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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에바다교회



성령의 하나님
[요14:16-17]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오실 수 있으신 길은
인간의 영이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입니다.
이것은 죄가 없는 상태에서만이 가능합니다.

죄가 몸 속에 들어오자 하나님의 영은 떠났고,
인간의 영은 죽었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은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으나, 거듭나게 되며는
그 영속에 하나님과의 교제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성령의 하나님은 우리로 예수님이 열어 놓으신
구원의 길로 들어오도록 인도하시고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동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은 죄에 빠질 수는 있으나 죄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죄의 세력은 영의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구원의 길을 가기를 원하고는 있으나, 그길을 갈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죄의 값을 인간은 지불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혼은 영의 길을 자각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혼이 영을 주관 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영은 혼에 속한 부분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혼이 영의 길을 택하기 원할 때, 영의 길로 들어서도록
도와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분이 필요합니다.
그분이 바로 성령님이시고 성령님의 역할이 바로
혼과 육에 속한 인간을 영에 속한 인간으로
변화시켜주시는 일이십니다.

인간은 아무리 능력이 있고 똑똑해도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마치 인간이 아무리 건강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죽음을 부활로, 우리의 죽을 생명을
영생으로 바꾸어 주신 분이 허락하심으로 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주관하시고, 주님의 죽을 몸에
영생을 주신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마찬가지로 혼이 주님을 믿을 때, 그 믿음을 통하여
성령님은 주님께 역사하셨던 능력을
우리에게도 적용시켜주십니다.

인간이 영의 길로 갈 수 있음은 오직 혼이
주님을 선택하는 한 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 결과 선택과 믿음을 통하여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나에게 나타나게 됩니다.

믿음은 구원의 문 밖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에서 문을 열어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어느 누구도 그 구원의 문을 열 수가 없습니다.
그문은 안에서 열어 주어야지만 열려지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문을 여시고 우리를 맞아 들이신 성령님은
우리에게 다섯 가지 면에서 역사를 하십니다.
이같은 성령님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구원의 길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1. 성령님은 보혜사 이시기 때문에 우리와 항상 함게 계시며 도와주십니다.


[요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인간이 죄에 빠졌던 원인은, 죄가 얼마나 나쁜 것인지,
죄를 짓지 못하도록 저지할 도움을 줄 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를 통하여 인간은 단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죄가 없었을 때는 아담에게는
자신의 영생의 삶에 불가능한 것이 없었습니다.
피조물이라는 인식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통하여
인간의 피조물의 한계를 알려 주셨습니다.
죄를 통하여 선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모시고 싶은 인식을 갖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도록 지음을 받았으나
하나님 대신 자기를 의지하고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 결과가 멸망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다시 돌아와
순종할 때, 또한, 창조주 를 하나님 답게 섬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인간이 알 때, 하나님은 땅으로 부터의 삶에서 우리를
하늘의 삶의 영생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깨닫기 까지만 허락하셨지
깨닫고 돌아올 수 있는 능력까지는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피조물의 한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도움은 시작되게 됩니다. 이 깨달음의 자리에 올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다가 도와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이것이 인간이 다시 잃었던 진리를 깨닫는 일이고
진리는 진리의 영 이신 성령님과의 만남을
만들어주는 기회인 것입니다.

내가 진리를 찾고 진리를 따라 사는 한 성령님은
절대로 나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진리와 성령님은 하나 이시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내 안에 쌓이면 쌓일 수록 나에게 오신 성령님은 함께
동행하시며 곁에 계시고, 나중에는 네 안에 들어와 계시게됩니다.
진리는 성령님의 거하시는 집이기 때문입니다.


2. 성령님은 교사이시기 때문에 항상 우리를 가르쳐주십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진리는 인간이 찾으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을 깨달으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죄에 대하여,
구원에 대해서, 하늘나라에 대해서, 그리고 마귀와
영적 전쟁과, 재림과, 심판과 그리고 부활에 이르기까지
다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오직 혼에 매여 이 땅에
육신적인 삶에만 깨달음이 묶여져 살고 있기 때문에
영에 관한 부분은 점점 무지해지고 맙니다.

인간은 죄 중에 잉태하여 태어났기 때문에
태어나서는 육신 중심의 삶을 제일 먼저 살게됩니다.

그리고 또한, 혼과 죄가 지배하는 세상의 교육을 통하여
혼 중심의 삶, 즉 세상 중심적인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다가 삶위 허무와 죽음을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말씀과 체험을 통하여 영적 중심의 삶으로 변화되어집니다.

혼이 영의 세계를 알도록 깨우쳐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영이 말씀으로 자라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은 12제자들에게 영의 세계에 대하여
특히 하늘나라에 대하여 들려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이 어렸기 때문에 아는 것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오순절날 성령의 임재하심을 받고
그들은 아는 것을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말씀의 양식은 우리의 영인 속사람을 자라게 만들어줍니다.
우리의 속사람의 완성이 부활후 천국에서의 모습이 되듯이
 우리의 진리의 깨달음의 완성도 천국에 가서야 이룰 수가 있습니다.

이땅에서의 진리의 깨달음의 한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격과 신분으로 이 땅에서 사는데 필요한 부분까지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 집안의 가정 교사로서 우리가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도록 말씀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3. 성령님은 조명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의
구주되심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요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성령님의 역할의 한계는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예수님의 선포하신 말씀의 법주 안에서만 활동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 활동의 주된 역할은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를
밝히 드러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증인 사역이십니다.

 우리는 귀로 듣고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봄으로 이해의 범주를 벗어나,
놀람과 확신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마치 땅의 만물이 달빛을 받을 때와, 햇빛을 받을 때가 다르게 보이듯이  
해의 역할은 빛으로 남을 비추어 드러나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나타나게 하시고
주님의 구원사역이 얼마나 은혜로운지를 조명의 빛으로 보
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뚜렷한 모습은 용서에 있고,
주님의 은혜가 드러난 현상은 구원의 표상인 십자가에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오셔서 나의 영안을 열어주실 때,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바로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고전 12:3f]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주님은 사역시절에 많은 기사와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이를 보는 사람들 시각에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은 주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으로 보았고, 나머지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예수님이
바알새블의 힘을 덧입어 기적을 일으킨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의 차이점은 같은 신앙, 같은 말씀을 지녔어도
성령의 역사하심의 차이에 의하여 주님을 다르게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메튜헨리' "신앙이 성령으로 역사되지 않고는
그에게 복종하고 의지하여 살아가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주시라 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고전 주석 p.180)

예수님이 구세주이신 것은 머리로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에 의해서 깨달아지는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증인 사역입니다.

 
4. 성령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불의한 것을 지적하십니다.


[요 16:8-11]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동물이 인간을 보는 눈과, 인간이
동물을 보는 것과는 많이 차이가 있습니다.

즉, 동물은 자신이 어떡해야지 유익이 주어진다는 면에서
주인을 이해하고 있는 반면, 인간은
동물의 행동 동기 까지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욥이 고난을 받고 있을 때, 네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각자 알고 있는 하나님을 욥에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닙께서 욥에게 직접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성령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이 잘못 알고 있는
세가지 오류를 지적하시고 바로 세우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1] 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입니다.
 
인간편에서는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죄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의 진정한 죄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죄인들을 용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통하여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길을 믿지를 않고 주님을 부인하고 구원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지은 모든 죄는 주님 안에서 용서되어질 수 있음을 볼 때,
진정 용서되어지지 않는 죄는 용서될 수 있는 죄보다
더 큰 구원의 부인죄 인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님은 제일 먼저 지적하십니다.


[2] 의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매달린 주님을 바라보았을 때에 죄인으로, 심판으로,
멸망으로. 저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자리가 대속으로,
영생으로. 부활로, 영광으로 바라보고 가셨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을 중거하심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셨음을 증거하십니다.
인간이 주님을 못박은 의는 멸망의 의 였음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의 바른 이해가 참 의 임을 알려주십니다.


