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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에바다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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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기도
(롬 8: 26-27)

 

하나님은 우리가 거듭 태어날때 기뻐하시지만, 정작 예뻐하시는 때는
자녀된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며 아버지께 기도할 때 입니다.
자녀된 우리들이 기도의 응답을 받으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고
감사드리는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기도를 올바르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1.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두가지 통로를 사용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1) 예수님을 통하여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어느날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기도와 주님의 기도가 응답면에서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방법과 내용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즉, 하나님과 나에 대한 관계를 깨닫고, 영광과 존귀를 올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워지기를 소원하고 나의 필요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회개하며 대적의 세력으로부터 지켜주시며 승리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순서로 하는 것이 올바른 기도라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2) 성령님을 통하여 기도하는 자세에 대하여 알려주십니다.

기도의 방법과 내용을 주기도문을 본받아 할지라도 대부분 실제로
기도행활에선 응답을 체험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 문제를 사도바울은 엡 6:18에서
"모든 기도와 간구로하되 무시로 성령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에는 성령안에서의 기도와 육체안에서의 기도가
있음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3)고 하였습니다.

육체와 정욕은 자아가 주인으로 있을 때 강하게 욕구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럴때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 보다는 내뜻의 주장과 요구가 기준이 되며
응답은 더욱 큰 욕구를 유발시키게 됩니다. (예: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그러나 거듭나 성령님이 나의 주인이 되시어 드려지는 기도는 욕심을 실은
기도보다는 마음을 실은 기도가 나오게 됩니다. 나의 사역에서 주님의
사역으로, 앞선 사역에서 인도를 받는 사역으로 기도의 내용이 변해지게 됩니다.

성령안에서의 기도가 거듭난 마음에서의 기도라면, 성령이 주관하시는 삶은
깨어있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깨우는 영이요, 육신은 잠을 자게 만드는
무거운 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들은 제자들을 보시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하신 것은 아직은
성령주도형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육신주도형 삶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이 내주하신 삶에는 유혹과 시험에 빠지지 않으며,
가장 중요한 순간인 예수님 재림하실 때에 제일 먼저
주님을 뵈올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기도하는 것은
 영적으로 상황을 잘 파악한 경우 드려지는 기도가 됩니다.

2. 이와 같은 자세로 기도할 때 성령님은 두가지 면에서 간섭을 하시게 됩니다.

(1) 기도의 실감이라는 영역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기도할 때 우리가 스스로 깨어있는 마음 속에 기도가 되지 않는
영역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회개의 영역이고, 또 하나는 체감의 영역입니다.
회개가 깊이 되지 않는 이유는 이성이 강하여 지성에 의한 회개만 나오기
때문이며 이때에는 행위에 대한 죄만 대부분 기억했던 것이 회개로 나나타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영혼에 감동을 주시면 행위 죄보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멋대로 산 교만죄가 더 크게 깨우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은 죄가 고백될 때 통회자복이 나오게 되며
그때가 지나야 용서함의 확신이 오게됩니다.

 또한 기도의 간절함이 실리지 않는 이유는 경험이 없음으로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기도에는 진정한 감사기 드려지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우리를 때때로 경험의 영역으로 몰아넣으십니다.
예를들면 질병, 사고, 배신, 파산, 고난, 등 이 과정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왜 그분께 간절히 기도를 해야하는 지를 알게
해 주는 도구들입니다. 경험을 하고나면 체감도가 높아지게 됩니다.

관계에서 서로 중요한 것은 공감입니다.
공감이 없이는 깊이도, 친밀도 이루워지기 어렵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나님과 깊은 공감을 갖게 하여주시며, 그 교류가 바로
성령안에서의 기도로 나타나게 하십니다.

(2) 이 과정을 지나고 나면 기도의 표혐의 영역에서 도와주십니다.

즉, 기도할 때는 우리가 사용하는 표현과 하나님께서 듣기를 원하시는
내용은 맞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예: 한나)

한나는, 무자함의 서러움을 기도하다 너무 지켜 중얼거림으로
엘리 제사장은 그녀가 취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토록 원통함이 기도를 드렸어도 응답을 받지 못한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즉,
'아이를 여호와께 드리고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않겠나이다.'


그래서 바울은 '롬 8:27''마음을 감찰 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 이니라'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그분의 계획을 이루기 원하는 소원의 기도를 듣기를 기다리십니다.
 그것이 나에게 맡기시는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사명적인
삶보다는, 생활적인 삶에서만 그치려는 신앙생활을 더 선호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깨달음과 계시로 우리들을 사명적으로 탄생하도록
도우시고 그일을 위하여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할 지를 알려주십니다.
(예: 사도바울 ' 가시 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 26:14)

3. 기도생활을 통한 성령님의 역사하심

성령님의 기도의 내적사역이 친밀관계의 사역이라면, 기도의 외적 사역은
동역관계의 사역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어 주신 것은 이 땅에 주님의 사역을 완성시키기 위함이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목표나 목적만을 계시하시고 과정, 시기, 순서 등은 세부적으로
말씀 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에 이길은 철저히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고만 갈 수 밖에
없습니다. 특별히 성령님은 세가지 면에서 도와주십니다.

(1) 하나님의 예비하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주님의 사역은 거의 인간의 판단과 파악과는 거리가 멀 때가 많습니다.
마치 바울을 로마로 후송하는 알렉산드리아호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고
행하다 '유라굴로 태풍'을 만나 고생하듯이 사역도 항해와 같아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매우 중요합니다. 기도는 성령님의 등대 빛을 발견하게 해 줍니다.

(2) 영적상황을 알게하여 주십니다.

사역자일수록 마귀의 공격대상이 되기 때문에 유혹, 부정, 욕망, 등에
쉽게 빠지기 쉽습니다. 대개 꿈을 통하여 대적의 정체나 현재와 미래의
영적위기상황을 계시하심으로 대처하게 해 주십니다. 영분별에 대한 은사를
베풀어 주심은 영적전투의 기도를 많이 올릴 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3)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도움을 주십니다.

말씀과 사역에 능력이 실리느냐, 아니냐는 전적으로 성령님의 개입
여하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실 때와, 12제자들과 사도바울이
성경말씀을 전하였을 때와, 오늘날 교회에서 같은 말씀을 전할 때와
말씀은 같아도 역사는 다르게 나타납니다. 마치 도끼날이 빠진 자루만
휘두르는 격이 되었습니다. 물속에 있는 도끼날을 찾아 말씀인 도끼자루에 끼고,
휘둘러야 심령이 쪼개지고 어두움의 세력이 쫓겨갈텐데, 성령의 도끼날이
어디에 빠져 있는지 도무지 찾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엘리사는 나무가지를 던졌고, 도끼날은 물속에서 떠올랐으며
도끼임자는 찾아 자루에 끼워 나무를 베었습니다.
도끼를 떠오르게 한 나무, 즉 오늘날 세상에 던져진 십자가는
유일한 성령님의 처소를 불러 올리는 길입니다.

십자가만 붙들고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 놓을 때
성령의 도끼는 우리에게로 나타날 것입니다.
십자가의 기도는 증인이 되기 위한 기도입니다.

성령님이 이 기도를 받으시면 권능으로 임하실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가장 중요한 두단어 권능과 증인은
바로 성령과 십자가 기도로 대변되어질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모두 성령안에 깨어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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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교회
(계 2:7)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은 각기 시대마다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시고 인간과 함께
하셨는데 성부께서는 시내산에 하강하시어 이스라엘 성막 지성소에 임하셨고,
성자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셨으며,
성령께서는 오순절날 임하시어 교회안에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지상사명의 완성은 예수님 공중 재림하실 때 성령님이
교회와 함께 들림받아 떠나심으로 이루워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이 오시는 시기와 증거를 자신이
떠날 때에 임해 성령님이 권능으로 임하신다라고 하셨고
그리고나면 너희가 내 중인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임재에는 두가지 특징이 나타나게 되는데
사도행전에 중심이 된 단어인 '권능과 증인' 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성령님은 교회와 3가지 면에서 관계가 깊으시다는 말씀입니다.


1. 교회는 성령님에 의해서 탄생 되어지며 또한 들림 받습니다. (존속면에서)



(1) 성령님은 교회를 세우십니다.


예수님 승천후 120명이 함께 모여 오순절이 되기까지 10일간 열심히
금식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충만한 강림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방언하며 찬양하고 능력의 충만함을 덧입자,
베드로가 일어나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이때 첫날에 회개하고 돌아온 백성이 삼천명이었고 두번째 설교에서
오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곧 이들은 사도들의
제자들이 되었고 이 모임은 예루살렘 교회로 구성이 되어 가르침과
교회와 기도와 하나님을 찬미함이 그치지가 않았습니다.

이로써 성령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교회는 성령의 권능이 임하시는 영적유기체인
신적기관이면서 인간이 역할을 담당하는 인적사역 조직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령의 임재하심을 온전히 모실 때,
하나님뜻에 따라 권능으로 사용되어질 수가 있습니다.

(2) 성령님은 교회들을 들려 올리십니다.

성령님이 이 땅에 오셔서 교회의 사역을 다 끝내실 즈음에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입니다.예수님은 공중재림과 지상재림 두번으로 임하시는데,
교회와 성도는 공중재림 하실 때 하늘로 들림받아 이 지상에서 떠나게 됩니다.
이의 근거는 교회의 두가지 의식과 관계가 되어 있음을 볼수 있습니다.
   
1) 세례: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이처럼 세례는 세상끝날 예수님이 이땅에
오실 때까지 진행되는 예식입니다.

2) 성찬: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
 
성찬도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까지 지켜지는 성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공중재림 하시면 성도들은 휴거 됨으로 세례와
성찬의 성례전이 그쳐지고 교회는 역할을 다 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전서에 보면 2: 6-7절에
'불법한 자 적 그리스도가 출현할 때에, 그것을 막고있었던
성령님이 옮겨가신다' 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오순절날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시작되었고 성령에 의해서
존속되어지고있다가 예수님 재림하여 오실땐 이 땅에서 떠나시며
교회성도들도 모두 하늘로 옮겨가게 됩니다.


2. 교회는 성령님에 의해서 다스려 집니다. (운영면에서)



성령님은 불신자를 거듭나게 하시고 거듭난 신자를 은사를 나누워주어
서로 능력이 다른 일꾼이 되어 주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완전한 교회로 세워가십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엡 4:11-12)

(1) 성령님은 성도를 온전케 하심으로 교회를 세워 나가십니다.

성도가 온전하여 질 수있는 것은 성령의 열매를 통하여 이루워 질 수 있습니다.
교회는 각 지체가 모여 조화를 이룰 때에 제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교회의 참된 모습은 무엇일까요?

1) 예배의 아름다운 모습 입니다.  2) 성도의 사랑의 교제 모습 입니다.
3) 세상에 선한 일을 하는 모습 입니다. (엡 2:10)

하나님이 가장 영광을 받으시는 순간은 교회의 예배를 통해서이며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하나님 가족이 서로 친밀하게 지내는 것이고,
가장 만족하시는 것은 성도들이 세상에 구제와 사랑을 베푸는 일입니다.

가정이 화평을 통하여 기쁨을 느끼듯, 하나님 가정도 사랑을 통하여 기쁨을
나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위하여 성령님은 인간의 성품중
한 가지를 쓰시어 열매를 맺게 하심으로 서로 조화를 이루워
주님의 성품을 교회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하십니다.

(2) 성령님은 성도를 봉사케 하심으로 교회를 든든히 세워 나가십니다.

교회가 조화가 잘 이루워지면 활발하게 자라나게 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은사입니다. 은사는 능력이자 힘입니다.
영적인 일을 수행하는데는 신적 능력이 있을 때 가능할 수 있습니다.
각 지체마다 다른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1) 사도는 우리몸에 골격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초대교회에서는
12사도들이 골격이며 교회에서는 교회 설립자와 당회원들이 골격들입니다.   

2) 선지자는 몸의 신경계통과 같으며 말씀을 온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로 예언자로서, 영분별 등 특수한 영적계시나 하나님의 뜻을  
대언자로서 교회에 전달하는 자입니다.

3) 목사와 교사는 몸의 순환기관과 같은 역할로 소화된 영양분을
각 마다마디마다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로 말씀으로
늘 각 부서마다 운영케함으로 제대로 가능하게 만드는 자들입니다.

4) 봉사자들은 온 몸의 각 지체들로 살 부분에 해당됩니다.
눈, 코, 입, 귀, 팔 다리, 허리 등 모두 각자의 기능이 중요합니다.
이들은 바로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그 교회를 운영하시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조화냐, 불화냐? 권능이 있느냐, 무능하냐?가 나타나게 됩니다.


3. 교회는 성령님에 의해서 사명을 완수합니다. (성취면에서)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의 탄생은 특별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사역이 주워진 교회들 입니다. 즉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들의 전도를 위하여,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 선교를 위하여 성령님이 세우셨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 13:2-3)

성령님은 바울의 선교여행을 인도하셨고 소아시아 지방에서
마게도니아로 가도록 환상으로 일러 주셨고(행 16: 6-7)
바울을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호송하셨습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소아시아 일곱교회에 책망과 칭찬과,
깨어있어 교회가 해야할 일들을 사도요한에세 지시하셨고
오늘날에도 각 교회가 담당해야할 지역별, 나라별, 민족별,
사명을 계시하시고 교회를 사용하시고 사명자 일꾼들의
동역자가 되시어 주님의 사역을 완성시켜 나가십니다.

교회가 힘이 생길 때는 선교와 전도가 활발할 때입니다.
교회의 마지막 목적은 바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이일을 완수 하시면 지상사역을 끝으로
교회와 함께 들려올라가십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요,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신 것과 같이
성령님은 교회의 생명이시요, 교회는 성령님을 모시는 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이 있으되 생명으로 오신 성령님을 모시고 교회가
순종할 때에 주님의 지상 명령을 완수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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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그리스도인

(롬 8:9)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의 여행을 두가지 방향에서 하며 살고 있습니다.
  첫째, 외부로 향하는 여행- 자신의 생존과 만족을 얻기 위하여 세상과
사람들과 사물들과의 관게를 좋게 맺으려는 삶을 말합니다.

둘째, 내면으로 향하는 여행- 평안과 자유함을 얻기 위하여 정신의
셰계로 심취하는 삶입니다.
 
오늘날 인간의 불행은 시회구조상 삶의 균형이 깨어진 상태에서
살기 때문에 오게 됩니다. 바쁜 삶은 내면의 세계에 대하여 방치하도록
내버려두게 함으로 영혼은 메마르고 삶은 건조해 지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삶의 균형을 영혼이 중심이 되어 하는 일들이
보람되고 건강한 삶을 살도록 알려 주십니다. (요삼 :2)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와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 이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성령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정립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들은 대개 한사람을 정의 할 때에 그 사람의 소속이나 신분, 또는
그밖에 하는 일 등을 살펴봄으로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을 생각할 때에도 이와 마찬가지로 그가
속해 있는 곳이 어디냐에 따라 그 신분도 일도 정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요?

 1. 그리스도인은 성령에 속해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롬 8:9)
 
여기에서 영에 있다는 말은 새로운 영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예전엔 육신의 영역에서 살고 있었으나, 이제는 어느덧
영의 영역에서 사는 사람이 되었음을 말합니다.

인간의 구조는 영과 혼과 육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사람의 영은
하나님께로서 나왔고, 혼은 하나님의 생명의 영이
육신에 닿았을 때, 생겨난 정신인 자의식 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 2:7)

그러므로 영의 영역은 - 하나님과 연결되는 부분이고,
육은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것과 연결되는 부분이고
혼은 영과 육의 중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영이 주어진 것을
몸에 전달하여 신령한 영체가 되도록 선도해 가는 수단 이었습니다.

자유의지를 지닌 하와는 어느날 말씀과 물질의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어떤 쪽을 선택하느냐가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가 되는 것입니다.

'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창 6:3)

불행하게도 물질을 선택한 하와는 육에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가 없어진 영은 폐쇄가 되게 되었고,
혼의 주인으로는 자아가, 육의 지배자로는 욕망이 들어차게 된 것입니다.

물질의 세계는 영의 원리로만 다스릴수 있게 하셨는데 인간은 영에서
육의 차원으로 전락되자 그만 물질 세계에 속한 자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물질과 육에 속한 바로 나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다시 새로운 영의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 나 대신 심판을 그분이
먼저 받으심으로 새로운 탄생의 기회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이 구원의 도리를 성령님이 적용시켜 주실 때 우리들은
영적으로 다시 거듭 태어나게 됩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바로 이 말씀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서,
그 영에 속해 교제하는 성령님의 지시에 따라 사는 사람이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 중거가 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하신 것입니다.
이는 바로 어디에 속해있느냐는 이른바 소속이 그렇게 만들어준 것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영자의 영을 받았음으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4-15)

2.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주와 합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 6:17)

연합에는 육신의 연합(남.여의 경우)도 있고,
혼의 연합(동지의 경우)도 있고,
영의 연합이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연합이란 부활하신 예수님께 주인의 자리를 내어준 사람으로
이는 자신의 자아와 싸워서 그 자리에 주님을 모신 것을 의미하며 육신의
욕망과 싸워서 자신의 몸을 주님이 다스리도록 맡긴 사람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연합도 혼의 연합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안만 유지됩니다.
그러나 영의 연합이란 영원한 세계까지의 연합이 지속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과의 관계를 이 세상에 사는 동안만 국한 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영생의 관계를 위하여 영의 연합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세상에는 예수님과 비슷한 행실을 하고 산 사람이 많습니다.
예컨대 홀몸으로 선을 추구하고, 악을 멀리하며 행실을 바르게 하고
깨우침을 받고 살려고 노력하는 수도승 들이나, 타 종교의 위대한
인물들은 이와같은 행실을 보여준 사람들 입니다. 그러나
이런 류의 사람들은 예수님과 연합을 이룬 것은 아닙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산 사람들도 많습니다.
인도의 간디 수상은 무저항주의, 평화주의 자였으며
성경도 많이 읽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놀랍게도
말하기를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힌두교인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았지만,
결국 그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로 거룩, 경건, 선행, 사랑, 평화를 행하며 살고
있을지라도 자신안에 에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지 않을 경우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그리스도인이 아닐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을 '예수님의 신부'로 말하고 있습니다.(계 19:7)
결혼이란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하며 다른 사람과는 연합을
이룰수 없는 신분임을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친구사이요,
좋아하는 사이로 지내면서 세상과 연합하여 살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연합인 삶에는 성령님이 다른 것으로는 끼어들수
없도록 완전히 하나가 되게 묶어 주십니다. 이와같은 연합이 하늘나라에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신부의 자격을 얻고 살게 하는 길입니다.


3.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들과의 다른 점은 영적인 안목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에게는 예비되어진 축복과 은혜가
놓여있습니다. 성령님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찾도록 인도하여 주시는 역할을 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보이는 것에만 연연하여 세상에 속해
사는 삶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 기대하며 감사하고 살때에
성령님은 때가 되어 한가지씩 찾아 예비하심을 맡게 하여 주십니다.

(예: 요셉이 애굽총리가 되도록 인도하셨고,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되도록 인도하셨고, 사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인도하셨음)

우리가 성령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사는 증거는 바로 사명적인
 삶을 살도록 하신 것이 됩니다. 목적지가 천국이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삶은 결과적으로 천국에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혼과 육의 인도는 세상의 구경거리를 안내하는 것으로
그치고 말기 때문에 굳이 천국의 일을 위해서는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명적인 삶만이 하늘에서의 상급을 받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기업을 우리에게 유업으로 주시기 원하십니다.
이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의길로 인도하여 주셨으며, 성령님은 구원받은
우리들을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그분은 예수님을 닮은 후사가 되기까지 연단과 훈련을 시키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도와주시는 좋은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순종으로 성령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삶을 살 때에, 그로부터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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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부터난 지혜
(약 3:17)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만물을 다스리도록 창조하신
후에 그들과 구별하여 주신 능력이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지식으로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아는 능력입니다.
같은 눈과 머리를 가졌어도 동물은 인간을 모르나 인간은 그들을 알수
있습니다. 아는 것이 모르는 것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이해로 사리를 분별하고 상황을 해석할 수 있는 힘입니다.
사건 전말을 잘 파악하는 사람을 보고 이해가 빠르다하며
책임있는 큰일을 맡을수 있습니다.

셋째는, 지혜로 이는 사건의 내용과 그 의미를 알 뿐만 아니라 그들을
실질적인 생활에 적용하여 좋은 결과를 이루워 내는 능력을 말합니다.
지식도 이해도 지혜도 모두 중요하나, 성경에서는 지혜를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헤의 근본이라'(시 111:10)

1. 지혜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말하는 지혜에는 '예스터하톱''예스터하라'라는
비슷한 두 히브리어가 있는데 이 둘을 구분하여 사용한다고 합니다.
'에스터하톱'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말하고
'예스터하라'는 세상에서 오는 지혜로 어두움의 세력이 주는
지혜를 말한다고 합나다. 이 두가지중 어떤 쪽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존경받는 인물로도, 경멸받는 인물로도 구분되어 집니다.

