기는 어렵죠.




성경 자체가 이스라엘 문화이기 때문에

 부언 설명 없이 이해하기 어려운 건 당연한 일이며,


이것은 곧 이 시대에 유대인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문화 상식이였을 것입니다.



잃은 은전 (15:8-10)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 하겠느냐  


또 찾은 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로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여기서 잃어버린 동전 '드라크마 (Drachma)'라는 말은
 신약 중 유일하게 이 곳에서만 나오는 헬라 화폐 명칭으로,


당시 한 드라크마는 로마 화폐

 한 데나리온 (Denarins)의 가치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1 데나리온 X 10 = 열흘 품삯

한 달 생활비 생각해서 높게 300만원이라 잡고 열흘이라 치면 1/3,

300만원 x 1/3 = 100만원

그 중 1/10을 잃어버렸으니

 100만원 x 1/10 = 10만원



좀 더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따따블 시키더라도
 10~30만원의 값어치 하는 동전을 잃어버린 후 여인은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았다',
즉, 쉬지않고 온 집안을 샅샅히 뒤져가며 살폈을 것입니다.

 


그렇게나 중요한 물건을 집 안에서 잃어버렸다면
왜, 가족이나 벗의 도움 없이 혼자 고생해가며 찾고 있을까요?



또한, 넉넉한 부자가 아니고서야 대략 10만원,
많게는 30만원 정도의 고가품을 잃어버리고 나몰라~라 하진 않겠지만
내 물건, 내가 찾고나서 기쁨을 이웃과 함께한다는 말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웃 초대 및 대접하면 음료수만 내놓지 않는 이상, 
음식은 기본으로 나올 것이고... 하면

 그 돈이 그 돈이지 남는게 뭐가 있다고 신나서 손님 대접하며 좋아라 할까요?



이 정도의 상황이라면 그 은전의 가치는 그녀에게 있어서 특별히 의미있었을 것이며
 소중하게 여기고 있던 물건이란 뜻인데...
당시, 유대 이스라엘 사회 풍습에는 결혼할 때 남자가 아내를 맞아들이는 '증표'
 가이사의 화상이 새겨진 드라크마 열 닢을 꿰어 머리에 두르게 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드라크마는 낱개보다 열 은전이 한 세트로  
결혼을 기념하며 화폐나 재산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때 여인의 지위는 지금과 다르게 당당하게 자신의 뜻을 전하지 못했으므로
 만약 결혼한 여인, 혹은 결혼을 앞둔 신부가
 사랑하는 사람의 증표 중 하나를 잃어버렸단 것은 굉장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겠죠?




= 잃어버렸다 =
= 의미를 두지 않고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
= 그들의 사랑을 얼마나 값지게 여기는지의 대한 신뢰 져버림 =




한 예로,미래의 신랑이 식 전에 신부를 찾아왔는데
그녀의 머리에 오직 아홉개의 은전이 메달려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완전하지 못한 아홉은 의미를 부여할 수 없으며
곧 은밀한 거절의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동전의 의미가 당연했던 이스라엘 사회에서
만약 내가 사랑하는 이와 결혼을 앞두고 
그 사람 모르게 사랑의 증표를 잃어버렸다면,

 이 일로 인해 헤어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가 날 찾아온다면?
 혹여나 물어보기라도 한다면 어쩌나,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여러가지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그녀의 마음은 얼마나 절박했을까요?



따라서 이 상황은 어떤 이유던간에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만큼
 누구에게도 말 못하는 혼자만의 문제였으며
 잃어버렸던 한 드라크마를 찾았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쁜 일이었겠죠.



이러한 상황을 알고 성경을 읽는다면
'잃은 은전'의 의미가 좀 더 크게 다가오지 않을까요?

       



2009/01/27

/ By Es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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