[3]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심판하여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 바로 너희들도
죽으면 더 큰 불과 유황의 심판에 들어갈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땅에서 벌이 무서워 감옥에 갈까봐 죄를 짓지않고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행위의 죄가 없어도 마음 속에 죄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형의 집행이 죽음 후에 주어질 뿐입니다.
사후의 심판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5. 성령님은 인도자 이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요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인도와 계시는 가나안 땅과 율법이었습니다.
신약에서의 예수님의 인도와 계시는 천국과 복음이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의 성령님의 인도와 계시는 증인과 선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인도하심은 처음에는 이 땅에 백성으로의 삶,
그리고 나아가서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서의 삶, 그리고 마지막은
하늘과 땅에서의 후사로서의 삶으로 진행하고 계심을 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알려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아직도 많은 것이 남아 있습니다. 장래의 하나님의 계획은
지나온 것보다 더 심오하고 깊은 것들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만이 아십니다.
성도들은 마지막 환난에 대해 대비해야합니다.
사탄과의 영적 전투에 참가해야합니다.
주님의 재림에 준비해야합니다.
마지막 심판에 설 수 있어야합니다.
천국의 상급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성도들은 증인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성령님의 마지막 사역은 우리로 증인이 되게 만드는 사역입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한 인간의 삶은 긴 구원의 사슬에 연결되어 있는 한 고리에 해당됩니다.
성령님이 오신 것은 나로 하나님의 세우신 구원의 줄의 대열에
든든한 고리로 매어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권능수여의 의미는 순교의 정신에서 발견해야만 되는 일이기에
권능과, 증인과, 순교는, 하나로 묶여 있음을 봅니다.

오늘도 성령님은 증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이는 그들만이 하늘의 상급을 받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성령님을 모시고 하늘의 상급을 받는
성도들이 다같이 되십시다.









보혜사 (Counselor)
[요 16:7-14]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는 영생체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영의 세계도 물질의 세계도 동시에 다 누리고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때에는 계시적 지식이 필요 없이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세상에 들어오자 진리의 세계는
문이 닫히고 영생도 잃어버리고 혼과 육만이
살 수 있는 죄 된 물질의 세계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인간은 창조 본연의 뜻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사물에 대한 존재의미를 분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에 거짓이 진리를 대신하게 되었고
죄된 욕망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간은 진리를 다시 찾아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회귀하기 위하여 진리를 계시하여 줄 존재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노아를 통하여
새 창조와 새 질서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점진적 진리의 계시를 위하여 구약에서의 약속을 통하여
메시야의 오심을 증거하였으며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는
신약에서의 약속으로 성령님의 오심을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특징은 진리의 영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성육신 예수님의 구속 사역, 그리고 좀 더 구분되어 마지막 진리의
회귀사역으로 인간의 잃어버린 영의 세계를 계시하여 주심에 있습니다.
진리의 회복이 인간 창조존재의 회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1. 성령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세 가지 일을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1)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하여 그들을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요 16:13]


진리의 특징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자
얻은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죄를 더 깊이 알게 되었고,
또 하나는 영생대신 죽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죄는 거짓된 삶을 살도록 만들었고
죽음은 이 세상에서의 두려운 삶과 지옥에서
둘째 사망을 겪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진리이신 예수님을 증거함으로
죄와 사망에서 건짐 받고 영생을 얻는 길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내가 곧 진리요.” 라고
말씀하신 것을 이해 적용 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2) 세상에 대하여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러 오셨습니다. [요 16:8]


죄를 깨우쳐 주는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셨고,
죄를 판정하는 분은 예수님이시며
죄를 회개하고 구원케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죄에 대하여 책망 하실 때에 '자범 죄'가 아니라
주님을 믿지않고 구원을 거부하고 있는' 교만 죄'를 지적 하십니다.

또한 의에 대한 책망은,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것을 깨닫지 못함”에 대한 책망입니다.

세상의 의는 정직, 준법, 선행, 효, 애국심 등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를 벗어난 의가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의일 뿐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의는 예수님을 정죄한 의 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세상적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는 피고요, 빌라도는 재판장이고, 원고는 제사장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재판 결과 주님께서는 사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땐 빌라도와 제사장들은 피고요,
원고는 주님이시며, 재판장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결과, 세상의 심판을 뒤엎고 주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사탄 마귀의 죄가 심판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을 좋아하고
사탄마귀 에 속해 있는 것을 성령님께서는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하여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요 16:14]

주님의 “성령님에 대한 가르침”은 너무 영적인 것이어서
구약과 신약 모두의 하나님 사역이 진행되는 동안
“성령님께서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그것은 사역의 진행상 뒤에서 일하셨기 때문에
영의 세계에서는 세분이 다 같이 함께 행한 것이었으나
표현상으로는 시작의 주 된 부분만 소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천지창조 시 성령님께서는 수면 위에 운행하심으로 생명체들을 잉태시키셨고,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사역 시엔 동정녀 마리아의 잉태, 사역을 함께하심으로
기적을 베푸심, 부활, 등 주님의 사역에 주 된 역할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구원의 완성 단계에서 성령님께서는
하나님과 주님에 대한 속 사정과 “그분들의 사랑과 은혜”에 대하여
더 자세히 우리들에게 알려주시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즉, 태양이 빛을 비추어야 지구의 모든 창조물이
아름답게 드러나듯이 우리의 영혼 속에 성령님의 조명이
비취어져야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아름다운 계획과 준비하신 모습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또한 주님과 주님의 말씀에 대한 지혜를 성령님이 주셔야
우리는 성육신의 의미와 십자가의 죽음 및 부활하심의
성자 하나님의 참된 은혜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가까이 할수록 특별한 지식을 더 많이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짐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를 위하여 성령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 편에서 성령님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을까요?


2. 성령님께서는 모든 구원 사역에 앞서
우리에게 보혜사의 역할을 하러 오셨습니다. [요 16:7]



아기가 태어났다고 해서 그의 인생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성인이 되어 올바른 삶을 살 줄 알아야 인생을 완성 할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주님 안에서 거듭 태어났다고 해서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따라 살 줄 알아야
올바른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앙이 완성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이렇기 위해서는 아기에게 어머니가 필요하듯이 우리에게도
어머니와 같으신 보혜사 성령님의 보살펴 주심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보혜사로 불리어지는 성령님의 호칭을 바르게 이해함으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역할도 온전히 받을 수 있습니다.


1) 보혜사란 “어떤 사람 곁으로 오도록 부름 받은 자” 란 뜻입니다.


이 단어 “파라클레토스” 는 어원적으로
“파라"(곁에) 와 “클레토스” (부르다) 단어가 결합된 말입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오도록 청함을 받았느냐?”
하는 것이 우리에겐 궁금한 부분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부르실 때 '또 다른 보혜사'
(요 14:16) 라고 부르신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헬라어에는 “다른” 이란 단어가 두 가지인데
[1] 알로스: 첫 번째 경우와 똑 같으나 다른 하나”라는 의미이며
[2] 헤테로스: 전혀 처음 것과 다른 어떤것” 이란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성령님을
자신과 같은 "알로스" 즉,다른 분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님께서는 예수님과 똑같은 분이십니다.
똑 같은 일을 하시지만 효능과 방법에서 다르게 하실 뿐입니다.

즉, 주님께서는 육신으로 제한 된 지역에서만 사역을 하신데 비해
성령님께서는 영으로 활동에 제한을 받지 않고
전 세계적으로 확대 사역을 하신다는 것과

주님께서는 일일이 사람들을 만나 말씀을 들려주심으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들려주신 데 비해
성령님께서는 동시에 어느 지역 어떤 사람들을 막론하고
계시와 꿈, 음성, 기적과 이사, 은사를 나누어 주심으로
더욱 천국과 영의 세계를 깊이 계시하여 주신다는 데에 있습니다.

결국 범위는 확대되었지만 우리를 향한 본질은
예수님과 같은 역할을 하시는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대신 성령님을
보내 주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2) 보혜사 성령님의 적극적인 사역은 우리 곁에서
격려하고 권고하여 주시는 역할을
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곁에서 능동적인 역활과 수동적인 역활을 하시는데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언제나 사단 마귀의 공격과 방해를 받아
성도들이 신앙생할을 하기에 낙심과 위협을 겪게 됩니다.

이  반대 세력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이겨나갈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주님께서 떠나신 후 사도들에게는 의지할 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회에 잡혀갔고더 이상
사역을 하지 못하도록 위협과 채찍을 맞고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한 자리에 모여 기도하였고, 이때 모인 곳이 진동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담대히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행 4:31)

성령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은 사도들은 주님을 모시듯 성령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살았기 때문에 더 이상 낙심이나
주저하지 않고 담대히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결과로 각 지역의 교회에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행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성령의 위로란, 성령님께서 격려해 주시고 든든히 서도록 시켜주셨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들 사역의 원동력이 되어주십니다.
이 힘이 우리로 하여금 사역의 고난과 위기, 영적 싸움을 모두 이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사도들을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게 하신 그분의 도우심인 것입니다.