(예: 아브라함 링컨과, 독재자 히틀러)

1) 바른 지혜는 결과가 선행으로 나타납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속성중의 하나이며 그리스도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받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선행의 삶을 위하여 주어지는 은사입니다.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모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욥12: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찌니라'(약 3:13)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주시나니'(고전 12:8)

요셉, 다윗, 다니엘이 지혜로운 사람인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따라 살았기 때문에  원수도 용서하고 대적도 먹이며 하나님이
세상에 있게 하신 것들 모두를 사랑으로 선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2) 거짓 지혜는 시기와 다툼을 일으킵니다.

시기는 마귀의 속성중에 하나이며 잘못된 열심으로
다툼과 분열을 일으켜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약 3:14-16)  

'사울왕, 하만, 다니엘을 모략한 총리들도' 다 머리가
좋은 지혜로운 사람들 이었으나 지혜의 동기가 이기적
욕심적인 것에서 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나만을 위하여
남들을 희생 시키려는 마음으로 행하려다가 도리어
자신이 불행을 겪는 결과를 맺게 되었습니다.

2. 거짓 지혜의 출처는 세가지 입니다.

1) 거짓 지혜는 세상으로부터 옵니다.

세상적이란, 목적이 세상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로 방법과 수단이
세속적이며 물질적 가치관을 위주로 한 지혜를 말합니다.
이는 관심도, 헌신도, 성공도, 오직 세상에서만 이루고 달성하려는
생각을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즉, 영적인
세계와는 전혀 무관한 세상중심적인 삶을 사는 지배자들을 말합니다.

(예: 부와 권세를 누리던 바로왕, 출세만을 좇았던 사울왕의 신하 도엑)

2) 거짓 지혜는 정욕적인 것에서부터 옵니다.

(1) 정욕적인 것이란 - 영적인 것과 반대되는 육신의 쾌락과 안위를 추구하는
성령이 없는 인간의 죄성인 모습을 말하며 육신의 열매를 맺는 삶을 말합니다.

(2) 음란, 퇴폐문화가 발달하는 것은 - 인간 본성의 정욕적인 지혜로 심리를
잘 파악하고 있는 데서 나오는 산물입니다.

3) 거짓 지혜는 사탄 마귀로 부터 옵니다.

(1) 마귀적이란 - 하나님을 부인하고 배반하며 서로 죽이고
멸망시키는 지혜를 말합니다. 오늘날 진화론이 합리적이고
인기가 있는 것은 바로 마귀적 지혜에 넘어간 것입니다.

(2) 과학자들의 공로 - 인류사회에 많은 유익을 가져
왔을찌라도 마귀적 지혜를 따르는 자들이 되면
그 지혜와 지식은 멸망을 가져오게 만듭니다.
(전쟁무기, 살상균,환경오엽 등)

그러므로 그 사람의 말이 그럴듯 하고 이치에 맞으나, 그 결과와
주변에 혼란과 분열이 있으면 거짓 지혜입니다. 고로 혀를 보고
따라가지말고 열매를 보고 따라가야 속지않습니다.

3. 참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지혜입니다.(약 3:17)

1) 위로부터란 말은 하나님께로부터라는 말로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분히 거할 때 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과 자유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2) 인간은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데 충분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지 못합니다. 오직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것이
나에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직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을 내 안에 모셨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분만이
성령의 충만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안에 있을 때
나타나는 '거룩한 지혜의 특성은 다음의 7가지' 입니다.

(1) 성결 - 성령님은 우리에게 두가지 성결의 작업을 실시하십니다.

첫째는, '사고의 성결'로 부정하고 죄된 생각을 버리고 주님을 닮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둘째는, '행위의 성결'을 말하며 인간에게는 자신을 욕되게 하는 나쁜 습관들이 있습니다.
(게으름, 음주, 흡연, 도박, 음란, 탐식 등을 성령의 전으로 정결케 하십니다.)

(2) 화평 - 성결이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자세라면 화평은 인간에
대한 나의 자세입니다. 세상에는 나를 미워하는 사람, 괴롭히는
사람, 빼앗아 가는 사람, 해를 끼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해 주셨음으로 나도
주님과 더불어 남을 용서 할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3) 관용 - 이해하는 마음과 베풀어주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마다
마음이 부드러워 지게 됩니다.

(4) 양순 - 거칠거나 무례하지 않고 남에게 양보하려는 마음입니다.
주인과 종의 차이는 지시하는 명령의 자세와 순종하는 겸손한
자세로 다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나의 주인이란 의미는 내가
항상 겸손하고 순종해야 하는 사람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5) 긍휼과 선한 열매 - 그리스도인의 동정심은 단순히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닌 성품에 속한 것 입니다. 스테반은 돌에 맞아 죽을 때
자신을 돌로 쳐 죽이려는 무리들을 용서했습니다. 그가 만일
감정적이었다면 다른 행동을 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의 마음이 예수님의 성품으로 변화했기 때문에 진심으로
긍휼을 행할수가 있었습니다.

(6) 편벽이 없음 - 선입견이 없이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기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자리에 함께
하신 것은 그들의 신분과 외모를 보신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영혼을 보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기준 보다는 말씀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사람들 입니다.

(7) 거짓이 없음 - 성령님은 거짓을 꾸짖으십니다. 나다니엘은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가롯유다는 속에 의심하는
거짓된 자로서의 간사함이 있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으로서 나타나지만,
지혜의 열매는 의로 나타납니다.'
(약 3:18)

이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든 행위를 뜻하며, 죄를 온전히
씻음 받은 사람이 화평한 마음으로 살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모두 예수님 안에서 참 지혜를 누리고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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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

(사 58:6-11)




금식이란 글자 그대로 음식을 금함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로 '쬼'이라는 이 단어는 '자신을 스스로
괴롭게 하는 속죄'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7월10일을 속죄일로 정하시고 하루를
단식하기를 명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날이 이스라엘 백성이 금 송아지 사건으로 인하여
죽을수 밖에 없엇던 죄를 용서하시고 모세에게 새로운 십계명 판을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허락받은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은  
참회와 경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동행하심을 의미합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에
속죄일은 더이상 필요가 없게 되었으며, 금식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위한 경건의 표현으로, 또한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워지도록 자신을 드리는 온전한 헌신의 표현으로
말씀하셨습니다.(마 6:17)

이와 같은 태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우리의 자세로 특별한
관심과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응답으로 나타나곤 하였습니다.
그러면 바른 금식의 내용과 이에 따른 유익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의 바른자세는 무엇일까요?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7)


(1) 흉악의 결박이 풀려 나가도록 간구 드리는 금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흉악한 세력들에 의해 사로잡혀 지내는 무력한 희생자들임을
안타깝게 여기며 이들의 해방과 자유를 위하여 간구드리는 금식을 말합니다.

흉박의 결박을 겪고 있는 경우는- 귀신들린 자, 사로잡혀 병든 자, 음란, 마약,
도박, 음주에 중독된 사람들, 이같은 중상들은 보통 의지로는 벗어날수 없는
증상들입니다. 금식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워 지기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 한 예로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시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상기 하십시요!

'금식과 기도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수 없느니라.'
(마 17:21, 막 9:29)


하나님께서는 능력을 받기 위해서나, 신령해지기 위해 의지적으로
금식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 하시지만, 고통을 당하는
이웃을 위하여 금식 하는 것은 기뻐받으십니다.

(2) 멍에의 줄이 끊어지도록 간구드리는 금식을 말합니다.

멍에란, 억압 또는 강제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세력 밑에서 위협받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멍에에 묶여있는 상태란 공산권에 있는 강제 노동 죄수,
포로상태, 독재주의 학살상태, 등 혹사와 위기속에 놓여있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같은 큰 악한 세력이 지배하고 있는 경우는 하나님께서 그 세력을
막아 주셔야만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결국 유다인을 몰살하려던 하만 총리는 하나님의 징계로 장대에
매달려 죽게 되고 오히려 모르드개가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북한, 아프리카, 또한 전쟁이 빈번한 지역 주민들을
위하여 금식기도를 드려야할 의무를 지닌 사람들 입니다.

(3) 압제당하는 자들은 위한 금식을 말합니다.

압제당하고 있는 상태란 폭력과 위협속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주로 노예신분, 인종차별, 폭력, 테러범, 반란군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대부분 입니다.
멍에나 압제는 악한 자들이 세력을 잡기 위하여 선량한 사람들을 지배하고 착취하고
혹사시키는 것을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이들을 사용하시어 자신의 백성들의
죄를 깨닫고 돌아서도록 하살때 가 있습니다.(예: 블레셋의 압제에서 벗어남)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대,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삼상 7:6)
 
(4) 불우한 이웃을 위한 금식을 말합니다.

냉정한 세상에는 재물이 없어 가난하거나 신분이 낮아 업신여김을
받는 다거나 열악한 환경속에 처해있는 하류층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친척인 경우는 도와주는 것을 꺼려 하거나 교제하는 것을
피하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허기지고 지친 삶을 살게 됩니다.

자신들에게는 남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다 같은 자녀들이기 때문에
형제들이 서로 나누지 않음을 가슴 아프게 여기십니다.
이들은 대개 가난과 수치를 겸하여 살고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을 위한 기도와 선행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행위입니다.
(예: 포로귀환한 백성들이 환난, 능욕, 굶주림을 벗어나기 위한
금식기도로 성벽 중건 완성)

'네가 이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가로되'(느1:4)

하나님께서 우리의 금식을 받으시는 이유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고 그분의 뜻을 깊이 깨달아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는 마음 자세 때문입니다.  
보통 성실한 신앙생활로도 기뻐하시지만 금식은 단호한 결심의
자세이기 때문에 평상시보다 빠르고 더 큰 응답을 내려주십니다.

2.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에 따르는 약속들(사58:8-11)

(1) 거룩한 삶을 살게됨(8)- '빛이 아침같이 비칠 것이며'
깨끗해진 심령이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여 죄성에서 벗어나
거룩한 모습으로 지내게 됩니다.

(2) 치료함을 받게됨-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오랫동안 정신적 육체적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3) 의로운 자의 삶-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욕심과 교만의 행위에서 벗어나 정직과 의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4) 영광이 따르는 삶-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성령님이 동행하심으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을 살게 됩니다.

(5) 응답받는 삶(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아버지와 자녀로서 막힌 담이 허물어진 삶을 살게 됩니다.

(6) 어두움을 물리치는 삶(10)- '네 빛이 흑암중에서 발하여'
복음의 능력으로 유혹에서 떠나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을 살게 됩니다.

(7) 승리의 삶-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영적인 세력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8) 인도함을 받는 삶(11)-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예비하신 삶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9) 영혼이 만족한 삶-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성령의 충만이 임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10) 강건한 삶-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영적 은사와 능력이 주어진 삶을 살게 됩니다.

(11) 번영의 삶- '너는 물된 동산 같겠고'
풍성한 소유와 번성을 이루는 삶을 살게 됩니다.

(12) 기쁨이 넘치는 삶-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말씀의 능력과 영생을 체험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언행은 보상을 받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바른 금식 기도는 제일 많은 축복을 받는 신앙자세입니다.
1년에 3번정도 금식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세는, 구약에서 말씀하신
'매년 3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찌니라'(출 23:17)
명하신 것에 부응하는 자세로 봅니다.

대개 금식일수는 1-3일 정도가 대부분이며 특별한 경우는
다니엘 쥬스금식 21간을 한 두번 할 경우 육신의 건강에
많은 도움이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영혼의 맑음과 육신의 건강을 위한 금식생활을 통하여 좀더
주님께 가까이 다가갈수 있는 영적 성장을 다같이
노력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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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자유
(갈 5:1)



세상에는 수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리고 무신론자도 자기와 선을 기준으로 삼고
살고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기독교와 다른점은 구원의 기준을
인간의 행위에 기초로 하고 있는 점이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구원하심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행의 결과로서 죄의 문제의 해결과
믿음으로서 실제적으로 어떤 방법이 맞는 길이냐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이를 위하여 '마르틴 루터'의 체험을 기준으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22세 때에 수도사가 되기 위하여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엄격한 규율에 따른 육신의 욕망을 줄이는
고행의 훈련과 탐구하는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였으며,
죄를 범하지 않은 언행을 철저히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심한 내면의 갈등을 겪게 되었습니다.
고행의 훈련을 행하던 어느날 한 말씀을 깨닫게 되어
그 훈련에서 벗어나 진정한 해답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말씀으로 말씀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서1:17)

그래서 그는 그 깨달음으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말할나위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더 할수없이 충성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는 도저히 인간이 해결할수 럾는 3가지 면에서
자유함을 얻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그리스도인은 죄로부터 해방된 자유인 입니다.  

수도원에서의 그의 선행과 고행은 충실한 수도사로서
하나님앞에 의롭다는 판결을 받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본인은 죄악성은 사라지기 커녕, 더 또렷이
죄에 대한 의식이 강하게 나타나게 되는 체험을
하게 되자 '고해성사'를 자주 드렸습니다.

그러나 '고해소'를 떠나는 그 순간에 죄의 생각은
다시 들어오고 미쳐 고백하지 못했던 죄들은
떠오르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고백을 해도 마음속에 남아있는 죄를 다 비울수
없다면 결국 남아있는 죄 때문에 구원에 이를수
없다는 결론에 그는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죄만 안 지으려는 생각과 철저히 조심하며
행동해도 없앨 수가 없는 잠재되어 있는
하나의 상태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0년이 지난 어느날 '로마서 1:17절'을 문득 생각해낸
마르틴 루터는 이 깨달음을 좀 더 깊이 이해해 보려고
몇일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1) 복음과 하나님의 의에 대한 관계에 대하여 의문이 생겼습니다.

"복음이란 기쁜 소식인 구원을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의는 죄를 심판하는 공의이기 때문에 만약 복음이
좋은 소식이라면 하나님게서 심판하심이 없어야 되는데,
말씀 속에는 왜 오히려 복음속에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난것이 기쁜소식이라고 되어있는가?'ㅡ더군다나

'나타난 공의가 오히려 믿음을 갖게 만들고
더욱 참된 믿음으로 이끌어 의인이 되어
살게 만든다'란 말씀은 무슨 뜻일까?"
그는 깊이 묵상하였습니다.

결국 그가 깨닳은 것은 복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공의는
나를 심판하려는 공의가 아니라 나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징계하셨음으로 모든 죄악이
이미 심판되어진 공의입니다.

이 공의를 이해하는 사람에겐 더이상 자신의 죄에 대하여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의 죄에 대한 대속 하심은 나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대속한 것입니다.

사람의 죄는 없앨 수도 안 지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죄의 댓가로 심판받은 예수님은
생명을 지불하셨음으로 나의 과거의 죄는 물론
일생의 죄가 모두 씻음받게 된 것입니다.

생명의 대속이 나의 전 생명의 삶에 있는
모든 것을 상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 하리라.'
(요8: 34-36)

그러므로 예수님의 대속으로 나는 깨끗한 의인이 되었으며
이 진리를 믿는 삶이 죄에서 해방된 삶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 감격을 다음과 같이 표현 했습니다.

'나는 마치 내가 새로 태어난 것처럼 느꼈다. 그리고
천국의 문이 활짝 열린 것처럼 느꼈다. 성경 전체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 '하나님의 정의는 내 가슴속에
두려움이나 미움대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달콤한 사랑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있다'

2. 그리스도인은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인 입니다.

구약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말씀인 율법은 사람의 모든 죄를
발견해 내는 역할을 해 줍니다. 늘 죄를 지니고 사는
인간에게는 율법은 말없이 큰 부담을 안겨 줍니다.
십계명 조차도 완전히 지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생각하면 마치 운전할 때 경찰차가 뒤에
따라오는 것을 보고 있는 느낌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을 모두 지키신 분 이실뿐
아니라, 은혜로 완성을 하여 주신 분 이십니다.

'때가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심이니라'(갈4:5)

즉, 담임 선생님이 훈육 선생님에서 어머니로
바뀐 것과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채벌을 위주로 점검, 검사, 지적을 하는 선생님 밑에서
벗어나 사랑으로 이해하고 권면하는 어머니의
용서함 가운데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잘못은 두려움이나 죄의식이 아니라,
 엄마가 싫어하는 습관으로 고쳐나가야만 할 버릇인 것입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스스로 고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같은 생활을 도와주기 위하여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3)

진리는 복음이며 복음은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말씀이십니다. 그 안에서 나도
윱법에서 완성된 내가 되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은 사탄 마귀로 부터 해방된 자유인 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서재에서 명상하고 있을 때,
마귀가 나타나서 지금까지 범한 자신의 죄를 다 내보이며
'이래도 네가 구원을 얻겠다고 생각하느냐?'하고 조소하였습니다.

이때 루터가 말하기를 '네 말대로다. 그러나 이 모든 죄는
벌써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 받은지 오래다.'
라고 말하자 마귀는 나가 버렸다고 합니다.

요한 1서 3:8절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죄인이 되어서 형무소에 들어가면 자유가 없어집니다.
모든 행동에 간수의 간섭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명령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가
사면이 된후에는 더이상 간수가 이래라 저래라
하지 못합니다. 이미 죄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일도 마찬가지 입니다. 죄에서 해방된
영혼은 사탄이 간섭할 권한이 없습니다.
이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신앙생활할 때 예수님과 따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 등 어느 위치에 자신을 두고 있는지에 따라
주님의 말씀하신 적용 범주도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해 주신것은 우리에 대하여도
우리를 위하여도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안에 속하시고
자신안에 우리를 속하도록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오직 그 안에서만 이루워진 것을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시기 때문입니다.

창살없는 감옥의 느낌을 생활속에서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오늘은 모든 구속을 철폐시키는 날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즐겁게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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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소망
(살전 4:16-17)



사람의 기대중에서 - 미래에 자신이 바라던 대로
변하여 살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만큼
기쁘게 만드는 것이 없습니다.
(예: 가난-부자, 병자-건강, 무능-만능, 추인-미인)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 우리들로 하여금
지금의 자신이 내가 아니요, 부활된 모습이 실제적인
내 자신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때 완벽하게 지으셨습니다.
즉 아담과 하와는 소유, 건강, 능력, 모습에 대하여 자신감을
가지고 살았습니다.죄가 들어오고 나서부터 하나님이
주신 완전함이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부활은 죄의 허물을 벗고 인간이
참 모습을 회복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모든 만물에 참 모습에 대한 징표를 두셨습니다.


(1) 자연계의 씨맺는 식물들- 어느 식물들이든 씨를 다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아주 볼품이 없습니다. 그러나 땅에 심기워지면
아름다운 꽃으로, 열매로,나무로 변화되어 집니다.

씨속에는 새생명과 완성된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기워지지 않으면 그 모습대로 있지만, 심기워지면
속 생명은 자라나고 변화됩니다.

(2) 곤충계의 변화- 여름철 주변에 맴도는 나비, 잠자리, 매미 등은
전에는 풀속에 기어다니는 애벌레나 물속에 유충으로
이슬이나 이끼를 먹으며 사는 벌레들 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때가되매 몸이 변하고 능력이 생기어 하늘을
날게되고 꿀을 먹는 곤충으로 변화되게 된 것입니다.
이들도 변화되기 위하여 고치를 짓고 변형되기를 기다리거나
허물을 벗기 위하여 한동안 동면하는 것 같은 생활을 하게 됩니다.

(3) 인간세계 에서의 부활- 우리인간에게도 하나님은
죄의 타락한 모습을 벗고 새로 완성된 모습으로
변화될 것을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워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부활하신 주님의 새 생명을
믿음으로 받아 들이며 살때 이루워집니다.
그 새 생명이 완전한 모습을 지니기 위하여는
말씀안에 심기워져야만 합니다.

이땅에서 성도들은 참 모습으로의 싹이난 상태입니다.
완성된 모습은 하늘나라에 가서 나타날 것입니다.
(예: 사도바울은 셋째 하늘에 올라가서
그들의 모습을 보고 온 사람 입니다.)

2. 그러면 우리의 완성된 모습은 어떤 모습이 될까요?

'죽은자의 부활도 이와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사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고전 15:42-44)


(1) 활짝핀 젊은 모습을 영원히 지닐 것입니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살며'
죄로 인한 추한 모습이 없어진 상태입니다.

씨의 모습이 각각 다르듯이 피어난 꽃들도 모양이
다 다릅니다. 그러나 씨보다 모두 아름답습니다.
그것은 모두 완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도 인격, 모습, 형태가 모두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녀로서의 완성된 모습은
모두 매력적일 것입니다.
(하나님 속성의 충분한 표현=인간의 완성.)

(2) 욕망이 없는 거룩한 몸이되어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된 것으로 다시살며'란
욕망이 없어진 거룩한 모습을 말합니다.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은 욕망, 감정, 감각으로 인하여
  싸우고 다투고 정욕과 타락속에 빠져 살게 됩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에는 죄가 없어져 욕망이 사라졌기 때문에
먹던 안먹던, 자던 안자던, 있던 없던, 그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거룩과 영광의 온전한 분이신 하나님께 매일 나아가는 것이
큰 기쁨과 즐거움이 될 뿐입니다.(예: 하나님을 대면한 모세의 환한 얼굴)

(3) 연약함이 없는 강한 영체로 살게 됩니다.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살며'
육신의 삶이 영력의 삶으로 바꿔지는 것을 말합니다.
약한 육체는 병들고, 늙고 노쇠하여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며,
또한 시험과 유혹에 늘 시달려 갈등속에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강한 몸이란 죽음에 기인하는 요소들이 다 제거된 영체를 말하며
욕심이나 번민으로 갈등하는 아무런 요인도 없는 건전한 상태를 말합니다.
몸과 마음이 건전하고 활발한 상태가 계속 유지될 것입니다.

(4)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신령한 몸으로 살게 됩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어느 것에도 제제를 받지 아니한 형태로 변화된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몸은 물질로 지어졌기 때문에 한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환경이 나를 지배하고 시간이 제한을 하고 제한된 공간에서만 안전을
유지할수 있습니다. (즉 우주나 물속에서는 생명을 유지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된 몸은 땅, 바다, 우주, 어디든지 구애를 받지않고
지낼수 있습니다. 물질세계와 영의 세계에서
나에게 영향을 줄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속도, 시간, 공간, 능력에 예수님처럼
자유자제로 구사할수 있습니다.

완전한 눈(고후3:18), 완전한 청각(계5:11),
완전한 후각과 미각(계2:17,22:2), 완전한 지식(고전13;12)
이와 같이 변화되어질수있는 것은 성령의 충만함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3. 언제 우리는 부뢀된 모습으로 변화되나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예수님의 재림에는 두번 이루워짐을 성경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공중재림과 지상재림 입니다.
성도들은 공중재림시에 죽은자가 먼저 일어나 부활로,
산자는 살아있는 그대로 공중에 들림받아 변화되어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곧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매일 말씀과 기도를 하는 생활은
주님을 맞이하는데 꼭 필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세상을 '시작과 끝'을 정하여 놓으시고
진행하고 계십니다. 시작은 창조시대를 말하며,
'아담으로 부터 시작하여 
예수그리스도시대 까지를 의미'합니다.

창조의 순서는 첫째, 만물을 지으시고,
둘째, 인간의 육체를 지으시고
셋째로, 인간의 영혼을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끝은 '신세계 창조시대' '예수님의 부활부터
새 하늘 ,새 땅의 새 창조까지' 입니다.
 
신세계 창조의 순서는 첫째, 영혼의 새 창조(거듭남)
둘째, 육체의 부활
셋째, 만물의 재 창조(새 하늘과 새 땅)
 
이와같이 두 창조의 세계는 정 반대의 순서를 갖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들의 삶은 어느시점 인가를 알아볼때
이미 신세계 창조의 첫번째 단계를 지나
욱체의 부활과 새 천국을 기다리는
시점에 와 있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모두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주님안에 나의 부활된 모습을 그려보며
참 기쁨과 소망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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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와 구원
( 마1:21)



인간의 삶중에서 가장 괴로운 것은 평생 내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죄된 생각과 행위를 버릴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인간들이
노력하여 만들어 낸것이 종교입니다.

그런데도 어느 종교도 죄의 문제를 해결할수가 없는 것은
그 근원이 인간에게서 온것이 아니라 인간을
유혹한 사단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문제는 영적으로만 풀려질수 있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 이십니다.

1. 죄란 무엇인가?

우리들이 흔히 죄라하면 불법 혹은
범법인 행위가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죄란 세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죄가 있습니다.

그것을 원죄라 하며 불신앙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아담은 범죄한 인간의 시조였습니다.
즉 죄인의 원형입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죄로 인하여 심판을 받은것은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윤리적으로도
행위적으로도 깨끗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문제가 된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은 윤리,도덕의
결함이 아니라 불신앙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즉 죄중에서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교만죄인 것입니다.

2)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죄가 있습니다.   

이는 자범죄중 유형적인 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불순종의 작은 행위를 심판으로
이와같이 크게 다루신것은
죄의 속성 때문입니다.
 
즉, 마귀가 하나님께 행한 모든것을 인간에게도
전부 흘러들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처음 나타난 것이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그로부터 인간은 시기, 분쟁, 미움, 저주, 살인 등
서로가 싸우고 죽이는 멸망의 행위로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3) 자신과의 관계에서 죄가 있습니다.

이를 자범죄중 무형적인 죄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행위는 마음속에 있는 것이 표현된 것이기
때문에 행위는 외부에 나타나지만,
실제적인 죄는 내부인 마음 속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보고
죄인중에 죄인이라고 말씀하심은 겉으로는
경건한 모습이지만 그 속에는
악한 생각이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즉 탐심, 질투, 판단, 교만, 간음, 정죄, 등을 가득
품고 있으므로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를 심판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사망과 형벌인 것입니다.

비록 회개하여 용서함을 받았을지라도 죄책감 에서는
 벗어났으나 행위에 대한 처벌은 남아 있게 됩니다.
 (예: 다윗)

2. 예수님이 오신 것은, 바로 이 죄와 처벌의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하나님의 은혜는
대속과 영생입니다. 죄가 마귀에게서 왔듯이
죄사함과 잃었던 영생도 하나님께로 부터만 올수
있습니다.  오직 죄에서 벗어날수 있는 길은
인간으로 오신 성자 하나님에 의해서만 해결될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은 나위 죄의 근본을 해결해 주십니다.

인간이 죄를 짓게 된 것은 마음속에 죄된 속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아담안에서 이미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즉 사과 나무가 사과를 맺기 때문에
사과 나무가 된 것이 아니라 사과 나무이기
때문에 사과를 맺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열매를 용서함 받기 위하여는
예수님의 대속한 피로 이루워질수 있지만
근본적인 죄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 하려 함이라'(롬6:6)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 태어났 듯이, 죽음도 예수님 안에서
십자가에 달려 이미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지은 죄를 회개하여
용서함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죄를 이기며 죄성을 단호하게 부인 하여
승리하는 삶이 더 중요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죽으심과
다시 부활하신 그분 안에 동참했다는
인식에서만 이루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된 생각이 나를 사로잡을땐 십자가를
바라보며 '죄인된 옛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다.' 라고 생각하여야 됩니다.

2) 예수님이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방법은
내주 하심으로 이루워 집니다.

인간은 반드시 누구와 함께 살도록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예: 영적으로는 하나님, 또는 마귀,  혼적으로는 지식,
또는 진리, 육적으로는 이성간)

그러므로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사람은 달라지게 됩니다.

사람이 마귀의 영과 세상지식과 육신의 욕망에
사로잡힐 땐,  죄인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과, 진리와 사랑으로
사로잡힐 땐 의인 으로 살수 있게 됩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주시면서
'너희와 함께, 또는 너희안에 계실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은 죄의 근원을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죄와 저주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님은 것은 적용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모두
말씀따라 살면서 완전 구원을 이루워 나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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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와 바늘귀

(마19:24)



예수님은 부자와 천국의 관계를 약대와 바늘귀로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바늘귀란 찾기도 어렵고
실을 꿰기도 어려운 좁은 구멍입니다.

천국을 바늘귀로 비유한 것은 아무나 그렇게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천국이 아니라는 의미이며

부자가 많은 짐을 지고 나르는 약대에 비유한 것은,
부자는 많은 부를 지니고 있지만 오직 남에게
건네주기 위하여 나르고 있는 것일뿐
자기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갈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부자가 천국가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말씀을 하심으로 성도들의 물질관에 대하여
옳은 견해를 가지라고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1.물질은 세상에 붙어있도록 접착제 역할을
하는 가장 끈끈한 풀과 같습니다.



소유가 점점 불어나는 것은
소유주의 노력 여부에 의해서 결정되어 집니다.
그러므로 많은 소유를 지녔다는 것은
온 정열을 그곳에 쏟았다는 증거도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보믈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이 말씀의 의미는 내가 애써 쌓아놓은 재물이
바로 보물이자 사랑의 대상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왜 재물이 천국가는 길을 막는 방해물의 역할을 할까요?
 
1) 천국보다 이 세상을 더욱 사랑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대표하는 것이 돈입니다.
그리고 돈은 세상의 모든것을 취하고
사용할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좋은것을 다 누리고 있는 상태는
즉 다른 세상, 다른 세계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도록 만들어 줄수밖에 없게 합니다.

보이는 것이 확실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희미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보이는 것들은 잠시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이
영원하다는 것을 잊게 만들어 줍니다.

2) 영혼보다 육신을 더욱 사랑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부자청년은 영생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언뜻보면 영혼을 위한 삶을 살려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소유를 버리고 나를 쫓으라 하신
예수님 말씀에 근심이 되어 뒤로 물러갔습니다.

그것은 소유없는 영혼이 하늘나라에서 사는 것보다
소유있는 육신이 이땅에서 사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영원한 미래를 위하여 잠시 머무는 세상을
버리려고 하지 않은 것입니다.

무엇이 그를 남게 만들었을까요?
육신이 쥐고 있는 소유가 바로 이와같이 만든 것입니다.

3) 말씀보다 자신을 더욱 사랑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자를 어리석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영혼육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눅12:20)
그는 하나님 없이도 잘 살수있으며 인생의 문제를
자기 스스로 해결할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생명의 문제는 사는 문제가 아니라
죽는 문제이며 또한 죽음은 어떤 능력도
막을 수 없습니다.

말씀은 생명에 관한 것인 반면,
자아는 소멸할 육신에 관한 것입니다.
물질은 자신의 주인을 하나님 대신,
소유한 사람으로 주인 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재물을 소유한 사람은 주인의 자리에
예수님 대신 자신이 앉아서 삶을 주관하게 됩니다.
돈을 사랑함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로 온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요1서 2:15)


2. 천국은 율법보다 중생으로 들어가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영생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께 나온 부자 청년은
외관상 하나도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십계명을 다 지켰을뿐 아니라 내세의 삶에 대한 관심도
현실의 삶에 대한 덕망도 다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이실지라도 그의 삶에 대하여
어떤 책망도 할수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수 없다'라고
하신 것은 중생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며 공회 회원이었던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보십시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수 없느니라'(요3:5)

소유가 주인이냐,성령님이 주인이냐하는 것은
거듭났는지 아닌지에 따라 결정이 됩니다.

발람, 아간, 나발, 게하시, 가롯유다,
아나니와와 삽비라, 바리새인, 율법사, 등
이들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이자 성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재물을 주님보다
더욱 귀하게 여긴 사람들 입니다.

반면에 니고데모, 세리장 삭개오, 아리마대 요셉, 등은
예수님 말씀을 듣고 거듭난 사람 들입니다.
즉 소유의 주인이 바뀐것이 거듭남의 증표가 된 것입니다.

소유가 주인이 되면, 숨기게 만들고(아간), 인색하게 만들고 (나발),
속이며(아나니와와 삽비라), 위선을 행하게(바리새인)만듭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 일지라도 기복신앙 쪽으로 몰고가
구원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주관하시면 소유를 주님을 위해
쓰는것을 기쁘게 만듭니다.(삭개오)

말씀쪽에 서게 만들고(니고데모),끝까지
주님을 섬기게 만듭니다,(아리마대 요셉)

골로새서 3:5절에서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하신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강한 세력이 주인으로 관장하고 있기 때문에
성령님의 역사를 전적으로 막고 있음을 얘기한 것입니다.

제물이 많은 자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기 어려운 것이
이 때문이며 행위는 율법에 따리 할찌라도 중생은 결코 하기가
어려워 구원과는 거리가 먼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보물의 위치를 이전 하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을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는 것과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게 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재물의 양에 관계되시는 분이 아니라
재물의 관리에 관계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재물을 소유한 사람들을 평가하시는 분이십니다.

욕심장이 에서 벗어나 영원한 부자가 되는 길은
재물을 하늘에 쌓아 놓을때 이룰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부자가 재물을 잃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늘에 쌓아놓고 제대로 사용하기를 원하실 뿐입니다.
그래야 재물이 쌓이고 늘어날 때마다 불안과
염려에서 벗어나 보람과 자유로움으로
살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시절 성도들의 삶에 비하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다 부자들 입니다.
이 말은 가난했던 그리고 예수님을 섬겼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천국에 들어갈수 있는 사람들인 반면에

부자들인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렵다는 것을 알고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깨닳음을 갖는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경고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마음 속에 있는 흉물스러운 낙타를 몰아내고
일용할 양식을 내려주시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천국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사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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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그리스도인
(롬12:2)



인간의 제일 정확히 파악하고 살아야 되는 일이
두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이시고, 또 하나는 내가 살고있는 세상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가 확실하여 이세상에서
존재의 의미와 뜻을 다하고 보람되게
살다 천국에 갈수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사는 문제에 대하여
행복하게 살기 보다는 무심히 불행하게
사는 경우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안다면 우리의 삶은
큰 의미를 지닌 만족한 삶이 될 것입니다.


1. 세상이 무엇인지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을 의미하는 말에는 두가지 의미의 개념이 있습니다.
'에레츠'- 창세기에 처음 나오는 말로 하나님이 만드셔서
인간에게 대여한 장소,곧 인류가 사는 처소로
세상의 의미를 말합니다.(창1:1)- 예, 에덴동산

'테벨'- 죄가 들어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고
인간을 타락 시킴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된
세속화된 세상을 말합니다.

인간이 불행한것은 세속화된 세상에 살고있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세가지로 볼수있습니다.

(1) 인간에게 두려움과 불안을 가져다 줍니다.


죄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기 때문에 두려움이 존재하게 됩니다.
세상은 죄로 가득찬 곳이기 때문에 심판으로 없어질 곳이며
죄성을 가지고 이 가운데 사는 인간들도
 똑같이 두려움을 느께게 됩니다.

인간에겐 죄가 없는 장소와 죄 문제가 해결된 마음의
쉴곳이 필요한데 그곳은 오직 모든 저주와 죄를
해결해주신 예수님이 계신곳 밖에는 없습니다.

(2) 인간을 유혹하고 미혹 시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것이라'(요1서2:15-16)

하나님이 없는 세상의 지배원리는 다음의 세가지 입니다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 유혹은
니쁜 것으로 부터 오는 것이지, 선한 것 으로 부터 오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분수를 넙게 만들고 분수를 넘는
부분들이 모두 죄가 되는 것입니다.(음란,탐심,교만)


(3) 인간에게 싸움을 일으킵니다.

'도적이 오는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인간에게 사랑하는 마음이 더큰가?
미워하는 마음이 더 큰가?
소유하려는 마음이 더 큰가?
비우려는 마음이 더큰가?

소유하려는 욕심이 더 크고, 미워하는 마음이
더 많기 때문에 남의 몫을 시기하여 빼앗으려는
생각이 들어 다투고 싸우게 됩니다.

세속화된 세상은 인간들에게
성공(나의 뜻)이 성취(하나님의 뜻)보다
 더 중요하고, 물질이 인격보다 더 중요하고,
조직이 개인보다 더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성공을 해도 불안과 욕망과
시기는 더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분쟁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려면 피해야 할 것과 나타낼 것이 있습니다.

1) 세속에 물드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약1:27)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은 사랍입니다.
구원의 의미는 건져내어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빠져 나온곳에 다시 섞여지면 안됩니다.
이것은 위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세상에 등지고
 멀리 떠나 사는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속에 살되 그것과 혼합되어 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가치관이 다르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중생(거듭남)으로부터
이루워질수가 있습니다.

즉 지금까지는 내 속에 세상적인 것들을 담고
살아왔으나, 거듭남을 통해 내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고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물과 기름은 함께 있을짜리도
 섞이지 않습니다. 항상 기름은 물위에 떠 있습니다.
이는 같은 액체 이지만 성분이 엄연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세상속에 사는
사람들과 같을지라도 속성은 다른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보혈의 공로에 의해 죄돤 세속성은 씻음받고
하나님의 속성이 속에 생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죄된 속성이 들어와도 주님의 보혈로 씻겨지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이 죄의 성향을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속에 물들지 않는 유일한 길은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길뿐입니다.

2)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야 온전한 삶을
살수 있습니다.(마5:13-14)


이 세상을 청결하게 해주는 두개의 큰 요소는
소금과 태양 빛 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세상에서
그 역할을 할때 사명을 다하는 삶을 살수 있습니다.

 (1) 소금의 역할이란 하늘나라의 맛을 내는
성령의 열매의 역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속에 있어도 변화가 되지 않는 원인은
소금이 녹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이 있어도
 행함이 없으면 그것이 바로 녹지않는 소금인 것입니다.

미움이 만연 한곳에 사랑의 소금이 뿌려져야하고,
불평이 있는 곳엔 기쁨이, 경쟁이 심한 곳엔 기다림이,
욕심엔 자비가 인색한 곳엔 베품이, 변덕이 심한 곳엔 지조가,
다툼에는 양보가, 욕망이 가득찬 곳엔 자제하는 모습들을
보여줄때에 우리 주변은 훈훈하게 될 것입니다.
 

(2) 빛의 자녀들의 역할은 착함, 의로움, 진실함 입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5:9)

상처가 곪은 부분이 있으면 도려내면 되지만
 썩은 부분이 있으면 잘라내든지 버릴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균이 이미 전체로 퍼져나갔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인간의 눈으로는 부분적으로 곪은데가 있다고
볼수있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는 썼었기 때문에
조만간에 다 버려야 할 심각한 상태까지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실때
 의인 10명만 있으면 멸하시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즉 한 도시에 열명의 빛의 역할을 하는 그리스도인만 있다면
오늘날도 그들 때문에 이세상을 멸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의인의 역할이 바로 빛의 역할이자
선함, 의로움, 진실함 입니다.

선은 악을 멀리하는 것이요,진실은 거짓을
멀리 하는 것이요, 의인은 부정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속된 세계를 창조된 시점의
세상으로 바꾸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 입니다.

내 마음을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로 닦으면 주님의 빛이
나의 마음의 거울에 반사되어 어두운 세상을
환히 비쳐줄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때 주님의 거울 앞에서 다시한번
나를 비추어보고 오늘도 세상으로
달려나간다면 내가 있는 곳은 그야말로
환하고 밝은 회복의 처소가 될 것입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떠날 세상이지만
세상을 버리고 떠나지 말고
만들고 떠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때
세상은 나의 소중한 곳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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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후사
(롬 8:17)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는 두가지 기둥이 있는데
그것은 십자가와 성령님 이십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지금까지 지내온 세속적인 모든것을
청산함의 뜻이며(죄인의 신분,성향,속성,목적,추구,근성,등)

성령님의 의미는 지금부터 새로운 시작으로 모든 것의
완성을 의미합니다.(칭의,양자,성화,견인,영화,후사,등)
중요한 것은 십자가 아래서 다시 태어난 몸이 무엇을
목적으로 삼고 살아야하는가에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양자됨의 세단계가 있음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자녀의 단계-칭의로 법적지위를 얻고
죄에서 해방된 상태(요1:12)

들째, 아들의 단계-성령님의 내주 하심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상태(롬8:14)

셋째, 후사의 단계-에수님과 연합하여 고난과
영광을 함께 누리는 천국 상속자의 상태(롬8:17)


1. 이땅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의 목적은 하나님의
후사가 되도록 준비하는 삶을 사는데 있습니다.  

구원의 최종 목적은 영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예수님을 닮은
자녀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그 이유는 주님과 함께
천국의 기업을 상속하여 주시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땅에서 받아 누리는 분깃에만
만족할것이 아니라 천국의 유산을 상속받을 후사가 되는
영광스런 자신을 바라보고 사는것이 바림직한 일입니다.


1) 상속권 자가 되기 위하여는 예수님과 합한
연합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롬8:17)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바라보실 때, 평가하실때,
또한 무엇을 맡겨주실 때, 모두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워 주십니다.

그 이유는 에수님이 우리의 모든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재림시 우리를 부활시키시며
어린양 혼인 잔치에 신부로 맞아 들이시는
주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후사이시자
상속권 자가 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모시지 않고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상속을 우리는 독자적으로 받을수 없습니다.
후사의 자격은 제일먼저 예수님과
연합한 삶을 살때에 주어지게 됩니다.


2) 후사가 되기 위하여는 또한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을 기쁘게 받아 들여야합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할 것이니라'(롬8:17)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유때문에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세상은 죄의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을 싫어합니다.
성도들도 마찬 가지로 세상의 자녀들이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예:이스마엘이 이삭을 싫어한 것은
유업을 못받기 때문이었듯이)

세상 자녀들은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수가 없으므로
 무조건 싫어하는 것입니다.그런데 세상의 핍박과 고난을
허용하시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를 더욱 주님을 닮은
온전한 자로 성숙시키기 위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히2:10)

온전케 된다는 것은 영광의 자리에 합당한 자격임을
의미하는데 이는 주님과 함께 고난을 통과한 사람만이
갖출수 있는 성숙함 입니다.예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허지만 우리는 죄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거룩함 만으로는 죄를 제거할수 없습니다.
죄는 댓가를 치뤄야만 속죄 되어질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온전하게 되어질수 있는 길은
죄의 문제를 해결할때 에야만 비로서 인간
으로서의 온전함을 이룰수가 있는 것입니다.