3) 보혜사 성령님의 소극적인 사역은 친구와 같이 항상 동행하며 함께 도와주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제부터는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말씀하셨습니다. (요 15:15)
친구이기 때문에 나의 비밀모두를 너희에게 다 들려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참 좋은 친구를 만나 서로 사귀고
도와가며 지내는 것처럼 기쁜 일이 없습니다.
더욱이 주님을 친구로 삼았던 사도들은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그런데 사도들이 영으로 거듭 태어나자
육신의 친구대신 영의 친구가 생긴 것입니다.
육신의 친구는 만나야지만 함께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의 친구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같은 기쁨은 영으로 나에게 오신 성령님께서 만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시며, 함께 주님의 일을 하시고 도와주시며,
하나님께 우리를 위해 대언하시고 변호해 주시며,
우리를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연단 훈련시키셔서 성장, 성숙하게 자라나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신부가 되도록 자라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님의 성화의 길에서 열매를 맺게 해주심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3. 우리는 우리에게 오신 보혜사 성령님을 어떻게 모셔드릴 수가 있을까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려면 우리의 몸을
성령의 전이 되도록 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이유를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한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육체의 소욕은 =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술수, 원수,
분쟁, 시기, 분냄, 당 지음, 분리,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 등이라 하였습니다. (갈 5:19-20)

이 같은 소욕을 없애기 위하여는 성경에 기록된바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속이 성령의 전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속에 자신의 정과 욕심을 못박은
십자가를 지니고 있을 때에 가능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성령님 오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행 1: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나의 노력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준비로 받는 것이고
나의 욕망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으로 받는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노력으로 받게 되면 소유 개념이 생겨 남용하게 되고,
욕심으로 받게 되면 과시하여 교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나를 쓰시도록
선택하실 때까지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오시면 우리로 오심을 알게 하십니다.


1) 성령님께서 바람과 같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바람과 같이 성령님이 오실 때 숨으로 마음껏 들이마셔
내 속에 가득 채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을 바람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요 3:8]

헬라어로 성령을 “프뉴마”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뜻은 "호흡"내지는 "바람"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임하셨을 때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행 2:2) 하였고
예수님께서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성령을 받으라 말씀하실 때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요 20:22) 하셨습니다.

즉, 주님의 숨을 불어내신 미풍은 성령 강림절 날 임하실 강한 바람의
성령님의 임재 하심의 보증으로 제자들에게 불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바람 미풍을 체험하였다면
강한 성령충만의 바람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풍이 불어올 때마다 마음껏 들이마셔야 됩니다.
나의 영혼육이 성령의 호흡으로 가득 찰 수 있도록
제자들과 같이 들숨을 채워야 합니다.


2) 성령님께서 강물같이 오실 때 마음껏 들이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마실 물을 달라 청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요 5: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라.” 하셨습니다.
이는 성령을 주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우리는 말씀으로 은혜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한 없는 회개와 눈물이 쏟아집니다.
성령님께서는 말씀의 위로로 마음껏 평안으로 채워주십니다.

말씀이 강물같이 선포됩니다.
진리의 깨달음이 넘치고 말씀에 대한 체험과 확신이 생깁니다.
이때 성령님의 조명을 더욱 받기 위해서 말씀을 많이 먹어야 합니다.
먹은 말씀만큼 성령님의 역사가 따르게 됩니다.


3) 성령님께서 불 같이 오실때 기도로 계속 받아야 합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오신 성령님께서는 불 같이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행 2: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에게 임하여 있더니”

성령님의 임재 하심에 바람으로 오심은 “동행과 인도하심”
생수로 오심은 “은혜와 평안함”을
그리고 불같이 오심은 “능력을 통해 사역을 감당 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불이 아니더라도, 바람도 태풍으로,
생수도 홍수로 오실 때는 그 위력도 상당히 큽니다.
그렇지만 불의 위력은 무엇보다도 제일 강합니다.

그리고 영적 전투에서 꼭 필요한것은 불 세례입니다.
이를 위해 금식기도로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늘에서 번개가 칠 때 피뢰침이 번갯불을 흡수할 수
있는 것은 '전류를 흡수할 수 있는 피뢰침'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성령의 불을 받기 위해서는 기도 침이 있어야 됩니다.
“기도 침”이란 한마디로 기도의 영을 말합니다.
나의 혼적인 생각이 아닌 영적인 욕구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영으로 기도를 많이 한다 하였고 
그리고 그 기도를 방언기도라 하였습니다.(고전 14:14-18)
기도는 성령을 불 같이 끌어들이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에게 임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나와 함께
가시적으로 계시는 것 같이 성령님을 대우해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14: 16-17] '성령의 오심'을 “우리의 같이” (메타, v16)
“우리와 함께” (파라, v17) “우리 안에” (엔 v17)
그 분의 위치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성령님과의 관계를 매일 교제를 함으로,
매일 동행함으로, 매일 의지함으로 우리로 어떻게
성령님을 모셔야 됨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는 성령강림절을 맞이하여
성령님을 바르게 모시는 성도들이 다 같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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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신앙
(요 11:25-26)



화가 '아더 브레스베인' 의 작품중에 '유충들의 장례식'이란 그림이 있는데
물 속에서 한 유충의 허물을 관에 넣고 검은 옷을 입은 유충들이 모여 울고 있는 장면이
있는 반면 물위 하늘에서는 껍질을 벗고 아름다운 잠자리가 되어 하늘을 날으며
그 장례식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는 안타까운 표정을 그린 그림입니다.

화가 '아더'는 이그림을 통하여 우리에게 천국에서 우리의 시신을 놓고
울고있는 모습을 내려다보는 부활로 변화된 천국에 간 성도의 모습을
그려보도록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신앙이란 무엇일까요?

 1. 완성된 모습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사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바로 하나님의 세계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사는 것과 세상속에서 나를 바라보며 사는
시각과의 차이입니다. 만일 유충같이 물속에서 자신의 모습과
삶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라면 유층체질의 건강과 물속에서의
배부른 삶이 바라는 것의 전부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속에서 자신의 모습과 삶을 전부로 여긴다면
우리 또한 육신의 건강과 이 세상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소망이 전부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썩어질 것과 신령한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생물체에 한 생명이지만 이중구조의 모습, 능력,
삶이 구분되도록 변화를 두신 것입니다.

즉 식물의 씨와 형체는 전혀다르고 유충과 성충의 모습도 전혀다릅니다.
버드나무씨는 먼지덩이같고, 코스모스씨는 때묻은 손톱 조각같고, 애벌레나 유충은 징그러운
벌레같지만   완성된 그들의 모습은 얼마나 화려하고 능력있는 삶을 사는 지 모릅니다.

그러면 씨가 진짜인가? 꽃의 형태가 진짜인가요? 유충의 모습과 삶이 진짜인가?
나비와 잠자리의 모습이 진짜인가요? 물론 완성된 모습이 진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육신의 모습과 삶이 진짜일까요? 부활의 모습과 삶이 진짜일까요?
하나님의 예정하심은 부활의 모습과 삶이 진짜인 것입니다.

뇌성마비 시인-'송명희'양은 1963년에 출생했습니다. 뇌성마비로 태어났기 때문에
몸도 얼굴도 가누질못하는 전신 지체 장애자입니다. 슬픔속에서 지내던 어느날 너무 자신이
원망스러워 자신을 이렇게 빚으신 하나님을 만나보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하나님 저를 만나주세요.
그러면 저의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수없이 부르짖던 어느날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나주셨습니다.  

고전 15:10="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자신이 그와 같이 된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이제 나는 이런 몸이라고해서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나는 이 몸으로 이 땅에서 할 일이 있고 그 후에는 나는 변하여
부활의 영광된 모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후로 장애인들을 위햐여 일하고 위로하고 성도들에게 부활신앙을
간증, 시집, 수기...출판을 통하여 자신의 참된 신앙을 보여주며 살고있습니다.
부활된 모습과 삶을 간직하고 사는 믿음은 자신의 삶을 이기고 생명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참된 신앙생활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2. 부활신앙이란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사는 신앙생활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은 초상집에 갔을 때, 마르다가 말하기를 '마지막 날 부활에는
오라비가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하였을 때, 주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하셨습니다. 마르다를 위로하기 위하여 나사로를  살려주실려면 생명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생명이요, 부활이니'하셔야 될텐데 그렇지앟고 부활을 생명보다
앞서 말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원형의 삶을 기준으로 이 땅에서 살고 있으시기 때문이고
우리들은 유충의 삶을 기준으로 이 땅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마르다에게
알려주기위하여 부활이 생명보다 중심이 되어야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1) 부활신앙이란 사후가 아니라 현실에서 적용되는 신앙입니다.