속죄가 고난을 수반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5:8-9)

고난은 순종의 여부를 기리우는 시금석 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온전함을 이루웠듯이 성도들도 고난을 통하여 주님께
순종함으로 온전해 질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예수님이 겪으신 핍박의 이유를 깨닫게 하며
나의 죄에 대하여 회개를 깨닫게 하며 주님이 흘리신 보혈에
 나의 고난을 귀속 시킴으로 어떠한 고난도
주님께 순종함으로 달게 받을수가 있게 됩니다.

예수님 때문에 오는 고난이 영광과 밀접한 관계가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후사가 되어 받게 되는 상속에는 7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속은 아들이 된 시점부터
시작이 되는데 그말은 이땅에서는 분깃으로 주어지게되고
아울러 천국에서는 유업으로 예비되어져 있는 것을 받게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나중에 누릴 안식과
영광을 바라볼때 이땅에서 결코 실망을 느끼기 보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수 있는 것입니다.

1) 영생의 상속자가 됨

'네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자마다
여러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

백배의 축복은 이땅에서 받는 것이요,
영생의 축복은 내세에서 받는 것입니다.

2) 구원의 상속자가 됨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천사로서
구원얻은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히1:14)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후사가 되도록 준비하는 자들에게는
지금부터 천사들의 수종을 받으며 장차 하늘에
들어가면 예수님과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3) 약속의 상속자가 됨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뜻이 변치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히6:17)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은 복의 근원, 자손증대,
대적의 문을 얻게 하심(창22:16-17)
이 세가지가 이루워지게 됨

4) 의의 상속자가 됨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후사가 되었느니라'(히11:7)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믿음은 의로 여김을 받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벗이란 친근감을 받게 되었습니다.

5) 하나님 나라에 상속자가 됨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약2:5)

심령이 가난한자는 욕심이 없는 사람들이라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게 됩니다.
천국은 이들의 소유입니다.

6) 기업의 상속자가 됨
'썪지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4)

구약에서의 기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지만
하늘나라에서의 기업은 썪지않고 깨끗한 영원한
영역이 기업으로 주어지게 됩니다.

7) 만물의 상속자가 됨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요계21:7)

이것들이란 만물이 새롭게 변한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하며 새 천지를 상속받고 살게 됩니다.
 
이 세상의 삶은 지나가는 삶입니다.
그 이유는 한정적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라지는 존재는 없는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인간에게 영혼을 주신것은 영원을 알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태어난 육신은 물질과 합하여 살때 편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주어진 영혼은 영원과 합하여 살때 편함을 느낍니다.

인간의 불행은 이같은 이원화 구조때문에 오게 됩니다.
이것을 예수님게서 일원화 구조로 바꿔주셨습니다.
그것이 거듭남이며 완성이 부활입니다.

시작은 씨앗으로 시작하지만 열매는 씨가 아니듯,
시작은 육신으로 시작하지만 부활의 몸은 육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미래의 내가 아닙니다.

바로 후사가 된 모습이 나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구원받은 목적은 후사가 되기 위함임을 알고
신앙생활 할때 앞에 놓여있는 영광이 지금의 나의
모든 부족과 고난을 기쁨으로 덮어줄 것입니다.
우리모두 진정한 모습인 후사됨을 바라보며 살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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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조명
(고전 2:12)



사도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메섹 선상에서 만나보기 전까지는
영의 세계에 속한 부분을 이성으로 해석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가 율법적으로 최선을 다한 삶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삶 밖에는 안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후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그의 삶은
아시아 뿐만 아니라 유럽까지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고
성령님의 조명으로 복음의 진수를 깨닳아
신약성경의 2/3를 기록하는 저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깨닳은 진리를 오늘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조명을
받고 사는 삶이야 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바른
삶을 사는길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조명을 받기 위해서는
신앙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1. 인간에게는 믿음의 영역과 이성의 영역 두 부분이 있습니다.

 

믿음의 영역은 말씀의 영역이고, 이성의 영역은 지식의 영역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나오는 기적이나 사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성의 지식으로만
믿음의 영적세계를 이해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예:예루살렘 성전의 종교지도자들)

말씀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것을 써놓은 것이기 때문에
믿음의 영역에서만 이해가 될수있지,
물질세계의 지식으로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불가능 할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자신의 뜻을 인간에게 알리실때
인간의 신체적인 오관에 호소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이성으로 이해가 되도록 이치에 맞게 논리적으로
기적을 일으키지도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부르실때 베드로는 인간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도저히 합당치 않은 지시를 받고 믿게 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한말 '말씀에 의지하여 그믈을 내리리이다'
그리고 순종으로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즉 말씀은 영적인 영역에 직접 개입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성과 감각으로 받아들이면 말씀은 지식의 대상이 되어
무시당하고 말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이성이 갈수 없는 영역을 갈수있게 만들고
말씀은 이성이 경험할수없는 것을 체험하게 하여 주는 것입니다.


2. 신앙은 초자연적인 영적 대상을 믿고 의지하는 영적영역을 의미합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은 영의 세계를 먼저 지으시고
나중에 물질세계를 말씀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세계 창조의 근원이 말씀이기 때문에
바로 그 말씀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의 주인공 이시며,
말씀이 능력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살아있어야만 하는데
살아계신 말씀이 성자 예수님이시고, (요1:1-3)
그 말씀을 영향력으로 그 대상에 적용시키신 분이
성령의 하나님 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모르고서는 말씀을 알지 못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고서는 그 말씀이 역사히는
체험을 할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확실한 창조주 삼위일체 하나님 이심을 믿는것을 말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들려주실 말씀을 다 전하여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말씀도 또한 다 믿을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직 남은것은 그 말씀이 실감나게 체험할수 있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천지창조시와 마찬가지로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말씀이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역사가 이루워질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역을 도와 주시기 의하여
성령님께서는 오셨다고 본문에서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백부장 고넬료'를 보십시요!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으며 말씀따라
구제와 기도를 많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기도의 내용은 영적인 진리를 더욱
깊이 깨닳아 알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도 말씀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나 들은것 만으로는 이해가 잘 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의 기도는 상달이 되었고,
베드로를 통해 구세주 예수님에 대하여 확실한 이해가 되자
성령충만함의 체험을 하게 되었고 그의 죽은 것과 같았던
영의 세계가 주님과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의
생명이 살아난 영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3. 성령님의 조명은 모든 시작을 성령님과 함께 할때에 받을수 있게 됩니다.


눈먼 장님은 무지개가 있어도 그 아름다움을 모릅니다.
또한 귀머거리는 아름다운 음악을 들어도
그 감미로움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영적인 현상도 이와 마찬가지 입니다.

즉 영적소경은 영적 셰계나 천국을 볼수 없으며
영적 귀머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장님도 귀머거리도 예수님은 고치셨습니다.
 
이는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셔서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면 영적 소경도
귀머거리도 고침을 받을수가 있습니다.

고침받기 위해서는 성령님을 찾아야 하며, 이에 우리는
오신 성령님이 나의 눈과 귀를 뜨고 듣게 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을 읽을때 마다 성령님과 함께 읽는것이고
말씀을 들을때 마다 성령님과 함께 듣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자연인은 자연의 현상을 깊은 관심없이
저절로 위치해 있는것으로 바라 봅니다.
그러나 과학자는 모든 자연물이 법칙에 의해 운영되고
상호작용에 의해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 합니다.

자연인과 과학자의 차이는 관심과 탐구 노력에 의하여
구분이 되듯이, 성경의 말씀도 나혼자서 지식으로 읽으면
오로지 글자로만 나열되어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나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 진리를 깨닫고자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 한다면 말씀속에 있는 영적인 법칙과
생명이 들어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성과 영성은 지식이냐 말씀이냐에 따라 구분되어지고
나의 의지냐 성령님의 조명하심이냐에 따라
각각의 세계가 열려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하나님의 영의 도우심' 으로만
열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영의 세계에 들어가는 길은
오직 처음부터 성령님을 모시고 순종할때 인도하심으로
이루워짐을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요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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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길
(롬 8:14)




하나님은 구원의 진행을 3단계로 나누워 완성하십니다.

1단계 - 자녀의 단계
: '예수님을 믿음' (요 1:12)

2단계 - 아들의 단계
: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성화되어가는 과정' (롬 8:14)

3단계 -
후사의 단계: '부활의 주님과 연합하여
고난을 통과함으로' (롬 8:17)입니다.

성도들은 자녀된 일반은혜에만 국한된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아들의 단계에 이르러
마침내 후사가 되어, 하늘나라의 유업을 기업으로
받아 누리는 삶을 목적으로 사는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한 참된 마음이신 것을 알고
아들로서의 자격을 갖추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들이 이땅에서 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자격을 갖출수 있는길을
다음과 같이 네가지로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1. 화평한자가 됨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받게 됩니다.

'화평케 하는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것임이요'(마5:9)

인간의 마음에는 이기심과 정욕이 있기 때문에
마음속에서는 갈등을 일으키고 나아가서 밖으로는
남과 불화를 일으키게 만듭니다.(약4:1)

그래서 내속에 있는 욕심을 없애지 않고서는
남과 화평을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땅에서의 욕심을
하늘나라에서의 욕심으로 바꾸고 사는것이 중요합니다.

처음에 12제자들은 예수님이 이땅에서의 왕이 될것을 기대하고
이 세상에 대한 욕심을 가졌으나, 나중에 예수님의 나라는
하늘에 있는것을 알고 소망을 하늘의 것으로 바꾸고 살았습니다.

즉, 이땅에 두고 갈것과 하늘나라까지
갖고 갈수있는것을 구분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다시말해 혼과 육에 관계되는 것
(출세,영광,부귀,영화, 안일)을 줄이고
영혼에 관계되는 것(영생,부활,천국,재림,상급)을
늘이고 산 것입니다.

독생자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막힌담을 허물으셨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셨습니다. 이로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이룰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우리주변의 모든 인간관계를
하나님의 영혼구원하심의 측면에서 바라보고 살며
아버지가 잃은 자식을 얻은 기쁨으로 나에게 얼마나 고맙게 여기실까
하는 즐거움으로 모두 형제처럼 화평을 이루워 산다면
이는 아들로서의 역활을 다하고 사는것이 될 것입니다.

2.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는 길 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게신 너희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마5:44-45)

성경에서 말하는 원수라는 단어의 의미는 두가지로 볼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을 미워하고 맞서는자들이 진정 우리들의 원수들입니다. (시139:21)



가나안땅의 31개 나라와 31개 왕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대에게
모두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그 이유는 바로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우상을 섬긴 원수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골리앗을 무찌른 이유가 하나님을 모욕하였기 때문이며
블레셋. 모압, 암몬, 아람, 아말렉을 쳐 무찌른것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예:사도바울이 구부로 섬에서 전도할때 총독 곁에 있는
박수 엘루마를 꾸짖어 소경이 되게한 사건같은것은
먼저 그안에 있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들과 세력을
물리치고 나서 영혼구원을 위하여 사랑과 기도를 하여
주어야함을 보여준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 대해 반대하고 해를 끼치는 원수가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은 대적하지 않지만 시기, 질투, 경쟁, 욕심, 원한, 등으로
미움을 가진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우리의 원수가 될수있으며
이들에게는 사랑으로 용서해 주라 하시는 것입니다.

예컨대 다윗의 경우 사울왕은 누가 보든지 그의 원수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왕을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자라 하여 두번이나
목숨을 해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자신의 손으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갈때, 시므이가 그에게 돌을 던지며
그를 모욕하고 저주했지만 이때도 '하나님께서 저 입을 통하여
내게 말씀하시는지 알곘느냐?'하고 그를 해하지 않고 용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고, 저주하는 자에게는 축복하고
 모욕하는자를 위하여는 기도하라'(눅6:27-28)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미워하신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미워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아들로서 이 점을 본받아 사람자체를 미워하지 말고
그 사람의 죄된 행위를 미워하고 사람은 용서해주는 마음이 있을때
비로서 아들로 인정받을수 있는 것입니다.


3.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때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받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롭 8:14)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계획하였고
예수님은 그 계획하신것을 완성시키셨고
성령님은 그 완성하신 구원의 경로를 우리에게
적용시키시며 직접 이땅에서의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우리들을 인도하시러 오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성령님을 대우해 드리는 데는
각자가 다름을 볼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셨을지라도
주인으로, 또 세례주로 모시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은
구원받을 자녀의 상태에서만 머므르고 사는 신앙이라
자신의 판단에 따라서 주로 살게 됩니다.

그러나 나의 삶의 주인이시며 나의 사명의 주관자로
예수님을 모시면 성령님께서 나를 다스리시고
인도하시기 시작하십니다.

이런 삶을 살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수 있으며
천국을 향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다시말해 우리들은 날아서 한국은 갈수가 없으나
비행기를 타면 갈수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비행기를 타고도 갈수있는 곳이 아닙니다.
이는 '성령호'를 탈때에만 도달할수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일단 비행기를 타면 중간에 내릴수가 없이
 그안에 모든것을 맡기고 가만히 있어야 목적지까지 가듯이
마찬가지로 성령호를 탔으면 믿고 맡기고
순종하여 가만히 있어야만 역시 도달할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도중에 아무리 우리가 내리려도 내릴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와같이 믿고 따르며 사는 삶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는 삶인 것입니다.


4. 이기는 자가 됨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수 있습니다.

'이기는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21:7)

그리스도인은 네가지 영역에서 이기도록 성경은 말씀합니다.

1)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2) 죄에 대하여 이겨야 합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3) 사딘의 세력을 이겨야 합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히리라.'{약 4:7)
4) 사망의 권세를 이겨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자 가운데 사셨으며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줄 앎이로다'(롭 6:9)

세상과 죄와 사단과 사망에서 이길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자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이길수 있는 방법은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1) 이 모든것을 이기신 예수님을
내안에 모시고 살때에 이길수 있게 됩니다.

(2) 성령님과 동행함으로 이길수가 있습니다.(행1:8)


(3) 믿음으로 이길수가 있습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라'(요1서 5:4)

이와같이 예수님, 성령님, 믿음은 승리의 3요소 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우리들은
아들로서의 신분과 사명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후사의 자리까지 가야하며, 세상과 육에 속한 부분에서 벗어나
성령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승리하는 삶을 살때에
진정 아들로서의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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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이 없는 자

(딤후 2:15)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셨을때는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담도록 지으셨습니다.
즉, 속성,성품,능력, 이미지 등
신에 속한 본성들을 구비하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영에 속한 사람으로 살도록 하셨기 때문에
내면이 순수하고 깨끗하고 선한 성품이
인간의 본연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불순종으로 죄를 짓고 난 다음에는
영적 순결의 눈은 어두워지고 세상에서
 죄의 욕망의 눈은 밝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일먼저 찾아온것이 부끄러움 입니다.(창 3:7)

이때부터 인간은 죄와 수치에 속한 삶을 살게 되었고
이에 따르는 욕망은 도저히 버릴수없는 추한 인간의
속성으로 마음속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에수님이 오심으로 육에 속한 우리들은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고 영광된 모습을 회복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살게된 것입니다.

이제 이땅에서의 삶은 예수님이 오시는 그날에
부끄러움이 없어진 새로운 모습을 보이기 위한
성결의 준비기간임을 알고 살때에 우리모두 공중으로
들림받아 주님을 영접하는 성도들이 될것입니다.
(요일 2:28)

1. 부끄러움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부끄러움은 패배, 벌거벗음, 무지,
무능, 욕망, 미움, 등의 초라한 감정으로
이는 죄의식으로부터 발생되는
언행의 떳떳치 못한 결과인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부끄러움을 두 부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1) 주관적인 부끄러움 - 수치임

부끄러움의 시초는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순종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잘 배분되어진 본성을 누리며
편히 살수 있도록 정해진 삶을 살게 하지만,
불순종은 한계를 넘어선 욕망이 죄성으로 치우쳐
살게 만들기 때문에 불안과 초조한 마음으로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처음에는 벗었어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였으나 (창 2:25)
불순종 후에는 '내가 벗었음으로 두려워 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라고 고백했습니다.

즉, 욕망은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었고
불순종의 죄는 그들을 두렵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치는 원죄로 부터 기인한 것이며
아담의 후손인 인간은 모두 수치를 지니고 사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2) 객관적인 부끄러움 - 치욕임

에덴 동산에서 추방된 인간은 하나님의 공의에서 떠나
세상에서 불의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죄로 점점 타락하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정죄와 심판을 하시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이 징계로 나타날때 인간은
치욕을 겪게 되며 이것이 객관적인 부끄러움인 것입니다.
(예: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 로마시대의 식민지 생활 등)
즉, 주권도, 소유도, 자유도 없는 노예와 같은
수모적인 삶이 치욕의 삶인 것입니다.

무시당하는 것민큼 속상한것이 없고,
빼앗기는 것만큼 억울한것이 없고
 놀림을 당하는 만큼 낙심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끄러운 수치와 치욕은 죄와 연관된 것으로
하나님과의 불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부끄러움을 씻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 스스로 해결할수없는 죄와 수치의 문제를
예수님을 통하여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이세상 어디에도 수치에서 벗어날수 있는 장소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안에 있는 장소를 제외하고는요!

예수님은 에덴동산의 원형인 천국의 삶을
마음속에 지니고 계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에덴동산에는 마귀가 있었으나
주님안에는 어떤 세력도 있을수 없고
오직 거룩한 영이신 성령님만이 계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안에 머물땐 우리는
죄와 수치의 원죄의 옷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 거룩한 의를 회복할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9:33절에
'보라 내가 부딛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끄러움과 수치를 치료받은 사람들 입니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내가 다시 올때 너희 영과 몸과 혼이 흠없이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하신 것입니다.


1) 우리는 육신이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타락의 시대를 음란한 세대라 말하고 있으며
성적인 타락은 세상사랑의 극치로 하나님께서는
심판이 완숙되어진 시기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예: 소돔과 고모라)

'너희는 이세대를 본받지 말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롬 12:1-2)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몸은 이미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진 몸입니다.
거듭 태어난 자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속에 있음으로
성결한 몸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란과 유혹이 틈탈수
없음을 인식하고 살때에 성결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2) 혼은 인격을 말하며 거룩과 고귀함을 의미 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혼을 연단 시키기 위하여
광야의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에 실패한 이유는 인간의 노력으로는 거룩과 성결에
도달하기 까지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 새로운 해결방안을 주셨는데
이는 본능에서 벗어난 욕망을 예수님 안에서 해결할수 있게
하셨으며, 하나님 뜻에서 벗어난 의지를 성령님안에서
다스려 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셨다'(살후 2:13)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내주하시면서 역사하실때 성령님의 사역은
순간적으로 이루워집니다.
(죄씻음, 영접, 구원, 하나님의 자녀, 영생, 부활, 휴거)

그럼에도 죄성에 시달리는 것은
육체의 부패성으로 인한 중독 증상 때문입니다.
성령님을 우리의 주인자리에 모시고 자아와 의지를
복종시킬때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3) 다시 살아난 영은 성령님이 임하시는 처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은 교재와 계시를 주시는 곳도 영이요,
영성과 영력을 주시는 곳도 영의 처소인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혼과 육이 이끄는 것에서 벗어나
영이 주도하는 삶을 살게된 것이며,
이것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인 것입니다.
이 때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위에 성취하며 살게됩니다.
이러한 삶이 부끄러움이 없는 일군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를 맺으므로
그분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성령님과 바른관계를
맺으므로 신령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수 있습니다.

비록 태어날땐 수치를 지니고 이세상에 나왔으나
이제는 모든 부끄러움을 씻음받은 자들이 되어
남은 삶을 온전한 모습으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사랑받는 자들이 다같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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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전투
(엡 6:12)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실때 먼저
영의 세계를 만드셨고 나중에 물질 세계를 지으셨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께로 부터 왔기 때문에
몸은 이 세상에서 살지만 연관은 항상
영의 세계에 연결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 관계를 파괴하고 멸망 시키려는 사탄마귀의 유혹과
공격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향해야할 영혼이
마귀의 지배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 사실을 영적 싸움이라 알려주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흑암의 권세와 싸워 이겨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 다니엘 기도, 예수님 40일 금식기도, 등)


1.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전투에 대한 이해 범주는 다음과 같습니다.

내적 치유와 상담심리 학자인 '닐 앤더슨' 박사가
신자들을 분석한 경험 결과에 의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전체신자의 65%- 자신속에 있는 죄성에 대하여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회개와 기도생활에 열심을 내지 않으므로
죄의 유혹에 쉽게 빠져 사단의 미혹에 그대로 이끌림.

둘째, 나머지 신자의 15%- 죄의 유혹과 믿음생활의 방해가
죄성으로 부터 생기는 것임을 알고 있으나
육신의 욕망이 강하여 그대로 허용하고 지내는 사람들
(음주, 도박, 마약, 불의, 음란...등)

셋째, 나머지 5%- 자신에게는 성령님이 계심으로
무엇을 하던 미혹받지도, 잘못하지도 않는다 여기고
자신의 고집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넷째, 전체의 15%- 죄된 생각과 유혹이 어디에서 부터 오는 지를 알며
마귀의 틈탐을 허용하지 않고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여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욥과 같이 애매한 고난을 받을수도 있고
가롯유다 같이 의심이 들어 주님을 배반하는 경우도 있는 것을 봅니다.


2. 사탄마귀는 두가지 방법으로 성도들을 공격합니다.

1) 전략적인 방법으로 공격합니다.


첫째, 대적하여 멸하려 합니다.(계 12:17)

하나님의 사역을 공격, 훼방 , 저지,등 맞닥드려 싸우려 합니다.
(예: 스룹바벨 성전건축, 느헤미야 성벽재건, 네로의 그리스도인의 학살, 등)


둘째, 상대방을 참소합니다.(계 12:10)

헐뜯고 비방하고 이간하며 거짓으로 분열시킵니다.
즉,가족,친구,성도,부부,이웃등 오해와 미움을 통하여 관계 단절을 시킵니다.
(예: 고린도교회 성도분열, 빌립보교회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다툼)

셋째, 성도를 미혹합니다.(딤전 4:1)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며 이단사설 등으로 진리에서 떠나게 만듭니다.
(예: 영지주의,몰몬교,통일교,종말론,등)


2) 전술적인 방법으로 공격합니다.

전략이 전쟁의 큰싸움 기준이라면 전술은 국지전(한 지역별로 하는 전쟁)입니다.
사단이 전술을 행하여 우리를 공격하는 근거는 우리의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괴롭힘- 육체를 공격하며 질병으로 고통을 줍니다.
(거라사인, 수로보니게 여인의딸, 벙어리 귀신들린 아들)

둘째, 사로잡음- 욕망을 충동하여 노예로 만듭니다.
(삼손, 데마, 유대교 지도자들)

셋째, 속임- 의심과 거짓을 통하여 믿음에서 떠나게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가롯유다,등)

이들 모두는 믿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유혹에 넘어갈
죄성에 따라 마귀가 틈탐으로 고통과 괴롭힘을
당한 경우의 사람들 입니다.


3. 오늘날 영적전쟁을 세가지 차원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1) 지상적 수준의 영적전쟁 - 악한영이 인간을
직접 공격하는 것에 대한 싸움(벧전 5:8)


'예수님께서 그 열두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악한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마10:1)

현대의학으로 고칠수 없는 병들은 마귀의 저주의
세력때문에 오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불의의 사고나 손실로 빚져 눌리고 사는것은
마귀의 시험으로 올수도 있습니다.(욥)


2) 주술적 영적전투 - 사단의 문화와 그에 사로 잡힌자들과의 싸움입니다.

무당, 뉴에이지, 점치는자, 마녀, 사단 숭배와 자살시도,등
이와 같은 종류의 세력은 육신을 괴롭히는 차원의 영들과는 다른
영혼을 누르고 분열시키며 정신이상의 질환들을 유발시킵니다.
(정령신앙, 운세보는것, 엑소시스트 영화, 초혼자, 등)


3) 전략적 차원의 영적전투 - 공중권세잡은 악한영과
세상 어두움의 세력과의 싸움입니다.


지역의 공중권세잡은 영들의 영향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파괴되고
ㅡ지진, 가뭄, 재해, 홍수, 화산, 전쟁,등 저주가 임하는 도시와 나라들,

또는 독재자로 인한 탄압과 혹사를 당하는 국가 및 백성들
ㅡ북한, 아프리카, 중동, 인도, 네팔, 아프카니스탄 등

전쟁 도발 지역에는 항상 공중권세 잡은 악한영의 사주가 있음을
늘 인식하며 깨어있는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4. 영적전투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두가지를 의지해야 합니다.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계 12:11)


1) 예수님의 보혈이 마귀를 물리칩니다.


세상에서 고소를 당했을때 무죄를 증명할수 있는
증거가 있으면 재판에서 승리함 같이
마귀가 우리를 아무리 참소 할지라도 무죄의 보증이 있으면
더 이상 참소나, 해를 주지도 못하게 됩니다.

그 보증이 바로 예수님의 보혈입니다.
이는 우리의 죽음을 대신하여 흘리신 것입니다.
따라서 마귀의 참소의 근거는 모두 다 없어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흘리신 보혈은 부활의 근거이며
부활은 사망을 물리치고 승리한 증거입니다.

사망권세란 죄의 권세이며
그 권세는 마귀가 쥐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이 죄와 사망권세를 이긴것은
예수님이 마귀를 이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내안에 그리고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
머리에서 발끝까지 나를 덧입혀 주고 계시면
어떤 해도 받을수 없을뿐 아니라, 그 피가 나에게도
죽음에서 승리할수 있는 부활의 증거가 되기 때문에
패배한 마귀는 그 피 앞에 설수가 없게 됩니다.


2) 예수님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 칠수 있습니다.


이 우주 만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 졌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곧 능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병자를 고치시며
귀신을 좇아낼때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중풍병자, 백부장 하인 ,나사로, 야이로의 딸 ,등 )

그런데 이 말씀의 권세를 믿는자인 우리에게도 넘겨 주셨습니다.

    '믿는 자들 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막 16:17-18)


믿음은 믿음의 대상과 함께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때 함께 계신분이 말씀대로 역사하여 주십니다.

영적 전투에는 내적 무장으로서 보혈을,
외적 싸움으로서 말씀을 사용해야 합니다.

이때 우리들은 모든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님의 보혈과 말씀만을 의지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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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

(계 2:10)



인간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하나님의 부르심을 세번 받게 되는데
첫번째 부르심은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하여,
두번째 부르심은 구원받은자에게 사명을 주기 위하여,
세번째는 천국으로의 영원한 부르심이 있습니다.

구원을 위해 부르실땐 감사함으로 순종해야하고
사명으로 부르실땐 충성으로 복종해야하고
천국으로 부르실땐 기쁨으로 달려 가야 합니다.

우리들은 현재 두번째 부르심의 시기에 놓인 사람들입니다.
이 시기가 중요한 이유는 하늘나라 에서의 상급이
이 시기에 열매에 따라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4:2에는 '맡은자들에게
구할것은 충성이라' 하였습니다.


1. 충성이란 무슨 말인가요?


충성은 헬라어로 '피스토스'인데 그 의미는
'믿을만한','신뢰할 만한',이란 뜻이며

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오직 믿음을 통하여만
충성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충성은 믿음을 전제로 하고 믿음은
이미 충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충성에는 충성할 대상과 충성을 느낀 당사자가 있어야 하는데
성경에서 가장 충성된 사람을 두사람 꼽고 있는 것을 봅니다.

히브리서 3:5-6 절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한 자'이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에서 아들로 충성한 분'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아버지와 자녀 관계에선 사랑으로 충성해야하고
사역에 관계에선 헌신으로 충성해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것입니다.


2. 그런데도 인간은 하나님께 충성하기 싫어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인의식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이 세상을 다스리는 관리자로 사명을 주셨는데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관리자의 신분을 잊고
마침내 주인의 행세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감당할수 없는 자리에 앉게 되었고
해결할수 없는 문제들을 짊어지게 된것입니다.

죄,사망,질병,고통,수고를 짊어짐으로 사단마귀의
종의 신분으로 전락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상황에서 벗어날수없는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시어
우리를 자녀로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된 혜택을 받기는 좋아하는데
여전히 죄성은 남아있어서 주인의식은 버리기 싫어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이점을 고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시다' 라는것을 인식하고 나면
그때서야 마음속에 충성심이 우러나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3.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떤 자세로 충성해야 될까요?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을 세가지 자세로 충성할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은 군사로서 충성된 삶을 살아야합니다.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4)

이 세상은 영적 전쟁터요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
소집된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들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적 전투를 위한
 갑옷을 만들어 입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엡 6:13-17)

옛 말에 군사로 모집된 충성된 자에게 주어진 격언이 있습니다.
 이것을 '군인삼망' 이라 부르는데 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출전할때는 집을 잊어야하고
둘째, 전진할때는 처자를 잊어야하고
셋째, 접전할때는 자신을 잊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에수님도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주어진 십자가를 달게 지고 따라야 한다'하셨습니다.

이는 충성의 대표적인 말씀이 아닐수 없으며 이를 따르는 자에게는
면류관이 상급으로 예비되어져 있음을 성경에서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누리지 못한 면류관의 삶을 천국에서는 꼭 받아 영원토록
승리의 삶을 누리도록 기대 하십시다.


2) 그리스도인은 경기자로서의 충성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고전 9:24)


 세상은 경기하는 경주장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장망성인 이 세상에서 천성문을 향하여
달려가는 경주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도바울은 달려갈길 다간후에 나에게만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자 에게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아마츄어 경주자들이 아닌
면류관을 바라보고 뛰는 프로 경주자들임을 알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승하기 위하여 생활고의 무거운짐이나
얽매이기 쉬운 욕망,등을 벗어버리고 뛰어야 가볍게 뛸수 있습니다.

즉,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고
달려 나가는 삶을 살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3) 그리스도인은 농부로서의 충성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갈 6:7-8)


인생은 씨뿌리는 농부요, 세상은 하나님의 밭입니다.
지금은 성령의 봄바람이 불어오는 따뜻한 계절이요,
얼마있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계절인 가을이 오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은 굳은 땅이라 봄일지라도 기경하여
씨를 뿌러야만 되기 때문에 땀과 눈물이 흐르게 됩니다.

그래서 충성된 농부는 눈물로 씨를 뿌린다 하였고
대신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 하였습니다.(시:126:5)

내가 나의 소득을 위하여 씨를 뿌린다면
충성이란 말은 해당이 안됩니다.
그 이유는 내가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한 구원의 열매를 얻기 위하여
복음의 씨를 뿌린다면 이는 충성이 되는 것입니다.

계시록 22:12절에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상이
내게 있어 각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주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삶에서 주님을 위한 일을 한것이 무엇이 있는가?
매일 점검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이 오실땐 나의 성공도,소유도,지위도,명예도,사랑도
 내가 받아야할 상과 벌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생명과 새삶을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위하여 그분의 자녀로서
살도록 하기위해서입니다.

아직도 우리들이 자신을 위하여 세상의 자녀로 산다면
오늘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 충성된 자들이 되어
하늘의 면류관을 바라보고 사는
참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다같이 노력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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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로서 난 자들

(요 1:12-13)




성경은 인간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써놓은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인간세계를 보고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의 자녀일때는 성경의 말씀은 이해도, 감동도,
 적용도 되지 못하는 황당한 내용의 책이라고 무시해 버린적이 많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부터는 성경만큼 진리의 책이 없을뿐더러
인생의 올바른 삶을 살도록 인도해 주는 유일한 안내서가 아닐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여전히 성경에 대한 신뢰성이 부족할뿐 아니라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지 못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이면 하나님의 눈으로 성경을 보아야 하는데
그분의 자녀 이면서도 세상의 자녀의 눈으로
여전히 성경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시각과 생각,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실한  정체성과 신분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1. 그리스도인은 창조로부터 탄생으로 생명이 바뀌어진 사람임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세상에 사는 인간은 창조된 인간과 탄생된 인간의 두종류가 있습니다.
즉 아담은 창조된 인간인 반면에 예수님은 하나님이 낳은 탄생된 인간이셨습니다.

더 나아가 '낳는다는 것'은 같은 종류에 속한
또 다른 분신이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만들어진 것은
모양은 같으나 내용은 같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자녀를 낳으면 그는 나와 속과 겉이같은 종류의 분신이지만  
입양한 자녀는 사람의 모양은 비슷하게 지녔어도
속은 다른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다시말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으되
하나님과 같은 종류에 속한 존재는 아닌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낳으셨기 때문에 그분의 형상 뿐만이 아니라
속성도, 내면도, 모두 하나님과 같은 또 다른 분신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히1;15)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에게는 아버지가 되신 반면에,
인간에게는 조물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인간은
서로 지니고 있는 생명이 다를수 밖에 없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인간을 자신의 자녀로
다시 낳게 하기 위해여 주님을 보내셨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지니고 있는 생명은
'바이오스'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는 소모성 생명으로 공기,물, 음식,등을
공급 받아야만 유지 되어지는 생명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오에'라는 생명을 지니셨는데
이는 하나님이 소유하고 계신 생명으로 영생의 생명이자
소멸되지도 아니하며 무엇을 공급받아서 유지되지도 않은
생명의 근원을 지니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예수님과 같은
'조오에'생명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우리를 지으심에서 벗어나
다시 낳는 탄생으로 새로 지으시는 방법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을 통하여서만 이루워 질수있게 하였습니다.

'영접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자들 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여기서 하나닙의 자녀란 말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녀란 단어가 헬라어에는 두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휘오스'
즉 양자가 되어 상속자가 되는 자녀를 의미하며

또 하나는 '데크논'이란 단어로 출생으로 인한
본성적인 자녀를 말할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본절에서 하나님의 자녀란 말에는 '데크논'을 사용한 것으로
우리들도 바로 하나님게서 낳은 자녀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예수님을 단지 완전한 인간으로만 여긴다면
우리에겐 여전히 인간의 생명만 남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세주 하나님으로 모신다면
하나님의 '죠오에'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져
다시 '태어남의 역사'가 이루워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가 되어
살아갈수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다는 것은 예전에 지닌것은 모두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죽었다는 그 의미를 잘못 해석함으로
'왜 말씀에는 죽었다고 했는데 옛성품도,죄성도,욕망도,
그대로 내안에 남아있고 하나도 변한것이 없이
신앙생활이 이렇게 힘든가?'하고 의문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셩경적으로 '죽었다'란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 죽임이 존재에게 적용될 때에는 그것과의 관계단절을 의미합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이때 죽음의 의미가 바로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기 보다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끊어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이 죽은 것을 말합니다.

같은 의미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옛사람이 죽은 것은
존재가 없어진것이 아니라 내가 옛사람에 대하여
관계가 모두 끊어진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자아와 죄는 없어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남아 유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버려진 옛성품과 옛주인 임으로
인정할 필요가 없으며 예수님으로 주인을 삼으면
우리는 더이상 죄에 종속되거나
자아를 주인으로 의식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절된 자아와 다시 관계를 유지한다면
옛성품과 옛사람으로 돌아가 버리고 마는 것이기에
오직 예수님만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삶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2) 죽음이 생명에 적용될때는 그것의 완전한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여기서 씨앗이 죽는다는 것은 변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땅속에 있으면서 변화된 모습과
새로운 생명이 열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나타나는 것이 변화된 새 생명의 모습이요, 죽은것은
땅속에 묻혀 안보이는 씨앗의 형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둘 다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안에서 거듭나게 되면 나의 옛성품, 자아와 의지는
주님의 성품으로 가리워지고 성령의 열매와 하나님의 속성으로
다시 변화된 모습이 되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땅이 씨앗의 헌것을 벗기고 새것으로 주입하여 잉태 시키듯,
예수님 안에 들어간 자는 주님이 옛것은 소멸시키시고
성령님의 새것을 주입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산다는 것은 주님이 내안에
내가 주님안에 있다는 인식을 확실히 하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2.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은 성령의 다스림을 받고 사는 사람들 입니다.(롬8:1-2)


관계는 끊어졌지만 자아도 죄성도 그대로 남아있다면,
그리고 변화는 되었지만 옛사람에 중독된 증상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실제로 그것을 처리하는 문제는 심각하지 않을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육신의 속성과 영의 속성에 특징을 알고 대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육신과 혼은 점진적으로 욕망이 소멸되어져 가게 하는데 비해
영의 세계에서는 성령의 역사하심은 단번에 이뤄지게 됨을 봅니다.
(즉, 회개하면 용서함을 받고,영접하면 구원을 받고,믿으면 영생을 얻게 되듯이)


1)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님의 의'가 전가된 거룩한 자들 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고 예수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그러므로 사람들은 구원받는 순간에 '성도'(거룩한자)라 불리워지는 것입니다.
 
즉, 행동이 어떠 하느냐에 따라 신분이 불리워지는 것이 아니라
신분이 결정됨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인간편에서 의지적으로 성화의 길을 가려면
점진적으로 거룩해 질수 밖에 없습니다.
(담배,술,쾌락,욕망 모두 서서히
줄여가며 끊을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내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역사하실때  
모든것이 즉시 이뤄진다는 진리를 믿으면
그분이 단번에 끊도록 역사하여 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옛사람의 남은 성품을 처리하는데는 인간편에서의 노력보다
성령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결단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 입니다.


2) 하나님의 자녀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자들 입니다.


나무의 열매를 보면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알수 있듯이
성도의 열매를 보면 그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직 아닌지를 알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반드시 성령의 열매가 열리게 되어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것은 성령의 열매는 일이 아니라
위치라는 것임을 아는것이 중요합니다.
 
'육신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것과...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이와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5:19-23)

이때 죄와 욕망의 열매가 나타나는 것은 육신의 일로 말미암아
 열리는 반면에 성령의 열매는 나에 의해서 열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굳게 붙어 있을때 그분에 의해서 가지가 열매를 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일과 성령의 열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육은 일을 산출해 내고 그것은 죄로 열매맺게 하는 반면에,
성령의 열매는 자아나 육의 노력을 필요로 하지않고
단지 믿음으로 예수님께 붙어 있기만 하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새 생명을 주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열매맺게 해 주시는 분 이십니다.

성령닙의 역사하심으로 이루워지는 이 모든 협력 사역은
우리가 예수님을 얼만큼 소중히 여기고
신앙생활을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은 신분변화의 확신과 그에 따른 약속을 받아들이는 자세 입니다.
온전히 받아들일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가 되어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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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와 도끼

( 3:10)




하나님은 인간이 좋은 열매를 먹고,

좋은 열매를 맺기 원하십니다.

에덴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어놓고 좋은 열매 맺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음으로

결국 죄의 씨앗을 마음에 심게 되었고,

죄의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되어 버리고 말게 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포도나무가 되어주셨고

죄의 뿌리의 나무에서 가지인 우리를 잘라내어

참 포도나무 줄기에 붙여 주셨음으로 그 결과로

우리들은 참포도의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어떠한 열매를 맺고 있는가

그것을 점검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만일 우리들이 아담의 죄의 씨를 심어

나쁜 열매를 맺고 있다면 성경 말씀대로 심판날에

곧 도끼로 찍히어 잘려져 버릴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열매 맺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씨앗을 마음에 심어 좋은 열매

좋은 보상을 받는것을 우리는 더욱 소망해야 할 것입니다



1.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빛의 열매를 맺게 하여 주십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요한 1서 1:5)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엡 5:9)



랍비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빛에 대한 전설을 보면

빛이 하나님의 보좌에서 나왔을 때 '어두움의 제왕'이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신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너를 어둠의 먼 거처로 쫓아 보내기 위하여

빛을 창조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어두움의 제왕이 그것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가 곧 빛의 흐름속으로 들어 갔을 때 그는 시간과 세상을 가로지르는
 메시야의 얼굴을 발견하였고 녹아버렸습니다.
 
그는 그 때 얼굴을 땅에 대고 소리칩니다.

"이 분은 나와 지옥의 모든 거민들을 파멸시킬 분이시다."


, 어두움은 육신과 자아의 영역이며 세상에 속한 것이며,

빛은 양심과 영혼의 영역이며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을 선택하면 세상에 속해
이기적인 마음으로 살게되어 육신의 죄성의 열매를 맺게되나
 반대로 빛을 선택하면 하나님께 속해 거룩한 빛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즉, 빛의 세 가지 속성에는 다음과 같습니다.

따듯함 (착함의 기본)
깨끗함 (의로움의 기본)
밝음 (진실의 기본)


 

1) 착함 : 그리스도인은 사람에게 보여주고 나타내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이고 사는 사람들 입니다.


만일 사람들 앞을 더 중히 여긴다면

이는 세상에 속한 사람일 것입니다.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그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요 3:21) 하였습니다.

 

2) 의로움 : 인간에게는 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의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의 자식과 의로움의 자녀는 죄와 의로 나타나는 속에

씨앗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씻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니라.’ (요1서 3:9)

 

3) 진실함 : 빛은 우리 마음 속에 어두움을 드러내었고

그 죄악은 예수님의 보혈로 씻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때 드러나게 되는 것이 진리의 바탕입니다.


그러므로 씻기지 않는 죄가 있을때 우리 안에는

회개치 않은 어두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죄를 모두 고백한 사람들이며

이럴 때에 그들에게는 진실함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 5:13)

 

 

2. 예수님으로부터 우리는 의의 열매를 맺게 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둠에서 빛의 세계로 인도하신대 반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직접 오셔서 위로와 평안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항상 기쁨과 감사의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 구하노라’ (빌 1:11)

 


의의 열매 중 대표적인 것은 평강입니다.


연단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다’ (히 12 : 11)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14:27)

 


우리는 주변 환경에 우리의 삶을 의존하여 살고 있고,

환경은 우리의 마음과 육신에 감각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런 삶이 인생의 전부라면 우리에겐 천국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계신 곳과

이 세상에서의 삶 둘 중에 하나를!