마르다는 마지막 부활 때, 다시 산다는 신앙을 지닌 미래 부활신앙의 소유지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녀에게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요11;40) 하시면서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하고 큰 소리로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죽은 나사로가 베를 동인채 걸어나왔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이해를 세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이 사건이 2천년전에 일어난 과거 부활 사건으로 보는 것과
둘째, 예수님 재림 때 모두 부활할 것을 믿는 종말론적 부활신앙과,
셋째, 주님은 언제든지 부활을 이루신다는 현실적 부활신앙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우리에게 현실적 부활신앙을 갖도록 보여주신 것입니다.

2) 부활신앙은 말씀과 믿음사이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신 신앙입니다.

믿음에는 대상을 말씀으로 바로보는 경우가 있고, 어떤 경우애는 말씀과 대상사이에
상황이 끼어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믿음사이에 내 의지가 끼어있게되면
비정상적인 상황이 닥칠 땐, 믿음은 현실적인 것이 되어버리고맙니다. 그러나
 중간에 내 의지대신 신앙이 있으면 비정상적일 때도 믿음은 말씀따라 가게됩니다.

(예) 아브라함은 이삭을 24년간 기다리다 지쳤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99때에 나타나셔서 "내년 이 맘 때에 아들이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이 생각하기를 "백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90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이스마엘이나 하나님앞에 살기 원하나이다."
하였습니다. 이 때는 말씀-의지-믿음=불신앙의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삭이 자라나 소년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려라.'하셨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의 고백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 (롬4:17) 하면서
순종하였습니다. 이 때는 말씀-부활신앙-믿음=순종이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도 불가능하고, 죽음에 직면하는 일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 때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고살면 주님의 부활의 역사가 오늘날에도 일어날 줄 믿습니다.

3. 부활신앙의 완성은 오순절 성령강립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12제자들은 주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더더군다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직접 나타나신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의심했던 도마조차도 부끄러워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베드로와
일곱제자들은 바닷가에 물고기를 잡으러 간다고 사명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즉,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부활이요, 나는 나대로 먹고 살아야겠다는
현실위주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나중에는 새롭게 변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이 되었고 모두 죽기까지 부활신앙으로 살다가 순교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부활절과 증인이 된 사이에 무슨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것이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 이었습니다.

부활절은 역사적인 객관적 사건입니다. 그러나 각자에게 임한 성령 강림사건은
개인적인 주관적 사건인 것입니다. 이 두 사건이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합하여 질 때,
부활신앙으로 바뀌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하시는 두가지 역할이 있습니다. 복음사역과 성화사역입니다.
즉 외적사역과 내적사역입니다. 그리고 외적사역은 두가지로 이루워집니다.

1) 성령님은 예수님을 증거하러 오셨습니다.

즉 복음전파의 완성을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15:26에 "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하였습니다. 그분은 복음사역의 주관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령님을 사역의 주관자로,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 때,
부활신앙의 준비를 갖출 수가 있게 됩니다.

2) 성령님은 우리를 사역의 동역자로 선택하시고 그 일을
완수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명은 사명자가 되었을 때 그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능력과 경험이 많다해도 그 일에 관심이 없으면
목숨걸고 할 수가 없습니다. 성도가 일단 성령님을 사역의 주관자로 모시게 되면
성령님은 이에 따른 각자의 사역구분과 수반되어지는 능력을 내려주십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충만을 받은 120문도는 그 후 모두 흩어져
세계각지에 복음을 능력있게 증거하여 책임을 완수하고 삶을 마쳤습니다.

그러므로 사역과 능력은 전적으로 성령님께 속해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능력을 구히지 않아도 성령님이 쓰시는 사역을 맡았을 경우는
그 곳에 필요한 은사가 주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로
주님의 증인이 되도록 함께 동행하십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이 부활신앙으로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 성령님의 강립사건. 성도들의 증인사역이
온전한 부활신앙으로 열매맺는 삶이 되도록
다같이 하나님게 은혜를 구히고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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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으로서의 사랑
(요 13:34)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도록 지음받았습니다.
그리고 행복을 이루는 삶에는 사랑이 기본임을 하나님은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와를 맨 마지막에 지어 아담에게 준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즉 아담은 영생, 건강, 소유, 능력, 친한동물 등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행복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소유로 행복을
삼을 수 없고 길들인 동물로도 행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행복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은 사랑의 대상도, 또한 얼마든지 원하는
환경에서 부족함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왜 볼행할까요?
그것은 사랑의 본성과 나눔을 성경적으로 행하고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 사랑의 본성은 오직 한 사람으로 만족하는 속성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담은 지음 받았을 당시에 이미 성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인인 하와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930년간을 부부로 살다 죽었습니다. (창 5:5), 그 동안에 낳은 자녀들은
여전히 900년 정도 살면서 수많은 자녀를 낳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후손 라멕
    두 아내를 취하였다 하였습니다. 즉 자손이지만 아내로 취할 여인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와보다도 더 예쁜 여인을 보았을 것입니다. 하와 또한 아담보다도 더 훌륭한
남자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관심의 대상은 되었을지 몰라도 사랑의 대상은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서로가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짝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본성은 하나님이 짝을 찾아 주셨다는 인식하에서만 나타날 수 있고,
행복은 두 사람들 모두 이 것을 기쁘게 지킬 때에만 누릴 수가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 스스로가 좋아하는 이성을 선택하여 살면서 부터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초점은 외모인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창 6: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떠나셨습니다. 즉 인간이 영적인 존재에서
물질에 유혹된 육적인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창 6:3)

영의 사람은 하나님의 시각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범주에서 대상을 올바르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혼과 육의 사랑은 인간의 죄된 시각에서 자신 만을 위한
욕망의 범주안에서 필요한 대상만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죄 이전의 사랑으로 환원이 되어야 올바른 사랑을 할 수 있게됩니다.   

죄인이 된 가운데 지닌 사랑은 사랑이기 보다는 정욕이나 욕망의 성향이 강한
변질된 사랑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이 욕망은 점점 성적타락을 유발하여
인간본성의 사랑을 모두 파괴시키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2. 본성을 잃은 죄인이 지닌 사랑은 하나님의 명령만을 따를 때, 행복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정도와 범주를 구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1) 말 2:15-16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말지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지켜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이유는 인간편에서는 행복이지만 하나님편에서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함이십니다. 그리고 그 경건한 자녀를 낳기 위해서는
경건한 가정생활을 해야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부부가 서로 다투고 싸우고 헤어지는 것은 자신들에게도 자녀들에게도
경건한 모습이 되지 못합니다. 결국은 모두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말게 됩니다.

2) 레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말며
이웃사랑하기를 네몸과 같이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사랑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음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사랑항목을
명령으로 지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죄인된 우리는 사랑의 행위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는 것이지 나의 감정에 의해 하는 것이 아님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모두를 다 자녀로 보십니다. 그래서 남도 내 몸같이 여기고 사랑해야함을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한 조상에서 낳았고 그 조상은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소유들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들이 모인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본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수준이 행복의 수준이 되도록 하셨음으로 사랑의 감정으로
행복을 얻으려는 마음은 항상 변질 될 수 있기때문에 주의하도록 알려주시고 계십니다.
(예: 다윗과 솔로몬의 삶=사랑의 기준과 실천이 그들의 행, 불행을 좌우하였습니다.)

3. 어떻게 해야 남을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있나요?

이 세상에는 내가 사는 동안 나에게 속한 것이 있는가하면 하나님께 속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내게 속한 것을 가지고 살면 쉽습니다. 그러나 내게 없거나 부족한 것을 가지고 살 땐
어렵습니다. 그럴 때에는 그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부터 빌려 받아 살아야 쉽습니다.  