그리고 나머지는 부차적인 삶으로 여기고

본 삶을 위하여 준비하는 과정으로 여기고 살아야 합니다.

하늘이 본향이라면 세상은 순례의 길이 됩니다.

 

따라서 고향을 찾아가는 발걸음은 기쁘고

활발한 발걸음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발걸음이

무겁고 마음이 불안하다면 고향보다 내가 있는 곳에

더욱 연연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장막을 예비하면 다시 데리러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안심되는 말이 어디 있을까요?


이 말을 믿지 못할 때 두려움, 걱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의심의 마음 구석에서 의심은 믿음의 정복 대상이며,

정복한 사람에겐 평강의 열매가 맺혀지게 됩니다.

 


3. 성령님으로부터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어둠과 빛을 구분하도록 비춰주셨고

예수님은 곁에 계셨지만 성령님은 우리 안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마음 밭에 성령의 열매의 씨앗을 뿌려주시는 분이십니다.


마음 밭이 좋아야 열매가 열리게 되고 그렇게 하기 위하여

굳은 마음, 욕망의 마음, 염려의 마음 밭을 갈아엎어

세상으로부터 오는 생각을 걸러내고

말씀으로 가득 채우고 살아야 합니다.

 


1) 하나님과의 관계


(1) 사랑 :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2) 희락 : 나에게 구원이 주어진 것을 깨닫는 마음

소망 가운데 살게 됩니다.


(3) 화평 : 내 안에서 죄가 씻음 받은 것을 깨닫는 마음

아버지를 만나는 기대로 살게 됩니다.

 


2)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4) 오래참음 : 인내가 하나님의 기회를 얻는 다는 것을 깨닫는 마음

성취하는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5) 자비 : 나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깨닫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6) 양선 : 나를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깨닫는 마음

넉넉한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3) 자신과 자신의 관계


(7) 충성 : 상급이 주어진다는 것을 깨닫는 마음

면류관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8) 온유 :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깨닫는 마음

땅의 기업을 누리는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9) 절제 : 탐심이 우상이라는 것을 깨닫는 마음

깨끗한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신앙은 열매의 나무를 기르는 삶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도움으로 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만일 우리의 삶속에서도 성령의 열매가 안 열린다면,

성경에 이른 말씀처럼 우리도 '마지막 심판의 날'

나쁜 나무로 관주되어 찍혀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신앙의 나무 옆에 도끼 대신

주님의 손길로 어루만짐을 받는 삶을 사모하는 가운데

성령의 열매가 풍성한 나무가 되도록

옷깃을 여미며 신앙생활을 꽃피우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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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광야란 메마르고 황량하며 위험한 장소'를 가리킵니다.
그럼에도 이 장소가 중요한 이유는 출애굽한 벡성들이
축복의 땅인 가나안을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 해야하는 과정의 길 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축복의 장소에 이르게 하시기 전에
반드시 인생광야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하지만 누구나 다 피하고 싶고 지나가기 싫어하는
이 광야를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허락하실까요?
그것은 광야속에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을때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을 진정 감사하며 누릴수 있게 됩니다.


1.광야는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최적의 장소임을 알게 하십니다.


인간이 일생일대에 외로운을 겪는 시기는
광야의 체험시절입니다.광야는 글자그대로 내 주변에
아무도 남아있는 것이 없는 그러한 곳 입니다.

인간이 외로울땐 사람을 찾을것 같지만, 두려움에 쌓여있는
고독 속 에서는 반드시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그런데도 나에게 주어진 상황속에서 일어나는 실패는 왠말이냐고
때로 주님께 항의 할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부분 주님의 일이라고 열정을 다했으나
결국은 자기를 위한 일이었음을 실패후에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내 힘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힘에 의해 그분을 위해 내가 사는 삶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단지 머리로 이해하고
주님을 쉽게 여기며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그분의 인격을,그분의 능력을 알고
진심으로 주님을 위하여 사는 것 입니다.

광야는 우리들을 배반당한 장소로, 핍박받는 장소로,
고통받는 장소로 만드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겪은 아픔이 그곳에 다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속에 들어갈때에 주님을 알게되고
주님을 이해와 공감으로 직접 만날수 있음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밖에 속해 있는 경우가 대부분 입니다.
그말은 환경에 대부분 동화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외면보다 내면의 세계에서 뵐수
있으신 분이기 때문에 외부와의 관계가 모두 끊어져야
다시 내면으로 들어와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내곁에서 다 떠났을때 몸에 질병으로 홀로 누워있을때
비방과 없신여김을 받고 있을때, 두려움과 근심에 쌓여 있을때
그때가 예수님이 들어오시도록 마음의 문이 열려지는 상태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의 문은 내가 연다고 열려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공감된 상태에 놓이게 되면 저절로 주님을 향하여
열려지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2.광야에서는 모든 짐을 다 내려놓는 체험을 하는 곳입니다.



사람은 역할이 많을수록 그에 따르는 문제의 짐도 많아 지게 됨을 봅니다.
대부분 여성의 경우- 남편의 아내요,자녀의 어머니요,사업의 동역자요
,사역의 리더요,자기 삶의 레포터,등 다섯가지의 역할을 흔히
하고 있음을 봅니다.그럴때에 원하는 것이 능력입니다.


그래서 지칠때마다 '나에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것을 할수 있느니라'하는 말씀으로 무장하고
다시 무리해서 일을 추진하곤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탈진이 되어 쓰러지게 됩니다.

광야에서는 모든것이 무장해제가 된 곳입니다.
자기만이 짊어져야만 모든일이 잘 진행될것으로 알았지만,
그자리에 자신이 없어도 일은 그대로
진행되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랄때가 많이 있습니다.

내가 바쁘고 모든일을 성공적으로 진행할땐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종종 잊어버리고 내가 주관자가 되어,
성과위주에 만족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그 자리에 없어도 일이 잘 진행되어 나가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일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을 그때야 깨닫게 됩니다.

짐을 내가 지고 살땐 행위에 따르는 의를 지니고 살게 되나
그 삶은 주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짐을 다 내려놓으라 하십니다.

우리가 은혜로 사는 법을 배우기 전까지는 절대로 쉼을
얻는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무려 2백만이나 넘는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40년을 지냈습니다.
그들의 능력으로 산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로 산 것일까요?

본인들은 자신의 능력으로 지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때문에 산것임을 알수 있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곳입니다
.또한 그 은혜로 광야를 벗어나는 하나님의 방법을 체험하는 곳입니다.
그때에 축복의 가나안 땅을 들어갈 준비를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엔'은 말합니다.
"고난속으로 들어가 보지 않고
고난의 문제를 해결할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크게 착각하는 것이 있다.
광야에 한번도 가보지 않은 그들이 다른사람들을
그곳에서 이끌어 낼수 있다고 착각한다."라는 것입니다.

이말은 내짐도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이
남의 짐을 어떻게 내려놓게 할수가 있겠냐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 짐을 맡길수 있는 체험이 있을때,
비로서 남의 짐도 맡기게 해 줄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짐을 벗는 체험이 광야의 체험입니다.


3. 광야는 새로운 길을 들어가기 위한 재 무장의 처소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후 성령에게 이끌리시어
광야로 나가셨습니다.그리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모든 시험을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광야에는 나를 쓰러뜨리려는 세력들이 많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그중에 제일 큰 세력이 사탄 마귀이며,
우리에게 낙심,좌절,포기,침체.절망,후회,의심을
넣어줌으로 우리로 하여금 쉽게 쓰러지게 만듭니다.

이때 우리들이 이 세력을 무찌를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말씀의 위력은 대적과 맞닥드렸을때 증명되어 지는 것입니다,
만일 위력이 없다면 예수님없는 말씀을 공포한 것일 겁니다.
믿음이 약한 우리들은 말씀의 능력또한 약합니다.
믿음을 자라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배려있게 다루십니다.

그래서 광야의 기간은 대개 4-5년이 걸리게 되며
그 기간 동안에 순종의 광야의 체험을 톡톡히 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톡톡한 체험이 확실한 믿음을 갖게 만들고
확실한 믿음이 말씀을 사용하는 능력의 근거가 되게 하십니다.

당신께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비젼이 있습니까?
그리고 형편은 광야입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앞에 가나안이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요?
이는 무장을 해야합니다.어떻게 무장을 해야할까요?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최대의 무장입니다.
실패란 예수님 없이 왔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 모시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분을 모셨을때 광야는 끝이 나게 되고,
새 사역이 전개됩니다.

광야를 통과한 사람만이 새 사역을 할수 있습니다.
그것이 광야를 통과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주님을 모시고 광야를 이겨나가십시다.

다만, 한가지 잊지 마십시요!

광야! ㅡ그곳은 바로
오늘 당신이 정복해야할 대상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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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되신 예수님




예수님은 우리삶에서 가장 소중한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실감있게 여겨지지 않는 분 이십니다.

그 이유는 나와 예수님과의 관계가 객관적인 관계에서
주관적인 관계로 옮겨가지 못한 상태에 있을때
체감도도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삶에 모든 문제가 풀려지도록
계획하여 놓으셨고 성령님은 우리와 예수님과의 관계범주내 에서만
하나님의 뜻은 이루시도록 역사하는 분 이십니다.

우리는 흔히 주변에 그리스도인들로 부터 이런말을 종종 듣습니다.
하나님은 조금 알겠는데 예수님은 마음에 잘 와 닫지 않는 다든가,
예수님은 잘 알겠는데 성령님은 잘 모르겠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을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가 '안다(앎)'라는 히브리어 단어 '야다''체험으로 아는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잘 모르겠다는 말은 이해는 가는데, 직접 체험은 하지 못하였을때
이와 같은 답답한 마음에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체험하기 어려운것은 예수님이 계신 자리와
우리의 자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리'란 바로 위치가 아니라 '놓여진 형편임'을 의미 합니다.
에수님이 계신 형편에 무리모두 함께 동참하여 체험으로
주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원합니다.


1.예수님은 나의 구세주 이십니다.(마 1:21)


예수님을 잘 알기 위해서는 그분이 겪은 고통을 깨닳을 때에
이해가 가장 빨리 오게 됩니다.
왜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을까요?

사형언도를 받았으면 감옥에 갇혀 있다가 사형 집행일날
두 강도처럼 십자가에 못박히면 될 것인데도
예수님만은 39번의 채찍에 맞음과...

가시 면류관의 찔림과 주먹질,
더우기 갖은 발길질과 함께 심지어 조롱과 능욕을
그렇게 처참하게 당하고 겪으셔야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하여 이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사 53:5)

인간의 불안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첫째, 마귀를 쫓음으로 하나님께 배반의 아픔을 주었고

둘째, 선악과를 먹으므로 교만하여 하나님을 무시헀고
셋째,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을 분노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평안의 회복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통하여서만
그것이 원활히 이루워질수가 있습니다.
그러려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하신것을
그대로 나에게 보복하실때 회복은 이루워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 보복을 우리대신 예수님이 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예수님을 철저히 외면 하셨고,
벌거벗겨 매맞는 수치를 통하여 우리 인간의 교만을 깨뜨리셨고,
십자가의 달리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 심판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아프게 했던 모든 행위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그대로 겪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깨어진 관계가 다시 회복되었으며,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평회를 누리게 된것입니다.

만일 우리 마음에 평안이 없다면 예수님이 당하신 징계가
우리에게 아직 깨닳음으로 받아들여 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깨닫고 나면 '하나님''나의 아버지'로,
'예수님' '나의 구원자'로 진심으로 느껴지게 될것입니다.


2)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신 고통은 나의 질병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질병과 노쇠는 죽음으로 가고 있는 증상입니다.
병을 이기려면 고통을 이겨야하고
죽음을 이기려면 새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온몸에 살점이 채찍에 갈갈히 찢겨지는 고통은
바로 나의 질병의 고통을 대신 하는것이요,
피가 흘러 나오는 것은 주님의 생명이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나의 죽음에 부어주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나에게는 치료와 새생명이 생기게 된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문제는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받으신 고난을 너무 쉽게 공감없이 받아 들이는 데 있습니다.
공감이 없으면 교류도 없고, 교류가 없으면 적용도 이루워 지지 않습니다.
적용이 이루워 질때만 비로소 체험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체험은 예수님을 나의 가장 소중한 분으로 인식하게 만듭니다.
(예: 감옥에서 거듭난 '챨스 콜슨'이란 분은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대속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영생을 주셨는데
그 이상 바랄것이 무엇입니까?
더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한분만으로 행복을 누릴수 있는 사람 입니다.


2. 예수님은 나의 삶에 주인 이십니다.(롬14:8)


생명이 있는 곳엔 질서가 있는데 그것을 유지 하는 것은 주권자 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생명이 있는 모든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
다스려 지고 있기 때문에 질서도 생존도 이루워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인간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주권에서 벗어나
자신이 주인이 되어 세상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결과 만물은 모두 공존 보존 되는데 반하여,인간만은
고통,질병,저주에 시달리며 고생속에 살게 된 것입니다.

능력이 없는데 책임을 많이 지고 있는 것처럼 불행한 삶은 없습니다.
인간은 운명과 환경을 다스릴수 있는 능력이 없는데 하나님이 만드신것을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해 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다가
지쳐 쓰러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다음과 같은 말을 성경에 기록했습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강건하면 팔십 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 가나이다'(시 90:10)

1)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의 모든 짐을 벗겨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옛 사람에게 옛주인이 있었듯이, 새 사람에게도 새 주인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 이십니다.

나라와 집안에 주인이 둘이 있으면 싸움이 일어나듯이,
한 개인의 영혼속에도 두 주인이 있으면 다툼과 분열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가 옛 주인인 '자아'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혼과 육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난 영에는 주인이 있지만, 혼과 육에는 아직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옛 성품을 지닌 자아가 자리를 차지 하고 있기에
계속 겉과 속이 다른 주인이 부딪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혼과 육은 죄의 근원입니다.
혼이 판단한것을 육이 먹었기 때문입니다.(선악과 사건)

예수님이 오신 것은 혼과 육을 못박아 죽이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미 혼과 욱이 죽었기 때문에
그만 다스리는 자격을 박탈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성경에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 안에서 멸망을 가져다준 자아는 죽은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여전히 무거운것은 옛사람의 죽은 몸과 자아를
가슴속에 픔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짐을 벗어 나에게 맡기라 하십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구원 아래 살게 된다고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2) 나의 자아의 짐을 내려 놓을때 주님은 나의 주인의 자리에 앉게 되십니다.

내안에 그리스도가 살고 계실때 실제로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그동안 내가 좋아하고 바라보고 쫓아갔던 세상적인 삶이
이제는 예수님이 좋아하고 바라보고 계획하신 삶으로
바뀌어 져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안에 계신 예수님을 따르게 만드는 혼과 육의 순종은
믿음과 말씀으로 대치가 되어 생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에 주어지는 것이 지혜,의로움,거룩함,구속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수있게 되는 것입니다.(고전1:30)

예수님의 지혜는 창조질서의 능력이며 생활의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의 회복이며 성화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구속함은 저주에서 벗어난 자유함이며 승리자의 삶인것입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이 나에게도 승리하게 해 주심으로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살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3.예수님은 나의 세례주 이십니다.(행 1:5)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에수님과 같은 아들을
하나님 나라에 가득 채우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자녀로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오셔서 가르쳐 주신 모든것을 제자들과 무리들이
이해는 했어도 예수님을 닮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출생과 생활이 예수님과 인간과는 서로
다르다는 것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즉,에수님은 성령님으로 잉태하였고 그분의 임재한 삶을 살았고
그분으로 인하여 부활하신데 반해 인간은 죄 가운데 태어나
죄성으로 살며 육신이 썩어 땅속에 묻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영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의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실패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것입니다.

육신으로는 예수님과 연합의 한계가 있으므로, 
영으로 다시 오셔서 직접 인간들 속에 내주 하셔야
자신과 같은 삶을 살수 있다는 것을 아시고,
그 길을 열어주신 방법이 '성령세레'이며 이는
예수님이 죽으셔야만 성취할수 있는 사역입니다.

오순절날 '마가 다락방에 모임 120문도'에게 약속하신
성령이 충만히 임하시자 그들은 권능을 받은 중인으로서의 삶을 체험하고
그 후부터 눈에 띄게 다르게 변화된 삶을 살게 되었음을 성경에서 보여 줍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려면,
주님으로부터 성령세레를 받아야만 합니다.

1) 성령세레는 나의 속이 모두 비어있을때 충만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사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요20:22)말씀 하셨습니다.

이때 왜 말씀만 하시지 않고, 숨을 내 쉬었다는 동작을 나타내셨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성령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를 알려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숨을 내 쉰다는 것은 속에 있는 것을 다 비운다는 의미이며
비워야 들이 마실수 있는 공간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즉, 내속에 있는 믿음에 반하는 세상적인 모든것을 다 비워버려야 합니다.
성령님이 오시기에 걸립돌이 되는 의지와 욕망적인 것들을 다 비워야 합니다.
비워지지않은 상태에서는 채워질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예: 사도바울의 경우 그가 지녔던 가문 ,명예,신분,학문,열정,의를 모두 버림)


2) 성령세례는 예수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기로 마음 먹었을때 내려 주십니다.


성령세례를 받으려는 소원은 대부분 능력을 소유하여
자신의 삶과 사역에 내 의도대로 사용하여 크게
부흥을 기대하며 구하는 것이 대부분 입니다.

그러나 주님 께서는 오히려 성령님의 능력이 우리를 소유하여
예수님의 뜻대로 사용되어 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증인의 삶은 순교적인 각오의 삶이며 순교는 내 뜻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사는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실예로 12제자와 120문도중 많은 사람들이 순교하였으며,
그 피의 댓가로 로마가 변화되어 그리스도 국가가 된 것입니다.

댓가 지불을 각오한 진정한 예수님의 일군으로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 에게는
누구든지 주님은 성령충만의 세례를 내려주실 것 입니다.

우리모두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나의 주인으로 나의 세례주로 모시고,
능력있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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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세례
(행 1:5-8)




신앙생활 하면서 반드시 이해 되어야 할 부분 인데도
 아무리 노력을 해도 선명하게 깨달아 지지 않는 부분이 두가지 있음을 봅니다.
한가지는 삼위일체 부분이고, 또 한가지는 성령님에 대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전자는 비교적 확실한 이해가 없어도 대부분 수긍하는데 비해
성령님의 사역에 대하여는 각각 주장하는 것이 다름을 봅니다.
주장마다 다 일리가 있고 성경구절 인용이나 사례를 들어 말하고 있음으로
서로가 부인이나 반박할수 없는 일임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신앙생활하는 성도들 에게는 각 주장대로 받아들이고 노력해도
무언가 석연치 않는 부분들이 생기는데 문제가 있음을 봅니다.
들었을 때와 경험했을 때와 차이가 있는가 하면,
경험한 부분이 뾰족히 정의된 말과 부합이 잘 되지 않아서,
이 부분은 어디에 속한 것인가...등 의구심을 가지고
그냥 지내는 경우도 적지 않음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부분을 겪으면서 성령론에 대한 서적들과 작은 경험에
성령님 역사하신것을 토대로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참고가 되시길 바랍니다.


1. 성령님의 사역에는 일반사역과 특수사역이 있으며

작용은 간접경로와 직접경로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능력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에
어떤 조건이나 형편 상황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천지창조의 능력)

다만 역사하실때 고려하시는 한가지 경우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자아상태에 따라 선택적으로
그사람에게 맞게 역사하실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자아가 지배하고 있는 영이 죽은 혼과 육의 상태에서는
공허, 갈망, 깨달음, 회개, 중생, 회심, 성화 순으로 차차 자아가 점령하고 있는 부분을
성령님의 점진적인 임재를 통하여 확대시켜 나가기 시작하십니다.

이때 이 과정을 일반사역이라 생각하면 쉽고, 주로 개입하심의
방법에 따라 다음과 같은 양상으로 즉;

'말씀으로의 깨우침, 기도중에 비전이나 환상, 꿈속에서의 계시,
은사있는 사역자로 부터의 예언, 안수시 병고침, 나아가서는 성령의 은사들'
점점 주어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령님의 일반사역에 의한 삶은 대개 생활면에서
주로 필요한 역사하심 이지만, 더 나아가 사명받은 삶을 살아가야하는 단계가 되면
사역면에서 자아를 처리하는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자기 부인이 있은 다음에야
사명의 십자가를 질수 있음을 특별히 마음에 새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줓을 것이니라'(마 16:24)


제자들은 모두 거듭나고 성령의 은사의 능력을 행하고
제자로서의 성결한 성화의 삶을 3년이상 경험한 사람들 이었으나
예수님이 잡하시던 밤에 무서워 자기들이 한 장담은 잊어버린채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같이 상황에 따라 처신하게 만드는 주관자는 '자아'입니다.
그러나 말씀에따라 처신하게 만드는 주관자는 '주님' 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관자가 되시기 위해서는
인간의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주님의 열한 제자 에게서 보고 알수 있습니다.

 '위로부터 능력을 덧 입히울 때 까지 이 성에 유하라'(눅 24:49)

이외에도 '성령세례와 권능을 받을것'(행 1:5-8)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특수 사역은 직접 경로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령세례 형태로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중생으로 영이 살아난 성도'들은 혼의 법주를 넘어
'영'이 다스리는 주권자가 되도록
성령님이 속사람을 강건케 해 주시는
마지막 사역이 성령세례에 속한 부분입니다.

이를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이 영으로 나의 마음에 임하시어
 주관하는 상태가 중생의 완성의 상태이며,
성령님이 이때 성령세례의 선물로 주어지는것이 권능이며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힘과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특수 사역에는 그분의 속성이 나타나도록
우리를 다음과 같이 충만케 하십니다.

'성품면'
에서는 열매로 맺게 하시고
'능력면'에서는 불,생수,바람과 같은 특성들을
'각자의 성격에 맞게 베플어 주심'
으로
사명을 위해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수 있도록
직접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2. 성령님의 사역에는 5가지 단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1) 중생 :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영이 태어남을 말하며
성령님이 주도 하시는 사역입니다.(요3:5)

이는 성경의 말씀이 중생의 도구로 쓰여집니다.(벧전 1:23)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과 위치는 바뀌었으나
자아가 주인인 우리의 옛 성품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삶은 여전히 인본주의 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주로 많이 하고 살게 됩니다.

이런 상태는 성령세레를 받기전의 상태이며
그 이유는 성령세례는 예수님 만이 줄수있는 사역 인데 반해,
중생은 성령님이 주도 하시는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와는 구분되어진 상태라고 볼수 있습니다.

2) 성령의 기본세례 : (고전 12:13)

거듭난 영혼에게 영적 자녀로 성장 시키며 은사를 베풀어 주심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섬기고 봉사할수 있도록 베풀어 주시는 세례입니다.
이것은 성령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세례임 으로 그때 받는 은사는
성령세례시에 임하시는 은사와는 성격상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방언이며,
'성령세례'시에 내려진 방언은 '표적방언'(각 나라 언어)인데 비해
'성령의 은사로 주어진 방언'은 자신만이 할수있는 '은사방언'으로 구분 됩니다.
성화의 정도와 믿음의 정도에 따라 성령님이 베푸시는 세례 정도도 다소 다릅니다.


3) 성령의 생활충만(엡5:18-21)

성령의 충만함이란 성령으로 가득차 있을 때를 말합니다.(주로 생활면에서)  
성령의 기본세례를 통하여 성화의 과정을 인도하시는 성령님은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도록 역사하시기 시작 하십니다.

9가지 열매가 점점 자라면서 생활 할때에 죄에 속한 성품이
세속의 삶에서 벗어나 은혜의 삶으로 변화되게 됩니다.

ㅡ술과 방탕을 멀리하고
시와 찬미 노래,찬송,감사,경외,섬김,순종,등의
생활충만한 삶인 것입니다.


4) 성령의 능력세례 (행1:8)

우리의 삶이 성령의 생활충만한 가운데 살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인 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즉, 전도와 양육과 제자된 삶을 살길 원하십니다.

이 사역을 수행하기 위하여는 특별한 능력이 필요한데,
이때 예수님이 직접 부어주시는 세례가 바로 '성령세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의 체험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의 체험이라면
성령세례의 체험은 하나님의 증인이 되는 '권능의 체험'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영으로 내주하시며 나의 영, 혼, 육,을 주관하여 주심으로
자아의 지배에서 벗어나 주님만을 섬기는 삶을 살수 있게 됩니다.


5) 성령의 능력충만(행4:31)

성령세례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권능 사역'의 시작이며
오직 한번만 주어질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역중에는 여러가지 영적전투에 넘어야할
위기들이 많이 있음으로 능력충만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성령세례받은 사도들이
공회의 대 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의 위협과 핍박을 받아
사역을 정지 당하게 되자 한데 모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 하였습니다.

그러자 모인 곳이 진동하고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제자의 길은 세상으로 보면 '고난의 길'이나,
주님편 에서는 '영광의 길'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살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동행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며,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성령세례를 통하여
 오늘날 우리의 주어진 사명을 완수 할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간구하여
 성령세례 받기를 다같이 사모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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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
(합3:2)



'부흥이란 무엇일까요?
'
부흥이란 히브리어로 '하야'란 단어인데,
그 뜻은 '되살아나게 하다' 란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부흥이란 지난날의 침체되고 쇄잔하였던 과거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여 다시 회복되고 복구된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뗄래야 뗄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바로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이 세상에서
완성하시기 위하여 계속 진행, 간섭해 나가심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사역을 방해 차단 시키려는 세력이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끼어들어 인간을 죄의 길로 유혹하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길에서 떠난 인간들에게 내려진 것이 재앙인 것입니다.

환경의 저주, 질병의 저주, 대적의 저주 등이 임하게 되고
이 같은 삶은 침채를 가져오며 혼란한 가운데
어두움의 세력에 눌리는 불행한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회복을 위하여 주어진 사랑의 매이며
깨닫고 돌아오는 자들에게는 부흥으로 더 큰 축복을 허락하십니다.
오늘날에는 부흥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나라, 민족, 사회, 개인 전체가 침체기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부흥을 이루기 위하여 준비할 때임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부흥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1. 주의 일과 사람의 일을 먼저 구분하는 분별력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의 일이란 주께서 이 땅에 구원을 위하여 진행하고 계시는 모든 일을 말하며,
이 일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가운데 진행이 되는 일을 말합니다.

반대로 사람의 일이란 인간이 이 땅에 자신의 욕망을 위하여
진행하는 모든 일을 가르키며 이 일은 언제나 인간이 만족, 보람,
쾌락을 추구하는 쪽으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지는 일들을 말합니다.

이 일이 주의 일인가, 사람의 일인가룰 구분하기 위해서는 성령안에서 기도함으로
영안이 열려 판단할수 있는 지혜를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 생활을 해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일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싫어하시는 일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늘날로 말한다면 다 신자들이자 성도들 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일을 하다가 징계를 받은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인 우리들도 주의 일보다 자신의 일을 위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염두해 둘 때에
우리들은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주님 중심 생활로 돌아올 수 가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거듭남의 삶을 살수 있도록
먼저 주님꼐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거듭난 사람은 하늘의 일을 목적으로 살고 있는데 반해,
거듭나지 못하면 자신의 일을 목적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거듭나기 위해서는 교회가 거듭나야 하고,
교회가 거듭나기 위해서는 주의 종이 거듭나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님은 이를 위하여 오신 분이시며 죄, 회개, 회심, 세례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새워 주십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듭나기 전의 백성들이었다면
초대교회의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성도들은 거듭난 사람들임을
비교하여 볼 때 그들의 생활면에서 뚜렷이 구분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감화를 받은 사람들은 주님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도드리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2. 부흥의 시기는 하나님께서 정하시며 준비가 된 곳에 일어나게 하십니다.


수년내에란 올바른 때를 의미하는 말이며 판단의 기준은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그 때는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때를 말하며 내려주시는 도움이
항상 가장 적절한 때에 적합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들으시고 미리 도와주신다면 우리는
자신에 대하여 실망하는 것을 배우지 못하며 교만해 질 수 있게 됩니다.
또는 그분이 우리를 너무 늦게 도우신다면, 우리는 그 분을 믿는 것을
배우지 못하기 때문에 본연의 자세를 깨우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가장 적절한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준비된 자가 되기 위하여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죄의 깨달음, 회개, 회심, 세례 모두 다 중요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러나 그 것에 완성은 결국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대게 하나님께서 직접 깨닫게 역사하심으로 생성되게 됩니다.

하나님께 향한 다윗의 고백을 보십시요!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대로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시 119:132)


부흥은 생명력입니다.


'되살아난다'
'죽다시피 한, 생명이 활력있고 생생하게 다시 살아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우리에게 생명으로써 느껴질 때 만사는 다 변화되며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축복으로 주어지는
그 분의 특별 은혜이기도 합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늑 1:5)

130년간 허물어져있는 이스라엘의 성벽을 단 52일만에 완성시킨 것과
온 백성이 황폐한 환경에서 벗어난 부흥은 바로 하나님께서
느혜미야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보시고 감동하여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세상에 사랑의 모든 대상에서 떠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아올 때 부흥은 오게 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계속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긍휼은 우리의 불행과 관계되는 단어입니다.
죄는 우리에게 진노를 가져오게 하는 반면에
사랑은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게 만듭니다.
사랑을 느끼시는 하나님은 이제 부흥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항상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의 죄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회개와 사랑을 가지고 있다 해도 간절한 요청이 빠진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은 약해집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상한 심령을 더 돌아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겔 36:37)

1) 전심으로 구하는 기도가 능력이 있습니다.

전심으로 구한다는 말은 나의 소원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즉, '엘리야의 기도'
전심으로 드린 기도의 전형적인 모습임을 봅니다.

대게 많은 사람들이 부흥을 위해서 세미나, 특별 부흥 성회 등
개최를 많이 하고 준비하지만 부흥은 전적으로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는 것임으로 기도로 엎드려 구하는 것이
먼저 선행되어야 효과적입니다.

2) 말씀으로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초대교회가 부흥된 것은 사도의 가르침이
매일 모이는 성도에게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생명이 있는 가르침은 예수님에 대하여 가르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설교가 모든 성경 구절 주제 중에 예수님이 한 주제 설교 제목의 대상이 될 때
나머지 대부분은 세상에 대상을 들려주는 죽은 설교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증거되고 있는 곳에 성령님을 보내십니다.
그것은 죄, 회개, 구원, 영생, 심판, 천국에 대한 진리의 터전이
마련된 곳에 말씀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부흥입니다.
부흥이 오면 모든 면에서 일들이 회복됩니다.
또한,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게 되고
 질서가 잡히며 순위가 바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되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 지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신년도엔
 '부흥'을 준비하고 기대하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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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름




이름이란 단순히 호칭이 아니라
그 이름을 소유한 사람이 내포하고 있는 본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들이 인격으로 나타난것을 대변하는 칭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도 본성을 나타내는 호칭으로
다양한 성품들을 대변하는 여러가지 이름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인간의 이름은 하나인 반면에 하나님의 이름이
여러가지가 있는것은 존재와 능력의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점진적 계시로 진행됨에 따라 이름도
구원역사에 발맞추어 계시적으로 알려주십니다.
이에 자신의 이름을 계시하신 순서로 살펴보겠습니다.

1.전능하신 하나님


엘(El)이라는 호칭으로 불러지며 이는 하나님의 성 입니다.
이름이 사용되어 질때는 복합어로서 불리어 집니다.

1)엘로힘( Elohim) :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뜻하며
이 이름은 복수형으로 삼위일체임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창1:1)

2)엘 엘리온(El-Elyon) :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뜻하며
오직 한분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창14:19)

3)엘 샤다이(El-Shaddai)
:'능력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뜻하며
그의 백성에게 축복과 기적의 원천이신 이름입니다.
(눅 1:49)

4)엘 올람(El-Olam) : '영원자이신 하나님'을 뜻하며
하나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신 분 이심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창21:33)

이상의 4가지 이름이 가장 많이 쓰여지며
그 외에도 '엘로아'(Elohim의 단수이며 욥기에서 사용되어 졌음),
'엘로이'(Elroy)-'감찰의 하나님'(창16:13),의 이름으로 불리어 지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피조믈과 구분이 되시며
우주만믈을 전지전능으로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 해야하는 원인이 여기에 있으며
오직 영광을 올려드려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2.여호와 하나님


'여호와'(YHWH)란 발음은
히브리어 자음에 아도나이의 모음을 붙여 만들어진 이름으로
야훼가 정확한 발음입니다. 그이름의 뜻은 언약을 맺으시고
성취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이란 의미이며 '스스로 있는 자'라고
모세에게 계시하신데서 유래 되었습니다(출3;14)

하나님의 약속하신 언약의 이름의 종류는 다음과 같습니다.

1)여호와 이레(Jireh) : '예비하시는 하나님'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믿음으로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 했을때
이삭을 대신하여 수양을 준비하신데서 유래되었습니다.(창22;14)

2)여호와 라파(Rapha) : '병을 치료해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때 모든 질병을 떠나게 하십니다.(출15:26)

3)여호와 닛시(Nissi) : '승리의 깃발 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과 싸워 승리한데서 유래되었습니다.(출17:15)

4)여호와 샬롬(Shalom) : '평강의 하나님'
 기드온이 동방군대를 맞아 싸울때 단을 쌓고 부른 이름입니다.(삿6:24)

5)여호와 라아(Raah) : '목자이신 하나님'
우리를 일생동안 의의길로 인도하십니다.(시23:1)

6)여호와 찌뜨케누(Tsidkenu) :'우리의 의가 되시는 하나님'
오직 하나님 만이 의로우십니다.(롐23:6)

7)여호와 삼마(Sammah)
: '거기 계시는 하나님'
예루실렘 성전을 바라보며 에스겔이 부른 이름입니다.(겔 48:35)


창세기에도 여호와의 이름을 계시하셨지만(창15:7),
그때에는 그 이름의 속성을 정확히 나타내지 않으시고
구속사의 출발이라고 할 출애굽 때에
비로서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신
구속의 여호와 이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출6:3)


창조주로서의 위엄과 능력을 갖추신 전능하신 하니님은
구속사에서 인간을 도우시며 자신의 뜻을 함께 이루워 나가시는
동역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십니다.


3.아버지 하나님(Father)


구약에서의 하나님은 인간을 주로 피조물중에서
가장 사랑하는 대상으로 여기시고 이땅에 자신의 나라를 세우는데
필요한 백성으로 관계를 가지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따라서 관계의 기준이 언약이었으며
이행 여부에 따라 실행 여부도 정해지는 조건적 관계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장 큰 본성은 사랑이시라
율법을 지키는데 실패한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사 인간이
만들어진 부분에 의거하지 않으시고,(연약한 흙)
창조된 부분에 의거하셔서(생기)인간을 재창조 하시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게 하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며
이로 부터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의 부모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규칙과 상벌로 다루시는 것으로 부터
 은혜와 사랑으로 베푸시는 보호자가 되신것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에게 세가지 선물을 약속하셨습니다.

1) 모든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자녀로 일생을 약속하셨습니다(롬8:28)
2) 모든것을 예비하시며 공급하여 주실것을 약속하셨습니다(고전 2:9)
3)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실것을 약속하셨습니다.(약 2:5)


그런데 이것을 받기 위해서는 한가지 중요한 단서를 붙이셨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자' 이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반드시 사랑으로만 증명될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한 생명이기 때문 입니다.

부모와 함께 살거나 자신을 닮았다고해서 자녀가 입증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부부도 남남이요, 부모와 자녀간도 남남이 되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사랑도 유산도 주기 원하지만
남의 자녀를 위하여 예비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자신의 자녀에게 천국도 사랑도 주기 원하시지만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세상의 자녀에겐 예비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일 큰 계명 즉, '네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는 말씀을
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이시기 때문에 후사로서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으시고 다스릴 권리가 있는 분이고
사실상 죄인인 우리는 전혀 해당이 되지않는 존재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동등한 자격을 얻어
하늘나라의 유업을 똑같이 부여 받을수 있게 된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이름의 마지막 계시가 아버지라고 알려주신것은
 천국의 도래가 가까와 졌음을 의미하는것이며
이제 당신의 '자녀다운 자녀'를 고르시어 구원의 계획을
모두 마무리 하시겠다는 표현이십니다.

세상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은 반대입니다.
세상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살아가는데 필요한 사용의 대상이며
하나님은 사는데 필요한 사용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심을 우리가 바로알때 우리는 그분의 진정한
자녀가 되어 성숙한 삶을 살게 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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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젼 (vision)
(행 2:17)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꿈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꿈을 그릴때마다 마음에 소망과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꿈이라고 다 이루워 지는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러는 
깨어지는 꿈도 있으나 바른꿈은 인생의 큰 성취를 이루게 할뿐만 아니라
살아가는데 활력을 주는 원동력이 되므로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특히 성경에서는 젊은이들은 비젼을 갖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어야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미래에 대한 꿈 에는 3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소원이며 이는 희망과 기대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소원은ㅡ'티그마'라는 단어의 뜻으로 밧줄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바
구원을 이루는 도구로 쓰여지면서 의미가 소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예:'두 정탐꾼을 살린 라합의 붉은줄'(수 2:18)

그러므로 자신의 욕구나 바램을 이룰수 있는 동기를
끝까지 부여잡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둘째는, 이상이며 이는 인간 개인이 소망적으로 품고 있는 최상의 바램입니다.

이상은ㅡ인간의 지성과 감정의 완전한 만족을 추구하는 것으로
절대적 이상은 완전한 인간의 상태를 바라보는 영화의 단계를 의미하며
상대적 이상은 성화의 단계를 이루워 나가는 현실적 이상을 의미합니다.

셋째는, 비젼이며 이는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소망과 통찰을 그려보고 있는 상태입니다.

비젼이란ㅡ하나님께서 계시하여 주시기 때문에 말씀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아브라함에게 주신말씀(창12:1)

소원은 지니고 있는 상태이며, 이상은 품고 있는 상태이며
비젼은 그려보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가장 선명한 꿈은 비젼을 갖는 것 입니다.


2. 꿈꾸는 자가 꿈을 이룹니다.


1) 비젼은 꿈을 가진자를 성공에 이르도록 끌고가는 힘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 한예로 야곱과 에서는 한 부모의 한형제의 동갑인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의 결과는 매우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꿈을 지닌 야곱은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조상이 되었으며
나라와 민족을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에돔 족속의 조상이 되었으며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다가 나중에는 멸망당하게 됩니다.
    
비젼을 가진 자의 힘은 무엇일까요?

자기확신(꼭 자신의 꿈을 이루리라는 자신감),
창의력(성취를 위한 여러가지 생각) 상상력(이루워진 후에 운영에 대한 생각),
열심(열정으로 덮어있는 마음),집중력(한 목적을 향하여 초점을 맞춘생각)
이상과 같이 다섯가지의 힘을 지니고 살기 때문에 활력이 있습니다.

2) 비젼은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도와 주기 때문입니다.

에서가 장자이지만 명분과 축복을 다 잃어버리게 된것은
그가 쾌락과 취미생활에 몰두 하였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야곱은 장자권의 중요성과 ,아버지 이삭의 축복권이
후계자가 되기에 얼마나 소중한 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장자권도 축복권도 얻을 기회를 잡게 된것입니다.

소원은 무관심을 관심으로 바꾸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지혜를 지니게 만들어 줍니다.
보이는 눈과 안보이는 눈의 차이는 관심으로 결정되며
관심은 소원 여부에 따라 켜졌다 꺼졌다 하는
등불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3. 비젼을 이루기 위하여는 다음과같이 3가지를 노력해야합니다.


1) 목표를 분명히 세워야합니다.

비젼이 있는 자와 없는자의 차이는 목표가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됩니다.
우리가 지닌것이 꿈이냐 비젼이냐의 차이는
형체가 막연하냐 아니면 뚜렸하냐에 따라 구분됩니다.

우리가 지닌것이 이상이냐 비젼이냐의 차이는
상상적이냐 아니면 현실적이냐로 구분됩니다.

2) 세운 목표를 항상 그려 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바라보고 있는 대상이
그 사람의 생각을 지배하기 때문에 많이 바라볼수록
목표는 선명하게 다가오게 됩니다.

예:사랑하는 이성을 바라보면 마음은 결혼으로 가득차고
좋아하는 사업을 바라보면 사업을 구상할 일로
생각이 가득 차게 됩니다.

결국 사람의 생각과 마음은 바라보는
대상쪽으로 이끌려 갈수밖에 없습니다.

3) 기회라고 생각할때는 행동해야 합니다.

기회는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만 보여집니다.
그리고 성공과 실패의 차이는 기회를 잡느냐,
못잡느냐의 결단에 달려있습니다.
망서릴 때에는 기회는 평범으로
바뀌어지고 말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단력이 있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십니다.(예:여호수아)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것은 비젼입니다,
그러므로 비젼은 우리의 생각이나 마음, 생활이나 삶을
모두 바꾸는 행복의 필수적인 요인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의 자녀로 비젼을 가지고
우리의 삶속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다같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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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넘어선 삶
(잠 3:11)


고독이란 사람에 따라서는 즐길수도 있는
내면의 자신만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견디기 어려운 탈피하고 싶은 심연의 공허함과
절망속에 갇히게 만드는 상태라 괴로움을 겪게 만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고독을 벗어나고 싶어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보나 오랜 세월을 창살없는 감옥에 갇혀서
헤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속사람과
한편 생활에 파묻혀 잊어버리려는 겉사람의 이중적인
생활방식을 영위함으로 해결하려 듭니다.

그러나 사실상 괴롭지만 견뎌야하고 싫지만 받아들여야만 하고
어렵지만 벗어나야만 하는 숙제가 바로 고독의 세계입니다.


1.인간은 처음에는 상대 고독만을 지닌 존재였습니다.


아담에게는 영생도 능력도 풍요도 일할 영역도
다 주어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러운 것은 모든 종류마다 짝이 있어
외롭지 않게 지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외로움은 상대가 없어서 오는 허전함 임을 느낀 것 입니다.