성경에선 하나님께 속한 것들이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분야는
하나님께 맡기고 살 때, 우리는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첫째가 생명입니다.(행 17:25)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둘째가 전쟁입니다.(삼상 17:47)
'전쟁은 야호와께 속한 것이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세번째가 사랑입니다. (요1서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그러므로, 생명도 영적전쟁도 사랑도 하나님께 속한 것임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도움심을 입을 때, 우리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도우심을 주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그분은 성령닙이십니다.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롬 5:5절에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었고...'


성령님은 창세기 6장에서 인간이 서로 아름다움을 보고 배우지를 선택했을 때,
인간에게서 떠나셨습니다. 그이후로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읍니다.
그런데 하나님의신 성령님은 이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시오셨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성령님을 모셔들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한다는 것은 주님안에 있는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죄안에 있었습니다. 그레서 죄의 영향을 받았고
죄 짓는 사랑을 하고살았읍니다. 그런데 이제는 죄를 미워하고 그 속에서나와
 예수님 안으로 옮겼습니다. 죄보다 예수님을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좋아할 때, 성령님은 우리의 모든 본성을 회복시켜주십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보혈이 본성위를 덮고 있는 모든 죄를 씻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생도, 능력도, 사랑도, 회복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셨다는 인식없이 가정은 지켜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명령을 실천함이 없이 행복은 누릴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가장 먼저 회복할 것이 있다면 그 것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가장 회복하기 어려운 것도 또한 사랑입니다.

인생은 다투고 살기에는 너무나 짧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930년간 행복하게 살았던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얼마나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지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13:34)

사랑은 감정보다 더높은 계명입니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순종의 문제입니다.
순종속에 주님의 사랑이 흘러 내림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명령은 책임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세상을 우리 대신 이미 사랑하셔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드리셨습니다. 사랑은 이미 회복되었고
우리의 실천을 통한 입증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다같이 서로사랑하며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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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권세
(요 1:12)



예수님 믿고 하나님 자녀가 된 성도들은 위로부터 세가지의 신변의
변화를 일으키고 살게됩니다. 그 것은 권세와 권능과 권위로, 이는
죄성을 지닌 삶에서 벗어나 영권을 소유한 자녀가 되어 살도록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 특권들을 사용하고 살 때에
승리가 주어진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 권세란 무엇일까요?

권세있는 사람과 힘에 센 사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권세란 직위에서 나타나는 것이요, 힘은 체력을 통해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의 권세란 '엑소우시아'란 단어로 '맡겨진 것'이란 뜻입니다.
즉 위로 부터 위임된 권위를 의미합니다.

1) 위의 권세란 하나님의 권세를 말합니다.

권세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말씀 한마디로 천지와 만물을 지으셨고,
권능으로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만물은 창조주와
피조물이요, 공급자와 수요자요, 주관자와 수용자의 관계이기 때문에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권세는 절대적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권세를 나타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나타내게된 이유는 하나님의 권세에 도전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천사장 루시퍼가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고 모반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아담과 하와도 마귀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 하였기 때문에 창조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권세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영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혼란은 선한 권세에 도전한
악한 권세로부터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심판이라는 권능의 판결로
하나님은 모두 정리할 계획을 세우시고 계십니다.
그 계획의 일환으로 예수님을 통하여 인간을 하나님의 권세 아래로
 부르셨고 유혹하는 세력을 물리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권세에 순종하는 자만이 권세를 사용할 수 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권세를 사용하는 사람들입니다.
스스로는 아무런 권세도 지닌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사용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권세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예수님도 하나님의 권세에 죽기까지 복종하였고,
그로인하여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시리고 심판하는 권세를
지니시게 되신 것입니다. (마 28:18)

 우리 또한 예수님께 순종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권세를
주님을 대신하여 사용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을 통하여 성도가 갖는 권세는 과연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집니다.

'영접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아담은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권세를 모두 잃어버렸지만,
예수님은 순종하심으로 모든 권세를 회복하셨습니다.
인간이 아담의 불순종의 탄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의 순종안에서 탄생함으로만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순종은 믿음으로만 나타낼 수 있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탄생도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이루워질 수 있습니다.  이는 신분만 바뀌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는 권세도 함께 주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즉, 내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사용할수 있는 권세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유하신 것들을
사용할 수 있는 권세가 또한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것을 가장 많이 소유할수 있는 대상은
오직 자녀 밖에만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삼으신 것은 천사에게도, 아담에게도 주셨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2) 예수님과 함께한 지위를 지니게 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4-6)

  '자녀'는 신분이지만 '예수님과 함께'란 지위를 말합니다.
즉 예수님의 지위가 마귀보다 높고 천사보다 높으시듯이,
그리스도인들의 지위 또한 그들보다 높은 것입니다.

육신의 현주소는 세상이지만 영적인 현 주소는 하나님 우편에
예수님이 서계신 곳이 나의 현주소인 것입니다.

땅에 속한 자녀가 땅에 속한 위치의 삶을 산다면, 땅에 있는 것만
지니고 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에 속한 자녀가 하늘의
위치에서 산다면 하늘의 것을 누리며 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늘의 것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인식할 때에,
주어진 권세는 자신의 능력으로 사용되어지게 됩니다.

   3. 그리스도인이 사용하는 권세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1) 원수인 사탄마귀의 능력을 물리칠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눅 10:19)

뱁과 전갈이란 창세기 3:15절에 나오는 말씀으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란 예언의 성취를 말합니다.
 타락한 천사들인 마귀와 부하들은 영체의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이기신 예수님이 나에게 권세를 주셨음으로 마귀가
아무리 힘이 강하여도 그리스도인의 권세로 묶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죄를 물리칠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인간은 원래부터 죄를 다스릴 수 있는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그 권세를 잃어버린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나,
이제 예수님의 순종으로 죄를 다스릴 수 있는 권세가 회복된 것입니다.

따라서 유혹이나 욕망에 사로잡혀 갈등 속에 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신 권세로 명하여 묶으면 죄성에 작용하는 힘이 떠나게 됩니다.
죄는 다스려야지 묵인하면 권세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립니다.     

3) 저주를 물리칠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르 속량하셨으니...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갈 3:13-14)

불순종으로 인하여 인간에게 내려진 저주가 임하게 됩니다.(신 28장)

(1) 생활의 저주: 가난, 궁핍, 황폐, 파멸...
(2) 질병의 저주: 염병, 열병, 상한, 학질, 한재, 풍재, 썩음...
 (3) 환경의 저주: 지진, 가뭄, 대적, 화산, 홍수...
(4) 멸망의 저주: 어두움의 세력으로부터 오는 저주를 말합니다.

저주는 심판의 일종이며 대적의 세력의 공격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정하거나,
받아들이지 말고 말씀으로 꾸짖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모든 저주를 속량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안에서 거듭나 새 사람이 되고, 새로운 신분을 지닌
그리스도인에게는 (고후 5:17) 아브라함의 축복이 주어져 있습니다.


4) 사망의 능력을 제어할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 15:55-57)

세상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 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원죄를 지고 있는 인간의 불안은 심판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악한 일을 행한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지만,
선한일을 행한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온다 하였습니다.

사망이 주는 두려움을 쫓아내고 천국의 문을 들어서는
기회가 육신의 장막을 벗는 일인 만큼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태연하게 맞이하는 사람들 입니다.

사망은 육신과 관계있지 영혼과는 무관합니다.
단지 영혼이 죽어있는 불신자들은 사망이 100% 육신에 적용되는
두려움에 살고 있지만, 영혼이 살아나 새 생명으로 사는 신자들에게는
죽은 육신에 사망의 공포는 무관한 것입니다.

이같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어도 진리를 올바로 알지 못하면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살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주어진 권세를 모르고 사용하지 못하면
우리는 고아와 같은 불행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은죽어서 천국가는 한가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순간부터 모든 것이 달라진 권세있는 신앙인으로
살게 하는데 더 큰 아버지로서의 기쁨이 있으십니다.