그러면 옛날에는 사람이 없어 고독했지만
요즈음은 쌓인것이 사람인데 왜 고독할까요?
그것은 나와 맞는 상대를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친구도 이성도 일도)

아담이 상대 고독에서 벗어날수 있었던것은
아내인 하와를 만나고 나서 부터입니다.
즉,서로 상대방이 자존심없이 마음을 주고 받을때
속에 있는 빈 공간이 채워지게 됩니다.
고독은 채워져야할 부분이 비어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아담과 그 아내 두시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 하니라'
(창2:25)

2.인간은 죄를 지음으로 절대 고독을 지닌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구조는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되어져 있기 때문에
각 부분마다 적합한 것으로 채워져 있을때
진정으로 행복한 인간이 될수 있습니다.

인간이 죄를 짓게 되자 영혼속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영이 떠나므로 진공상태가 되어 영이 닫쳐버린 것입니다.
혼과 육은 상대도 일도 있으므로 채워질수 있었으나
영은 비워있기 때문에 안정을 누릴수가 없게 된것입니다.

'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욥기 32:8)

무지는 불안과 공허를 유발시키며 그 결과가 고독입니다.
그리고 영혼이 하나님을 떠나 홀로 있는것 그것이 영원히 인간이 해결할수 없는
절대 고독의 존재가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절대 고독 속에 몸부림을 치다가 죽은 대표적인 사람을 들자면
아마도 가장 행복한 삶을 산것 같았으나
가장 불행한 삶을 산 사람은 솔로몬 왕일 것입니다.
'모든것이 헛되도다.'하는 독백은
고독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결론입니다.


3.인간의 완성은 고독을 통하여 평안을 찾을때 이루워 집니다.


고독은 자라는 습성이 있습니다.생명체가 자라나듯이 고독도 자랍니다.
그런면에선 고독을 자라도록 영향을 주는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죄성 입니다.
마치 믿음이 자라도록 영향을 주는것이 말씀인것처럼
말씀은 영혼을 채우나 죄는 마음을 채웁니다.
인간의 완성은 말씀이 온전히 영혼에 채워질때 이루워지게 됩니다.

반면에 인간의 파멸은 죄가 욕망으로 몸에 채워질때 나타나게 됩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이성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살아있는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을 맞아 들이는 것입니다.
그분이 오늘날 성령님 이십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가
내안에서 열린다면 평안이 점점 넘치기 시작할것 입니다.

고독은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영혼의 통로입니다.
머무는것이 아니라 지나가도록 뚫려져 있는 길입니다.

이제 다 같이 일어나서 평안의 본성에 이르도록
고독의 길을 벗어납시다.

'하나님'이 모든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잠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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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잠 24:3-4)


가정이란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가정의 의미를 정의할때
행복의 보금자리 또는 사랑의 공동체, 등
단지 행복의 개념으로만 인식하고 있습니다만,
더 나아가 성경적인 개념의 가정이란
'하나님의 집을 짓는 것' 이란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오랜 결혼 생활을 통해 우리에게 더욱 깨닳아 지는것이 있다면
그것은 부부사이에 항상 사랑만 존재하는것이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미움도 존재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가장 원하지 않는 부분들을
서로 각자 인정하고 받아 들여야만 하는
어려운 국면에 이를때에, 그 대응을 어떻게 해야 할줄 몰라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통해 우리가 알수 있는것은 누구든지 행복관리는 쉬운데,
불행관리는 어렵다는 것이 부부간의 공통적인 체험일 것입니다.

우리가 총괄적으로 가정을 행복과 사랑의 대상으로 볼때
그 주체는 바로 자신들이 됩니다.
그러나 가정을 하나님의 집을 세우시는 것으로 볼때는
그 주인공은 바로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가정이 견고히 흔들리지않고 견디느냐
아니면 쓰러지느냐 하는것은 그 대상에 달려있는것이 아니라
그 기초에 달려있는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가정과 교회는 하나님이 만드신 제도 이므로
말씀이 기초가 됨을 아는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성경에는 가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집은 지혜로 말미암이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히 되며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은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잠 24:3-4)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잠 2:6)

그러므로 가정을 행복하게 만드는것은 지혜와 명철과 지식이며,
우리는 이 일체가 모두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것을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행복한 가정을 세우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1.가정은 지혜로 지을때 온전히 세워질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혜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남자일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적어도 집에 관한한은
당연히 지혜의 주인공이 아내가 됨이 마땅합니다.

'무릇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손으로 그곳을 허느니라'(잠 14:1)

이때 지혜로운 여인이란 바로 자신의 신분을 아는 여인을 말합니다.
따라서 영적 으로는 그리스도의 신부요,
육신적 으로는 남편의 신부임을 먼저 자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처럼 남편을 주께하듯 복종하라시는 성경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신부의 자격을 갖추고 살라는 말씀으로
아내가 그 말씀을 순종하여 따를때에
예수님이 내 집에 함께 거하시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아내된자의 모든 형편을 아시므로
인내하고 기다리면 마땅히 그분이 모두 풀어주고
해결해 주실것을 믿어야 할것 입니다.

2.가정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행복이 가득차게 됩니다.

그러면 누가 지식의 주인공이 될까요?
그것은 바로 남편이 지식의 주인공이 되어야함을
성경에서는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편된 자들아 이와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벧전3:7)

이때 지식이란 아는것을 의미함으로 남편은 아내에 대하여
다른 어떤 관심의 대상 보다도 제일 많이 관심을 가지고
알고 있어야 그 가정은 행복으로 가득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내와 얼마나 행복하게 사느냐 하는것은 다시말해 남편이
아내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 하는 것에 정비례함을 봅니다.
즉,배우자의 꿈과 취미와 재능을 파악해야 하고, 아내의 마음의 상처나
약점이나 싫어하는것이 무엇인가를 평소 염두에 두어 피해야하고
생일,결혼기념일,처가집 행사에 반드시 신경을 써 주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아내의 장점은 장려해주고,
단점은 덮어주는 것이 바로 지식있는 남편의 할일입니다.

3.가정은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하고 안정되어 집니다.

가정이 흔들리는 이유는 세속적인 부분들이
가정으로 틈타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즉,탐심,음란,도박,음주,쾌락,등이 이에 속하며
이는 바로 이기심을 타고 들어오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명철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 일까요?
그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 이십니다.

'나는 명철이라 내게 능력이 있으므로'(잠 8:14)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이라'(잠 5:1)

부부가 연합하여 하나님을 경외할 때 가정에는
세속적인 것이 결코 들어올 수 없습니다.

사실상 남편과 아내는 미완성된 존재인고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주시면서 허락해 주신 가정을 통해
너희가 서로 이 말씀으로 힘을 합하여 스스로 완성시켜 나가라 하십니다.

1)자녀를 나서 기르는 것도 완성의 한 단계요,
2)상대를 서로 아끼는 가운데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서로 이땅에서 의지하며 사는 것도 완성의 한단계요,
3)때가되어 노년에 힘이 다하여 본향으로 돌아갈때
서로가 행복한 임종을 맞이하게 해주는 것도
완성의 한 결과 입니다.

더 나아가 부부가 서로 다른 환경과 취향과 습관이 다르게 만나게 하심은,
서로 다투도록 하심이 아니요,서로의 부족한 부분들을 보완하여
가정을 이루워 살면서 슬기롭게 완성을 이루워 나가라고
상대방을 각자 다르게 하신것을 알아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서로 다른 부분을 잘 연합이 되도록 붕합 시켜주는
이른바 '위로 접착제'라고 할수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을 통해 불행관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행복관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눌때에 우리 모두가 바라는
행복한 가정이 과연 이루워 지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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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
(잠 22:1)


1. 은총이란 하나님께서 인간 개인에게 베풀어 주시는 특별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자비하심을 만물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읋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에서 베풀어 주시는 대표적인 은혜는 구원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은혜에 비하여 개인에게 특별히 베풀어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 것을 우리는 '은총'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로 표현되는
'헤세드'(구약) 또는 '카리스' (신약)의 의미는 '선행, 친절, 호의' 라는 뜻인 반면,
은총으로 표현되는 '헨''사랑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은총받은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특별사랑을 부어주신
사람들이며,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살피셔서 찾아 내신다 하셨습니다.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시 101:6)

그래서 본문에서도 이 세상에 어떤 금은 보화보다도
'은총을 택한 사람이 되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눈길에는 세가지가 있습니다.

1) 은혜의 눈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구원과 축복을 골고루
나누워 주시기 위한 자비의 눈길을 말합니다.
(예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출15:13)

2) 감찰의 눈길입니다.


이는 특별한 사명을 위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기 위한 눈길을 말합니다.
(예:다윗의 중심을 보신 하나님께서
일곱 형들 보다 어린 그를 선택하신것을 보십시요)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역대하16:9)

그러므로 은혜의 눈길이 처지를 보는 것이라면,
감찰의 눈길은 사람속에 있는 마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3) 은총의 눈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위한 눈길입니다.
(예: 다니엘을 사자굴 에서도 건지시고
세상 종말에 일어날 모든 계시를 보여주신 하나님)

"네게 이르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단10:11)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점진적으로 시대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구약 시대에는 백성으로, 신약 시대에는 자녀들로, 사도 시대에는 후사로,
점점 더 큰 은혜로 가까이 부르시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기업을 유업으로 받는 후사가 될 성도들 입니다.
이와 같이 되기 위해서는 모두 다 은총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바람직 합니다.  
성경에서는 은총을 받는 방법에 대하여 세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 '지혜를 얻는 자' 에게 은총이 주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왕)
"대저 지혜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잠 8:35)

(2) '선을 행하는 자' 가 은총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요셉)
 "선을 간절히 구하는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잠11:27)

(3)
'성전을 짓는 자' 가 은총을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스룹바벨)
"그가 머리돌을 내어놓을 때에 우리가 외치기를
은총,은총이 그에게 있을찌어다 하니라 하셨고..."(스가랴4:7)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총을 택한 사람이 되어 살라고 하십니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잠22:1)

이상과 같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베풀어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바로 그 중에 하나가 오늘의 주제인 '은총' 이며 은총을 받은 사람이 되면,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게 됩니다.
또한 하늘나라 에서는 큰 상급이 준비되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은총을 받기로 마음으로 사모한다면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며 선을 베푸는 삶을 사십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을 우리에게도 내려주실 것입니다.








영성

[눅 24:49]



/By Paul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 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눅 24-49)


영성이란 신자 개인이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의하여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갈수 있도록 영력이 함양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능력이 필요한데
이 능력은 인간이 지닌 잠재 능력을 개발함에 의해
힘이라는 물리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첫째, 육체를 개발하면ㅡ건강이 주어지는 활력이 생기게 됩니다.
   둘째, 머리를 개발하면ㅡ지식이 주어지는 지력이 생기게 됩니다.
   셋째, 소유를 개발하면ㅡ물질이 주어지는 재력이 생기게 됩니다.
   네째, 지위를 개발하면ㅡ권세가 주어지는 권력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힘은 땅에 속한 것이며
또한 이 힘 만으로는 인생의 문제를 다 해결 할 수가 없습니다.
(예: 느브갓네살 왕과 바로왕)


그러므로 인생의 문제는 인간의 능력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은 능력이 합하여 질때 비로서
쉽게 풀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 요셉과 다니엘)


이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부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믿음을 소유하여 영력을 얻는 삶을 추구하여야합니다.


1. 영력이란 무엇 일까요?


1) 영력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약속한 선물임을 믿어야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버지 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인 신분을
확실히 인식할때 실현되어지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2) 영력은 에수님 께서만이 내려주시는 능력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 승천을 확신하는 성도에게
주어지는 세레주 에수님의 역활입니다.


3) 영력의 주어짐은 마치 갑옷을 입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임재로 임하시는 분이시지,
소유 되어지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과 육과 혼을 입고 있기 때문에
이 세개의 성향중 가장 강한쪽의 욕구를 따라 살게 됩니다.
 

      (1) 육신의 본능이 강하면ㅡ'본능 주도적'인 삶을 살게 되고
     (2) 지성과 지식이 강하면ㅡ'이성 주도적'인 삶을 살게되고
(3) 영성이 강하면ㅡ'성령 주도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며
우리에게 능력을 덧입을수 있도록 축복을 주시는 세레주 이십니다.


오늘 나의 삶이 힘겨운 삶이 되고 있다면,
바로 이때가 세레주 예수님을 더욱 가까이 모시고 살 때임을
우리는 반드시 깨달아야만 할 것입니다.


2. 영력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1) 거듭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인간에게 임하실 때는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 것은
바로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의 되살아난 영입니다.
그동안 없었던 영의 역할이 시작되면서 성령님은
더욱 그 역할을 활성시켜줍니다.
 

즉 영적으로 느끼고, 분별하고, 계시를 받고 하는 것을 개발시켜줍니다.
또한 하나님께 기도하고 뜻을 이해하고 말씀을 깨닫는데 영감을 주시고 죄를
깨닫고 거룩함을 유지하려는 영의 상태를 투명하게 하여주십니다. 


2) 육은 죽이고 혼은 훈련시켜야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한 육신을 변화시킬 수는 없으시나, 
인간 스스로 육을 극복할 수 있도록 생명력을 주셨습니다. 
그 것이 새 생명입니다.


죄된 부모로부터 죄된 육신이 탄생되었듯이 
거룩한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영의 속사람이 탄생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곁사람은 죽어가는 것이요, 
속사람은 점점 살아아게 하셨습니다.
 

그 것을 겉 사람이 빨리 깨닫고 
욕망과 의지를 내려놓게 하신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을갈 5: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박았느니라.'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영이 수용할 때, 주님의 보혈은 좌와 욕망을 
처리하고 성령님은 자아와 의지를 다스리게 됩니다. 


거듭나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님이 주도하시지만 
육과 혼을 변화시키는 것은 혼이 말씀을 붙들고 성화의 길을
걸음으로 성령님으로 활동의 영역을 넓혀 드릴 때, 가능하게 됩니다.


3) 영의 영역을 넓혀야합니다.


성도가 거듭나고 육과 혼을 훈련시킨다 하여도 
여전히 마귀는 우리를 유혹하고 공격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쓰러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육의 죄는 비밀로 숨겨진 가운데 저지르게하고 
혼의 죄는 합리적으로 드러난 가운데 저지르게 만듭니다.
 

그 것이 숨겨진 탈선이고, 대외적인 명분입니다. 
즉 세상의 제도와 풍습을 나의 영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한 위로로 여겨 동참하게 만듭니다.


진정 하나님을 위한 것인가 아닌가는 
성령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밝혀지게됩니다. 
 즉 주님을 본 받지 못할 때는 영은 명분상 주인일뿐 
실질적인 세력은 믿음으로 가장된 혼과 육입니다.


우리는 이 것을 오직 기도로만 가려낼 수 있숩니다. 
큰 사역을 하면서 기도를 적게 하는 것만큼
 사탄이 좋아하는 것은 없습니다. 


성령님은 사역을 중요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사역을 올바르게 할 수 있는 바른 영혼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반드시 죽는 체험으로 예수님을 내 영혼의 주인으로 
모셔들인 영혼이 되어야 성령님은 활발히 활동하십니다. 


성령님과 영혼이 함께 공존하는 수준이
바로 영성의 수준이 됩니다. 
이는 오직 영화의 수준을 바라보며 성화의 길을 
열심히 걸을 떄, 점점 이루워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영성을 소유하여 능력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008/11/20

/By Paul









돈 (money) 이란 무엇인가?
   [딤전 6:10]



/By Paul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사춘기 때는 용모요, 청년은 이성이요,

장년의 시기에는 사업이요, 중년은 명예요, 노년에는 편안함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대에 관계없이 공통적으로 갖고있는 관심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돈'이라고 합니다.



다시말해 사람들이 하루를 살면서 

생각하는 것의 60-70%가 돈에 관계된 것입니다.


그만큼 돈은 사람들의 삶과 생각에 많은 부분을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물질관을 가지고 생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1. 돈 (money) 이란 무엇일까요?



돈이란 영어로 'money'로 불려지며, 그 기원은 'monastery'입니다.



1) 돈에는 신학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돈은 신학적인 의미를 내포하며 이는 바로 '수도원'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해 어원 학상으로 '돈' 이라고 부르는 그 말의 기원은
바로 신전에서부터 사용되어짐으로 그 용어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즉,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러 올 때 제물들을 가지고 와서 신께 드린 것을
사제들이 일일히 다 보관할 수 없다보니 교환을 해야할 필요가 생기게 되면서
물건을 팔아 돈으로 보관하게 된 것입니다.그러므로 돈에 관한 신학적인 의미는 다시말해
'신에 바쳐진 제물' 이라는 것에 그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2) 돈은 특성상 돈을 판단하는 기준에 따라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첫째는, 부정적인 면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돈을 오직 욕망의 대상으로만 보면,
돈은 욕심의 대상이 되어 죄를 짓게 되고,
그렇게 지은 죄는 결과적으로 사람을 타락하게 만듭니다.

 

   둘째는, 긍정적인 면입니다.
               돈을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선을 행하는데
아주 유용하게 사용될 수있는 귀중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2. 기독교 윤리학 에서의 돈이란 정의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비목적' 입니다. 

돈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요 결과라는 것입니다.
일의 목적이 돈이 아닌 보람과 유익이 될 때, 
돈은 단순히 수단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둘째는 '비죄악' 입니다. 

돈은 죄악에 이용될 뿐이지 죄악은 아닙니다.
돈은 중립적일 뿐입니다. 
다만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선하게도 악하게도 사용될 뿐입니다.



셋째는 '비우상' 입니다. 인간은 창조주를 섬기게 되어있지
인간이 만든 것을 섬기도록 되어있지 않습니다. 물질의 가치가 영적인 가치보다 높으면
돈은 그 순간부터 우상이 되어 인간에게 불행을 초래하게 됩니다.



3. 물질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제물은 쌓아두라고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베풀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제물은 모으는 자체는 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위하여 모으는 것이 죄가 될뿐입니다. (예, 어리석은 부자)


"네가 이 세대에 부한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제물에 소망을 두지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누워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디모데 전서 6:17-18)



노래는 부르기전 까지는 노래가 아닌 것 같이 
재물을 올바른 용도로 사용하기 전에는 아직 온전한 축복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사실상 돈을 모으는 기쁨은 단지 금전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더 큰 욕심의 죄를 갖게 만들지만, 그러나 돈을 사용하는 기쁨은 
하나님의 선한뜻을 행할 수 있음으로 우리에게 편안한 마음을 가져다 주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에 돈에 대한 걱정이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우리 자신이 이를 
스스로 소유하고 싶은 욕망쪽에 더 많은 마음이 기울어져 있는 것은 아닐런지요?





2008/11/13

/By Paul



         

    

        

                                  

   믿음에 대하여
     [요한1서 5:4]



/By Paul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인간의 가장 큰 차이점은 하나님은 영이시고
인간은 몸을 갖고 있는 물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인 몸이 영을 알아가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신앙은 대상을 기준으로 한 것이요 믿음은 주체가 변하는 과정을
밟아가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신앙 생활에는 변동이 없어도
믿음 생활에는 서로 다른 변화를 겪으며 살게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서로 다른 수준의 믿음의 단계를 살펴볼까요?


1) 첫 단계는 구원에 필요한 믿음입니다.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행 14:9)

즉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것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신념이나 의지의 
부분일 경우가 대부분 입니다.
그것은 나의 이성의 이해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신념과 의지적인 믿음은 부분적인 믿음으로 
성경을 다 믿을 수가 없고 오직 이해 부분만 인정하기 때문에
항상 의심이 동반된 믿음의 수준입니다. (자아가 주인임)

        
2) 두번째 단계는 생활에 필요한 믿음이 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 1:17)


이는 구원의 믿음과는 
다른 생활을 해 나가는데 필요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 자라며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심으로 생기는 믿음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나의 모든 삶을 맡기며 살 때
인생의 짐이 가벼워지고 은혜 속에 머무는 평안이
 주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주인이심)


3) 세째는 상급에 필요한 믿음이 있습니다.
ㅡ'믿음을 지켰으니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음으로'
(딤후 4:7-8)


이는 특별한 믿음으로서 
성령님이 은사로 베풀어 주십니다. (믿음의 은사)


이는 이땅에서 주인의 뜻을 행한 자에게 주어지는
상을 받게 하는 믿음입니다. (성령님이 주관자임)


생활에 필요한 믿음에 구원의 믿음만으로 지낸다면 
우리는 환경에 눌리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만일 상급에 필요한 믿음에 생활의 믿음으로 지낸다면
 우리는 계속 어둠의 세력에 눌리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소극적 신앙 생활이라 부르는 반면,
환경을 다스리며 사는 삶을 
적극적인 신앙 생활이라 부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이기는 사람들 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무기가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요한 1서 5:4)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지금 현재 당면한 모든 상황에 
필요한 그 믿음이 무엇인지를 점검해보고
환경을 능히 이기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2008/11/06

/By Pa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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