이는 단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호적의 아버지가 아니라,
관계의 실제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권세를 사용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승리의 삶을 다같이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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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신 예수님
(요 14:6)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생의 삶을 주셨습니다.
사망이 온 것은 자연 현상이 아니라, 죄에 대한 심판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에 예속된 생명은 시한부적이며 육신안에 속해있는 반면,
처음 아담과 하와와 같이 죄가 없는 경우에는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영혼안에 거하며 육신에 주어진 소모성 생명은,
영생과일을 먹음으로 영체로 변화되어 영원히 살도록
예정하여 놓으셨던 것입니다. (에덴동산)

인간은 조상인 아담안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모든 것을
잃었으나 하나님은 예수님안에 모든 것을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다 예비하여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것이 확실한 약속이심을
주님의 부활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죄를 대신 지심으로 자신의 '푸쉬게'(육의 생명)
죽음에 내어 드렸습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본성으로 인하여
죽을 수가 없으신 분이라,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니신 부활의 생명은 본래부터
 지니고 계셨던 '조에'의 영생의 생명이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거쳐 생명에 이른 주님의
영생의 생명을 믿음으로 소유한 사람들 입니다.

그렇다면 영생의 참생명은 어떻게 주어지는 것일까요?

1. 자연적 생명이 창조에 의하여 주어 지듯이
참 생명은 부활에 의하여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생명이라 하신 것은 죽음이 없으시다는
뜻이자, 영원히 사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땅에 오신 목적중의 하나가 바로 죽음의 저주로 멸망받을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인 자신의 생명을 주시려 오신 것 입니다.   

이에 예수님이 지니신 영생의 '조에'의 생명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얻을 수가 있습니다.

(1) 피조물인 인간은 만들어진 존재임으로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낳아진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흙으로 형상을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을
갖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될 수가 없습니다.
만들어진 존재임으로 닮을 수는 있으나 동질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낳으신 아들이심으로 생명, 속성,
능력, 사역, 모두 하나님과 같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예수님과 같이 모든 속성과 생명,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이어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날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그 길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열어주시고자 이 땅에 오신 것이요,
그 법칙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 이니라' (요 1:12)

하나님은 우리를 아담과 하와의 부모로부터 잉태하게 되었고,

성령님은 예수님을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하게 하셨으며, 예수님은
우리들을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탄생시키십니다. (요 3:5)

그러므로, 예수님을 나의구세주 그리스도로 영접하여
마음에 모시는 것과 그 이름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신성을 지니신
영원한 분이시며, 그분의 사역(죄사함, 거듭남, 자녀, 증인)을
마음에 의심치 않고 모두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때에 내 속에 있는 자아는 어느새
본성의 순종의 자아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됩니다.

(2) 참 생명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의해
주어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이 생명을 주실 수 있었던 예는 사역기간중에
세사람의 죽은 사람들을 살리신 것으로 입증이 됩니다.
(나사로, 회당장 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

그러나 참 생명은 이른바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명이 육의 생명을 줄 수 있듯이, 영생의 생명도 같은
생명을 줄 수 있습니다. 죽음이 예수님의 생명을 빼앗아 가지 못하고
오히려 생명에 삼키운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죽음과는
상관이 없는 '조에'의 생명이자 하나님의 생명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한편, 부활로 인하여 죽음이 철폐된 것은 하나님께서 내린 인간의
사망과 저주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풀어졌음을 의미하며, 이는
예수님을 통하여 영생이 다시 회복 되어졌음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을 때에 죄인에서 의인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하는 반면에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실 때에, 죽음을 넘어선 영생의 생명으로
수명을 넘어선 삶을 살수 있음을 깨닫고 기쁨으로 살게 됩니다.

2. 예수님이 주신 새 생명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일으킬까요?  
     
인간이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영과 혼은 한 덩어리로 융해되어
섞여 있는 상태입니다. 영이 있지만 죽어있기 때문에 혼이 모든 것을
판단하고 지시함으로 육은 순종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심으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안에 오실 땐
우리의 영안에 오시게 됩니다. 이 때 영이 죽어 있으면 성령님은
오실 수가 없음으로 영이 살아나는 거듭남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1)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생명의 빛이 나의
 죽은 영을 향하여 들어옴으로 소생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영의 양식인 생명의 말씀을 공급해
줌으로 나의 영이 활동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을 '생명의 빛'(요 8:12)이요,
'생명의 말씀'(요 6:68)이라 하신 것은 이 때문 입니다.

어느날 주님의 생명의 빛이 나의 영혼에 비추워지면,
융해되어있던 영은 깨어나며 혼과 분리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깨닫게 되고, 사랑에 감동하게 되고,
속에 있는 죄가 드러나기 시작함으로 회개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는 영이 깨어난 증거입니다. 씻음 받은 영혼에 성령님이
임하시어 거하십니다. 그리고 평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2) 같은 생명은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음므로
주님과 연합을 이루게 합니다. 


내안에 속사람이 커서 생명도 자라나면, 주님과는 뗄래야
뗄수 없는 주님을 모시고 싶은 마음이 됩니다.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

예수님은 억지로 내 안에 모셔지지도 또는 그분안에
내가 들어가기도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새 생명이 자라면 저절로 모시거나 그분안에
들어가려하고 그 때에 비로서 연합으로 인한
평안을 느끼게 안심이 됩니다.  
 
3. 새 생명의 능력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몸에는 두가지이 힘이 작용합니다.
사망의 힘과 생명의 힘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신 8:3)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적 생명 유지법과, 초자연적인 생명유지법의
두가지를 다 적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른바
'음식이
공급할 수 없는 다른 힘을 공급해 준다'
뜻으로-바로 이 힘이야말로 새 생명의 힘이 되는 것입니다.

(1) 새 생명의 힘만이 사망의 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 : 55-57)

사망이 힘을 발휘할 때는 죄를 기반으로 삼을 때 입니다.
죄는 율법에 의해서 드러남으로 율법을 바탕으로 죄는
강력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율법도, 드러난 일도, 쏘는 사망도,
다 죽음으로 만족시켜주시고 그들이 더이상 책 잡을 수 없는
새 생명으로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사망의 힘은
새 생명 앞에서는 무력해지고 말게 된 것입니다.  

(2) 새 생명의 힘만이 예수님을 공중에서 영접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쇠붙이가 자석에 끌려가 붙는 이유는 자성이 서로 같기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공중재림시에 성도가
들림받을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새 생명' 때문입니다.
 그 때에 또한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새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님을 영접하여 새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나 때문에 예수님은 부활하신 것입니다.
부활의 생명을 주시려고요. 우리는 다같이 새 생명을 얻어
주님께 감사드리는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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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이신 예수님
(요 14:6)



죄가 세상에 들어 오기전엔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첫째,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고,
둘째,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들었고
셋째는 영생을 소유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불순종으로 죄를 짓고나자
하나님께 가는 길이 막혀버렸고, 진리를 듣는 대신
세상의 지식과 학문만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고,
영생대신 사망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근본적인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심을 보여주심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1. 진리란 무엇인가?

1) 하나님의 창조원리가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실 때, 기준을 정확히
구분 할수 있도록 정반대되는 양극을 만드셨습니다.
(예: 빛과 어두움, 선과악, 질서와 혼돈, 창조주와 피조물)

그리고 창조당시에는 구원과 진리에 대한 필요성은 없었습니다.
창조되어진 자체가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는 순종하는 상태였으며,
기준을 알아야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에 창조자체가 진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준을 알아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은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깨뜨리는 세력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타락한 천사들과 인간이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자유의지가 주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따르지 않고'
파괴의 원리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조화와 공존은 깨어지게 되었고 선택여지에 따라 구원이냐,
멸망이냐가 결정되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2) 자유의지는 진리를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자유의지의 주인인 자아는 자신만을 위하여 한쪽만을 선택하려는
교만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불순종이자 죄고,
거짓이자 멸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인간이 자아가 주관하는 삶을
살 때에 하나님의 원리는 무시되어지고, 죄의 원리가 지배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자아는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게 만들었고
창조원리를 따르지 않게 만들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지게 만든 장본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아가 있을 때 진리는 무시되고 숨기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대신 이성이 나타나고 지식이 행동의 기준이 되어 버립니다.

3) 예수님은 순종을 통하여 진리를 소유하신 분이 되었습니다.

자아는 인간이 창조될 당시부터 부여되어진 선택의 주인이었습니다.
단지 죄를 짓고 난 다음에 자아는 선을 선택하려는 본질의 자아에서
벗어나 악을 선택하려는 교만의 자아로 바뀐 것입니다.

성육신한 예수님에게도 자아가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광야에서의 마귀의 시험) 그러나 주님은 말씀으로 가득한
근원적 영적자아를 지니신 분이라 언제나 하나님을 선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지키셨고 만물의 조화와 공존을
이루셨고 한번도 죄를 짓는 일을 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분만이 진리이심을 인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된 자아가 본질의 자아로 변화되기 위하여는
예수님 안에 머므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이미 자신의 피로
죄된 자아이 잘못을 모두 청산하시고 씻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 안에서 진리를 회복하게 되면 다음의 세가지가 회복됩니다.

1) 자유를 누리며 살게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요 8:32)
인간이 자유인으로 살수 없는 것은 지은 죄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죄를 안 짓고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이는 원죄로 인한 선한 본성외에 죄의 본성을 함께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지 않으려해도 무의식중에 짓게 되는 것이 죄인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의 신분으로 살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하셨고,
죄의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만 종의 신세에서 벗어나 참 자유인이
될 수 있음을 말씀 하신 것입니다.

(1) 진리이신 예수님 안에서만 참자유를 누릴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1-2)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진리안에서만 활동을 하시는 반면,
사망은 멸망의 영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죄안에서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사망으로 묶어두지 못한 것은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진리이시기 때문이었으며 이것이 증명된 것이 부활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안에 있는 자가 되면 성령의 지배와 죄를 해결하는
부활의 예수님의 공로에 의해 나의 죄가 씻어졌고
사망의 법에서 벗어난 삶을 살수있게 됩니다.   

(2) 진리는 세상의 근심과 염려로 부터 자유하게 만듭니다.
 
삶에서의 근심은 대개 생활고의 문제로 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는 가시와 엉겅퀴가 나는 저주받은 세상에서의 삶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모든 저주를 속량하시어 저주받은 생활의 문제를
모두 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나님은 모든 것을 준비하고 인간에게 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우리가 찾아 누리도록 성령님을 통해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2) 진리는 우리를 구원케 만듭니다.

인간에게 가장 괴로운 것은 죽음입니다. 그리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 해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으로 직접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임은
죽음을 넘어선 증인이 되어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태초에 진리안에 영생이 있었듯이 부활하신 예수님안에
영생이 있고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2:13)
진리는 인간이 이 세상에 있기전에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운영하신 섭리입니다.
인간은 세울 수도 알 수도 없는 천국의 기준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만든
철학이나 종교로는 창조나 구원을 이룰 수가 없고 성육신 하신 예수님만이
새 창조와 구원을 하실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의 세계에서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3) 진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자로 만듭니다.

신앙의 수준은 회복의 척도에 비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죄성을 지닌 인간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서는 다툼과 미움이 그치지 않습니다.
아무리 내가 선해도 해를 받고 살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 사도들은 미움을 받았고 스테반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초대 교인들은 로마의 핍박속에 재산을 다 빼앗겼습니다.)

인간의 사랑으로는 참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상대방을 용서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 인에는 예수님이 계셨고 예수님은
우리를 진리안에 있게 하셨고, 진리는 우리를 에덴의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로 회복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말고'(엡 4:26)란 에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것을 깨닫고 행하라 하신 것이고,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벧전 1:22)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자는 예수님의 보혈로 영혼이 깨끗해 졌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와 같이 모든 만물들을 사랑으로 대하고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와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지키고
순종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으면 예수님 앞에 모두 서게 됩니다.
낯설게 느껴지면 진리를 따라 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반갑고 환영받으면 진리를 진정 깨닫고 순종하며 산 결과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나의 구세주 이심을 믿고 의지하고 사는 삶만이 진리의 삶을 사는 깃입니다.  
가장 외로운 이 때에 사랑의 주님을 모셔 들여 진리의 삶을 사는 우리들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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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신 예수님
(요14:1)


길이란 먼곳에 있는 두지점을 연결시켜주는 통로를 말합니다.
이 땅에서 출발하여 도달할수 있는 가장 먼 곳은 천국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인 우리들이 본향인 천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분입니다. 지금은 길이 끊어져서 이 땅에서 사는 인생길
천국에서 사는 영생길로 나뉘어져 있지만(죄가 길을 차단시켜
버렸기 때문에) 본래 길은 한 길인 영생길만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땅에서 살았지만 하나님의 때가 차면 자손들과
영생의 삶을 땅으로부터 하늘로 옮겨갈 예정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자 인생은 영생에서 끊어져 분리되었고,
삶도 천국의 삶에서 세속의 삶으로 전락되어 타락하며 살게 된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시어 천국 가는 길을 다시 열어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구원받은 자녀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하여 그 길로 오는 방법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길 되심은 어떻게 이루워지게 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예수님은 성육신을 통하여 그의 길 되심을 열어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마치 산에 올라가는 길에 비유를 합니다.
  즉 정상은 하나지만 그곳까지 도달하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듯이
천국가는 길도 마찬가지 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산의 정상과 천국과는 도달하는 과정이 다른 것은 산은
이땅에서 난 길로 올라갈수 있지만, 천국은 이땅에서의
길이아닌 영원의 세계의 길 이라는데 있습니다.

이 길은 인간에 의해서 끊어진 길임으로 스스로 이을 수가 없습니다.
이미 그 길을 통과해 들어갈 자격을 상실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자격을 갖추게 하고 인도하여 함께 갈
새로운 안내자가 인간에겐 필요한 것입니다.

(1) 그길로 들어설수 있는 자격은 죄 씻음을 받은 자만이 들어갈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것은 불순종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이 죄로 말미암아 천국에 속해있는 길이 화염검으로
막히게 되었으며,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어느누구도 인간으로서는 하나님께서 막아놓으신 화염검을
뽑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화염검을 뽑으시고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다시
그 길로 들어가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2) 죄 문제가 해결 되었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들어갈수 있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한분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올수 있도록 정해 놓으셨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행 4:12)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유일한 분이심에 대한 증거는 바로 부활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 때문에 죽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징계의 증명인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선택의 증명입니다. 즉음에서 산자만이
죽음에서 살아 날수 있는 길을 인도할수 있습니다.
선택되었음은 허락받은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열린 길을 만드셨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막 15:37-38)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히 10:20)

'새로운 길' 이란 아담에게 주어졌던 폐쇄된 옛길을 다시 재개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하늘에서 내려오신 새로 난 길을 십자가를 통하여 열어 주신 것입니다.

또한 '산 길'이란 생명의 길을 의미하며 이는 어느 누구도 육신을 입고서는
천국을 갈수 없으나 그분안에 있으면 지장 받음없이
천국까지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 휴거)
이 모든 길의 시작은 이 땅에서부터 이루워져야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성육신 하시어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그의 길 되심을 완성하셨습니다.


길의 중요성은 시작보다도 원하는 곳에 도착할 수 있도록 바로 그 지점에
연결되어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것은
천국의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스테반도, 사도바울도, 사도요한도 보았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천국에 도착하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이 도달점에 계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 잎에
나갈 수 있게 된 것으로 증명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 하시기를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 모든 것은
응답받을 줄로 알라 하시며, 이는 하나님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시는 일 이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요14:13)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만난 사람이 아니고는 하나님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양자를 삼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맛본 사람은
하나님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을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길로
인도 하신 예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예수님이 도달점에 계신 것은 성령님을 보내심으로 증명이 됩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은 우리들을 아버지의 뜻대로 살도록
인도하여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천국에 올라가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 됩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서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님에 관하여 증거하시고,(요 16:26)
우리를 더 많은 천국의 진리로 알려주시고,(요 16:13)
우리에게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행 1:8)    

길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통행할 수 있는 도로의 의미입니다.
또 하나는 확실히 도착한 지점에서의 목적달성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통행을 만드셨으며, 성령님은 완성시켜 주었습니다.

3. 그 길의 시작은 좁은 문이며 마지막은 천국문에 이르는 영생의 한 길입니다.

우리 앞에는 두 길이 놓여져 있습니다. 넓은 길과 좁은 길 입니다.
그런데 특징은 넓은 길에는 문이 없습니다. 항상 열려 있기 때문에
 아무나 자유로 마음대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좁은 길로 들어가려면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들어가려면 준비를 해야 들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좁은 문은 세상의 모든 짐을 벗어야만 통과 할 수 있는 작은 문입니다.

예수님 께서 부자를 낙타에 비유하신 것은 사람의 덩치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짊어지고 있는 짐을 가리킨 것입니다. 즉 소유, 명예, 권세, 인기, 업적,등
세상에서는 필요한 것이지만 천국에서는 필요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생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은 세상의 것을 버려야만
들어 갈 수 있게 됩니다. 즉 모두 없애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소유에 집착하는 마음을 바꾸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소유개념에서 괸리개념으로의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주어졌지만 내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면 들어갈 수 있는 문인 것입니다.

(2) 좁은 문이란 예수님이 천국문으로 인도히시는 새 길의 시작입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

좁은 문 안에서의 삶은 예수님이 주시는 양식을 먹고 사는 생활을 말하는데
이 양식은 영생하는 생수요, (요4:14), 생명의 떡이요, (요 6:35),
천국의 평안입니다. (요14:27)

인간은 본래 이 땅에 살 때에도 천국의 것을 소유하고 누리고 먹고 살도록
지음을 받은 존재였습니다. (영생, 능력, 생명과일), 죄로 인해
천국이 삶을 잊어버렸으나 예수님 안에서 다시 모든 것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길이라 하신 진리의 말씀은 그분안에서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착해서 얻을 수 있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시작부터 만들어 놓으신 영광의 길 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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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로서 난 자들

(요 1:12-13)




성경은 인간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써놓은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인간세계를 보고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의 자녀일때는 성경의 말씀은 이해도, 감동도,
 적용도 되지 못하는 황당한 내용의 책이라고 무시해 버린적이 많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부터는 성경만큼 진리의 책이 없을뿐더러
인생의 올바른 삶을 살도록 인도해 주는 유일한 안내서가 아닐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여전히 성경에 대한 신뢰성이 부족할뿐 아니라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지 못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이면 하나님의 눈으로 성경을 보아야 하는데
그분의 자녀 이면서도 세상의 자녀의 눈으로
여전히 성경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시각과 생각,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실한  정체성과 신분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1. 그리스도인은 창조로부터 탄생으로 생명이 바뀌어진 사람임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세상에 사는 인간은 창조된 인간과 탄생된 인간의 두종류가 있습니다.
즉 아담은 창조된 인간인 반면에 예수님은 하나님이 낳은 탄생된 인간이셨습니다.

더 나아가 '낳는다는 것'은 같은 종류에 속한
또 다른 분신이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만들어진 것은
모양은 같으나 내용은 같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자녀를 낳으면 그는 나와 속과 겉이같은 종류의 분신이지만  
입양한 자녀는 사람의 모양은 비슷하게 지녔어도
속은 다른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다시말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으되
하나님과 같은 종류에 속한 존재는 아닌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낳으셨기 때문에 그분의 형상 뿐만이 아니라
속성도, 내면도, 모두 하나님과 같은 또 다른 분신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히1;15)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에게는 아버지가 되신 반면에,
인간에게는 조물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인간은
서로 지니고 있는 생명이 다를수 밖에 없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인간을 자신의 자녀로
다시 낳게 하기 위해여 주님을 보내셨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지니고 있는 생명은
'바이오스'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는 소모성 생명으로 공기,물, 음식,등을
공급 받아야만 유지 되어지는 생명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오에'라는 생명을 지니셨는데
이는 하나님이 소유하고 계신 생명으로 영생의 생명이자
소멸되지도 아니하며 무엇을 공급받아서 유지되지도 않은
생명의 근원을 지니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예수님과 같은
'조오에'생명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우리를 지으심에서 벗어나
다시 낳는 탄생으로 새로 지으시는 방법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을 통하여서만 이루워 질수있게 하였습니다.

'영접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자들 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여기서 하나닙의 자녀란 말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녀란 단어가 헬라어에는 두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휘오스'
즉 양자가 되어 상속자가 되는 자녀를 의미하며

또 하나는 '데크논'이란 단어로 출생으로 인한
본성적인 자녀를 말할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본절에서 하나님의 자녀란 말에는 '데크논'을 사용한 것으로
우리들도 바로 하나님게서 낳은 자녀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예수님을 단지 완전한 인간으로만 여긴다면
우리에겐 여전히 인간의 생명만 남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세주 하나님으로 모신다면
하나님의 '죠오에'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져
다시 '태어남의 역사'가 이루워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가 되어
살아갈수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다는 것은 예전에 지닌것은 모두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죽었다는 그 의미를 잘못 해석함으로
'왜 말씀에는 죽었다고 했는데 옛성품도,죄성도,욕망도,
그대로 내안에 남아있고 하나도 변한것이 없이
신앙생활이 이렇게 힘든가?'하고 의문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셩경적으로 '죽었다'란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 죽임이 존재에게 적용될 때에는 그것과의 관계단절을 의미합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이때 죽음의 의미가 바로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기 보다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끊어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이 죽은 것을 말합니다.

같은 의미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옛사람이 죽은 것은
존재가 없어진것이 아니라 내가 옛사람에 대하여
관계가 모두 끊어진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자아와 죄는 없어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남아 유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버려진 옛성품과 옛주인 임으로
인정할 필요가 없으며 예수님으로 주인을 삼으면
우리는 더이상 죄에 종속되거나
자아를 주인으로 의식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절된 자아와 다시 관계를 유지한다면
옛성품과 옛사람으로 돌아가 버리고 마는 것이기에
오직 예수님만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삶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2) 죽음이 생명에 적용될때는 그것의 완전한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여기서 씨앗이 죽는다는 것은 변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땅속에 있으면서 변화된 모습과
새로운 생명이 열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나타나는 것이 변화된 새 생명의 모습이요, 죽은것은
땅속에 묻혀 안보이는 씨앗의 형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둘 다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안에서 거듭나게 되면 나의 옛성품, 자아와 의지는
주님의 성품으로 가리워지고 성령의 열매와 하나님의 속성으로
다시 변화된 모습이 되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땅이 씨앗의 헌것을 벗기고 새것으로 주입하여 잉태 시키듯,
예수님 안에 들어간 자는 주님이 옛것은 소멸시키시고
성령님의 새것을 주입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산다는 것은 주님이 내안에
내가 주님안에 있다는 인식을 확실히 하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2.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은 성령의 다스림을 받고 사는 사람들 입니다.(롬8:1-2)


관계는 끊어졌지만 자아도 죄성도 그대로 남아있다면,
그리고 변화는 되었지만 옛사람에 중독된 증상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실제로 그것을 처리하는 문제는 심각하지 않을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육신의 속성과 영의 속성에 특징을 알고 대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육신과 혼은 점진적으로 욕망이 소멸되어져 가게 하는데 비해
영의 세계에서는 성령의 역사하심은 단번에 이뤄지게 됨을 봅니다.
(즉, 회개하면 용서함을 받고,영접하면 구원을 받고,믿으면 영생을 얻게 되듯이)


1)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님의 의'가 전가된 거룩한 자들 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고 예수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그러므로 사람들은 구원받는 순간에 '성도'(거룩한자)라 불리워지는 것입니다.
 
즉, 행동이 어떠 하느냐에 따라 신분이 불리워지는 것이 아니라
신분이 결정됨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인간편에서 의지적으로 성화의 길을 가려면
점진적으로 거룩해 질수 밖에 없습니다.
(담배,술,쾌락,욕망 모두 서서히
줄여가며 끊을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내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역사하실때  
모든것이 즉시 이뤄진다는 진리를 믿으면
그분이 단번에 끊도록 역사하여 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옛사람의 남은 성품을 처리하는데는 인간편에서의 노력보다
성령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결단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 입니다.


2) 하나님의 자녀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자들 입니다.


나무의 열매를 보면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알수 있듯이
성도의 열매를 보면 그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직 아닌지를 알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반드시 성령의 열매가 열리게 되어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것은 성령의 열매는 일이 아니라
위치라는 것임을 아는것이 중요합니다.
 
'육신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것과...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이와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5:19-23)

이때 죄와 욕망의 열매가 나타나는 것은 육신의 일로 말미암아
 열리는 반면에 성령의 열매는 나에 의해서 열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굳게 붙어 있을때 그분에 의해서 가지가 열매를 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일과 성령의 열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육은 일을 산출해 내고 그것은 죄로 열매맺게 하는 반면에,
성령의 열매는 자아나 육의 노력을 필요로 하지않고
단지 믿음으로 예수님께 붙어 있기만 하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새 생명을 주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열매맺게 해 주시는 분 이십니다.

성령닙의 역사하심으로 이루워지는 이 모든 협력 사역은
우리가 예수님을 얼만큼 소중히 여기고
신앙생활을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은 신분변화의 확신과 그에 따른 약속을 받아들이는 자세 입니다.
온전히 받아들일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가 되어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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